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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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아마포로 표현하게 된다. 여기서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10그램의 차, 또는 =기타 등등이라는 시리즈를 거꾸로 하면, 다시 말해 이 시리즈에 이미 암시되어 있는 역의 관계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나온다.
C. 일반적 가치형태
1개의 저고리
10그램 차
40그램의 커피 = 20미터의 아마포
1쿼터의 밀
2온스의 금
1/2톤의 철
X량의 상품 A
기타 등등의 상품
1. 가치형태의 변화된 성격
여러 가지 상품들은 자기의 가치를 이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단순하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 한 개의 상품으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 통일적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일한 상품으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단순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일반적이다.
제1형태와 제2형태는 한 상품의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또는 상품체]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다.
제1형태는 1개의 저고리=20미터의 아마포, 10그램의 차=1/2톤의 철 등과 같은 가치등식을 제공했다. 저고리의 가치는 아마포와 동등하고 차의 가치는 쇠와 동등하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저고리와 차의 이러한 가치표현들은 [아마포와 쇠가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것이다. 이 형태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우연적인 때때로의 교환행위에 의해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의 초기 단계에서 뿐이다.
제2형태는 제1형태보다 더 완전하게 한 상품의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저고리의 가치는 아마포 . 쇠 . 차, 요컨대 저고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물건과 동등한 것으로 되어 저고리의 현물형태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는 모든 상품들의 공통된 가치표현은 직접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왜냐하면, 각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다른 모든 상품들이 등가(물)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개된 가치형태는 어떤 특수한 노동생산물[예컨대 가축]이 예외적으로가 아니라 관습적으로 각종 상품들과 교환되는 그때에 비로소 실제로 나타난다.
새로 얻어진 형태[제3형태]는 상품세계의 가치들을 그 세계에서 선발된 한 개의 상품종류[예컨대 아마포]로 표현하며, 그리하여 모든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과 아마포와의 동등성(同等性)을 통해 표현된다. 이제는 어떤 상품의 가치도 아마포와 등등한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될 뿐 아니라 일체의 사용가치로부터 구별되며, 또 바로 그렇게 됨으로써 모든 상품의 가치는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형태에 의해 비로소 상품들은 실제로 가치로 서로 관련맺거나 상호간에 교환가치로 나타나게 된다.
이전의 두 형태는 각 상품의 가치를 단 하나의 다른 종류의 상품으로 표현하거나, 그 상품과는 다른 일련의 많은 상품으로 표현한다. 어느 경우에나 개별상품이 하나의 가치형태를 얻게 되는 것은 말하자면 개별상품의 개인적인 일이고, 개별상품은 다른 상품들의 협력 없이 이 일을 달성한다. 다시 말해, 다른 상품들은 그 상품에 대해 등가(물)이라는 수동적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반적 가치형태는 오로지 상품세계 전체의 공동사업으로 생길 수 있을 뿐이다. 하나의 상품이 자기의 가치를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이 자기들의 가치를 동일한 등가(물)로 표현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새로 등장하는 상품종류도 반드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가치로서의 상품들의 객관적 실재는 순전히 이 물건들의 '사회적 존재'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이 객관적 실재는 상품들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모든 상품들이 아마포와 동등하게 되는 이 형태에서는, 모든 상품들은 이제 질적으로 동등한 것[즉, 가치 일반]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가치량으로 나타난다. 모든 상품들의 가치량이 동일한 재료인 아마포로 표현되기 때문에 서로 비교된다. 예컨대, 10그램의 차= 20미터의 아마포이고, 40그램의 커피=20미터의 아마포라면, 10그램의 차=40그램의 커피가 된다. 바꾸어 말해, 1그램의 커피에는 가치의 실체인 노동이 1그램의 차에 들어 있는 것의 1/4만 들어 있다.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상품세계로부터 제외된 등가(물) 상품인 아마포에 일반적 등가(물)(universal equivalent)의 성격을 부여한다. 아마포의 현물형태는 모든 상품들의 가치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형태며, 따라서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 아마포의 현물형태는 온갖 인간노동의 눈에 보이는 화신(visible incarnation), 즉 온갖 인간 노동의 사회적 번데기 상태로 간주된다. 직포[아마포를 생산하는 사적 노동]는 이리하여 일반적인 사회적 형태[즉, 다른 모든 종류의 노동과 동등하다는 형태]를 획득한다. 일반적인 가치형태를 구성하는 무수한 등식은 아마포에 실현되어 있는 노동을 다른 상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노동과 차례 차례로 등치시키며, 그리하여 직포를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일반적 현상형태로 만든다. 이처럼 상품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은, 현실적 노동의 모든 구체적 형태와 유용한 속성이 사상(捨象)된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소극적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현실적 노동을 인간노동 일반[인간노동력의 지출]이라는 공통된
성질로 환원시킨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모든 노동생산물을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로 표현하는 일반적 가치형태는,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해 일반적 가치형태가 상품세계의 사회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상품세계 안에서는 노동의 일반적 인간적 성격이 노동의 독자적인 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2.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과 등가형태의 발전 사이의 관계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 정도와 등가형태(等價形態)의 발전 정도는 서로 대응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등가형태의 발전은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의 표현이며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상품의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다른 한 상품으로 하여금 '개별적인‘ 등가(물)로 되게 한다. 상대적 가치의 전개된 형태[즉, 한 상품의 가치를 다른 모든 상품들로 표현하는 것]는 다른 모든 상품들에게 상이한 종류의 '특수한 ’등가(물)이라는 형태를 부여한다. 끝으로, 특수한 한 가지 상품이 '일반적' 등가(물)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타의 모든 상품들이 그 상품을 자기들의 통일적인 보편적 가치표현의 재료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형태 그 자체가 발전함에 따라 가치형태의 두 극 [즉,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사이의 대립도 또한 발전한다.
이미 제1형태-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도 이 대립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고정(fix)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등식을 좌로부터 우로 읽는가 또는 그 반대인가에 따라 아마포와 저고리라는 두 개의 상품극(商品極) 각각은 어떤 때는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고 어떤 때는 등가형태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극의 대립성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아직 곤란하다.
제2형태에서는 한 번에 단 한 가지 상품만이 자기의 상대적 가치를 완전히 전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 다른 모든 상품이 그 한 가지 상품에 대해 등가(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에만, 그 한가지 상품은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미 여기에서는 가치등식-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 =10그램의 차, 또는 =1쿼터의 밀 등등-의 양변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만약 바꾸어 놓는다면, 이 등식의 전체 성격이 변경되어 전개된 가치형태가 일반적 가치형태로 전환된다.
끝으로, 마지막 형태[제3형태]가 상품세계에 일반적 사회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를 주는데, 그것은 상품세계에 속하는 모든 상품[단 하나의 상품을 제외하고]이 등가형태로부터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때에만 그렇다. 따라서 아마포라는 하나의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과의 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즉,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이러한 형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때에만 그렇다.(주석 26: 일반적 . 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가 [마치 자석의 양극이 음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의 대립적인 형태라는 사실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 이 때문에 모든 상품이 동시적으로 직접적 교환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이 생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 모두가 교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품생산을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독립의 최고봉으로 보는 소시민에게는 상품들이 직접적으로 교환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들(이것들은 상품생산에 내재하고 있다) [반대편에서 보면 화폐가 지닌 특권]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다. 이 속물적 유토피아는 프루동(Proudon)의 사회주의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철학의 빈곤? 제1장} 결코 독창적인 것도 아니고 프루동보다 훨씬 이전에 그레이(J. Gray), 브레이(J. F. Bray) 등등에 의해 더 잘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이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과학'(科學)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어떤 학파도 프루동학파처럼 '과학'이라는 말을 남용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상(思想)이 없는 곳에는 사상을 대신해 말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는 상품은, 통일적인 따라서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만약 아마포[또는 일반적 등가(물)로 역할하는 어떤 한 상품]가 동시에 상대적 가치형태에도 참가한다면, 그 상품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20미터의 아마포=20미터의 아마포로 되며, 이것은 가치도 가치량도 표현하지 않는 하나의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일반적 등가(물)의 상대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히려 제3형태를
거꾸로 놓아야 한다. 일반적 등가(물)은 기타의 상품들과 공통된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않으며, 그것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체의 무한한 시리즈로 상대적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되면 전재된 상대적 가치형태[즉, 제2형태]가 등가(물) 상품의 독자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로 나타난다.
3. 일반적 가치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의 이행
일반적 등가형태는 가치 일반의 한 가지 형태다. 따라서 어떤 상품도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어떤 한 상품이 (제3형태에서) 일반적 등가형태로 되는 것은, 그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에 의해 그들의 등가(물)로 선출되어 배제되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될 때에 한해서다. 이러한 배제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품종류에 한정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상품세계의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객관적인 고정성과 일반적인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인 등가형태로 간주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이제 화폐상품(貨幣商品)으로 된다. 다시 말해, 화폐로 기능한다. 상품세계 안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상품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 되며, 그 상품이 그 역할을 사회적으로 독점하게 된다. 제2형태에서 아마포의 특수한 등가(물)로 기능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그리고 제3형태에서 자기들의 상대적 가치를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상품이 이 특권적 지위를 역사적으로 획득했다. 그것은 금(을)이다. 제3의 형태에서 아마포의 자리에 금을 놓으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D. 화폐형태
20미터의 아마포
1개의 저고리
10그램의 차
40그램의 커피 = 2온스의 금
1쿼터 의 밀
1/2톤 철
X량의 상품 A
제1형태에서 제2형태로, 또 제2형태에서 제3형태로 이행하면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반해, 제4형태는 아마포 대신 이제 금이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제3형태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제4형태에서는 금이 [아마포가 제3형태에서 한 역할과 똑같은 역할, 즉]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수행한다. 진보한 것은, 직접적인 일반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즉, 일반적 등가형태]가 이제는 사회적 관습에 의해 최종적으로 상품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형태와 일체화되었다는
점뿐이다.
금이 다른 여러 상품에 대해 화폐로 상대하는 것은, 금이 그들에 대해 이미 이전부터 상품으로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금도 개별적인 교환에서는 개별적 등가(물)로서, 그리고 전개된 교환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등가(물) 상품과 나란히 특수한 등가(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금은 어떤 때는 좁은 범위에서, 어떤 때는 더 넓은 범위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이 상품세계의 가치표현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독점하자마자 화폐상품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금이 화폐상품으로 되었을 때 비로소 제4형태는 제3형태와 구별되었다. 바꾸어 말해, 일반적 가치형태는 화폐형태(貨幣形態)로 전환되었다.
한 상품[예컨대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를 화폐상품으로 기능하는 상품[예컨대 금]에 의해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는 가격형태(價格形態: price form)이다. 그러므로 아마포의 '가격형태'는 다음과 같다.
20미터의 아마포 = 2온스의 금
또는 만약 금 2온스 주화의 명칭이 2원이라면,
20미터의 아마포 = 2원
화폐형태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일반적 등가형태(一般的 等價形態), 따라서 일반적 가치형태[즉, 제3형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제3형태는 거꾸로 하면 제2형태[전개된 가치형태]로 환원되고, 이 제2형태의 구성요소는 제1형태[즉,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다. 그러므로 단순한 상품형태[또는 단순한 '가치'형태]는 화폐형태의 맹아인 것이다.
제 4 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상품은 첫눈에는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하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로 차 있는 기묘한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상품이 사용가치(使用價値)인 한,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든, 인간노동의 생산물로 비로소 이러한 속성들을 획득한다는 관점에서 보든, 상품에는 조금도 신비한 요소가 없다. 인간이 자기의 활동에 의해 자연소재의 형태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변경시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면, 목재로 책상을 만들면 목재의 형태는 변경된다. 그러나 책상은 여전히 목재이고 보통의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책상이 상품으로 나타나자마자 초감각적인 물건으로 되어버린다. 책상은 자기의 발
로 마루 위에 설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에 대해 거꾸로 서기도 하며, [책상이 저절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망상(妄想)을 자기의 나무 두뇌로부터 빚어낸다. (주석 27: 세계 전체가 완전히 정지상태에 있는 것같이 보였던 바로 때 {1848년 혁명의 패배 직후의 반동기} 다른 것들을 고무하기 위해 중국{태평천국의 난}과 책상{독일상류계급의 신비주의}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한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또 가치를 규정하는 요소들의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 여러 가지 유용노동 또는 생산활동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유기체의 기능이고, 각각의 기능은 [그 성격과 형태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인간의 뇌 . 신경 . 근육 . 감각기관의 지출이라는 것은 생리학상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치의 양적 규정의 토대[즉, 위의 지출의 계속시간 또는 노동량]에 관해 말한다면, 노동량(勞動量)은 노동의 질과는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태에서도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사람의 관심사[비록 발전단계가 빠름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주석 28: 고대의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토지 면적은 하루의 노동을 기준으로 측량되었다. 이로부터 에이커는 Tagwerk(또는 Tagwanne) {하루의 일}(jurnale, terrajurnalis 또는 diornalis), Mannwerk {남자 한 사람의 일}, Mannskraft{남자 1인의 힘}, Mannsmaad {남자 1인의 풀베기}, Mannshauet{남자 1인의 수확}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게오르그 루드비히 폰 마우러(Georg Ludwig von Maurer),?마르크. 농지.? 촌락 도시제도 및 공권력의 역사에 대한 서설?, 뮌헨 1854년, p. 129 이하를 보라.) 끝으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서로를 위해 노동하게 되면, 그들의 노동도 또한 사회적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자마자 발생하는 노동생산물의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이 형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종 인간노동이 동등하다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로서 동등한 객관성을 가진다는 구체적 형태를 취하며, 인간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에 의해 측정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의 가치량(價値量)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끝으로,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그 속에서 그들의 노동의 사회적 성적이 증명된다]는 노동생산물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치환(置換: substitution)에 의해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되며,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 [즉, 사회적] 물건으로 된다. 이것은 마치 물건이 시신경에 주는 인상은 시신경 자체의 주관적 흥분으로서가 아니라 눈밖에 존재하는 물건의 객관적 형태로 파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시각의 경우에는 광선이 현실적으로 한 개의 물건[외부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물건[눈]으로 던져진다. 이것은 물리적인 물건들 사이의 하나의 물리적 관계다. 이에 반해,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와 가치관계[이 속에서 상품형태가 나타난다]는 상품의 물리적인 성질이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물적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위해 우리는 몽롱한 종교세계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는 인간 두뇌의 산물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가진 자립적인 인물로 등장해 그들 자신의 사이 그리고 인간과의 사이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찬가지로 상품세계에서는 인간 손의 산물들이 그와 같이 등장한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物神崇拜: fetishism)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부착되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상품세계의 이와 같은 물신숭배는, 앞의 분석이 보여준 바와 같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발생된다.
유용한 물건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이 [서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적 개인의 노동생산물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적 개인들의 노동총계가 사회의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도 오직 이 교환 안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바꾸어 말해, 교환행위가 노동생산물들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들과, [노동생산물을 매개로] 생산자들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적 개인의 노동은 사회의 총노동의 한 요소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자기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개인들이 자기들의 작업에서 맺는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이1]물건을 통한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 그리고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노동생산물은 교환에 의해 비로소 [유용한 물건이라는 감각적으로 다양한 물체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적으로 등등한 객관적 실재, 즉 가치(價値)를 획득한다. 노동생산물이 유용(有用)한 물건과 가치(價値)를 가진 물건으로 분할되는 것은, 교환이 이미 충분히 보급되어 유용한 물건이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따라서 물건의 가치로서의 성격이 이미 생산 중에 고려되는 때에만 실제로 나타난다. 이 순간부터 개별 생산자의 사적 노동은 이중의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한편으로, 사
적 노동은 일정한 유용노동으로서 일정한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켜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총노동의 한 요소로서, 자연발생적인 사회적 분업의 한 분야로서, 자신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 다른 한편, 사적 노동이 개별 생산자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특수한 유용한 사적 노동들이 서로 교환될 수 있으며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서다. 서로 상이한 각종 노동의 완전한 동등화(同等化)는, 우리가 그들의 현실적 차이들을 사상(拾象)함으로써만, 즉 모든 노동을 인간노동력의 지출[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으로 환원(還元)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적 생산자들의 두뇌에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은 실제의 거래[생산물의 교환]에서 나타나는 형태로만 반영된다. 그리하여 사적 노동의 사회적인 유용성은 노동생산물이 타인에게 유용해야 한다는 형태로 반영되며, 각종 노동의 동등성이라는 사회적 성격은 물질적으로 상이한 노동생산물들이 모두 하나의 공통된 성질[즉, 가치]을 가지고 있
다는 형태로 반영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이 단순히 동질의 인간노동의 물적 외피(外皮)이기 때문에 서로 가치로서 관계를 맺는다고 보지 않고. 그 반대로 생각한다. 즉, 사람들은 그들의 상이한 생산물을 교환에서 서로 가치로 등치(等値)함으로써 그들의 상이한 노동을 인간노동으로서 동등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주석 29: 그러므로 갈리아니가 "가치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물적 외피에 숨어 있는 관계라고 첨가했어야 했다(갈리아니[Galiani], ?화폐에 대해?, 쿠스토디 편, ?이탈리아 경제학고전집?, 근세편, 제3권, 밀라노, 1803년, p. 221).) 가치는 자기의 이마에 가치라고 써붙이고 있지는 않다. 가치는 오히려 각각의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象形文字)로 전환시킨다. 뒤에 인간은 이 상형문자의 의미를 해독하여 그들 자신의 사회적 산[가치]의 비밀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유용한 물건이 가치라는 성격을 가지는 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노동생산물은, 그것이 가치인 한, 그 생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물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후일의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발전사에 획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물 자체의 객관적인 성격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상을 결코 없애 버리지는 못한다. 이 특수한 생산형태[상품생산]에서만 타당한 것[즉, 서로 독립된 사적 노동들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은 사적 노동들이 인간노동으로서 동등하다는 데 있으며, 그 사회적 성격이 노동생산물에서 가치라는 존재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상품생산의 관계에 파묻힌 사람들은 [위의 과학적 발견 이전에나 이후에나 마찬가지로] 절대적 타당성-마치 과학에 의해 공기의 구성요소들이 발견된 뒤에도 공기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의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산자들이 교환할 때 실제로 우선 관심을 갖는 것은 자기의 생산물과의 교환으로 타인의 생산물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는가, 즉 어떤 비율로 생산물들이 교환되는가이다. 이 비율이 어느 정도의 관습적인 고정성을 얻게 되면, 그 비율은 노동생산물의 본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1돈의 쇠와 2온스의 금이 가치가 같다는 것은, 1그램의 금과 1그램의 쇠가 [물리적 . 화학적 속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사실과 같은 것처럼 생각한다. 노동생산물의 가치로서의 성격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량으로 작용할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 가치량은 교환자들의 의지 . 예견 행위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이다. 사회 안에서 교환자들 자신의 운동은 그들에게는 물건들의 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들은 이 운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운동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서로 독립적으로 수행되면서도 사회적 분업의 자연발생적인 일환으로 전면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사적 노동이 사회가 요구하는 양적 비율로 끊임없이 조정된다는 과학적 인식이 경험 자체로부터 생기기 위해서는, 상품생산이 완전히 발전해야 한다. 위와 같은 조정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생산물 사이의 우연적인 . 끊임없이 변동하는 교환관계 중에서, 생산물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마치 우리의 머리 위로 집이 무너져 내릴 때의 중력의 법칙과 같이] 규제적인 법칙으로서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기 때문이다.(주석 30: "주기적인 공황을 통해서만 자기를 관철시킬 수 있는 법칙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사자들의 의식과 무관한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국민경제학비판개요?, 아놀드 루게[Arnold Ruge]와 칼 마르크스가 핀집한 ?독불연보?, 파리, 1844년에 있음).) 그러므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량(價値틀)의 결정은 상품의 상대적 가치의 현상적인 운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의 발견은,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크기가 순전히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듯한 외관(外觀)을 제거하기는 하나, 결코 가치의 크기가 결정되는 물적 형태를 철폐하지는 못한다.
인간생활의 여러 형태들에 관한 고찰, 따라서 이 형태들의 과학적 분석은 그것들의 현실의 역사적 발전과는 반대의 길을 밟는다. 왜냐하면, 그 분석은 사후적으로, 따라서 발전과정의 기성(旣成)의 결과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노동생산물에 상품이라는 도장을 찍는 [따라서 상품유통의 전제조건으로 되고 있는] 형태들은, 사람들이 그 형태들의 역사적 성격이 아니라[그들에게는 그것들이 불변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내용과 의미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사회생활의 자연적 형태라는 견고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상품가격의 분석이 가치량의 결정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모든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화폐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상품은 가치라는 성격을 확정시킨 것이다. 그러나 바로 상품세계의 이 완성형태-화폐형태-가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 따라서 개별 노동자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냄으로써 은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저고리나 장화는 [아마포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반적 화신이기 때문에] 아마포와 관계를 맺는다고 말하면, 이 표현은 황당무계하게 들린다. 저고리와 장화의 생산자들이 자기 상품들을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아마포[또는 마찬가지지만 금이나 은]와 관계를 맺게 한다면, 사회의 총노동과 그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관계는 그 생산자들에게는 전혀 황당무계한 개념일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들은 바로 부르주아 경제학의 범주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범주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일정한 사회적 생산양식[상품생산]의 생산관계에서는 사회적으로 타당하며 따라서 객관적인 사고형태(思考形態)다. 그러므로 상품의 모든 신비[즉,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 노동생산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상과 황당무계]는 우리가 다른 생산형태로 이행하자마자 곧 소멸한다.
경제학자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좋아하므로(주석 31: 리카도조차도 자기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리카도는 원시적 어부와 원시적 사냥꾼을 상품소유자로 만들고, 물고기와 짐승을 그들의 교환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시간에 비례해 교환시킨다. 이때 그는 원시적 어부와 원시적 사냥꾼이 1817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통용되고 있던 금리계산표에 의거해 자기들의 노동도구의 가치를 계산한다는 시대착오에 빠지고 있다. ‘오웬(Owen)의 평행사변형' {노동자촌}이 부르주아 사회형태 이외에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사회형태인 듯하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베를린, 1859년, pp. 38-39)), 우선 로빈슨 크루소의 섬생활을 보기로 하자. 로빈슨 크루소는 본성이 검소하지만 각종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며 따라서 도구를 만들고 가구를 제작하고 염소를 길들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 등 각종 유용노동(有用勞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나 그와 유사한 것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로빈슨 크루소는 자기의 온갖 활동을 즐기고 위안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의 생산적 기능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여러 기능들이 동일한 자신의 여러 가지 활동형태, 따라서 인간노동의 여러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절실한 필요 때문에 자기의 시간을 정확하게 여러 가지 기능들 사이에 배분한다. 어떤 기능이 그의 총활동에서 더 큰 시간을 차지하는가는, 목적하는 유용효과를 얻는 데 부닥치는 곤란이 큰가 작은가에 달려 있다. 그는 경험으로 이것을 안다. 난파선에서 시계 . 장부 . 잉크 . 펜을 구해낸 우리의 로빈슨 크루소는 훌륭한 영국사람답게 즉시 자기 자신의 일들을 장부에 적기 시작한다. 그의 장부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유용한 물건들이나, 그것들의 생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작업이
나, 끝으로 이들 생산물의 일정량의 생산에 평균적으로 걸리는 노동시간 등의 명세가 포함되어 있다. 로빈슨 크루소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든 부(富)를 구성하는] 물건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너무나 간단명료하여 누구라도 특별히 머리를 쓰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들은 벌써 가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밝은 섬으로부터 음침한 유럽의 중세(中世)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는 여기에서 독립적인 사람 대신 모두가 의존적이라는 것-농노와 영주, 가신과 제후, 속인과 성직자-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는 인격적 예속이 물질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와 이에 의거하고 있는 생활의 여러 부문들을 특징짓는다. 그러나 바로 인격적 예속관계가 주어진 사회적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노동과 노동생산물은 그것들의 진정한 모습과는 다른 환상적인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다. 노동과 생산물은 사회의 거래에서 부역(賦役)과 공납(貢納)의 모습을 취한다. [상품생산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와 같은 노동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여기에서는 노동의 특수하고 자연적인 형태가 노동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인 것이다. 부역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만, 어떤 농노도 자기의 영주를 위해 지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일정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교회에 바쳐야 하는 10 . 1조는 자기가 성직자로부터
받는 축복에 비하면 훨씬 더 분명하다. 중세 사람들의 상호관계에서 각자가 하는 상이한 역할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든, 개인들이 노동의 수행에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인격적 관계로 나타나며, 물건들[노동생산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지는 않는다.
공동노동[직접적으로 결합된 노동]의 예를 찾아보기 위해 [모든 문화민족의 역사의 초기에 나타
나는] 그러한 노동의 자연발생적 형태로까지 소급해 갈 필요는 없다.(주석 32: "자연발생적인 공동체 소유는 명백히 슬라브적 형태이며, 심지어는 전적으로 러시아적 형태라고까지 하는 가소로운 편견이 최근에 널리 퍼지고 있다. 사실 이것은 로마인 . 게르만인 . 켈트인들에게도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원시적 형태이며, 이 형태의 수많은 표본들은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볼 수 있다. 아시아적, 특히 인도적 공동체소유 형태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는, 자연발생적 원시적 공동체소유의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어떻게 그 붕괴의 여러 가지 형태가 발생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로마적. 게르만적 사적 소유의 여러 가지 원형은 인도적 공동체소유의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같은 책, p 10) ) 가까운 예로 자신의 필요를 위해 곡물. 가축 .실 .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가족의 가부장적 생산이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그들 가족노동[집단노동]의 여러 가지 생산물이지만, 상품으로 서로 상대하지는 않는다. 이 생산물들을 생산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들(즉, 농경 .목축. 방적 . 직포 . 재봉 등)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회적 기능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상품생산에 의거한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자연발생적인 분업체계를 가지는] 가족의 기능들이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의 성별 . 연령별 차이 그리고 계절의 교체와 더불어 변동하는 노동의 자연적 조건이 가족들 사이의 노동배분이나 가족 구성원 각자의 노동시간을 규제한다. 이 경우 각 개인의 노동력은 처음부터 가족의 전체 노동력의 일정한 부분으로 작용할 따름이므로, 개별 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노동 자체의 사회적 특징의 하나로 나타난다.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Association of free men)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적 노동의 모든 특징들이 재현再現)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 그 자신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 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매분은 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따라서 총생산물 중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 몫의 척도가 된다. 개별생산자들이 노동이나 노동생산물과 관련해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생산이나 분배에서 투명하고 단순하다.
상품생산자 사회의 일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는, 생산자들이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따라서 가치로 취급한다는 점, 그리고 이물적 형태에서 자기들의 개별적 사적 노동을 동질적인 인간노동으로 서로 관련지운다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은 상품생산자 사회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종교는 추상적 인간에게 예배드리는 기독교, 특히 그것의 부르주아적 발전형태인 프로테스탄트교나 이신론(理神論) 등의 기독교이다. 고대 아시아적, 고전고대적 생산양식에서는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환, 따라서 인간의 상품생산자로서의 존재는 하나의 종속적인 역할[물론 공동체가 붕괴단계에
들어감에 따라 그 중요성이 증대하긴 했지만]을 했다. 진정한 상업민족은, 에피쿠로스의 신들[상이한 세계 사이의 공간에 존재하며 인간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처럼, 또는 폴란드 사회의 틈새에 끼여 사는 유태인들처럼, 오직 고대세계의 틈새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대의 사회적 생산유기체는 부르주아적 생산유기체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그 생산유기체는 [다른 사람들과의 자연적인 종족관계의 탯줄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미성숙에 입각한 것이거나, 직접적인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생산유기체의 상황은 노동생산력의 낮은 발전단계, 그리고 그에 대응해 물질적 생활의 생산과정 안에서의 제한된 인간관계, 따라서 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제한된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한성이 고대의 자연숭배나 민중신앙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세계의 종교적 반영은,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일상생활의 현실적 관계가 투명하고 이해할 수있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 사회적 생활과정(즉, 물질적 생산과정)이 자유롭게 연합한 인간들에 의한 생산으로 되고 그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여지게 될 떼,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이 벗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는 물질적 토대 또는 일련의 물질적 생존조건을 가져야 하는데, 이 조건 자체도 또한 하나의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의 자연발생적 산물이다.
경제학은 가치와 가치량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분석했고,(주석 33: 리카도의 가치량 분석의 불충분한 점-그래도 그것은 최량의 분석이다-은 이 책의 제3권 및 제4권?잉여가치학설사“에서 보게 될 것이다. 가치 일반에 관해 말한다면, 고전파경제학은 생산물의 가치(價値)로 나타나는 노동과 생산물의 사용가치(使用價値)로 나타나는 노동을 어디에서도 뚜렷하게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못했다. 고전파경제학이 실제로 이러한 구별을 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노동을 질적 측면에서, 또 어떤 때는 양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노동을 단순히 양적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질적 동일성 또는 동등성을, 따라서 각종 노동의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의 환원을 전제한다는 것을 고진파경제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컨대 리카도는 데스튜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v)의 다음과 같은 말에 찬의를 표명하고 있다. "우리의 육체적 및 정신적 능력만이 우리의 본원적 부(富)라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러한 능력의 사용, 즉 어떤 종류의 노동은 우리의 유일한 본원적 재보(財寶)이며, 또 우리가 부(富)라고 부르는 모든 물건들, 즉 가장 순수하게 기호에 맞는 것들뿐만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들이 창조되는 것은 언제나 이 능력의 사용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그 모든 물건들은 그것들을 창조한 노동을 대표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하나의 가치를 갖는다면, 또는 심지어 두 가지 별개의 가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 물건들은 그 가치들을 그것들이 발생한 노동의 가치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도 확실하다"(리카도,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비봉출판사, 365쪽). 우리는 다만 리카도가 데스튜트의 말에 그 자신의 한층 더 깊은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만을 지적해 둔다. 사실, 데스튜트는 한편으로 부를 형성하는 모든 물건들은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을 대표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물건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가치'(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노동의 가치로부터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선 한 상품(이 경우에는 노동)의 가치를 가정하고, 다음에는 또 그것으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규정하려고 하는 속류경제학의 흔한 오류?순환논법?에 빠지고 있다. 그런데 리카도는 데스튜트의 이 말을,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모두에 노동(노동의 가치가 아니고)이 표현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리카도 자신도 이처럼 두 개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이중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가치와 부, 그것들의 상이한 특성“이라는 장[제20장] 전체에 걸쳐 세이(J.B. Say)와 같은 사람들의 시시한 주장을 꼼꼼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가치의 원천이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데스투트가 자기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다른 한편, 가치의 개념에 관해서는 데스튜트가 세이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나 경제학은 어째서 이 내용이 그러한 형식을 취하는가, 즉 어째서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며, 그리고 어째서 노동시간에 의한 노동의 측량(測量)이 노동생산물의 가치량(價値量)으로 표현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주석 34: 고전파경제학의 근본적인 결함의 하나는 상품[특히 상품가치]의 분석으로부터 [가치를 교환가치로 되게 하는] 가치형태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같은 고전파경제학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들조차도 가치형태를 전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또는 상품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고전파경제학이 가치량의 분석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좀더 깊은 곳에 있다. 노동생산물의 가치형태는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가장 추상적인,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바로 이 형태에 의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한 종류가 되며 역사적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만약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사회적 생산의 영원한 자연적 형태라고 잘못 본다면, 필연적으로 가치형태, 따라서 상품형태,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한 화폐형태나 자본형태 등의 특수성까지도 간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시간이 가치량의 척도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경제학자들도 화페[즉, 일반적 등가(물)의 완성된 형태]에 관해서는 매우 괴상하고 모순된 관념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보통의 화폐 정의가 통용되지 않는 은행업의 고찰에서 특히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하여 고전파경제학에 반대해 중상주의가 부활했는데(가닐 등), 이들은 가치에서 오직 사회적 형태만을, 또는 오히려 사회적 형태의 실체없는 외관만을 보고 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 둘 것은, 내가 말하는 고전파경제학은 W. 페티 이래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의 내적 관련을 연구한 모든 경제학을 속류경제학(俗流經濟學: vulgar economics)에 대비시켜 지칭한다는 것이다. 속류경제학은 오적 외관상의 관련 속에서만 헤매면서 가장 조잡한 현상을 부르주아지의 자가수요에 맞도록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미 훨씬 전에 과학적 경제학에 의해 제공된 자료들을 되풀이해 음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속류경제학은 부르주아적 생산 당사자들이 자기들 자신의 세계[그들에게는 가장 좋은 세계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친부하고 독선적인 관념을 현학적으로 체계화하며 또 이 관념을 영원한 진리라고 선포하는 일만을 하고 있다.) [생산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생산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구성[체]에 속하고 있다는 도장이 분명히 적혀있는] 그러한 형태들도 경제학자의 부르주아적 의식에서는 생산적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명한 자연적 필연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경제학이 부르주아 이전의 사회적 생산유기체의 형태들을 취급하는 태도는 대체로 교부(敎父)들이 기독교 이전의 종교를 취급하는 태도와 흡사하다.(주석 35: "경제학자들은 하나의 기묘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제도[인위적인 제도와 자연적인 제도]가 있을 뿐이다. 봉건제도는 인위적인 제도이고, 부르주아제도는 자연적인 제도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두 가지 증류의 종교를 설정하고 있는] 신학자들과 비슷하다. 자기 자신의 종교 이외의 종교는 모두 인간이 발명해낸 것이고, 자기 자신의 종교는 신의 계시인 것이다....그리하여 이때까지는 역사라는 것이 존재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대답“. 1847년, p. 113). 고대 희랍인과 로마인은 오직 약탈에 의해서만 생활했다고 생각하는 바스티아(Bastiat)는 우습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약탈에 의해 살아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약탈할 수 있는 무엇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 약탈의 대상이 끊임 없이 재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희랍인과 로마인도 역시 그들 세계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하나의 생산과정, 즉 하나의 경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부르주아경제가 현대세계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는 바스티아는 노예노동에 입각한 생산양식은 약탈 체제에 입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위험한 근거 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이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까지도 노예노동의 평가를 잘못했었는데 하물며 바스티아와 같은 보잘것없는 경제학자가 어떻게 임금노동의 평가를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나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년)가 나왔을 때 미국의 어떤 독일어 신문이 나에게 제기한 반대를 간단히 반박하려 한다. 그 신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견해[즉, 일정한 생산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생산관계, 간단히 말해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실질적 토대로 해 그 위에 하나의 법률적 .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또한 그 실질적 토대에 조응하는 일정한 형태의 사회적 의식이 생긴다“고 하는 것과,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은 사회적 . 정치적 . 정신적 생활의 일반적 과정을 제약한다"고 하는 것]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대세계에 대해서는 분명히 정당하지만, 카톨릭교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나, 정치가 지배하고 있던 아테네와 로마에 대해서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선 첫째로 놀라운 것은, 중세와 고대세계에 관한 위와 같은 진부한 문구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세도 카톨릭에 의해서는 생활할 수 없었고, 고대세계도 정치에 의해서는 생활할 수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 세계가 자기의 생활을 영위한 방식 그것이 왜 한 경우에는 정치가, 다른 경우에는 카톨릭교가 지배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뿐 아니라, 예컨대 토지소유의 역사가 로마공화국의 이면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공화국의 역사에 그다지 정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또한 [편력기사 (knight errantry) 가 사회의 어떤 경제형태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한 대가는 이미 오래 전에 동키호테가 지불했던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이 상품세계에서 나타나는 물신성[또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의 객관적 현상형태]
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혼란에 빠지고 있는가는, 특히 교환가치의 형성에서 자연의 역할에 관한 지리하고 무의미한 논쟁에서 잘 나타난다. 교환가치는 어떤 물건에 투하된 노동을 표현하는 일정한 사회적 방식이므로 [예컨대 환율 등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소재를 포함할 수가 없다.
상품형태[화폐형태나 자본형태와 구별되고 있다]는 부르주아적 생산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미발달한 형태이므로, 그것은 [비록 오늘날과 같이 지배적 . 특징적인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비교적 일찍부터 출현했으며, 그 때문에 그 물신적 성격은 비교적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인{발달한} 형태에서는 이 단순성이라는 외관까지도 소멸한다. 중금주의(重金主義)의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중금주의자들은 금과 은이 하나의 사회적 생산관계로서의 화폐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금과 은이라는 자연물이 독특한 사회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의 경제학은 거만한 태도로 중금주의를 비웃고 있지만, 그것의 물신숭배성은 그것이 자본을 취급하자마자 아주 뚜렷해지는 것은 아닌가? {제3권 제24장을 참조하라.}지대(地代)는 토지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사회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중농주의자들의 환상이 소멸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 아닌가? {제3권 제38장을 참조하라.}
그러나 너무 앞질러 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상품형태 자체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드는 데 그치려 한다. 만약 상품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使用價置)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모르지만, 사용가치는 물건인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다; 물건인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價値)이다, 우리 자신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교환가치(交換價値)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라고. 그러면 이제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상품의 심정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가치(교환가치)는 물건의 속성이고, 부(富: 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는 필연적으로 교환을 포함하고 있지만 부는 그렇지 않다.“(주석 36: ?경제학의 약간의 용어논쟁에 관한 고찰, 특히 가치와 수요공급에 관해?, 런던, 1821년, p. 16.) "부(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고 가치는 상품의 속성이다. 인간이나 사회는 부유하고. 진주나 금강석은 가치 있는 물건이다....진주나 금강석은 진주나 금강석만큼 가치를 가진다. "(주석 37: 베일리, ?가치의 성질, 척도 및 원인에 관한 비판적 논문?, p. 165)
진주나 금강석 속에서 교환가치를 발견한 화학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이 화학적 실체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예리한 통찰력을 자부하고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물건의 사용가치는 물건의 물질적 속성과는 관계없이 존재하지만, 물건의 가치는 물건으로서의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와 같은 견해[엉터리 견해]를 확증해 주는 것은, 물건의 사용가치는 교환 없이 [즉, 물건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실현되지만, 물건의 가치는 오직 교환에서만 [즉,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서만] 실현된다고 하는 기묘한 사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라도 저 선량한 독베리(Dogberry)가 경비원 시콜에게 가르쳐 준 충고[전혀 말이 되지 않는 충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역자 주: 세익스피어의 희극, ?헛소동?, 제3막, 제3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운명의 덕택이지만, 읽고 쓰는 것은 자연히 알게 된다"라고.(주석 38: 앞의 ?고찰?의 저자나 베일리는, 리카도가 교환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고 그를 비난한다. 사실은 이것과 반대다. 리카도는 [예컨대 금강석이나 진주와 같은] 물건들이 교환가치로서 가지고 있는 외관상의 상대성을 이 외관의 배후에 숨어 있는 그것들의 진정한 관계[즉, 인간노동의 단순한 표현으로서의 그것들의 상대성]로 환원시켰던 것이다. 만약 리카도의 후계자들이 베일리에 대해 조잡하고 적절하지 못한 답변을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리카도 자신에게서 가치와 가치형태[또는 교환가치] 사이의 내적 관련에 관한 아무런 해명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제 2 장
교환과정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상품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물건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만약 상품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그것을 점유할 수 있다.(주석 1: 경건했던 것으로 평판이 난 12세기에도 상품들 중에는 매우 미묘한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그 당시 프랑스의 한 시인은 랑디시장에서 볼 수 있는 상품들 중에 천 . 구두 . 가죽 . 농기구 . 모피 등과 아울러 ‘몸을 파는 여자’까지 들고 있다.) 이 물건들이 상품으로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품의 보호자들은 이 물건들에 자신들의 의지를 담고 있는 인물로 서로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한 상품의 소유자는 다른 상품의 소유자의 동의하에서만, 따라서 각자는 쌍방이 동의하는 하나의 의지행위(意志行爲)를 매개로 해서만,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고 타인의 상품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사적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계약(契約)의 형식을 취하는 이 법적 관계는 [합법적으로 발달한 것이든 아니든] 경제적 관계를 반영하는 두 의지 사이의 관계다. 이 법적 관계[또는 의지 관계]의 내용은 경제적 관계 그 자체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주석 2: 프루동(Proudhon)은 처음에 정의 . 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치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소규모 상품생산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인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理想: ideal)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 분자(分子)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진정한 법칙들을 연구하고 이에 의거해 일정한 과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그 대신 '자연상태'나 '친화성'이라는 '영원한 이념'에 의거해 이러한 상호작용을 개조하려는 화학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고리대(高利貸)는 '영원한 정의', '영원한 공정성', '영원한 상호부조' 및 기타의 '영원한 진리'와 모순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고리대'에 대해 아는 것은, 교부들이 고리대가 '영원한 은총', '영원한 신앙‘, '신의 영원한 의지'와 모순된다고 말했을 때 교부들이 고리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보다 과연 더 많은가?)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만 상품의 대표자, 따라서 소유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제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제적 관계들의 인격화(人格化 personification)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이 경제적 관계들의 담지자(擔持者)로 서로 상대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상품소유자와 상품 사이의 주된 차이는,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체를 오직 자기 자신의 가치의 현상형태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태어날 때부터 평등주의자며 냉소주의자인 상품은, 빠른 어떤 상품과도, 비록 그것이 마리토르네스(Maritornes)보다 더 추한 외모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정신뿐 아니라 몸까지도 교환할 용의를 항상 가지고 있다. 상품은 다른 상품체의 구체적 속성을 파악할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상품소유자가 자기 자신의 다섯 개 이상의 감각으로 보충해 준다. 그의 상품은 자기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상품을 시장에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상품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가치(使用價値)를 가지고 있다. 상품소유자에게는 상품은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담지자[따라서 교환수단]라는 점에서만 직접적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주석 3: "왜냐하면 모든 물건에는 두 개의 용도가 없기 때문이다....그 하나의 용도는 그 물건에 고유한 것이고, 다른 용도는 고유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구두에는, 한편으로 구두로서 신는다는 용도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환될 수 있다는 용도가 있다. 두 가지 모두 구두의 사용방식이다. 왜냐하면, 구두를 자기가 필요로 하는 화폐 또는 식료품과 교환하는 사람까지도 구두를 구두로서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두 고유의 사용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두는 교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C. 일반적 가치형태
1개의 저고리
10그램 차
40그램의 커피 = 20미터의 아마포
1쿼터의 밀
2온스의 금
1/2톤의 철
X량의 상품 A
기타 등등의 상품
1. 가치형태의 변화된 성격
여러 가지 상품들은 자기의 가치를 이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단순하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 한 개의 상품으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 통일적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일한 상품으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단순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일반적이다.
제1형태와 제2형태는 한 상품의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또는 상품체]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다.
제1형태는 1개의 저고리=20미터의 아마포, 10그램의 차=1/2톤의 철 등과 같은 가치등식을 제공했다. 저고리의 가치는 아마포와 동등하고 차의 가치는 쇠와 동등하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저고리와 차의 이러한 가치표현들은 [아마포와 쇠가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것이다. 이 형태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우연적인 때때로의 교환행위에 의해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의 초기 단계에서 뿐이다.
제2형태는 제1형태보다 더 완전하게 한 상품의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저고리의 가치는 아마포 . 쇠 . 차, 요컨대 저고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물건과 동등한 것으로 되어 저고리의 현물형태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는 모든 상품들의 공통된 가치표현은 직접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왜냐하면, 각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다른 모든 상품들이 등가(물)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개된 가치형태는 어떤 특수한 노동생산물[예컨대 가축]이 예외적으로가 아니라 관습적으로 각종 상품들과 교환되는 그때에 비로소 실제로 나타난다.
새로 얻어진 형태[제3형태]는 상품세계의 가치들을 그 세계에서 선발된 한 개의 상품종류[예컨대 아마포]로 표현하며, 그리하여 모든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과 아마포와의 동등성(同等性)을 통해 표현된다. 이제는 어떤 상품의 가치도 아마포와 등등한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될 뿐 아니라 일체의 사용가치로부터 구별되며, 또 바로 그렇게 됨으로써 모든 상품의 가치는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형태에 의해 비로소 상품들은 실제로 가치로 서로 관련맺거나 상호간에 교환가치로 나타나게 된다.
이전의 두 형태는 각 상품의 가치를 단 하나의 다른 종류의 상품으로 표현하거나, 그 상품과는 다른 일련의 많은 상품으로 표현한다. 어느 경우에나 개별상품이 하나의 가치형태를 얻게 되는 것은 말하자면 개별상품의 개인적인 일이고, 개별상품은 다른 상품들의 협력 없이 이 일을 달성한다. 다시 말해, 다른 상품들은 그 상품에 대해 등가(물)이라는 수동적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반적 가치형태는 오로지 상품세계 전체의 공동사업으로 생길 수 있을 뿐이다. 하나의 상품이 자기의 가치를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이 자기들의 가치를 동일한 등가(물)로 표현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새로 등장하는 상품종류도 반드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가치로서의 상품들의 객관적 실재는 순전히 이 물건들의 '사회적 존재'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이 객관적 실재는 상품들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모든 상품들이 아마포와 동등하게 되는 이 형태에서는, 모든 상품들은 이제 질적으로 동등한 것[즉, 가치 일반]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가치량으로 나타난다. 모든 상품들의 가치량이 동일한 재료인 아마포로 표현되기 때문에 서로 비교된다. 예컨대, 10그램의 차= 20미터의 아마포이고, 40그램의 커피=20미터의 아마포라면, 10그램의 차=40그램의 커피가 된다. 바꾸어 말해, 1그램의 커피에는 가치의 실체인 노동이 1그램의 차에 들어 있는 것의 1/4만 들어 있다.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상품세계로부터 제외된 등가(물) 상품인 아마포에 일반적 등가(물)(universal equivalent)의 성격을 부여한다. 아마포의 현물형태는 모든 상품들의 가치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형태며, 따라서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 아마포의 현물형태는 온갖 인간노동의 눈에 보이는 화신(visible incarnation), 즉 온갖 인간 노동의 사회적 번데기 상태로 간주된다. 직포[아마포를 생산하는 사적 노동]는 이리하여 일반적인 사회적 형태[즉, 다른 모든 종류의 노동과 동등하다는 형태]를 획득한다. 일반적인 가치형태를 구성하는 무수한 등식은 아마포에 실현되어 있는 노동을 다른 상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노동과 차례 차례로 등치시키며, 그리하여 직포를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일반적 현상형태로 만든다. 이처럼 상품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은, 현실적 노동의 모든 구체적 형태와 유용한 속성이 사상(捨象)된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소극적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현실적 노동을 인간노동 일반[인간노동력의 지출]이라는 공통된
성질로 환원시킨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모든 노동생산물을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로 표현하는 일반적 가치형태는,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해 일반적 가치형태가 상품세계의 사회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상품세계 안에서는 노동의 일반적 인간적 성격이 노동의 독자적인 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2.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과 등가형태의 발전 사이의 관계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 정도와 등가형태(等價形態)의 발전 정도는 서로 대응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등가형태의 발전은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의 표현이며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상품의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다른 한 상품으로 하여금 '개별적인‘ 등가(물)로 되게 한다. 상대적 가치의 전개된 형태[즉, 한 상품의 가치를 다른 모든 상품들로 표현하는 것]는 다른 모든 상품들에게 상이한 종류의 '특수한 ’등가(물)이라는 형태를 부여한다. 끝으로, 특수한 한 가지 상품이 '일반적' 등가(물)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타의 모든 상품들이 그 상품을 자기들의 통일적인 보편적 가치표현의 재료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형태 그 자체가 발전함에 따라 가치형태의 두 극 [즉,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사이의 대립도 또한 발전한다.
이미 제1형태-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도 이 대립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고정(fix)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등식을 좌로부터 우로 읽는가 또는 그 반대인가에 따라 아마포와 저고리라는 두 개의 상품극(商品極) 각각은 어떤 때는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고 어떤 때는 등가형태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극의 대립성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아직 곤란하다.
제2형태에서는 한 번에 단 한 가지 상품만이 자기의 상대적 가치를 완전히 전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 다른 모든 상품이 그 한 가지 상품에 대해 등가(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에만, 그 한가지 상품은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미 여기에서는 가치등식-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 =10그램의 차, 또는 =1쿼터의 밀 등등-의 양변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만약 바꾸어 놓는다면, 이 등식의 전체 성격이 변경되어 전개된 가치형태가 일반적 가치형태로 전환된다.
끝으로, 마지막 형태[제3형태]가 상품세계에 일반적 사회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를 주는데, 그것은 상품세계에 속하는 모든 상품[단 하나의 상품을 제외하고]이 등가형태로부터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때에만 그렇다. 따라서 아마포라는 하나의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과의 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즉,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이러한 형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때에만 그렇다.(주석 26: 일반적 . 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가 [마치 자석의 양극이 음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의 대립적인 형태라는 사실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 이 때문에 모든 상품이 동시적으로 직접적 교환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이 생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 모두가 교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품생산을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독립의 최고봉으로 보는 소시민에게는 상품들이 직접적으로 교환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들(이것들은 상품생산에 내재하고 있다) [반대편에서 보면 화폐가 지닌 특권]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다. 이 속물적 유토피아는 프루동(Proudon)의 사회주의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철학의 빈곤? 제1장} 결코 독창적인 것도 아니고 프루동보다 훨씬 이전에 그레이(J. Gray), 브레이(J. F. Bray) 등등에 의해 더 잘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이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과학'(科學)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어떤 학파도 프루동학파처럼 '과학'이라는 말을 남용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상(思想)이 없는 곳에는 사상을 대신해 말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는 상품은, 통일적인 따라서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만약 아마포[또는 일반적 등가(물)로 역할하는 어떤 한 상품]가 동시에 상대적 가치형태에도 참가한다면, 그 상품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20미터의 아마포=20미터의 아마포로 되며, 이것은 가치도 가치량도 표현하지 않는 하나의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일반적 등가(물)의 상대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히려 제3형태를
거꾸로 놓아야 한다. 일반적 등가(물)은 기타의 상품들과 공통된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않으며, 그것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체의 무한한 시리즈로 상대적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되면 전재된 상대적 가치형태[즉, 제2형태]가 등가(물) 상품의 독자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로 나타난다.
3. 일반적 가치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의 이행
일반적 등가형태는 가치 일반의 한 가지 형태다. 따라서 어떤 상품도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어떤 한 상품이 (제3형태에서) 일반적 등가형태로 되는 것은, 그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에 의해 그들의 등가(물)로 선출되어 배제되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될 때에 한해서다. 이러한 배제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품종류에 한정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상품세계의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객관적인 고정성과 일반적인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인 등가형태로 간주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이제 화폐상품(貨幣商品)으로 된다. 다시 말해, 화폐로 기능한다. 상품세계 안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상품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 되며, 그 상품이 그 역할을 사회적으로 독점하게 된다. 제2형태에서 아마포의 특수한 등가(물)로 기능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그리고 제3형태에서 자기들의 상대적 가치를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상품이 이 특권적 지위를 역사적으로 획득했다. 그것은 금(을)이다. 제3의 형태에서 아마포의 자리에 금을 놓으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D. 화폐형태
20미터의 아마포
1개의 저고리
10그램의 차
40그램의 커피 = 2온스의 금
1쿼터 의 밀
1/2톤 철
X량의 상품 A
제1형태에서 제2형태로, 또 제2형태에서 제3형태로 이행하면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반해, 제4형태는 아마포 대신 이제 금이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제3형태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제4형태에서는 금이 [아마포가 제3형태에서 한 역할과 똑같은 역할, 즉]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수행한다. 진보한 것은, 직접적인 일반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즉, 일반적 등가형태]가 이제는 사회적 관습에 의해 최종적으로 상품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형태와 일체화되었다는
점뿐이다.
금이 다른 여러 상품에 대해 화폐로 상대하는 것은, 금이 그들에 대해 이미 이전부터 상품으로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금도 개별적인 교환에서는 개별적 등가(물)로서, 그리고 전개된 교환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등가(물) 상품과 나란히 특수한 등가(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금은 어떤 때는 좁은 범위에서, 어떤 때는 더 넓은 범위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이 상품세계의 가치표현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독점하자마자 화폐상품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금이 화폐상품으로 되었을 때 비로소 제4형태는 제3형태와 구별되었다. 바꾸어 말해, 일반적 가치형태는 화폐형태(貨幣形態)로 전환되었다.
한 상품[예컨대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를 화폐상품으로 기능하는 상품[예컨대 금]에 의해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는 가격형태(價格形態: price form)이다. 그러므로 아마포의 '가격형태'는 다음과 같다.
20미터의 아마포 = 2온스의 금
또는 만약 금 2온스 주화의 명칭이 2원이라면,
20미터의 아마포 = 2원
화폐형태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일반적 등가형태(一般的 等價形態), 따라서 일반적 가치형태[즉, 제3형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제3형태는 거꾸로 하면 제2형태[전개된 가치형태]로 환원되고, 이 제2형태의 구성요소는 제1형태[즉,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다. 그러므로 단순한 상품형태[또는 단순한 '가치'형태]는 화폐형태의 맹아인 것이다.
제 4 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상품은 첫눈에는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하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로 차 있는 기묘한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상품이 사용가치(使用價値)인 한,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든, 인간노동의 생산물로 비로소 이러한 속성들을 획득한다는 관점에서 보든, 상품에는 조금도 신비한 요소가 없다. 인간이 자기의 활동에 의해 자연소재의 형태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변경시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면, 목재로 책상을 만들면 목재의 형태는 변경된다. 그러나 책상은 여전히 목재이고 보통의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책상이 상품으로 나타나자마자 초감각적인 물건으로 되어버린다. 책상은 자기의 발
로 마루 위에 설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에 대해 거꾸로 서기도 하며, [책상이 저절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망상(妄想)을 자기의 나무 두뇌로부터 빚어낸다. (주석 27: 세계 전체가 완전히 정지상태에 있는 것같이 보였던 바로 때 {1848년 혁명의 패배 직후의 반동기} 다른 것들을 고무하기 위해 중국{태평천국의 난}과 책상{독일상류계급의 신비주의}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한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또 가치를 규정하는 요소들의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 여러 가지 유용노동 또는 생산활동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유기체의 기능이고, 각각의 기능은 [그 성격과 형태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인간의 뇌 . 신경 . 근육 . 감각기관의 지출이라는 것은 생리학상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치의 양적 규정의 토대[즉, 위의 지출의 계속시간 또는 노동량]에 관해 말한다면, 노동량(勞動量)은 노동의 질과는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태에서도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사람의 관심사[비록 발전단계가 빠름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주석 28: 고대의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토지 면적은 하루의 노동을 기준으로 측량되었다. 이로부터 에이커는 Tagwerk(또는 Tagwanne) {하루의 일}(jurnale, terrajurnalis 또는 diornalis), Mannwerk {남자 한 사람의 일}, Mannskraft{남자 1인의 힘}, Mannsmaad {남자 1인의 풀베기}, Mannshauet{남자 1인의 수확}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게오르그 루드비히 폰 마우러(Georg Ludwig von Maurer),?마르크. 농지.? 촌락 도시제도 및 공권력의 역사에 대한 서설?, 뮌헨 1854년, p. 129 이하를 보라.) 끝으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서로를 위해 노동하게 되면, 그들의 노동도 또한 사회적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자마자 발생하는 노동생산물의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이 형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종 인간노동이 동등하다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로서 동등한 객관성을 가진다는 구체적 형태를 취하며, 인간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에 의해 측정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의 가치량(價値量)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끝으로,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그 속에서 그들의 노동의 사회적 성적이 증명된다]는 노동생산물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치환(置換: substitution)에 의해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되며,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 [즉, 사회적] 물건으로 된다. 이것은 마치 물건이 시신경에 주는 인상은 시신경 자체의 주관적 흥분으로서가 아니라 눈밖에 존재하는 물건의 객관적 형태로 파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시각의 경우에는 광선이 현실적으로 한 개의 물건[외부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물건[눈]으로 던져진다. 이것은 물리적인 물건들 사이의 하나의 물리적 관계다. 이에 반해,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와 가치관계[이 속에서 상품형태가 나타난다]는 상품의 물리적인 성질이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물적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위해 우리는 몽롱한 종교세계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는 인간 두뇌의 산물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가진 자립적인 인물로 등장해 그들 자신의 사이 그리고 인간과의 사이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찬가지로 상품세계에서는 인간 손의 산물들이 그와 같이 등장한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物神崇拜: fetishism)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부착되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상품세계의 이와 같은 물신숭배는, 앞의 분석이 보여준 바와 같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발생된다.
유용한 물건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이 [서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적 개인의 노동생산물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적 개인들의 노동총계가 사회의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도 오직 이 교환 안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바꾸어 말해, 교환행위가 노동생산물들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들과, [노동생산물을 매개로] 생산자들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적 개인의 노동은 사회의 총노동의 한 요소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자기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개인들이 자기들의 작업에서 맺는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이1]물건을 통한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 그리고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노동생산물은 교환에 의해 비로소 [유용한 물건이라는 감각적으로 다양한 물체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적으로 등등한 객관적 실재, 즉 가치(價値)를 획득한다. 노동생산물이 유용(有用)한 물건과 가치(價値)를 가진 물건으로 분할되는 것은, 교환이 이미 충분히 보급되어 유용한 물건이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따라서 물건의 가치로서의 성격이 이미 생산 중에 고려되는 때에만 실제로 나타난다. 이 순간부터 개별 생산자의 사적 노동은 이중의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한편으로, 사
적 노동은 일정한 유용노동으로서 일정한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켜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총노동의 한 요소로서, 자연발생적인 사회적 분업의 한 분야로서, 자신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 다른 한편, 사적 노동이 개별 생산자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특수한 유용한 사적 노동들이 서로 교환될 수 있으며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서다. 서로 상이한 각종 노동의 완전한 동등화(同等化)는, 우리가 그들의 현실적 차이들을 사상(拾象)함으로써만, 즉 모든 노동을 인간노동력의 지출[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으로 환원(還元)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적 생산자들의 두뇌에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은 실제의 거래[생산물의 교환]에서 나타나는 형태로만 반영된다. 그리하여 사적 노동의 사회적인 유용성은 노동생산물이 타인에게 유용해야 한다는 형태로 반영되며, 각종 노동의 동등성이라는 사회적 성격은 물질적으로 상이한 노동생산물들이 모두 하나의 공통된 성질[즉, 가치]을 가지고 있
다는 형태로 반영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이 단순히 동질의 인간노동의 물적 외피(外皮)이기 때문에 서로 가치로서 관계를 맺는다고 보지 않고. 그 반대로 생각한다. 즉, 사람들은 그들의 상이한 생산물을 교환에서 서로 가치로 등치(等値)함으로써 그들의 상이한 노동을 인간노동으로서 동등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주석 29: 그러므로 갈리아니가 "가치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물적 외피에 숨어 있는 관계라고 첨가했어야 했다(갈리아니[Galiani], ?화폐에 대해?, 쿠스토디 편, ?이탈리아 경제학고전집?, 근세편, 제3권, 밀라노, 1803년, p. 221).) 가치는 자기의 이마에 가치라고 써붙이고 있지는 않다. 가치는 오히려 각각의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象形文字)로 전환시킨다. 뒤에 인간은 이 상형문자의 의미를 해독하여 그들 자신의 사회적 산[가치]의 비밀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유용한 물건이 가치라는 성격을 가지는 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노동생산물은, 그것이 가치인 한, 그 생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물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후일의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발전사에 획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물 자체의 객관적인 성격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상을 결코 없애 버리지는 못한다. 이 특수한 생산형태[상품생산]에서만 타당한 것[즉, 서로 독립된 사적 노동들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은 사적 노동들이 인간노동으로서 동등하다는 데 있으며, 그 사회적 성격이 노동생산물에서 가치라는 존재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상품생산의 관계에 파묻힌 사람들은 [위의 과학적 발견 이전에나 이후에나 마찬가지로] 절대적 타당성-마치 과학에 의해 공기의 구성요소들이 발견된 뒤에도 공기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의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산자들이 교환할 때 실제로 우선 관심을 갖는 것은 자기의 생산물과의 교환으로 타인의 생산물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는가, 즉 어떤 비율로 생산물들이 교환되는가이다. 이 비율이 어느 정도의 관습적인 고정성을 얻게 되면, 그 비율은 노동생산물의 본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1돈의 쇠와 2온스의 금이 가치가 같다는 것은, 1그램의 금과 1그램의 쇠가 [물리적 . 화학적 속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사실과 같은 것처럼 생각한다. 노동생산물의 가치로서의 성격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량으로 작용할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 가치량은 교환자들의 의지 . 예견 행위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이다. 사회 안에서 교환자들 자신의 운동은 그들에게는 물건들의 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들은 이 운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운동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서로 독립적으로 수행되면서도 사회적 분업의 자연발생적인 일환으로 전면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사적 노동이 사회가 요구하는 양적 비율로 끊임없이 조정된다는 과학적 인식이 경험 자체로부터 생기기 위해서는, 상품생산이 완전히 발전해야 한다. 위와 같은 조정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생산물 사이의 우연적인 . 끊임없이 변동하는 교환관계 중에서, 생산물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마치 우리의 머리 위로 집이 무너져 내릴 때의 중력의 법칙과 같이] 규제적인 법칙으로서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기 때문이다.(주석 30: "주기적인 공황을 통해서만 자기를 관철시킬 수 있는 법칙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사자들의 의식과 무관한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국민경제학비판개요?, 아놀드 루게[Arnold Ruge]와 칼 마르크스가 핀집한 ?독불연보?, 파리, 1844년에 있음).) 그러므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량(價値틀)의 결정은 상품의 상대적 가치의 현상적인 운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의 발견은,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크기가 순전히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듯한 외관(外觀)을 제거하기는 하나, 결코 가치의 크기가 결정되는 물적 형태를 철폐하지는 못한다.
인간생활의 여러 형태들에 관한 고찰, 따라서 이 형태들의 과학적 분석은 그것들의 현실의 역사적 발전과는 반대의 길을 밟는다. 왜냐하면, 그 분석은 사후적으로, 따라서 발전과정의 기성(旣成)의 결과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노동생산물에 상품이라는 도장을 찍는 [따라서 상품유통의 전제조건으로 되고 있는] 형태들은, 사람들이 그 형태들의 역사적 성격이 아니라[그들에게는 그것들이 불변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내용과 의미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사회생활의 자연적 형태라는 견고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상품가격의 분석이 가치량의 결정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모든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화폐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상품은 가치라는 성격을 확정시킨 것이다. 그러나 바로 상품세계의 이 완성형태-화폐형태-가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 따라서 개별 노동자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냄으로써 은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저고리나 장화는 [아마포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반적 화신이기 때문에] 아마포와 관계를 맺는다고 말하면, 이 표현은 황당무계하게 들린다. 저고리와 장화의 생산자들이 자기 상품들을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아마포[또는 마찬가지지만 금이나 은]와 관계를 맺게 한다면, 사회의 총노동과 그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관계는 그 생산자들에게는 전혀 황당무계한 개념일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들은 바로 부르주아 경제학의 범주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범주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일정한 사회적 생산양식[상품생산]의 생산관계에서는 사회적으로 타당하며 따라서 객관적인 사고형태(思考形態)다. 그러므로 상품의 모든 신비[즉,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 노동생산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상과 황당무계]는 우리가 다른 생산형태로 이행하자마자 곧 소멸한다.
경제학자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좋아하므로(주석 31: 리카도조차도 자기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리카도는 원시적 어부와 원시적 사냥꾼을 상품소유자로 만들고, 물고기와 짐승을 그들의 교환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시간에 비례해 교환시킨다. 이때 그는 원시적 어부와 원시적 사냥꾼이 1817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통용되고 있던 금리계산표에 의거해 자기들의 노동도구의 가치를 계산한다는 시대착오에 빠지고 있다. ‘오웬(Owen)의 평행사변형' {노동자촌}이 부르주아 사회형태 이외에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사회형태인 듯하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베를린, 1859년, pp. 38-39)), 우선 로빈슨 크루소의 섬생활을 보기로 하자. 로빈슨 크루소는 본성이 검소하지만 각종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며 따라서 도구를 만들고 가구를 제작하고 염소를 길들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 등 각종 유용노동(有用勞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나 그와 유사한 것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로빈슨 크루소는 자기의 온갖 활동을 즐기고 위안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의 생산적 기능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여러 기능들이 동일한 자신의 여러 가지 활동형태, 따라서 인간노동의 여러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절실한 필요 때문에 자기의 시간을 정확하게 여러 가지 기능들 사이에 배분한다. 어떤 기능이 그의 총활동에서 더 큰 시간을 차지하는가는, 목적하는 유용효과를 얻는 데 부닥치는 곤란이 큰가 작은가에 달려 있다. 그는 경험으로 이것을 안다. 난파선에서 시계 . 장부 . 잉크 . 펜을 구해낸 우리의 로빈슨 크루소는 훌륭한 영국사람답게 즉시 자기 자신의 일들을 장부에 적기 시작한다. 그의 장부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유용한 물건들이나, 그것들의 생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작업이
나, 끝으로 이들 생산물의 일정량의 생산에 평균적으로 걸리는 노동시간 등의 명세가 포함되어 있다. 로빈슨 크루소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든 부(富)를 구성하는] 물건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너무나 간단명료하여 누구라도 특별히 머리를 쓰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들은 벌써 가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밝은 섬으로부터 음침한 유럽의 중세(中世)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는 여기에서 독립적인 사람 대신 모두가 의존적이라는 것-농노와 영주, 가신과 제후, 속인과 성직자-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는 인격적 예속이 물질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와 이에 의거하고 있는 생활의 여러 부문들을 특징짓는다. 그러나 바로 인격적 예속관계가 주어진 사회적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노동과 노동생산물은 그것들의 진정한 모습과는 다른 환상적인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다. 노동과 생산물은 사회의 거래에서 부역(賦役)과 공납(貢納)의 모습을 취한다. [상품생산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와 같은 노동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여기에서는 노동의 특수하고 자연적인 형태가 노동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인 것이다. 부역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만, 어떤 농노도 자기의 영주를 위해 지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일정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교회에 바쳐야 하는 10 . 1조는 자기가 성직자로부터
받는 축복에 비하면 훨씬 더 분명하다. 중세 사람들의 상호관계에서 각자가 하는 상이한 역할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든, 개인들이 노동의 수행에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인격적 관계로 나타나며, 물건들[노동생산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지는 않는다.
공동노동[직접적으로 결합된 노동]의 예를 찾아보기 위해 [모든 문화민족의 역사의 초기에 나타
나는] 그러한 노동의 자연발생적 형태로까지 소급해 갈 필요는 없다.(주석 32: "자연발생적인 공동체 소유는 명백히 슬라브적 형태이며, 심지어는 전적으로 러시아적 형태라고까지 하는 가소로운 편견이 최근에 널리 퍼지고 있다. 사실 이것은 로마인 . 게르만인 . 켈트인들에게도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원시적 형태이며, 이 형태의 수많은 표본들은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볼 수 있다. 아시아적, 특히 인도적 공동체소유 형태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는, 자연발생적 원시적 공동체소유의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어떻게 그 붕괴의 여러 가지 형태가 발생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로마적. 게르만적 사적 소유의 여러 가지 원형은 인도적 공동체소유의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같은 책, p 10) ) 가까운 예로 자신의 필요를 위해 곡물. 가축 .실 .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가족의 가부장적 생산이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그들 가족노동[집단노동]의 여러 가지 생산물이지만, 상품으로 서로 상대하지는 않는다. 이 생산물들을 생산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들(즉, 농경 .목축. 방적 . 직포 . 재봉 등)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회적 기능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상품생산에 의거한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자연발생적인 분업체계를 가지는] 가족의 기능들이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의 성별 . 연령별 차이 그리고 계절의 교체와 더불어 변동하는 노동의 자연적 조건이 가족들 사이의 노동배분이나 가족 구성원 각자의 노동시간을 규제한다. 이 경우 각 개인의 노동력은 처음부터 가족의 전체 노동력의 일정한 부분으로 작용할 따름이므로, 개별 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노동 자체의 사회적 특징의 하나로 나타난다.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Association of free men)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적 노동의 모든 특징들이 재현再現)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 그 자신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 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매분은 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따라서 총생산물 중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 몫의 척도가 된다. 개별생산자들이 노동이나 노동생산물과 관련해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생산이나 분배에서 투명하고 단순하다.
상품생산자 사회의 일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는, 생산자들이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따라서 가치로 취급한다는 점, 그리고 이물적 형태에서 자기들의 개별적 사적 노동을 동질적인 인간노동으로 서로 관련지운다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은 상품생산자 사회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종교는 추상적 인간에게 예배드리는 기독교, 특히 그것의 부르주아적 발전형태인 프로테스탄트교나 이신론(理神論) 등의 기독교이다. 고대 아시아적, 고전고대적 생산양식에서는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환, 따라서 인간의 상품생산자로서의 존재는 하나의 종속적인 역할[물론 공동체가 붕괴단계에
들어감에 따라 그 중요성이 증대하긴 했지만]을 했다. 진정한 상업민족은, 에피쿠로스의 신들[상이한 세계 사이의 공간에 존재하며 인간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처럼, 또는 폴란드 사회의 틈새에 끼여 사는 유태인들처럼, 오직 고대세계의 틈새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대의 사회적 생산유기체는 부르주아적 생산유기체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그 생산유기체는 [다른 사람들과의 자연적인 종족관계의 탯줄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미성숙에 입각한 것이거나, 직접적인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생산유기체의 상황은 노동생산력의 낮은 발전단계, 그리고 그에 대응해 물질적 생활의 생산과정 안에서의 제한된 인간관계, 따라서 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제한된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한성이 고대의 자연숭배나 민중신앙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세계의 종교적 반영은,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일상생활의 현실적 관계가 투명하고 이해할 수있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 사회적 생활과정(즉, 물질적 생산과정)이 자유롭게 연합한 인간들에 의한 생산으로 되고 그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여지게 될 떼,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이 벗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는 물질적 토대 또는 일련의 물질적 생존조건을 가져야 하는데, 이 조건 자체도 또한 하나의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의 자연발생적 산물이다.
경제학은 가치와 가치량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분석했고,(주석 33: 리카도의 가치량 분석의 불충분한 점-그래도 그것은 최량의 분석이다-은 이 책의 제3권 및 제4권?잉여가치학설사“에서 보게 될 것이다. 가치 일반에 관해 말한다면, 고전파경제학은 생산물의 가치(價値)로 나타나는 노동과 생산물의 사용가치(使用價値)로 나타나는 노동을 어디에서도 뚜렷하게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못했다. 고전파경제학이 실제로 이러한 구별을 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노동을 질적 측면에서, 또 어떤 때는 양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노동을 단순히 양적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질적 동일성 또는 동등성을, 따라서 각종 노동의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의 환원을 전제한다는 것을 고진파경제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컨대 리카도는 데스튜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v)의 다음과 같은 말에 찬의를 표명하고 있다. "우리의 육체적 및 정신적 능력만이 우리의 본원적 부(富)라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러한 능력의 사용, 즉 어떤 종류의 노동은 우리의 유일한 본원적 재보(財寶)이며, 또 우리가 부(富)라고 부르는 모든 물건들, 즉 가장 순수하게 기호에 맞는 것들뿐만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들이 창조되는 것은 언제나 이 능력의 사용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그 모든 물건들은 그것들을 창조한 노동을 대표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하나의 가치를 갖는다면, 또는 심지어 두 가지 별개의 가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 물건들은 그 가치들을 그것들이 발생한 노동의 가치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도 확실하다"(리카도,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비봉출판사, 365쪽). 우리는 다만 리카도가 데스튜트의 말에 그 자신의 한층 더 깊은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만을 지적해 둔다. 사실, 데스튜트는 한편으로 부를 형성하는 모든 물건들은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을 대표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물건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가치'(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노동의 가치로부터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선 한 상품(이 경우에는 노동)의 가치를 가정하고, 다음에는 또 그것으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규정하려고 하는 속류경제학의 흔한 오류?순환논법?에 빠지고 있다. 그런데 리카도는 데스튜트의 이 말을,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모두에 노동(노동의 가치가 아니고)이 표현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리카도 자신도 이처럼 두 개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이중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가치와 부, 그것들의 상이한 특성“이라는 장[제20장] 전체에 걸쳐 세이(J.B. Say)와 같은 사람들의 시시한 주장을 꼼꼼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가치의 원천이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데스투트가 자기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다른 한편, 가치의 개념에 관해서는 데스튜트가 세이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나 경제학은 어째서 이 내용이 그러한 형식을 취하는가, 즉 어째서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며, 그리고 어째서 노동시간에 의한 노동의 측량(測量)이 노동생산물의 가치량(價値量)으로 표현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주석 34: 고전파경제학의 근본적인 결함의 하나는 상품[특히 상품가치]의 분석으로부터 [가치를 교환가치로 되게 하는] 가치형태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같은 고전파경제학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들조차도 가치형태를 전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또는 상품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고전파경제학이 가치량의 분석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좀더 깊은 곳에 있다. 노동생산물의 가치형태는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가장 추상적인,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바로 이 형태에 의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한 종류가 되며 역사적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만약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사회적 생산의 영원한 자연적 형태라고 잘못 본다면, 필연적으로 가치형태, 따라서 상품형태,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한 화폐형태나 자본형태 등의 특수성까지도 간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시간이 가치량의 척도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경제학자들도 화페[즉, 일반적 등가(물)의 완성된 형태]에 관해서는 매우 괴상하고 모순된 관념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보통의 화폐 정의가 통용되지 않는 은행업의 고찰에서 특히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하여 고전파경제학에 반대해 중상주의가 부활했는데(가닐 등), 이들은 가치에서 오직 사회적 형태만을, 또는 오히려 사회적 형태의 실체없는 외관만을 보고 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 둘 것은, 내가 말하는 고전파경제학은 W. 페티 이래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의 내적 관련을 연구한 모든 경제학을 속류경제학(俗流經濟學: vulgar economics)에 대비시켜 지칭한다는 것이다. 속류경제학은 오적 외관상의 관련 속에서만 헤매면서 가장 조잡한 현상을 부르주아지의 자가수요에 맞도록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미 훨씬 전에 과학적 경제학에 의해 제공된 자료들을 되풀이해 음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속류경제학은 부르주아적 생산 당사자들이 자기들 자신의 세계[그들에게는 가장 좋은 세계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친부하고 독선적인 관념을 현학적으로 체계화하며 또 이 관념을 영원한 진리라고 선포하는 일만을 하고 있다.) [생산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생산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구성[체]에 속하고 있다는 도장이 분명히 적혀있는] 그러한 형태들도 경제학자의 부르주아적 의식에서는 생산적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명한 자연적 필연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경제학이 부르주아 이전의 사회적 생산유기체의 형태들을 취급하는 태도는 대체로 교부(敎父)들이 기독교 이전의 종교를 취급하는 태도와 흡사하다.(주석 35: "경제학자들은 하나의 기묘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제도[인위적인 제도와 자연적인 제도]가 있을 뿐이다. 봉건제도는 인위적인 제도이고, 부르주아제도는 자연적인 제도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두 가지 증류의 종교를 설정하고 있는] 신학자들과 비슷하다. 자기 자신의 종교 이외의 종교는 모두 인간이 발명해낸 것이고, 자기 자신의 종교는 신의 계시인 것이다....그리하여 이때까지는 역사라는 것이 존재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대답“. 1847년, p. 113). 고대 희랍인과 로마인은 오직 약탈에 의해서만 생활했다고 생각하는 바스티아(Bastiat)는 우습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약탈에 의해 살아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약탈할 수 있는 무엇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 약탈의 대상이 끊임 없이 재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희랍인과 로마인도 역시 그들 세계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하나의 생산과정, 즉 하나의 경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부르주아경제가 현대세계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는 바스티아는 노예노동에 입각한 생산양식은 약탈 체제에 입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위험한 근거 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이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까지도 노예노동의 평가를 잘못했었는데 하물며 바스티아와 같은 보잘것없는 경제학자가 어떻게 임금노동의 평가를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나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년)가 나왔을 때 미국의 어떤 독일어 신문이 나에게 제기한 반대를 간단히 반박하려 한다. 그 신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견해[즉, 일정한 생산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생산관계, 간단히 말해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실질적 토대로 해 그 위에 하나의 법률적 .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또한 그 실질적 토대에 조응하는 일정한 형태의 사회적 의식이 생긴다“고 하는 것과,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은 사회적 . 정치적 . 정신적 생활의 일반적 과정을 제약한다"고 하는 것]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대세계에 대해서는 분명히 정당하지만, 카톨릭교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나, 정치가 지배하고 있던 아테네와 로마에 대해서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선 첫째로 놀라운 것은, 중세와 고대세계에 관한 위와 같은 진부한 문구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세도 카톨릭에 의해서는 생활할 수 없었고, 고대세계도 정치에 의해서는 생활할 수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 세계가 자기의 생활을 영위한 방식 그것이 왜 한 경우에는 정치가, 다른 경우에는 카톨릭교가 지배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뿐 아니라, 예컨대 토지소유의 역사가 로마공화국의 이면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공화국의 역사에 그다지 정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또한 [편력기사 (knight errantry) 가 사회의 어떤 경제형태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한 대가는 이미 오래 전에 동키호테가 지불했던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이 상품세계에서 나타나는 물신성[또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의 객관적 현상형태]
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혼란에 빠지고 있는가는, 특히 교환가치의 형성에서 자연의 역할에 관한 지리하고 무의미한 논쟁에서 잘 나타난다. 교환가치는 어떤 물건에 투하된 노동을 표현하는 일정한 사회적 방식이므로 [예컨대 환율 등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소재를 포함할 수가 없다.
상품형태[화폐형태나 자본형태와 구별되고 있다]는 부르주아적 생산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미발달한 형태이므로, 그것은 [비록 오늘날과 같이 지배적 . 특징적인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비교적 일찍부터 출현했으며, 그 때문에 그 물신적 성격은 비교적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인{발달한} 형태에서는 이 단순성이라는 외관까지도 소멸한다. 중금주의(重金主義)의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중금주의자들은 금과 은이 하나의 사회적 생산관계로서의 화폐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금과 은이라는 자연물이 독특한 사회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의 경제학은 거만한 태도로 중금주의를 비웃고 있지만, 그것의 물신숭배성은 그것이 자본을 취급하자마자 아주 뚜렷해지는 것은 아닌가? {제3권 제24장을 참조하라.}지대(地代)는 토지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사회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중농주의자들의 환상이 소멸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 아닌가? {제3권 제38장을 참조하라.}
그러나 너무 앞질러 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상품형태 자체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드는 데 그치려 한다. 만약 상품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使用價置)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모르지만, 사용가치는 물건인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다; 물건인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價値)이다, 우리 자신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교환가치(交換價値)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라고. 그러면 이제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상품의 심정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가치(교환가치)는 물건의 속성이고, 부(富: 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는 필연적으로 교환을 포함하고 있지만 부는 그렇지 않다.“(주석 36: ?경제학의 약간의 용어논쟁에 관한 고찰, 특히 가치와 수요공급에 관해?, 런던, 1821년, p. 16.) "부(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고 가치는 상품의 속성이다. 인간이나 사회는 부유하고. 진주나 금강석은 가치 있는 물건이다....진주나 금강석은 진주나 금강석만큼 가치를 가진다. "(주석 37: 베일리, ?가치의 성질, 척도 및 원인에 관한 비판적 논문?, p. 165)
진주나 금강석 속에서 교환가치를 발견한 화학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이 화학적 실체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예리한 통찰력을 자부하고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물건의 사용가치는 물건의 물질적 속성과는 관계없이 존재하지만, 물건의 가치는 물건으로서의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와 같은 견해[엉터리 견해]를 확증해 주는 것은, 물건의 사용가치는 교환 없이 [즉, 물건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실현되지만, 물건의 가치는 오직 교환에서만 [즉,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서만] 실현된다고 하는 기묘한 사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라도 저 선량한 독베리(Dogberry)가 경비원 시콜에게 가르쳐 준 충고[전혀 말이 되지 않는 충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역자 주: 세익스피어의 희극, ?헛소동?, 제3막, 제3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운명의 덕택이지만, 읽고 쓰는 것은 자연히 알게 된다"라고.(주석 38: 앞의 ?고찰?의 저자나 베일리는, 리카도가 교환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고 그를 비난한다. 사실은 이것과 반대다. 리카도는 [예컨대 금강석이나 진주와 같은] 물건들이 교환가치로서 가지고 있는 외관상의 상대성을 이 외관의 배후에 숨어 있는 그것들의 진정한 관계[즉, 인간노동의 단순한 표현으로서의 그것들의 상대성]로 환원시켰던 것이다. 만약 리카도의 후계자들이 베일리에 대해 조잡하고 적절하지 못한 답변을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리카도 자신에게서 가치와 가치형태[또는 교환가치] 사이의 내적 관련에 관한 아무런 해명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제 2 장
교환과정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상품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물건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만약 상품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그것을 점유할 수 있다.(주석 1: 경건했던 것으로 평판이 난 12세기에도 상품들 중에는 매우 미묘한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그 당시 프랑스의 한 시인은 랑디시장에서 볼 수 있는 상품들 중에 천 . 구두 . 가죽 . 농기구 . 모피 등과 아울러 ‘몸을 파는 여자’까지 들고 있다.) 이 물건들이 상품으로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품의 보호자들은 이 물건들에 자신들의 의지를 담고 있는 인물로 서로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한 상품의 소유자는 다른 상품의 소유자의 동의하에서만, 따라서 각자는 쌍방이 동의하는 하나의 의지행위(意志行爲)를 매개로 해서만,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고 타인의 상품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사적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계약(契約)의 형식을 취하는 이 법적 관계는 [합법적으로 발달한 것이든 아니든] 경제적 관계를 반영하는 두 의지 사이의 관계다. 이 법적 관계[또는 의지 관계]의 내용은 경제적 관계 그 자체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주석 2: 프루동(Proudhon)은 처음에 정의 . 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치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소규모 상품생산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인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理想: ideal)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 분자(分子)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진정한 법칙들을 연구하고 이에 의거해 일정한 과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그 대신 '자연상태'나 '친화성'이라는 '영원한 이념'에 의거해 이러한 상호작용을 개조하려는 화학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고리대(高利貸)는 '영원한 정의', '영원한 공정성', '영원한 상호부조' 및 기타의 '영원한 진리'와 모순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고리대'에 대해 아는 것은, 교부들이 고리대가 '영원한 은총', '영원한 신앙‘, '신의 영원한 의지'와 모순된다고 말했을 때 교부들이 고리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보다 과연 더 많은가?)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만 상품의 대표자, 따라서 소유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제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제적 관계들의 인격화(人格化 personification)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이 경제적 관계들의 담지자(擔持者)로 서로 상대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상품소유자와 상품 사이의 주된 차이는,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체를 오직 자기 자신의 가치의 현상형태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태어날 때부터 평등주의자며 냉소주의자인 상품은, 빠른 어떤 상품과도, 비록 그것이 마리토르네스(Maritornes)보다 더 추한 외모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정신뿐 아니라 몸까지도 교환할 용의를 항상 가지고 있다. 상품은 다른 상품체의 구체적 속성을 파악할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상품소유자가 자기 자신의 다섯 개 이상의 감각으로 보충해 준다. 그의 상품은 자기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상품을 시장에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상품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가치(使用價値)를 가지고 있다. 상품소유자에게는 상품은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담지자[따라서 교환수단]라는 점에서만 직접적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주석 3: "왜냐하면 모든 물건에는 두 개의 용도가 없기 때문이다....그 하나의 용도는 그 물건에 고유한 것이고, 다른 용도는 고유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구두에는, 한편으로 구두로서 신는다는 용도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환될 수 있다는 용도가 있다. 두 가지 모두 구두의 사용방식이다. 왜냐하면, 구두를 자기가 필요로 하는 화폐 또는 식료품과 교환하는 사람까지도 구두를 구두로서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두 고유의 사용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두는 교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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