자본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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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가치변화는 바로 제1의 유통행위 M-C에 의해 구매되는 상품에서 일어나야 되는데, 그렇다고 그 상품의 가치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등가물끼리 교환되며 상품은 그 가치대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消費)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따라서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勞動力: labour-power)이다.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살아 있는 사람]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운동시키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화폐소유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商品)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교환은 그 자체로서는 그 자신의 성질로부터 나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종속관계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소유자[즉.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사람]가 그것을 상품으로 시장에 내어놓을 때[즉, 판매할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동력의 소유자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만 하며, 따라서 자기의 노동능력 [즉, 자기 일신(--身)]의 자유로운 소유자로 되어야만 한다.(주석 2: 고전적 고대에 관한 백과사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엉터리를 읽을 수 있다. 즉, 고대세계에는 " 자유로운 노동자와 신용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자본은 충분히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몸젠[Mommsen)도 자기의 ?로마사?에서 이 점에 관해 오류를 되풀이해 범하고 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항상 일정한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노동력을 한꺼번에 몽땅 판매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그는 자유인으로부터 노예로, 상품소유자로부터 상품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노동력을 언제나 자기의 소유물로, 자기 자신의 상품으로 취급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그가 자기의 노동력을 항상 일시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만] 구매자의 자유처분에 맡겨 사용하게 하는 경우에만, 따라서 노동력은 양도하더라도 노동력에 대한 자기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하다.(주석 3: 그러므로 각국의 법은 노동계약의 최대 기간을 규정하고 있다. 자유로운 노동이 행해지고 있는 곳에는 법은 계약해제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여러 나라들, 특히 멕시코에서는 (미국의 남북전쟁 이전에는 멕시코로부터 할양(割讓)받은 지역에서도, 또 쿠자(Cuza)의 변혁 시까지는 사실상 다뉴브의 여러 제후국에서도) 노예제도가 채무sh예제라는 형태로 은폐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노동하여 갚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것도 대대로 이어지는] 채무로 말미암아, 노동자 개인뿐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도, 사실상 타인이나 다른 가족의 소유물로 된다. 후아레스(Juarez)는 채무노예제를 폐지했지만, 자칭 황제인 막시밀리안(Maximilian)은 하나의 칙령으로 그것을 부활했는데, 이 칙령은 워싱턴의 하원에서 적절하게도 멕시코에서 노예제도를 다시 채용하기 위한 칙령이라고 비난받았다. "나는 나의 특수한 육체적 . 정신적 기능과 활동능력의 개별 생산물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고, 나의 능력의 사용을 제한된 시간 동안 타인에게 허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제한에 의해 나의 능력은 나의 전체성.? 일반성과 외적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의 전체 노동시간과 나의 생산물 전체를 양도한다면, 나는 나의 실체, 나의 일반적 활동과 현실성, 나의 인격을 어떤 타인의 소유로 되게 할 것이다"(헤겔[G. W. F. Hegel], ?법철학?, 베를린, 1840년, p. 104).)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발견하기 위한 제2의 필수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이 대상화된 상품을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살아 있는 신체 안에만 존재하는] 자기의 노동력 그 자체를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동력이 아닌 다른 상품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예컨대 원료, 노동도구 등1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가죽 없이는 장화를 만들 수 없다. 그 외에도 그는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공상가까지도, 미래의 생산물[즉, 그 생산이 아
직 완성되지 않은 사용가치]을 먹고 살 수는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 그 모습을 나타낸 첫날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도 또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된다면, 생산물은 생산되고 나서 판매되어야 하며, 또 생산물이 판매된 뒤에야 비로소 생산자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생산에 필요한 시간외에 판매에 필요한 시간이 추가된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自由人; free individual)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物件)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e of)는 의미다.
어째서 이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대면하게 되는가라는 문제는, 노동시장을 상품시장의 하나의 특수한 분야로 간주하는 화폐소유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당분간 우리의 관심사도 아니다. 화폐소유자가 그 사실에 실천적으로 달라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사실[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이론적으로 달라붙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즉, 자연이 한편으로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남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제1권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始初蓄積)"을 참조하라} .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경제적 범주들도 역시 자기들의 역사적 흔적을 가지고 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려면 일정한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자 자신을 위한 직접적 생활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더 나아가 어떤 사정 하에서 모든 생산물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가를 탐구해 본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아주 독특한 생산양식(生産樣式), 즉 자연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구는 상품 분석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비록 생산물의 압도적 양이 직접 자가소비(自家消費)에 충당되고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정이 그 전체 폭이나 깊이에서 교환가치에 의해 아직도 지배되지 않더라도,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일어날 수 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회 안의 분업이 어느 정도 발전해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분리[물물교환과 함께 처음 시작된다]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을 그 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발전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 어디에도 있다.
또 이제 화폐(貨幣)로 눈을 돌려보면, 그것은 상품교환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전제로 한다. 각종의 화폐형태(단순한 상품등가물로서의 화폐,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 퇴장화폐 및 세계화폐)는 이런저런 기능의 크기와 그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 사회적 생산과정의 매우 다른 수준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품유통이 조금만 발달하면 모든 화폐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자본(資좌.)은 그렇지 않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勞動者)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하나의 역사적 전제조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사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본은 처음부터 사회적 생산과정의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의 눈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차기의 노동이 임금노동(賃金勞動: wage-labour)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가 일반화된다.)
이제 우리는 노동력이라는 이 독특한 상품을 좀더 상세하게 고찰해야 한다. 이 상품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치를 가진다.(주석 5: "한 인간의 가치(價値)는 다른 모든 물건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의 가격(價格)이.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힘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불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홉즈[T. Hobbes], ?리바이어던", 몰즈워즈 편, ?저작집? 런던, 1839-1844, 제3권, p. 76).) 그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은 이 개인의 생존을 전제로 한다. 이 개인의 생존이 주어져 있다면,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維持)이다. 살아 있는 개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生活手段)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은 결국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귀착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그런데 노동력(勞動力)은 오직 그 발현(發現)에 의해서만 실현되며, 오직 노동(勞動)을 통해서만 활성화된다. 노동력의 활성화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 신경 .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지출의 증가는 수입의 증가를 조건으로 한다.(주석 6: 그러므로 고대 로마에서 농업노예를 감시하던 노예관리인인 빌리쿠스(villicus)는 “.보통의 예보다 그 일이 쉽다는 이유로 보통의 노예보다 더 적은 생활물자를 받았다"(몸젠[T. Mommsen], ?로마사?, 1856년, p. 810).) 노동력의 소유자가 오늘의 노동을 끝마쳤다면, 그는 내일도 오늘과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총량은 노동하는 개인을 정상적인 생활상태로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식물 . 의복 . 난방 .주택 등과 같은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계급이 어떤 조건하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주석 7: 손턴(W. T Thornton), ?과잉인구와 그 해결책? 런던 1846년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역사적 및 도덕적{정신적} 요소(historical and moral element) 포함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의 일정한 나라에는 노동자들의 필요생활수단의 평균적 범위는 주어져 있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화폐가 연속적으로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 전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시장에 연속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판매자는, "살아 있는 개체는 어느 것이나 생식(生殖: procreation)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는 것처럼“(주석 8: 페티(William Petty).), 생식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모(消耗)와 사망의 결과 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노동력은 적어도 같은 수의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에는 이러한 보충인원[다시 말해 노동자의 자녀들]의 생활수단이 포함되며, 그리하여 이 독특한 상품소유자 종족은 상품시장에서 영구히 존재하게 된다.(주석 9: "그것[노동]의 자연가격(自然備格)은....노동자를 유지하기 위해, 또 노동자로 하여금 [시장에서 감소되지 않는 노동공급을 보장할 만한]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나라의 기후나 생활관습에 의해 요구되는 생활수단과 편의품의 양이다.(R. 토렌즈, “곡물무역론”, 런던, 1815년, p. 62). 여기에서는 노동이란 말이 노동력이라는 말 대신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인간유기체(人間有機誘: human organism)의 일반적인 천성을 변화시켜 일정한 노동부문에서 기능과 숙련을 몸에 익혀 발달한 특수한 노동력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 또는 교육이 필요한데, 거기에는 또 얼마간의 상품들(또는 그 등가)이 소요된다 이 비용은 노동력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훈련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비용은 [보통의 노동력의 경우에는 매우 적지만]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 속에 들어간다.
노동력의 가치는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의 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는 이 생활수단의 가치[즉,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생활수단의 일부, 예컨대 식료품이나 연료 등은 매일 소비되고 매일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생활수단들, 예컨대 의복이나 가구등과 같은 것들은 비교적 장시간에 걸쳐 소모되며, 따라서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보충되어도 된다. 어떤 종류의 상품은 매일, 또 어떤 종류의 상품은 매주, 매분기 등으로 구매되거나 지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출의 총액은 예컨데 1년 동안 어떻게 분배되든 매일매일의 평균수입(平均收人)에 의해 보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노동력의 생산에 매일 필요한 상품의 양을 A, 매주 필요한 양을 B, 매분기에 필요한 양을 C....등이라고 가정하면, 이 상품들의 하루의 평균 365A+52B+4C+등등/365 이 될 것이다. 이 하루 평균으로 필요한 상품량이 6시간의 사회적 노동을 포함하고 있다면, 매일의 노동력(勞動力)에는 반일 분[노동일이 12시간이라면]의 사회적 평균노동(平均勞動)이 대상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 노동력이 매일 생산되기 위해서는 노동일의 반이 필요하다. 이 노동량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즉, 매일 재생산되는 노동력의 가치]를 형성한다. 만일 반일분의 사회적 평균노동이 3원으로 표시된다면, 3원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만약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매일 3원에 판다면 노동력의 판매가격은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 그리고 우리의 전제에 의하면, 자기의 3원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기를 갈망하는 화폐소유자는 실제로 이 가치를 지불한다.
노동력의 가치의 궁극적인 또는 최소의 한계는, 노동력의 보유자인 인간이 [자기의 생명과정을 갱신할 수 있기 위해] 매일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품량의 가치에 의해, 다시 말해 육체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설정된다. 만약 노동력의 가격이 이 최소한계까지 떨어진다면, 그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노동력은 위축된 상태로만 유지되고 발현되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의 가치든 그것은 그 상품을 정상적인 품질로 공급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이와 같은 노동력의 가치규정을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로시(Rossi) 등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탄식하는 것은 매우 값싼 감상(感傷: sentimentality)이다.
"생산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의 노동자의 생활수단을 무시하면서 노동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 나의 망상이다. 우리가 노동 또는 노동능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동시에 노동자와 그의 생활 수단, 노동자와 그의 임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주석 10: 로시(Rossi), ?정치경제학강의?, 브뤼셀, 1843년, pp. ,370-371.)
노동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노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치 소화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소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소화라는 과정이 실제로 진행
되려면,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튼튼한 위장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노동능력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노동능력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생활수단의 가치가 노동능력의 가치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능력이 판매되지 않는다면 노동능력은 노동자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는 오히려 그의 노동능력이 그것의 생산에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의 재생산을 위해 생활수단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가혹한 자연의 필연성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이때에 그는 시스몽디처럼 "노동능력은....판매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주석 11: 시스몽디(Sismondi), ?신경제학원리“, 제1권, p. 113.)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특수성 때문에 나타나는 하나의 결과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이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직 현실적으로 구매자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벌써 일정한 양의 사회적 노동{생활수단}이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그 뒤에 행해지는 노동력의 발휘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양도와 현실적인 발휘(즉, 노동력의 사용가치로서의 존재)는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처럼 판매에 의한 사용가치의 형식적 양도와 구매자에게 그것의 현실적 인도가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구매자의 화폐는 대체로 지불수단(支拂手段)으로 기능한다. (주석 12: "모든 노동은 그것이 끝난 뒤에 대가를 지불받는다?(“최근 맬더스가 주장하는 수요의 성 질....에 관한 원리의 연구?, p. 104). "상업신용(商業信用: commercial credit)의 시초는 생산물 의 주된 창조자인 노동자가 자기의 저축에 의해 자기의 임금 지불을 1주일 . 2주일 . 1개월 . 3개월까지 기다릴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가널[C. Ganilh), ?정치경제학의 체계?, 제2판, 파리, 1821년, 제2권, p. 150).)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는,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 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예컨대 매주 말에]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어디에서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자본가에게 선대(先貸: advance)한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격을 지불받기 전에 노동력을 구매자의 소비에 맡기며, 따라서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신용(信用)을 주고 있다. 이 신용을 제공한다는 것이 결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는 것은,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때때로 발생한다는 사실(주석 13: "노동자는 자기의 근면을 대부(貸付: lend)한다"고 슈토르히(Storch)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교활하게도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노동자는 "자기의 임금을 잃어버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위험도 부담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노동자는 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슈토르히, ?정치경제학강의?, 페테르부르크, 1815년, 제2권, pp. 36-37).)뿐 아니라, 더욱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주석 14: 하나의 실례.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heere)의 ?보고서?,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 비누, 탄산칼륨의 가루, 석회, 더비셔주에서 나는 석분, 기타 유사한 성분을 섞어 넣음으로써 불순(不純: adulterated)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 보고서 및 "불순빵의 제조에 관한 1855년의 위원회"의 보고 및 하설[Hassa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 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l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 왜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이 이러한 불순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명반이나 석분이 든 것을 사가는가에 대한 이유로서,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단골 빵집이나 잡화점에서 주는 빵을 군말없이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들은 노동주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 그리고 트리맨히어는 증인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혼합물을 넣은 빵이 일부러 이러한 종류의 고객을 목표로 공공연하게 제조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 "잉글랜드의 다수의 농업지대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농업지방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노동임금은 2주일에 1회씩, 또 심지어 1개월에 1회씩 지불된다. 이와 같이 지불간격이 길기 때문에 농업노동자들은 상종을 외상으로 사지 않을 수 있다....그는 비싼 가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는 외상을 지고 있는 소매점에 사실상 묶여 있다. 그리하여 예컨대 임금이 1개월 만에 지불되는 월트셔의 호닝함(Horningham)에서는 농업노동자들은 다른 곳에서는 1스톤{l4파운드}당 1실링 10펜스 하는 밀가루에 대해 2실링 4펜스를 지불한다"(추밀원의무관의 ?공중위생. 제6차 보고서?, 1864년, p. 264). "페이즐리(Paisley)와 킬마노크(Kilmarnock)(서부 스코틀랜드)의 목판날염공들은 1853년에 파업에 의해 임금 지불기간을 1개월에서 2주간으로 단축시키는데 성공했다"(?공장감독관보고서?, 1853년 10월 31일, p. 34).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주는 신용(信用: credit)이 한층 더 재미있게 발전된 것으로서 우리는 영국의 많은 탄광소유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이 방법에 의하면, 월말에 가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그 동안에 자본가로부터 차입하는데 이 차입은 흔히 상품형태로 이루어지고, 이 상품에 대해 는 시장가격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현물지급제도). "탄광주들 사이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월1회씩 임금을 지불하고, 중간의 매주 말에는 현금을 빌려 주는 것이 일반적 관례로 되어 있다. 이 현금은 매점(기업주 자신이 소유한 잡화점)으로 들어간다. 노동자들은 한 쪽에서는 현금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현금을 지출하는 것이다"(?아동노동 조사 위원회. 제3차 보고서”, 런던, 1864년, p. 38, 제 192호).)
그러나 화폐가 구매수단으로 기능하건 지불수단으로 기능하건 그것은 상품교환 그 자체의 성질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노동력의 가격은 비록 나중에 실현된다 할지라도, 가옥의 임대료처럼 계약상 이미 확정되어 있다. 노동력은 [비록 그 대가가 나중에 지불된다 하더라도] 벌써 판매된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를 순수한 형태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노동력의 소유자가 노동력의 판매와 동시에 계약상 정해진 가격을 즉시 받는다고 전제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제 우리는 노동력이라는 이 독특한 상품의 소유자에게 화폐소유자가 지불하는 가치가 결정되는 방식을 알았다. 화폐소유자가 교환을 통해 받는 사용가치는 노동력의 현실적 사용, 즉 노동력의 소비과정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화폐소유자는 이 과정에 필요한 모든 물건[예컨대 원료 등]을 상품시장에서 구매하며, 또 그것에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소비와 마찬가지로 시장[즉, 유통분야] 밖에서 수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 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
[그 안에서 노동력의 매매가 진행되는] 유통분야 또는 상품교환분야는 사실상 천부인권(天賦人權: innate rights of man)의 참다운 낙원이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 소유 ? 벤담{Bentham: 공리주의}이다. 자유(自由)! 왜냐하면 하나의 상품[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물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공동의지(共同意志: joint will)가 하나의 공
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의 결과다. 평등(平等)!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所有)!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것만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利己主義) . 이득(利得) . 사적 이익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豫定調和)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攝理: providence)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 공익 .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속류자유무역주의자들은 이 단순상품유통 또는 상품교환분야로부터 자신들의 견해나 개념을 끌어내고 [또 자본과 임금노동에 근거한 사회를 평가하는] 그들의 판단기준을 끌어내고 있으나, 이제 이 분야를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렀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제 3 편
절대적 잉어기치의 생산
제 7 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 8 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제 9 장 잉여가치율
제 10 장 노동일
제 11 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제 7 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 1 절 노동과정{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 노동력의 구매자는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소비(消費)한다. 이것에 의해 노동력의 판매자는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노동력[즉, 노동자]으로 되는데, 그 이전에는 그는 오직 잠재적으로만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對象化)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즉, 어떤 종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쓰이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만들게 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사용가치[즉, 어떤 일정한 물품]이다. 사용가치 또는 재화(財貨)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과정(labour process)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人間)과 자연(自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新陳代謝: metabolism)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해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自然力)으로서 자연의 소재(素材: material)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天惟)}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여기에서는 최초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노동형태들은 문제로 삼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기 위해 시장에 나타나는 시기는, [인간노동이 아직도 그 최초의 본능적 형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로부터 매우 긴 시간이 흐른 뒤다.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 (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즉,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더욱이 노동의 내용과 그 수행방식이 노동자의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않을수록,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을 자기 자신의 육체적 . 정신적 힘의 자유로운 발휘로서 즐기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노덩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1)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 [즉, 노동 그 자체], (2) 노동대상(勞動對象), (3) 노동수단(勞動手段)이다.
인간을 위해 최초부터 식량 또는 생활수단을 마련해 주고 있는 토지(경제학적 관점에서는 물도 여기에 포함된다)(주석 1: "토지의 천연산물은 소량이고, 또 그것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습은 마치 청년을 근면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그에게 적은 돈을 주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t], ?정치경제학원리", 더블린, 1770년, 제1권, p. 116).)는 인간노동의 일반적 대상으로서 인간측의 수고 없이 존재한다. 노동에 의해 자연환경과의 직접적 연결로부터 분리된 데 불과한 물건들도 모두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대상이다. 예컨대, 그 자연환경인 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잡힌 물고기, 원시림에서 벌목된 원목(原木), 광맥에서 채취된 광석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노동이 스며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원료(原料: raw material)라고 부른다. 예컨대 이미 채굴되어 세광(洗鑛)과정에 들어가는 광석이 그것이다.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대상이 원료인 것은 아니다. 노동대상이 원료로 되는 것은 그것이 이미 노동에 의해 어떤 변화를 받은 경우뿐이다.
노동수단이란, 노동자가 자기와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넣어 이 대상에 대한 자기의 활동의 전도체(傳導體: conductor)로서 이용하는 물건[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의 복합체]이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 물리적 .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 [자기의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주석 2: "이성(理性:reason)은 강력한 동시에 교활하다. 그것이 교활한 것은 [자기 자신은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여러 객체들을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 상호작용하여 지치게 만들면서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실현시킨다는] 그 매개적(媒介的) 활동 때문이다"(헤겔, ?철학체계?, 제1부, “논리학“, 베를린, 1840년, p.382).) 과일과 같은 완성된 형태의 생활수단[이것의 채취에는 인간의 신체기관만이 노동수단으로 기능한다]을 제외하면, 노동자가 직접 손에 넣는 것은 노동대상이 아니고 노동수단이다. 그리하여 자연물은 노동자의 활동의 기관(器官: organ)으로 된다. 노동자는 자연물을 성경의 말씀{“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태복음 제6장 27절, 누가복음 제12장 25절) }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체기관에 덧붙여 자기의 자연적 모습을 연장하는 것이다. 토지는 노동자의 본원적인 식량창고일 뿐 아니라 그의 노동수단의 본원적인 창고이기도 하다. 토지는 예컨대 ?그가 던지거나 문지르거나 누르거나 자르는 데 사용하는] 돌을 공급한다. 토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동수단이기는 하나, 그것이 농업에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노동수단과 비교적 고도로 발달한 노동력(勞動力)이 전제되어야 한다.(주석3: 다른 점에서는 보잘것 없는 저작인 ?정치경제학이론?(파리, 1815년, 제1권 p.266) 가운데서 가닐(Ganilh)은 중농주의자(重農主義自)들에 반대해 진정한 농업의 전제로 되는 다수의 노동과정을 적절하게 열거하고 있다.) 노동과정이 조금이라도 발전하게 되면 특별히 가공된 노동수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태고의 동굴 속에서도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가 발견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당시에는 가공된 돌이나 나무 . 뼈 . 조개들 외에도 길들여진 동물[노동에 의해 변화되고 특정의 목적을 위해 사육된 동물]이 노동수단으로 주요한 역할을 했다.(주석 4: “부의 형성과 분배의 고찰”(1766년)에서 튀르고(Turgot)는 길들여진 동물이 문명의 초기에 가진 중요한 의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그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遣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주석 5: 모든 상품 중 진정한 사치품은 상이한 생산시대의 기술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 중 역학적(力學的: mechanical)인 종류의 노동수단[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은, [예컨대 관 . 통 . 바구니 .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用器)로 쓰일 뿐이고 따라서 생산의 혈관계통(血管系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훨씬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용기로서의 노동수단은 화학공업에서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한다.(주석 6: 지금까지의 역사 기술(記述)은 [모든 사회생활의 토대이며 따라서 모든 현실적 역사의 토대인] 물질적 생산의 발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선사(先史: pre-history)시대 는 이른바 역사연구가 아니라 자연과학적 연에 입각하여 도구나 무기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노동이 노동대상에 작용하는 것을 중개하며, 따라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활동의 전도체로 쓰이는 물건들 이외에] 노동과정의 수행에 필요한 모든 객체적(客體的) 조건들은 더 넓은 의미의 노동수단에 포함될 수 있다. 그것들은 직접적으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들 없이는 노동과정이 전혀 행해지지 못하거나 불완전하게만 행해진다. 이러한 종류의 보편적인 노동수단은 역시 토지(土地)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토지는 노동자에게는 설 장소를 제공하며, 그의 노동과정에
대해서는 작업장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의 노동에 의해 매개된 이러한 종류의 노동수단 중에는 공장이나 운하(運河)나 도로 등이 있다.
요컨대,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합되었다. 즉, 노총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노동자측에서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이제
생산물측에서는 고정된 정지성(停止性)으로서 존재의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자는 방적노동을 한 것이고, 그 생산물은 방적된 것[즉, 실]이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生産手段: means of production)(주석 7: 예컨대 아직 잡히지 않은 물고기를 어업의 생산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기이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물고기가 없는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는 기술은 아직까지는 발명되지 않았다.)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주석 8: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ur)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대해서는 결코 충분한 것이 못된다. [제1권 제16장을 참조하라].) 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용가치가 생산물의 형태로 노동과정으로부터 나을 때, 그 이전의 노동의 생산물인 다른 사용가치는 생산수단으로 노동과정에 들어간다. 동일한 사용가치가 어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다른 노동과정의 생산수단으로도 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
광업 . 수렵 . 어업 등(농업은 처음으로 처녀지를 개간하는 경우에만)과 같이 그 노동대상이 천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채취산업(採取産業)을 제외하면, 모든 산업부문은 원료[즉, 노동과정을 이미 통과했으며 그 자체가 벌써 노동생산물인 노동대상]를 취급하고 있다. 예컨대 농업의 종자가 그러하다. [보통 자연의 산물(産物)이라고 간주되는] 동물과 식물도 현재의 모습에서는 전년도의 노동의 생산물일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의 통제하에 인간의 노동에 의해 이루어진 점차적인 변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특히 노동수단에 대해 말한다면, 그 대다수는 가장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도 과거 오랫동안의 노동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원료는 생산물의 주된 실체를 이를 수도 있고, 오직 보조재료(補助材料)로 그 생산물의 형성에
참가할 수도 있다. 보조재료는 [석탄이 증기기관에 의해, 휘발유가 자동차에 의해, 건초가 말에 의해 소비되는 것과 같이] 노동수단에 의해 소비(消費)되거나, [염소가 표백되지 않은 아마포에, 석탄이 철에, 염료가 양모에 첨가되는 것과 같이] 원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원료에 첨가(添加)되거나, [작업장의 조명이 나 난방에 사용되는 재료와 같이] 노동의 수행 그 자체를 지원(支援)하거나 한다. 주요재료와 보조재료 사이의 구별은 진정한 화학공업에서는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화학공업에서는 투입되는 원료 중 그 어느 것도 생산물의 실체로서 [원래의 모습대로]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석 9: 슈토르히(Storch)는 원료와 보조재료를 구별한다 세르뷸리에(Cherbulier)는 보조재료를 '도구의 원료'라고 불렀다)
물건들은 각각 여러 가지 속성(屬性)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용도(用途)가 각양각색일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생산물이 아주 판이한 여러 가지 노동과정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예컨대 곡물은 제분업자. 전분업자 . 양조업자 .목축업자 등에게 원료로 된다. 그것은 종자(種子)로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을 위한 원료로 된다. 마찬가지로 석탄은 생산물로서는 광업에서 나오지만 생산수단으로 광업에 들어간다.
동일한 생산물이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으로도 원료로도 쓰일 수 있다. 예컨대 가축의 사육에서 가축은 원료(原料)임과 동시에 비료제조의 수단(手段)이기도 하다.
소비를 위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생산물이 새로운 다른 생산물의 원료로 되는 일도 있다. 예컨대 포도가 포도주의 원료로 되는 것과 같다. 또는 노동이 우리에게 [원료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물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원료 [예컨대 면화 . 면사 . 면포와 같은 것]를 반제품(半製品)이라고 부르는데, 중간제품(中間製品)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료는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계열(系列) 전체를 통과해야 하며, 각각의 과정에서 그 모습을 변경시키면서 계속 반복해서 원료로 기능하고, 최후의 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된 생활수단 또는 완성된 노동수단의 형태로 되어 나온다.
요컨대,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 방적공은 방추(紡錘)를 실을 뽑기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하며, 아마를 실을 뽑는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물론 방적 재료{즉, 아마}와 방추 없이는 방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적을 개시할 때에는 이러한 생산물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방적과정 자체에서는 아마와 방추가 과거의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特)이라는 사실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것은 마치 방이 농민과 제분업자와 빵제조업자의 과거노동(past labour)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이 소화과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노동과정에 있는 생산수단이 과거노동의 생산물로서의 자기의 성격에 우리의 주의를 끈다면, 그것은 그 생산수단의 결함 때문이다. 잘 베어지지 않는 칼이나 잘 끊어지는 실 등은 그 칼을 만든 사람A와 그 실을 만든 사람 B를 자꾸 생각나게 만든다. 우수한 생산물에는 [그것의 유용한 속성들을 그 물건에 갖추어 준] 과거의 노동은 사라져 버렸다.
노동과정에서 사용되지 않는 기계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뿐 아니라 그 기계는 자연과정의 파괴력에 의해 침식된다. 쇠는 녹슬고 목재는 썩는다. 직포에도 편직에도 사용되지 않는 면사는 낭비된 솜이다. 살아 있는 노동은 이 물건들을 가져다가 죽은 상태로부터 소생시켜 단순히 가능성이 있는 사용가치로부터 현실적으로 유용한 사용가치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물건들은 노동(勞動)의 불길 속에 끌려들어가 노동유기체의 일부로 사용되고, 노동과정에서 그것들의 개념과 사명에 합치하는 기능(機能)을 수행하게끔 활기가 부여된다. 이리하여 이 물건들은 [생활수단으로 개인적 소비에 들어갈 수 있거나 생산수단으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사용가치,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서 합목적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 완성된 생산물이 노동과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존재조건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물이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것[즉, 생산물이 살아 있는 노동과 접촉하는 것]은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이용하고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은 그 소재적 요소인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하며 그것들을 다 써버린다. 따라서 노동은 소비과정(消費過程)이다. 이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mption)가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와 구별되는 점은, 개인적 소비에서는 생산물이 살아 있는 개인의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생산적 소비에서는 그것이 노동[즉, 살아 있는 개인의 노동력을 발휘하는 활동]의 생활수단으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소비가 만들어 내는 것은 소비자(消費者) 자신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와는 구별되는 생산물(生産物)이다.
노동수단과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인 한, 노동은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생산물을 소비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 종류의 생산물을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위한] 생산수단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 생산물을 소비한다. 그러나 노동과정이 최초에는 인간과 [인간의 협력 없이 존재하는] 토지 사이에서 행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역시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수단[즉, 자연의 소재에 인간노동이 결합되지 않은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주석 10: 매우 놀라운 통찰력을 {잘못} 발휘해 토렌즈(Torrens)는 미개인의 돌에서 자본의 기원(起源)을 발견하고 있다 "미개인이 자기가 추격하는 야수를 향해 던지는 최초의 돌덩이에서, 그리고 그가 손이 닿지 않는 과일을 따기 위해 손에 잡았던 최초의 막대기(stick)에서 우리는 어떤 물품을 추가로 손에 넣으려고 다른 물품을 취득하는 것을 보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기원을 발견한다"(토렌즈, ?부의 생산에 관한 논문? pp. 70-71). 영어에서 stock이라는 단어가 자본(capital)이라는 단어와 동의어(同義語)인 이유를 토렌즈는 아마 앞에서 말한 최초의 막대기(stick)로부터 설명했을지도 모른다.)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이제 우리의 장래의 자본가(資本家)에게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그와 작별한 것은 그가 상품시장에서 노동과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 즉 객체적 요소인 생산수단(生産手段)과 인적 요소인 노동력(勞動力)을 구매한 뒤부터다. 그는 전문가다운 빈틈없는 안목으로 방적업 . 제화업 등과 같은 그의
전문적 사업에 적합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골랐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본가는 그가 구매한 상품인 노동력의 소비에 착수한다. 다시 발해, 그는 노동력의 담지자인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게 한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장화를 만들거나 실을 뽑는 특정한 방식도 자본가가 개입했다고 해서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우선 그가 시장에서 발견하는 그대로의 노동력(勞動力)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자본가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종류의] 노동(勞動)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기는 생산방식(生産方式) 그 자체의 변화는 나중에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중에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는, 두 가지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자본가는 노동이 질서정연하게 수행되고 생산수단이 합목적적으로 사용되도록, 그리하여 원료가 낭비되지 않고 노동도구가 소중하게 취급되도록, 다시 말해 작업중의 사용에 의해 불가피한 정도로만 마멸되도륵 감시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 자본가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한다고 가정하면, 노동력을 하루 동안 사용할 권리는, 예컨대 그가 하루 동안 임차(賃借)한 말의 사용권리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에게 속한다. 상품의 사용은 상품의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노동력의 소유자,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가 판매한 사용가치(使用價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자존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의 노동력의 사용가치, 다시 말해 그것의 사용[즉, 노동]은 자본가의 것으로 된다. 자본가는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노동 그 자체를 살아 있는 효모(酵母)로서 [역시 그의 것인)]죽어 있는 생산물 형성요소(形成要素)와 결합시킨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동과정은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수단을 첨가함으로써만 노동력을 소비할 수 있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과 물건 사이의, 즉 그에게 속하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생산물은, 마치 그의 포도주 창고 속에 있는 발효과정의 생산물이 그의 것인 것과 똑같이, 그의 것이다.(주석 11: "생산물은 자본(資本)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자기의 것으로 되며, 자본으로 전환되더라도 생산물은 여전히 자기의 것으로 된다"(세르뷸리에, ?부와 빈곤“, 파리, 1841년, p. 54).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노동을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에 판매함으로써 생산물에 대한 일체의 요구를 완전히 포기한다. 생산물은 여전히 이전과 같이 자본가의 것으로 되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계약에 의해서는 조금도 변경되지 않는다. 생산물은 원료와 생활수단을 공급한 자본가에게 전적으로 귀속된다. 이것은 취득법칙(取得法則)의 엄밀한 귀결이지만, 이 법칙의 근본원리는 이와는 반대로 노동자는 자기가 생산한 것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가지고 없다는 것이다"(같은 책, p. 58). "노동자가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경우....자본가는 자본"(여기서는 생산수단이라는 의미)”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노동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임금으로 지불되는 것을 관습에 따라 자본의 개념에 포함시킨다면, 노동을 자본으로부터 분리시켜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이라는 단어는 자본과 노동 모두를 포함한다"(제임스 밀[James Mill]), ?정치경제학원리“, 런던, 1821년, pp. 70-71).)
제 2 절 가치증식괴정(valorization process)
자본가에 의해 취득된 생산물은 실 . 장화 등과 같은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 그러나 장화가 어
느 정도 사회적 진보(進步: progress)의 토대로 되고 우리의 자본가가 분명히 진보를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장화 그 자체를 위해 장화를 제조하는 것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는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우리의 자본가의 목적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 즉 판매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물품인 상품(商品)을 생산하려고 한다. 둘째, 그는 생산에 사용한 상품들의 가치총액[즉, 그가 상품시장에서 자기의 귀중한 화폐를 투하해 획득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총액]보다 그 가치가 더 큰 상품을 생산하려고 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상품생산이 문제로 되고 있으므로, 이때까지 우리가 고찰해온 것{즉, 노동과정}은 분명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생산과정을 가치형성과정으로 고찰해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각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량에 의해, 즉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결과로 자본가가 손에 넣은 생산물(生産物)에도 해당한다. 예컨대 그 생산물이 면사라 하고, 이 생산물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을 계산해 보자.
면사의 생산에는 우선 원료[예컨대 10파운드의 면화]가 필요하다. 이 면화의 가치가 얼마인가를 여기서 새삼스럽게 따져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시장에서 그것을 그 가치대로, 예컨대 10원에 구매했기 때문이다. 면화의 가격에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이미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면화의 가공 중에 소모된 방추량이 [다른 모든 사용된 노동수단을 대표한다고 가정하고] 2원의 가치를 가진다고 하자. 만약 12원으로 표현되는 금량을 생산하는 데 24노동시간[즉, 2노동일1이 걸린다면, 이 면사에는 우선 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는 셈이 된다{면화소비량 10원과 방추소모량 2원}
우리는 면화가 그 형태를 바꾸었으며 소모된 방추가 아무 흔적없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정 때문에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일반적 가치법칙에 따라, 40파운드의 면사의 가치=40파운드의 면화의 가치+한 개의 방추의 가치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 등식의 양변을 생산하는 데 동일한 노동시간이 필요하다면, 10파운드의 면사는 10파운드의 면화와 1/4개의 방추의 등가물(等價物)이다. 이 경우 동일한 노동시간이 한편에서는 면사라는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면화와 방추라는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가치가 면사, 방추, 또는 면화 어느 것으로 나타나는가는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방추와 면화가 조용히 나란히 놓여 있지 않고 방적과정에서 결합되고 이 결합(結슴)에 의해 그것들의 형태가 변화해 면사로 전환(轉換)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가치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것은 마치 이 물건들이 단순한 교환을 통해 면사라는 등가물로 바뀌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면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이고, 따라서 그것은 면사에 포함된다. [면화로부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살아 있는 사람]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운동시키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화폐소유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商品)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교환은 그 자체로서는 그 자신의 성질로부터 나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종속관계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소유자[즉.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사람]가 그것을 상품으로 시장에 내어놓을 때[즉, 판매할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동력의 소유자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만 하며, 따라서 자기의 노동능력 [즉, 자기 일신(--身)]의 자유로운 소유자로 되어야만 한다.(주석 2: 고전적 고대에 관한 백과사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엉터리를 읽을 수 있다. 즉, 고대세계에는 " 자유로운 노동자와 신용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자본은 충분히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몸젠[Mommsen)도 자기의 ?로마사?에서 이 점에 관해 오류를 되풀이해 범하고 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항상 일정한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노동력을 한꺼번에 몽땅 판매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그는 자유인으로부터 노예로, 상품소유자로부터 상품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노동력을 언제나 자기의 소유물로, 자기 자신의 상품으로 취급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그가 자기의 노동력을 항상 일시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만] 구매자의 자유처분에 맡겨 사용하게 하는 경우에만, 따라서 노동력은 양도하더라도 노동력에 대한 자기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하다.(주석 3: 그러므로 각국의 법은 노동계약의 최대 기간을 규정하고 있다. 자유로운 노동이 행해지고 있는 곳에는 법은 계약해제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여러 나라들, 특히 멕시코에서는 (미국의 남북전쟁 이전에는 멕시코로부터 할양(割讓)받은 지역에서도, 또 쿠자(Cuza)의 변혁 시까지는 사실상 다뉴브의 여러 제후국에서도) 노예제도가 채무sh예제라는 형태로 은폐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노동하여 갚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것도 대대로 이어지는] 채무로 말미암아, 노동자 개인뿐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도, 사실상 타인이나 다른 가족의 소유물로 된다. 후아레스(Juarez)는 채무노예제를 폐지했지만, 자칭 황제인 막시밀리안(Maximilian)은 하나의 칙령으로 그것을 부활했는데, 이 칙령은 워싱턴의 하원에서 적절하게도 멕시코에서 노예제도를 다시 채용하기 위한 칙령이라고 비난받았다. "나는 나의 특수한 육체적 . 정신적 기능과 활동능력의 개별 생산물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고, 나의 능력의 사용을 제한된 시간 동안 타인에게 허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제한에 의해 나의 능력은 나의 전체성.? 일반성과 외적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의 전체 노동시간과 나의 생산물 전체를 양도한다면, 나는 나의 실체, 나의 일반적 활동과 현실성, 나의 인격을 어떤 타인의 소유로 되게 할 것이다"(헤겔[G. W. F. Hegel], ?법철학?, 베를린, 1840년, p. 104).)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발견하기 위한 제2의 필수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이 대상화된 상품을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살아 있는 신체 안에만 존재하는] 자기의 노동력 그 자체를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동력이 아닌 다른 상품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예컨대 원료, 노동도구 등1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가죽 없이는 장화를 만들 수 없다. 그 외에도 그는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공상가까지도, 미래의 생산물[즉, 그 생산이 아
직 완성되지 않은 사용가치]을 먹고 살 수는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 그 모습을 나타낸 첫날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도 또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된다면, 생산물은 생산되고 나서 판매되어야 하며, 또 생산물이 판매된 뒤에야 비로소 생산자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생산에 필요한 시간외에 판매에 필요한 시간이 추가된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自由人; free individual)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物件)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e of)는 의미다.
어째서 이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대면하게 되는가라는 문제는, 노동시장을 상품시장의 하나의 특수한 분야로 간주하는 화폐소유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당분간 우리의 관심사도 아니다. 화폐소유자가 그 사실에 실천적으로 달라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사실[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이론적으로 달라붙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즉, 자연이 한편으로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남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제1권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始初蓄積)"을 참조하라} .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경제적 범주들도 역시 자기들의 역사적 흔적을 가지고 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려면 일정한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자 자신을 위한 직접적 생활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더 나아가 어떤 사정 하에서 모든 생산물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가를 탐구해 본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아주 독특한 생산양식(生産樣式), 즉 자연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구는 상품 분석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비록 생산물의 압도적 양이 직접 자가소비(自家消費)에 충당되고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정이 그 전체 폭이나 깊이에서 교환가치에 의해 아직도 지배되지 않더라도,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일어날 수 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회 안의 분업이 어느 정도 발전해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분리[물물교환과 함께 처음 시작된다]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을 그 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발전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 어디에도 있다.
또 이제 화폐(貨幣)로 눈을 돌려보면, 그것은 상품교환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전제로 한다. 각종의 화폐형태(단순한 상품등가물로서의 화폐,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 퇴장화폐 및 세계화폐)는 이런저런 기능의 크기와 그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 사회적 생산과정의 매우 다른 수준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품유통이 조금만 발달하면 모든 화폐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자본(資좌.)은 그렇지 않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勞動者)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하나의 역사적 전제조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사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본은 처음부터 사회적 생산과정의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의 눈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차기의 노동이 임금노동(賃金勞動: wage-labour)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가 일반화된다.)
이제 우리는 노동력이라는 이 독특한 상품을 좀더 상세하게 고찰해야 한다. 이 상품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치를 가진다.(주석 5: "한 인간의 가치(價値)는 다른 모든 물건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의 가격(價格)이.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힘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불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홉즈[T. Hobbes], ?리바이어던", 몰즈워즈 편, ?저작집? 런던, 1839-1844, 제3권, p. 76).) 그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은 이 개인의 생존을 전제로 한다. 이 개인의 생존이 주어져 있다면,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維持)이다. 살아 있는 개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生活手段)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은 결국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귀착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그런데 노동력(勞動力)은 오직 그 발현(發現)에 의해서만 실현되며, 오직 노동(勞動)을 통해서만 활성화된다. 노동력의 활성화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 신경 .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지출의 증가는 수입의 증가를 조건으로 한다.(주석 6: 그러므로 고대 로마에서 농업노예를 감시하던 노예관리인인 빌리쿠스(villicus)는 “.보통의 예보다 그 일이 쉽다는 이유로 보통의 노예보다 더 적은 생활물자를 받았다"(몸젠[T. Mommsen], ?로마사?, 1856년, p. 810).) 노동력의 소유자가 오늘의 노동을 끝마쳤다면, 그는 내일도 오늘과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총량은 노동하는 개인을 정상적인 생활상태로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식물 . 의복 . 난방 .주택 등과 같은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계급이 어떤 조건하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주석 7: 손턴(W. T Thornton), ?과잉인구와 그 해결책? 런던 1846년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역사적 및 도덕적{정신적} 요소(historical and moral element) 포함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의 일정한 나라에는 노동자들의 필요생활수단의 평균적 범위는 주어져 있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화폐가 연속적으로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 전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시장에 연속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판매자는, "살아 있는 개체는 어느 것이나 생식(生殖: procreation)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는 것처럼“(주석 8: 페티(William Petty).), 생식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모(消耗)와 사망의 결과 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노동력은 적어도 같은 수의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에는 이러한 보충인원[다시 말해 노동자의 자녀들]의 생활수단이 포함되며, 그리하여 이 독특한 상품소유자 종족은 상품시장에서 영구히 존재하게 된다.(주석 9: "그것[노동]의 자연가격(自然備格)은....노동자를 유지하기 위해, 또 노동자로 하여금 [시장에서 감소되지 않는 노동공급을 보장할 만한]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나라의 기후나 생활관습에 의해 요구되는 생활수단과 편의품의 양이다.(R. 토렌즈, “곡물무역론”, 런던, 1815년, p. 62). 여기에서는 노동이란 말이 노동력이라는 말 대신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인간유기체(人間有機誘: human organism)의 일반적인 천성을 변화시켜 일정한 노동부문에서 기능과 숙련을 몸에 익혀 발달한 특수한 노동력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 또는 교육이 필요한데, 거기에는 또 얼마간의 상품들(또는 그 등가)이 소요된다 이 비용은 노동력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훈련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비용은 [보통의 노동력의 경우에는 매우 적지만]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 속에 들어간다.
노동력의 가치는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의 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는 이 생활수단의 가치[즉,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생활수단의 일부, 예컨대 식료품이나 연료 등은 매일 소비되고 매일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생활수단들, 예컨대 의복이나 가구등과 같은 것들은 비교적 장시간에 걸쳐 소모되며, 따라서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보충되어도 된다. 어떤 종류의 상품은 매일, 또 어떤 종류의 상품은 매주, 매분기 등으로 구매되거나 지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출의 총액은 예컨데 1년 동안 어떻게 분배되든 매일매일의 평균수입(平均收人)에 의해 보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노동력의 생산에 매일 필요한 상품의 양을 A, 매주 필요한 양을 B, 매분기에 필요한 양을 C....등이라고 가정하면, 이 상품들의 하루의 평균 365A+52B+4C+등등/365 이 될 것이다. 이 하루 평균으로 필요한 상품량이 6시간의 사회적 노동을 포함하고 있다면, 매일의 노동력(勞動力)에는 반일 분[노동일이 12시간이라면]의 사회적 평균노동(平均勞動)이 대상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 노동력이 매일 생산되기 위해서는 노동일의 반이 필요하다. 이 노동량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즉, 매일 재생산되는 노동력의 가치]를 형성한다. 만일 반일분의 사회적 평균노동이 3원으로 표시된다면, 3원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만약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매일 3원에 판다면 노동력의 판매가격은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 그리고 우리의 전제에 의하면, 자기의 3원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기를 갈망하는 화폐소유자는 실제로 이 가치를 지불한다.
노동력의 가치의 궁극적인 또는 최소의 한계는, 노동력의 보유자인 인간이 [자기의 생명과정을 갱신할 수 있기 위해] 매일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품량의 가치에 의해, 다시 말해 육체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설정된다. 만약 노동력의 가격이 이 최소한계까지 떨어진다면, 그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노동력은 위축된 상태로만 유지되고 발현되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의 가치든 그것은 그 상품을 정상적인 품질로 공급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이와 같은 노동력의 가치규정을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로시(Rossi) 등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탄식하는 것은 매우 값싼 감상(感傷: sentimentality)이다.
"생산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의 노동자의 생활수단을 무시하면서 노동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 나의 망상이다. 우리가 노동 또는 노동능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동시에 노동자와 그의 생활 수단, 노동자와 그의 임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주석 10: 로시(Rossi), ?정치경제학강의?, 브뤼셀, 1843년, pp. ,370-371.)
노동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노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치 소화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소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소화라는 과정이 실제로 진행
되려면,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튼튼한 위장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노동능력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노동능력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생활수단의 가치가 노동능력의 가치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능력이 판매되지 않는다면 노동능력은 노동자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는 오히려 그의 노동능력이 그것의 생산에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의 재생산을 위해 생활수단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가혹한 자연의 필연성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이때에 그는 시스몽디처럼 "노동능력은....판매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주석 11: 시스몽디(Sismondi), ?신경제학원리“, 제1권, p. 113.)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특수성 때문에 나타나는 하나의 결과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이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직 현실적으로 구매자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벌써 일정한 양의 사회적 노동{생활수단}이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그 뒤에 행해지는 노동력의 발휘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양도와 현실적인 발휘(즉, 노동력의 사용가치로서의 존재)는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처럼 판매에 의한 사용가치의 형식적 양도와 구매자에게 그것의 현실적 인도가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구매자의 화폐는 대체로 지불수단(支拂手段)으로 기능한다. (주석 12: "모든 노동은 그것이 끝난 뒤에 대가를 지불받는다?(“최근 맬더스가 주장하는 수요의 성 질....에 관한 원리의 연구?, p. 104). "상업신용(商業信用: commercial credit)의 시초는 생산물 의 주된 창조자인 노동자가 자기의 저축에 의해 자기의 임금 지불을 1주일 . 2주일 . 1개월 . 3개월까지 기다릴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가널[C. Ganilh), ?정치경제학의 체계?, 제2판, 파리, 1821년, 제2권, p. 150).)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는,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 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예컨대 매주 말에]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어디에서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자본가에게 선대(先貸: advance)한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격을 지불받기 전에 노동력을 구매자의 소비에 맡기며, 따라서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신용(信用)을 주고 있다. 이 신용을 제공한다는 것이 결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는 것은,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때때로 발생한다는 사실(주석 13: "노동자는 자기의 근면을 대부(貸付: lend)한다"고 슈토르히(Storch)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교활하게도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노동자는 "자기의 임금을 잃어버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위험도 부담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노동자는 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슈토르히, ?정치경제학강의?, 페테르부르크, 1815년, 제2권, pp. 36-37).)뿐 아니라, 더욱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주석 14: 하나의 실례.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heere)의 ?보고서?,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 비누, 탄산칼륨의 가루, 석회, 더비셔주에서 나는 석분, 기타 유사한 성분을 섞어 넣음으로써 불순(不純: adulterated)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 보고서 및 "불순빵의 제조에 관한 1855년의 위원회"의 보고 및 하설[Hassa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 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l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 왜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이 이러한 불순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명반이나 석분이 든 것을 사가는가에 대한 이유로서,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단골 빵집이나 잡화점에서 주는 빵을 군말없이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들은 노동주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 그리고 트리맨히어는 증인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혼합물을 넣은 빵이 일부러 이러한 종류의 고객을 목표로 공공연하게 제조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 "잉글랜드의 다수의 농업지대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농업지방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노동임금은 2주일에 1회씩, 또 심지어 1개월에 1회씩 지불된다. 이와 같이 지불간격이 길기 때문에 농업노동자들은 상종을 외상으로 사지 않을 수 있다....그는 비싼 가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는 외상을 지고 있는 소매점에 사실상 묶여 있다. 그리하여 예컨대 임금이 1개월 만에 지불되는 월트셔의 호닝함(Horningham)에서는 농업노동자들은 다른 곳에서는 1스톤{l4파운드}당 1실링 10펜스 하는 밀가루에 대해 2실링 4펜스를 지불한다"(추밀원의무관의 ?공중위생. 제6차 보고서?, 1864년, p. 264). "페이즐리(Paisley)와 킬마노크(Kilmarnock)(서부 스코틀랜드)의 목판날염공들은 1853년에 파업에 의해 임금 지불기간을 1개월에서 2주간으로 단축시키는데 성공했다"(?공장감독관보고서?, 1853년 10월 31일, p. 34).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주는 신용(信用: credit)이 한층 더 재미있게 발전된 것으로서 우리는 영국의 많은 탄광소유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이 방법에 의하면, 월말에 가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그 동안에 자본가로부터 차입하는데 이 차입은 흔히 상품형태로 이루어지고, 이 상품에 대해 는 시장가격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현물지급제도). "탄광주들 사이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월1회씩 임금을 지불하고, 중간의 매주 말에는 현금을 빌려 주는 것이 일반적 관례로 되어 있다. 이 현금은 매점(기업주 자신이 소유한 잡화점)으로 들어간다. 노동자들은 한 쪽에서는 현금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현금을 지출하는 것이다"(?아동노동 조사 위원회. 제3차 보고서”, 런던, 1864년, p. 38, 제 192호).)
그러나 화폐가 구매수단으로 기능하건 지불수단으로 기능하건 그것은 상품교환 그 자체의 성질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노동력의 가격은 비록 나중에 실현된다 할지라도, 가옥의 임대료처럼 계약상 이미 확정되어 있다. 노동력은 [비록 그 대가가 나중에 지불된다 하더라도] 벌써 판매된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를 순수한 형태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노동력의 소유자가 노동력의 판매와 동시에 계약상 정해진 가격을 즉시 받는다고 전제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제 우리는 노동력이라는 이 독특한 상품의 소유자에게 화폐소유자가 지불하는 가치가 결정되는 방식을 알았다. 화폐소유자가 교환을 통해 받는 사용가치는 노동력의 현실적 사용, 즉 노동력의 소비과정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화폐소유자는 이 과정에 필요한 모든 물건[예컨대 원료 등]을 상품시장에서 구매하며, 또 그것에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소비와 마찬가지로 시장[즉, 유통분야] 밖에서 수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 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
[그 안에서 노동력의 매매가 진행되는] 유통분야 또는 상품교환분야는 사실상 천부인권(天賦人權: innate rights of man)의 참다운 낙원이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 소유 ? 벤담{Bentham: 공리주의}이다. 자유(自由)! 왜냐하면 하나의 상품[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물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공동의지(共同意志: joint will)가 하나의 공
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의 결과다. 평등(平等)!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所有)!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것만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利己主義) . 이득(利得) . 사적 이익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豫定調和)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攝理: providence)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 공익 .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속류자유무역주의자들은 이 단순상품유통 또는 상품교환분야로부터 자신들의 견해나 개념을 끌어내고 [또 자본과 임금노동에 근거한 사회를 평가하는] 그들의 판단기준을 끌어내고 있으나, 이제 이 분야를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렀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제 3 편
절대적 잉어기치의 생산
제 7 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 8 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제 9 장 잉여가치율
제 10 장 노동일
제 11 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제 7 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 1 절 노동과정{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 노동력의 구매자는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소비(消費)한다. 이것에 의해 노동력의 판매자는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노동력[즉, 노동자]으로 되는데, 그 이전에는 그는 오직 잠재적으로만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對象化)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즉, 어떤 종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쓰이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만들게 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사용가치[즉, 어떤 일정한 물품]이다. 사용가치 또는 재화(財貨)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과정(labour process)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人間)과 자연(自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新陳代謝: metabolism)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해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自然力)으로서 자연의 소재(素材: material)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天惟)}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여기에서는 최초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노동형태들은 문제로 삼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기 위해 시장에 나타나는 시기는, [인간노동이 아직도 그 최초의 본능적 형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로부터 매우 긴 시간이 흐른 뒤다.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 (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즉,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더욱이 노동의 내용과 그 수행방식이 노동자의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않을수록,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을 자기 자신의 육체적 . 정신적 힘의 자유로운 발휘로서 즐기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노덩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1)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 [즉, 노동 그 자체], (2) 노동대상(勞動對象), (3) 노동수단(勞動手段)이다.
인간을 위해 최초부터 식량 또는 생활수단을 마련해 주고 있는 토지(경제학적 관점에서는 물도 여기에 포함된다)(주석 1: "토지의 천연산물은 소량이고, 또 그것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습은 마치 청년을 근면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그에게 적은 돈을 주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t], ?정치경제학원리", 더블린, 1770년, 제1권, p. 116).)는 인간노동의 일반적 대상으로서 인간측의 수고 없이 존재한다. 노동에 의해 자연환경과의 직접적 연결로부터 분리된 데 불과한 물건들도 모두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대상이다. 예컨대, 그 자연환경인 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잡힌 물고기, 원시림에서 벌목된 원목(原木), 광맥에서 채취된 광석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노동이 스며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원료(原料: raw material)라고 부른다. 예컨대 이미 채굴되어 세광(洗鑛)과정에 들어가는 광석이 그것이다.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대상이 원료인 것은 아니다. 노동대상이 원료로 되는 것은 그것이 이미 노동에 의해 어떤 변화를 받은 경우뿐이다.
노동수단이란, 노동자가 자기와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넣어 이 대상에 대한 자기의 활동의 전도체(傳導體: conductor)로서 이용하는 물건[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의 복합체]이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 물리적 .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 [자기의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주석 2: "이성(理性:reason)은 강력한 동시에 교활하다. 그것이 교활한 것은 [자기 자신은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여러 객체들을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 상호작용하여 지치게 만들면서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실현시킨다는] 그 매개적(媒介的) 활동 때문이다"(헤겔, ?철학체계?, 제1부, “논리학“, 베를린, 1840년, p.382).) 과일과 같은 완성된 형태의 생활수단[이것의 채취에는 인간의 신체기관만이 노동수단으로 기능한다]을 제외하면, 노동자가 직접 손에 넣는 것은 노동대상이 아니고 노동수단이다. 그리하여 자연물은 노동자의 활동의 기관(器官: organ)으로 된다. 노동자는 자연물을 성경의 말씀{“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태복음 제6장 27절, 누가복음 제12장 25절) }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체기관에 덧붙여 자기의 자연적 모습을 연장하는 것이다. 토지는 노동자의 본원적인 식량창고일 뿐 아니라 그의 노동수단의 본원적인 창고이기도 하다. 토지는 예컨대 ?그가 던지거나 문지르거나 누르거나 자르는 데 사용하는] 돌을 공급한다. 토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동수단이기는 하나, 그것이 농업에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노동수단과 비교적 고도로 발달한 노동력(勞動力)이 전제되어야 한다.(주석3: 다른 점에서는 보잘것 없는 저작인 ?정치경제학이론?(파리, 1815년, 제1권 p.266) 가운데서 가닐(Ganilh)은 중농주의자(重農主義自)들에 반대해 진정한 농업의 전제로 되는 다수의 노동과정을 적절하게 열거하고 있다.) 노동과정이 조금이라도 발전하게 되면 특별히 가공된 노동수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태고의 동굴 속에서도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가 발견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당시에는 가공된 돌이나 나무 . 뼈 . 조개들 외에도 길들여진 동물[노동에 의해 변화되고 특정의 목적을 위해 사육된 동물]이 노동수단으로 주요한 역할을 했다.(주석 4: “부의 형성과 분배의 고찰”(1766년)에서 튀르고(Turgot)는 길들여진 동물이 문명의 초기에 가진 중요한 의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그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遣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주석 5: 모든 상품 중 진정한 사치품은 상이한 생산시대의 기술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 중 역학적(力學的: mechanical)인 종류의 노동수단[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은, [예컨대 관 . 통 . 바구니 .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用器)로 쓰일 뿐이고 따라서 생산의 혈관계통(血管系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훨씬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용기로서의 노동수단은 화학공업에서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한다.(주석 6: 지금까지의 역사 기술(記述)은 [모든 사회생활의 토대이며 따라서 모든 현실적 역사의 토대인] 물질적 생산의 발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선사(先史: pre-history)시대 는 이른바 역사연구가 아니라 자연과학적 연에 입각하여 도구나 무기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노동이 노동대상에 작용하는 것을 중개하며, 따라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활동의 전도체로 쓰이는 물건들 이외에] 노동과정의 수행에 필요한 모든 객체적(客體的) 조건들은 더 넓은 의미의 노동수단에 포함될 수 있다. 그것들은 직접적으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들 없이는 노동과정이 전혀 행해지지 못하거나 불완전하게만 행해진다. 이러한 종류의 보편적인 노동수단은 역시 토지(土地)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토지는 노동자에게는 설 장소를 제공하며, 그의 노동과정에
대해서는 작업장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의 노동에 의해 매개된 이러한 종류의 노동수단 중에는 공장이나 운하(運河)나 도로 등이 있다.
요컨대,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합되었다. 즉, 노총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노동자측에서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이제
생산물측에서는 고정된 정지성(停止性)으로서 존재의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자는 방적노동을 한 것이고, 그 생산물은 방적된 것[즉, 실]이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生産手段: means of production)(주석 7: 예컨대 아직 잡히지 않은 물고기를 어업의 생산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기이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물고기가 없는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는 기술은 아직까지는 발명되지 않았다.)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주석 8: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ur)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대해서는 결코 충분한 것이 못된다. [제1권 제16장을 참조하라].) 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용가치가 생산물의 형태로 노동과정으로부터 나을 때, 그 이전의 노동의 생산물인 다른 사용가치는 생산수단으로 노동과정에 들어간다. 동일한 사용가치가 어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다른 노동과정의 생산수단으로도 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
광업 . 수렵 . 어업 등(농업은 처음으로 처녀지를 개간하는 경우에만)과 같이 그 노동대상이 천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채취산업(採取産業)을 제외하면, 모든 산업부문은 원료[즉, 노동과정을 이미 통과했으며 그 자체가 벌써 노동생산물인 노동대상]를 취급하고 있다. 예컨대 농업의 종자가 그러하다. [보통 자연의 산물(産物)이라고 간주되는] 동물과 식물도 현재의 모습에서는 전년도의 노동의 생산물일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의 통제하에 인간의 노동에 의해 이루어진 점차적인 변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특히 노동수단에 대해 말한다면, 그 대다수는 가장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도 과거 오랫동안의 노동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원료는 생산물의 주된 실체를 이를 수도 있고, 오직 보조재료(補助材料)로 그 생산물의 형성에
참가할 수도 있다. 보조재료는 [석탄이 증기기관에 의해, 휘발유가 자동차에 의해, 건초가 말에 의해 소비되는 것과 같이] 노동수단에 의해 소비(消費)되거나, [염소가 표백되지 않은 아마포에, 석탄이 철에, 염료가 양모에 첨가되는 것과 같이] 원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원료에 첨가(添加)되거나, [작업장의 조명이 나 난방에 사용되는 재료와 같이] 노동의 수행 그 자체를 지원(支援)하거나 한다. 주요재료와 보조재료 사이의 구별은 진정한 화학공업에서는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화학공업에서는 투입되는 원료 중 그 어느 것도 생산물의 실체로서 [원래의 모습대로]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석 9: 슈토르히(Storch)는 원료와 보조재료를 구별한다 세르뷸리에(Cherbulier)는 보조재료를 '도구의 원료'라고 불렀다)
물건들은 각각 여러 가지 속성(屬性)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용도(用途)가 각양각색일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생산물이 아주 판이한 여러 가지 노동과정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예컨대 곡물은 제분업자. 전분업자 . 양조업자 .목축업자 등에게 원료로 된다. 그것은 종자(種子)로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을 위한 원료로 된다. 마찬가지로 석탄은 생산물로서는 광업에서 나오지만 생산수단으로 광업에 들어간다.
동일한 생산물이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으로도 원료로도 쓰일 수 있다. 예컨대 가축의 사육에서 가축은 원료(原料)임과 동시에 비료제조의 수단(手段)이기도 하다.
소비를 위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생산물이 새로운 다른 생산물의 원료로 되는 일도 있다. 예컨대 포도가 포도주의 원료로 되는 것과 같다. 또는 노동이 우리에게 [원료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물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원료 [예컨대 면화 . 면사 . 면포와 같은 것]를 반제품(半製品)이라고 부르는데, 중간제품(中間製品)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료는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계열(系列) 전체를 통과해야 하며, 각각의 과정에서 그 모습을 변경시키면서 계속 반복해서 원료로 기능하고, 최후의 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된 생활수단 또는 완성된 노동수단의 형태로 되어 나온다.
요컨대,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 방적공은 방추(紡錘)를 실을 뽑기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하며, 아마를 실을 뽑는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물론 방적 재료{즉, 아마}와 방추 없이는 방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적을 개시할 때에는 이러한 생산물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방적과정 자체에서는 아마와 방추가 과거의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特)이라는 사실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것은 마치 방이 농민과 제분업자와 빵제조업자의 과거노동(past labour)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이 소화과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노동과정에 있는 생산수단이 과거노동의 생산물로서의 자기의 성격에 우리의 주의를 끈다면, 그것은 그 생산수단의 결함 때문이다. 잘 베어지지 않는 칼이나 잘 끊어지는 실 등은 그 칼을 만든 사람A와 그 실을 만든 사람 B를 자꾸 생각나게 만든다. 우수한 생산물에는 [그것의 유용한 속성들을 그 물건에 갖추어 준] 과거의 노동은 사라져 버렸다.
노동과정에서 사용되지 않는 기계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뿐 아니라 그 기계는 자연과정의 파괴력에 의해 침식된다. 쇠는 녹슬고 목재는 썩는다. 직포에도 편직에도 사용되지 않는 면사는 낭비된 솜이다. 살아 있는 노동은 이 물건들을 가져다가 죽은 상태로부터 소생시켜 단순히 가능성이 있는 사용가치로부터 현실적으로 유용한 사용가치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물건들은 노동(勞動)의 불길 속에 끌려들어가 노동유기체의 일부로 사용되고, 노동과정에서 그것들의 개념과 사명에 합치하는 기능(機能)을 수행하게끔 활기가 부여된다. 이리하여 이 물건들은 [생활수단으로 개인적 소비에 들어갈 수 있거나 생산수단으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사용가치,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서 합목적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 완성된 생산물이 노동과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존재조건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물이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것[즉, 생산물이 살아 있는 노동과 접촉하는 것]은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이용하고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은 그 소재적 요소인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하며 그것들을 다 써버린다. 따라서 노동은 소비과정(消費過程)이다. 이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mption)가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와 구별되는 점은, 개인적 소비에서는 생산물이 살아 있는 개인의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생산적 소비에서는 그것이 노동[즉, 살아 있는 개인의 노동력을 발휘하는 활동]의 생활수단으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소비가 만들어 내는 것은 소비자(消費者) 자신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와는 구별되는 생산물(生産物)이다.
노동수단과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인 한, 노동은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생산물을 소비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 종류의 생산물을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위한] 생산수단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 생산물을 소비한다. 그러나 노동과정이 최초에는 인간과 [인간의 협력 없이 존재하는] 토지 사이에서 행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역시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수단[즉, 자연의 소재에 인간노동이 결합되지 않은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주석 10: 매우 놀라운 통찰력을 {잘못} 발휘해 토렌즈(Torrens)는 미개인의 돌에서 자본의 기원(起源)을 발견하고 있다 "미개인이 자기가 추격하는 야수를 향해 던지는 최초의 돌덩이에서, 그리고 그가 손이 닿지 않는 과일을 따기 위해 손에 잡았던 최초의 막대기(stick)에서 우리는 어떤 물품을 추가로 손에 넣으려고 다른 물품을 취득하는 것을 보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기원을 발견한다"(토렌즈, ?부의 생산에 관한 논문? pp. 70-71). 영어에서 stock이라는 단어가 자본(capital)이라는 단어와 동의어(同義語)인 이유를 토렌즈는 아마 앞에서 말한 최초의 막대기(stick)로부터 설명했을지도 모른다.)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이제 우리의 장래의 자본가(資本家)에게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그와 작별한 것은 그가 상품시장에서 노동과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 즉 객체적 요소인 생산수단(生産手段)과 인적 요소인 노동력(勞動力)을 구매한 뒤부터다. 그는 전문가다운 빈틈없는 안목으로 방적업 . 제화업 등과 같은 그의
전문적 사업에 적합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골랐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본가는 그가 구매한 상품인 노동력의 소비에 착수한다. 다시 발해, 그는 노동력의 담지자인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게 한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장화를 만들거나 실을 뽑는 특정한 방식도 자본가가 개입했다고 해서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우선 그가 시장에서 발견하는 그대로의 노동력(勞動力)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자본가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종류의] 노동(勞動)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기는 생산방식(生産方式) 그 자체의 변화는 나중에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중에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는, 두 가지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자본가는 노동이 질서정연하게 수행되고 생산수단이 합목적적으로 사용되도록, 그리하여 원료가 낭비되지 않고 노동도구가 소중하게 취급되도록, 다시 말해 작업중의 사용에 의해 불가피한 정도로만 마멸되도륵 감시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 자본가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한다고 가정하면, 노동력을 하루 동안 사용할 권리는, 예컨대 그가 하루 동안 임차(賃借)한 말의 사용권리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에게 속한다. 상품의 사용은 상품의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노동력의 소유자,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가 판매한 사용가치(使用價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자존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의 노동력의 사용가치, 다시 말해 그것의 사용[즉, 노동]은 자본가의 것으로 된다. 자본가는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노동 그 자체를 살아 있는 효모(酵母)로서 [역시 그의 것인)]죽어 있는 생산물 형성요소(形成要素)와 결합시킨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동과정은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수단을 첨가함으로써만 노동력을 소비할 수 있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과 물건 사이의, 즉 그에게 속하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생산물은, 마치 그의 포도주 창고 속에 있는 발효과정의 생산물이 그의 것인 것과 똑같이, 그의 것이다.(주석 11: "생산물은 자본(資本)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자기의 것으로 되며, 자본으로 전환되더라도 생산물은 여전히 자기의 것으로 된다"(세르뷸리에, ?부와 빈곤“, 파리, 1841년, p. 54).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노동을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에 판매함으로써 생산물에 대한 일체의 요구를 완전히 포기한다. 생산물은 여전히 이전과 같이 자본가의 것으로 되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계약에 의해서는 조금도 변경되지 않는다. 생산물은 원료와 생활수단을 공급한 자본가에게 전적으로 귀속된다. 이것은 취득법칙(取得法則)의 엄밀한 귀결이지만, 이 법칙의 근본원리는 이와는 반대로 노동자는 자기가 생산한 것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가지고 없다는 것이다"(같은 책, p. 58). "노동자가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경우....자본가는 자본"(여기서는 생산수단이라는 의미)”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노동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임금으로 지불되는 것을 관습에 따라 자본의 개념에 포함시킨다면, 노동을 자본으로부터 분리시켜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이라는 단어는 자본과 노동 모두를 포함한다"(제임스 밀[James Mill]), ?정치경제학원리“, 런던, 1821년, pp. 70-71).)
제 2 절 가치증식괴정(valorization process)
자본가에 의해 취득된 생산물은 실 . 장화 등과 같은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 그러나 장화가 어
느 정도 사회적 진보(進步: progress)의 토대로 되고 우리의 자본가가 분명히 진보를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장화 그 자체를 위해 장화를 제조하는 것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는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우리의 자본가의 목적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 즉 판매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물품인 상품(商品)을 생산하려고 한다. 둘째, 그는 생산에 사용한 상품들의 가치총액[즉, 그가 상품시장에서 자기의 귀중한 화폐를 투하해 획득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총액]보다 그 가치가 더 큰 상품을 생산하려고 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상품생산이 문제로 되고 있으므로, 이때까지 우리가 고찰해온 것{즉, 노동과정}은 분명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생산과정을 가치형성과정으로 고찰해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각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량에 의해, 즉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결과로 자본가가 손에 넣은 생산물(生産物)에도 해당한다. 예컨대 그 생산물이 면사라 하고, 이 생산물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을 계산해 보자.
면사의 생산에는 우선 원료[예컨대 10파운드의 면화]가 필요하다. 이 면화의 가치가 얼마인가를 여기서 새삼스럽게 따져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시장에서 그것을 그 가치대로, 예컨대 10원에 구매했기 때문이다. 면화의 가격에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이미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면화의 가공 중에 소모된 방추량이 [다른 모든 사용된 노동수단을 대표한다고 가정하고] 2원의 가치를 가진다고 하자. 만약 12원으로 표현되는 금량을 생산하는 데 24노동시간[즉, 2노동일1이 걸린다면, 이 면사에는 우선 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는 셈이 된다{면화소비량 10원과 방추소모량 2원}
우리는 면화가 그 형태를 바꾸었으며 소모된 방추가 아무 흔적없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정 때문에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일반적 가치법칙에 따라, 40파운드의 면사의 가치=40파운드의 면화의 가치+한 개의 방추의 가치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 등식의 양변을 생산하는 데 동일한 노동시간이 필요하다면, 10파운드의 면사는 10파운드의 면화와 1/4개의 방추의 등가물(等價物)이다. 이 경우 동일한 노동시간이 한편에서는 면사라는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면화와 방추라는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가치가 면사, 방추, 또는 면화 어느 것으로 나타나는가는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방추와 면화가 조용히 나란히 놓여 있지 않고 방적과정에서 결합되고 이 결합(結슴)에 의해 그것들의 형태가 변화해 면사로 전환(轉換)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가치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것은 마치 이 물건들이 단순한 교환을 통해 면사라는 등가물로 바뀌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면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이고, 따라서 그것은 면사에 포함된다. [면화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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