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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15
    잉여가치율의 증대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 또는 착취되는 노동자 수의 감소를 노동력의 착취도의 제고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를 이루고 있다. 이 자명한 제2법칙(第二法則)은 이후에 전개되는 자본의 경향, 즉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즉,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가변적 자본부분]를 가능한 한 축소시키려는 자본의 경향-이것은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량을 생산하려는 자본의 또 다른 경향과 모순된다-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중요하다. 다른 한편, 만약 고용되는 노동력의 양[즉, 가변자본의 크기]이 잉여가치율이 감소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증대하지 못한다면,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감소할 것이다.
    제3법칙(第三法則)은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이 잉여가치율과 투하 가변자본량이라는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만약 잉여가율[노동력의 착취도]과 노동력의 가치(필요노동시간)가 주어져 있다면, 가변자본이 크면 클수록 생산되는 가치량과 잉여가치량도 더 커진다는 것은 자명하다. 만약 노동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고 또 필요노동부분의 한계도 주어져 있다면, 개별 자본가가 생산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전적으로 그가 움직이는 노동량(勞動量)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노동량은 앞의 가정 하에서는 그가 착취하는 노동력의 양 또는 노동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고, 이 수는 또한 그가 투하하는 가변자본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잉여가치율이 주어져 있고 또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는 경우,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투하가변자본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한 부분을 그는 생산수단(生産手段)에 지출한다. 이것은 그의 자본의 불변부분이다. 다른 부분을 그는 살아 있는 노동력(勞動力)에 지출한다. 이 부분은 그의 가변자본을 형성한다. 동일한 생산방식(生産方式) 하에서도 생산부문(生産部門)이 다르면 불변부분과 가변부분으로
    의 자본의 분할도 달라지며, 통일한 생산부문에서도 생산과정의 기술적 토대와 사회적 결합이 달라짐에 따라 그것은 달라진다. 그러나 주어진 자본의 불변부분과 가변부분 사이의 비율이 어떻든 [즉, 1 : 2이든 1 : 10이든 1 : x이든] 바로 앞에서 정립한 법칙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의 분석에 의하면, 불변자본의 가치는 비록 생산물의 가치 속에 재현(再現)되기는 하지만 새로 생산되는 가치[즉, 새로 창조되는 가치생산물(價値生産物)] 속에는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1,000멍의 방적공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물론 100명의 방적공을 고용할 때보다 더 많은 원료. 방추 등이 요구되지만, 이 추가적인 생산수단의 가치는 [등귀할 수도 하락할 수도 불변일 수도, 또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지만] 생산수단을 가동시키는 노동력에 의해 수행되는 가치증식과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 확인된 법칙{제3법칙}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즉, 상이한 자본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고 노동력의 착취도가 같은 경우] 이들 자본의 가변부분의 크기[즉, 살아 있는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이 법칙은 현상(現象)의 외관에 의거한 모는 경험 {평균이윤율(平均利潤率)의 형성}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사용되는 총자본에 대한 백분율을 고찰하면, [많은 불변자본과 적은 가변자론을 사용하는] 방적업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가변자본과 적은 불변자본을 사용하는] 빵제조업자보다 더 적은 이윤[잉여가치]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 외견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매개항(媒介項)이 필요한데, 그것은 마치 0/0이 현실적인 크기를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등 대수학(代數學)의 입장에서는 많은 매개항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고전파 경제학은 비록 이 법칙 {제3법칙}을 정식화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 법칙을 고수했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가치법칙의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무리한 추상(抽象)에 의해 이 법칙을 현상의 모순으로부터 구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리카도학파가 어떻게 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가는 나중에(주석 2: 이에 대해서는 제4권 {“잉여가치학설사”제20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보게 될 것이다. '사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속류경제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현상을 규제하고 설명하는 법칙(法則)을 무시하고, 그와는 반대로 현상(現象)의 외관에 매달리고 있다. 스피노자와는 반대로, 속류경제학은 "무지(無知)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신(神) 이외에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이 그 현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스피노자는 "무지는 결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총자본이 매일 움직이는 노동은 하나의 단일노동일(單一勞動日)로 간주할 수 있다. 만약 예컨대 노동자의 수가 100만이고 한 노동자의 평균노동일이 10시간이라면, 사회적 노동일은 1,000만 시간으로 된다. 한 노동자의 평균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그 한계가 육체적 조건에 의해 설정되건 사회적 조건에 의해 설정되건-잉여가치량은 오직 노동[즉, 노동인구]의 증가에 의해서만 증가할 수 있다. 이 경우 인구의 증가는 사회적 총자본에 의한 잉여가치생산의 수학적 한계로 된다. 반대로 인구의 크기가 주어져 있는 경우, 이 한계는 노동일 연장의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주석 3: "사회의 노동[즉, 경제적 시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인구 100만이 하루에 각각 10시간씩 노동하면 합계 1,000만 시간으로 되는 것과 같다. 자본의 증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어떤 주어진 시기에도] 사용되는 경제적 시간(時間)의 현실적 범위 안에 있다.(“국민의 정치 경제학에 관한 연구”, 런던, 1821년, pp. 47, 49).) 다음 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법칙은 오직 지금까지 고찰한 형태의 잉여가치 {절대적(絶對的) 잉여가치}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잉여가치의 생산에 관한 이때까지의 고찰로부터 명백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임의의 화폐액 또는 가치액이 모두 자본으로 전환될 수는 없고, 일정한 '최소한도'의 화폐 또는 교환가치가 개별적인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가변자본의 최소한도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1년 내내 고용하는 1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는 자기의 생활수단의 재생산에 필
    요한 노동시간(이를테면 하루에 8시간)만 노동하면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필요로 하는 생산수단도 역시 8노동시간분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노동자로 하여금 이 8시간 이외에 이를테면 4시간의 잉여노동을 하게 하는] 자본가는 추가적 생산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추가적 화폐액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 하에서는, 자본가가 매일 취득하는 잉여가치로 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다시 말해 자기의 필수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 위해서도, 벌써 두 사람의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 한 사람이 4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하기 문에, 노동자 두 사람은 8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하며, 따라서 8시간의 노동은 노동자의 필요노동과 동일하다.} 이 경우 그의 생산의 목적은 단순한 생활의 유지이고 부의 증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부(富)의 증가를 전제하고 있다. 그가 보통의 노동자보다 겨
    우 2배 낮게 생활하며, 또 생산된 잉여가치의 절반을 자본으로 재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그는 노동자의 수와 투하자본의 최소한도를 8배로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32시간의 잉여노동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몸소 자기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직접 생산과정에 참가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는 경우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혼혈아, 즉 '소경영주(小經營主)'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자본가는 자본가로서 [즉,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시간 전체를 타인노동의 취득과 관리, 그리고 노동생산물의 판매에 바쳐야 한다.(주석 4: "차지농업가는 자기 자신의 노동에 의지할 수 없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손해를 볼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이다. 그는 탈곡하는 사람을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탈곡되지 않은 곡물 때문에 임금이 그의 손실로 될 것이다. 또 그는 풀을 베는 사람, 수확하는 사람 등을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항상 자기의 농장 구내를 순회해야 하며, 태만이 생기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만약 그가 어떤 한 장소에 매달려 있으면, 태만이 생길 것이다"(?식량의 현재가격과 농장규모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 한 농장주?아버노스트“, 런던, 1773년, p. 12). 이 책은 대단히 흥미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본가적 차지농업가' 또는 '상인적 차지농업가'의 발생사를 연구할 수 있고, [생계유지를 주로 하는] '소농장주'에 대비한 그들의 자기 찬양을 들을 수 있다. "자본가계급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완전히 육체노동의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된다"(리처드 존스[Richard Jonse], ?국 민경제학교과서?, 허트포드, 1852년, 제3강의, p. 39).) 중세의 길드제도는 개별 장인{마스터}이 고용할 수 있는 노동자 수의 최대한도를 매우 적은 수로 제한함으로써 수공업적 장인이 자본가로 전환되는 것을 강제로 저지하려 했다.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는 [생산을 위해 투하하는 최소금액이 중세의 최대한도를 훨씬 초과하게 될 때]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본가로 전환된다. 여기에서도 자연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헤겔이 자기의 ?논리학?에서 발견한 법칙, 즉 단순한 양적(量的) 차이가 일정한 점에 도달하면 질적(質的) 차이로 이행한다는 법칙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있다.(주석 5: 로랑(Laurent)과 제라르(Gerhardt)에 의해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전개된 대화학의 분자설(分子 設)은 바로 이 법칙에 입각하고 있다 {엥겔스: 화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렴풋 한 이 주(注)의 설명을 위해 다음의 것을 지적해 둔다.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1843 년에 C. 제라르가 처음으로 명명한 탄소화합물의 '동족열(同族列)'에 관한 것인데, 각 계열은 각각 특유의 대수적(代數的) 구조식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파라핀 계열은 CnH2n+2이고, 표준 적인 알코올의 계열은 CnH2n+O이고, 표준적인 지방산의 계열은 CnH2nO2등등. 이들 예에서는 분자식에 CH2를 단순히 양적으로 추가하면 그때마다 질적으로 상이한 물체가 형성된다. 이 중 요한 사실의 확정에서(마르크스의 과대한 평가를 받은) 롤랑과 제라르의 기여에 관해서는 코프 (Kopp)의 ?화학의 발달?(윈헨, 1873년, pp. 708, 716)과 숄렘머(Schorlemmcr)의 ?유기화학의 성립과 발달?(런던, 1879년, p. 54)를 참조하라.})
    개별적인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가 자본가로 전환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가치액의 최소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단계 에 따라 달라지며. 또 주어진 발전단계에서도 생산분야가 다르면 각 분야의 특수한 기술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생산분야들은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의 초기에 각 개인의 수중에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최소한도의 자본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콜베르(Colbert)시대의 프랑스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독일주들처럼 국가가 개인들에게 보조금을 주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공업부문과 상업부문의 경영에 법률상의 독점권(獨占權)을 갖는 회사(주석 6: 이런 종류의 회사를 루터(Martin Luther)는 '독점회사'라고 부른다.) -근대적 주식회사의 선구자-가 설립되었다.
    우리는 생산과정의 진행 중에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상세한 내용들은 더 이상 취급하지 않겠으며, 따라서 자본 그 자체의 특성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몇 가지 요점만을 강조해 둔다.
    생산과정의 내부에서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인격화된 자본인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기의 일을 규칙적으로 또 상당한 강도를 가지고 수행하도록 감시한다.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의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
    자본은 우선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기술적 조건을 그대로 이용해 노동을 자기에게 예속시킨다. 따라서 자본은 즉시로 생산방식을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때까지 고찰해 온 형태의 잉여가치의 생산[즉, 노동일의 단순한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은 생산방식 그 자체의 어떤 변화와도 관계없이 나타났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생산은 구식 빵제조업에서나 근대적 면공장에서나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생산과정을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노동자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을 자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합목적적인 생산활동의 단순한 수단 및 재료(材料)로 대한다. 예컨대 가죽공장에서 그는 가죽을 단순히 자기의 노동대상(勞動對象)으로 취급한다. 그가 무두질하는 것은 자본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을 가치증식과정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사정은 달라진다. 생산수단은 즉시 타인의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한다.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한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자기의 생산활동의 소재적 요소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자기 자신의 생활과정에 필요한 효모(酵母: ferment)로 소비하는데, 자본의 생활과정은 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야간에 가동이 중단되어 살아 있는 노동을 조금도 흡수하지 못하는 용광로와 작업장은 자본가로 보아서는 '순전한 손실'이다. 그러므로 용광로와 작업장은 노동력의 '야간노동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화폐가 생산과정의 객체적 요소[즉, 생산수단]로 전환되자마자, 생산수단은 당연한 권리와 힘에 의해 타인의 노동과 잉여노동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죽은 노동과 살아 있는 노동 [즉, 가치와 가치창조력] 사이의 이와 같은 전도(inversion) 또는 왜곡(distortion)-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특유한 특징이다-이 어떻게 자본가들의 의식에 반영되고 있는가를 하나의 실례에 의해 마지막으로 보이려고 한다. 영국의 공장주들이 반란을 일으킨 1848-50년에 ‘서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명성있는 회사의 하나인 칼라일 부자회사[1752년 이래 1세기 동안 존속하고 있으며, 동일한 가족에 의해 4대째 경영되고 있는 페이즐리(Paisley)의 아마 및 면화 방적공장의 사장'인 매우 유식한 신사가 1849년 4월 25일자 ?글래스고우 데일리 매일?지에 '릴레이 제도'라는 제명의 한 편지를 기고했는데(주석 7: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30일?, p. 59.),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제 노동시간을 12시간에서 10시간으로 단축하는 데서 생기는 해악을 살펴보기로 히자....그 것은 공장주의 기대와 재산에 대한 가장 중대한 손상이라는 점으로 귀착된다. 만약 그가" (즉 그의 '직공들'이) "과거에는 12시간 작업했는데 앞으로는 10시간으로 제한된다면, 그의 공장에 있는 기계나 방추의 매 12개가 10개로 축소될 것이며, 또 만약 그가 자기의 공장을 판매할 생각 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10개로밖에 평가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전국의 모든 공장이 자기 가 치의 6분의 1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주석 8: 같은 보고서, p. 60. [그 자신 스코틀랜드인이고, 잉글랜드의 공장감독관들과는 달리 전적으로 자본가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공장감독관 스튜어트는 자기의 보고서에 수록한 이 편지가 "릴레이 제도를 쓴 것이고, 특히 이 제도에 대한 편견을 제거할 목적으로 쓴 매우 유용한 편지다" 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4세대의 자본가적 속성을 물려받은 이 서부 스코틀랜드인의 자본가적 두뇌에는, 방추 등의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수단이 자본으로서 가진 성질[즉, 자기 자신을 가치증식시키며 매일 타인의 무상노동의 일정량을 흡수한다는 생산수단의 자본속성]과 구별없이 서로 엉켜 있는데 이 때문에 칼라일 회사 사장은, 그가 만약 자기 공장을 판매한다면, 그는 방추의 가치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 위에 또 방추의 가치증식력에 대해서도 대가를 지불받을 것으로, 즉 방추에 들어 있는 노동[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대해서뿐 아니라 방추의 도움을 받아 매일 페이즐리의 용감한 서부 스코틀랜드인들로부터 짜내는 그 잉여노동에 대해서까지도 대가를 지불받을 것으로 망상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노동일을 2시간 단축하면 방적기계 12대의 판매가격이 10대의 판매가격으로 축소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 4 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 12 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제 13 장 협업
    제 14 장 분업과 매뉴팩쳐
    제 15 장 기계와 대공업



    제 12 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노동일 중 자본이 지불한 노동력 가치(勞動力 價値)의 등가물이 생산되는 부분을 우리는 이때까지 불변(不變)의 크기로 간주했는데, 실제로도 사회의 일정한 경제적 발전단계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는 불변의 크기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노동자는 이러한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을 넘어 2시간, 3시간, 4시간, 6시간 등을 더 일할 수 있었다. 이 연장의 크기에 따라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과 노동일(勞動日)의 길이가 결정되었다. 필요노동시간은 불변이었지만, 1노동일 전체는 가변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노동일의 길이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분할이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자. 예컨대 선분 AC, 즉 A-B-C가 12시간 노동일을 표시하며, AB부분은 10시간의 필요노동(必要勞動)을, BC부분은 2시간의 잉여노동(剩餘勞動)을 표시한다고 하자. AC를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또는 AC의 더 이상의 연장과는 전혀 관계없이, 어떻게 잉여가치의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잉여노동을 연장시킬 수 있는??
    노동일 AC의 한계는 주어져 있지만, BC는 그 종점 C[그것은 동시에 노동일 AC의 종점이다]를 넘어 연장되지 않더라도 그 시발점 B를 반대방향인 A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연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직선 A-B'- B-C에서 B'B는 BC의 절반[즉, 1노동시간]과 같다고 하자. 이제 만약 12시간 노동일 AC에서 점 B를 B'으로 이동시킨다면 BC는 B'C의 길이로 연장되어, 노동일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12시간이지만 잉여노동은 50%만큼 [즉,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잉여노동이 BC에서 B'C로 [즉,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연장되는 것은, 동시에 필요노동이 AB에서 AB'으로 [즉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단축되지 않고서는 분명히 불가능하다. 잉여노동의 연장에 필요노동의 단축이 대응하고 있다. 즉, 노동자가 이때까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해 쓰고 있던 노동시간의 일부가 자본가를 위해 지출되는 노동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노동일의 길이가 아니라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노동일(勞動日)의 분할(分割)이다.
    다른 한편, 만약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다면 분명히 잉여노동의 크기도 주어진다. 노동력의 가치[즉,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는 그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규정한다. 만약 1노동시간이 0.5원의 금량으로 표현되며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5원이라면, 노동자는 자본이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한 가치를 대체하기 위해 [다시 말해, 그가 매일 필요로 하는 생활수단의 가치의 등가물을 생산하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수
    단(生活手段)의 가치가 주어지면 노동력(勞梨力)의 가치가 주어지고(주석 1: 하루의 평균임금의 가치는 노동자가 '생활하고, 노동하며, 생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월리암 폐티[William Petty],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 1672년, p. 64). "노동의 가격은 항상 생활수단의 가격으로 구성된다....노동자의 임금이 [다수의 노동자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가족을 노동자의 낮은 신분과 지위에 맞게 부양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경우" 그는 적합한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반더린트, ?화폐만능론?, p. 15). "자기의 팔과 근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단순한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타인에게 판매할 수 있는 경우에만 무엇인가를 갖게 된다....어떤 종류의 노동에서도 노동자의 임금은 그가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에 국한된다는 사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튀르고, ?부의 형성과 분배의 고찰?, 데르 편, ?저작집?, 제1권. p. 10). ”생활필수품의 가격은 사실상 노동의 생산비다"(맬더스, ?지대의 성질과 성장 및 지대를 규제하는 원리에 관한 연구?, 런던, 1815년, p. 48. 주).)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지면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의 길이가 주어진다. 그런데 잉여노동(剩餘勞動)의 크기는 노동일 전체에서 필요노동시간을 뺀 것과 같다. 12시간에서 10시간을 빼면 2시간이 남는데,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이 2시간 이상으로 잉여노동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물론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5원 대신 4.5원을, 또는 이보다도 더 적은 금액을 지불할 수도 있다. 이 4.5원의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9노동시간이면 충분할 것이고, 따라서 이제는 12시간 노동일 중 2시간 대신 3시간이 잉여노동으로 될 것이며, 잉여가치도 1원에서 1.5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는 오직 노동자의 임금을 그의 노력의 가치 이하로 인하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는 9시간에 생산하는 4.5원을 가지고는 이전보다 10분의 1만큼 적은 양의 생활수단을 얻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그의 노동력의 재생산은 위축된 형태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잉여노동은 정상적 한계를 넘어섬으로써만 연장될 수 있으며, 잉여노동의 영역은 필요노동시간의 영역을 강탈함으로써만 확대될 수 있다. 잉여노동의 이와 같은 증대방법이 현실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상품이 자기의 완전한 가치대로 매매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제되고 있는 한, 노동력의 생산[또는 그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임금(賃金)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하락하는 것에 의해서만 감소될 수 없고, 오직 노동력의 가치 그 자체가 하락하는 것에 의해서만 감소될 수 있다.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노동의 연장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의 결과 생기는 것이며, 그 반대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이 잉여노동의 연장의 결과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예에서 필요노동시간이 1/10 만큼[즉,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축소되고 따라서 잉여노동이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연장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가 현실적으로 1/10 만큼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노동력의 가치가 10분의 1만큼 하락한다는 것은, 이전에는 10시간에 생산되던 것과 동일한 양의 생활 수단이 이제는 9시간에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 productivity)의 향상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어떤 제화공이 주어진 생산수단으로 12시간 노동일에 한 켤레의 장화를 만들 수 있다고 하자. 그가 이와 동일한 시간에 두 켤레의 장화를 만들 수 있으려면 그의 노동생산성은 2배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노동수단
    이나 노동방법 또는 이 두 가지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노동의 생산조건[즉, 그의 생산방식], 따라서 또한 노동과정 그 자체에 혁명(革命)이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이라는 말은 노동과정에 변화가 일어나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단축되며, 그리하여 주어진 양(量)의 노동(勞動)이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使用價値)를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주석 2: "산업이 개량(改良)된다고 할 때, 그 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품을 이 전보다 적은 노동자에 의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이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갈리아니, ?화페에 대해”, pp. 158, 159) "생산비의 절약은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량의 절약일 수밖에 없다"(시스몽디, ?경제학연구?, 제1권 p. 22).) 지금까지 노동일의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생산방식이 주어져 있고 불변인 것으로 전제했다. 그러나 필요노동이 잉여노동으로 전환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생산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자본이 역사적으로 전해 온 형태의 노동과정을 그대로 계승해 그 노동과정의 계속시간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할 수 있으려면 먼저 노동과정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 따라서 생산방식(生産方式) 그 자체가 변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만 노동력의 가치는 저하할 수 있으며, 노동일 중 이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도 단축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나는 절대적 잉여가치(絶對的 剩餘價値: absolute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이에 대응해 노동일의 두 부분들의 길이 변화로부터 생기는 잉여가치를 나는 상대적 잉여가치(相對的 剩餘價値: relative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생산물[따라서 일상적 생활수단에 속하거나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생산물]이 생산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이 상승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최종형태를 주는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될 뿐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수단들에 들어 있는 노동의 양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예컨대 장화의 가치는 제화공의 노동에 의해서 뿐 아니라 가죽. 왁스. 실 등의 가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불변자본의 물질적 요소들[즉, 노동수단과 노동재료]을 공급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와 그에 상응한 상품가격의 저하도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그러나 필요한 생활수단을 공급하지도 않으며 그것의 생산을 위한 생산수단을 공급하지도 않는 생산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노동력의 가치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상품이 값싸게 되는 경우, 그것은 [그 상품이 노동력의 재생산에 참여하는 비율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예컨대 속옷은 하나의 필요한 생활수단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생활필수품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상품이 값싸게 되는 경우, 그것은 속옷에 대한 노동자의 지출을 감소시킬 뿐이다. 생활필수품의 총량은 상이한 산업부문들의 생산물인 각양각색의 상품으로 구성되며, 그러한 상품들 하나하나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의 일부를 형성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저하하는데, 필요노동시간의 총감소량은 상술한 상이한 생산부문들 전체에서 일어난 노동시간 단축의 총계와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반적 결과{노동력의 가치 저하}를 마치 각 개별 경우{자본}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직접적인 목적인 것처럼 취급한다. 그렇지만 개별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예컨대 속옷의 가치를 저하시킬 때, 그는 결코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켜 그만큼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목적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이 결과에 기여하는 한, 그는 일반적 잉여가치율의 제고에 기여하게 된다.(주석 3: "기계설비의 개량(改良)에 의해 공장주의 생산물이 2배로 증가한다면....공장주는 총생산물 중 더 적은 몫으로 노동자들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그의 이윤은 증가할 것이다. 그의 이윤은 다른 방법으로 변경될 수는 없지 않은가?“(람지[Ramsay], ?부(富)의 분배에 관한 연구?, pp. 168-169).) 자본의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경향(傾向)들은 그것들의 현상형태(現象形態)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內在的 法則: immanent laws)이 개별 자본들의 외적 운동(外的 運動)에 표현되어 경쟁이 강제하는 법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하여 개별 자본가를 추진시키는 동기(動機)로서 그의 의식(意識)에 도달하는 방식을 여기에서 고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 점만은 분명하다. 즉, 경쟁의 과학적 분석은 자본의 내적 본성이 파악된 뒤에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천체(天體)의 외관상의 운동은 [감각적으로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천체의 진정한 운동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얻어진 결과들만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노동시간이 6원으로 표현된다면, 12시간의 1노동일에는 72원의 가치가 생산{창조}될 것이다. 현재의 지배적인 노동생산성으로 이 12노동시간에 12개의 상품이 생산된다고 가정하고, 이 상품 한 개에 소비되는 원료와 기타 생산수단의 가치가 6원라고 하자.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는 상품 1개의 가치는 12원이다. 즉, 6원은 생산수단의 가치고, 6원은 이러한 생산수단을 처리할 때 새로 첨가된{추가된} 가치다. 이제 어떤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2배로 하는 데 성공하여 그 결과 그는 12시간의 1노동일에 이 종류의 상품을 12개가 아니라 24개를 생산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만약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1개의 상품의 가치는 이제 9원으로 떨어질 것이다. 즉, 생산수단의 가치가 6원이고 노동에 의해 새로 첨가된 가치가 3원으로 될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2배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노동일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72원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다만 이 새로운 가치가 이제는 2배의 생산물(生産物)에 할당될 뿐이다. 따라서 1개의 생산물은 새로운 가치의 1/12 대신 1/24을 [즉, 5원 대신 3원을] 포함하게 된다. 또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생산수단이 각 생산물로 전환될 때, 이제는 상품 1개당 전과 같이 1노동시간이 아니라 1/2노동시간만이 생산수단에 첨가된다. 이 상품의 개별 가치(個別置値: individual value)는 이제 그 사회적 가치(社會的 價値: social value)보다 낮다. 즉, 이 상품에는 사회적 평균 조건 하에서 생산된 같은 종류의 대다수의 상품에 비해 적은 노동시간이 들어 있다. 1개의 상품은 평균적으로 12원이 소요되어 2시간의 사회적 노동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변경된 생산방식 하에서는 1개의 상품에는 9원만이 소요되고 1 1/2시간의 노동만이 들어 있다. 그러나 상품의 현실적 가치(現實的 價値)는 그 상품의 개별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社會約 價値)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 실제로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가 자기의 상품을 12원이라는 사회적 가치로 판매한다면, 그는 그 상품을 개별 가치보다 3원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3원의 특별잉여가치(特別剩餘價値: extra surplus-value)를 실현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에게는 12시간 노동일이 이제는 종전의 12개가 아니라 24개의 상품으로 나타나므로, 1노동일분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판로(販路)가 2배로, 즉 시장이 2배로 커져야 한다. 기타의 조건이 같다면, 그의 상품은 오직 가격인하(價格引下)를 통해서만 시장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상품을 그 개별 가치보다는 비싸게, 그러나 그 사회적 가치보다는 싸게, 예컨대 1개당 10원에 판매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그는 상품 1개당 1원의 특별잉여가치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증대는 [그가 생산하는 상품이 노동력의 일반적 가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생활필수품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자본가 자신이 가지게 된다. 따라서 각 개별 자본가들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상품가치를 저렴하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잉여가치의 생산증대는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그에 대응하는 잉여노동의 연장에서 발생한다.(주석 4: “어떤 사람의 이윤(利潤)은 그가 타인의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物)을 지배한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노동(勞動) 그 자체를 지배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만약 그가 [그의 노동자의 임금에는 변동이 없는데 자기의 제품을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면, 그가 이윤을 볼 것은 분명하다...그때에는 그가 생산하는 것 중 더 적은 부분으로도 이 노동을 고용하는데 충분할 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부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게 된다“(캐즈노브[J. Cazenove], ?정치경제학개론?, 런던, 1832년, pp. 49, 50).) 필요노동시간이 10시간[즉,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60원]이고, 잉여노동이 2시간[따라서 매일 생산되는 잉여가치가 12원]이라고 하자. 우리의 자본가는 이제 24개의 상품을 생산해 그것을 1개당 10원에, 즉 합계 240원에 판매한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144원{6원 x 24개}이기 때문에 14 2/5개{=144원/10}의 상품은 투하된 불변자본의 가치를 대체한다.
    12시간 노동일의 노동은 나머지 9 3/5개 {24개- 14 2/5개}로 표현된다. 노동력의 가격이 60원이기
    때문에 필요노동시간은 6개의 생산물로 표현되고 잉여노동은 3 3/5개의 생산물로 표현된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은 사회적 평균조건 하에서는 5 : 1 {=10시간: 2시간}이었으나 이제는 5 : 3 {=6 : 3 3/5}으로 된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도 이와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12시간 노동일의 생산물의 가치는 240원{=10원 x 24개}이다. 그 중 144원은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되는 데 지나지 않는] 생산수단의 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96원이 남는데, 이것은 1노동일 동안 새로 창조된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다. 이 화폐적 표현은 동일한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의 화폐적 표현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사회적 평균노동의 12시간은 다만 72원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노동은 강화된 노동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시간 안에 동일한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본가는 노동력의 하루 가치에 대해 지금도 종전대로 60원만 지불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제 이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종전의 10시간이 아니라 7 1/2 시간{96원 : 12시간=60원: 7.5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잉여노동은 2 1/2시간만큼 증가하며, 그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는 12원에서 36원{=96-60}으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개선된 생산방식을 채용하는 자본가는 동일한 생산부문의 다른 자본가에 비해 1노동일 중 더 큰 부분을 잉여노동으로 취득한다. 그는 총체로서의 자본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할 때 수행하는 일을 개별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새로운 생산방식이 일반화되고 그리하여 상품의 개별 가치와 사회적 가치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자마자, 이 특별잉여가치는 소멸된다.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의 법칙은 새로운 생산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의 상품을 그 사회적 가치 이하로 판매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고 또 바로 이 법칙이 경쟁(競爭)의 강제법칙(强制法則)으로 작용해 그의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주석 5: "만약 나의 이웃사람이 적은 노동으로 많이 생산함으로써 싸게 팔 수 있다면,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싸게 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더 적은 직공의 노동으로 [따라서 더 싸게] 생산하는 온갖 기술. 방법 ? 기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동일한 기술. 방법. 기계를 이용하거나, 그것들과 유사한 어떤 발명을 해야 할 일종의 필요성과 경쟁심을 야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 처하게 되며, 누구도 자기의 이웃사람보다 더 싸게 팔 수 없게 된다"(?영국에 대한 동인도무역의 이익“, 런던, 1720년, p. 67).) 이러한 과정 전체를 거쳐 최후로 일반적 잉여가치율(一般的 剩餘價値率)이 영향을 받는 것은,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생활필수품의 생산에 기여하는] 산업부문에서 일어나서 [노동력의 가치를 구성하는] 상품들을 값싸게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에 반비례한다. 노동력(勞動力)의 가치도 역시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생산성에 정비례한다. 그것은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증가하며, 그 저하에 따라 저하한다. 화폐가치가 불변이라면 12시간이라는 사회적 평균노동일은 항상 72원이라는 동일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데, 그것은 이 가치총액이 임금과 잉여가치로 분할되는 비율 여하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만약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결과 생활수단의 가치가 저하하고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가치가 60원에서 36원으로 떨어진다면, 잉여가치는 12원에서 36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이전에는 10노동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다만 6노동시간{72원 : 12시간=36: 6시간}이 필요하다. 4노동시간이 떨어져 나와(set free) 잉여노동의 영역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며 끊임 없는 경향이다.(주석 6: "노동자의 생활비가 어떤 비율로 감소되든, 만약 그와 동시에 노동에 대한 규제들이 제거된다면, 그의 임금도 동일한 비율로 저하할 것이다"(?곡물수출 장려금의 폐지에 관한 고찰?, 런던, 1753년, p. 7). "산업의 이익은 곡물과 일체의 식료품이 가능한 한 싸게 되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비싸게 하는 모든 것은 노동을 역시 비싸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노동이 규제되지 않는 모든 나라에서는 식료품가격이 노동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의 가격은 필요한 생활수단이 싸게 될 때에는 언제나 싸게 된다"(같은 책, p. 3). "임금은 생산력이 증가하는 것과 동일한 비율로 감소한다. 기계가 생활수단을 싸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노동자도 싸게 한다" (?경쟁과 협동의 상대적 장점에 관한 현상논문?, 런던, 1834년, p. 27).)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는 상품의 절대적 가치(絶對的 價値)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본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상품에 들어 있는 [그리고 판매에 의해 실현되는] 잉여가치(剩餘價値)뿐이다. 잉여가치의 실현은 투하한 가치의 대체(代替: replacement)를 반드시 수반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반비례하지만,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 바꾸어 말해, 하나의 동일한 과정 {노동생산성의 발전}이 상품을 싸게 만드는 동시에 상품에 들어 있는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때문에, 교환가치(交換價値)의 생산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본가가 왜 상품의 교환가치를 끊임없이 떨어뜨리려고 노력하는가라는 수수께끼가 해명된다. 이 수수께끼를 가지고 경제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케네(F. Quesnay)는 자기의 논적(論敵)들을 괴롭혔는데, 이에 대해 그 논적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케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공산품(工産品)의 제조에는 [생산에 해를 끼치지 않고] 노동에 대한 지출 또는 노동비용(勞動費用)을 감축하면 할수록, 그 감축은 그만큼 더 유리하다. 왜냐하 면 그것은 제품의 가격을 인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숙련공들의 노동 으로부터 생기는] 부(富)의 생산은 그들의 생산물의 교환가치(交換價値)의 증대에 있다고 믿고 있다. "(주석 7: 케네, ?상업 및 수공업자의 노동에 대한 대화?, pp. 188-189.)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의 발전에 의한 노동의 절약(주석 8: "그들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그처럼 절약하는 투기꾼들"(비도[J. N. Bidaut], ?공업과 상업에서 발생하는 독점에 대해?, 파리, 1828년, p. 13). "고용주는 시간과 노동을 절약하기 위해 항상 전력을 다할 것이다"(스튜어트[Dugald Stewart], ?경제학강의?, 해밀턴[W. Hamilton] 편. "저작집?, 제8권, 에딘버러, 1855년, p. 318). "그들"(자본가들)"의 관 심사는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생산력을 가능한 한 크게 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증진에 그 들의 주의가 집중되고 있으며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고 있다"(리처드 존스,?국민경제학교과 서?, 1852년, 제3강의, p. 39).)은 결코 노동일(勞動日)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오직 일정한 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의 단축이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생산성을 제고시킨 결과 1시간에 가령 종전의 10배의 상품을 생산하게 되고, 그리하여 각 1개의 상품에 이전의 10분의 1의 노동시간을 지출하게 된다는 사실은, 결코 그로 하여금 종전과 같이 하루에 12시간 노동하고 또 그 12시간 동안 120개가 아니라 1,200개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노동일은 단축되기는커녕 연장되기조차 하여 14시간 동안 1,400개를 만들도록 강요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매컬록, 유어, 시니어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보면, 어떤 쪽에는 생산력(生産力)의 발전에 의해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이 단축되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에 대해 자본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쓰여 있고, 다음 쪽에는 노동자는 앞으로 하루에 10시간이 아니라 15시간 노동함으로써 이 감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쓰여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테두리 안에서는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해야 할 부분을 단축하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수 있는 나머지 부분을 연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상품을 싸게 하지 않고 이러한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달성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다음에 고찰하려고 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여러 특수한 생산방식들을 검토할 때 밝혀질 것이다.



    제 13 장
    협 업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각 개별 자본이 다수의 노동자를 동시에 고용하고, 따라서 노동과정이 대규모로 수행되어 대량의 생산물을 공급하게 되는 그때부터 비로소 실제로 시작한다. 많은 노동자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또는 같은 노동의 장(場: field)에서), 같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같은 자본가의 지휘 밑에서 함께 일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개념적{논리적}으로나 자본주의적 생산(資本主義的 生産)의 출발점을 이룬다. 생산방식 그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초기의 매뉴팩쳐는 동일한 개별 자본에 의해 동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더 많다는 것 이외에는 길드{동업조합(同業組合)}의 수공업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길드의 장인(匠人: master)의 작업장이 확대된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 차이는 순전히 양적(量的)인 것이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주어진 자본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양은 개별 노동자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에다 통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수를 곱한 것과 같다. 노동자의 수(數)는 그 자체로서는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 또는 노동력의 착취도(搾取渡)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으며, 그리고 상품가치 일반의 생산에서도 그것은 노동과정의 어떤 질적(質的)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집단 노동은 ‘새로운’ 생산력을 창조한다.} 만약 12시간 노동일 하루가 6원으로 대상화된다면, 그러한 노동일 1,200일은 6원 x 1,200으로 대상화될 것이다. 1,200명의 노동자의 경우에는 12 x l,200 노동시간이, 개별 노동자의 경우에는 12노동시간이 생산물에 합쳐지고 만다. 가치의 생산에서는 다수의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의 단순한 합(合)으로서만 계산된다. 따라서 1,200명의 노동자가 각각 개별적으로 생산하든, 또는 그들이 동일한 자본의 지휘하에 통합되어 생산하든, 생산되는 가치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다. 가치로 대상화되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질(質)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평균적 노동력(平均的 勞動力)이 지출된 것이다. 그러나 평균량(平均量)은 언제나 [크기만 다를 뿐 종류가 같은] 다수의 개별량(個別量)의 평균일 뿐이다. 각 산업부문에서 개별 노동자는 평균적 노동자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수학에서 '오차' {편차(偏差)}라고 부르는 이와 같은 개별적 차이는 우리가 어떤 최소한도의 노동자를 함께 고용하기만 하면 서로 상쇄되어 없어진다. 유명한 궤변가이며 아첨꾼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차지(借地)농업가로서의 자기의 실제의 경험에 의거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5명의 농업노동자로 구성되는 ‘그처럼 작은 집단’에서도 벌써 노동에서의 모든 개인적 차이는 서로 상쇄되어 소멸되며, 따라서 어떤 5명의 성인 농업노동자도 동일한 시간 안에 다른 임의의 5명의 성인 농업노동자가 하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주석 1: "서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는 힘과 숙련과 성실성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떤 임의의 5명은 전체로서는, 내가 앞에서 말한 연령에 속하는 다른 어떤 5명과도 같은 양의 노동을 제공한다는 것을 나는 면밀한 관찰에 근거해 확신하는 바다. 이것은 이 5명 중 1명은 훌륭한 일꾼의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1명은 서투른 일꾼이고, 다른 3명은 전자에 가깝거나 후자에 가까운 중간 일꾼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5명밖에 안 되는 그처럼 작은 집단에서 당신들은 5명의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량(全量)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버크, ?곡물부족에 관한 의견과 상세한 논의?, 런던, l800년, pp. 15-16). 평균적 개인에 대해서는 케들레(J. Quetelet)의 의견을 참조하라.) 어쨌든,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많은 노동자의 집단적 노동일(集團的 勞動日)을 노동자의 수로 나눈 것이 하루의 사회적 평균노동(社會的 平均勞動)인 것은 명백하다. 한 사람의 1노동일이 예컨대 12시간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12명의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일은 144시간이다. 그리고 12명 각각의 노동은 사회적 평균노동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개개인이 동일한 작업을 하는 데 상이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각 개인의 노동은 144시간이라는 집단적 노동일의 1/12로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12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의 입상에서 보면 노동일은 12명 전체의 노동일로서만 존재한다. 각 개별 노동자의 노동일은 [이들 12명이 서로 협력해 가면서 노동을 하건 또는 그들의 작업 사이의 관련이 단순히 동일한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는 점뿐이건] 집단적 노동일의 구성부분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이 12명의 노동자들이 2명씩 나뉘어져 각각 6명의 '소경영주(小經營主)'에게 고용된다면, 이들 각 소경영주가 동일한 가치량(價値量)을 생산하는가 어떤가, 따라서 일반적 잉여가치율을 얻게 되는가 어떤가는 확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개별적 편차가 나타날 것이다. 가령 어떤 노동자가 어떤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현저하게 많은 시간을 들인다면, 그의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드는 노동시간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즉, 평균적 노동시간]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의 노동은 평균적 노동으로 인정될 수 없고, 그의 노동력도 평균적 노동력으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한 노동력은 전혀 팔리지 않든가 또는 노동력의 평균가치 이하로 팔릴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능률(勞動能率)의 일정한 최저한도가 모든 노동에 대해 전제되고 있는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 최저한도의 설정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예: 성과급제 임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저한도는 평균과는 괴리(乖離)된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해 그 평균가치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6명의 소경영주 중 어떤 사람은 일반적 잉여가치율보다 더 많은 것을 뽑아내며,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적은 것을 뽑아낸다. 이 불균등은 사회 전체적으로는 서로 상쇄되지만 개별 소경영주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가치증식의 법칙은, 개별 생산자가 자본가로 생산하며 다수의 노동자를 동시적으로 고용할 때, 즉 처음부터 사회적 평균노동을 사용할 때, 비로소 그에게 완전히 실현된다.(주석 2: 로셔(Roscher)는, 자기 부인이 이틀간 일시켰던 한 재봉사는 자기 부인이 하루 동안 동시적으로 일시켰던 두 사람의 재봉사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유치원에서 또는 주연배우인 자본가가 없는 상황에서 연구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업방식에 변동이 없는 경우라도 많은 노동자의 동시적 고용은 노동과정의 객체적 조건(客體的 條件)에 혁명을 일으킨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건물, 원료를 위한 창고, 그들이 동시에 또는 번갈아 사용하는 용기. 기구. 장치 등등, 한 마디로 말해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일부가 이제는 노동과정에서 공동으로 소비된다. 한편, 이 때문에 이러한 생산수단의 교환가치가 등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사용가치가 더 철저하게 이용된다고 해서 등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생산수단은 공동으로 사용되며 이전보다 대규모로 사용된다. 20명의 직포공이 20대의 직조기를 가지고 일하는 방은 독립적인 1명의 직포공이 2명의 도제를 데리고 일하는 방보다는 넓어야 할 것이지만, 노동자 20명을 수용하는 작업장 하나를 건축하는 데는 노동자 2명씩을 수용하는 10개의 작업장을 건축하는 데 드는 것보다 적은 노동이 든다. 따라서 대규모의 공동사용(共同使用)을 위한 거대한 생산수단의 가치는 이 생산수단의 규모와 유용한 효과에 비례해 증
    가하지는 않는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생산수단은 재개의 생산물에 자기 가치의 더 적은 부분을 이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이 생산수단의 총가치가 더 많은 양의 생산물에 배분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생산수단은 [개별적으로 사용되는 생산수단에 비해] 비록 절대적으로는 더 큰 가치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 작용범위를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더 적은 가치를 가지고 생산과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상품의 총가치에 포함되어 있는 불변자본의 일부의 가치는 저하하며, 이 저하의 크기에 비례해서 상품의 총가치(總價値)도 역시 저하한다. 그 효과는 마치 그 상품의 생산수단에 더 싸게 생산되는 것과 같다. 생산수단의 사용의 이러한 절약(節約)은 전적으로 노동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산수단이, [고립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자나 소경영주가 가지고 있는] 분산되고 상대적으로 더 비싼 생산수단과는 달리, 사회적 노동의 필요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 일하지 않고 다만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 일하는 경우에도 가능하다. 노동수단의 일부는, 노동과정 그 자체가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하기 전에, 별써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한다{큰 건물 안에 많은 노동자들이 모이면 그렇게 된다}.
    생산수단의 절약(節約)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첫째, 그것이 상품을 저렴하게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측면이다. 둘째, 그것이 총투하자본[즉, 불변부분과 가변부분의 가치총액]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윤율}을 변동시키는 측면이다. 두번째 측면은 이 책의 제3권 제1편에서 비로소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야 할 다른 많은 문제들도 서술의 적절한 내적 연관을 위해 그곳으로 미룰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대상의 분할은 분석(分析)의 진행상 불가피한 것인데, 이러한 분할은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신과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자들은 노동수단을 자기와는 독립해 존재하는 타인의 소유로 상대하며, 이리하여 노동수단의 사용상의 절약도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생산성을 제고시키는 방법과도 관련이 없는] 하나의 별개의 조작(操作: operation)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동일한 생산과정에, 또는 서로 다르지만 상호관련된 생산과정에 많은 사람이 계획적으로 함께 협력해 일하는 노동형태를 협업(協業: cooperation)(주석 3:“힘의 결합”(데스튜트 드 트라시, ?의지 및 의지작용론?, p. 80).) 이라고 한다.
    기병 1개 중대의 공격력이나 보병 1개 연대의 방어력이 개별 군인이 제각기 전개할 수 있는 공격력이나 방어력의 합계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힘의 총계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동일한 불가분의 작업에 참가할 때 [예컨대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거나 윈치(卷楊機: winch)를 돌리거나, 장애물을 제거할 때] 발휘하는 사회적 역량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주석 4:“분할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다수 노동자들의 협력 없이는 수행할 수 없는 작업이 많이 있다. 예컨대 큰 통나무를 짐마차에 들어올리는 일....요컨대 많은 사람의 손이 하나의 불가분의 동일한 작업에서 동시에 상호협조하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온갖 일"(웨이크필드, ?식민화 방법에 관한 견해?. 런던, 1849년, p. 168).) 이 경우, 결합노동(結合努動: combined labour)의 성과는 고립된 개별 노동에 의해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거나 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거나 또는 매우 작은 규모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협업(協業)에 의해 개인의 생산력이 제고될 뿐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생산력[즉, 집단적인 힘]이 창조되는 것이다.(주석 5: "1톤의 무게를 들어올리는 일은 한 사람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며, 열 사람이면 전력을 다해야 겨 우 가능하지만, 백 사람이면 각자가 손가락 하나만을 움직여도 할 수 있다"(존 벨러즈, ?산업 전문학교의 설립에 관한 제안“, 런던, 1696년, p. 21).)
    다수의 힘이 하나의 총력(總力)으로 융합(融合)되는 데서 생기는 새로운 역량(力量)을 무시하더라도, 대부분의 생산적 노동에서는 단순한 사회적 접촉만으로도 벌써 각 개별 노동자들의 작업능률을 증대시키는 경쟁심이나 혈기(血氣: animal spirit)라는 자극이 생긴다. 그 결과 함께 일하는 12명은 144시간이라는 집단적 1노동일에, 각각 12시간씩 제각기 일하는 12명의 고립된 노동자들보다, 또는 12일 동안 계속 일하는 1명의 노동자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해 낸다.(주석 6: "이 경우에도“ (각각 30에이커씩을 가진 10명의 차지농업가들이 고용하는 수의 노동자를 1명의 차지농업가가 300에이커의 경지에 고용하는 경우) "역시 농업노동자의 수가 많아짐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있는데, 이것은 실무자가 아니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1대 4의 비율이 3대 12의 비율과 같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이 명제가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확기에나 기타 긴급한 많은 작업들에서는 많은 노동자를 결합시킨다면 일은 더 잘, 더 신속하게 수행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663
  • 자본론5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1권, 제9장).) 그러므로 상품소유자는 자신을 만족시켜 줄 사용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을 얻기 위해 자기 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모든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는 비(非)사용가치이고, 그것의 비(非)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이다. 따라서 상품은 모두 그 소유자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소유자를 바꾸는 것이 상품의 교환(交換)인데, 이 교환이 상품을 가치(價値)로 서로 관련시키며 상품을 가치로 실현한다. 그러므로 상품은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먼저 가치로 실현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상품은 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먼저 자신이 사용가치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동이 과연 타인에게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그 생산물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가 시켜주지 못하는가는 오직 상품의 교환만이 증명할 수 있다.
    상품의 소유자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사용가치를 지닌] 다른 상품과의 교환에서만 자기의 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그러한 한, 교환은 그에게는 개인적 과정일 따름이다. 다른 한편, 그는 자기의 상품을 가치로 실현하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의 상품이 다른 상품소유자에게 사용가치를 가지든 안 가지든, 자기의 상품을 자기의 마음에 드는 동일한 가치의 다른 상품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교환은 그에게는 일반적 사회적 과정이다. 그러나 동일
    한 과정이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오로지 개인적인 것이면서 또한 동시에 오로지 일반적 사회적인 것으로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더 상세하게 고찰하면, 어떤 상품소유자에게도 다른 모든 상품은 자기 상품의 특수한 등가(물)로 간주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점은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타당하기 때문에, 어떤 상품도 사실상 일반적 등가(물)로 되지 못하며, 따라서 상품들은 [서로 가치로 동등시되며 가치량으로 서로 비교되는] 일반적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결코 상품으로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산물 또는 사용 가치로서만 서로 상대하게 된다.
    이 곤경에 직면하여 우리의 상품소유자들은 파우스트와 같이 생각한다. "태초에 행함이 있었다. " 그리하여 그들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행동했던 것이다. 상품소유자들은 본능적으로 상품 본성의 법칙들에 순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인 다른 하나의 상품과 대비시킴으로서만 자기들의 상품을 서로 가치로서, 따라서 상품으로서 관계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품의 분석을 통해 이 결과를 얻은 바 있다. 그러나 오직 사회의 행동만이 일정한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상품의 사회적 행동이[자신들의 가치를 모두 표시하는] 특수한 상품을 분리해 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선발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등가형태로 된다. 사회적 과정을 통해 일반적 등가(물)는 이 선발된 상품의 독자적인 사회적 기능으로 된다. 그리하여 이 상품은 화폐(貨幣)로 된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자기들의 능력과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더라." "그 짐승의 이름이 나 그 이름을 표시하는 숫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 외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 라."
    [요한계시록, 17장 13절: 13장 17절]

    화폐는 [종류가 다른 노동생산물이 실제로 서로 동등시되고, 따라서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교환현상의 역사적 확대와 심화는 [상품의 성질 속에 잠자고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을 발달시킨다. 원활한 상거래를 위해 이 대립을 외부로 표현하려는 욕구는 독립적인 가치형태를 만들려는 충동을 낳게 되는데, 이 충동은 [상품이 상품과 화폐로 분화됨으로써] 하나의 독립적 가치형태를 얻을 때까지 중지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에 발맞추어 특정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 (주석 4: 상품생산을 영구화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화폐와 상품 사이의 대립'을, 따라서 화폐 그 자체를 [왜냐하면, 화폐는 오직 이 대립에서만 존재하므로] 폐지하려고 하는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의 교활함을 이것에 의해 평가할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카톨릭교를 존속시키면서 교황을 폐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 더 상세한 것은 나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61 이하를 보라.)
    생산물들의 직접교환은 한 측면에서 보면 단순한 가치표현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순한 가치표현의 형태는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였다 그런데 직접적인 생산물교환의 형태는 X량의 사용가치 A=Y량의 사용가치 B이다.(주석 5: 두 개의 상이한 유용한 물건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미개인 사이에서 가끔 보는 바와 같이) 한 개의 물건에 대해 잡다한 물건들이 등가(물)로 제공되는 동안은, 직접적인 생산물교환도 아직 시작단계에 있을 뿐이다.) 이 경우 A와 B라는 물건은 교환 이전에는 상품이 아니고 교환에 의해 비로소 상품으로 된다. 어떤 유용한 물건이 교환가치로 될 가능성을 획득하는 최초의 방식은 그 유용한 물건이 비(非)사용가치[즉, 그 소유자의 직접적 필요량을 초과하는 양의 사용가치]로 존재하는 것이다. 물건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해 외적인 것이며 따라서 양도할 수 있다. 이 양도가 상호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이 양도될 수 있는 물건들의 사적 소유자로,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서로 독립된 인격으로, 서로 상대하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호간에 타인이라는 관계는 자연발생적인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공동체가 가부장적 가족이거나, 고대 인도의 공동체이거나, 페루의 잉카국이거나 그것은 마찬가지다. 상품교환은 공동체의 경계선[즉,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물건들이 한 번 공동체의 대외적 관계에서 상품으로 되기만 하면 그것들은 반사적으로 공동체 안에서도 상품으로 된다. 이러한 물건들의 양적 교환비율은 최초에는 완전히 우연적이다. 그 물건들이 교환될 수 있는 것은, 그 물건 소유자들이 그것들을 서로 양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타인 소유의 유용한 물건에 대한 욕망이 점차로 확립된다. 교환의 끊임없는 반복은 교환을 하나의 정상적인 사회적 과정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노동생산물의 적어도 일부는 처음부터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이 순간부터 직접적 소비를 위한 물건의 유용성과 교환에서의 물건의 유용성 사이의 구별이 굳어져 간다. 물건의 사용가치가 물건의 교환가치로부터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물건들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은 물건들의 생산 그 자체에 의존하게 된다. 관습은 이 물건들의 가치를 일정한 크기로 고정시킨다.
    직접적인 생산물교환에서는 각 상품은 그 상품의 소유자에게는 직접적 교환수단으로 되며, 그 상품의 비소유자에게는 [상품이 그에게 사용가치로 되는 한] 등가(물)로 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교환되는 물건은 아직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나 교환자의 개인적 욕망과는 관계없는]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한다. 가치형태의 필요성은 교환과정에 들어오는 상품의 수와 다양성이 증가함에 따라 발전한다. 문제와 그 해결의 수단은 동시에 생긴다. [상품소유자들이 자기 자신의 물품을 여러 가지 다른 물품과 교환하고 비교하는] 상거래는, 상품소유자들의 여러 가지 상품들이 하나의 제3의 상품종류와 교환되고 가치로서 비교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제3의 상품은 기타의 여러 상품의 등가(물)로 됨으로써, 비록 좁은 범위 안에서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또는 사회적인 등가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이 보편적인 등가형태는 [자기를 낳은] 일시적인 사회적 접촉과 함께 발생하고 또 소멸한다. 즉, 때로는 이 상품이, 때로는 저 상품이, 일시적으로 보편적인 등가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상품교환의 발달에 따라 그것은 배타적으로 특수한 상품종류에만 고착된다. 즉, 화폐형태(貨幣形態)로 응고한다. 화폐형태가 어떤 종류의 상품에 부착되는가는 처음에는 우연이다. 그러나 대체로 두 가지 사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화폐형태는 교환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물품[사실 이 물품은 토착 생산물들의 교환가치를 최초로 자연발생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에 부착되거나, 양도가능한 토착재산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는 유용한 물건 [예: 가축]에 부착된다. 유목민족은 화폐형태를 최초로 발전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재산 전체가 이동할 수 있는 따라서 직접 양도가능한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의 생활방식이 그들을 끊임없이 다른 공동체와 접촉하도록 함으로써 생산물의 교환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를 [노예의 형태로] 원시적인 화폐재료로 삼은 일은 가끔 있었으나 토지를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토지를 화폐재료로 삼으려는 착상은 발전된 부르주아 사회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착상이 나타난 것은 17세기의 마지막 1/3의 일인데, 그것의 실행을 전국적 규모에서 시도한 것은 그보다 1세기 뒤인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기 [몰수한 교회토지를 근거로 1789년에 발행한 아시냐 assignats]였다.
    상품교환이 좁은 국지적(局地的) 한계를 타파하고, 따라서 상품가치가 인간노동 일반의 체현물[응고물]로 발전해 감에 따라 화폐형태는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자연적으로 적합한 상품인] 귀금속으로 옮아간다.
    "금(金)과 은(銀)은 처음부터 화폐는 아니지만, 화폐는 성질상 금과 은이다"(주석 6: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135. "귀금속은....본질상으로 화폐다"(갈리아니[F. Galiani], ?화폐에 대해?, 쿠스토디 편 근세편, 제3권, p. 137) 라는 말은, 금과 은의 자연적 속성이 화폐의 여러 기능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주석 7: 이 점에 대해 더 상세한 것은 앞의 나의 저서의 「귀금속」의 절 참조.)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는 화폐의 한가지 기능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즉, 화폐가 상품가치의 현상형태[즉, 상품의 가치량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는 재료]로 역할하는 기능이다. 가치의 적당한 현상형태(즉, 추상적인, 따라서 동등한 인간노동의 체현물]로 될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보아도 동일하고 균등한 질을 가지고 있는 물질뿐이다. 다른 한편, 가치량의 차이는 순전히 양적인 것이므로, 화폐상품은 순전히 양적인 구별이 가능한 것, 즉 그것을 마음대로 분할할 수 있고 또 그 부분들을 다시 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금과 은은 성질상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화폐상품은 이중(그重)의 사용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특수한 사용가치(예컨대 금은 이빨을 때우거나 사치품의 원료로 쓰인다) 외에도, 그것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형태적 [화폐형태] 사용가치를 가진다.
    다른 모든 상품은 화폐의 특수한 등가(물)일 뿐이지만,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들의 일반적 등가(물)이므로, 다른 모든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특수한 상품과 일반적 상품(주석 8: "화폐는 일반적 상품이다"(베리[P. Verri], 앞의 책, p. 16).) 사이의 관계와 같다.
    이미 본 바와 같이, 화폐형태는 다른 모든 상품들 사이의 관계가 한 상품에 반사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화폐가 상품이라고 말하는 것은(주석 9: "우리가 귀금속이라는 일반적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금과 은은....그 가치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상품이다....귀금속의 더 작은 중량이 그 나라의 생산물이나 제조품의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다면, 그때에는 귀금속의 가치가 오른다고 인정된다"(클레먼트[S. Clement], ?상호관계에 있는 화폐 . 상업 . 외환의 일반적 관념에 관한 연구. 한 상인의 저?, 런던, 1695년, p. 7). "금과 은은 (주조되든 않든) 비록 다른 모든 물건의 척도로 사용되지만, 포도주 . 기름. 담배 . 의복. 천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다"(차일드[J. Child], ?상업, 특히 동인도의 그것에 관한 연구?, 런던, 1689년, p. 2). "이 나라의 자본과 부를 오직 화폐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또 금과 은을 상품에서 제외시켜서도 안 된다"(파필론[T. Papillon], ?가장 유리한 무역으로서의 동인도무역?, 런던, 1677년, p. 4).) 화폐의 완성된 모습으로부터 출발해서 화폐를 분석하려는 사람을 위한 발견에 불과하다. 교환과정은 [자기가 화폐로 전환시킨] 상품에게 가치를 주는 것이 아니란 독특한 가치형태를 준다. 이 두 가지 개념[가치와 가치형태]의 혼동은, 금과 은의 가치를 상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한다.(주석 10: "금과 은은 화폐이기 이전에 금속으로서 가치를 가진다"(갈리아니, 앞의 책 p.72). 로크는 다 음과 같이 말한다 "은은 화폐로 되는데 적합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전반적 합의에 의해 하나의 상상적 가치가 은에게 주어졌다"(로크[J. Locke], "이자 인하의 결과들에 관한 몇 가지 고찰?, 1691년 ?저작집?, 1777년 제2권, p. 15). 이와 반대로 로(Law)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상이한 국민들이 어떤 하나의 물건에 동일한 상상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또는 어떻게 이 상상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자신이 이 문제 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다. "은은 자신이 가진 사용 가치에 비례해, 따라서 그 참된 가치에 비례해 교환되었다. 화폐로 채택됨으로써 은은 추가적인 가치를 얻었다"(로[J. Law], ?통화와 상업에 관한 고찰?, 데르편, ?18세기의 재정경제학자 들?, pp. 469, 470).) 또 화폐는 어떤 기능들[예: 유통수단의 기능]에서는 자기 자신의 단순한 상징(象徵)에 의해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또 하나의 오류[즉, 화폐는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류]가 생겼다. 그렇지만, 이 그릇된 생각에는, 물건의 화폐형태는 물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외적인 것이고 물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인간관계의 현상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모든 상품이 일종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가치로서 상품은 거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물적 외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주석 11: "화폐는 그것들(상품들)의 상징이다"(포르보네[de Forbonnais], ?상업원리?, 신판, 라이덴, 1776년, 제2부, p. 143). "상징으로서 화폐는 상품들에 의해 매혹된다"(같은 책, p. 155). "화폐는 물건의 상징이며 그것을 대표한다"(몽테스키외[Montesquieu], ?법의 정신?, ?저작집?, 런던, 1767년, 제2권, p. 3). "화폐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부(富)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등가(물)이다"(르 트로느[Le Trosne], ?사회적 이익에 대해?, p. 910). "가치의 개념을 고려한다면 물건 그 자체는 다만 상징이라고 말해야한다. 물건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헤겔, ?법철학“, p. 100). 경제학자들보다 훨씬 이전에 법학자들은 ,화폐는 단순한 상징이며 귀금속의 가치는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을 고취했는데, 그것은 왕권에 아첨한 것으로서, 그들은 중세 전체를 통해 로마제국의 전통과 로마민법의 화폐개념에 의거해 왕의 주화변조권(鑄貨變造權)을 옹호했던 것이다. 이 법학자들의 눈치 빠른 제자인 필립 드 발루아는 1346년의 한 칙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화의 제조 . 형상 . 발행고 .주화에 관한 법령 제정권....그리고 주화를 우리가 마음먹은 가격으로 유통시키는 권리가 오로지 우리와 우리의 국왕폐하에게 속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 황제의 칙령이 화폐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로마법의 정설이었다. 화폐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명문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화폐를 구매해서는 안 된다. 화폐는 공공의 사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상품으로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이 점에 관한 좋은 설명은 파니니(G. F. Pagnini),
    "물건들의 정한 가격에 관한 시론“, 1751년, 쿠스토디 편, 근세편, 제2권을 보라. 파니니는 이 책의 제2부에서 특히 법률가들을 논박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생산양식 하에서 물건이 취하는 사회적 특성[또는 노동의 사회적 규정이 취하는 물적 특성]을 단순한 상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특성들이 인간 이성의 자의적인 산물이라고 발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설명은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이 즐겨 썼던 수법이었다. 그들은 이 수법에 의해 인간관계의 불가사의한 모습[그 발생과정을 그들은 해명할 수 없었다]으로부터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기이한 외관을 제거하려고 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한 상품의 등가형태는 그 상품의 가치량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금이 화폐며 따라서 기타의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것은 예컨대 10그램의 금이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모든 상품처럼 화폐도 그 자신의 가치량을 상대적으로 다른 상품들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화폐 자신의 가치는 화폐의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며, 동일한 양의 노동시간이 응고되어 있는 다른
    상품의 양으로 표현된다.(주석 12: "만약 사람들이 1부셀의 밀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에 1온스의 은을 페루의 광산으로부터 런던 에 공급할 수 있다면, 1온스의 은은 1부셀의 밀의 자연가격이 된다. 이제 만약 채굴하기 더 쉬운 새로운 광산이 발견되어 2온스의 은을 종전에 1온스를 생산하던 것과 같은 정도로 쉽게 생산할 수 있다면, 기타 조건이 동일하다면, 밀 값이 1부셀당 10실링으로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종전의 1실링일 때와 마찬가지로 싸다"(페티[W. Petty], ?조세공납론“, 런던, 1667년, p. 32).) 화폐의 상대적 가치의 확정은 그것의 원산지에서 직접적 물물교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화폐상품이 화폐로서 유통에 들어갈 때 그 가치는 이미 주어져 있다. 17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화폐분석의 첫 단계[즉, 화폐는 상품이라는 발견]가 이미 개시되었지만, 그것은 역시 단서에 불과했다. 어려움은 화폐가 상품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 왜 . 무엇에 의해 상품이 화폐로 되는가를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다.(주석 13: 로셔(Wilhelm Roscher)는 "화폐의 잘못된 정의는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화폐를 상품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상품 이하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것이다. "라고 말한 다음, 화폐의 본질에 관한 저술의 잡다한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목록은 화제이론의 현실적 역사에 대한 지식을 조금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훈이 나타난다. "화폐를 다른 상품들로부터 구별하는 특수성들"(그렇다면 화폐는 역시 상품 이하의 것이거나 상품 이상의 것이다)"을 최근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충분히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그러한 한에서는, 가널(G. Ganilh)의 반(半)중상주의적 반동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로셔, ?국민경제학원리“, 제3판, 1858년, pp. 207-210). 이상! 이하! 충분하지 않게! 그러한 한에서! 전혀 아니다! 이것이 개념규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절충주의적 교수식 잡담을 로셔는 겸손하게도 경제학의 '해부학적 . 생리학적 방법'이라고 명명(命名)한다! 그러나 한 가지 발견만은 그의 공적인데, 그것은 화폐는 '하나의 기분 좋은 상품'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 표현으로부터 안 바와 같이, 다른 물건의 가치량을 표현하는 물건은 이러한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자기의 성질 속에 내재하는
    사회적 속성으로] 등가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잘못된 외관이 확립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그 과정은, 일반적 등가형태가 하나의 특정 상품의 현물형태와 동일시되어 화폐형태로 고정될 때, 완성되었다. 외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
    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렇게 이끌어 온 운동은 운동 그것의 결과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이리하여 상품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가치모습을 [자신들의 외부에서 자신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체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상품체, 즉 금
    또는 은은 지하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 화신(化身:incarnation)으로 된다. 여기에 화폐의 신비성이 있다. {상품생산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기의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순전히 원자론적으로 상호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그들의 생산관계는 그들의 통제와 의식적인 개인적 행동으로부터 독립된 물적 모습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그들의 노동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폐물신( 貨幣物神: money fetish)의 수수께끼는 상품(물신商品物神)의 수수께끼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제 3 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제 1절 가치의 척도


    나는 이 책의 어디에서나 설명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금을 화폐상품이라고 전제한다.
    금의 첫째 기능은 상품세계에 그 가치표현의 재료를 제공한다는 점, 또는 상품들의 가치를 동일한 명칭의 크기[즉, 질적으로 동일하며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 크기]로 표현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금은 가치의 일반적 척도(一般的 尺度)로 기능하는데, 오직 이 기능에 의해서만 금이라는 특수한 등가상품은 화폐로 되는 것이다.
    화폐 때문에 상품들이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모든 상품이 가치로서는 대상화된 인간노동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상품의 가치는 한 개의 특수한 상품에 의해 공동으로 측정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 특수한 하나의 상품이 자기들의 공통적인 가치척도(價値尺度), 즉 화폐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가치척도로서의 화폐는 상품들에 내재하는 가치척도(즉, 노동시간)의 필연적인 현상형태다.(주석 1: 어째서 화폐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노동시간을 대표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예컨대 한 장의 종이 쪽지가 X노동시간을 대표하지 못하는가 라는 문제는 어째서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노동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문제로 귀착한다. 왜냐하면 상품의 형태를 취하면 노동생산물은 상품과 화폐상품으로 분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어째서 사적 노동은 그 대립물인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 취급될 수 없는가 라는 문제도 있다. 상품 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61 이하).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다.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 노동증명서는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여한 부분과 [공동생산물 중 소비용으로 예정된 부분에 대한]그의 청구권을 확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웬은, 상품생산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상품생산의 필연적 조건들을 [화폐에 관한 속임수에 의해] 제거해 보려는 엉뚱한 생각[프루동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 상품의 가치를 금으로 표현하는 것-X량의 상품 A=Y량의 화폐상품-은 그 상품의 화폐형태, 즉 그 상품의 가격(價格)이다. 이제 철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형태로 표시하기 위해서는 1톤의 철=2온스의 금이라는 단 한 개의 등식으로 충분하다. 이 등식은 이제 다른 상품들의 가치등식과 열을 지어 행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등가상품인 금은 이미 화폐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품들의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이제 다시 그것의 최초의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을 띠게 된다. 다른 한편, 전개된 상대적 가치표현[즉, 수많은 상대적 가치표현의 끝없는 시리즈]은 이제 화폐상품의 독특한 상대적 가치형태로 된다. 그러나 이 끝없는 시리즈는 이제 상품들의 가격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주어져 있다. 가격표를 거꾸로 읽으면 온갖 상품들로 표현된 화폐의 가치량[또는 화폐의 구매력]을 보게 된다.(역자 주: 2온스의 금 = 20미터의 아마포 또는 = 1개의 저고리 또는 = 10그램의 차 또는 = 기타 등등.) 그런데 화폐는 가격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상품들의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화폐는 자기 자신의 등가(들)로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화폐는 가격을 가지지 않는다. }
    상품의 가격 또는 화폐형태는 [상품의 가치형태 일반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물체형태와는 구별되며, 따라서 순전히 관념적인 또는 개념적인 형태이다. 쇠 . 아마포 . 밀 등의 가치는,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1, 이 물건들 속에 존재한다. 이 가치는 이 물건들과 금과의 동등성에 의해, 말하자면 이 물건들의 머리 속에만 있을 뿐인 금과의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상품의 보호자가 상품의 가격을 외부세계에 전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혀를 이 상품에게 빌려주던가[상품의 가격을 말하던가], 또는 상품에 정가표를 매달아 주던가 해야 한다.(주석 2: 미개인이나 반(半)미개인은 혀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선장 패리(Perry)는 배핑만{그린랜드}의 서해안 주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경우(물물교환의 경우) 그들은 그것(그들에게 제공된 물건)을 혀로 두 번씩 핥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교환이 만족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부 에스키모인적 경우에 교환자는 물건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핥곤 했다. 이와 같이 북방에서는 혀가 소유권 취득의 기관(器官)으로 간주되어 있다면, 남방에서는 위(stomach)가 축적된 재산의 기관(organ)으로 간주되어 카피르인[남동아프리카의 혹인]들이 사람의 부(富)를 그 사람의 아랫배가 나은 정도에 따라 평가하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카피르인은 매우 영리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1864년의 영국정부의 위생보고서가 노동자계급의 대다수에게는 지방질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탄식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에 의사 하비(혈액순환을 발견한 하비와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사람은 부르주아지나 귀족계급의 지방과다를 제거하는 처방을 광고함으로써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에 의한 상품가치의 표현은 순수히 관념적인 행위[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므로, 이 기능을 위해서는 단순히 상상적인, 관념적인 금을 사용할 수도 있다. 상품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가 자기 상품의 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또는 상상적인 금의 형태」를 부여하더라도 아직은 자기의 상품을 금으로 전환시킨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그가 몇 백만의 상품가치를 금으로 평가하는 데도 현실적인 금은 한 조각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화폐는 가치척도의 기능에서는 다만 상상적인 또는 관념적인 화폐로서만 역할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엉터리 화폐이론(貨幣理論)이 나타나게 되었다.(주석 3: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중의 ‘화폐의 도량표준에 관한 학설’,p. 76 이하를 보 라.) 그러나 상상적일 뿐인 화폐가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한다 할지라도 가격은 전적으로 실제의 화폐재료에 달려 있다. 예컨대 1톤의 쇠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노동량, 즉 가치는 그것 동일한 양의 노동을 포함하고 있는 상상 속의 화폐상품량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금, 은 또는 구리 어느 것이 가치척도로 쓰이는가에 따라 1톤의 쇠의 가치는 전혀 다른 가격표현을 얻게 된다. 즉,금, 은 또는 구리의 전혀 다른 양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만약 두 개의 서로 다른 상품, 예컨대 금과 은이 동시에 가치척도로 쓰인다면, 모든 상품은 두 개의 다른 가격표현, 즉 금가격과 은가격을 가지게 된다. 이 가격표현들은 은 대 금의 가치비율[예컨대 1 : 15]이 불변인 한 아무 일 있이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치 비율이 변동할 때마다 상품의 금가격과 은가격 사이의 비율은 교란되는데, 이 사실은 이중의 가치척도가 가치척도의 기능과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석 4: "금과 은이 법률상 화폐로[즉, 가치척도로] 병존하는 경우, 그것들을 동일한 물질로 간주하려는 헛된 시도가 끊임없이 있었다. 만약 일정한 노동시간이 변함없이 일정한 비율로 은과 금에 대상화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은과 금이 동일한 물질이며, 가치가 적은 금속인 은은 금의 일정한 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3세 {1327-1377}의 시대로부터 조지 2세 {1727-1760}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영국 화폐의 역사는 금과 은의 법정 가치비율과, 금과 은의 현실의 가치변동 사이의 충들에 기인하는 끊임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어떤 때는 금이, 어떤 때는 은이 너무 높게 평가되었다. 현실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된 금속은 유통에서 끌려나와 용해되어 수출되었다. {법정가치율은 금화 1온스=은화 15온스이지만, 시장가치비율은 금 1온스=은 온스라면, 금화를 녹여 시장에서 은을 구매해 주조하면 이익이 된다.} 그리하여 두 금속의 가치 비율은 다시 법률에 의해 변경되었으나, 새로운 명목비율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현실적인 가치비율과 충돌했다. 우리 자신의 시대에는, 인도와 중국의 은수요 때문에 은에 비해 금의 가치가 매우 미미하게 그리고 일시적으로 하락한 것이 프랑스에서 동일한 현상{즉, 은이 수출되고 금에 의해 유통에서 추방되는 것}을 대규모로 발생시켰다. l855년, 1856년 및 185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금 수출에 대한 금 수입의 초과액은 41,580,000파운드에 달했지만, 은 수입에 대한 은 수출의 초과액은 34,704,00파운드이었다. 두 금속이 법률상 가치척도로 되어 있고, 따라서 법화(法貨; legal tender)이며, 지불하는 측에서는 마음대로 은으로나 금으로 지불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가치가 등귀하고 있는 금속에는 프리미엄이 붙어,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과대평가된 금속으로 자신의 가격을 계산하며, 이 과대평가된 금속만이 사실상 가치척도로 된다. 이 분야의 모든 역사적 경험은 간단히 다음의 것으로 귀착된다. 즉, 법률상 두 상품이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그 중의 한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p. 75-76).)
    가격이 정해져 있는 상품들은 모두 a량의 상품 A=X량의 금, b량의 상품 B=Y량의 금, c량의 상품 C=Z량의 금 등의 형태로 표시된다. 여기서 a, b, c는 A, B, C라는 상품들의 일정한 양을 표시하며, X Y, Z는 금의 일정한 양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상품들의 가치는 여러 가지 크기의 상상적인 금량(金量)으로, 즉 상품체의 다종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금량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양으로 전환되고 있다. 상품들의 가치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금량으로 서로 비교되고 측정된다. 그리고 기술상의 이유로 어떤 고정된 금량을 가치들의 도량단위(unit of measurement)로 삼을 필요성이 발생한다. 이 도량단위 자체는 또다시 그 세부단위로 분할됨으로써 도량표준(度量樣準)으로 발전한다. 금이나 은이나 동(銅)은 그것들이 화폐로 되기 전에 벌써 이와 같은 도량표준을 그것들의 금속무게 속에 가지고 있다. 예컨대 도량단위로 쓰이는 1파운드는 한편으로는 다시 분할되어 온스로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합해져서 젠트너{Zentnar; 100파운드}로 된다.(주석 5: 영국에서 화폐의 도량표준 단위로 역할하는 1온스의 금이 정수(整數)의 단위 부분들로 분할될 수 있다는 기이한 사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우리나라의 주화제도는 본래 은의 주화에만 적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1온스의 은은 언제든지 일정한 수의 동등한 주화로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금이 그뒤 [오직 은에만 적합한] 주화제도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1온스의 금은 정수의 소주화로 분할 주조될 수 없게 된 것이다"(매클라렌[J. Maclaren), ?통화사?, 런던, p. 16).) 그러므로 모든 금속유통에서는 중량의 도량표준에 적용되던 명칭들이 그대로 화폐 또는 가격의 도량표준에도 적용되고 있다.
    가치의 척도 및 가격의 도량표준은 화폐의 전혀 다른 두 가지 기능이다. 화폐가 가치의 척도인 것은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化身)이기 때문이고, 가격의 도량표준인 것은 고정된 금속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척도로서 화폐는 다종다양한 상품의 가치를 가격[즉, 상상적인 금량]으로 전환시키는 데 봉사하며,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 화폐는 이러한 금량을 측정한다. 가치척도는 가치로서의 상품들을 측정한다. 이와는 반대로, 가격의 도량표준은 여러 가지 금량을 금의 단위량으로 측정하는 것이지 금의 하나의 양인 가치를 금의 다른 양인 중량으로 측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격의 도량표준으로 되기 위해서는 금의 일정한 무게가 도량단위로 고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동일한 명칭의 양들이 측정되는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량의 고정성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일정한 금량을 나타내는 도량단위가 변하지 않을수록 가격의 도량표준은 그 기능을 더 잘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금이 가치척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금 자체가 노동생산
    물이며 따라서 가치가 잠재적으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주석 6: 영국의 저서들에서는 가치의 척도와 가격의 도량표준('가치의 도량표준')에 관한 혼동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양자의 기능과 양자의 명칭은 끊임없이 혼동되고 있다.)
    우선 금의 가치변동은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의 금의 기능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금의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여러 가지 금량 사이의 가치관계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가령 금의 가치가 1,000%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12온스의 금은 여전히 1온스의 금의 12배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격에서는 여러가지 금량의 상호관계만이 문제로 된다. 다른 한편, 1온스의 금이 그 가치의 증감에 따라 그 중량을 바꾸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에, 온스를 세분한 각 부분의 중량도 변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금은 그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가격의 고정된 도량표준으로 여전히 역할한다. 금의 가치변동은 모든 상품에 대해 동시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상품들 가치의 상호관계에는 변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비록 이제는 상품들의 가치가 모두 이전보다 높거나 낮은 금가격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한 상품의 가치를 다른 한 상품의 사용가치로 평가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품들을 금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거기에 전제되고 있는 것은 일정량의 금을 일정한 시기에 생산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상품가격의 변동 일반에 관해서는 제1장에서 말한 단순한 상대적 가치표현의 법칙들이 적용된다.
    상품가격(商品價格)이 일반적으로 오르는 것은, 화폐가치(貨幣價値)가 불변이라면 상품가치가 오르는 경우뿐이고, 상품가치가 불변이라면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경우뿐이다. 그와 반대로, 상품가격이 일반적으로 내리는 것은, 화폐가치가 불변이라면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경우뿐이고, 상품가치가 불변이라면 화폐가치가 오르는 경우뿐이다. 그러므로 화폐가치의 상승은 반드시 상품가격의 비례적 하락을 초래하고, 또 화폐가치의 하락은 반드시 상품가격의 비례적 상승을 초래한다는 결론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치가 변동하지 않은 상품에 대해서뿐이다. 그런데 그 가치가 화폐가치와 같은 정도로 동시에 오르는 상품은 동일한 가격을 유지한다. 상품가치가 화폐가치보다 더 완만하게 오르거나 더 급속하게 오르는 경우에는, 그 상품가격의 하락 또는 상승은 상품의 가치변동과 화폐의 가치변동 사이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등등.
    이제는 가격형태(價格形態)의 고찰로 되돌아가자. 금속무게의 화폐명칭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점차 그 원래의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된다. 이 원인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발전 정도가 낮은 민족들에게 외국화폐가 수입된 것. 예컨대 고대 로마에서는 금과 은의 주화는 처음에는 외국상품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 외국주화의 명칭은 국내의 무게 명칭과 달랐다. (2) 부(富)의 발전에 따라 저급 금속은 고급 금속에 의해 가치척도의 기능으로부터 쫒
    겨난다는 점. 동(銅)은 은에 의해, 은은 금에 의해 쫓겨난다. 비록 시적(詩的) 연대기에서는 이 순서가 다르다 할지라도.(주석 7: 이 연대기의 순서가 반드시 일반적 역사적 타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파운드는 현실적인 은 1파운드의 중량을 표시하는 화폐 명칭이었다. 금이 가치척도로서의 은을 몰아내게 되자 이 동일한 명칭은 금과 은의 가치비율에 따라 대체로 1/15파운드의 금에 적용되었다. 이제는 화폐 명칭으로서의 파운드와 금의 관습적인 무게 명칭으로서의 파운드는 분리되어 버렸다. (주석 8: 그리하여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은 그 원래 중량의 1/3 이하를 대표하고 있으며, 잉글랜드와의 합병 {1707년} 이전의 스코틀랜드의 파운드는 겨우 1/36을, 프랑스의 리브르는 1/74을, 스페인의 마라베디는 1/1,000 이하를, 포르투갈의 레이는 그보다도 더 작은 부분을 대표하고 있다.) (3) 몇 백 년에 걸친 군주들의 끊임없는 화폐변조. 이로 말미암아 금 주화는 원래 중량과는 전혀 관계없이 명칭만을 가지게 되었다.(주석 9: "그 명칭이 오늘날에는 전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 주화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한때는 실질적인 가치를 가진 주화들이었고, 또 그것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계산했던 것이다"(갈리아니, ?화폐에 대해?, p. 153).)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화폐 명칭이 그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국민적 관습에 속하는 것으로 되었다. 화폐의 도량표준은 한편으로는 순수히 관습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효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므로, 결국은 법률에 의해 규제된다. 귀금속의 일정한 중량, 예컨대 1온스의 금은 공식적으로 더욱 작은 부분으로 분할되고, 이 부분에 대해 파운드, 탈러 등과 같은 법정 세례명이 주어진다. 이 분할된 부분이 현실적인 화폐단위로써 역할하는데, 그것은 이번에는 또다시 실링, 페니 등과 같은 법정 세례명을 가지는 다른 일정한 부분으로 세분된다. (주석 10“ 데이비드 어콰트(David Urqhart)는 그의 ?상용어(常用語)?에서 영국의 화폐 도량표준의 단위인 파운드(파운드 스털링)는 현재 약 1/4온스의 금과 같다는 말도 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도량표준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척도를 변조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이러한 금 무게의 '거짓 명칭'에서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찰가지로 문명이 미치는 위조작용 (僞造作用)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속의 일정한 중량이 금속화폐의 도량표준으로 되는 것은 여전히 전과 같다. 달라진 것은 화폐의 분할방식과 명칭뿐이다.
    그리하여 가격[즉, 상품의 가치가 관념적으로 전환되어 있는 금량]은 이제 금의 도량표준의 화폐 명칭[또는 법률상 유효한 계산 명칭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1쿼터의 밀이 1온스의 금과 그 가치가 같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것이 3파운드 17실링 10 1/2펜스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1971년 1월 이전에는 1파운드 스털링=20실링, 1실링:12팬스였으나, 그 뒤부터 1파운드 =100팬스(p)가 되었다 ] 이와 같이 상품들은 자기들의 가치가 얼마인가를 자기들의 화폐명칭으로 표현하며, 그리고 화폐는 어떤 물건을 가치로, 따라서 화폐형태로 고정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계산화폐로 역할한다.(주석 11: "사람들이 아나카르시스에게, 희랍 사람들은 화폐를 무엇에 사용하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계산을 위해서'라고 대답했다"(아테나이오스[Athenaeus], ?학자들의 향연?, 슈바이크호이저[Schweighauser] 편, 1802년, 제2권, 제1부, 제4편, 제49절, p. 120).)
    물건의 명칭은 그 물건의 성질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야곱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파운드, 탈러, 프랑, 두카트 등등의 화폐 명칭에는 가치관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신비한 명칭에 어떤 숨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야기되는 혼란은, 이 화폐 명칭이 상품가치를 표현함과 동시에 일정한 금속무게[즉, 화폐의 도량표준으로 역할하는 금속무게]까지도 표현하게 됨으로써 더욱 심하
    게 된다.(주석 12: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의 금은 상품가격과 동일한 계산명칭으로 표현되므로 (예컨대 1온스의 금은 1톤의 쇠와 꼭 마찬가지로 3파운드 17실링 10 1/2펜스로 표현되므로) 금의 이와 같은 계산명칭은 금의 '주조가격'(mint-price)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금은 마치 그 자체의 재료로 평가되고, 다른 모든 상품과는 달리 어떤 고정된 가격을 국가로부터 받는다는 괴상한 관념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금의 일정한 중량을 계산명칭으로 고정하는 것을 이 중량의 가치를 설정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74).) 다른 한편에서는, 가치가 상품세계의 잡다한 물체들로부터 구별되어 이러한 형태[즉, 물적일 뿐 아니라 순수히 사회적인 형태]로 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주석 13: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76 이하의 ‘화폐의 도량단위에 관한 학설’ 참조. 금이나 은 의 고정된 무게에 이미 붙인 법정 화폐명칭을 국가가 더 큰 또는 더 작은 무게에 붙임으로써 (예컨대 1/4온스의 금으로 20실링을 주조하는 대신 40실링을 주조함으로써) 화폐의 '주조가격'을 인상하거나 인하하려는 환상적인 생각을 몇몇의 이론가들은 가지고 있었다. 이 생각이 공공및 사적 채권자에 대한 졸렬한 금융조작이 아니라 경제적 기적요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폐티가 ?화폐 소론(小論). 하리팍스 후작에게?(1682년) 에서 충분히 논술했으므로, [그 후세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직접적 계승자인 더들리 노스(Dudley North) 및 존 로크까지도 그가 말한 것을 더 세속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페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한 나라의 부(富)를 하나의 포고(布告)에 의해 10배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훨씬 이전에 그와 같은 포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묘한 일일 것이다"(같은 책, p. 36).)
    가격(價格)은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勞動)의 화폐명칭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품과 [그 상품가격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화폐량이 등가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동어반복이다.(주석 14: "그렇지 않다면, 화폐로 백만 원의 가치는 상품의 동원한 가치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 으면 안 된다"(르 트로,느?사회적 이익에 대해?, p. 919). 즉, "어떤 가치는 그것과 동일한 크 기의 다른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표현은 두 상품의 등가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가치량의 지표로서의 가격은 그 상품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표이기는 하지만, 그 상품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즉, 가격]는 반드시 그 상품의 가치량의 지표로 되지는 않는다. 가령 동일한 양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1쿼터의 밀로도 표현되고 2 파운드(약 1/2온스의 금)로도 표현된다고 하자. 2 파운드는 밀 1쿼터의 가치량의 화폐적 표현, 즉 그 가격이다. 이제 만약 어떤 사정 [예 수요 . 공급의 사정]이 1쿼터의 밀을 3 파운드로 가격을 올리거나 또는 l 파운드로 가격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1 파운드와 3 파운드는 이 밀의 가치량의 표현으로서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이 밀의 가격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첫째로 이 밀의 가치형태, 화폐[형태]이며, 둘째로 이 밀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생산조건 또는 노동생산성이 변하지 않는 한, 1쿼터의 밀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가격의 변화 이전에나 이후에나 여전히 동일한 양의 사회적 노동시간이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밀 생산자의 의지와도, 또는 다른 상품소유자의 의지와도 관계가 없다. 이와 같이 상품의 가치량(價値量)은 사회적 노동시간(勞動時間)과 어떤 필연적인 관계[그 상품의 가치가 형성되는 과정에 내재한다]를 가진다. 가치량이 가격(價格)으로 전환되는 것과 더불어 이 필연적인 관계는 한 상품과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는] 화폐상품 사이의 교환비율(交換比率)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환비율은 그 상품의 가치량을 표현할 수 있음과 동시에 주어진 조건하에서는 그 상품이 더 많은 또는 더 적은 화폐량과 교환될 수 있다는 것도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가격(價格)과 가치량 (價値量)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즉, 가격이 가치량과 괴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가격형태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결코 가격형태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 가격형태를 다음과 같은 생산양식-즉, 여기에서 법칙은 끊임없는 불규칙성 사이에서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평균으로서 자신을 관철할 뿐이다-에 적합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가격형태는 가치량과 가격 사이[다시 말해, 가치량과 그 화폐적 표현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을 허용할 뿐 아니라, 하나의 질적 모순[화폐는 상품의 가치형태에 지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가격이 전혀 가치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내포할 수가 있다. 그 자체로서는 상품이 아닌 것[예컨대 양심이나 명예 등]이 그 소유자에 의해 판매용으로 제공될 수 있으며, 그 가격을 통해 상품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태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물건은 가치(價値)를 가
    지지 않지만 가격(價格)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의 가격표현은 수학상의 어떤 양{예: 허수}과 같이 상상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 상상적인 가격형태, 예컨대 미개간지[거기에는 인간노동이 대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의 가격은 현실의 가치관계 또는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관계를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상대적 가치형태 일반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격은 일정량의 등가물(예: 1온스의 금)이 어떤 상품(예: 1톤의 쇠)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그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지, 거꾸로 쇠가 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것에 의해 쇠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상품이 실제로 교환가치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현물형태를 벗어버리고 단순한 상상적인 금으로부터 현실적인 금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상품으로서는 이 형태변화가 헤겔의 '개념'에서 필
    연으로부터 자유로 이행하는 것, 또는 가재가 자기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 또는 성(聖) 제롬이 아담의 원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주석 15: 제롬은 청년시대에 육체적 정욕과 격렬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이것은 그가 사막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환상과 싸웠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정신적 정욕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컨대 그는 말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주의 심판자 앞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목소리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라고. '나는 기독교도올시다.’ '거짓말이다. 너는 키케로(Cicero)의 한 패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심판자의 큰 소리가 울렸다. ")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상품은 그 실제의 모습(예컨대 쇠라는 모습)과 나란히 [자기의 가격 형태에서1]관념적인 가치모습 또는 상상적인 금모습을 가질 수 있지만. 상품은 현실적으로 쇠인 동시에 현실적인 금일 수는 없다. 상품에 가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상상적인 금을 상품에 등치하면 되지만, 상품이 그 소유자에게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금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만약 쇠의 소유자가 어떤 다른 상품의 소유자와 대면하여 그에게 쇠의 가격을 가리키면서 그것은 쇠가 이미 화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상대방은 천국에서 성베드로가 자기 앞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한 단테에게 대답한 것처럼 대답할 것이다.

    "이 돈의 품질과 무게는 이미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말해 보라, 그것이 네 주머니에 있는가 없는가."

    가격형태는, 상품이 화폐와 교환될 수 있다는 것과 이러한 교환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다른 한편, 금은 교환과정에서 이미 화폐상품으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념적인 가치척도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관념적인 가치척도 속에는 경화( 硬貨 hard cash)가 숨어 있다.



    제 2 절 유통수단



    (a) 상품의 변태(變態: metamorphosis)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상품의 교환은 모순되고 서로 배제하는 관계들을 내포하고 있다. 상품의 발전[상품과 화폐로의 상품의 분화]은 이 모순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제공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현실의 모순이 해결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물체가 끊임없이 다른 한 물체를 향해 낙하하면서 동시에 그 물체로부터 끊임없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타원은 이 모순이 실현되는 동시에 해결되는 운동형태다.
    교환과정이 상품들을 [그것들이 비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것들이 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 이전시키는 한, 그것은 사회적인 물질대사(物質代謝)이다. 어떤 유용노동의 생산물이 다른 유용노동의 생산물을 대체한다. 사용가치로 쓰이는 장소에 도달하면, 상품은 교환(交換)의 영역을 떠나 소비(消費)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상품교환의 영역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 과정을 형태의 측면에서, 즉 사회적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상품들의 형태변환(變煥) 또는 변태(變態)만을 고찰해야 한다.
    이 형태변환에 대한 이해가 지금까지 불충분했던 것은, 가치의 개념 그 자체가 명료하지 않았다는 점을 별도로 하면, 어떤 한 상품의 형태변환은 언제나 두 종류의 상품[즉, 보통상품과 화폐상품]의 교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정 때문이다. 상품과 금의 교환이라는 교환의 소재적(素材的) 요소에만 집착할 때에는, 정말로 보아야 할 것[즉, 상품의 형태상의 변화]을 간과하게 된다. 단순한 상품으로서의 금은 아직 화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다른 상품들은 그들의 가격을 통해 [그들 자신의 화폐모습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금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상품은 우선은 도금(鍊金)도 하지 않고 사탕도 넣지 않고 타고난 모습 그대로 교환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교환과정은 상품을 상품과 화폐라는 두 개의 요소로 분화시키는데, 이 두 개의 요소는 상품에 내재하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을 표현하는 외적 대립이다. 이 대립에서 사용가치로서의 상품들이 교환가치로서의 화폐와 대립한다. 다른 한편, 이 대립의 어느 쪽도 상품이며, 따라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은 두 극(極)
    의 각각에서 서로 반대로 표현되며, 또 이것에 의해 두 극의 상호관계가 표현된다. 등식의 한 편에는 보통의 상품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 그것의 가치로서의 존재는 가격에서 다만 관념적으로 나타날 뿐이며, 이 가격을 통해 상품은 [상품가치의 진정한 화신인] 금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등식의 다른 한편에 있는} 금이라는 물건은 오직 가치의 화신, 화폐로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금은 현실적으로 교환가치(交換價値)이다. 금의 사용가치는 일련의 상대적 가치표현들[여기서 금은 다른 모든 상품들을 자신의 유용성의 물질적 표현의 총체로 대면한다]에서 다만 관념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상품들의 이와 같은 대립적 형태들은 교환과정의 현실적인 운동형태들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상품소유[예컨대 우리의 첫 친구인 아마포 직포자]와 함께 교환장소인 시장(市場)에 가보기로 하자. 그의 상품인 20미터의 아마포는 2원이라는 가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것을 2원과 교환하고, 그 다음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답게 이 2원을 같은 가격의 가정용 성경책과 다시 교환한다. 그에게는 단순한 상품이며 가치의 답지자인 아마포가 그것의 가치모습인 금과 교환되어 양도되고, 이 가치모습은 다시 다른 하나의 상품, 즉 성경책과 교환되어 양도된다 이제 이
    성경책은 사용대상(object of utility)으로서 직포자의 집으로 가서 신앙의 욕망을 만족시키게 된다. 이와 같이 상품의 교환과정은 대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두 개의 변태-상품의 화폐로의 전환과, 화폐로부터 상품으로의 재전환- 에 의해 수행된다.(주석 16: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가 불에서 만물이 발생하며 만물에서 불이 발생한다고 말한 것은, 금은 재화들과 교환되며 재화들은 금과 교환되는 것과 같다"(F. 라살, ?에페소스의 은사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 베를린, 1858년, 제1권, p. 222). 이 문맥에 대한 라살의 주(p. 224주3)는 화폐를 부당하게도 단순한 가치상징(價値象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변태의 두 계기(契機: moments)는 직포자의 상이한 거래행위[즉, 상품을 화폐와 교환하는 판매와, 화폐를 상품과 교환하는 구매]임과 동시에 두 행위의 통일(구매를 위한 판매)이다.
    이제 아마포 직포자가 이 거래의 최종결과를 검토해 본다면, 그는 아마포 대신 성경책을, 즉 그의 최초의 상품 대신 그것과 가치(價値)는 같으나 유용성(有用性)은 다른 별개의 한 상품을 가지고 있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기타의 생활수단과 생산수단도 얻는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전체 과정은 그의 노동생산물과 다른 사람의 노동생산물과의 교환[즉, 생산물들의 교환]을 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상품의 교환과정은 다음과 같은 형태변환을 하면서 이루어진다.

    상품 - 화폐 - 상품

    C - M - C

    그 소재적 내용을 본다면, 이 운동은 C-C, 즉 상품과 상품의 교환이며, 사회적 노동의 물질대사인데, 이 물질대사가 결말을 지을 때에는 과정 자체도 사라진다.

    C - M. 상품의 제1 변태 또는 판매
    가치가 상품체로부터 금체(金體: body of gold)로 건너뛰는 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salto mortale)이다.(역자 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88.)
    만약 이 도약에 실패한다면, 상품 자체로서는 고통스러울 것이 없으나 상품소유자에게는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회적 분업은 상품소유자의 노동을 일면적(一面的)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그의 욕망을 다면적(多面的)인 것으로 만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산물은 그에게 오직 교환가치로서만 역할한다. 그러나 그의 생산물은 화폐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화폐는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있다. 화폐를 다른 사람의 주머니로부터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상품은 우선 화폐소유자에게 사용가치로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 상품에 지출된 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형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노동은 사회적 분업(分業)의 일환이어야 한다. 그러나 분업은 하나의 자연발생적인 생산조직이고, 그 조직은 상품생산자의 배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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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 풍수환(風水渙)
    『 순풍에 돛 』
     
     ○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체든 무생물체든
     ○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극히 드뭅니
     ●     다. 우리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
            려고 할때에는 반드시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잘
     ●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머리가 좋은 사람은 
     ○     자신의 잘못을 되살펴 바라보지만 더 좋은 사람은
     ●     무엇 때문에 안되는지 그 원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자연이 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우주가 원하고 있지 않는 것은 되어지지
            가 않는 것입니다. 우주가 원하는 법칙 그것을 우
            리는 성리(性理)라고 말합니다. 즉, 사람이 성공
            을 한다든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든가 하는 것
            은 물론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노력이 성리와 일치
            했을 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운이 있다
            고도 합니다. 운은 물과 같이 항상 떠 다니고 있습
            니다. 이러한 운(運)과 내가 어떻게 해야 복(福)을
            받을 것인가를 알려 주는 것이 바로 환(渙)괘입니
            다.
     
                           풍수환(風水渙)
     
        환(渙)은 분산한다, 분산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돛을 달고 배가 물위를 가는 상(象)으로 밖으로 향해
        가는 큰 기운을 발산하고 대사업을 이룩해 시기를 나
        타낸다. 괘의 형상은 물의 수면 위로 바람이 부는 형
        상으로 물 위에 떠 있는 나무 잎과 검불을 흐트려 놓
        는 것이다. 그래서 정체된 상태를 헤쳐나가고 새로운
        출발을 기하는데는 좋은 괘상이다.  그러나 흐트린다
        는 것은 민심이 떠난다는 의미도 있고 나라가 분열된
        다는 의미도 있다. 가족이 분열된다는 어두운 암시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매사에 출발에 임해서는 이러
        한 사실을 명심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큰 위험
        과 난관을 극복하여 뜻한 바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원했듯이 우주도 원하면 이루어지지만 사람은 원하지만
    우주가 원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
    은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성리를 모르는 헛 노력은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같이 일어나 새벽별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 오지만 한 평생을 고생
    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주의 성리를 도외시한
    채 자기 몸만 갖고 열심히 한다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
    이를 먹어서 힘든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해서 목숨을 잃는다든가 하
    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주의 성리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아
    야 됩니다. 우리 인생에 연습은 없습니다.  하늘은 결코 연습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
    로 하늘의 법칙이 허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돈으로 사 먹
    었는데 그것이 어찌 하늘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냐고 반문 하는 사
    람은 언젠가는 하늘로 부터 원망어린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하늘의 법칙이라는
    평등한 능력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실감하지 않으면 안되
    겠습니다. 사람들은 운을 믿습니다. 상황이 있고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행운과 불운은 없습니다. 만약 행운과 불운이 있다
    고 가정을 한다면 행운은 만나면 좋고 불운은 피하면 좋습니다.
     
        대상. 바람이 물위에서 불어 온다. 이것이 환의 괘상
        이다. 성왕은 이 괘상을 보고 천제(天帝)에 제사지내
        고 종묘를 세워 백성의 흩어짐을 막는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행운과 불운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피하면 행운이 될 수 있고 만나면 또 행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행동 하나 하나를 헛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의해야만 합니다. 행운은 피하고 불운은 맞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좋
    지 않은 소리라고 해서 수용하지 못하고 피해 버리면 그것은 불운
    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기 기분에 치우쳐서 위로 팔짝 뛰었다가
    는 자칫 머리를 부닥쳐 다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하고
    자 할때는 현재 처해져 있는 그 상황에서 부터 벗어나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항상 인식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그렇
    치 않으면 매사에 실수하여 다치게 됩니다. 상괘는 바람이고 하괘
    는 물을 뜻합니다. 물위에 바람이 부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물위
    에 떠 다니듯 대세의 흐름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
    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방향을 통해서 도달하
    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족이 뭉치지 않으면 상황의 바람이
    흩어지게 만듭니다.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불어오는  상
    황을 통해 흘러가야 흩어짐 없이 온전하게 갈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음효. 위기로부터 구해진다. 구해주는 협력자
        는 씩씩하고 용감하다. 그대로 따라 가기만 해도 길하
        다.
     
      상황을 떠나지 말라. 그러나 머무르지도 말라는 말을 잘 명심해
    야 합니다. 물 위에 바람이 불면 자기자신만 가만히 던져 놓고 있
    으면 바람의 힘을 타고 저절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괘는
    대단히 좋은 괘입니다.  그러나 할려고 하는 마음 하나만 갖고 상
    황을 살피지 않고 심정가는대로 하게 되면 오히려 그 상황에 놓여
    진 것들이 다 휘날려 버리게 됩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나 그
    밖에 먼지는 바람에 휘날려 버리게 되듯이 할려고 하는 것이 오히
    려 잃어 버리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잠자리가 앉을 수 있는 곳에 준비를 하고 있어야 잠자리를 잡을
    수 있듯이 날아가는 잠자리를 쫓아 다니면 잡지 못하는 것과 같습
    니다.  하고자 하는 자기자신의 힘이 반경의 상황을 바람에  날려
    버리지 않도록  그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큰 발전을 이룰 수가 없
    습니다. 풍수환은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환은 뿔뿔이 흩어진
    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면 상황이 흩날려 버려 이익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이 불운을 막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처지를 수습하고 상
    황을 수습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되면 하늘이 도와서 하늘
    의 힘으로 행운을 얻어서 마치 물 위에 올라가 있으면 행운이라는
    바람이 힘 안들이고 실어 날라다 주듯이 그렇게 어려운 물의 상황
    을 건널 수 있도록 크나큰 발전을 꾀하는 것이 바로 풍수환괘입니
    다.
     
        두 번째 양효. 흐트러질 위기를 만나서는 급히 서둘러
        지원자를 붙들어야 한다. 바라는 바가 이뤄져서  후회
        가 없다.
     
      사회가 싫어서 그 사회를 버리고 외딴섬에 가서 살려고 하는 사
    람은 사람이 아닌 짐승들에게 피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물에 빠
    진 자는 작은 나뭇 가지라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
    황이 자기를 따돌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터를 버리고 좀
    더 편한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은 행운을 얻을 자격을 스스로가
    박탈하는 꼴입니다.  조국이 살기 어렵다고 조국을 버리고 자기만
    이 잘 살겠다고 떠난 사람들은 나중에는 조국이 잘 살더라도 돌아
    올 수가 없습니다. 외지에서의 험난한 고생으로 인해 원래의 자리
    로 되돌아올 힘 마져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일수
    록 작은 가지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그 자리를 피하지 말고 오히려
    처한 상황을 통해서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행
    운은 찾아 옵니다. 그래거 그대로 따라 가기만 해도 길하다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음효. 몸을 바쳐 남을 위해 헌신한다. 결코 후
        회는 없다.
     
      대부분 하려는 바가 있어도 환경에 의해 치우쳐지면 할 바를 행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환경이라는 그 상황을 저버려서는 않됩니다
    . 우리가 무언가를 한다고 했을 때 그 상황에서 절망이 오게 되면
    그 절망을 떠 받쳐줄 수 있는 동반자는 바로 자신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는 먼저 자기자신을 위
    하지 말고 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크
    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바로 큰 발전은 하늘이 원하는
    뜻입니다. 이와같이 목숨의 희생이 없으면 원하는 바는 자기자신에
    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 환경과 그 처한
    사회의 삶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때 그 가족, 그 사회,
    그 환경이 바로 우리가 찾았던 행복의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최상의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그 때 비로소 바로보게 될 것입니
    다. 내가 싫어서 떠난 곳이지만 찾아서 헤매인 바로 그곳은 결국
    자기가 떠났던 그 곳이라는 사실을 현명한 사람은 알고 있는 법입
    니다. 그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네 번째 음효. 사사로운 당파를 해산시키면 크게 길하
        다.  일단 해산시켜버린 후에라야 대동 단결이 가능하
        다. 놀라운 대 사업이 성취될 것이다.
     
     일은 노동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꾼의 기질로 창조적으로 해
    내야 합니다. 노동이 필요한 것은 로보트로 하면 됩니다. 사람은 창
    조력인 일을 해야 합니다. 노동은 게임입니다. 즐겁게 해야합니다.
    힘들게 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환은 흩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흩어짐
    이 있어야 새롭게 창조됨이 있는 것입니다. 일이란 좋은 아이디어가
    실현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걸고 일을 하게 되면 일단은
    흩어지게 됩니다. 흩어짐이 있으면 모임이 있는 법입니다. 한 번 흩
    어짐이 있은 후에라야 국민의 대동 단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일대 대개혁은 범상한 생각으로는 되어 지지가 않습니다. 한 번 해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어 놓고
    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법을 멀리
    하고 자신의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살게 되면 결국은 노동만 하는것
    과 같습니다.  우주의 법칙을 사용하는 사람이 곧 일을 하는 일꾼입
    니다. 그랬을 때 놀라운 대 사업을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양효.  흩어질 위기에 직면했을 때  천하를
        호령하고 그것을 막으면 왕위는 안정되고 허물이 없어
        진다.
     
      음성에너지가 강하게 당기면 흩어짐이 오게 됩니다. 당겨서 오게
    끔하면 대길하다는 것입니다. 대나무가 매듭을 지으며 올라갈때도 그
    껍질을 단락을 지으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대개혁을 할 때는 한번에
    신중하게 명령을 내리며 한 번 내린 명령은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할 때는 그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의도를 모
    르고 하는 것은 엉뚱한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바 의도를
    명확히 알아서 시작하면 그것이 결국 가장 빠른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천하를 호령하고 안되는 부분을 막아야 명령은 안
    정되고 신뢰감을 주며 허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양효. 유혈(流血)의 위기를 만난다. 조심해
        서 위험을 멀리하면 허물은 없을 것이다.
     
      위해를 멀리 떠나면 허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은
    정확한 길을 찾아 가야 합니다. 끝을 갖고 명확히 해야 합니다. 주변
    을 살펴서 나아가야 실패가 없습니다. 멀리 뻗어 나아가려면 명확한
    끝을 찾아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조심해서 위험을 멀리하면 허물은
    없을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923
  • 58. 태위택(兌爲澤)
    『 영합의 즐거움 』
     
     ●     정치가는 국민들로부터 선출을 받지만 결국은 그 정
     ○     치가가 국민을 움직입니다.  유능한 기업가는  돈이
     ○     있는 세계에서 돈을 버는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돈 위에서 돈을 움직입니다. 아주 유능한 인간은 자
     ●     기라고 하는 속안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자기
     ○     자신을 마음대로 내어 쓸 수 있게 됩니다. 자기자신
     ○     을 배열하여 자유자재로 드러내기에  스스로를 움직
            이는 능력으로 주변을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태위택(兌爲澤)
     
        [택(澤)]괘는 연못을 뜻한다. 연못과 연못이 합쳐져서
        바다를 이룬다. 그러므로  즐거움이 따른다. 택  괘는
        크게 발전한다. 강효가 안에 있고  유효가 바깥에 있
        다. 즐거워 하는 형태를 깊이  지속하여 중단이 없으
        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다. 힘든  일에 백성보다 앞
        장서면 백성들이 노고를 잊고 힘쓰며  지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을 안겨주게 된다.
     
      이 괘는 위의 괘와 아래 괘가 똑같이 생겼으며, 안에  나가려고
    하는 양성에너지가 두 개, 겉에 당기려고 하는 음성에너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 바로 물입니다. 물이 흐를 수
    있는 것은 안에서 바깥으로 튀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 맨
    바깥의 힘은 안으로 휘말리고 있기 때문에 흘러가도 흩어지지 않
    는 상태, 이것이 물입니다.
      "[택(澤)]괘는 연못을 뜻한다. 즉 물인 연못과 연못이 합쳐져서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이 따른다." [택(澤)]괘
    는 물과 물이 겹쳐져 있습니다.  이는 곧 큰 물이 된다는  뜻이며
    또한 상당히 발전하고 번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이 주는 의
    미는 기쁨입니다. 안에서는 하고자 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도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거두어 들일 것을 생각하면서
    행하기 때문에 기쁨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주려고만 하
    거나, 거둬들일 것이 없이 무조건 하려고만 하면 생기는  것이 없
    습니다. 진정 하고자 하는 것이 속뜻으로 서고, 하지 않으면 못베
    길 만큼 할만한 힘이 있고 힘만큼 거둬들일 수 있을 때 기쁨을 맞
    이할 수 있습니다.
     
      시냇물이 모여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룹니다. 물의  가
    장 중요한 특성은 서로  합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합쳐질
    수 있으면 기쁨이 온다란 뜻도 됩니다. 물이 합쳐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움켜쥐려는 것을 빨리 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움
    켜쥐려는 자기 자신을 고집하면 물은 자기 갈 방향대로 서로 가서
    흩어져 버립니다.
      "강효가 안에 있고 유효가 바깥에  있다." 겉이 강해져서는 안
    됩니다. 자존심을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은 속이 약한 사람입니다.
    속으로 하고자 하는 뜻이 분명한 사람은 겉을 낮출 줄 알아야 합
    니다. 흐르고자 하면 흐름을 막을 수  없는 물, 어디든지 흐를 수
    있는 물, 물이 막히지 않고 흐를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겉을 겸
    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돌멩이가 가로 막으면 가만히 그 아래로
    돌아 흐를 수 있는 겸손, 그래서  물은 연못이 되고, 바다가 되는
    법입니다. 때문에 이 괘는 속마음은 꿋꿋하고  겉모습은 부드러운
    미덕을 표현합니다.
     
      "즐거워 하는 형태를 깊이 지속하여 중단이  없으면 만사가 순
    조로울 것이다." 뜻이 큰  사람은 결코 자만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공의 제일 조건은 두뇌의 명석함도 아니고, 끊어지지 않게 꾸준
    히 오래한다는 것도 아니고, 많은 재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오
    직 즐겨할 수 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할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답이 되어져서 결
    국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건드리면
    그 사람은 힘이  뻣뻣해지면서 밀어버리지만  즐겨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아무리 미운 사람도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나를 향
    해서 성내는  사람을 손쉽게  물리치는 방법은  즐거운 마음으로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다면 조금  더 큰 마음으로  이해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사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분노는 곧
    사라집니다.
      "힘든 일에 백성보다 앞장서면 백성들이 노고를 잊고 힘쓴다."
    어려운 길을 만날 때 피하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고  즐거운 마음
    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도와줄 수 있는 벗이 생기면 난관은  아름다운 숲으로 변할 것입
    니다. 즐거이 힘든 일에  다른 사람보다 앞장서면 다른  사람들도
    그 일을 거들어 주게 됩니다.
      "지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을 안겨주게 된다."  '저
    사람은 자꾸 실수를 해서  같이 일하기 싫다.' 하는  마음이 생길
    때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실수를 같이  도우면 더 이상 미안해서
    그 사람은 그와같은 실수를 결코 다시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너
    는 왜 자꾸 그렇게 실수를 저지르는 거야?" 하고 다구치면 그 사
    람은 자신의 실수를 돌이켜 볼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뭐 어째서 그러냐" 하고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진정으로 깊고 큰 사랑은 미운 짓을 통해서 강해집니다. 커다란
    미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은 정말로 큰 사랑입니다.  그러나
    조그만 실수를 외면해야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선 사랑이 흘러
    나오지 않습니다. 때문에 어렵든 쉽든,  작든 크든 즐거운 마음으
    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즐겨한다는 것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격려
    하고 분발하게 만드며 커다란 힘을 남겨두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덧 모르게 바다가 되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대상. 못과 못이 마주 잇대어져 있는 것이 택(澤)괘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친분이 있는 사람
        과 모여 함께 학습한다.
     
      태(兌)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연못, 소녀, 입(口)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괘는 두 개가 나란히 겹쳐 있어서 처녀 둘이 즐겁게
    말하며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는 사람을 저절로 즐겁
    게 하는 화목한 분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주변이 즐
    겁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괘는 말해 주고 있
    습니다.  입은 웃거나 말하는 것으로 마음을 통하게 하지만 한번
    잘못되면 입이 더러워질 수가 있으며 서로의 의중을 모르고 하는
    말에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입은 인
    간관계를 원할하게 하는데 사용하며 그러기 위해선 성실한 마음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양효. 화합한 마음으로  즐겨하니 서로의 행
        동에 의심하는 바가 없다. 길하다.
     
      "화합한 마음으로 즐겨하니  서로의 행동에 의심하는  바가 없
    다." '내가 뭐하러 열심히 일하냐? 저쪽이 100% 일하면 나는 30%
    는 쉬어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되면 서로의 마음에 의심이 생깁
    니다. 하고자 하는 것이 합쳐진 상태에서는 서로 의심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길하다'가 되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하는 것이
    없이 한다'가 되어 합쳐질  때 일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훌륭한 성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두 번째 양효. 진심으로 즐겨하는 마음은 서로의 마음
        을 믿기 때문이다. 길하다. 후회는 사라진다.
     
      "진심으로 즐겨하는 마음은 서로의 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어
    느 한 명이 뭔가 걱정스럽고, 다른 일에 신경쓰고 있다면 그 마음
    은 서로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일이 어려워집니
    다. 성공과 실패는 '성공해야 되겠다'하는 먹은 마음에 의해 나타
    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느냐, 아니
    냐에 딸린 문제입니다.
      "후회는 사라진다." 진심으로 축복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는 서
    로간에 사랑만을 위해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조금 손해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계산을 하면 후회할 일이 생깁
    니다.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즐겁고, 자기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서
    로 같이 있는 것이 즐거울 때, 진정으로 서로 믿는 마음이며 그때
    후회할 일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공연히 무언가 계산하게 되
    면 그 계산으로 인해 이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산한 것보다
    몇 배 손해가 따르게 됩니다.
      "계산할 바에야 사랑하지 말라."
      "계산할 바에야 행하지 말라."
      "그러나 계산을 위해서 행하지 않는 것도 하지마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하라. 그때 우주의 계산이 따라
    오게 된다. 셀 수 없을 만큼 ."
     
        세 번째 음효. 남에게 영합하여 즐겨한다. 흉하다.
     
      뜻과 뜻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영합하는  것은 불길한
    일입니다. 이 집을 잘 건사하기 위한 마음을 가진 주인이 이 집을
    잘 건사해 줄 사람인지  알고 영합해야 하는데  쓸데없이 마음이
    넓어져서 한밤중에 "아니 누구십니까?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십시오." 하고 도둑인지 벗인지 모르고 영합하면 도둑이 들어와
    서 물건을 모두 뺏어가 버립니다.
      겉이 영합해서는 안되며, 속이 영합해야 합니다. 진정한 영합도
    갖지 않은 채, 무조건 영합하면  도둑이 들어옵니다. 따라서 후회
    할 일이 생기기 전에 매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처해져 있는
    지금 여건을 대하려는 마음을 갖고, 그 결실을 거둬들일  수 있도
    록 뜻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때 어느덧 인생은 바다가 되어 있
    을 것입니다.  취하지 못하면 모두가 다 실수인 것입니다. 태위택
    괘는 즐겁게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
    각하고 하면 꼭 실수를 하게 됩니다.  차는 굴러가야 하지만 운전
    자는 어느순간 어느 순간에도 멎을 수 있어야 하듯이 너무 속력을
    내면 급정지가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속은 강하고 겉은 부드럽다
    입니다. 겉이 부드럽지 못하면 취할 바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서가듯이 항상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사를 즐겁게 하되 항상 여유를 잃지 말고 급한 마음에 사로잡히
    지 말아야 합니다. 급한 마음으로 하면 실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양효. 어느것이 진정 즐거운 것일까? 가리고
        있다. 판단을 못내려 번민한다.  굽히지 않는 의젓한
        마음으로 불의를 미워한다면 전도에 경사스러운 기쁨
        이 있을 것이다.
     
     세번째가 음성 에너지가 융합하기 위해서는 가려서 해야하는데 그
    가려서 하기 위해서는 여유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양성 에너지입니다. 삼효까지가 음성에너지로 두 양성 에너
    지를 거쳐왔기 때문에 촉박한 여유로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
    에 사효에서 다시금 양효로 받았으니 어느것이 진정 즐거운 것인지
    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양성 에너지의 하고자 함만 많아지기 때
    문에 섣불리 판단을 못 내리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판단을 못
    내려 번민한다고 했습니다.  "굽히지 않는 의젓한 마음으로 불의를
    미워한다면 전도에 경사스러운 기쁨이 있을 것이다."  급한 마음을
    갖되 무엇인가 두어걸음 뒤로 물러서는 마음을 가지라는 얘기입니
    다. 그래야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양효. 악당을 가차없이 제거하는데 성의를
        가진다. 안되는 일도 밀고 나간다.  제왕으로써 용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하다.
     
     급한 마음으로 하게되면 상대방이 적의를 품고 있는지 의기투합하
    고자 하는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상대의 속셈을 읽을 수 있으
    려면 여유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자 하는 본
    인의 에네르기에 너무 사로잡혀 있으면 상대의 속셈을 읽을 겨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너무 급하기 때문에 상대를 못 보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음효. 남의 힘을 끌어오니 즐겁다. 자신의
        힘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뜻을 높이는 일입니다.  우
    리가 살아가다보면 주변에 뜻이 안 맞는 사람이 참 많이 있다는 것
    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뜻이 높다고 해서  높은 뜻을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뜻이 높을수록 여유를 갖고 항상 낮춰야 됩니다. 자기자
    신을 낮췄을 때 비로소 자신의 뜻한 바를 세상에 갖출수가  있습니
    다.  그래서 스스로 뜻을 높임과 동시에 뜻이 낮다고 하는 이 세계
    와 잘 영합을 하여서  높은 뜻이 곧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뜻과 뜻이 뭉쳐야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나는 뭉
    쳐 지지가 않습니다. 뜻이 아닌 마음으로 뭉치면 마음이 변덕스럽기
    때문에 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자세를 갖춰야만 합니다. 물과 물이 합칠 수 있는 것도 받아들이는
    수용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움직이게 되면 세상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우주는 너무나도
    단순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며, 우리의 삶 또한 무한한 능력과
    힘을 행사할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742
  • 57. 손위풍(巽爲風)
    『 반복하여 시도하다 』
     
     ●    인생은 결코 연습이 없습니다. 시간은  다시 보상받
     ●    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매우 치열합니
     ○    다. '이제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시작해야겠다.'는 마
            음은 그렇게 써놓고 잊어먹는게 또  마음입니다. 많
     ●    은 실패를 통해서 큰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실
     ●    패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저 좋은
     ○    것을 따라서 사는 사람도 밤낮 뒤쳐져서 사는  사람
            에 불과합니다.
     
                                    손위풍(巽爲風)
     
        [손(巽)] 괘는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괘다.
        이 괘는 바람의 형태를 겹쳐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서 겸손한 마음으로 몇 번이
        고 성의있는 행동을 거듭하는 상태를 표현한다. 강효
        가 왕자의 위치인 가운데에 있으니 이것은 훌륭한 지
        도자가 정당한 위치에 있어서 바른 도리를 쫓아 뜻을
        펴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유효가  모두 강효의 아
        래에 있어서 강효에 순종하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것은 모든 국민이 훌륭한 지도자에게  순응하는 모습
        니다. 그러므로 손괘는 조금씩 점차로 발전하는 것이
        다.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여 나아가면 순조로운 성
        과를 거두리라. 겸손한 태도로 남의  의견을 쫓기 때
        문에 훌륭한 인물을 얻기에 좋다.
     
      "[손(巽)] 괘는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괘다. 이  괘는
    바람의 형태를 겹쳐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서 겸손한 마음으로 몇 번이고 성의있는 행동을 거듭하는 상
    태를 표현한다." 손(巽) 괘는 바람이  두 개 겹쳐서 있습니다. 바
    람이 부는데 또 바람이 불어오므로 이 괘는 산들바람을 뜻합니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물과 같아서 자기보다 강한데 부닥치면 자
    기를 스스로 낮추어 돌아서 나갑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든지 스며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과 바람의 차이점은  물은 자기라
    고 하는 물질을 분명하게 갖고 있는데  반하여 바람은 분명한 자
    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람의 큰  단점입니
    다.
     
      자기가 굳건히 존재하지 않는 바람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습니
    다. 매사에 자기를 낮추어 하되, 그 안에는 심지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심지가 없으면  흩어져 버리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안에 분명한 것이 들어 있는 사람은 기분내키는대로 하지 않습니
    다. 한 번해서 안된다고 재도전하고 또 재도전하는 것은  큰 힘을
    무리하게 가하면 안됩니다.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가 이루어질 때 있게끔 적당한 힘을
    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자리를 잡을 때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살
    짝 잡아야 되는데 손으로 움켜 잡으면 잠자리는 잡았지만 형태가
    망가져 버리게 됩니다. 한 번 해서  안되었을 때 조금 더 조이고,
    더 조이고 하면서 힘을 가해 나가는 것은 안에 분명한 심지가 있
    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심지가 없으면 자꾸 새버리는  결과가 됩
    니다.
     
      "그러므로 손괘는 조금씩 점차로 발전하는 것이다." 일을 제대
    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미친 듯이 신나서 하는 것
    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조금씩, 점차로라는 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강한 것이 망가져 버립니다. 또  안에 강한
    것이 분명하게 있지 않으면 조금씩 조금씩  하다가 뭘 하는줄 모
    르고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일 조금  하다가 그만두고, 저 일 조
    금하다가 그만두는 사람은 안에 하는 일에 대한 대상이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한꺼번에  와락 된
    다기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부터 축적되어지면서 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괘는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손위풍] 괘는 바람에 바람이 부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어나가기 때문에  끌어 모으지
    못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지 않고 주저 앉아  있는
    것보다는 일단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낫기 때문에 약간의 발전이
    있다고 표현해 놓았지만 바람은  자신의 단점을 잘  알지 못하면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하더라도 성공할 수는 없게 됩니다.
      거두어 들일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한 두 번 하다가 안되면
    그만두어 버립니다. 상사가  아니꼬와서 못다니겠다는 사람은  그
    안에 거두어 들일려고 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거두어 들일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난제에 부딪치면
    달래가면서, 문제를 살살 녹여가면서  해결해냅니다. 그런 사람이
    반드시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거듭하여 행하
    는 것보다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 없느
    냐가 더 중요합니다.
      인생은 결코 연습이 없습니다. 시간은 다시 보상받을 수 없습니
    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매우 치열합니다. '이제부터 마음을  가다
    듬고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은 그렇게 써놓고 잊어먹는게 또 마음
    입니다. 많은 실패를 통해서 큰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실패
    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저 좋은 것을  따라서 사
    는 사람도 밤낮 뒤쳐져서 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대상. 바람이 바람을 따르는 것이 손(巽)괘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성
        의를 피력하여 일을 처리한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성의를 피력하여 일을 처리한다." 거듭
    거듭 성의를 피력하는 것은 중심이 없으면 나올 수  없습니다. 흔
    히 소인배들은 일을 할 때 중심을 잡지않고 신나게 시작하였다가
    뭘 해야 하는 지를  모르고 허둥대다가 결국은  중도에 포기하곤
    합니다. 일의 완성과 발전을 위해서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성의
    를 갖고 거듭 거듭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첫 번째 음효. 확고한 신념이  없고 의심하는 마음으
        로 진퇴를 거듭한다.  무사와 같은  꿋꿋하고 변하지
        않는 의지를 가지는 것이 좋다.
     
      '하면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는 그와같이 시작을 해야  합니다. 즉 무슨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마음의 성의를 갖고 시작해야 되는데, 마음의 성의라는 것
    은 처음부터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하다보면 성리의 눈이 틔어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성
    리의 눈은 틔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패도 따르게 되어 있습니
    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해서 결국은  발전합니다. 한 두 번 하다
    가 어려운 일이 있다 해서 포기하는  사람은 구축하려는 힘이 없
    었던 사람입니다. 안에 의지가 없는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멸망합
    니다. 동시에 거듭하기를 주저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 효는 "처음
    에는 확고한 신념이 없어서 의심하는 마음으로 진퇴를 거듭한다."
    꼭 해낼 수 있다라는 "무사와 같은  꿋꿋한 마음"만 있으면 실패
    를 하더라도 결국에는 완성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손해가 이익이 될 수도 있고, 또 너무 큰 이익을
    취해서는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
    이 곧 안에 분명한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좌우됩니다. '나'라는 것
    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 있는 '나'라야 됩니다. 현실을 망각한 '나'
    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있을 때 거듭거듭 노력하면 만물을
    자신이 원하는 데로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만이 거
    듭거듭 노력할 수 있으며 진정한 겸손을 할 수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뜻이 분명한 사람은 겸손을 내보일 수 있지만,  자기가 강하
    게 있는 사람은 절대로 겸손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망하게
    됩니다.
     
        두 번째 양효. 겸손한 태도로 의자 밑에 앉는다. 자주
        자주 무당을 불러 신의 가호를 빈다. 뜻이 도리에 맞
        으니 길하리라.
     
      "겸손한 태도로 의자  밑에 앉는다." 아무리  자기의 마음에는
    못 마땅하더라도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의자에  앉지 않고 밑에 내
    려가 앉듯이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하면  그때 신의 가호가 내리
    는 법입니다. 즉 진정으로  되어지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하면 반드시 신의 가호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절대로 인간
    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어느 정도 신의
    가호와 맞아 떨어졌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성공했을 때 그것은 인간이 성공시킨 것이 아니고 신이
    원하는 것을 인간이 해냈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성공이 얻어진 것
    입니다. 어떤 인간이 훌륭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잘 될 수 있는 신
    의 가호를 받는 노력을  하였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의 노력만으로 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리를 떠난  인간의
    노력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똑똑해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신위에
    있다는 자만심을 가져서는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신의
    가호가 생기게끔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만들어진 신이란 것도 결국은 나의 본성이 만든 것이며 게이
    머가 게임의 룰을 지키듯이 정한 룰을 따르는 것은 전체적인 즐거
    움과 안정을 위하는 길입니다.
     
      "자주 자주 무당을 불러 신의 가호를 빈다." 우리는 항상 '지금
    내가 너무 만족해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너무 나라는 틀안에
    쌓여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점을 수시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
    다. 자기에 너무 빠져  있으면 신의 가호를 못느끼게  되어있습니
    다.
      신의 가호를 반드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때가  비로
    서 가장 중립적인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그때 진정한  조심이 나
    오고, 그때 진정으로 챤스를 잡을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
    다. 그렇지 않을 때  신은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신의 가호를 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양효.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표시하며 비굴하게 군다. 그러나 마음의 진실이 없으
        니 마침내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난처한 지경에 빠지
        게 될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표시하며 비굴하게 군
    다." 남한테 얻는다는 것이 구걸하면 안얻어지는 법입니다. 몇 번
    이고 몇 번이고 거듭하되,  안에 구축하려고 하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해야지 거저 얻어먹으려는 식으로 구걸을 해서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뜻이 분명하게  있고 신의 가호와 마주치면  원하는
    것이 자신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해주는 것이  신입니
    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 무조건 손을 벌리면 오히려  난처한 지경
    에 빠져버립니다. 또 반대로  한 두 번 해보다가  안된다고 "에이
    짜증한다." 하고 그만두어 버리면 신의 가호를 느낄 수 없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거듭거듭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구걸인 지
    를 아는 사람은 군자입니다.  군자가 아닌 사람은 자꾸  비굴하게
    굽니다. 그러므로 겉은 숙이되 안은 결코 숙이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 음효. 후회할 만한 아무런 과실은 없다. 사냥
        에서 여러 가지 훌륭한 포획물을  얻어 온다. 겸손한
        태도로 군주를 도와 나라에 행적을 남긴다.
     
      다시 음성에너지가 갖추어졌습니다. 첫 번째 효에서 먼저  가지
    려는 것만을 생각하니 의심하는 마음만 생겼습니다. '이걸해서 정
    말 내가 잘 될까?' 이렇게 가지려는 것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
    다. 이루려 하는 것을 바로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는데 있어서 무턱대고 나가지 말고  겸손하게 나아가라고 했습니
    다. 마구 박차고 나아감으로 해서 조화를 깨뜨려서는 안된다고 하
    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아가면 음성에너지가 약해지기  때문에
    거둬들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냥에서 여러  가지 훌
    륭한 포획물을 얻어 온다. 겸손한 태도로 군주를 도와  나라에 행
    적을 남긴다." 다시  네 번째에서  음성에너지가 갖추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냥에서 여러 가지 훌륭한 포획물을 얻어오고 겸손한 태
    도로 군주를 도와 나라에 행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양효. 중정한 지위에  있어 한결같은 마음
        이 변함이 없으면 길하리라. 만사  순조롭지 않은 것
        이 없다. 처음에는 곤란이 있으나  뒤에는 성공이 있
        다. 모든 일에 사전 준비와 사후 처리에서 일관한 노
        력을 기울이면 길하리라.
     
      '내가 요렇게 하면 정말 좋은 성과가  있겠지.' 하는 마음을 갖
    고서 일을 하면 잘 안되는 법입니다. '내가  요번에 집을 사면 방
    을 요렇게 꾸미고, 카페트 깔고, 이렇게 인테리어를 하고 .' 등등
    온갖 설계와 인테리어를 하면  사기도 전에 아파트  당첨에서 뚝
    떨어집니다. 이렇게 꿈에 부풀어서 하면 뒤가 꼭 안되게  되어 있
    습니다. 아직 주어질 때가 아닌데  먼저 먹으니 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안되었을 때는 하지 말고, 때가 되면  우겨서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뒤가 똑같이 일관하려면 마음의 여흥이  먼저 사라진 뒤라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흥을 안나타내기 위해 아예 희망마저 갖
    지 않는 사람은 더더욱 될 일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중정의 지
    위에 있어 한결같은 마음이 변함이 없다." 입니다. 한결같은 마음
    이 변함이 없는 것, 이것은 여흥이 뒤쫓지 않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양효. 고요히 의자 밑에 앉아 있다. 재산과
        지위를 상실한다. 이렇게 하향의 상태로 이어지면 별
        다른 잘못이 없어도 흉한 것이다.
     
      "고요히 의자 밑에 앉아 있다."  그 지위가 극한에 이르렀으므
    로 지위는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음을 상징합니다. 겸손이 지나
    쳐서 속이 비어버리면 안됩니다. 속은  항상 차있어야 합니다. 산
    들바람은 거듭 불지만 힘이 약하기 때문에  주저앉아 버릴 수 있
    습니다. 주저 앉아서는 안됩니다. 항상  놀되 나아갈 바를 갖추고
    놀아야 합니다. 나갈 바 없이 노는 사람은 나갈 바를 갖추고 노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갖추어진  다
    음 노력과 노력을 거듭하면 크게  발전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
    는 것이 [손위풍]입니다.
      [손위풍]을 잘못 이해하고 거듭거듭 나아가기만 하면 순허풍이
    되어 버립니다. 그나마 나아가지도  않고 쌓기만 해야지 하면  그
    바람은 완전히 죽어버립니다. 바람이 불지도  않습니다. 항상 [손
    위풍]의 상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한결같은 마음을  갖도록 해야
    됩니다. 나가기 위한 것은 반드시 구축을 현실로 두고  나가야 됩
    니다. 구축이 현실이 되지 않고 구축하려는 마음만 갖고 나아가는
    것은 구축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664
  • 56. 화산려(火山旅)
    『 고독한 여행길 』
     
     ○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호
     ●     의를 갖고 중심이 가담해야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     결정해야 합니다. 호감이라고 하는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 충분히 느껴서  중심이 그것을 할  것인가, 말
     ○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나쁜 일이라서  무조건
     ●     외면하면 그 사람은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제일
     ●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화산려(火山旅)
     
        [려(旅)] 괘는 약간의 발전을 상징하는 괘다. 다섯 번
        째 유효(柔爻)가  강효(强爻)사이에서 중앙의  지위를
        얻어 걍효의 지위를 쫓고 있다.  고요히 멈춰서 밝은
        빛속에 선다. 그렇게 함으로써 갸날프나마 앞길이 열
        려 보인다. 나그네의 심정과 같은  조심함을 가져 길
        이 변함이 없으면 길하리라. 려(旅)의 뜻은 참으로 중
        대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
    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
    다. 그러나 마음은 몸  안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은 항상 몸
    바깥에 나와져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마음이 몸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쉬울 수도 있습니다. 정신이  딴데 팔려있는 사람들, 그것도
    일종의 마음이 몸 바깥에 나와있는  것입니다. 바람난 여자들, 그
    것도 마음이 몸 바깥에  나와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몸 바깥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마음이 몸 바깥으로 나오더라도 그 중심은
    항상 몸 안에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람난 여자들은 마음의
    중심이 바깥으로 나가버린 것입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으면 자꾸
    만 자기 마음에 안드는 것들은 외면해 버리게 됩니다.  누가 조금
    뭐라 그러면 삐지는 사람, 자존심 때문에 발길을 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몸 바깥으로 마음이 전혀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과거 무사들은 마음이 몸 저멀리 나가  있으면서 그 중심은 몸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사들은 눈으로 보지않아도 볼 수 있었
    습니다. 뒤에서 살기를 느껴서 적의 칼날이 몸 가까이  오면 즉시
    받아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의 눈입니다. 소위 안테나
    를 세운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마음의 눈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육체
    의 눈만 통해서 보고 마음이 스스로 컨트롤 되지 않는 사람은 마
    음의 중심이 몸 바깥으로 튀어 나가서  공연히 앞만 보고 가다가
    뒤에서 오는 오토바이에 치이는 경박스러움을 범하게  됩니다. 마
    음이 몸 안에 있는 사람은 제대로 느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바
    로 볼 수가 없습니다. 현실속에서 살면서 전혀 현실을  못 느끼고
    살게 됩니다.
      미국의 커다란 재벌이었던 록펠러는 돈에  관한한 현실적인 눈
    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공중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주머니에
    잔돈이 없어서 자기 비서한테 5센트를 빌렸습니다. 다음날 록펠러
    가 비서를 불러서 "자네한테 빌린 5센트일세. 받아가게." 하고  말
    했습니다. 비서는 "괜찮습니다. 그까짓 5센트 ." 하고 대답하였습
    니다. 록펠러가 나즉이 얘기했습니다.  "여보게, 이 5센트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이 돈은 1달러에 대한 1년치 이자일세." 여기서 1
    달러란 그 당시 한달을 생활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5센트를 단
    지 5센트로 보지 않고 5센트의 값어치를 알 수 있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록펠러는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한  문제 틀리는게 무지무지하게 안
    타깝습니다.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은 20문제만 써도 다  쓴 것같이
    가슴이 뿌듯합니다. 굉장히 인심이 후해져서 "한, 두 개 틀리면 어
    떠냐."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이 넓어서 나오는 배짱이 아니라
    지금 현실 감각을 못 느끼는 사람이 하는 얘기입니다.
      록펠러가 기름을 팔기위해 5리터짜리 깡통을 납땜해서 막고 있
    었습니다. 공장에서 한참 납땜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옆에  있던
    기술자에게 물었습니다. "이것봐. 이거  납땜하는데 납을 몇 방울
    떨어뜨리나?" "이것을 기름이 새지 않게 밀봉을 하려면  40방울이
    필요합니다." 록펠러가 한참 들여다 보더니  "자네 이걸 38방울로
    때워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한  번 38방울로 때워보게,
    열개만 ." 그리고 38방울로 때우니까 10개  가운데 3개가 기름이
    샜습니다. 다음에 39방울로 때우니까 10개 모두 기름이 새지 않았
    습니다. 그리고 록펠러는 앞으로 39방울로 줄이도록 지시하였습니
    다.
     
      록펠러가 납땜질하는 것을 무심코 넘기지 않은 것은 눈으로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몸 밖으로 나와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한 방울을 아껴도 될 것같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방울을
    아껴서 완전무결하게 기름이 새지 않았을 때 록펠러는 돈을 크게
    벌었을 때보다 더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그까짓 한 방울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호의를 갖고
    중심이 가담해야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호감
    이라고 하는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 충분히 느껴서 중심이 그것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나쁜 일이라서 무조건
    외면하면 그 사람은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제일  쓸모없는 사
    람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당신이 좋은 곳을 찾아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멀
    리서 보았을 때 이쁜 꽃은 가까이 가면 벌레도 많이 끼어있고 또
    조금 있다가 시들어 버립니다. 나는 황무지라도  당신으로 인해서
    그곳에 꽃이 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을 그렇게 살았을  때
    비로소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려(旅)] 괘는 여행을  뜻하는 괘입니다. 인생은  여행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행에서 성공한 사람은 마음이 몸 밖에 있고 중심
    은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정착되어 있고, 정착
    된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흥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이 속 안에 있는 사람은  인생을 아직도 여행하고 있습
    니다. 인생을 여행하는 식으로  살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큰
    득이 없습니다. 부평초같은 인생을 계속해서 걷는 것입니다.
     
      [려(旅)] 괘는 위는 불을 뜻하고 아래는 산을  뜻합니다. 즉 산
    위에 불이 붙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불이 일어나도 산밑에서부터
    일어나야지 활활 불길이 올라갈텐데, 산은 정지해있고  그 맨위에
    불길이 있으면 잘못하면 불씨는 꺼져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몸
    밖에 나와 있고 중심이  안에 있는 사람은 불길이  산 밑에 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심이라고  하는 산은 가운데  있고, 불길이
    세기 때문에 위에까지 번져나갈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괘는 마음이 꼭대기에 조금 있어서 이제 곧 꺼질
    것이냐, 켜질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려(旅)괘는 약간의 발전을  상징하는 괘다." 위의  화(火)괘는
    여성이고 아래 산(山)괘는 남성입니다. 남성의 에너지가 아래에서
    위로 뻗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발전할 수 있다라고 표현하
    였습니다. "유효(柔爻)가 강효(强爻)사이에서  중앙의 지위를 얻
    어 강효의 지위를 쫓고 있다. 고요히 멈춰서  밝은 빛속에 선다."
    다섯번째 음효와 외괘(外卦)인 화(火)에서 중용을 지키면서  고요
    히 멈춰서서 밝은 빛속에 섬으로써 가냘프나마 앞길이 열려 보인
    다는 뜻입니다.
      "나그네의 심정과 같은 조바심을 가져 길이  변함이 없으면 길
    하리라." 옛날 나그네는  오늘날 나그네와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옛날 나그네는 고생이 많았습니다.  길이 험하고, 맹수를  만나고,
    서리 맞아가면서 노숙을 해야하기도 하고, 물을 만나면 바지를 걷
    고 건너는 등 갖은 곤경과 두려움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조바심을 갖고 길을 가면 길하겠지만 마음이 밖에 나가있지 않고
    조금이라도 만족해하면 해를 당한다라는 뜻입니다. 또  가다가 그
    만둬도 지쳐서 당한다라는 뜻입니다. "려(旅)의 뜻은 참으로 중대
    하다." 그래서 나그네와 같은 그러한 때는 인생의 커다란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빨리 나그네로부터 안정을 얻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상. 산 위에 불이 타고 있는 것이  려(旅)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공명하고 신중한 태도로
        위급한 문제를 처리하고 미결수의 문제를 지연시키지
        않는다.
     
      "공명하고 신중한 태도로 위급한 문제를 처리하고 미결수의 문
    제를 지연시키지 않는다." 즉 려(旅)의 상태는 시급하다라는 뜻입
    니다. 좀 더 나그네 노릇하겠다고 마음먹는 동안 벌써 10년, 30년
    혹은 한 평생이 지나가 버립니다. 지금 빨리 변화해야 합니다. 지
    금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미래는 뻔한 것입니다.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앞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노력해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여행으로부터  졸업하지 못하면 그  인생은 이미
    끝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음효. 여행길에서 자질구레하고 천하게 군다.
        소갈머리가 적으니 남들이 싫어한다. 결국 재난을 자
        초한다.
     
      "자질구레하고 천하게 군다." 마음이  바깥으로 나와 있어야지
    다른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자질구레하다는 것
    은 마음이 안에 있고 중심이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는 양
    효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음효가 있어서 자리가  뒤바뀌어 있습니
    다. 나가야할 자리인데  거둬들이고 있으니 자질구레하고  그렇게
    소갈머리가 적으니 남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음효. 가슴속에 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으
        니 여행길에서 좋은 여관에 들고 여비가 두둑이 생기
        고 충실한 하인도 얻어 마침내 아무런 근심도 없다.
     
      쇼핑을 갈때도 이미 그 마음 안에는 물건을 살것인가, 말것인가
    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가서 구경하다가 대상에 마음이
    빼앗기면 뜻하지 않은 물건을 사고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
    과 같이 쇼핑을 나가면 무척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
    뢰감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행길에서 너무 자질구레한 생각
    이나 자기 생각만 하면 천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음성 에네르기는
    안에만 있으면 안됩니다.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중심은
    안에있되 마음은 바깥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중심이 분명한 사
    람이 주변에 마음을 두고 나아가면 아무런 근심이 없다고 한 것입
    니다. 두번째는 음의 자리입니다. "소갈머리가 있었다면"은  겸손
    한 마음을 말합니다. "가슴속에 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으니" 란
    마음 안에 음성 에네르기가  중심을 갖고 밖으로 나아감을 말합니
    다. 그래서 "여행길에서 좋은 여관에 들고 여비가 두둑이 생기고
    충실한 하인도 얻어 마침내 아무런 근심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 양효. 유숙하던 곳에 불이나서 쫓겨난다. 따
        르던 하인한테도 배신 당한다. 불행한 일이다.  위험
        이 닥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재벌이었던 록펠러는  그 아버지 때부터 이미 돈에 관한
    현실감을 철두철미하게 배웠던 것입니다. 돈을 절약하는 생활습관
    을 들였기에, 어릴때부터 현실을 보는 안목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
    다.  마음의 풍요를 알고 있었기에 비록 돈을 짠돌이 처럼 쓸지언
    정 떳떳하게 쓸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에 중심이 있어야 구
    속됨 없이 자신의 명분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고,  마음의 손을 통해서 계산을 할 줄 알아야 합니
    다 다만 그 중심을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네 번째 양효.  여행도중에 거처할만한  처소를 얻고
        생활할만한 자재도 얻었다. 그러나 목적지가 있기 때
        문에 마음속은 항상 안정되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마음속은 항상 안정되어져 있지
    않다." 여행도중에 거처할만한 처소를 얻고 생활할만한 자재를 얻
    었을지라도 이것은 아직 진정으로 정착할 위치는 아닌 것입니다.
    즉 여행중 한 때의 정착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안정되어 있지 않았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안정되어 있
    지 않은 사람이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이것 저것 찝적거리게 됩
    니다. 자고로 '이것 안되니까 다른 것 해야지.' 하는 사람치고 성
    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을  끝까지
    해야만 그 다음이 그로인해 잘되어지는 법입니다.  실력은 그렇게
    늘어나는 것입니다. 한 번 시작한 것을 80%까지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바꾸면 그 사람은 다음 번에 또 안되는  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이루어지는 것은 80%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80%의 노력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결국은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여행도중에 거처할만한 처소를 얻고 생활할만한  자재도 얻었
    다." 여행도중에 잠깐 성공할만한 자리에 앉아서 돈도 벌었을지라
    도 자기가 완성을 이룬 것은 아니므로  아직 진정 정착할만한 위
    치는 아닌 것입니다. 항상 완성할만한 목적지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음효. 꿩을 쏴서 화살 한 개를 잃어버렸다.
        반성하면 마침내는 윗사람의  인정을 받아  명예있는
        명령을 받을 것이다.
     
      "꿩을 쏴서 화살 한 개를  잃어버렸다." 뭔가 성공할 것같아서
    일을 벌려 놓은 다음에 다시 보니 이쪽이 더 유리한 것 같아서 길
    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 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
    다. 중심에서 자기가 자꾸 떨어져  나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
    이 성공을 향해선 사람에게 오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자기 유혹에
    자기가 걸리는 것입니다. 일은 자기 중심으로 끌어 들여와야 합니
    다. 자기가 일을 쫓아서 이게 더  잘될까, 저게 더 잘될까하고 따
    라다니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합니다. 성공이란  중심에서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침내는 윗사람의 인정을  받아 명예있는 명령을  받을 것이
    다." 비록 꿩도 못잡고 실패했지만 잡을 수 있게끔 자신을 변화시
    키면 위 아래로 인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만해서 "내
    가 여기까지 왔는데 누가  나를 건드려? 나  하고 싶은대로 하겠
    다."고 하면 여섯 번째 효에서 흉하다에 걸리게 됩니다.
     
        여섯 번째 양효.  새가 보금자리를 태운다.  나그네의
        몸이면서 교만하여 남의 위에 있다고  자만하니 인심
        을 잃어 보금자리를 태운 새처럼 몸 둘 곳이 없게 된
        다. 먼저는 웃고  뒤에는 울부짖는다. 그나마  자기를
        태워다 주는 소마저 잃었으니  끝내 알아낼 길이  없
        다. 흉하다.
     
      아무리 좋은 챤스라도 쥐어야할 챤스가 있고 쥐어서는 안될 챤
    스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열차를 잡아타는 것도 몸이 튕겨 날라가
    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중심을  갖고서 잡으면 탈 수 있지
    만, 중심을 가눌 수 없는 몸으로 열차를 잡으면 곧 튕겨져 날라가
    고 맙니다. 매사는 먼저 중심을  밀어넣고 시작해야 합니다. 돈이
    생기면 먼저 비축해 놓고 그 비축속에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있
    다고 써버리면 큰일납니다.
      "먼저는 웃고 뒤에는 울부짖는다." 충분히 다져서 갖춰놓은 후
    에 오는 챤스가 진짜 챤스입니다. "너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 이미
    충분한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 충분한 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
    은 챤스가 왔다고 해서 절대로 잘 되는 일은 없습니다. 먼저 자신
    이 충분히 갖추어 놓으면  그 뒤에 챤스는 또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나마 자기를 태워다 주는 소마저 잃었으니  끝내 알아낼 길
    이 없다. 흉하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그 여행의 종착지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나는 최소한도 인생의 종착지를  30대에 끝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30세 부터는 화산려(火山旅)가 신중하게 들려야
    합니다. 이것이 단지 주역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으로  들려야 합니
    다. 그런데 40이 넘어도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사람은 일
    찌감치 인생을 졸업하는게 더 유리할른지도  모릅니다. 화산려(火
    山旅)는 그대들이 불을 꺼뜨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또 약간의
    발전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약간의 발전을 통해서 더 풍요로운 발
    전으로 번영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심을 잃지 말고 중
    심을 충분히 채운뒤에, 충분한 소유를  통해서 새로운 계기를, 그
    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산려(火山旅)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582
  • 55. 뇌화풍(雷火豊)
    『 번 영 』
     
     ●     나는 물론 당신에게 잘되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부자
     ●     가 되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     이 아무리 부자로 많은 것을 벌어놨다 하더라도  당
            신이 죽을 때 가져갈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     나는 당신에게 가정을 사랑하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     그대가 가정에 매이는 것은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     왜냐면 아무리 여러분의 자식, 부인, 친지들을 위해
            헌신하더라도 그대가 죽을때 무덤까지는 따라올지라
            도 묘에서 떠나고 나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뇌화풍(雷火豊)
     
        [풍(豊)] 괘는 번영을 상징하는 괘다. 풍(豊)은 성대
        함을 의미한다. 풍(豊)은 밝음으로써 움직인다. 그렇
        기 때문에 성대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이 공명정대함
        을 숭상하니 그 덕이 성대의  경지에 이른다. 정오의
        태양처럼 천하를 밝게 비출 것이다.  천지에 차고 비
        는 것은 계절과 더불어 소장한다.  천지와 만물이 그
        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나 귀신이랴. 어찌 그 영고성
        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자연의 것입니
    다.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오늘 잠을 자면서  삶을
    청구하여 다음날 주어지는 식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틀림없이 나의 것이 아니고 자연의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
    가 모르게 우리로부터 삶을 빼앗아 갑니다.
      삶이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살겠다고 해서 더 살아지
    는 것도 아니고, 죽겠다고 해서  죽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삶을 부여
    하였다고 해서 인생마저 내팽개쳐 놓으면  그것은 자연이 원하는
    것에 역행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가장 초정밀한 경영
    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터득하고 성리(性理)에 의해 살기위해서 인생에
    있어서 대자연의 경영의 도를 얻어야 합니다. 이 경영의 도를 얻
    지 못하면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모든 조건을 나쁘게 쓰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성리에 의해 인생을 경
    영해 나갈 수 있는 경영의 도를 얻어야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정화된 관념속에서 자신의  막을 치고 있습니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막을 가지고 살면 경영의  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바로 경영의 도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는 그  막을 깨
    느냐 깨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인간은 젊었을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패기와 상상력을 가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막 안에서 자기 생각만  하고 있으면
    자연은 그 좋은 세월을 그냥 흘려 보내 버립니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뇌화풍(雷火豊)]입니다.
     
      [풍(豊)]은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차면 기우나니" 그
    '자연'의 시기에 와있을 때가 바로 풍(豊)입니다.  그래서 이 풍
    (豊)은 엄청나게 크게 발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지
    금이 가장 크므로 이제부터는 기울어진다고 말하는 괘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생에 있어  자신의 막을 제치고  경영의 도를
    얻으면 기울어지지 않고 풍요로운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경영의 도를 스스로 배워서 깨우쳐야 합니
    다. 짐승들은 엄마 젖을 먹을 때 엄마가 얼마동안 가르쳐 주면 대
    부분이 경영의 도를 얻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무리 성인이 목
    이 터져라 가르쳐도 소수만이 경영의 도를 얻습니다. 사실 인간이
    기 때문에 경영의 도를 얻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
    나 "경영의 도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필요없습니다. 경영의
    도는 자기 자신의 막만 깨우치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풍(豊)괘입니다.
     
      풍(豊)괘의 하괘는 음성에너지가 하나 있기 때문에 여자를 뜻하
    는 괘이고, 상괘는 남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중녀(中女),
    즉 가운데 여자이고 남자는  장남으로 남자가 나이가  약간 많은
    상태로서 서로 배합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잘  맞는 상태일
    때 인간은 대부분 이 안에서 머무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내 버립
    니다. 인간의 고민은 주로 자기 막안에서 자기 때문에  하게 됩니
    다. 막만 벗어나면 고민은 없어집니다. 영혼이 막 밖에서 사는 사
    람과 막 안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고 머리만 씁니다. 그래서 많은 궁리는 하였
    으나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풍(豊)괘는 번영을 상징하는 괘다. 풍(豊)은 성대함을  의미한
    다. 풍(豊)은 밝음으로써 움직인다." 인간이  고민이 없고 심심하
    다고 할 때 자연으로부터  가장 좋은 여건을 부여받은  때입니다.
    그때 막이 깨어져 있고 경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바로 앞날의
    웅덩이를 생각하며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내어 대비를 합
    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다가  석가가
    얘기했듯이 "고기없는 못에서 늙은  백조처럼" 처량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왕이 공명정대함을 숭상하니  그 덕이 성대의  경지에 이르렀
    다." 이렇게 죽을 때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막을 벗어나
    야지 공명정대할 수 있습니다. "정오의 태양처럼 천하를  밝게 비
    출 것이다." 태양도 정도가 되면 기울고,  달도 만월이 되면 기울
    어지기 시작합니다. "천지에 차고 비는 것은 계절과  더불어 소장
    하고, 천지와 일월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나 귀신이랴? 어찌
    그 영고성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막으로부터 깨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름이 온다고 해서 옷
    이 필요없다고 찢어버리면 곧 가을이 도착합니다.  여름에는 옷이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잘  보관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  자기
    막으로부터 벗어난 공명정대한 경영의 도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
    니다. 그래야만 앞을 내다볼 수 있고 겨울에 얼어죽지  않고 따뜻
    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대상. 우뢰와 번개가 함께 오는 것이 풍(豊)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밝은 판단으로 형옥을 판
        결하는 형벌을 집행하여 위령을 세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밝은 판단으로  형옥을 판결하는 형벌
    을 집행하여 위령을 세운다." 형옥을 판결하는 형벌을 집행한다는
    것은 사심이 없이 공명정대함으로 일을 집행한다는 뜻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기 경영의 도를 얻어야만 자기 인생을 항상
    풍요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양효. 뜻을 같이 하여  나갈 수 있는 주인을
        만난다. 비록 능력이 비슷해서  상등하지만 충돌하지
        아니하니 허물은 없다. 협력하여 나아가면 남에게 인
        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이 더 우
        수하다고 생각하여 반발하면 재난을 얻을 것이다.
     
      "비록 능력이 비슷해서 상등하지만 충돌하지  아니하니 허물은
    없다." 첫 번째 양효와 대응관계에 있는 네 번째 효와 같이  나아
    가는데 모두 양효이기 때문에 서로 비슷하고  상등합니다. 그런데
    자기 막에 빠져 있으면 서로 충돌하여 허물이 되어  버립니다. 공
    정하게 동업을 함께 하려면 자기 막이 없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막부터 벗어나 있
    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이것을 좋아하듯이  저 친구고 저것
    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서로 이해와 협력으로 공존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슷한 실력끼리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음효. 거적을 두텁게  둘러치니 밤같이 어둡
        다. 대낮인데도 북극성이 보일 것같다. 불의한 때 무
        리하게 전진하면 남의 의심과  미움을 받게 될  것이
        다. 내 마음에 성의가 있어서 저절로 남의 마음을 감
        동시키게 되면 길하리라.
     
      "거적을 두텁게 둘러치니 밤같이 어둡다."  두 번째 효는 음에
    너지이기 때문에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막을 두텁게 둘러치니 어
    둡다는 것입니다. 남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막을
    거두어야 합니다. 뇌화풍(雷火豊)은 풍요의  도를 계속 얻으려면
    자기만의 막을 벗어나야 된다라는 것을 계속 말합니다.
     
        세 번째 양효. 막을 두텁게  둘러치니 밤중같이 어둡
        다. 대낮인데도 작은 별이 보일 것같다. 그런  상황에
        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른팔이 꺾였으니
        마침내 쓰일 수 없다. 재능을  감추고 나아가면 탈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경영의 도를 얻지 못하면 자기 입장만 생각하게 되고 자
    기 입장만 생각하다 보면 더 틀어박혀 버리는 결과만 생기게 됩니
    다.  그러면 나중에는 내가 이러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까지
    생기게 되어 결국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 막을
    벗어나면 시야가 탁 트이게 되고  정신도 맑아지고 생을 보람있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른 팔이 꺾였으니 마침내 쓰일 수 없다. 재능을 감추고 나아
    가면 탈이 없을 것이다." 막 안에서 엄청나게 기뻐하는 기쁨은 바
    로 엄청난 재난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오른 팔이 꺾이는 불행이
    곧 닥치게 됩니다.  여기서 재능이란 "나는 이렇다."라고 자신을
    내세우는 막을 말합니다. 그  막을 넘어가서 경영을 하지  아니하
    고, 그것을 가지고 우기게 되면 크나 큰 재난으로 치우치게 될 것
    입니다.
     
      사람이 재능의 자아에 치우쳐서 바깥  세상과의 연관을 끊어버
    려서는 안됩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가난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세계를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지만이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난 알기를 무슨 별나라 세계처럼 우습게  취급
    하는 사람은 조금 있다가 망할 사람입니다.  많이 알고 있다고 스
    스로 믿고 있는 사람만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사랑을 얻
    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 모
    두가 사랑하지 않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다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경영되어야 합니다. 카르마[業]가 인생이 되어서
    는 안됩니다. 그 카르마를 고집해서는  물론 안됩니다. 그리고 하
    루속히 막을 자기 막으로부터 벗어나야 양을  몰고 갈 수 있습니
    다. 양치기가 자기 막안에서 생각에 잠겨있으면 양떼는 다 흩어져
    버립니다. 양치기도 양을 잘 몰기 위해서는 경영을 해야 합니다.
     
        네 번째 양효. 거적을 두껍게  둘러쳤으니 위치가 좋
        지 못하다. 대낮에도 북두칠성을 볼 것같다. 어둡기만
        할 뿐 밝은 구석이 없다. 그러나 동지를 만나면 함께
        전진할 수 있어서 길하리라.
     
      일본 속담에 "사람 알기를 도둑놈같이 하라."라는  말이 있습니
    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중 동업해서 잘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
    습니다. 그런데 사실 뭔가 이루려면  혼자하기는 힘듭니다. "동지
    를 만나면 함께 전진할 수 있어서 길하리라." 사실 자신의 에너지
    를 대상을 향해 쓰는 방향으로 터득하게 되면 동지가 상당히 필요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게 사람입니다. 그
    런데, 자기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자기 적입니
    다. 그래서 자기 속셈만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주변은 괴로
    와집니다.
     
        다섯 번째 음효. 현자를 초빙해서 쓰면 경사와 명예를
        얻는다. 길하다.
     
      거적을 두텁게 둘러친게 곧 나의 마음입니다. 거적을  둘러치면
    안보입니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넓게 보는 법입니다. 진정으로 훌
    륭해지면 더 넓게 보이는 법입니다.
      "현자를 초빙해서 쓰면 경사와 명예를 얻는다. 길하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함께 하는 동지가 있으면 그만큼 큰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나"가 없는 동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동
    지. 인정과 인정으로 맺어진 사이는 언젠가 뒤돌아서면 욕을 할게
    틀림 없습니다. 뜻으로 사랑으로 맺어져야만 영원히 같이 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주는 사랑인 동시에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영원히 우주가 망하지 않는 기운이기 때문입니다. 우
    주는 차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
    들은 이 괘를 보면 차면 기운다를 걱정합니다.
     
        여섯 번째 음효. 한 때 하늘이라도 올라갈 것같은 그
        저택이 지금은 거적으로 둘러쳐져 있다. 문틈으로 들
        여다 봐도 인기척이 없다. 사람의  눈을 피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삼년동안 누구 한 사람 얼굴을 본 사람
        이 없다. 흉하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자신에 만족하지 말고 자연
    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벌어봐야 자연의 것이
    지 내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은  자연과 하나
    가 되는 길입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자식도, 부인도 내가 죽
    고 3년후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러
    한 인간의 심정을 쫓지말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을 얻어
    야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그것을  알고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얻은 행복은 반드시 비운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물론 당신에게 잘되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부자가 되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리 부자로  많은 것
    을 벌어놨다 하더라도 당신이 죽을 때 가져갈 물건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또 나는 당신에게 가정을 사랑하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그
    대가 가정에 매이는 것은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여러분의 자식, 부인, 친지들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도 결국 그대
    가 죽고나서 그대의 묘까지는 따라갈 수는 있어도 결국 묘에서 떠
    나고 나면 더 이상의 관계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이나 이순신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항상 살아있습니
    다. 그들은 조국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석가나 예수 등 성
    현들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능한한 그토록 이 지구와 함께 남아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
    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차고 기우는 법칙을 항상 갖고 있
    지만, 변해도 그 변화에 휩쓸려 가지 않는 세계가  반드시 존재하
    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만족에 의해서 마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끌려 살다보면  언젠가 피보는 때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 사이에는 처음에 만났을 때  서먹서먹한게 많기 마련입니
    다. 그것은 서로가 스스로를 막안에 묶어놓고  살아왔기 때문입니
    다. 우리가 태양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올
    줄 알아야 합니다. 즉 '함께'라는 정신이 있어야 하고 공동체를 위
    해 희생하는 에너지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재
    능으로만 출세하게 되면서 재능으로 만족을 얻게 되면 그것은 언
    젠가 반드시 하향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5178
  • 54. 뇌택귀매(雷澤歸妹)
    『 첩으로 시집가다 』
     
     ●     비즈니스가 되었건, 공부가  되었건 결실이  있어야
     ●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드웨어를 이루어내지 못하
     ○     면 아무런 맛이 없습니다. 또  하드웨어를 잉태시키
            지 못한 노력은 아니함만 못합니다.  하드웨어가 없
     ●     는 소프트웨어는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태풍도
     ○     번개도 소프트웨어를 망가뜨릴 수는 없지만  하드웨
     ○     어가 없는 소프트웨어는 태풍이 불기전에 이미 망가
            진 제품입니다.
     
                        뇌택귀매(雷澤歸妹)
     
        [귀매(歸妹)]의 괘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데 중요한
        괘다. 시집가는 길에  여자가 주도하여  나서는 것은
        흉하다. 만에 한가지 좋은 일은 없다. 여자가 시집가
        는 것은 천지간의 큰 법칙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사
        귀지 아니하면 만물이 생겨나지 못함이다. 여자가 시
        집가는 것은 인간의 시종일관한 도리다. 그러나 여자
        가 먼저 즐겨함으로써 남자를 움직여  시집가는 것은
        여자의 지위로서 부당하다. 그러니 흉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중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는 해낼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아이디어,
    방정식과 같은 것들이고, 하드웨어는 그것들이 실질적으로 해내어
    나타나 있는 결실, 기계 따위 등등입니다. 즉, 하드웨어가 우리의
    몸이라면 소프트웨어는 생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벼락이 치고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부는 등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나서 폭탄이 터
    지는 등의 재해들은 하드웨어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다시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설사
    깨어진 집이라도 다시 건설할 수 있습니다. 즉 천재지변도 하드웨
    어는 파괴시킬 수는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파괴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훨씬 중요하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는데 결실이 생기지 않는다." 즉 자본을 들여
    서 사업을 벌렸는데 자본만 탕진하고 결과가 없다면 어디에 잘못
    이 있는 것일까? 소프트웨어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
    리는 먼저 소프트웨어가 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소프트웨어가 되
    어져 있지 않은 하드웨어는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는 있는데  하드웨어가 없다면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결실이 없는 소프트웨어는 아
    무 소용이 없습니다.  흔히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따라잡은 나라들입니다.  소프트
    웨어가 하드웨어를 따라가면 하드웨어 자체는 따라 잡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창조력은 발휘할 수 없습니다.
      2차 대전때 일본은  자신들도 어지간히 비행기도  만들어 내고
    또 가미가제 정신도 있으니까 이 정도면 미국과 전쟁을 한 번 벌
    일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고 보니까
    일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일본인들은 정신통일, 사무라이
    정신 등등으로 총으로 안되면 몸으로라도  해낸다라는 정신은 가
    지고 있는데 미국인들은 유도탄이라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도 않
    는데도 정확하게 자신들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또  일본은 폭탄
    을 많이 만들어서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적을 때려부수려고 했
    는데 미국인들은 원폭이라는 아주 작은  규모로 어마어마한 위력
    을 발휘하는 폭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
    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인은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런 소프트웨어가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프트웨어적인 공
    부를 엄청나게 해야한다.' 일본은  엄청나게 공부하였으며 오늘날
    드디어 선진국가가 되었습니다. 선진국 상품들을 모방하더라도 소
    프트웨어를 통해서 얼른 자기 것으로 변신시켜 남들이 만들어 놓
    은 하드웨어를 능가하는  하드웨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따라 잡는 입장에 섰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 아직  선진국가에 들어가지 못한
    나라. 대표적으로 한국을 비롯하여 대만같은 나라들은 선진국에서
    만들어 낸 것을 보고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엉성하다가 점점 비슷하게  따라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산품은
    아직도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고, 뭔가 마무리가 덜된 것같은 느낌
    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지금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선진국 물건을 보고 어떻게  하면
    그와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 낼 것인가 생각했지, 그  이상의 물건
    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부족하였습니다.
     
      소프트웨어가 먼저 발전한 후 곧  하드웨어가 이를 받쳐주어야
    합니다. 인간 개개인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따라  잡지 않으
    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아이디어가 결실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소프트웨어가 되어져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봐야 소용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비즈니스가 되었건, 공부가 되었건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의 인생이 하드웨어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아무런  맛이 없습니다.
    또 하드웨어를 잉태시키지 못한 노력은 아니함만  못합니다. 하드
    웨어가 없는 소프트웨어는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태풍도 번개
    도 소프트웨어를 망가뜨릴 수는 없지만  하드웨어가 없는 소프트
    웨어는 태풍이 불기전에 이미 망가진 제품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이 말은 자기가 아는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하드웨어를 해보았더니 하드웨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
    아서 거기에서 소프트웨어를 수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소
    프트웨어조차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그저  하드웨어를 만들면서
    그냥 실패해서 쪼개져 나가는 것, 그것은 성공의 밑거름이 될 수
    도 없을 뿐더러 그런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귀매(歸妹)] 괘는 상괘가 음(陰)이 둘, 양(陽)이 하나로 남성
    을 나타내는데, 양효는 첫 효에 있어 장남, 즉 나이 많은 남자를
    뜻하는 괘입니다. 하괘는 음(陰)이 하나, 양(陽)이 둘로 여성을
    나타내며 특히 세 번째 효에 음(陰)이 있어 젊은 여자를 뜻합니다.
    주역은 밑에서 위로 읽기 때문에 결국 귀매(歸妹)는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를 유혹한다 해서 이것은 첩이 된다는 뜻입니다.
      위의 괘는 남자를 뜻하면서 뇌성을 나타냅니다. 아래 괘는 여성
    을 뜻하면서 연못을 뜻합니다. 연못위에 뇌성이 치면 수면이 출렁
    거립니다. 그러면 태풍 불 때처럼  풍파가 많게 됩니다. 음성기운
    은 밑에 숨겨져 있어야 하는데 귀매  괘는 첫째, 둘째 효가 양효,
    다섯째, 여섯째 효가 음효로 이루어져 있어 음성 에너지가 위에서
    양성기운을 누르고 있는 형상으로 양성기운이  작용을 못하게 되
    어 자체내에서 풍파만 일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에게 쥐어 사는 남자들  치고 제대로 되는  남자가 사실은
    없습니다. 그나마 여자를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더 엉망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는 남자답게 활동하여 여자를  여자답게 추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추스리지 못하고 무조건 전진만 해서는 되지 않는
    다는 교훈을 귀매는 주고 있습니다.
     
      뇌(雷) 괘는 뇌성이므로 움직임입니다. 하괘는 연못이면서 감각
    적으로 기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에서  남자가 움직이고
    여자는 기뻐한다라는 뜻에서 이는 정신적인  사랑이 없이 육체적
    인 관계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안이 충실하지 않은 사랑입니
    다. 그래서 노력은 하는데 안에  알맹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소프
    트웨어가 안되어 있는 사람이 하는 노력이 이와같은 것이라는 이
    야기입니다.
      "여자가 먼저 즐겨함으로써 남자를 움직여 시집가는 것이 귀매
    의 상징이다. 여자의 지위로서 부당하다. 흉하다." 양성기운에 의
    해 이 우주는 아름다운  창조를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성에너지를 음성에너지가  짓눌러 버리면  세상은 파괴되어
    버립니다.
      남자는 판단하기 어려울 때에는 여자의 말을 한 번쯤 경청해야
    됩니다. 왜냐면 남자는 나갈려고 하는데 여자는 먼저 당길려고 하
    는 것을 우선 생각하니까 남자가 여자의  말을 한 번쯤 경청하면
    좀 더 신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우선하고 남
    자가 거기에 매여 살면 아름다운 창조는 벌어질 수  없습니다. 여
    자가 주도하는 집안은 크게 잘되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움직
    이는 것은 깊이가 없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여자는  자기
    속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자가 주권을 가지고 있으면 흉하다라
    고 주역은 말하고 있습니다.
     
        대상(大象). 연못 위에 우뢰가 진동하고 수면위에  파
        문이 일어나는 것이  귀매(歸妹)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일시적인 현상에  사로잡히는 폐해를
        깨닫고 영속되는 길에 마음을 둔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일시적인 현상에  사로잡히는 폐해를
    깨닫고 영속되는 길에 마음을 둔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깊이
    장래를 전망하면서 폐해를 깨달아 안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먼 미
    래를 생각하지 않는게  원칙입니다. 여자는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운데 있는 사람의  영향을 잘 받게 되
    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이치를 따지게 되면 여자는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가 혀를 내
    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를 이치에 맞지 않는 울타리에 가두어 놓으
    면 남자가 크게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심지가 굳은
    남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이와같은 처지에  있어서 그런
    가벼운데 일어나는 파문을 쫓지  아니하고 심도 있는  깊은 것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즉 "내가 이 일을 가벼운 마음에 너무 즐겨
    서 하고자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양효. 소실로 시집간다. 허나 절름발이도 걸
        을 수 있는 것. 비록  남의 소실이긴 하지만 정처(正
        妻)와 서로 힘을 모아 성의껏  남편을 섬겨나가면 길
        하리라.
     
      "소실로 시집간다." 첫 번째는 양성에너지이기 때문에 뭔가 해
    야 됩니다. 그래서 소실이라는 명목으로 시집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실이라는 명목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도 안되는 것은 아니며, 결
    국은 상식을 쫓는 일입니다.  아주 꼭 맞는  바른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은 바른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어중간한 것도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첩으로 시집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뜻
    입니다.
      "비록 남의 소실이긴 하지만 본부인과 서로  힘을 모아 성의껏
    남편을 섬겨 나가면 길하리라." 이 말은 만약 내가 직장을 들어갔
    는데 나에게 딱 맞는 직장이 아니다 하더라도  "못해 먹겠다." 하
    면서 하는 둥 마는 둥  하지 말고, 협력을 다해서 자기  나름대로
    깊이 있게, 진실하게 성의껏 생활하면 길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군자가 아닌 이상 자신에게 꼭  맞는 직장을 못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파문이 일 듯이 깊이를 갖지 않고  가볍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들어오고  나서 보니 내가 원했던게  아닙니
    다. 그런 경우에는 비록 절름발이와 같은 신세라 하더라도 성의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다하고 나가버리는  사람은 자기의 심도
    있는 세계, 인생의 어떤 깊이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설
    사 소실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잘못했다고 탓하거나, 그만 두는 것
    보다는 거기서 성심껏 생활하다 보면 언젠가  길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도가 날 회사에서 나의 노력에  의해서 그 부도를 막아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회사에게 희생당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내
    개인 사업을 할 때 부도당해질 수 있는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좋은 곳을 찾아가지 말
    고, 나쁘고 불리한 곳에서 그곳을 좋은 곳으로 움직일 수 있는 능
    력, 그것이 갖추어지는게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양효. 애꾸눈도 볼 수 있는 법. 남의 소실로
        서 한 사람의 본 몫은 못할 망정  한결같은 마음으로
        변함없이 숨은 노력을 계속하여 감이 좋다.
     
      양성에너지이므로 자꾸 무얼 바라지 말고, 바르게 되어질 수 있
    도록 성의를 다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노력입니다. "애꾸눈도 거
    리 측정은 못하지만 보이기는 하는 법," 설사 거리 측정이 안된다
    하더라도 꾸준히 열심히 보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절름발이도 늦기는 하지만 걸을 수 있듯이, 애꾸눈도 정확히
    보지는 못하더라도 볼 수는 있듯이," 일단 어설프게 나마 해야할
    시기가 오면 그렇게라도 시작은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작하
    였으면 "남의 소실로서 한 사람의 본 몫은 못할 망정 한결같은 마
    음으로 변함없이 숨은 노력을 계속하여 감이 좋다." 나의 부실 때
    문에 한사람의 몫을 못할  망정 한결같은 마음으로  변함이 없이
    숨은 노력을 계속하여 감이 좋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 처음부터 다 되어질  수
    없는 법, 안되는 것만큼 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첩으로 시집가서
    혼자 독차지하려면 집안이 풍지박살이 나고  쫓겨나게 되니까 못
    마땅 하더라도 "본부인과 잘 뜻을 합해서 해나가면 길하리라." 즉
    내가 무슨 일을 하다가 저 사람하고는 마음이 안맞아서 못하겠다
    하고 돌아서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할 일을
    위해서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더 정성껏 하면 결국은 좋
    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쪽 눈이 없다  하더라도
    볼 수는 있는 법. 잘  안보인다고 투정하지 말고 보이는 것을  갖
    고, 즉 그 정도 실력만 갖고라도 더욱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음효. 여자가 첩으로  남편의 애정을 얻으려
        하나 무리다.  몸을 삼가 부처(副妻)가 되는 것이 분
        수에 맞는 줄 알아야 한다.
     
      여자는 남자를 독점하려고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정처
    (正妻)하고 부처(副妻)하고 한 집에 사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
    니다. 여자는 자기 중심적이므로 남자가 이쪽도  신경쓰고 저쪽도
    신경쓰고 있는 것을 알면 배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애정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는 바람을 피우면 안된다고 세 번째에
    서 말하고 있습니다.
      "몸을 삼가 부처가 되는  것이 분수에 맞는  줄 알아야 한다."
    여자가 정조를 가지면 음성에너지의 덕이 나가게  됩니다. 여자의
    심정으로 봤을 때는 독차지 하는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중
    요한 것같지만 지금까지 성실하게 왔는데  채워지지 않는다고 튕
    겨져 나가면 그나마 성실한 것이 아무런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됩니다. 절름발이라 하더라도, 또 애꾸눈이라  하더라도 못마땅한
    처지에 부합해서 그 곳을 위해서 힘을 쓰면 성공할 수 있는 위대
    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마쓰시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가
    장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쓰시다가 한
    마디로 일축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하기 직전에 그만
    두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튕겨져 나가야 한다." 할 때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쏟
    으면 답을 자연이 가르쳐 주게 됩니다. 우주가 자기  하는대로 잘
    안된다 해서 망치로 내려치면 그 순간  우주는 그 깨어지는 파편
    들을 그 사람에게 돌려줍니다. 그래서 "비록 절름발이라 하더라도
    노력을 거듭해야 한다." "성실껏 행하다가 부아가 날 때도 있겠지
    만, 그 때 튕겨나가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해야된다. 그래야만 심
    도 있는 깊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하괘 택(澤)괘가 주는 교
    훈이었습니다.
     
        네 번째 양효. 혼기가 늦어진다. 그러나 시기가 늦어
        지는 것은 좋은 인연이 있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 보면, 원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안에서 무수히 많
    은 소프트웨어의 작용을 해가지고 소프트웨어가 이제 이길 수 있
    다는 확신이 섰을 때  비로소 실행으로 옮겨야지  성공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되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도 그
    거 해야지.' 하면 될 턱이 없는 것입니다. 즉 안에  내실이 분명히
    갖추어진 다음에 행실로 옮기라는 얘기입니다.
      "시기가 늦어지는 것은  좋은 인연이 있기를  기다리기 때문이
    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간에  꼭 어려운 일에 부딪치게 됩니
    다.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화려하게 무대에 서는 가수들을 평범한
    사람이 보면 그저 멋있는 것같아서 나도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생
    각할 지 모르지만, 훌륭한 음반을 내기 위해서는 노래를 만 번 이
    상 부르며 피나는 연습을 해야됩니다. 만 번을 불렀을때 비로소
    그 사람이 감정으로 인해서  삐그덕거리는 것이 없어집니다. 제작
    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한 후 '난 이렇
    게 했는데 왜 안되나?' 할 때, 그 때가 바로 시작할 때입니다. 지
    금까지는 자기 기분으로 한 것이고, 이제부터 진짜 일을 느끼면서
    할 때입니다.
     
        다섯 번째 음효. 은나라의 천자인  제을이 그 누이를
        시집보낼 때 그 의상이 따라가는 시종의 것보다도 오
        히려 검소하였다. 귀한  것은 마음속에  있고 의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달은 보름에 가까울 때가  좋다.
        길하리라.
     
      쉽게 예를 들면, '내가 요걸  사면 신나겠지. 막 자랑할텐데 .'
    하는 그런 기분을 가졌을 때 일은 되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운전
    면허증을 딸 때도 '따자마자 차를 멋있게 몰고 다녀야지.' 하는 기
    분이 들 때 운전면허증을 따면 큰일 납니다. 그리고 그런 때는 면
    허증이 따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몇 번 떨어져서 그런  기분이
    다 지칠 때 그때가서 겨우 면허증이 따집니다.  그래서 "은나라의
    천자인 제을이 그 누이를 시집보낼 때  그 의상이 따라가는 시종
    의 것보다도 오히려 검소하였다." 자신의 사치스런 감정이 다  없
    어질 때, 제왕의 누이라는  높은 신분이지마는 그런 사치성이  다
    없어질 때, 그때 제왕이라는 뜻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사치가 들어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실수가 내포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치스러운 마음이 다 사라질
    때 객관적으로 현실이 보입니다. 그래서 화려한  의상을 치워버린
    다고 했습니다.
     
        여섯 번째 음효. 조상의 제사에  아내가 받들고 있는
        광주리는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빈 광주리요, 남편의
        희생으로 받치는 양은 찔러도  피가 나지 않는  썩은
        양이었다. 이러고서야 가정이 순조로울 수 없다.
     
      결과가 생긴 다음에는 그것을 펼쳐내야만 됩니다. 소프트웨어가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하드웨어가 뒤따라야 합니다. 다 이루어졌다
    고 해서 자기 혼자만 독차지 하고 그것을 베풀줄 모르면 아무 소
    용이 없습니다. '나는 했는데 '라는  자기 만족에 빠져서 그것을
    펼쳐내지 못한다면, 씨를 뿌려 놓고 나중에 거둬들이는 노력은 하
    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조상의 제사에 아내가 받들고 있는 광주리는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빈 광주리요, 남편의 희생으로 받치는 양은 찔러도  피가 나
    지 않는 썩은 양이었다."  하드웨어가 뒤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소프트웨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빈광주리에 불과하
    고, 양은 양이로되 피가  나지 않는 썩은  양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소프트웨어가 확고부동해야 하며,  그 소프
    트웨어는 반드시 하드웨어를 통해서 결실을  만들어 내야만 하겠
    습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6149
  • 53. 풍산점(風山漸)
    『 착실한 성장 』
     
     ○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어망 따위가 필요합니
     ○     다. 열흘동안 커다란 어망을 만들어서  열하루째 고
     ●     기를 잡는 사람이 고기를 많이 잡겠다고 매일  손으
            로 물고기를 잡아서 열하루 잡은 것보다 더 많이 잡
     ○     는 법입니다. 그냥 돈 벌려고 하는 사람과 기업가는
     ●     다릅니다. 돈을 많이 벌면 기업가가 되는것 같지만,
     ●     사실 기업가의 틀을 갖춘 사람은 어망을 먼저  갖추
            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냥 돈벌려고 하는 사람은
            물고기를 낱 개로 잡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
            업가는 튼튼한 어망을 구축하며, 그 어망의 과보(果
            報)로 결국 그룹을 이루는 것입니다.
     
                           풍산점(風山漸)
     
        [점(漸)]의 괘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데  중요한 괘다.
        한결같은 보조로 변함이 없으면 만사  순조로울 것이
        다. 나아가서는 지위를  얻고, 행하여서는 공을 세운
        다. 바른 도리로 나가니  가히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있다. 천자의 위치에는 강효가 바르게 있으니 훌륭한
        인물이 제왕의 지위를 얻는다. 멈춰야  할 때 멈춰서
        순서를 쫓고, 움직여야 할 때 움직여서 막힘이  없다.
        그 전도는 무궁하다.
     
      불교에 보면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報)"라고 하는 것은 어느 주체가 행위를 일으켰을 때 '주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주체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세계로부터 무
    엇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방안에 있는 휴지를
    깨끗이 치웠더니 뭔가 상쾌하게 정돈되고 편안함이 오는 것, 또는
    꽃을 심었더니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 등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
    라 어떠한 보답이 따라오는 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화구경을 갈 때는 대부분 비슷한 원인으로 그 영화를
    보러 갑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결과는 각각 다릅니다.
    한 회사에 취직을 할 때 같이 입사를 한 사람들은 원인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며 나타나는 결과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인과응보(因
    果應報)가 아니고  '인연과보(因緣果報)'입니다. 인연과보(因緣
    果報)라는 것은 연(緣)이 하나 더 들어가 있습니다. 연(緣)은 고
    리를 말합니다. "같은 원인이 고리가 되어서 연결이 되어야만 비
    로서 결과에 대한 보답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
    (因)'이 아닌 '연(緣)'이며, 연(緣)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과보(果報)'라고 합니다.
     
      인연에 의한 결과에 따른 보답. 여러분들이 원인을 갖고 회사에
    취직을 하였는데, "못해 먹겠다."라는 방향으로 연(緣)을  만들면
    결과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보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
    나 연(緣)을 소중히 여겨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연
    (緣)을 잘 키워나가면 뒤에는 풍요와 수확이 따르게 됩니다. 때문
    에 원인을 갖고 온 '나'보다 어느 세상에  가든지간에 내가 그 원
    인과 결연(結緣)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받는
    보답이 판이하게 나타난다는 것이 인연과보(因緣果報)입니다.
     
      연(緣)을 얼마만큼 돈독히 하느냐에 따라서 눈물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사랑의 터전이  가꾸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또 연(緣)을
    통해서 나의 세계가 눈물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뜨거운 소중함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서 내게는 크나 큰 과보(果報)가
    따라올 것입니다. 과보(果報)가 따라야지 응보(應報)가  따라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꼭 납득해야만 하겠습니다.
      자기로 인해서 왔다가 자기로 인해서 가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는 응보(應報)가 따릅니다. 그러나 연(緣)을  통해서 자기의 정성
    을 갖고 결연(結緣)되어져 있는  그 세계를 가꾸어  나가면 나의
    뒤에는 마땅히 커다란 복이 과보(果報)로 따르게 됩니다.
     
      [점(漸)]괘는 바람을 뜻하는 상괘와 산을 뜻하는 하괘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상괘는  바람을 뜻하지만 나무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위에 나무가 있는 형상으로 나무가 밑으로 뿌리를 박고
    위로 자라는 것입니다. 효(爻)를 보면  음에너지와 양에너지가 각
    각 3개인데 구조적으로 먼저  음성 기운 두  개가 밑에 받쳐있고
    맨 위에 양성 기운 두 개가 위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
    지는 끊어질 망정 뿌리는 절대로 끊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漸)]괘는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전진하
    는 상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순서가 이렇게 되어야  올바른 순
    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고 밑에 받쳐져 있는 힘은  약한데 막 퍼져서 나간다
    면 뿌리가 뽑혀지는 중대 과실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뿌
    리가 든든한 상태에서는 가지가 실수를 해도 그것은 대수롭지 않
    은 실수이므로 기둥이 부러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것을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내가 지금 충분한 상
    태를 갖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떠나
    서 벌어지는 사업은 뭐든지 망합니다. 무리하게 사채를 마구 끌어
    모아서 회사를 세우면 결국 나중에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불가
    능은 없다."고 마구 어거지로 하려는 사람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대상(大象). 산위에 나무가 점점 자라고 있는 것이 점
        (漸)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먼저 자신의
        덕을 길러서 점차로 나라의 풍속을 선한 것으로 인도
        해 나간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질문도 어느 정도 자기 실력을
    갖추어 놓고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부족한 점을  찾아서
    이를 보완함으로써 실력이  향상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준비없이
    무조건 배운다고 학원만 다니는 사람은 아무리 명 강의를 들어도
    그것이 제대로 자기 실력이 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예습이 중
    요한 것입니다.
     
        첫 번째 음효. 어린 새끼  기러기가 따라오려고 물가
        로 나간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급히 나르려고 하면
        위태롭다. 비난은 있으나 허물은 없다.
     
      기러기는 아주 정돈된 형태로 날아 갑니다. 기러기 대형이 일
    (一)자로 되었다가 W자로 되었다가 하는 것은 바람에 따라서 바뀌
    는 것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일(一)자가 되어 저항을 줄이고
    바람이 뒤에서 불면 V자형으로 하여 서로 바람을 막아주면서 앞으
    로 갑니다. 기러기는 정돈된 상태에서 아주 점진적으로 형태를 바
    꾸기 때문에 실수가 없고 항상 안정을 유지해 나갑니다.  바로 풍
    산점(風山漸)의 괘상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효(爻)의 풀이
    를 기러기에 비유하였습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급히 나르려고 하면 위태롭다. 비난은 있
    으나 허물은 없다." 아직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러
    기가 무턱대고 날려고 하면  "꼴갑 떨지마라." 하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날고자 하는 의욕에 대해서는 허물이 없다는 뜻입니
    다. 아직 미숙한 상태에서 높이  날려고 한다든가, 초보운전때 아
    직 속도의 감각을 모른 상태에서 속력을  내여 씽씽 달리면 위험
    합니다. 그러므로 점진적으로 해야합니다.
      어린 기러기는 먼저 날개짓하기 전에 몸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
    야 됩니다. 그것이 세상과 연결을 짓는, 즉 결연(結緣)을 하는 방
    법입니다. "무턱대고 날려고 해서는 안된다." 먼저 충분히 날아
    갈 수 있는 결연(結緣)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두 번째 음효. 기러기가 바위에 올라간다. 음식은  풍
        부하고 생활은 즐겁다. 그러나  그것은 무위도식하는
        게 아니라 장차 비약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길하
        다.
     
      "그러나 그것은 무위도식하는게 아니라 장차  비약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높이 날기 위해서 안전한 반석위에 올라가 먹을
    것을 먹으면서 힘을 기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충분한 소유를
    길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섣불리 일을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세 번째 양효. 기러기가 뭍에 오른다. 숫놈은  일거에
        높이 비상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무리를 떠나가서 돌
        아오지 아니하고, 암놈은 임신하였으나  아내의 정조
        를 잃었기 때문에 낳아 기르려 하지 않는다.  흉하다.
        지나친 욕망에서  오는 마음의  고독을 사세(事勢)에
        순응하면서 무리끼리 서로 도와 보호하는 것이 좋다.
     
      인연을 벗어나서 "이제 날  수 있구나." 하면서 먼저 가겠다고
    동료를 버리고 혼자 날라가면 인과응보가 되어 길을 잃어서 돌아
    올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가면 사고
    가 난다는 뜻입니다. 수영을 할 때도 땅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
    고 헤엄쳐 가야지 땅을 떠나서 물로만  가는 사람은 결국 익사하
    고 맙니다.
      항상 자기 욕심만 가지고  자기가 처해져 있는  상황을 덜커덕
    떠나 버리면, "숫놈은 일거에 높이 비상하고 싶은  욕심에 무리를
    떠나가서는 돌아오지 못한다."가 되어 버립니다.  또 그렇게 되면
    아내는 다른 남자의 자식을 임신하게  되고 "아내의 정조를 잃었
    기 때문에 낳아서 기르지 못하게 된다."가 되어 흉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세태(世態)의 흐름을 따라,  즉 나무가 산을 따
    르듯이 주어진 환경을 존중하고 인연을 충실히 가꾸어 맺어야 합
    니다.
      지금 지구상에 수만가지의 일들이 다 벌어질  수 있는 것은 땅
    이 꽉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인력을 풀어버리면  모든 것
    이 다 깨어져 나가 버립니다. 나무가 자라는 것도, 기러기가 하늘
    을 나는 것도, 땅이 그것을  허용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그 세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지
    키지 않고 혼자 튀어나가 버리면 점진적은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약은 점진적으로 되는  것이지, 갑자기 어느날 뒤
    집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친 욕망에서 오는 마음의 고독을 사세(事勢)에 순응하면서
    무리끼리 서로 도와 보호하는  것이 좋다." 배신자,  바로 배신자
    라는 것이 자기 무리를 떠나서  혼자 어떻게 잘 되어보려고 하는
    자입니다. 자기 자신의 여건과 환경을  배신하지 않도록 해야 합
    니다. 결코 배신해서는 잘 되지 못하며, 그 말로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네 번째 음효. 기러기가 나무 위에 진출한다.  고요히
        온순한 자세를 가지면 안정된 가지를 얻으리라. 허물
        은 없다.
     
      사람이 쓸데없이 마음만 섣불리 앞서면 되어질 수 있는 바탕을
    만들려 하지 않고 무턱대고 할려고 합니다. 많은 고기를  잡기 위
    해서는 어망 따위가 필요합니다. 열흘동안 커다란  어망을 만들어
    서 열하루째 고기를 잡는 사람이 고기를  많이 잡겠다고 매일 손
    으로 물고기를 잡아서 열하루 잡은 것보다  더 많이 잡는 법입니
    다. 그냥 돈 벌려고  하는 사람과 기업가는  다릅니다. 돈을 많이
    벌면 기업가가 되는 것같지만,  사실 기업가의 틀을 갖춘  사람은
    어망을 먼저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냥 돈벌려고 하는 사람은 물고
    기를 낱 개로 잡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업가는 튼튼한 어망
    을 구축하며, 그 어망의 과보(果報)가 결국 그룹입니다.
      "기러기가 나무에 진출한다. 고요히  온순한 자세를 가지면 안
    정된 가지를 얻으리라." 안정된 가지를 갖추고 난 뒤에 비로소 날
    아야지 되돌아 올 수 있고 또 나는 만큼 쉴  곳이 있는 것입니다.
    안정된 가지를 갖추지 않고 무조건 나가면 큰 일  납니다. 수영학
    원 6개월 다녀서 수영에 자신이 생겼다고 바다에서 멀리 섬이 보
    인다고 헤엄쳐 나가면 결국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먼저 안정
    된 가지와 연(緣)을 맺어 놓은 다음에 그 연(緣)을 통해서 안정된
    가지를 맺어 놓은 다음에 그때 날라야 됩니다. 그래서 네 번째 효
    는 음성에너지이기 때문에 "안정된 가지를 갖추고 그 다음에 비상
    하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양효. 기러기가 높은 언덕에 진출한다.  남
        편이 나라일에만 열중하기 때문에 아내는 3년동안 임
        신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소원을 성취하리라. 길하다.
     
      "남편이 나라일에만 열중하기 때문에 아내는 3년동안 임신하지
    아니한다." 날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됩니
    다. 여자한테도 한눈 팔새가  없습니다. "마침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연(緣)에 의해서 연(緣)을 갖고, 연(緣)의
    세계를 위해서 일하다보면 손해보는 것같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좋은 결실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공을 위해 점차적으로 가
    는 순서입니다. 그리하면 나무의 뿌리는  산에 깊숙히 내리고, 산
    은 그 나무를 자라게 하여 점차적으로  울창한 숲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여섯 번째 양효. 기러기가 넓은 하늘을 날아간다.  그
        날아가는 날개에 질서가 있어 어지럽지 않다. 길하다.
     
      기러기들은 바람의 강도와 방향에 따라서  대형을 유연하게 변
    화시키면서 날라갑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멀리 날 수 있는 것입니
    다. "날아가는 날개에 질서가 있어 어지럽지  않다." 이제 점차적
    으로 발전하여 자유를 통해서 기러기가  완전히 과보(果報)를 움
    직이는 것입니다. 보(報)의 세계를 알고 보(報)를 맞춰가는 것입니
    다. 과보(果報)를 보고 과보(果報)를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응보(應報)에
    떠밀려 다니는 불행을 겪기보다는 과보(果報)를 통해서 여유있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한 평화로운 삶을 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431
  • 52. 간위산(艮爲山)
    『 부동(不動)의 상태 』
     
     ●     몸은 가되 마음은 멈춰서 있어야 합니다. 마음도 신
     ●     나서 같이 가면 부딪치는 것입니다. 가야할 때 가는
     ○     걸 알려면 흐르되 멈춘채로 흘러야 되고, 순간 순간
            멈춰야 되고, 또 멈추되 결코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     안됩니다. 그때 비로서 흐름과 하나가 됩니다. 또한
     ●     심정으로부터 떠난 상태를 가져와야지만 진정한  화
     ○     합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렇게 이야기합니다. "흐르되 항상 멎은 상태로 흘러
            라.  멈추되 항상 흘러라.  굴러가는 바퀴가 땅위에
            정지된채 정지하려면 쓰러져 버린다."
     
                          간위산(艮爲山)
     
        [간(艮)]은 멈춘다는 뜻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고,
        가야할 때 간다. 움직이고 정지하는  것이 그 시기를
        잃지 않으면 그 길에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 괘는
        각 효가 하나도 만나는 것이 없다. 서로 등지고 멈춰
        서서 그 몸을 볼 수  없고 뜰에 들어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때와 곳을 따라
        멈출줄 알면 허물이 없으리라.
     
      간(艮)은 견고함을 나타내는 산이 두 개 겹쳐있는 괘입니다. 산
    아래 산이 있어 막혀있고 정지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막혀있다
    는 것은 우리가 크게 발전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막혔
    다' '정지한다'는 것을 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라는 것이 될 경우
    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괘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
    다. 운전을 하다보면 자동차가 정지하여야할 상황이 있습니다. 이
    때는 브레이크를 밟아주면서 차를 세워주고, 그 이후에 또 가야합
    니다. 그런데 그냥 가게 되면 부닥치게 됩니다.
      인간은 두뇌가 있기 때문에 이 두뇌는 항상 회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유심히 잘 보기 위해서는  말도 하지 말고 머리
    도 쉬어야만 합니다. 공상이 쉬어야지만이 물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즉 정지한 상태에서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이
    야기입니다.
     
      "이 괘는 각 효가 하나도 만나는 것이 없다." 이 괘는 어느 것
    하나이든지 서로가 화합하는게 없습니다.  양과 양으로 밀어내고,
    음과 음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이 꽉 막힐 때가 있고,
    또 아무리 노력을 해도  노력이 되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때 어떻게든지  발버둥쳐 볼려고 합니
    다. 할려고 하는 그 기상은 좋지만, 발버둥치는 그 자체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괘가 간위산(艮
    爲山)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경우를 당했을 때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려
    면 어려움을 품어야 합니다. 그 어려움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행복한 때라 하더라도 그 어려움은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상황이 막혀버리는  경우가 생
    깁니다. 이것을 통해 성숙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누군가 만약에 나를 못움직이게 하려고 몸을 꽉잡았을 때, 빠져
    나가려고 버둥거리면 상대방은 힘을 더 주어 조여오게 됩니다. 오
    히려 내가 힘을 빼버리면 더 이상 안조입니다. 도둑이  들었을 때
    태연하게 누워서 가만히 있으면 도둑이 그냥  물건만 훔쳐가는데,
    "도둑이야" 그러고 먼저 호들갑을 떨면 도둑은 어느새 강도로 변
    해서 그 사람을 죽여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다. 멈출 때 멈추어서서 그 상황을
    잘 비켜가면 도리어 나중에  복이 되는 법입니다. 여름에  나무가
    무성하게 잎이 자랐다가도 가을이면 서서히  잎이 떨어지기 시작
    합니다. 낙옆이 떨어지는데도 나무가 '나는 잎을  더 자라게 해야
    지' 하면 그 나무는 생명력이 고갈되어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
    때 안으로 더 걷어들이고  뿌리쪽으로 강하게 작용을  하면 결국
    나중에 가서는 더 무성하게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흘러 내려가다가 웅덩이가  있으면
    물은 웅덩이를 건너 뛰어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웅덩이를 먼저
    채우고 흘러나가게 됩니다. 혹시 '운'이라는 것이 나를 강제적으로
    묶어놓고 있다고 한다면 물이 웅덩이를 채우듯이 자기 내실을 기
    하면서 또 적당히 자신에게  맞는 기회를 찾아서  움직이게 되면
    그 운을 무난히 넘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자기 몸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서 대상에 머물러
    야만 그 대상이 내 몸안으로 들어옵니다. 마음이 한  물건에 집중
    하고 있으면, 그 물건이 내 눈에 정확히 들어옵니다. 많은 여자들
    이 있는 가운데에서 나의 애인이 유독 눈에  띨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이 애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멎은
    상태가 되어야지만 현실이 들어오게 됩니다.
      멈춘다는 것은 정신통일을  말합니다. 정신통일은 정신의 정지
    상태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주의력 집중이 곧 정신 집중입
    니다. 멎은 상태에서 흐르는 흐름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주의
    력 집중입니다. "즐거움에 빠지지 말아라." "슬픔에 빠지지  말아
    라." "기쁠 때 멈추어라. 슬플 때 멈추어라. 그리고 그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이것이 진정으로 멈추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위기가 이상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보통 '신경
    성'이라는 이름이 앞에 붙은 병이 생긴 사람들이 다 이런  사람들
    입니다. 신경성 병은 자신이 고쳐야 합니다. 그것은 다 주의력 집
    중이 되지 않아서 경직되어 생긴 것입니다. 흐르는 흐름을  볼 때
    조심해야 되고, 걸음 걷는다는 그 자체가 해가 되지  않는가도 생
    각해야 됩니다. 즐거울 때, 또 어려운 문제에 쌓였을 때, 결코 죽
    은 듯이 정지되어서는 안됩니다. 곰한테 걸리면 죽은 듯이 정지하
    라고 했지만, 그것도 사실은 산태로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멎은 상태에서 바로 보고, 바로 들어온 것을 통해서 거기에  맞
    게끔 머리를 써야 합니다. 회의할 때 주제에서 어긋나는 횡설수설
    을 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정지하여 주의력을  집중하는 것이
    없이 그냥 굴러가는 머리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면
    그 사람의 인생은 밤낮 땀은 억수로  흘렸으되 결실이 없게 됩니
    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결실을 바로 내기 위해서는 멎은 상태에
    서 바로 보고, 바로 본  것들 위에서 비로서 머리를 써야만  되는
    것입니다.
      "[간(艮)]은 멈춘다는 뜻이다. 멈춰야할  때 멈추고 가야할 때
    갈 수 있는, 즉 움직이고 정지하는 그 시기를 잃지 않으면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 괘는 위, 아래가 하나도 만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겨웅에 부질없이 움직이는 것은 그 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멈춘다는 것은 멈춰야 할 곳에 멈춘다는 의미입니다.
      멈춰야할 때 멈춘다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서는 마음은 항상 멀리 가 있어야 됩니다. 목적지를  보고 가야지
    정확히 멈출 때를 알지, 그렇지 않으면 정확히 멈출  때를 모르는
    겁니다.
     
      몸은 가되 마음은 멈춰서  있어야 합니다. 마음도 신나서  같이
    가면 부딪치는 것입니다. 가야할 때 가는 걸 알려면  흐르되 멈춘
    채로 흘러야 되고, 순간 순간 멈춰야 되고, 또 멈추되 결코 그 자
    리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때 비로서 흐름과 하나가되고 심정
    으로부터 떠난 상태를 가져와야지만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다
    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흐르되 항
    상 멎은 상태로 흘러라.  멈추되  항상 흘러라.  굴러가는 바퀴가
    땅위에 정지된채 정지하려면 쓰러져 버린다."
     
        대상. 산이 겹친 것이 간(艮)의 괘상이다. 산도 제 위
        치를 지켜 움직이지 않는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자신의 신분에 넘치는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자신의 신분에  넘치는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서야할 때 브레이크를  밟는 것. 자신의  신분에 넘치는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흐르는 흐름에 계속해서 빠지지 않
    는다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음효. 멈춰서서 발을 움직이지 아니한다.  자
        신의 바른 위치를 잃지 않는다. 허물은 없다. 길이 한
        결같이 하여 변함없음이 좋다.
     
      "멈춰서서 발을 움직이지 아니한다." 즉 꽉 조여가지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바른  위치를 잃지 않는다."
    이럴 때는 있는 자체로 서 있어야지 여기서 발버둥 쳐버리면 자기
    자신의 발의 위치마저 잊어버리게  됩니다. "길이 한결같이  하여
    변함이 없으면 좋다." 즉 무리하게 하지 말아라 라는  이야기입니
    다.
     
        두 번째 음효. 장딴지 위치에 그친다. 적극적으로  하
        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
        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
        하다.
     
      "장딴지 위치에 그친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장딴지
    정도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즉 조이는 힘이 그만큼 약
    해진다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따라가
    고 있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
    고, 남의 힘에 의해 밀려 가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
    은 자기 주장을 더 내세우게 되는데, 그러지 말고  차라리 주장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불쾌할  망정 남에게 끌려가는 편이  낫습니
    다. 적당히 끌려가면 기회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양효. 허리의 위치에 그친다. 허리를  움직이
        지 아니하니 뼈가 깨질 듯이  아프다. 불안한 생각에
        마음이 탄다.
     
      여기는 양에너지입니다. 무언가 하려고 하는 상태입니다. "허리
    를 움직이지 아니하니 뼈가 깨질 듯이 아프다." 그러나 정지된 상
    태에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열심히  하면 허리만 아프지 결
    실이 없습니다. 하려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현실적으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등골  뼈가 깨질 듯  아프고,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허리 정도 움직일 수 있을 때가 마음이 더 타는 법입니다. 차라
    리 다 못 움직인다면 괜찮은데, 이만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더 괴
    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움직여 진다고 무리하게  움직이면 통증만
    심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대로 있으면 서서히 풀려가게 됩니다.
     
        네 번째 음효. 몸에 그친다. 자신이 해야될 일에 그친
        다. 허물은 없다.
     
      "몸에 그친다." 몸 정도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마구 움직이는
    정도는 못하더라도 그저 착실하게  자기 자신 하나는  간수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자기 몸 움직이는데에서 만족하고 나중에 더 풀
    릴 때까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난 못해"
    "내가 뭐하러 여기 있어?"  하고 반발하다가는 주위에 의해  먼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음효. 광대뼈를 움직이지 아니한다. 마음이
        바르게 중용의 도를 지키기 때문에 말이 신중하다.
     
      "광대뼈를 움직이지  아니한다." 광대뼈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것은 턱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 주장을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중용을 지켜
    서 아무리 따질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부하
    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섯 번째 양효. 중후한 마음으로  고요히 위치를 지
        킨다. 길하다. 유종의 미를 거두리라.
     
      지금 불운하다고 해서 불운을  버리고 다른데 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중후한  마음으로 고요히  위치를 지킨다.  길하
    다." 현재의 위치에서 더 큰 복이 올 수 있습니다. 서러움을 간직
    하고 살면 그 서러움을 통해서 나중에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는데,
    서러움이 싫다고 해서 나가버리면 자기 자신의 전 인생뿐만 아니
    라 자기 처자식까지도 전부다 해를 입게 됩니다.
      남자가 맨 처음 군대에 갔을 때  자기가 대학원 나왔다고 신병
    때 잘난척을 하면 위로부터 얻어 맞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를 가
    더라도 일단 그곳의 실세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무언가
    강한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싫다고 함부로 나가
    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신입사원밖에 되지 안습니다. 어딜
    가든지 맨 처음에는 "발을 못움직인다.", "장딴지가 못움직인다."
    라는 상황을 겪고 지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어느새 자기 자신도
    최고 고참이 되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부터 어려움을 극기하면서 온 사람은  자기 판단이 분명하
    지만, 그 판단 없이 자기 멋대로 하겠다고 날뛰면  주어진 자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막힌 산이  움직이지 않듯이, 그 확고한
    힘을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처음  시작할 때
    는 항상 [간위산]으로 시작하라." 그것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
    는 우주의 섭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794
  • 51. 진위뢰(震爲雷)
    『 두려운 마음 』
     
     ●     외면하지 말라, 돌아서지 말라, 바로 힘들고  외면해
     ●     야 할 그때가 각질을 뚫고 에너지가 나아가야할  때
     ○     다. 가라. 지옥으로 가라. 드디어 지옥안에서 그대는
            천당을 발견할 것이다.  애초부터 천당을  찾아가면
     ●     지옥이 끝까지 따라오리니, 안심입명(安心立命)은 편
     ●     안한 마음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다. 불편한
     ○     마음을 통해 생명의 자리가 바로서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편안하면 본 뜻을 잃는다. 불편한 마음으로써
            현실을 지키는 울타리를 삼아라.
           
     
                          진위뢰(震爲雷)
     
        [진(震)] 괘는 발전을 의미하는 괘다. 우뢰가 진동하
        니 놀라며 두려워하지만 우뢰가 그치니  웃으며 이야
        기한다. 근신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있으니 복을
        이룬다. 무서운 우뢰소리 백리를 뒤흔드니 모든 사람
        들이 겁내고 두려워한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
        로 제사를 거행하여 조금도 예절에 실수하는 일이 없
        다. 이런 인물이면 나아가 제왕의  지위에 올라 상제
        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거의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을 당하는
    큰 문제로부터 사사로운 문제에 이르기까지  각종 어려움이 발생
    하여 그로 인해서 많은 고민과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일
    수록 우리는 약해져서는 안되며, 그것이 한편 생각하면 우리를 강
    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하늘의 배려라고  여겨야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을 물러섬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합니다.
      씨앗도 껍데기를 까면 그 안에 있는 것은 상당히 야들야들합니
    다. 그러나 어느 씨앗도 껍데기는  단단합니다. 달걀도 안의 노른
    자와 흰자는 약하지만 껍질은 단단한 편입니다. 씨앗이 제일 먼저
    뚫고 나오는 것은 자기  각질입니다. 그리고 각질은 앞으로  흙을
    뚫고 나가는 일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씨앗이 각질안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하면 씨앗이  싹이 나고 나무로  변한다고 하는
    비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일을 주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비젼을 일으킬 수  있는 동기와 계기를 마련
    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뢰(雷)" 괘는 뇌성을 나타내는 괘가 두  개 겹쳐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뇌성이 치고 있습니다. 우리들 눈 앞에  나타나는 사
    사로운 어려운 일들이 모두 다 뇌성입니다. 뇌성과 뇌성이 겹치고
    겹치면 번개가 됩니다. 그런데 번개에 맞을 확률은  100만분의 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뇌성이 치더라도 번개 맞을 일은  거의 없다
    는 것이 또 뇌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개친다고 겁이나서
    못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치 밥풀귀신에게  홀린 사
    람과 똑같습니다.
      어느 야간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여고생입니
    다. 하루는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오는 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나올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느라 잘 몰랐는데,  교문을 나
    서자마자 혹시 누가 있지 않나 하고  사방을 둘러보니까 어디 저
    쪽에서 누군가가 허연 옷을 입고선 따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
    니다. 그 여학생은 겁이 나서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또 도망가
    면 달려들 것같아서 참고 참으며 버스타는데까지  갔습니다. 그런
    데 이상하게도 버스안에서도 그 사람이 계속 따라오고 있는 것이
    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집 골목있는데까지 왔는데  힐끗보니 아
    직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아직까지  나를
    덮치지 않는걸 보면 이건 사람이 아니라 귀신 같았습니다. 그래서
    골목길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쳐서 드디어 집앞에서 초인
    종을 누르고 빨리 문열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나오면서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 "엄마 학교에서부터 누가 날 따라오는데  아
    마 귀신인가봐." 엄마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얘야 너 눈에 붙은
    밥풀이나 떼어라." 하고 밥풀을  떼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옆을 보
    니까 허연게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는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그러한 밥풀귀
    신같은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밥풀을 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벼락에 맞을 확률이 100만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마음을 편안하게 놓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뇌성이 부딪
    칩니다. 우리는 항상 긴장하는 마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야 합니다. 여기서 '두려운'이라는 것은  겁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대비하며 '잘되야 될텐데' 하는 조바심 내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조바심 내는 마음을  갖고 뇌성을 쳐다보고  지나갔을 때
    뇌성은 별 것 아닌 소리로 사그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싹이 나올 때 그런  걱정, 그런 위험을 갖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야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결코 흙을 뚫고 나올 수 없습니
    다. '도(道)'는 항상 마음조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는 해탈했
    다고 술먹고 퍼져서 자동차고 뭐고 다  나오라 그래 하면서 찻길
    아무데서나 픽픽 쓰러지는게 초연한 것이 아닙니다. '초연'한 것은
    항상 조심하고 항상 가슴 조이면서 문제가  생길 때는 문제를 직
    시하고 그 가운데서 길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문제들
    이 번개가 땅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뢰(雷)'괘는 주역 64괘 가운데서 크게 발전한다는 괘중의 하나
    입니다. 상하괘가 똑같이 생겼으며, 음효가  두 개 양효가 하나로
    서 남성입니다. 왜 음에너지가 두 개고 양에너지가 하나인데 양성
    이 되는가? 양에너지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안에서 당기는
    힘이 더 강해야 합니다. 그 힘이 약하면 양성이  안나가는 법입니
    다. 그래서 우리가 웃을 때는 안에서 당기는 힘이 약해집니다. 그
    것을 우리는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프다고 그럽니다. 웃으면 당기는
    힘이 점점 약해져서 나가긴 나가야 되겠는데 당길 힘이 없다보니
    까 배아픈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양성 에너지가 우선 작용하
    기 위해서는 그 안에 음성에너지가 곱으로 있어야 됩니다.  이 뢰
    (雷)괘가 바로 안에 당기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양성에너지가  더
    이상 못참겠다 하고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또  여성도 마
    친가지로 여성에너지가 우선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강하게 내보
    낼려고 하는 양성에너지가 두 배로 있어야 합니다.
      "우뢰가 진동하니 놀라며 두려워하지만 우뢰가  그치니 웃으며
    이야기한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하더라도 그 문제가 두고  두
    고 평생을 묶어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뢰는 사라지는  법입니
    다. 그래서 두려움이 있는 곳,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편안한 것을
    찾아가려는 것은 각질안의 행복입니다. 각질속 행복은  우리가 바
    라는 진정으로 풍요로운 평안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끝내가서
    는 그 각질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각질을 깨고  나와야 됩니다. 외면하는  자존심. 이것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비겁한 자존심입니다.  피하되 스스로 외면하
    지 않는다. 즉 "우뢰가 진동하니 놀라며 두려워하지만  우뢰가 그
    치니 웃으며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항상 거울삼아서 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
    니다. 옆집에 도둑이 들어왔는데 우리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괸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필경 나중에 도둑을 맞을  것입니다. 그
    렇다고 매일밤 도둑 공포증에 걸려서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할
    위인입니다.
     
      이 세상은 무수히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일
    들이 지금 앉아 있는 우리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같지만, 그
    러나 이 세상은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별의 별 것을 다 일
    으켜 결국은 우리와 상관이 있게 됩니다. 그 일으킴 속에서 "나의
    뜻을 어떻게 관철시켜 나갈 것인가?"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남의 일을 거울삼아서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합니다. 그러
    나 남의 일이 가슴에 와닿지를 않고, "저것은 내 일이  아니니까."
    하는 사람은 그 일을 이겨나갈 수 없는 사람이며, 하물며 자기 일
    도 아닌데 남의 일에 자기가 공포에 질려 겁을 먹고 엄두를 못내
    는 사람은 물론 뜻을 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  두 사람은 결
    코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신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있으니 복이 이른다." 즉 두려워하
    는 마음으로 가슴 조이면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편안하게 살려
    고 하는 사람은 돼지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매사 두려워하는 마음
    으로 '안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행동하니 복이 있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일면 두려워 하는 그 마음안에 머
    무르고 불편함이 일면 그 불편한 마음 안에 머물라는 말입니다.
      "무서운 우뢰소리 백리를 뒤흔드니 모든 사람들이 겁내고 두려
    워한다." 이럴 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한 태도로 제사를 거행하
    여", 즉 하고자 하는 일에 정성을 쏟아서 "조금도 예절에  실수하
    는 일이 없다." 실수는  각질안에서 행복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제왕의 지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항상 조바심 내는
    마음으로 천둥 번개가 치는 곳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대상. 우뢰가 거듭 겹쳐서 오는 것이 진(震)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근신하고 두려워하며 더
        욱 주의를 살펴 수양한다.
     
      외면하지 말라, 돌아서지 말라, 바로  힘들고 외면해야 할 그때
    가 각질을 뚫고 에너지가 나아가야할 때다. 가라.  지옥으로 가라.
    드디어 지옥안에서 그대는 천당을 발견할 것이다.  애초부터 천당
    을 찾아가면 지옥이 끝까지 따라오리니.
     
        첫 번째 양효. 우뢰소리 들려오니 겁내고 두려워하지
        만 우뢰가 그친 뒤에는 웃으며 이야기한다. 근신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복이 오게 된다. 근신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난국에 대처하면 뒤에는  웃고 즐겨할
        수 있게 나라의 질서가 회복될 것이다.
     
      "우뢰소리 들려오니 겁내고 두려워하지만 우뢰가  그친 뒤에는
    웃으며 이야기한다." 우뢰소리 들려오니 겁내고 두려워하지만  조
    바심내고 주의력을 잔뜩 집중시키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 뒤에는
    우뢰가 그쳐지는 것이며, 우뢰가 그친 뒤에는  웃으며 이야기합니
    다. 중요한 것은 조바심 내고 더욱 주의력을 살펴서  하기 때문에
    복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발전은 외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먼저 각질을 깨
    는 것으로부터 발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음효. 음전(陰電)과  양전(陽電)이 합쳐 맹렬
        한 우뢰가 운다. 벼락이 떨어질 염려가 있다.  침착하
        게 판단하여 재물을 버리고 언덕에 올라가 피하라. 7
        일이 지나면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침착하게 판단하여 재물을 버리고 언덕에 올라가 피하라." 벼
    락이 떨어질 위험이 있을 때는 자기가 가진것에 메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길을 찾아야 됩니다. 흘러가는 에너지는 길을  찾지만, 자
    기로부터 흐르지 않는 에너지는 그럴 때 자기를 웅크리게 됩니다.
    그리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벼락 탓을 합니다. 그러면 염라대왕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 벼락 내가 준 것이다.  그대는 나에게 불
    만있는가?" 그때는 물론 자기 것을 놓고, 거기서  길을 찾아야 됩
    니다. 자기 것에 매여져 있으면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집착하
    지 말라. 일주일쯤 지나면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을
    쥐기 위해서 지금 잠시 잡은 것을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로
    두 개를 쥐는 법입니다.
     
        세 번째 음효. 천둥은 멀리가고 다시는 재앙이 없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침착하게 그 상항을 대처해
        나가며 매듭을 짓는다면 또 다시 위급한 사항은 오지
        않는 것이다.
     
      나하고는 상관없었던 일이 느닷없이 나에게 닥쳤을 때, 그 때는
    얼른 대피할 수 있어야지 한가지만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있게
    되면 두 번째에 걸립니다. 그래서 음과 양이 합쳐서  맹렬한 우뢰
    가 칠 때는 얼른 자기가 지금 현재 쥐고 있는 것을 놓고 다른 곳
    으로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첫째, 자기 자신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매여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면서도 항상 외부와의 벌
    어지는 일들을 리드미컬하게 조화시켜 나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
    합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일지라도 침착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
    가면 위험은 멀리가고 다시는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네 번째 양효. 우뢰가 쳐서 드디어 땅속에 들어 갔다고 해서
        내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우뢰가 한 번 치고 나면 끝났지만  조그맣게 작은 소리가 다시
    한 번 칩니다. 즉  메아리가 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소멸한다
    했을 때 한꺼번에 싹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그와같은 형태로 파
    장이 차츰 차츰 약하게 나가게 됩니다. 처음에 쳤던  것이 없어졌
    다고 해서 형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뒤에 여
    파의 에너지가 남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기
    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시간 동안 뜸을 들여야 할 밥
    을 한 40분쯤 되어서 물기가 다 빠졌다고 솥뚜껑을 열고 밥을 한
    번 푼다음 다시 그것을 뜸들이려고 하면  제맛이 나지 않는 법입
    니다. 그 여파기간을 잘 측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공부할 때
    도 마찬가지로 어젯밤에 달달 외웠다고 해서 그 다음날 다 생각나
    는게 아닙니다. 사람은 잃어버린다는 여파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
    다. 그래서 공부는 꾸준히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되었다고 해서 마음을 놔버리면 다시 한  번 꼭 그와 엇비슷
    한 것이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양에너지가 한 번 더 있
    다는 것은 우뢰가 한 번 더 쳐서 이것이 에코를 일으킨다는 뜻입
    니다. 우뢰가 멎었다 해서 결과가  대번에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때에 조심해야 됩니다.
     
        다섯 번째 음효. 우뢰가 일어나니 전진함은 위험하다.
        그러나 달아나서는 안된다. 냉정히  판단하고 제사를
        계속 지내라.
     
      네 번째에서 다시 일어나는 우뢰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뢰
    가 일어나니 전진함은 위험하다." 이때 또 겁내서는 안됩니다. 잘
    살펴서 할 일이 있음을 보고 신중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해
    야 합니다. 그 일은 이제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이므로 실수하지 않
    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다된 밥에 재뿌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입니다.
     
        여섯 번째 음효. 우뢰소리에 당황하여  겁에 질린 눈
        을 두리번거린다. 마음에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없는 태도로 전진하면 흉할 뿐이다. 우뢰는 자기
        집에 떨어진 것이  아니고, 이웃집에 떨어진  것이다.
        이웃의 일을 보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
        을 가지면 비록 흉하기는 하나 허물은 없을 것이다.
     
      "이웃의 일을 보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면
    비록 흉하기는 하나 허물은 없을 것이다." 남한테 일어났을 때 내
    일처럼 받아들여서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 내가 싫다고 무조건 되돌아 서는게  아니고, '내
    가 이렇게 싫을 때도 어떻게 싫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 볼 수 있
    을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는 사람. 이러한 힘을 우리는 20대부
    터 길러야지 30세쯤되면 저절로 굴러가게 됩니다. 즉 내가 생각해
    내지 않아도 아이디어가 저절로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우뢰가 아무리 일어난다 하다라도  스스로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나는 가고 싶지 않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치
    고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이란 심정에서 벗어난 삶입니다.
      우리는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기도문 "나에게  편안과 행운이
    찾아오게 마옵시고, 나에게 시련과  불운이 왔을 때 그것을  나의
    뜻으로 내가 원하는 행운으로 바꿀 수  있게끔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던 맥아더 장군의 신념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震)]괘는 양이 맨 밑에 서로 몰려있고, 음과  양이 서로 몰
    려 있어 모두가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발하기 때문에  서로
    쾅하고 부딪쳐서 번쩍하고 번개가 날 수도 있고 반발하는 힘에 의
    해서 에코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사 무슨 일을 할 때 거
    기에는 반드시 반발하는 힘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공기도 만질려
    고 하면 아무 것도 없지만 이걸  밀어내면 공기가 나를 밀어냅니
    다. 물을 손가락으로 찌르면 물이 별게 아닌 것같지만  그렇지 않
    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지만 서로 반발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스스로 잘
    살펴서 넘어가는 지혜를 터득하면 크게  발전한다는 것을 진위뢰
    (震爲雷)는 우리한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5183
  • 50. 화풍정(火風鼎)
    『 고정관념을 버린다 』
     
     ○     자식을 얻기 위해서 첩을 얻을 수 있듯이 나는 그대
     ●     들에게 얼토당토한 질문을 합니다.  "그대는 가정을
     ○     떠나서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즉 찌꺼기를  버리
            기 위해서 솥을 뒤집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
     ○     다. "예"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네  가정도 지킬 수
     ○     없는 네가 어찌 성리(性理)를 지키겠느냐?" 하고 말
     ●     합니다. 그러나 "네, 하지만 제 가정은 어찌하면 좋
            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네 가정을 지켜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
            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가정을 버리면서 어떻
            게 따릅니까?"라고 말한다면 나는 다만 빙긋이 웃을
            뿐 그대를 가정으로 돌려 보낼 것입니다.
     
                         화풍정(火風鼎)
     
        [정(鼎)]은 크게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괘는 솥
        을 상징한다. 나무로 불을 때서 삶고 익힌다.  성현은
        삶고 익힌 제물로 하늘의 상제를 제사하고 천하의 어
        진 사람을 돕는다. 겸손한 마음으로  남의 말과 의견
        을 존중하니 눈과 귀가 총명해 진다. 유화한 덕을 가
        진 이가 제왕의 지위에 있어서 훌륭한 신하들과 뜻이
        서로 호응한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발전하는 것이
        다.
     
      [화풍정(火風鼎)]은 위의 괘가 불을 뜻하는 괘입니다. 불은 활
    활타므로 양성에너지 입니다. 그런데 활활타서 날아가지 않고 지
    금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은 안으로 강하게 응집이 되어져 있기 때
    문입니다. 음성에너지는 응집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화(火)는 불
    을 뜻하면서도 안으로 응집되어 있는  상태에서 바깥을 잘  살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명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래 괘는 밑으로는  음성에너지이기 때문에 가라앉아 있으며,
    위로 퍼져 나가는데 퍼져나가는 것이 한  번 더 퍼져나가면 그것
    이 바람입니다. 또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마음은 강하게 하되, 안
    으로는 자기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여 겸손을 뜻하는 괘이기
    도 합니다.
      위로는 현명하고 안으로 겸손하게 임하게  되면 하늘은 온전함
    을 그 사람에게 주게  됩니다. 그래서 [화풍정]은 크게  발전하는
    괘라고 했습니다.
      또 하괘는 밑으로는 깊이  깊이 파고 들어가서  흙을 움켜쥐고
    위로는 쭉쭉 뻗어올라가기 때문에 나무를 뜻하기도  합니다. 나무
    와 불이 모여지게 되면 무언가를 끓이고 태울 수가  있습니다. 때
    문에 [정(鼎)]괘는 "나무를 불로  때서 삶고 익힌다."라는 뜻입니
    다.
      정(鼎)은 가마솥을 나타냅니다. 솥은 무언가  담아서 그것을 끓
    여 다른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상태는  바람을 타
    고 나르듯이 굉장히 크게 발전합니다. 성현은 "삶고  익힌 재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하늘로부터의 행복에 대답해서 "천하
    의 어진 사람을 돕는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인은 무슨
    일이 크게 발전했을 때, 자기가 잘나서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아니
    하고 겸손하게 "이렇게 잘 될 수 있게  하늘이 도와주셨구나." 해
    서 그 고마움을 하늘에 돌린다라는 뜻입니다.
      옛날 예수가 말했듯이 모든 영광은  하늘로 돌린다라는 뜻입니
    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
    문에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그 잘
    된 것은 하늘에 고마움을 느끼고, 하늘의 뜻에 맞추어서  모든 이
    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또 소인배가 못하겠다는 일
    을  하늘을 대신해서 정성껏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욱 더 크게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잘되면 내가 잘했다  하고 자만심에
    차서 자기를 내세웁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길
    이 막힙니다. 그래서 성인은 잘될 것은 하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고 해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낸다라고 했습니다.
      상괘는 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총명하다."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괘는 나무를 상징하는 괘이기도  하지만 겸
    손을 뜻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머리
    를 총명하게 쓰는 것도 필요하고, 자기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모든 영광을 하늘에 돌리고  항상 아무 것도 없는
    듯한 새로운 기분으로 해야됩니다.  그것이 바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대상. 나무 위에 불이  있는 것이 정(鼎)괘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군주의 자리를 바르게 지
        켜 하늘의 명령이 자신에게 정착하도록 한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군주의 자리를 바르게 지켜 하늘의 명
    령이 자신에게 정착하도록 한다." 먼저 자기의 위치를 정하고  세
    상을 움직여야 합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자꾸 먼저 세계를 재패하
    려고 합니다. 대체로 정치가들은 "세계의  종"이라는 마음을 가져
    야 하는데 입으로는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진실은 자기 욕
    심을 세상에 펼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세상에 펼치려고 해서 세계를  재패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또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정치를 하려면 먼저 자기의  위치를
    분명히 정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찾은 사람이  그
    위치에서 자기가 얻은 것을  베풀었을 때 그러한  사람들이 전부
    다 인류를 끌고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지배 당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피조체(被造體)
    이든지 간에 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사람이 세계를 움직이는
    주인공입니다.
     
        첫 번째 음효. 솥을 거꾸로 뒤집는다. 도리에 어긋나
        는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솥바닥에 있는 찌꺼기
        를 쏟아버리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찌꺼기를 버려
        야지 거기에 소중한 물건을 삶아서 익힐 수  있는 것
        이다. 첩을 두는 것이 아들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허
        물은 없다.
     
      "솥을 거꾸로 뒤집는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는 먼저 남아있는 찌꺼기를 전부 다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때에 따라서는 욕먹을 짓이  필요합니다. 솥을 뒤집어 놓는  것은
    남들로부터 비난받을 짓이지만, 그것에 대한 심지가  분명한 것이
    라면 반드시 이와같은 과정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이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찌꺼기를 버려야지
    거기에 소중한 물건을 삶아서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찌꺼기를 버
    려야 거기에 소중한 물건을 삶아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은 사실 미국보다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지금
    동양이 미국보다 뒤지고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입
    니다. 동양 사람들은 의리있는 사람들입니다. 의(義)와 정직은  곧
    이 곧대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의(義)는 상당히  입체적입니다. 선생이 학생을  때리는
    것은 동양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선생님이 때리면
    폭력을 휘둘렀다고 경찰에 고발을 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자제력
    을 가지고 학생이 미처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서 때리
    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것이 의(義)입니다. 미국사람들은 불러다가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해줍니다. 또 들은 그대로를 이해하도록 설
    득을 시킵니다.
      이것이 정직과 의리의 다른 점입니다. 그런 식으로 정직하게 되
    면 노력한만큼 그 이상의 알파가 나올 수 없습니다.  미국 물건을
    사면 상당히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그
    래도 우리 동양에서 가장 발전된 일본은 동양의  "의(義)" 정신이
    있어서 실용적인 면이 있으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
    니다. 일본 제품이  모양이 매끄럽고 이쁜  것은 몇 천년동안  의
    (義)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발전해 봐야
    쓰기에는 이상이 없지만 그 이상의 것이 담겨있지 않듯이 정직만
    으로는 큰 발전이 없습니다. 때문에 뜻한 바를 하기  위해서는 윤
    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첩을 두는 것이 아들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허물은 없다." 부
    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부인을  얻는 것은 한 여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인권을 저버리는 것같지만, 자식을 얻기 위해
    서는 첩을 얻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옳은  것은 아
    니지만 허물될 것은 없다. 즉 그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담기 위해
    서 솥을 거꾸로 해서 엎어버릴 지라도 그것에 대해 허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양효. 솥에 물건이 담겨있다. 조심하여  다루
        어야 한다. 내 짝이 병이 있으니  내 그와 함께 하지
        못한다. 마침내 허물은 없으리라.
     
      "솥에 물건이 담겨있다. 조심하여 다루어야 한다." 솥을 엎어서
    다 떨궈낸 다음에 이제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는 처음부터 좋지
    않은 불순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첫
    번이 잘못되면 잘못이 잘못을 낳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짝이 병이 있으니 내 그와  함께 하지 못한다." 무언가 찌
    꺼기를 버리고 새로 시작할  때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병이 있는 친구를 끌어들여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나한테 현재 이
    득이 된다하여도 뇌물같은 것을 잘못받으면  그 뇌물이 보석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수갑으로  변하여 나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는 양효이므로  무언가 해낼 때  애초부터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넣어서 꺼림칙한 것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
    다. 조심해서 다루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양효. 솥  귀가 변하였다. 손댈 길이  없으니
        어찌 할 길이 없다. 솥안에 삶아 놓은 기름진 꿩고기
        도 먹지 못한다. 비가 내려서 솥이 다시 식어 걱정은
        없어질 것이다. 결국은 길하다.
     
      "솥 귀가 변하였다." 찬 것이 뜨거운 것으로 변하였고 쌀이 밥
    으로 변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하고자 해서  행동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또 다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속이 거북해서 방귀를 뀌었습니다. 나는 속이 좋지 않은  것을 좋
    게 하기 위해 한 행동이지만 옆의  사람들이 냄새가 난다고 인상
    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이 부분까지를 알아야 합니다.
      "손댈 길이 없으니 어찌 할 길이 없다." 밥이 맛있게 되었다고
    빨리 밥먹자고 솥에 달려들면  솥이 뜨거워져 있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으므로 결국 밥도 먹을 수 없습니다. 즉 무엇인가 우리
    가 행동하게 되면 거기에는 나도 모르는 제 3의 작용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비가 내려서 솥이 다시 식어  걱정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끝내 가서는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달은 솥도 식는 것처럼 바로
    그와같은 점을 조심하면 크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정
    도에 지나치게 되면 과열이라는 상태가 되어서 기계가 망가질 수
    있습니다. 과열되기 전에는 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사
    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열되지 않게 쉬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그 일로 인해서 자기도  모르게
    벌어질 수 있는 것을  미리 생각하고 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사람만이 영원히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양에너지는 번지고 번져 나가는 것이므로  무언가 생각지도 않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네 번재 양효. 솥발이 부러져서  공식 연회석에서 맛
        좋은 음식을 엎질러  버린다. 정말 어찌하면  좋은가.
        그 꼴이 수치스럽다. 흉하다.
     
      "솥발이 부러져서 공식 연회석에서 맛 좋은  음식을 엎질러 버
    린다." 맛 좋은 음식을 만들었다고 함부로 좋아하면 맛 좋은 음식
    이 엎질러져 버립니다. 아직 익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너무 큰 만
    족을 기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로부터 좋은 결실이 맺어
    질 수 있습니다. 겸손을 얻지 못하고 자만을 얻은 사람이 바로 이
    와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크게 발전을 하기 위
    해서는 자기 만족의 차원을 낮추어야 합니다. 공식 석상에서 맛좋
    은 음식을 엎질러서 공식적인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효, 즉 음식이 익었다고 해서  신난다고 달려들지
    말 것이며, 좋다고 너무 만족해 하지 말고 겸손의  덕을 쌓아야겠
    습니다.
     
        다섯 번째 음효. 솥에 황금의 귀와 고리가  달려있다.
        훌륭한 솥이다. 어진  제왕이 마땅한  지위에 있어서
        그 덕행이 충실하다.  한결같이 하여  변함이 없으면
        나라의 발전은 순조로울 것이다.
     
      "솥에 황금의 귀와 고리가 달려있다. 훌륭한 솥이다." 가마솥에
    금덩어리가 달리면 훌륭한 솥이 됩니다. 금과 쇠는 성질이 다릅니
    다. 금과 쇠를 붙인다고  해서 덜커덕 붙는  것이 아닙니다. 여간
    고생해서는 서로 붙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두가지의 성질을 하나
    로 교합시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기존에  있는 질서에 자기의 창
    조물을 결합시켜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6효 가운데서 가장  높은 인간의 차원이면서 음효
    로 이루어져 있고 두  번째 양효와 정응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어진 임금이라고 했습니다. 그 어진 임금이 쇠와 금을 붙일 수 있
    을 정도로 겸손한 노력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일을 돕는 신하가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나라의  발전도 순조로울 것이고,
    또한 그와같은 자세로 일을 할 때 그 사람의 덕행은 충실할 것이
    라고 공자는 풀이해 놓았습니다.
     
        여섯 번째 양효. 솥에 옥으로 만든 귀가 달렸다. 강과
        유가 서로 조화되어 크게 길하다.  순조롭지 않은 것
        이 없다.
     
      쇠하고 옥이 부딪치면 옥이 깨지는가? 쇠가 깨지는가? 옥이 깨
    집니다. 옥은 쇠보다 약합니다. 그런 약한 옥과 강한 쇠를 결합시
    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단계가 이
    루어지면 그와같은 어려운 일도 해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
    서 "솥에 옥의 귀가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쇠와 옥, 즉
    "강과 유가 서로 조화를 이루니 크게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얻기 위해서 첩을 얻을 수  있듯이 나는 그대들에게 얼
    토당토한 질문을 합니다. "그대는 가정을 떠나서 나를 따를 수 있
    겠는가?" 즉 찌꺼기를 버리기 위해서 솥을 뒤집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예"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네  가정도 지킬 수 없
    는 네가 어찌 성리를 지키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네, 하
    지만 제 가정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네 가정을
    지켜라. 내가 거기에 임할 것이다."라고 나는 말할 것입니다. 그러
    나 "그럴 수  없습니다. 가정을 버리면서  어떻게 따릅니까?"라고
    말하면 나는 빙긋이 웃고 말 뿐입니다.
      그런 첫 번째 단계가  지나서 정성껏 하다보면  정성껏 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도 모르는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 영향을
    조심하고 무언가 잘 되었을 때 너무나  마음의 만족을 찾지 말고
    겸손으로 정성을 다하면 드디어  쇠에다가 금을 장식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집니다. 또 그 뒤에는 쇠와  옥, 즉 전혀 다른 것을
    결합시킬 수 있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355
  • 45. 택지췌(澤地萃)
    『 인재를 모으다 』
     
     ●     불교적으로 말하면 나 자신이  해탈을 하여 붓다가
     ○     되는 것보다는 이 세상이 나로 인하여 극락이  되는
     ○     것이 더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슬픈 일은
            내가 붓다가 되지 못하면 극락이 나에게는 극락으로
     ●     느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내가 붓다가
     ●     되는 것과, 세상이 극락이 되는 두가지를 동시에 이
     ●     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만 비로서 온전해 집니다. 그
            러기 위한 첫 번째의 길은 내가 붓다가 되려는 마음
            을 버리고, 붓다의 길을 열심히 가는 희생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원하고 있지
            만 큰 행운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행복한 사
            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택지췌(澤地萃)
     
        [췌(萃)]는 모인다는 뜻이다.  아래는 유순하고 위는
        즐거워한다. 강건한 군주와 유순한 신하가 고르고 바
        른 도리를 지켜 서로 호응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므
        로 천하의 어진 인사가 여기에  모인다. 이러한 상태
        가 길이 계속하여 변함이 없으면 나라는 크게 발전하
        리라. 왕이 종묘를 세우고 정성스럽게 조상의 신령에
        게 기원의 제사를 올린다. 그와같이  바른 도를 지키
        면 훌륭한 인재를 얻기에 좋다. 또 상하 협력이 이루
        어져 만사가 순조롭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매사에
        용감하게 전진하면 점점 더 발전하리니, 크게 성과를
        거두리라. 이것이 천명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일 수 있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마음
        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기뻐도 기뻐하지 말고 슬퍼도 슬픔에 빠지지 말라." 내가 이러
    한 말을 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슬픔이 다가왔을 때 그 슬픔을 이
    겨나갈 수 있고, 기쁨이 왔을 때 그 기쁨으로 하여금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췌] 괘는  행운이 찾아들었을
    때 그 행운을 누리기 위한 괘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한 말의 뜻을
    얻지 못하면 이 괘가 주는 행운이  찾아왔어도 오히려 그 행운으
    로 하여금 더 큰 불행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택지췌]의 상괘는 연못이고,  하괘는 땅입니다.  "땅위에 물이
    고여 있는 형상"이 [택지췌]입니다. 이 말은 웅덩이에  물이 점점
    모여든다는 뜻입니다. 의도적으로 노력을 해서 좋은  것이 모여드
    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과였는지는 모르지만 행운이 모여드는 것
    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이와같은 괘를  틀림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좋은 형상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없으면 이 괘의 행운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아주 반가운 사람을 길에서 만났을 때, 너무  반가
    와서 서로 끌어 안기 위해 뛰어갈 때  너무 좋아서 길을 살필 수
    있는 정신을 망각해 버리면 달려가는 도중에  차에 치여 죽을 수
    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기쁜 마음을 잠시 멈추고 길을 살
    필 수 있는 현명함이 필요하다고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 기
    뻐서 달려들다가 죽었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
    까? 기쁜 일이 왔어도 누릴 수 있는 내가 죽어 없어진다면 그 무
    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좋고 기쁜  일에 자기 마음을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행운을 스스로  누릴 수 있게하기 위
    함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같은 행운을 어떻
    게 하면 오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나 자신이 해탈을 하여 붓다가 되는 것보다
    는 이 세상이 나로 인하여 극락이 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슬픈 일은 내가 붓다가  되지 못하면 극락이 나에게
    는 극락으로 느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내가  붓다가
    되는 것과, 세상이 극락이 되는 두가지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
    도록 해야만 비로서 온전해 집니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의 길은
    내가 붓다가 되려는 마음을 버리고, 붓다의 길을 열심히  가는 희
    생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원하고 있지만
    큰 행운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하
    기 때문입니다.
     
     [췌(萃)]괘는 땅위에 연못이 있는 형상입니다. 땅위에 물이 있다
    고 해서 결코 그 물이 모두 땅에 스며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 괘
    는 '인위적'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괘입니
    다. 땅위에 있는 연못의  물은 땅으로 스며들어가게 되어  있습니
    다. 그런데 물이 땅으로 스며드는 것은 결코 인위적으로는 되어지
    지 않습니다. 물이 강한 압력으로 밀면 땅을 다치게 합니다. 물이
    땅에 스며들기를 거부해 버리면 증발을 해서 사라지게 됩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물이 땅에 스며드는 기간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 스스로 똑똑한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억지로 스며
    들려고 하기 때문에 땅을 못쓰게 만들든지, 스스로 땅으로부터 이
    탈되는 일을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괘의 요지는  천연적으로
    스며들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 곳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그 곳과 함께 그 속
    에서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며들어야만  됩니다. 빗물은
    우리가 직접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빗물이 땅속에 스며들어
    서 그 뒤에 나온 샘물은 매우 맑고 영양가 있는 생명수가 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취직을 하더라도 비로소 그 곳에 스며들어 있어야
    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며들기 전에
    그만두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직장을  찾아다닌다 하더라도 생명
    력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와같은 사람은 많은  경험을
    했어도 관광에 불과한 것이지 전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파워는 스며들어야만 갖게 됩니다. 스며들지 않는 것은 가
    치가 없는 파워에 불과합니다.
     
      사람마다 개개인의 재능과 기술과 직업과  취미가 서로 다르지
    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취미, 재능과 작업 등이 진정한 빛
    을 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며들어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따
    라서 스며들어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취미가 다
    르고 재능이 다르더라도 성공시킬 수 있지마는 자기 취미만 채우
    고 자기 재능만 믿게 되면 그 사람은 성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난 너무 개인적인 마음으로만 행하지 않았
    는지를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스며드는 것을
    얻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나는 20대까지는 반드시 그 것을 얻는
    데 주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성공하고 싶겠지만,
    20대는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스며들 수 있는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면서 스며들어서
    나온 샘물을 통해 바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20대에 성공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을 유지하지 못하고 나중에 가서는  밑바닥에서 헤메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왜냐하면 인생 20대때  성공은 스며들어
    서 나온 진정한 성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이 되겠다." "나는 얻겠다." 라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는 안됩니다. "무엇이 되어지게끔 하겠다!", "무엇이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 "나는 바깥의 세계를 망
    가뜨리지 않으면서 하겠다!" 라는 세가지를 명심하고 행하였을 때
    비로소 이 괘가 말하는 "대길(大吉)하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얻겠다." "내가 되겠다."라는 마음은 음효가 아니고  양효
    이기 때문에 하괘의 지(地)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 라는 것이 음효입니다. 그때 비로
    서 우리는 스며들어 가는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정신없이 어
    떤 일을 할 때, 힘든지도 모르고 그 일에 몰입하는 것을 경험합니
    다. 그 때가 바로  그 일에 스며들어가는  때입니다. 그리하여 그
    일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일이 나를 통하여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강건한 군주와 유순한 신하가 고르고 바른 도리를 지켜  서로
    호응하고 있는 상태다." 다섯 번째 양(陽)의 자리에 양효(陽爻)가
    있고, 두 번째 음(陰)의 자리에 음효(陰爻)가 있으므로 강건한 군
    주와 유순한 신하가 고르고 바른 도리를  지켜 서로 호응하고 있
    다고 했습니다.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므로  "중정(中
    正)"이라고 말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천하의 어진  인사가 여
    기에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강한 군주와 유순한 신
    하가 올바르게 있기 때문에 착하고 좋은  것, 또 모든 어진 사람,
    현명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 변함이
    없으면 행복은 크게 발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왕이 종묘를 세우고 정성스럽게 조상의 신령에게 기원의 제사
    를 올린다." 이 말은 자기가 위와같은 행운을 만났다고  해서 "내
    가 잘났다." 하는 자만심을 갖지 말고 두루 만물에게 감사하는 말
    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업을 할 때는  이루어지게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富)를  원한다면 부(富)를 취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부(富)가 모여 들어오게끔 해야 합니다. 부(富)가 들
    어 올 수 있게끔 하려면 자신이 먼저 최선의 노력으로 심혈이 기
    울여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메카니즘을 통해 큰 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을 감사의 제물로 바치는  겸손과 아
    량이 계속 그 메카니즘을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잘되는 것이다."라는 마음을 없애고,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다가 일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하였던 미세한 바람에 땀을 씻으
    면서 시원함을 느낄 때, 바람이 고맙다는 것을 느끼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매사에 무슨 일을 할 때 "용감하게 전진하면
    점점 더 크게 발전하리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일 수 있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천지 만물의 마음의 움
    직임을 알 수 있다." 즉 행복이  오는 길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
    다.
     
        대상. 땅위에 연못이 있는 것이 [췌(萃)]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보존하
        기 위하여 무기를 정비하고 불의의 사변을 경계한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보존하기 위하
    여 무기를 정비하고 불의의 사변을 경계한다." 현명한 사람은  행
    복을 버리고 성리를 택합니다. 행복하는 순간에 마음이 빠지게 되
    면 행복보다 더 큰 불행이 벌어지게 됩니다. 번영을  길이 보존하
    기 위해서는 불의의 사변을 경계하여 조치할  수 있는 안목이 필
    요합니다. 좋은 일이 많이 벌어지면, 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
    면 그로 인해서 뜻밖의 변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좋은 일이 생길
    때 그 좋은 일 속안에서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계태세
    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첫 번째 음효. 동지를 모을려고  하는 성의는 있으나
        결과를 맺지는 못한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
        이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는 모이고  하여
        뜻이 혼란하기만 하다. 그러나 성의를 가지고 나아간
        다면 허물은 없으리라.  서로 미소를  나누는 정도의
        모여질 수 있는 작은 길은 열리게 된다.
     
      "동지를 모을려고 하는 성의는  있으나 결과를 맺지는 못한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음효이기 때문에
    좋은 일을 모으려고 하는 성의는 좋으나 아직 초기이므로 사람들
    이 한꺼번에 모여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같은 상태에서
    "동지여! 내게로 모이라." "행운이여! 나에게로  오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면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직 익숙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마치 첫
    숟갈에 배가 부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의를 가지고
    나아간다면  허물은 없으리라. 서로 미소를 나누는 정도의 모여질
    수 있는 작은 길은 열리게 된다." 그러나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면
    사람들이 한 번에 모여지지는 않을 지라도 서로 미소를 나누는 정
    도의 모여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 음효. 마음속에 굳은  신념을 갖고 변함없이
        성의를 다하면 동지를 자기 곁으로 끌어 모을  수 없
        다. 길하리라. 성의가 있으니 제사올리기에 좋다.
     
      "안된다." 하고 돌아서지 말고 마음속에 굳은 신념을 갖고 변함
    없이 계속하면 행운을 자기 곁으로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성의
    가 있으니 제사 올리기에 좋다." 즉  "나는 꼭 해야된다."라기 보
    다는 꼭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마
    치 산 밑에서 산을 보고 올라갈 때에는 산이 높지 않은 것 같지만
    이제 정상이 바로 눈 앞에 보이고 마음은 이미 정상에 올라가 있
    는데 몸이 못 미치고 있을 때, 이 때가 제일  답답한 것이며 실수
    도 많이 벌이집니다. 그  때 무리하게 한꺼번에 올라가려고  하면
    도리어 사고가 납니다. 이 때 몸이 올라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
    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신의  가호를 받아 만사가  순조롭다 하고
    말하고 있는 효가 두 번째 입니다.
     
        세 번째 음효. 동지를  모으려 하나 되는 일이  없다.
        슬픈 노릇이다. 그러나  노력을 계속해  나가면 벗을
        얻게 되어 허물은 없을 것이다.  약간 난경에 빠지리
        라.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가 동지는 아닙니
    다. 맨 처음에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눈을 뭉칠  때는 단단하게
    뭉쳐지는 부분은 얼마없고 나머지는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진정
    한 동지라고 하는 것은 딴딴하게 뭉쳐진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효에서 딴딴하게 뭉쳐진 부분이  조금 생겼지만 역시 많
    은 부분이 떨어져 나간 점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허물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딴딴하게  뭉쳐진 이
    부분을 계속 굴리면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것이 달라붙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이 딴딴한 부분은 자기한테 필요한 것은 붙이고, 붙
    여질 수 없는 부분은  쫓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조그만  눈덩이를
    자꾸 굴렸을 때, 떨어져 나갈 것은 떨어져 나가면서  눈덩이는 계
    속 커집니다. 떨어져 나가는 것이 있고 굳어지는 것은  점점 굳어
    져 가는 상태를 "약간 난경에 빠지리라." 하고 말했습니다.
     
      성공은 신의 가호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나사못
    하나 박는 것도 아무리 자로 재어서 딱 맞는  것을 구할 지라도
    만들다 보면 안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과 하나가 된
    사람은 미리 준비한 재료외에  다른 것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때에도 어떤 대용품을 즉시 구하여 일이  척척 맞아 들어가게 합
    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가호입니다. 첫  번째는 "성의는 갖고 있
    으나 결과를 맺지 못한다."고 하여 아직 스며드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신의 가호가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마음속
    에 굳은 신념이 있어서 동지를 자기 곁으로 끌어 모을 수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뭘 하나 하는데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물건
    도 주변에서 금방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길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재료는 다 모였는데 일을 하다 보면  쉽게 완성
    품에 도달하기는 또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동지를 모으려
    고 하나 되는 일은 없다. 슬픈  노릇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러나 노력을 계속해 나가면 허물은 없을 것이다." 장애가  나타나
    면 또 다른 방법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스며들어 있는 사람은 스며들어 가는 과정에서 다른 방법을 얻
    게 되지만, 스며들어 가지 않는 사람은 "안된다." "나는 못한다."
    라고 하며 그 일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진정으로  그만두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완수를 하고 난 뒤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만
    약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 못마땅하다면  그 못마땅한 것을 토
    대로 해서 그 위에 못마땅한 것이 없어지도록 한 다음, 이제는 여
    기가 좋아서 더 이상 떠나고 싶지않다 했을 때, 더  큰 뜻을 품고
    떠나야 합니다. 때문에 이 세상이 못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죽어
    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이 곧 파라다이스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인
    간은 비로서 죽을 권리가 있게 됩니다.
     
        네 번째 양효. 자신의 능력에  비하여 월등한 지위에
        있으나 처신을 삼가면 크게 길하리라. 허물이 없다.
     
      네 번째는 음의 자리에 양효가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
    러나 지금까지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면서  모든 심혈을 기울
    여서 한다를 통과해 왔기 때문에 비록  맞지 않는 위치라고는 하
    나 높은 자리에 앉아서 크게 길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운전할 때는 앞만 보고 두  손으로 핸들을 꽉잡고 그냥
    곧장 가기만 했는데, 열심히 노력하여 운전하는 일에 완전히 스며
    들어 운전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숙달되면, 한 손으로 운전하
    면서 한 손으로 노래를 틀고 담배도  피우며 자신의 취미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운전이  재미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행복입니다.
      네 번째는 자신의 능력은 어느 한계가 있으나, 노력하고 희생하
    여 스며들게 되면 능력  이상의 파워를 자연으로부터  얻어서 그
    이상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난다고  법규를
    무시하고, 주위를 살피지 않고  마구 달리면 아무리 신의  능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때문에 다섯  번째
    효는 이것을 경계하여 바른 도리를 꾸준히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
    다.
     
        다섯 번째 양효. 군주의 지위로  사람을 모으고 있으
        나 그 뜻이 만민을  심복시킬 만큼 위대하기  때문은
        아니다. 큰 허물은 없으나 결코  성의로써 모인 것은
        아니다. 바른 길을 지켜야 후회가 없다.
     
      "군주의 지위로 사람을 모으고 있으나 그  뜻이 만민을 심복시
    킬 만큼 위대하기 때문은 아니다." 군주의 힘이 결코 모든 안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의도적으로 하는  노력은 완전
    한 스며듬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더 좋은 것을 찾아서 떠날 수도
    있습니다. 연못에 뭉쳐진 물이 모두 다 스며들어가는 것은 아닙니
    다. 차안에서 음악을 즐길 수 있으며, 담배를 피울  수 있으며, 옆
    의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으나 무턱대고 달려서는 안됩니다. 항상
    위험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즉시 위험을 막을 수
    있게끔 대처할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모두가  모였다고 무턱대
    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후회를  해소하리라고 다
    섯 번째 효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최고의 영화의 지위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신의 무능과  고립상태를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을 하고 있으니 허물은 없으리라.
     
      진정으로 스며들어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비록 잘못
    되어 실패를 하게 되더라도 스스로 다시 마음을 자제하고 차분하
    게 다시 시작합니다. 여섯  번째는 이와같은 과정을 거친  사람은
    "어려운 난관에 다시 부닥쳤을 때 자신을 자제하면서 결국 그 일
    을 다시 해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허물이 없다고 했
    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마음이
    차게 되면 마음에서 만족하게 되고, 그 다음번 일이  힘들 경우에
    는 포기를 하게 됩니다. 비록 스며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얻었
    다 하더라도 또 다른 일을 할 때  한 번에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
    다. 거기에는 다른 실패가 또 따르고 있습니다. 그 실패는 스며들
    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미 이와같은 상태를 거쳐온 사람은  그 과
    정을 잘 넘기기 때문에 아무런 허물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면 그 사람은 이미 "대길하다."가 보장되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서두르지 마라. 그렇다고 늦장을  부려서는 더 더욱  안된다."
    "물러서지 말라. 그렇다고 깨버리지도  말라." "이루어라. 그렇다
    고 너무 기뻐하지 말라." 이것이 [췌(萃)] 괘을 얻기 위해 가야할
    진리인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4478
  • 35. 화지진(火地晋)
    『 순조로운 전진 』
     
     ○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 없이 자기 과시를
     ●     위해 베푸는 덕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     일으키게 됩니다. 밝은 덕은 남한테 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숨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     명덕(明德)은 끝내 전달되어 드러나게 됩니다. 드
     ●     러나지 못하는 폐덕(廢德)은  자기 만족에 불과한
     ●     것으로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화지진(火地晋)
     
        [진] 이라는 것은 나아갈 [진]과 같다.  즉 나아간다
        는 뜻이다. 진괘는 밝은 태양이 지평선  위에 나타나
        순차로 하늘에 올라 대왕의 지위에  정착하는 기상이
        다. 밝은 군주가 왕위에 있어서 유화한  덕으로 천하
        를 다스리니 어진 신하들이 순종하는 태도로 이를 보
        필한다. 천자는 제후들에게  마필을 상으로 주니  그
        수가 풍성하고 하루에 세  번 접견하는 그런  우대를
        베푼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도
    를 하면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길까." 하는 여린 마음이 아니고, "이
    세상을 자기 의지대도 움직여 내겠다."고 하는 굳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 의지가 굳건하고 뚜렷할수록 외부의 어떤 압력이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는 절대로 꺽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나도 의지를 갖추어야지.' 하
    고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꽉 다무는 의지는 모두 진짜 의지
    가 아닙니다. 자기 암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큰 마음의
    강한 의지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알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강하
    지 않은 의지가 어떤 것인가를 예를 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입니다.
     
      사람은 덩치가 쥐보다 크지만 쥐를 무서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
    다. 또 바퀴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퀴벌레
    하고 싸움을 했을 때  바퀴벌레를 이기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메뚜기가 떼를 지어 달려들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당할 수도 있겠
    지만 그러나 "나는 메뚜기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퀴벌레가 바글거리면 골치 아프다라고 생
    각될 수는 있겠지만 바퀴벌레 때문에 나는 무서워서 죽고싶다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당연히 바퀴벌레를 이길 수 있습니다. 메뚜기도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날아가는 메뚜기는 잡기가 힘들겠지만 자기자신이
    메뚜기와 1:1로 싸우면 이미 당신 마음에 '이겼다'라는 마음을 가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메뚜기보다도 작은 파리로 변
    했다면 메뚜기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까짓 바
    퀴벌레 별 것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바퀴벌레보다
    작아졌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스스로가 알고 있고 믿고 있었
    던 그 세계에 대해 자기 마음으로부터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그
    것은 자신의 마음이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진짜 큰 사람은 어금니를 깨물지 않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메뚜기를 우습게 보지도 않습니다. 바퀴벌레도
    우습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퀴벌레와 메뚜기의 약점을 찾아내
    어서 그 약점을 통해 능히 메뚜기와 바퀴벌레를 멸종시킬 수 있습
    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자기 의지를 펼쳐낼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은 커다란 짐승을 보고 '킹콩, 이까짓 것' 하고 달려가는 어
    리석은 짓하고는 다릅니다. 배짱. 거기에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성장을하여 확고부동한 의지를 갖
    고 있으면 세상의 어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항상 염려하면서도 그
    것을 우습게 보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킨 것이
    이  [화지진]괘 입니다.
     
      "진괘는 밝은 태양이 지평선 위에 나타나 순차로 하늘에 올라 대
    왕의 지위에 정착하는 기상이다." 상괘는 불을 뜻하는 괘이며 하괘
    는 땅을 뜻하는 괘입니다. "땅위에 불이 있다." 즉 태양이  떠오르
    고 있는 모습입니다. 더불어 이것은 음(陰)입니다. 자신의 굳건한
    의지가 점점 성장을 해서 마치 태양처럼 떠오르게 된다고 하는 괘
    입니다. 이것은 주먹을 불끈 쥐거나 어금니로 깨무는 그와 같은 것
    이 아니라, 남이 볼 때는 별로 나타나는 것 없이 그저 묵묵하게 있
    되 안으로 강한 폭발력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감 때문에 점쟁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의뢰하는 사람은 바로 이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살이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능히 제재할 수 있는 생명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력을 통해서 우리가 점차적으로 밝게 떠오르면 화
    지진이 뜻하는 좋은 결실을 얻어 낼 수가 있습니다.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남하고 싸우려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물을 건너기 위해서 주먹을 쥐고 내 뛰는 사람은 강물
    을 흐리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먹을 쥐지 않고 가는 사람
    은 배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물을 흐리게 하지 않고 지나는 사람
    입니다. 강한 자기 의지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은 외부에 자기를 드
    러내지 아니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킵니다.
     
      "밝은 군주가 왕위에  있어서 유화한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니
    어진 신하들이 순종하는 태도로 이를 보필한다." "월급  안올려주
    면 나 회사 그만둘거야." 하는  배짱은 이미 그 회사에서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쫓아낼까?' 하고 궁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으
    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열심히 행함으로
    써 상대방에게 진심이 전달되어 '저 사람에게는  간이라도 빼어주
    고 싶다.' 할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
    람이라고 보아도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틀림없이 갖추어
    져 있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강한 사람입니다. 결국은 찬란한 지위
    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남에게 베풀면 여러 사람이 따
    르고 받들게 될 것이며, 그렇게 베푸는 덕이 진정한 덕입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 없이 자기 과시를 위해 베푸
    는 덕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일으키게 됩니다. 밝은
    덕은 남한테 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숨어있는 것
    도 아닙니다. 명덕(明德)은 끝내 전달되어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
    나지 못하는 폐덕(廢德)은 자기 만족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쓸모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장점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장미가 비록 가시를 가지고 있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
    고 있습니다. 양귀비는 비록 독을 가지고 있지만 나름대로 아름다
    움을 나타낼줄 압니다. 모든 꽃은 전부 때깔을 갖고 있습니다. 그
    로 인해서 천지에 음양의 조화를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자기 자신의 때깔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기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사
    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첫째로 매력도 없을뿐더러 둘째로 자기 자
    신이 사는 것에 대한 의미나 비젼이나 삶의 희열따위를 스스로 얻
    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세계적인 배우, 가수 등 유명 연예인들은 대개 이혼율이 높습니
    다. 그것은 남편이 처음에는 마음에 좋았지만 딴데서 다른 사람들
    이 자신을 보고 열광을 하니까 저쪽으로 가면 더 낫겠지 하는 마
    음으로 항상 새로운 사람을 찾아다니다  보니까 이혼율이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 그렇게 예쁘던 그녀들도 나이를 먹게
    되면 얼굴이 흉칙해 집니다. 그때 그것을 가장 징그럽게 생각하고
    천대하는 것은 그녀 자신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찾아볼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행복은 새로이 찾아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가
    든지 그 머무는 곳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불만, 자기 투정
    등 이런게 많은 사람은 현실적으로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고 사실
    은 머무를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어져 있지않기 때문에 매번 불
    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머무를 줄 아는 사람이 머물러 있는 세계
    를 넓혀 나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晋)입니다.
     
      음(陰)이 세 개면 땅입니다. 머무른다는 세계입니다. 먼저 땅에
    머무르려는 것을 갖추고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하
    늘로 올라가면 지구 바깥의 진공상태에  내동댕이쳐져 다시 돌아
    올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그와같은 행복을 찾아서  움직이고 있
    지 않은가 스스로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찾
    아다님으로써 행복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계속 찾아다닐 것입니다. 그 사람은 천당에 갖다 놔도 또 새로운
    천당을 찾기 위해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머무를 곳이 없는 사람
    은 행복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우주는 반드시 말해줄 것입니
    다.
     
      우주는 날마나 변하는데 이것은 머무르기 때문에 변하는 것입니
    다. 오천년 전의 나무가 죽어 없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오천년 전의
    우주나 지금의 우주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변함 없이
    존재하는 그곳에 머물러서 우주는 그 안정된 세계를 고이 간직하기
    위해서 지금 수없이 많은 삼라만상이 벌어지도록 전진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지진]입니다.
     
     
        대상. 밝은 태양이 땅위에 올라오는 것이 진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스스로  명덕을 밝게한다.
     
      "밝은 태양이 땅위에  올라오는 것이 진의  괘상이다." 굳건한
    땅을 갖추고 그 땅을 토대로 불을 붙혀서 앞으로 나아갈 때 땅은
    풍성해지지만, 불이 되어서 땅으로  가는 사람은 도리어 땅이  그
    불을 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땅을 구제하겠다는 불만 가지
    고 땅에 머무르려고 한 이론이 공산주의 입니다. 공산주의는 실패
    했습니다. 불이 제대로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불이  먼저 있고
    땅이 있는 사람이 꼭 데모나 시위, 폭동의  방법으로 잘되려 합니
    다. 내가 잘 될 생각을 하지 않고 잘 되는 자의 것을 빼앗아서 같
    이 쓰자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전체를 위해서 나온 사고방식 같
    지만 결국은 발전이 없습니다. 설사 세상이 불합리한 것을 내가 스
    스로 느낀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땅을 소중히 여겨 그것을 토대로 나의 에너지를 이 땅을 위해
    써서 땅덩어리를 넓혀 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전진인 것입니다.
     
      눈덩이를 굴리면 눈덩이가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응축
    하는 힘이 있어 계속 불어나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돌맹이를 높
    은데서 굴리면 구르다 여기저기 부딛쳐서 깨어져  버리게 됩니다.
    인간도 나가야 된다는 마음으로 시위, 폭동 등을  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의해 본인만 깨어져 버리게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는 번개가 치면 뿌리채 뽑혀져 나갑니다. 그러나
    나무가 하나의 커다란 숲을 이루면 번개가 쳐봐야 숲가운데 나무
    하나 정도는 잠깐 망가질는지 모르지만 그 나무는 죽지는 않습니
    다. 번개가 어느 나무 한가지는 칠 수 있어도 숲 전체를 부술 수
    는 없기 때문에 뿌리를 다치게 하지 못합니다.
     
      숲은 점점 커집니다. 땅 한 평에 나무를 열 개 심어 놓으면 나
    무들은 한 평이 갖고 있는 기운을 1/10로 빼먹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들은 자라서 한 평에 뿌리 내린  모든 나무의 뿌리가 양분이
    부족하고 공간이 부족하게 되면 뿌리들끼리 서로 죽이느냐? 그렇
    지 않습니다. 뿌리들은 서로 죽이지 않고 열 평 바깥으로 번져 나
    갑니다. 그렇게 해서 숲은 커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들은
    열명이서 같이 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어지지 않겠는가 하
    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따지다가 보니까 밤낮 싸우게
    됩니다. 10명이 합해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전진
    입니다.
     
        첫 번째 음효. 혼자서  바른 길을 걷고 있건만  남이
        몰라주니 전진하려 하다가 좌절되곤 한다. 그러나 한
        결같은 마음으로 변함이 없으며 길하리라. 아직은 성
        의를 인정받지 못하여 왕명을 얻지  못하나 초초하지
        않는 여유있는 마음으로 고요히 때를  기다리면 허물
        이 없으리라.
       
      "혼자서 바른 길을 걷고 있건만 남이  몰라주니 전진하려 하다
    가 좌절되곤 한다." 처음에 자신의 뜻이 확고부동하고 분명하다고
    해서 이를 악물고 뛰어 나가는 사람은 비록 자기 딴에 완전한 것
    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성의가 전달되어 남이 알아 줄 수 있을
    때 까지를 기다리지 못하면 좌절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좌절하는
    뜻은 진정한 자기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아직은  성의를 인정받
    지 못하여 왕명을 얻지 못하나 초초하지 않는 여유있는 마음으로
    고요히 때를 기다리면 허물이 없으리라." 큰 뜻은 초조하지  않는
    여유를 갖추고 있습니다. 때문에 큰 뜻은 언젠가 그  성의가 드러
    나고, 자기 바깥의 환경과 모든 만물에게 두루 그 성의를 내보이
    게 됩니다.
     
        두 번째 음효. 전진하고자 하나 전진하지  못하니 마
        음이 괴롭다. 나라 위한 굳은 의가 변함이 없으면 길
        하리라. 큰 복을 왕부에게서 받으리라.
     
      "전진하고자 하나 전진하지 못하니 마음이 괴롭다." 급하게 빨
    리 성과를 이루려고 하나  성과가 빨리 나타나지  않으니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라 위한 굳은 의가 변함이  없으면 길하리라." 이
    럴 때는 조급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꼭 해내야겠다는 신념만 간
    직한 채 차근차근 성의를 다하여야 합니다. 굳은 '의(義)'가 변함
    이 없으면 비록 직접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서서히
    외부로부터 성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므로 길하게 됩니다.
     
        세 번째 음효. 나라를 위한 정성이 이제야 여러 사람
        들에게 신뢰를 얻었으니 그  세운 뜻이 높이  드러날
        것이다. 후회와 근심은 사라진다.
     
      "나라를 위한 정성이 이제야 여러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으니
    그 세운 뜻이 높이 드러날 것이다." 때깔이 없는 성의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말고  서서히 때깔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 때깔이 비로서 여러사람에게 차츰 차츰 동화
    를 일으키게 할 것입니다. 그것을 갖추면 당신의 뜻은  이미 이루
    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틀림없습니다.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당신 스스로 발전하고자  뛰어나가는 자세는 좌절을
    반드시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  피로와 과로가 겹치게 될  것입니
    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거듭 의심하여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회의가 당신에게 나타나지 않도록 당신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때깔을 통해서 아름다운 창조를 이
    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번째 양효. 전진한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지위에 있음은 큰 쥐가 남에게 해를 미침과 같다. 바
        른 길은 지킬 지라도 위험하다.
     
      이곳은 음효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양효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
    반적으로 보았을 때  음(陰)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양효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크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운을 가지고 양(陽)
    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단지 해야되겠다는  생각으로 양성기운만
    가지고 나아가면 위험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여기 못있겠다." 하고 나갈 때, 그때 나가지 말고 뒤돌
    아 서야 됩니다. 뒤돌아 섰을 때가 바로 그 일을  자기 품속에 넣
    을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외면을  하게 되면 더
    이상 그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이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지위에 있음은 큰 쥐가 남에게 해를
    미침과 같다." 즉 자기가 머무를 곳, 머무를 수 있는 정도를 생각
    하지 않고 무턱대고 전진하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자기한테 바른
    길로 찾아가는 것이라 할  지라도 위험한 길입니다. 직업을  자꾸
    바꾸는 사람,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자꾸 움직이는 사람은 육법전
    서에 어긋나는 일이 하나 없이 도덕적으로  맞는 경우를 모두 지
    켜 나간다 하더라도 끝내가면 그 사람은 배를 곯게 되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음효. 걱정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잃어 없
        어지는 것을 근심하지  말라. 전진하면 경사가  있어
        길하리라. 순조롭지 않은 것이 없다.
     
      "걱정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잃어  없어지는 것을 근심하지 말
    라." 양효의 자리로서 나아가야  할 위치이지만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나아가면 더  이상 위험이 도래하지 않
    습니다. 지금까지 주역을 보면서 35개의 괘동안  양성기운은 좋은
    것이지만 양성이 양성으로만 움직이면 좋지 않다는 것을 항상 보
    아왔습니다.
     
        여섯 번째 음효. 내가 뭐 망할게 있겠냐 하고서 날카
        롭게 나간다. 이러한 기동은 빛나는 큰  도리가 아니
        다. 오직 작은 읍국(邑國) 같은 것을 정벌할 때 쓰면
        위태롭기는 하나 그런데로 길하고 허물은  없을 것이
        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계속되면 남의  비난을 받
        아 난처한 경지에 빠진다.
     
      "내가 뭐 망할게 있겠냐 하고서 날카롭게 나간다. 이러한 기동
    은 빛나는 큰 도리가 아니다." "이제 내가 100만원 정도 땄으니까
    이제부터는 끝 수가 좋지 않다 하더라도 뒷돈이 이렇게 많으니까
    못먹어도 GO" 하면 나중에 다  땄다가 다시 다 잃는 결과밖에는
    오지 않습니다. 자기 안주할  곳을 자기 것처럼 믿어서는  안됩니
    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잘되어 가면 그 된 것을 스스로 믿어버리
    게 됩니다. 부자가 된  다음에 부자가 되었다고 스스로  내세우는
    순간 그 부(富)는 그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되었을  때 잘된
    것을 비축해 놓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없는 것이다."라고  여
    겨야 됩니다.
     
      있는 자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나아갈 때는 상황을 갖고서
    움직여야지 상황을 믿는 자기 자신으로 움직이면 안됩니다. 갑자
    기 서울에 올라와 살고 싶다고 지금  있는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상황을 보고서 상황에 맞추어  바꾼게 아니고, 이쪽 상황을  보고
    '내가 그만 두어야 겠다.' 하고 스스로 자신을 믿고 저지르는 일입
    니다. 또 "여기가 잘안되게 때문에 저것으로  바꾸어 보아야 겠습
    니다." 하는 것도 안되는 일입니다. 왜냐면 상황을 움직일 만한 힘
    이 없고 그 상황에 벌써 밀려나가는  자신이 새로운 것을 찾아봐
    야 거기서도 밀려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갖고서 상황을 움
    직여 내는 전진이 바로 [화지진]이 말하는 '진(進)'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758
  • 25. 무위자연(無爲自然)- 천뢰무망(天雷无妄)
    25. 무위자연(無爲自然)- 천뢰무망(天雷无妄)…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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