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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10
    [면화로부터 실을 뽑을 때 마멸되거나 소모되지 않을 수 없는]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도 마찬가지다.(주석 12: "상품{생산}에 직접 사용된 노동뿐만 아니라, 그러한 노동을 지원하는 기구, 도구, 건물에 투여된 노동도 또한 상품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리카도,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한글판, 85쪽).
    그리하여 면사의 가치, 즉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결정하는 데 있어, [면화 그 자체와 소모되는 방추를 생산하는, 그리고 그 다음으로 면화와 방추로 면사를 생산하는] 여러 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서로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 면사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은 모두 과거의 노동이다. 그리고 면사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이 마지막 과정인 방적에 지출된 노동보다 더욱 과거의 것이라는 사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한 채의 집을 짓는 데 일정한 양의 노동[예컨대 30노동일]이 필요하다면, 제30일째의 노동일이 최초의 노동일보다 29일 늦게 생산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 집에 투하된 노동시간의 총계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재료와 노동수단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은 마치 방적 과정의 어느 초기 단계에서 [즉, 방적의 형태로 최후에 첨가된 노동 이전에] 지출한 노동인 것처럼 간주할 수 있다.
    요컨대, 12원이라는 가격으로 표현되는 면화와 방추라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 즉 생산물의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만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면화도 방추도 사용가치의 생산에 실제로 이바지해야만 한다. 우리의 경우 그것들이 면사로 되어야만 한다. 가로서는 어떤 사용가치가 그것의 담지자가되건 상관없지만, 가치의 담지자는 사용가치를 가져야만 한다. 둘째,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 하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만약 1파운드의 면사를 뽑아내는 데 1파운드의 면화만이 필요하다면, 1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는 데는 1파운드의 면화만이 소비되어야 한다. 방추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망령이 들어 철로 만든 방추 대신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면사의 가치에는 여전히 철제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만이 계산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수단(生産手段), 즉 면화와 방추가 면사의 가치의 얼마만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12원[즉, 2노동일의 체현물]이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勞動)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우리는 이 노동을 이번에는 노동과정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노동과정의 경우에는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킨다는 합목적적 활동으로서만 노동을 고찰했다. 따라서 기타 사정이 동일하다면, 노동이 그 목적에 잘 맞으면 맞을수록 면사는 그만큼 더 나은 것이 생산될 것이다. 또한 방적공의 노동은 다른 종류의 생산적 노동과는 독특한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는 주관적으로는 방적이라는 특수한 목적(目的)에서,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특수한 작업방식(作業方式), 생산수단의 특수한 성질, 그리고 생산물의 특수한 사용가치(使用價値)에서 나타난다. 면화와 방추는 방적에는 필요하지만 대포 생산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 한, 다시 말해 가치의 원천인 한, 그것은 대포의 포신(砲身)을 깎는 노동자의 노동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있는 예를 가지고 말하면) 면사의 생산수단에 실현되어 있는 면화 재배자와 방추제조자의 노동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오직 이 동일성(同一性) 때문에 면화재배 . 방추제조 . 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이미 노동의 질 . 성질 . 내용이 아니고 오직 노동의 양(量)뿐이다. 이 양이 계산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방적노동이 단순한 노동이며, 사회적 평균노동이라고 가정하자. 이것과는 반대되는 가정을 하더라도 사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노동과정에서는 노동자의 노동은 끊임없이 운동(運動)의 형태로부터 정지된 존재(存存)의 형태로, 즉 노동자의 작업의 형태로부터 생산물의 형태로 전환한다. 한 시간 뒤에는 방적이라는 운동은 면사의 일정한 양으로 실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일정량의 노동[즉, 한 시간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되었다. 우리는 방금 방적노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노동[방적공의 생명력의 지출]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방적노동이 노동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노동력(勞動力)의 지출(支出)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방적이라는 특수한 노동(勞動)이기 때문은 아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는 작업에서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즉, 사회의 평균적인] 생산조건 하에서 1노동시간에 a파운드의 면화가 b파운드의 면사로 바뀐f다면, 12a파운드의 면화가 12b파운드의 면사로 바뀌지 않는 한, 하루의 노동은 12노동시간으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원료 생산물도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원료는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을 흡수(吸收)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사실상 이 흡수에 의해 원료는 면사로 전환되는데, 왜냐하면 노동력이 방적이라는 형태로 지출되어 원료에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산물인 면사는 이제 면화가 흡수한 노동의 계량기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1시간에 1 과2/3 파운드의 면화가 1과 2/3파운드의 면사로 바뀐다면, 10파운드의 면사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한 것을 가리킨다. 이제 일정한[경험적으로 확정된]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
    그 노동이 다름 아닌 방적노동이고, 그 노동의 재료가 면화이고, 그 노동의 생산물이 면사라는 사실은,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따라서 원료]이라는 사실과 꼭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가령 노동자가 방적공장이 아니라 탄광에서 일한다면 노동대상인 석탄은 천연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층에서 채굴해 낸 석탄의 일정량은 일정한 양의 흡수한 노동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노동력의 판매를 고찰할 때,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원이고, 이 3원에는 6노동시간이 대상화되어 있으며, 이 노동량은 노동자의 매일 평균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제 만약 우리의 방적공이 1노동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주석 13: 이곳의 숫자는 모두 임의로 가정한 것이다.)로 전환시킨다고 가정하면, 6시간에는 10파운드의 면화를 1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시킬 것이다. 즉, 방적과정에서 면화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6노동시간은 3원의 금량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이 면화에는 방적노동 그 자체에 의해 3원의 가치가 첨가된다.
    이제 생산물인 10파운드의 면사의 총가치를 검토해 보자. 10파운드의 면사에는 2와1/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다. 이 중 2일분의 노동은 소비된 면화량과 방추량에 포함되어 있었고, 1/2일분의 노동은 방적과정 중에 흡수되었다. 2와1/2노동일은 15원의 가치의 금량(金量)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 10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이고 1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이다.
    우리의 자본가는 깜짝 놀란다. 생산물의 가치가 투하된 자본의 가치와 똑같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10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인데, 상품시장에서 15원이 이 생산물의 형성요소들
    [또는 같은 말이지만 노동과정의 요소들]에 지출되었던 것이다. 즉, 10원은 면화에, 2원은 방추에, 그리고 3원은 노동력에 지출되었던 것이다. 면사의 가치가 이들 각각보다 크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면사의 가치는 이전에 면화와 방추와 노동력 사이에 분산되어 있던 가치의 합계(合計)에 불과하며, 이와 같이 기존의 가치를 단순히 합계하는 것으로부터는 결코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주석 14: 이것은 [비농업노동은 모두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의 기초로 되고 있는 근본명제인데, 전문적인 경제학자들도 이 명제를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딴 하나의 물건에 몇 개의 다른 물건의 가치를 가산(加算)한다"(예컨대 아마에 직포공의 생활비를 가산한다)"고 하는 방식, 즉 이를테면 각종 가치를 단 하나의 가치에 층층이 쌓아 올려 가는 방식은 그 하나의 가치를 그만큼 증대시킨다.....‘가산한다'는 용어는 제조품의 가격이 형성되는 방식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가격은 소비된 몇 개의 가치의 총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산은 증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메르시 드 라 리비에르[Mercier de la Riviere], ?정치사회의 자연적 및 본질적 질서?, p. 599).) 이제는 이 모든 가치들이 하나의 물건에 집중되어 있지만, 15원이라는 화폐액도 세 가지의 상품구매로 분열되기 전에는 역시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는 그 자체로서는 기이한 것이 아니다. 1파운드의 면사의 가치는 1.5원이므로 10파운드의 면사를 사자면 우리의 자본가는 상품 시장에서 15원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자본가가 자기 집을 이미 지어져 있는 채로 시장에서 사든 또는 자신을 위해 그것을 새로 짓게 하든, 어느 경우에도 집의 취득에 투하된 화폐액은 증식되지 않을 것이다.
    속류경제학(俗流經濟學: vulgar economics)에 정통하고 있는 자본가는 아마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투하했던 것이다"라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 선량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듯이, 그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주석 15: 예컨대 1844-1847년에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본의 일부를 생산적인 사업에서 때내어 철도주식에 투기했다가 다 잃어버렸다. 또 미국의 남북전쟁 시대에는 그들은 공장을 폐쇄하고 공장노동자를 해고하면서 리퍼플의 면화거래소에서 투기를 했다.) 그는 위협적으로 말한다. 두 번 다시는 이와 같이 속지 않겠다고.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상품을 제조하지 않고 시장에서 기성품을 사겠다고. 그러나 만약 그의 동료 자본가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면 그는 어느 시장에서 상품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화폐를 먹을 수는 없다. 그는 호소한다. "나의 절제(節制:abstinence)를 고려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15원을 아무렇게나 써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생산적으로 소비해 그것으로 면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대가로 이제는 나쁜 양심 대신 좋은 면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폐퇴장자가 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금욕(禁欲)이 초래하는 나쁜 영향을 화폐퇴장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이다. 더구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도 그 권력을 상실하는 법이다. 그의 금욕의 장점이 무엇이든, 생산과정에서 나온 생산물의 가치는 이 과정에 투입된 상품가치의 총액과 같을 뿐이기 때문에, 그의 금욕을 특별히 보상해 줄 만한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덕행(德行: virtue)의 보수는 덕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가는 더욱 집요하게 주장한다. "면사는 나에게는 쓸모가 없다. 나는 그것을 판매하기 위해 생산했던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그는 그것을 팔면 될 것이다. 또는 더욱 간단하게,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을 생산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자본가의 가족의사 매컬록(MacCulloch)이 과잉생산(過剩生産: over-production)이라는 유행병에 대한 특효약으로 그에게 써주었던 처방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아직도 완강하게 주장한다. "과연 노동자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기의 손발만으로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가? 내가 노동자에게 재료를 대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에다가 자기의 노동을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한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빈털털이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산수단, 나의 면화와 나의 방추로 사회를 위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봉사를 하지 않았던가. 또한 내가 노동자들에게 생활수단까지도 공급해 주면서 봉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나는 이 모든 봉사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그러나 노동자도 또한 그를 위해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전환시킴으로써 답례를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봉사(奉仕)가아니다.(주석 16: "자랑하고 치장하고 꾸며도 좋다....그러나 준 것보다도 많이 또는 더 좋은 것을 취하는 사람은 고리대업자(高利貸業者)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이웃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서, 강도나 절도와 마찬가지다. 이웃사람에 대한 봉사와 선행이 모두 봉사와 선행은 아니다. 왜냐하면, 간통하는 남녀도 서로에게는 커다란 봉사와 희열을 주기 때문이다. 마부도 강도가 길가에서 약탈하고 라와 국민들을 습격하는 것을 방조함으로써 강도에게 크게 봉사한다. 교황예찬가들도 모든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거나 학살하거나 옥 사하게 하지 않고 그래도 몇 사람은 살려주고 추방하거나 소유물만 빼앗음으로써 우리에게 크 게 봉사하고 있다. 악마까지도 자기에게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큰 봉사를 한다...요컨대 이 세상에는 커다란, 훌륭한, 일상적인 봉사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목사 여러분께,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 비텐베르크, 1540년).) 봉사(service)라는 것은 상품에 의한 봉사건 노동에 의한 봉사건 어떤 사용가치의 유용한 효과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주석 17: 나는 이 점에 대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37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봉사'라는 범주가 세이(J.b. Say)나 바스티아(F. Bastiat)와 같은 종류의 경제학자들에게 어떤 '봉사'를 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交換價値)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3원의 가치(價値)를 지불했다. 노동자는 그에게 면화에 첨가된 3원의 가치로 정확한 등가(等價)를, 즉 가치에 대해 가치를 반환했다. 지금까지 그처럼 자본을 가지고 뽐내던 우리의 친구는 이제 갑자기 [그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말한다. "나 자신도 노동하지 않았는가? 방적공을 감시하는 노동을, 총감독이라는 노동을 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러한 노동도 역시 가치를 형성하지 않는가?"라고.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감독과 관리인은 어이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자본가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본래의 표정을 되살린다. 그가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한 것은 모두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런 말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따위 핑계와 속임수는 고용된 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있다. 그 자신은 실무적인 사람이므로 사업 이외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업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잘 알고 있다.
    좀더 상세하게 이 문제를 고찰해 보자.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원이었는데, 그 이유는 노동력 그 자체에는 1/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매일 요구되는 생활수단은 1/2노동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에 포함되고 있는] 과거의 노동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living labour)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매일의 유지비와 노동력의 매일의 지출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양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交煥價値)를 규정하며, 후자는 노동력의 사용가치(使用價値)를 형성한다.
    노동자의 생명을 24시간 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1/2노동일이 필요하다는 사정은 결코 노동자가 하루종일 노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과정에서 노동력이 창조하는 가치는 그 크기가 서로 다르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할 때 이미 가치의 이와 같은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면사 또는 장화를 제조한다는 노동력의 유용한 성질은 자본가에게는 하나의 불가결한 조건일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가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유용한 형태로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다른 모든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實現)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양도(讓渡)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즉, 노동 그 자체]는, 판매된 기름의 사용가치가 기름장수에게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속하지 않는다.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본가는 이 사정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쾌활하게 웃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6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10파운드의 면화가 6노동시간을 흡수해 1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된다면, 20파운드의 면화는 12노동시간을 흡수해 2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연장된 노동과정의 생산물을 고찰해 보자. 이 20파운드의 면사에는 이제 5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다. 즉, 4노동일은 소비
    된 면화량과 방추량에 대상화되어 있었던 것이고, 1노동일은 방적과정 중에 면화에 의해 흡수된 것이다. 그런데 5노동일의 화폐적 표현은 30원이다. 따라서 이것은 20파운드 면사의 가격이며, 1파운드 면사의 가치는 전과 같이 1.5원이다. 그러나 방적과정에 투입된 상품들의 가치총액은 27원이고, 면사의 가치는 30원이다. 생산물의 가치는 그 생산에 투하된 가치보다 1/9만큼 증가했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 . 방추 . 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의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통영역의 외부에서 수행된다고 달하는 이유는, 유통은 [생산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가치증식 과정을 준비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선의 세계에서는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역할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가치[즉, 이미 대상화된 죽은 형태의 과거 노동]를 자본[즉, 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제 가치창조과정(역자 주: 가치형성과정은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의 가치로 '이전'되는 과정과 노동력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일정한 점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창조과정(價値創造過程)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다. 만약 그 과정이 자본에 의해 지불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에 의해 보상되는 점까지밖에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치창조과정에 불과할 것이고, 만약 그 과정이 이 점을 넘어 계속된다면 가치증식과정으로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가치형성과정을 노동과정과 비교해 보면,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有用勞動)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생산의 운동은 질적으로-생산물의 종류, 그리고 생산과정의 목적과 내용에 따라-고찰된다. 가치형성과정에서는 이 동일한 노동과정이 오직 양적 측면에서 고찰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 여기에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상품들은 더 이상[노동력이 일정한 목적에 따라 가공하는]물적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대상화된 노동의 일정량으로 간주될 뿐이다. 생산수단에 들어 있는 것이거나 노동력에 의해 첨가되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노동은 오직 계속시간에 의해 계산될 뿐이다. 그것은 몇 시간 또는 며칠 등으로 계산된다.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노동력은 반드시 정상적인 조건하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방적업에서 자동 뮬(mule)이라는 방적기계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생산수단으로 되어 있다면, 노동자로 하여금 물레를 잡고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에게 정상적인 품질의 면화 대신 자꾸만 끊어지는 부스러기 솜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1파운드의 면사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超過時間)은 가치 또는 화폐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 또 하나의 조건은,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력은 [그것이 사용되는 부문을 지배하는] 평균수준의 기능과 숙련과 민첩성을 보유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의 자본가는 노동시장에서 이와 같은 정상적인 질의 노동력을 구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노동력은 평균수준의 긴장도와 강도로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끝으로-그리고 이 점에 대해 자본가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형법(刑法)을 가지고 있다-원료와 노동수단의 낭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낭비는 대상화된 노동의 쓸모없는 지출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생산물에 들어가지 않으며, 생산물의 가치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주석 18: 이것은 노예제에 의거한 생산을 더욱 비싸게 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노예제도하에서 노동자는 [고대인의 적절한 표현에 의하면] 말하는 도구이며, 반(半)정도 말하는 도구인 동물 및 말을 못하는 도구인 죽은 노동도구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노예 자신은 동물과 노동도구를 사용할 때 자기가 그것들의 동류(同類)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을 그것들이 느끼도록 만든다. 그는 동물을 학대하며 또 열정을 가지고 노동도구를 못쓰게 만듦으로써 자기가 그것들과는 다르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생산양식에서는 가장 조잡하고 가장 육중한 노동도구[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무디기 때문에 못쓰게 만들기도 어려운 노동도구]만을 사용하는 것이 경제원칙으로 되고 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멕시코만(灣)에 인접한 노예주에서는 [고랑을 만들 수는 없고 멧돼지나 두더지 모양으로 땅을 파헤치는] 고대 중국식의 쟁기만이 발견되고 있다(케언즈[J, E. Cairnes], ?노예력?, 런던, 1862년, p.46 이하 참조). 옴스테드 (Olmsted)는 자기의 저서 ?연안 노예주?(pp.46-47)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 본 도구들은, 말하자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임금을 지불하 는 노동자를 이처럼 괴롭히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의 것들이다. 그 도구들은 엄청나게 무겁고 무딘 것이므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도구에 비하면 적어도 10%이상 일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도 확신하게 되었지만, 노예들이 도구를 주의하지 않고 거칠게 취급하는 조건하에서는 더 가볍고 정교한 도구를 노예들에게 제공하더라도 이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늘 주고 있는[또 그것을 줌으로써 우리가 이득을 보는] 그러한 도구는 버지니아주의 옥수수밭에서는 [그 토지가 우리나라 밭에 비해 그 흙이 더 부드럽고 돌도 적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하루도 견뎌 내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째서 농장에서는 말 대신 일반적으로 노새가 사용되고 있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첫째의 그리고 분명히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말은 노예들의 취급에 견디지 못해 금방 절름발이가 되던가 병신이 되는데 노새는 매질에도 견뎌 내고 가끔 한두 끼 굶겨도 그 때문에 치명적인 해는 입지 않으며, 또 비록 돌보는 것을 좀 소홀히 하거나 좀 지나치게 부리더라도 감기가 들거나 병이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방의 창문가에 서 있으면 가축을 학대하는 모습을 거의 언제나 보게 되는데, 북부지방의 농장주라면 어느 누구라도 당장 이러한 마부를 해고시켜 버렸을 것이다. ")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는데, 이제 이 차이가 생산과정의 두 측면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 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보다 많은 양성비가 소요되며 그것의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드는]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숙련 차이가 어떻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할 뿐인] 노동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방적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석세공에서도,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의 양적 초과(量的 超過)에 의해서만, 하나의 동일한 노동과정(한 경우에는 면사를 만들고 다른 경우에는 보석을 만든다)의 시간적 연장(時間的 延長)에 의해서만 생긴다. (주석 19: 고급 노동과 단순한 노동,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의 구분은 부분적으로는 단순한 환상에 근거한 것이거나, 적어도 [이미 오래 전부터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다만 전통적인 관습 가운데만 존속할 뿐인] 구분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노동자계급 중 어떤 계층의 절망적인 상태[즉, 이 계층은 빠른 계층과 달리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우연적인 사정들이 대단히 큰 역할을 함으로써 두 형태의 노동이 그 지위를 뒤바꾸는 경우까지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자계급의 체력이 약해져 상대적으로 기진맥진한 곳[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모든 나라에서 그러하다]에서는, 근육의 힘이 더 요구되는 낮은 형태의 노동이 그보다 훨씬 더 정밀한 노동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높은 형태의 노동으로 간주되며, 더 정밀한 노동은 단순노동의 등급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컨데 영국에서는 벽돌공의 노동이 비단직공의 노동보다 훨씬 더 높은 등급이다. 다른 한편, 면 빌로도 전모공(剪毛工:fustian-cutter)의 노동은 [비록 고도의 육체적 긴장을 요하고 매우 비위생적임에도 불구하고] 단순노동으로 취급된다. 더욱이 이른바 '숙련노동'이 일국의 노동 가운데서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랑(S. Laing)의 계산에 의하면, 잉글랜
    드(및 웨일즈)에서 1,100만 명의 사람들이 단순노동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저서가 발간된 당 시의 총인구 1,800만 중에서 100만의 상류계급과 150만의 극빈자. 부랑자 . 범죄자 . 매춘부. 그 리고 465만의 중간계급을 빼면, 위에 말한 1,100만이 남는다. 그러나 그는 중간계급에 소(小)금 리생활자 . 관리 .작가 . 예술가 . 학교 교사 등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 숫자를 증대시키기 위해 '공장노동자' 중 고액임금 취득자도 이 465만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벽돌공까지도 중간계급의 '고급노동자'로 되어 있다(랑[S. Laing], ?국민적 빈곤?, 1844년, pp. 49-52).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보통의 노동 이외에는 제공할 것이 없는 큰 계급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 다"(J. 밀, “식민지” 의 항목,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부록?, 1831년).)
    다른 한편, 어떤 가치형성과정에서도 고급 노동이 항상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 예컨데 하루의 고급 노동이 X일의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주석 20: "가치의 척도인 노동에 대해 말하는 경우,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특수한 종류의 노동을 의미한 다....그 노동에 대한 다른 종류의 노동의 비율은 쉽게 확정할 수 있다"(캐즈노브[J. Cazenove)] ?정치경제학개론?, 런던, 1832년, pp. 22 - 23).) 따라서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에 의해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分析)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제 8 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노동과정의 여러 가지 요소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생산물의 가치형성에 참가한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구체적 내용과 목적과 기술적 성격 여하를 막론하고 노동대상에 일정한 양의 노동을 지출함으로써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한다. 다른 한편,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보존되어 생산물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다시 나타난다. 예컨대 면화와 방추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에 재현된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에 이전됨으로써 보존된다. 이러한 이전은 생산수단이 생산물로 전환되는 동안, 즉 노동과정 중에 일어난다. 그것은 노동에 의해 매개된다. 그러면 어
    떻게?
    노동자는 동일한 시간에 이중으로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편으로 면화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기 위해 노동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기가 가공하는 면화의 가치나 자기의 노동수단인 방추의 가치를 생산물인 면사로 이전시키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가치를 노동대상에 첨가하는 것과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노동자가 동일한 노동시간에 동시적으로 수행한} 전혀 다른 두 개의 결과이므로, 이와 같은 결과의 이중성(二重性)은 분명히 그의 노동의 이중성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 즉, 그의 노동은 한 쪽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창조(創造)하고, 다른 쪽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보존(保存) 또는 이전(移轉)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각 노동자는 새로운 노동시간[따라서 새로운 가치]을 첨가하는가? 그는 언제나 자기의 독특한 방식으로 생산적 노동을 함으로써 그렇게 할 따름이다. 방적공은 오직 실을 뽑음으로써만, 직포공은 오직 천을 짬으로써만, 대장장이는 쇠를 단련함으로써만 그렇게 한다. 비록 이러한 작업이 노동 일반[그리하여 새로운 가치]을 첨가한다고 하더라도, 합목적적인 노동[예컨대 방적 . 방직 . 단야(鍛冶)]에 의해서만 생산수단(면화와 방추, 면사와 직기, 쇠와 모루)은 생산물[새로운 사용가치]의 형성요소로 된다.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의 원래의 형태는 소멸되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위해 소멸될 뿐이다.(주석 1: “노동은 그것에 의해 소멸된 창조물 대신 새로운 창조물을 준다.” (“국민의 경제학에 관한 논문?, 런던, 1821년, p. 13).) 그런데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할 때 본 바와 같이, 어떤 사용가치가 새로운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소비되는 한, 그 소비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새로운 사용가치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로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소비된 생산수단으로부터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되는 노동시간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즉, 그것을 생산물의 가치성분으로 생산물로 이전하는]은 노동자가 노동일반(勞動一般)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첨가되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有用性), 그것의 특수한 생산적 형태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합목적적 생산활동(방적 . 방직 . 단야)으로서의 노동은 그 손이 한 번 닿기만 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키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어 노동과정의 요소들로 전환시키며, 그것들과 결합해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수행하는 특수한 생산적 노동이 방적이 아니라면 그는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면화나 방추의 가치를 면사로 이전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노동자가 직업을 바꾸어 목공이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루의 노동을 통해 그의 재료에 가치를 첨가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자기의 노동에 의해 가치를 첨가하는 것은, 그의 노동이 방적노동이나 목공노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일반,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이기 때문이며, 또 그가 일정한 가치량을 첨가하는 것은 그의 노동이 어떤 특수한 유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시간 계속되기 때문이다. 즉, 방적공의 노동은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라는 그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성질에
    의해 면화나 방추의 가치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며, 방적노동이라는 그 구체적이고 유용한 성질에 의해 생산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며 그 가치를 생산물 속에 보존한다. 이로부터 동일한 시간 안에 노동의 이중의 결과가 생긴다.
    노동의 단순한 앙적(量的)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質)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二重性)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
    어떤 발명에 의해 방적공이 이전에는 36시간 걸려 방적하던 면화량을 이제는 6시간에 방적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의 노동은 합목적적인 유용한 생산활동으로서는 그 힘이 6배로 증가되었다. 6노동시간의 생산물은 이전의 6배[즉, 6파운드가 아니라 36파운드]로 되었다. 그러나 36파운드의 면화는 이전에 6파운드의 면화가 흡수하던 것과 같은 노동량을 흡수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1파운드의 면화에는 이전의 방법에 비해 다만 1/6의 새로운 노동이, 따라서 이전에 첨가되던 가치의 1/6만이 첨가된다. 다른 한편, 이제 생산물인 36파운드의 면사에는 이전에 비해 6배의 면화가치가 들어 있다. 6시간의 방적에서 이전의 6배의 원료가치가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된다. 물론 이때 각 1파운드의 원료에는 이전의 1/6의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지만.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과정에서 노동이 가치를 보존한다는 속성과 가치를 창조한다는 속성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가를 보여주고 있다. 동일한 양의 면화를 면사로 방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면화에 첨가되는 새로운 가치는 그만큼 더 크고, 동일한 노동시간에 방적되는 면화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물로 이전되어 보존되는 가치는 그만큼 더 크다.
    반대로 방적노동의 생산성(生産性)이 변하지 않고, 따라서 방적공이 1파운드의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는 데 여전히 동일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면화 그 자체의 교환가치는 변해
    1파운드의 면화가격이 6배로 올랐거나 1/6로 떨어졌다고 가정하자. 그 어느 경우에도 방적공은 여전히 동일한 양(量)의 면화에 동일한 노동량(勞動量), 즉 동일한 가치(價値)를 첨가할 것이며, 또 어느 경우에나 그는 동일한 시간에 여전히 동일한 양의 면사를 생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면화로부터 면사라는 생산물로 이전하는 가치는 종전에 비해 한 경우에는 6배로 되며 다른 경우에는 1/6로 된다. 노동수단의 유용성이 노동과정에서 변하지 않은 채, 노동수단의 가치가 증감하는 경우에도, 위와 동일한 결과가 생긴다.
    만약 방적과정의 기술적 조건들이 변하지 않고, 또 그 생산수단의 가치에도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방적공은 여전히 동일한 노동시간에 동일한 양의 원료와 [이것들의 가치는 불변]를 소비할 것이다. 그가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가치는 그가 첨가하는 새로운 가치에 정비례한다. 2주 동안에는 그는 1주 동안에 비해 2배의 노동[즉, 2배의 가치]을 첨가하며, 또 그와 동시에 2배의 가치를 갖는 2배의 원료를 소비하고, 2배의 가치를 갖는 2배의 기계를 소모하며, 그리하여 그는 2주의 생산물에 [1주의 생산물에 보존하는] 가치의 2배를 보존한다. 주어진 불변의 생산조건 하에서는 노동과가 더 많은 가치를 첨가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가치를 이전시켜 보존한다. 그러나 그가 더 많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새로운 가치의 첨가가 [그 자신의 노동과는 독립적인] 불변의 생산조건(生産條件)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 의미에서는, 노동자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의 첨가량에 비례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면화가 1원에서 2원으로 오르든 또는 0.5원으로 떨어지든 노동자가 1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면화가치는 언제나 그가 2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가치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만약 노동자 자신의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이 향상되던가 저하한다면, 그는 한 시간에 이전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은 면화를 방적하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1노동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면화의 가치는 이전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2노동시간에는 1노동시간에 비해 2배의 가치를 보존할 것이다.
    가치는 [보조화폐에서 볼 수 있는 가치의 순전히 상징적인 표현을 도외시한다면] 사용가치로서의 물건 속에만 존재한다. (인간 자신도 노동력의 인격화(人格化)로서만 고찰한다면 하나의 자연물[비록 살아있고 의식있는 물건이지만]이고, 노동 그 자체는 노동력의 육체적 발현이다.) 그러므로 어떤 물건이 그 사용가치를 잃어버리면 그것의 가치도 또한 잃어버린다. 그러나 생산수단은 그 사용가치를 상실함과 동시에 그 가치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의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생산물에서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가치에 대해서는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사용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떤 사용가치 속에 존재하는가는 [상품의 변태에서 본 바와 같이] 아무래도 좋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듯이, 노동과정에서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로 옮겨가는 것은 생산수단이 자기의 독자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와 함께 자기의 교환가치(交換價値)까지도 상실하는 한에서다. 생산수단은 생산수단으
    로서 잃어버리는 가치만을 생산물로 넘겨준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여러 물질적 요소들은 이 점에서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보일러를 가열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석탄은 바퀴의 축에 바르는 기름 등과 마찬가지로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다. 염료나 기타 보조재료들도 사라져 버리기는 하지만 생산물의 속성으로 다시 나타난다. 원료는 생산물의 실체를 형성하지만 그 형태는 변한다. 따라서 원료와 보조재료는 사용가치로서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의 독자적인 모습을 잃어버린다. 진정한 노동수단은 이와는 다르다. 도구 . 기계 . 공장건물 . 용기 등이 노동과정에서 유용한 것은 그것들이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유지해 매일 똑같은 형태로 다시 노동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 동안 만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동안 [즉, 노동과정에 있을 동안] 생산물에 대해 자기의 독자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역시 그 모습을 유지한다. 기계나 도구나 작업용 건물 등의 잔해는 [그것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생산물과는 별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제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노동수단이 [작업장에 들어간 날부터 폐물창고로 추방되는 날까지] 생산에 이바지한 기간 전체를 고찰한다면, 이
    기간 중 그 사용가치는 완전히 소비되었고 따라서 그 교환가치는 완전히 생산물로 이전된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어떤 방적기계가 10년이 되어 그 수명이 다했다면 그 기계의 총가치는 10년간의 노동과정에서 10년간의 생산물로 넘어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노동수단의 생존기간은 몇 회 반복되는 노동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노동수단도 인간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는다. 인간은 누구나 매일 24시간씩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 물론 사람을 쳐다보아 그가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를 정
    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곤란도 생명보험회사가 평균의 이론에 의거해 인간의 수명에 관한 아주 확실하고 유리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노동수단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류의 기계가 평균적으로 얼마 동안 존속할 수 있는가는 경험상 알려져 있다. 노동과정에서 기계의 사용가치가 겨우 6일 동안만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기계는 평균해서 1노동일마다 그 사용가치의 1/6씩을 잃어가며, 따라서 그날그날의 생산물에 그 가치의 1/6을 넘겨주게 된다. 모든 노동수단의 마멸, 사용가치의 매일매일의 상실과 이에 따른 생산물로의 매일매일의 가치이전(價値移轉)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된다.
    이로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의 소멸로 말미암아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물에 넘겨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생산수단이 잃어버릴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생산수단 그 자체가 인간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면, 그것은 생산물에 아무런 가치도 넘겨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용가치(使用價値)의 형성에는 이바지하지만 교환가치(交煥價値)의 형성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협력 없이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수단, 즉 토지. 바람. 물. 광석형태의 금속. 원시림의 나무 등은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여기에서 우리 앞에는 또 하나의 흥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컨대 어떤 기계의 가치가 1,000원이고, 그 기계는 1,000일 뒤에 마멸된다 고 가정하자. 이 경우 기계의 가치는 매일 1/1,000씩 생산물로 넘어간다. 그와 동시에 비록 기계의 활동력이 점차 감퇴하기는 하지만 그 기계 전체가 노동과정에서 기능하고 있다. 이로부터 노동과정의 하나의 요소인 어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는 전체적으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부분적으로만 참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 사이의 차이가 여기에서는 객체적 생산요소들에 반영되고 있다. 즉, 동일한 생산과정에서 동일한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의 요소로서는 전체(全體)로 계산되지만 가치형성의 요소로서는 오직 일부분(-部分)씩만 계산된다.(주석 2: 여기서는 기계. 건물 등과 같은 노동수단의 수리(修理: repair)는 문제로 삼지 않는다. 수리 중의 기계는 노동수단이 아니라 노동재료다. 즉, 그것을 써서 노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노동이 첨가되어 그 사용가치가 회복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수리노동은 그 노동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본문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점차로 사망에 이르는 마멸이며, "그때그때의 수리로는 회복할 수 없는 종류의 마멸이며, 칼을 예로 든다면, 칼 수리공이 새로 날을 세울 가치가 없다고 말할 정도의 상태에 이르는 그러한 종류의 마멸"이다.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기계는 모든 노동과정에는 전체적으로 참가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가치형성과정에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참가한다. 우리는 다음의 문장에 나타난 개념의 혼동을 잘 알 수 있다. "리카도씨는 양말제조기를 제작할 때 첨가된 기계제작공의 노동의 일부가 예컨대 한 켤레의 양말의 가치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한 켤레의 양말을 생산한 총노동에는....기계제작공의 노동의 일부가 아니고 그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 대의 기계는 틀림없이 여러 켤레의 양말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그 양말들 중 어 한 켤레도 기계 전체의 참가없이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의 용어논쟁에 관한 고찰, 특히 가치 및 수요공급에 관해?, 런던, 1821년, p. 54). 유별나게 자부심이 강하고 아는 체하는 이 저자가 자기의 혼동과 문제제기로부터 면책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리카도나 그 전후의 어떤 경제학자도 노동의 두 측면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더욱이 가치형성에서 이 두 측면이 하는 역할를 분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 문이다.)
    다른 한편, 어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는 부분적으로 들어가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전체적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면화에서 실을 뽑을 때, 115파운드의 면화에서 매일 15파운드의 낙면(落綿:waste)이 생기며, 이 낙면은 면사로 되지 못하고 오직 솜부스러기로 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15파운드의 낙면발생이 방적의 평균적 조건하에서는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면, 이 15파운드의 면화의 가치도 면사의 실체로 되는 100파운드의 면화의 가치와 꼭 마찬가지로 면사의 가치에 들어간다. 100파운드의 면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15파운드의 면화의 사용가치가 솜부스러기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면화의 낭비는 면사생산의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된다. 바
    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가치를 면사로 이전시킨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모든 폐기물(廢棄物)에도 해당한다. 적어도 이 폐기물이 다시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따라서 새로운 독립적인 사용가치로 되지 않는 한. 폐기물의 사용은 맨체스터의 대규모 기계제작 공장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큰 기계에 의해 대패밥 모양으로 깎여진 쇠부스러기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고, 저녁때가 되면 그것이 큰 차에 실려 공장에서 제철소로 운반되어 그 다음날 다시 대량의 철로 되어 제철소에서 공장으로 돌아온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 원래의 사용가치의 형태 속에 있는 가치를 상실할 때에만, 새로운 생산물로 가치를 이전한다.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에서 입을 수 있는 가치상실의 최대한도는 분명히 그것이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가치량[다시 말해,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은 노동과정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물에 첨가할 수는 결코 없다. 어떤 노동재료. 기계. 생산수단이 아무리 유용하다 하더라도 만약 그 가치가 3,000원[이를테면 500노동일]이라면, 그것은 생산물의 가치에 결코 3,000원 이상을 첨가할 수 없다. 그것의 가치는 [그것이 생산수단으로 들어가는] 노동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산물로 나온 {이전의} 노동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노동과정에서는 그것은 오직 사용가치로서, 즉 유용한 속성을 가진 물건으로 역할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이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생산물에 아무런 가치도 넘겨주지 못할 것이다.(주석 3: 이로부터 세이(J. B. Say)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잉여가치(이자 . 이윤 . 지대)를 생산수단(토지 . 도구 . 원료)이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를 통해 수행하는 '생산적 서비스'로부터 도출하려고 한다. 기묘한 변호론적 착상이 날 때마다 발표하는 로셔(William Roscher)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J. B. 세이가 ?정치경제학개론? 제1권 제4장에서, 일체의 비용을 공제한 뒤 정유공장이 생산한 가치는 어쨌든 새로운 가치이고, 정유공장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해 수행된 노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정당하다"(?국민경제학원리?, 제3판, 1858년, p. 82, 주). 매우 정당하다! 정유공장이 생산한 '기름'은 정유공장의 건설에 지출된 노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로셔는 석유가 '천연적으로[비록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긴 하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름'이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가치'를 '기름'과 같은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석유가 상대적으로 '적은 양으로' '천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자연)은 교환가치를 거의 만들어 내지 않는다"(같은 책, p.79). 로셔가 자연과 교환가치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어리석은 처녀가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아주 조그마한 아이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 '학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리카도학파는 자본까지도 '축적된 노동'이라고 해서 노동이라는 개념속에 포괄시킨다. 이것은 졸렬하다. 왜냐하면 사실 자본의 소유자는 분명히 그것의 단순한 생산및 보존 이상의 것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의 향락을 절제했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 대신 예컨대 이자(利子)를 요구하는 것이다"(같은 책 p. 82). 단순한 '요구'를 '가치'의 원천으로 전환시키는 경제학의 이 '해부생리학적 방법'이야말로 얼마나 '기묘'한가!)
    생산적 노동이 생산수단을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形成要素)로 전환시킴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는 일종의 윤회(輪廻: metempsychosis)를 겪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소모된 육체로부터 새로 만들어진 육체로 옮겨간다. 그러나 그 이전은 이를테면 현실적 노동의 배후에서 일어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노동을 첨가할 수 없으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첨가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의 유용한 형태이어야 하며, 생산물들을 새로운
    생산물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해 그들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중의 노동력[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주석 4: "농업의 모든 도구들 중에서 인간의 노동이야말로....농업자가 자기의 자본을 회수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이 의지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 물건-현재 보유하고 있는 역축과....짐수레. 쟁기. 삽 등-은 일정한 양의 인간노동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곡물부족에 관한 의견과 상세한 논의, 1795년 11월 W. 피트에게 제출한 것? , 런던, 1800년. p. 10).) 경기가 좋은 동안에는 자본가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노동의 이 무상(無償)의 선물을 보지 못하지만, 노동과정의 잠재적인 중단, 즉 공황(恐慌)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주석 5: 1862년 11월 26일자 ?더 타임즈?지에는 어떤 공장주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자기의 방적공장에 8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해 매주 평균 150고리짝의 동인도(東印度) 면화나 약 130고리짝의 아메리카 면화를 소비하는 공장주였는데, 그는 자기의 공장이 조업중단으로 입게 되는 간접비용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그는 그 비용을 연간 6,000파운드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생산적 비용 중에는 예컨대 지대. 세금. 지방세. 보험료 그리고 1년 계약으로 고용한 관리인. 경리. 기사 등의 급료 등과 같은, 우리와는 관계없는 수많은 항목들이 들어 있다. 다음으로 때때로 공장을 따뜻하게 하거나 증기기관을 운전하는 데 필요한 석탄이나, 그밖에도 임시노동으로써 기계설비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을 150파운드로 계산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기계설비의 손상이라고 하면서 1,200파운드를 계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후와 자연적인 부식(腐蝕: decay)은 증기기관이 운전을 정지했다고 해서 그 작용을 중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1.200파운드라는 금액은 기계 설비가 벌써 대단히 마멸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처럼 낮게 평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생산수단에서 실제로 소모되는 것은 그 사용가치(使用價値)이고, 이 사용가치의 소비에 의해 노동은 생산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생산수단의 가치(價値)는 소비되지 않는다.(주석 6: "생산적 소비라는 것은 상품의 소비가 생산과정의 일부로 되는 경우다....이러한 경우 가치의 소비(消費)는 없다"(뉴먼[S. P. Newman], ?정치경제학개요", p. 296).) 따라서 그것이 재생산된 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 가치는 보존된다. 그 가치가 보존되는 것은 노동과정에서 가치 그 자체에 어떤 조작이 가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가 원래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용가치가 사라지기[비록 다른 사용가치 속으로이긴 하지만]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再現)되기는 하나, 엄밀히 말해 재생산(再生産)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되는 것은 [원래의 교환가치가 그 속에 재현되는] 새로운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주석 7: 아마 20판은 거듭했으리라고 생각되는 북아메리카의 어떤 개설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떤 형태로 자본이 재현(再現)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자기의 가치를 생산물에 재현시키는 모든 가능한 생산요소를 장황하게 열거한 다음,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생존과 안락에 필요한 각종 식료품. 의복. 주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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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9
    그러므로 이 가치변화는 바로 제1의 유통행위 M-C에 의해 구매되는 상품에서 일어나야 되는데, 그렇다고 그 상품의 가치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등가물끼리 교환되며 상품은 그 가치대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消費)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따라서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勞動力: labour-power)이다.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살아 있는 사람]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운동시키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화폐소유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商品)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교환은 그 자체로서는 그 자신의 성질로부터 나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종속관계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소유자[즉.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사람]가 그것을 상품으로 시장에 내어놓을 때[즉, 판매할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동력의 소유자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만 하며, 따라서 자기의 노동능력 [즉, 자기 일신(--身)]의 자유로운 소유자로 되어야만 한다.(주석 2: 고전적 고대에 관한 백과사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엉터리를 읽을 수 있다. 즉, 고대세계에는 " 자유로운 노동자와 신용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자본은 충분히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몸젠[Mommsen)도 자기의 ?로마사?에서 이 점에 관해 오류를 되풀이해 범하고 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항상 일정한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노동력을 한꺼번에 몽땅 판매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그는 자유인으로부터 노예로, 상품소유자로부터 상품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노동력을 언제나 자기의 소유물로, 자기 자신의 상품으로 취급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그가 자기의 노동력을 항상 일시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만] 구매자의 자유처분에 맡겨 사용하게 하는 경우에만, 따라서 노동력은 양도하더라도 노동력에 대한 자기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하다.(주석 3: 그러므로 각국의 법은 노동계약의 최대 기간을 규정하고 있다. 자유로운 노동이 행해지고 있는 곳에는 법은 계약해제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여러 나라들, 특히 멕시코에서는 (미국의 남북전쟁 이전에는 멕시코로부터 할양(割讓)받은 지역에서도, 또 쿠자(Cuza)의 변혁 시까지는 사실상 다뉴브의 여러 제후국에서도) 노예제도가 채무sh예제라는 형태로 은폐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노동하여 갚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것도 대대로 이어지는] 채무로 말미암아, 노동자 개인뿐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도, 사실상 타인이나 다른 가족의 소유물로 된다. 후아레스(Juarez)는 채무노예제를 폐지했지만, 자칭 황제인 막시밀리안(Maximilian)은 하나의 칙령으로 그것을 부활했는데, 이 칙령은 워싱턴의 하원에서 적절하게도 멕시코에서 노예제도를 다시 채용하기 위한 칙령이라고 비난받았다. "나는 나의 특수한 육체적 . 정신적 기능과 활동능력의 개별 생산물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고, 나의 능력의 사용을 제한된 시간 동안 타인에게 허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제한에 의해 나의 능력은 나의 전체성.? 일반성과 외적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의 전체 노동시간과 나의 생산물 전체를 양도한다면, 나는 나의 실체, 나의 일반적 활동과 현실성, 나의 인격을 어떤 타인의 소유로 되게 할 것이다"(헤겔[G. W. F. Hegel], ?법철학?, 베를린, 1840년, p. 104).)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발견하기 위한 제2의 필수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이 대상화된 상품을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살아 있는 신체 안에만 존재하는] 자기의 노동력 그 자체를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동력이 아닌 다른 상품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예컨대 원료, 노동도구 등1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가죽 없이는 장화를 만들 수 없다. 그 외에도 그는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공상가까지도, 미래의 생산물[즉, 그 생산이 아
    직 완성되지 않은 사용가치]을 먹고 살 수는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 그 모습을 나타낸 첫날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도 또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된다면, 생산물은 생산되고 나서 판매되어야 하며, 또 생산물이 판매된 뒤에야 비로소 생산자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생산에 필요한 시간외에 판매에 필요한 시간이 추가된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自由人; free individual)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物件)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e of)는 의미다.
    어째서 이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대면하게 되는가라는 문제는, 노동시장을 상품시장의 하나의 특수한 분야로 간주하는 화폐소유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당분간 우리의 관심사도 아니다. 화폐소유자가 그 사실에 실천적으로 달라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사실[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이론적으로 달라붙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즉, 자연이 한편으로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남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제1권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始初蓄積)"을 참조하라} .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경제적 범주들도 역시 자기들의 역사적 흔적을 가지고 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려면 일정한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자 자신을 위한 직접적 생활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더 나아가 어떤 사정 하에서 모든 생산물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가를 탐구해 본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아주 독특한 생산양식(生産樣式), 즉 자연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구는 상품 분석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비록 생산물의 압도적 양이 직접 자가소비(自家消費)에 충당되고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정이 그 전체 폭이나 깊이에서 교환가치에 의해 아직도 지배되지 않더라도,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일어날 수 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회 안의 분업이 어느 정도 발전해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분리[물물교환과 함께 처음 시작된다]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을 그 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발전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 어디에도 있다.
    또 이제 화폐(貨幣)로 눈을 돌려보면, 그것은 상품교환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전제로 한다. 각종의 화폐형태(단순한 상품등가물로서의 화폐,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 퇴장화폐 및 세계화폐)는 이런저런 기능의 크기와 그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 사회적 생산과정의 매우 다른 수준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품유통이 조금만 발달하면 모든 화폐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자본(資좌.)은 그렇지 않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勞動者)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하나의 역사적 전제조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사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본은 처음부터 사회적 생산과정의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의 눈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차기의 노동이 임금노동(賃金勞動: wage-labour)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가 일반화된다.)
    이제 우리는 노동력이라는 이 독특한 상품을 좀더 상세하게 고찰해야 한다. 이 상품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치를 가진다.(주석 5: "한 인간의 가치(價値)는 다른 모든 물건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의 가격(價格)이.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힘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불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홉즈[T. Hobbes], ?리바이어던", 몰즈워즈 편, ?저작집? 런던, 1839-1844, 제3권, p. 76).) 그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은 이 개인의 생존을 전제로 한다. 이 개인의 생존이 주어져 있다면,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維持)이다. 살아 있는 개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生活手段)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은 결국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귀착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그런데 노동력(勞動力)은 오직 그 발현(發現)에 의해서만 실현되며, 오직 노동(勞動)을 통해서만 활성화된다. 노동력의 활성화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 신경 .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지출의 증가는 수입의 증가를 조건으로 한다.(주석 6: 그러므로 고대 로마에서 농업노예를 감시하던 노예관리인인 빌리쿠스(villicus)는 “.보통의 예보다 그 일이 쉽다는 이유로 보통의 노예보다 더 적은 생활물자를 받았다"(몸젠[T. Mommsen], ?로마사?, 1856년, p. 810).) 노동력의 소유자가 오늘의 노동을 끝마쳤다면, 그는 내일도 오늘과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총량은 노동하는 개인을 정상적인 생활상태로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식물 . 의복 . 난방 .주택 등과 같은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계급이 어떤 조건하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주석 7: 손턴(W. T Thornton), ?과잉인구와 그 해결책? 런던 1846년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역사적 및 도덕적{정신적} 요소(historical and moral element) 포함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의 일정한 나라에는 노동자들의 필요생활수단의 평균적 범위는 주어져 있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화폐가 연속적으로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 전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시장에 연속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판매자는, "살아 있는 개체는 어느 것이나 생식(生殖: procreation)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는 것처럼“(주석 8: 페티(William Petty).), 생식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모(消耗)와 사망의 결과 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노동력은 적어도 같은 수의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에는 이러한 보충인원[다시 말해 노동자의 자녀들]의 생활수단이 포함되며, 그리하여 이 독특한 상품소유자 종족은 상품시장에서 영구히 존재하게 된다.(주석 9: "그것[노동]의 자연가격(自然備格)은....노동자를 유지하기 위해, 또 노동자로 하여금 [시장에서 감소되지 않는 노동공급을 보장할 만한]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나라의 기후나 생활관습에 의해 요구되는 생활수단과 편의품의 양이다.(R. 토렌즈, “곡물무역론”, 런던, 1815년, p. 62). 여기에서는 노동이란 말이 노동력이라는 말 대신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인간유기체(人間有機誘: human organism)의 일반적인 천성을 변화시켜 일정한 노동부문에서 기능과 숙련을 몸에 익혀 발달한 특수한 노동력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 또는 교육이 필요한데, 거기에는 또 얼마간의 상품들(또는 그 등가)이 소요된다 이 비용은 노동력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훈련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비용은 [보통의 노동력의 경우에는 매우 적지만]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 속에 들어간다.
    노동력의 가치는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의 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는 이 생활수단의 가치[즉,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생활수단의 일부, 예컨대 식료품이나 연료 등은 매일 소비되고 매일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생활수단들, 예컨대 의복이나 가구등과 같은 것들은 비교적 장시간에 걸쳐 소모되며, 따라서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보충되어도 된다. 어떤 종류의 상품은 매일, 또 어떤 종류의 상품은 매주, 매분기 등으로 구매되거나 지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출의 총액은 예컨데 1년 동안 어떻게 분배되든 매일매일의 평균수입(平均收人)에 의해 보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노동력의 생산에 매일 필요한 상품의 양을 A, 매주 필요한 양을 B, 매분기에 필요한 양을 C....등이라고 가정하면, 이 상품들의 하루의 평균 365A+52B+4C+등등/365 이 될 것이다. 이 하루 평균으로 필요한 상품량이 6시간의 사회적 노동을 포함하고 있다면, 매일의 노동력(勞動力)에는 반일 분[노동일이 12시간이라면]의 사회적 평균노동(平均勞動)이 대상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 노동력이 매일 생산되기 위해서는 노동일의 반이 필요하다. 이 노동량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즉, 매일 재생산되는 노동력의 가치]를 형성한다. 만일 반일분의 사회적 평균노동이 3원으로 표시된다면, 3원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만약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매일 3원에 판다면 노동력의 판매가격은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 그리고 우리의 전제에 의하면, 자기의 3원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기를 갈망하는 화폐소유자는 실제로 이 가치를 지불한다.
    노동력의 가치의 궁극적인 또는 최소의 한계는, 노동력의 보유자인 인간이 [자기의 생명과정을 갱신할 수 있기 위해] 매일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품량의 가치에 의해, 다시 말해 육체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설정된다. 만약 노동력의 가격이 이 최소한계까지 떨어진다면, 그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노동력은 위축된 상태로만 유지되고 발현되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의 가치든 그것은 그 상품을 정상적인 품질로 공급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이와 같은 노동력의 가치규정을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로시(Rossi) 등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탄식하는 것은 매우 값싼 감상(感傷: sentimentality)이다.

    "생산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의 노동자의 생활수단을 무시하면서 노동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 나의 망상이다. 우리가 노동 또는 노동능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동시에 노동자와 그의 생활 수단, 노동자와 그의 임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주석 10: 로시(Rossi), ?정치경제학강의?, 브뤼셀, 1843년, pp. ,370-371.)

    노동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노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치 소화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소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소화라는 과정이 실제로 진행
    되려면,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튼튼한 위장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노동능력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노동능력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생활수단의 가치가 노동능력의 가치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능력이 판매되지 않는다면 노동능력은 노동자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는 오히려 그의 노동능력이 그것의 생산에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의 재생산을 위해 생활수단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가혹한 자연의 필연성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이때에 그는 시스몽디처럼 "노동능력은....판매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주석 11: 시스몽디(Sismondi), ?신경제학원리“, 제1권, p. 113.)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특수성 때문에 나타나는 하나의 결과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이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직 현실적으로 구매자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벌써 일정한 양의 사회적 노동{생활수단}이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그 뒤에 행해지는 노동력의 발휘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양도와 현실적인 발휘(즉, 노동력의 사용가치로서의 존재)는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처럼 판매에 의한 사용가치의 형식적 양도와 구매자에게 그것의 현실적 인도가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구매자의 화폐는 대체로 지불수단(支拂手段)으로 기능한다. (주석 12: "모든 노동은 그것이 끝난 뒤에 대가를 지불받는다?(“최근 맬더스가 주장하는 수요의 성 질....에 관한 원리의 연구?, p. 104). "상업신용(商業信用: commercial credit)의 시초는 생산물 의 주된 창조자인 노동자가 자기의 저축에 의해 자기의 임금 지불을 1주일 . 2주일 . 1개월 . 3개월까지 기다릴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가널[C. Ganilh), ?정치경제학의 체계?, 제2판, 파리, 1821년, 제2권, p. 150).)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는,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 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예컨대 매주 말에]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어디에서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자본가에게 선대(先貸: advance)한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격을 지불받기 전에 노동력을 구매자의 소비에 맡기며, 따라서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신용(信用)을 주고 있다. 이 신용을 제공한다는 것이 결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는 것은,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때때로 발생한다는 사실(주석 13: "노동자는 자기의 근면을 대부(貸付: lend)한다"고 슈토르히(Storch)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교활하게도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노동자는 "자기의 임금을 잃어버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위험도 부담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노동자는 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슈토르히, ?정치경제학강의?, 페테르부르크, 1815년, 제2권, pp. 36-37).)뿐 아니라, 더욱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주석 14: 하나의 실례.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heere)의 ?보고서?,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 비누, 탄산칼륨의 가루, 석회, 더비셔주에서 나는 석분, 기타 유사한 성분을 섞어 넣음으로써 불순(不純: adulterated)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 보고서 및 "불순빵의 제조에 관한 1855년의 위원회"의 보고 및 하설[Hassa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 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l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 왜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이 이러한 불순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명반이나 석분이 든 것을 사가는가에 대한 이유로서,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단골 빵집이나 잡화점에서 주는 빵을 군말없이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들은 노동주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 그리고 트리맨히어는 증인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혼합물을 넣은 빵이 일부러 이러한 종류의 고객을 목표로 공공연하게 제조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 "잉글랜드의 다수의 농업지대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농업지방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노동임금은 2주일에 1회씩, 또 심지어 1개월에 1회씩 지불된다. 이와 같이 지불간격이 길기 때문에 농업노동자들은 상종을 외상으로 사지 않을 수 있다....그는 비싼 가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는 외상을 지고 있는 소매점에 사실상 묶여 있다. 그리하여 예컨대 임금이 1개월 만에 지불되는 월트셔의 호닝함(Horningham)에서는 농업노동자들은 다른 곳에서는 1스톤{l4파운드}당 1실링 10펜스 하는 밀가루에 대해 2실링 4펜스를 지불한다"(추밀원의무관의 ?공중위생. 제6차 보고서?, 1864년, p. 264). "페이즐리(Paisley)와 킬마노크(Kilmarnock)(서부 스코틀랜드)의 목판날염공들은 1853년에 파업에 의해 임금 지불기간을 1개월에서 2주간으로 단축시키는데 성공했다"(?공장감독관보고서?, 1853년 10월 31일, p. 34).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주는 신용(信用: credit)이 한층 더 재미있게 발전된 것으로서 우리는 영국의 많은 탄광소유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이 방법에 의하면, 월말에 가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그 동안에 자본가로부터 차입하는데 이 차입은 흔히 상품형태로 이루어지고, 이 상품에 대해 는 시장가격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현물지급제도). "탄광주들 사이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월1회씩 임금을 지불하고, 중간의 매주 말에는 현금을 빌려 주는 것이 일반적 관례로 되어 있다. 이 현금은 매점(기업주 자신이 소유한 잡화점)으로 들어간다. 노동자들은 한 쪽에서는 현금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현금을 지출하는 것이다"(?아동노동 조사 위원회. 제3차 보고서”, 런던, 1864년, p. 38, 제 192호).)
    그러나 화폐가 구매수단으로 기능하건 지불수단으로 기능하건 그것은 상품교환 그 자체의 성질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노동력의 가격은 비록 나중에 실현된다 할지라도, 가옥의 임대료처럼 계약상 이미 확정되어 있다. 노동력은 [비록 그 대가가 나중에 지불된다 하더라도] 벌써 판매된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를 순수한 형태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노동력의 소유자가 노동력의 판매와 동시에 계약상 정해진 가격을 즉시 받는다고 전제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제 우리는 노동력이라는 이 독특한 상품의 소유자에게 화폐소유자가 지불하는 가치가 결정되는 방식을 알았다. 화폐소유자가 교환을 통해 받는 사용가치는 노동력의 현실적 사용, 즉 노동력의 소비과정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화폐소유자는 이 과정에 필요한 모든 물건[예컨대 원료 등]을 상품시장에서 구매하며, 또 그것에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소비와 마찬가지로 시장[즉, 유통분야] 밖에서 수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 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
    [그 안에서 노동력의 매매가 진행되는] 유통분야 또는 상품교환분야는 사실상 천부인권(天賦人權: innate rights of man)의 참다운 낙원이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 소유 ? 벤담{Bentham: 공리주의}이다. 자유(自由)! 왜냐하면 하나의 상품[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물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공동의지(共同意志: joint will)가 하나의 공
    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의 결과다. 평등(平等)!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所有)!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것만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利己主義) . 이득(利得) . 사적 이익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豫定調和)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攝理: providence)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 공익 .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속류자유무역주의자들은 이 단순상품유통 또는 상품교환분야로부터 자신들의 견해나 개념을 끌어내고 [또 자본과 임금노동에 근거한 사회를 평가하는] 그들의 판단기준을 끌어내고 있으나, 이제 이 분야를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렀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제 3 편

    절대적 잉어기치의 생산



    제 7 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 8 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제 9 장 잉여가치율
    제 10 장 노동일
    제 11 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제 7 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 1 절 노동과정{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 노동력의 구매자는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소비(消費)한다. 이것에 의해 노동력의 판매자는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노동력[즉, 노동자]으로 되는데, 그 이전에는 그는 오직 잠재적으로만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對象化)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즉, 어떤 종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쓰이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만들게 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사용가치[즉, 어떤 일정한 물품]이다. 사용가치 또는 재화(財貨)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과정(labour process)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人間)과 자연(自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新陳代謝: metabolism)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해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自然力)으로서 자연의 소재(素材: material)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天惟)}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여기에서는 최초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노동형태들은 문제로 삼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기 위해 시장에 나타나는 시기는, [인간노동이 아직도 그 최초의 본능적 형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로부터 매우 긴 시간이 흐른 뒤다.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 (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즉,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더욱이 노동의 내용과 그 수행방식이 노동자의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않을수록,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을 자기 자신의 육체적 . 정신적 힘의 자유로운 발휘로서 즐기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노덩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1)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 [즉, 노동 그 자체], (2) 노동대상(勞動對象), (3) 노동수단(勞動手段)이다.
    인간을 위해 최초부터 식량 또는 생활수단을 마련해 주고 있는 토지(경제학적 관점에서는 물도 여기에 포함된다)(주석 1: "토지의 천연산물은 소량이고, 또 그것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습은 마치 청년을 근면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그에게 적은 돈을 주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t], ?정치경제학원리", 더블린, 1770년, 제1권, p. 116).)는 인간노동의 일반적 대상으로서 인간측의 수고 없이 존재한다. 노동에 의해 자연환경과의 직접적 연결로부터 분리된 데 불과한 물건들도 모두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대상이다. 예컨대, 그 자연환경인 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잡힌 물고기, 원시림에서 벌목된 원목(原木), 광맥에서 채취된 광석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노동이 스며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원료(原料: raw material)라고 부른다. 예컨대 이미 채굴되어 세광(洗鑛)과정에 들어가는 광석이 그것이다.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대상이 원료인 것은 아니다. 노동대상이 원료로 되는 것은 그것이 이미 노동에 의해 어떤 변화를 받은 경우뿐이다.
    노동수단이란, 노동자가 자기와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넣어 이 대상에 대한 자기의 활동의 전도체(傳導體: conductor)로서 이용하는 물건[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의 복합체]이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 물리적 .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 [자기의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주석 2: "이성(理性:reason)은 강력한 동시에 교활하다. 그것이 교활한 것은 [자기 자신은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여러 객체들을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 상호작용하여 지치게 만들면서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실현시킨다는] 그 매개적(媒介的) 활동 때문이다"(헤겔, ?철학체계?, 제1부, “논리학“, 베를린, 1840년, p.382).) 과일과 같은 완성된 형태의 생활수단[이것의 채취에는 인간의 신체기관만이 노동수단으로 기능한다]을 제외하면, 노동자가 직접 손에 넣는 것은 노동대상이 아니고 노동수단이다. 그리하여 자연물은 노동자의 활동의 기관(器官: organ)으로 된다. 노동자는 자연물을 성경의 말씀{“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태복음 제6장 27절, 누가복음 제12장 25절) }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체기관에 덧붙여 자기의 자연적 모습을 연장하는 것이다. 토지는 노동자의 본원적인 식량창고일 뿐 아니라 그의 노동수단의 본원적인 창고이기도 하다. 토지는 예컨대 ?그가 던지거나 문지르거나 누르거나 자르는 데 사용하는] 돌을 공급한다. 토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동수단이기는 하나, 그것이 농업에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노동수단과 비교적 고도로 발달한 노동력(勞動力)이 전제되어야 한다.(주석3: 다른 점에서는 보잘것 없는 저작인 ?정치경제학이론?(파리, 1815년, 제1권 p.266) 가운데서 가닐(Ganilh)은 중농주의자(重農主義自)들에 반대해 진정한 농업의 전제로 되는 다수의 노동과정을 적절하게 열거하고 있다.) 노동과정이 조금이라도 발전하게 되면 특별히 가공된 노동수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태고의 동굴 속에서도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가 발견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당시에는 가공된 돌이나 나무 . 뼈 . 조개들 외에도 길들여진 동물[노동에 의해 변화되고 특정의 목적을 위해 사육된 동물]이 노동수단으로 주요한 역할을 했다.(주석 4: “부의 형성과 분배의 고찰”(1766년)에서 튀르고(Turgot)는 길들여진 동물이 문명의 초기에 가진 중요한 의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그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遣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주석 5: 모든 상품 중 진정한 사치품은 상이한 생산시대의 기술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 중 역학적(力學的: mechanical)인 종류의 노동수단[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은, [예컨대 관 . 통 . 바구니 .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用器)로 쓰일 뿐이고 따라서 생산의 혈관계통(血管系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훨씬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용기로서의 노동수단은 화학공업에서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한다.(주석 6: 지금까지의 역사 기술(記述)은 [모든 사회생활의 토대이며 따라서 모든 현실적 역사의 토대인] 물질적 생산의 발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선사(先史: pre-history)시대 는 이른바 역사연구가 아니라 자연과학적 연에 입각하여 도구나 무기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노동이 노동대상에 작용하는 것을 중개하며, 따라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활동의 전도체로 쓰이는 물건들 이외에] 노동과정의 수행에 필요한 모든 객체적(客體的) 조건들은 더 넓은 의미의 노동수단에 포함될 수 있다. 그것들은 직접적으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들 없이는 노동과정이 전혀 행해지지 못하거나 불완전하게만 행해진다. 이러한 종류의 보편적인 노동수단은 역시 토지(土地)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토지는 노동자에게는 설 장소를 제공하며, 그의 노동과정에
    대해서는 작업장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의 노동에 의해 매개된 이러한 종류의 노동수단 중에는 공장이나 운하(運河)나 도로 등이 있다.
    요컨대,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합되었다. 즉, 노총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노동자측에서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이제
    생산물측에서는 고정된 정지성(停止性)으로서 존재의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자는 방적노동을 한 것이고, 그 생산물은 방적된 것[즉, 실]이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生産手段: means of production)(주석 7: 예컨대 아직 잡히지 않은 물고기를 어업의 생산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기이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물고기가 없는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는 기술은 아직까지는 발명되지 않았다.)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주석 8: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ur)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대해서는 결코 충분한 것이 못된다. [제1권 제16장을 참조하라].) 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용가치가 생산물의 형태로 노동과정으로부터 나을 때, 그 이전의 노동의 생산물인 다른 사용가치는 생산수단으로 노동과정에 들어간다. 동일한 사용가치가 어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다른 노동과정의 생산수단으로도 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
    광업 . 수렵 . 어업 등(농업은 처음으로 처녀지를 개간하는 경우에만)과 같이 그 노동대상이 천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채취산업(採取産業)을 제외하면, 모든 산업부문은 원료[즉, 노동과정을 이미 통과했으며 그 자체가 벌써 노동생산물인 노동대상]를 취급하고 있다. 예컨대 농업의 종자가 그러하다. [보통 자연의 산물(産物)이라고 간주되는] 동물과 식물도 현재의 모습에서는 전년도의 노동의 생산물일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의 통제하에 인간의 노동에 의해 이루어진 점차적인 변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특히 노동수단에 대해 말한다면, 그 대다수는 가장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도 과거 오랫동안의 노동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원료는 생산물의 주된 실체를 이를 수도 있고, 오직 보조재료(補助材料)로 그 생산물의 형성에
    참가할 수도 있다. 보조재료는 [석탄이 증기기관에 의해, 휘발유가 자동차에 의해, 건초가 말에 의해 소비되는 것과 같이] 노동수단에 의해 소비(消費)되거나, [염소가 표백되지 않은 아마포에, 석탄이 철에, 염료가 양모에 첨가되는 것과 같이] 원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원료에 첨가(添加)되거나, [작업장의 조명이 나 난방에 사용되는 재료와 같이] 노동의 수행 그 자체를 지원(支援)하거나 한다. 주요재료와 보조재료 사이의 구별은 진정한 화학공업에서는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화학공업에서는 투입되는 원료 중 그 어느 것도 생산물의 실체로서 [원래의 모습대로]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석 9: 슈토르히(Storch)는 원료와 보조재료를 구별한다 세르뷸리에(Cherbulier)는 보조재료를 '도구의 원료'라고 불렀다)
    물건들은 각각 여러 가지 속성(屬性)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용도(用途)가 각양각색일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생산물이 아주 판이한 여러 가지 노동과정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예컨대 곡물은 제분업자. 전분업자 . 양조업자 .목축업자 등에게 원료로 된다. 그것은 종자(種子)로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을 위한 원료로 된다. 마찬가지로 석탄은 생산물로서는 광업에서 나오지만 생산수단으로 광업에 들어간다.
    동일한 생산물이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으로도 원료로도 쓰일 수 있다. 예컨대 가축의 사육에서 가축은 원료(原料)임과 동시에 비료제조의 수단(手段)이기도 하다.
    소비를 위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생산물이 새로운 다른 생산물의 원료로 되는 일도 있다. 예컨대 포도가 포도주의 원료로 되는 것과 같다. 또는 노동이 우리에게 [원료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물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원료 [예컨대 면화 . 면사 . 면포와 같은 것]를 반제품(半製品)이라고 부르는데, 중간제품(中間製品)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료는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계열(系列) 전체를 통과해야 하며, 각각의 과정에서 그 모습을 변경시키면서 계속 반복해서 원료로 기능하고, 최후의 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된 생활수단 또는 완성된 노동수단의 형태로 되어 나온다.
    요컨대,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 방적공은 방추(紡錘)를 실을 뽑기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하며, 아마를 실을 뽑는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물론 방적 재료{즉, 아마}와 방추 없이는 방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적을 개시할 때에는 이러한 생산물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방적과정 자체에서는 아마와 방추가 과거의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特)이라는 사실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것은 마치 방이 농민과 제분업자와 빵제조업자의 과거노동(past labour)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이 소화과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노동과정에 있는 생산수단이 과거노동의 생산물로서의 자기의 성격에 우리의 주의를 끈다면, 그것은 그 생산수단의 결함 때문이다. 잘 베어지지 않는 칼이나 잘 끊어지는 실 등은 그 칼을 만든 사람A와 그 실을 만든 사람 B를 자꾸 생각나게 만든다. 우수한 생산물에는 [그것의 유용한 속성들을 그 물건에 갖추어 준] 과거의 노동은 사라져 버렸다.
    노동과정에서 사용되지 않는 기계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뿐 아니라 그 기계는 자연과정의 파괴력에 의해 침식된다. 쇠는 녹슬고 목재는 썩는다. 직포에도 편직에도 사용되지 않는 면사는 낭비된 솜이다. 살아 있는 노동은 이 물건들을 가져다가 죽은 상태로부터 소생시켜 단순히 가능성이 있는 사용가치로부터 현실적으로 유용한 사용가치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물건들은 노동(勞動)의 불길 속에 끌려들어가 노동유기체의 일부로 사용되고, 노동과정에서 그것들의 개념과 사명에 합치하는 기능(機能)을 수행하게끔 활기가 부여된다. 이리하여 이 물건들은 [생활수단으로 개인적 소비에 들어갈 수 있거나 생산수단으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사용가치,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서 합목적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 완성된 생산물이 노동과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존재조건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물이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것[즉, 생산물이 살아 있는 노동과 접촉하는 것]은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이용하고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은 그 소재적 요소인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하며 그것들을 다 써버린다. 따라서 노동은 소비과정(消費過程)이다. 이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mption)가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와 구별되는 점은, 개인적 소비에서는 생산물이 살아 있는 개인의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생산적 소비에서는 그것이 노동[즉, 살아 있는 개인의 노동력을 발휘하는 활동]의 생활수단으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소비가 만들어 내는 것은 소비자(消費者) 자신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와는 구별되는 생산물(生産物)이다.
    노동수단과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인 한, 노동은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생산물을 소비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 종류의 생산물을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위한] 생산수단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 생산물을 소비한다. 그러나 노동과정이 최초에는 인간과 [인간의 협력 없이 존재하는] 토지 사이에서 행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역시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수단[즉, 자연의 소재에 인간노동이 결합되지 않은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주석 10: 매우 놀라운 통찰력을 {잘못} 발휘해 토렌즈(Torrens)는 미개인의 돌에서 자본의 기원(起源)을 발견하고 있다 "미개인이 자기가 추격하는 야수를 향해 던지는 최초의 돌덩이에서, 그리고 그가 손이 닿지 않는 과일을 따기 위해 손에 잡았던 최초의 막대기(stick)에서 우리는 어떤 물품을 추가로 손에 넣으려고 다른 물품을 취득하는 것을 보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기원을 발견한다"(토렌즈, ?부의 생산에 관한 논문? pp. 70-71). 영어에서 stock이라는 단어가 자본(capital)이라는 단어와 동의어(同義語)인 이유를 토렌즈는 아마 앞에서 말한 최초의 막대기(stick)로부터 설명했을지도 모른다.)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이제 우리의 장래의 자본가(資本家)에게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그와 작별한 것은 그가 상품시장에서 노동과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 즉 객체적 요소인 생산수단(生産手段)과 인적 요소인 노동력(勞動力)을 구매한 뒤부터다. 그는 전문가다운 빈틈없는 안목으로 방적업 . 제화업 등과 같은 그의
    전문적 사업에 적합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골랐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본가는 그가 구매한 상품인 노동력의 소비에 착수한다. 다시 발해, 그는 노동력의 담지자인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게 한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장화를 만들거나 실을 뽑는 특정한 방식도 자본가가 개입했다고 해서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우선 그가 시장에서 발견하는 그대로의 노동력(勞動力)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자본가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종류의] 노동(勞動)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기는 생산방식(生産方式) 그 자체의 변화는 나중에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중에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는, 두 가지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자본가는 노동이 질서정연하게 수행되고 생산수단이 합목적적으로 사용되도록, 그리하여 원료가 낭비되지 않고 노동도구가 소중하게 취급되도록, 다시 말해 작업중의 사용에 의해 불가피한 정도로만 마멸되도륵 감시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 자본가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한다고 가정하면, 노동력을 하루 동안 사용할 권리는, 예컨대 그가 하루 동안 임차(賃借)한 말의 사용권리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에게 속한다. 상품의 사용은 상품의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노동력의 소유자,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가 판매한 사용가치(使用價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자존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의 노동력의 사용가치, 다시 말해 그것의 사용[즉, 노동]은 자본가의 것으로 된다. 자본가는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노동 그 자체를 살아 있는 효모(酵母)로서 [역시 그의 것인)]죽어 있는 생산물 형성요소(形成要素)와 결합시킨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동과정은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수단을 첨가함으로써만 노동력을 소비할 수 있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과 물건 사이의, 즉 그에게 속하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생산물은, 마치 그의 포도주 창고 속에 있는 발효과정의 생산물이 그의 것인 것과 똑같이, 그의 것이다.(주석 11: "생산물은 자본(資本)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자기의 것으로 되며, 자본으로 전환되더라도 생산물은 여전히 자기의 것으로 된다"(세르뷸리에, ?부와 빈곤“, 파리, 1841년, p. 54).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노동을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에 판매함으로써 생산물에 대한 일체의 요구를 완전히 포기한다. 생산물은 여전히 이전과 같이 자본가의 것으로 되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계약에 의해서는 조금도 변경되지 않는다. 생산물은 원료와 생활수단을 공급한 자본가에게 전적으로 귀속된다. 이것은 취득법칙(取得法則)의 엄밀한 귀결이지만, 이 법칙의 근본원리는 이와는 반대로 노동자는 자기가 생산한 것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가지고 없다는 것이다"(같은 책, p. 58). "노동자가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경우....자본가는 자본"(여기서는 생산수단이라는 의미)”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노동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임금으로 지불되는 것을 관습에 따라 자본의 개념에 포함시킨다면, 노동을 자본으로부터 분리시켜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이라는 단어는 자본과 노동 모두를 포함한다"(제임스 밀[James Mill]), ?정치경제학원리“, 런던, 1821년, pp. 70-71).)



    제 2 절 가치증식괴정(valorization process)



    자본가에 의해 취득된 생산물은 실 . 장화 등과 같은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 그러나 장화가 어
    느 정도 사회적 진보(進步: progress)의 토대로 되고 우리의 자본가가 분명히 진보를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장화 그 자체를 위해 장화를 제조하는 것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는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우리의 자본가의 목적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 즉 판매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물품인 상품(商品)을 생산하려고 한다. 둘째, 그는 생산에 사용한 상품들의 가치총액[즉, 그가 상품시장에서 자기의 귀중한 화폐를 투하해 획득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총액]보다 그 가치가 더 큰 상품을 생산하려고 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상품생산이 문제로 되고 있으므로, 이때까지 우리가 고찰해온 것{즉, 노동과정}은 분명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생산과정을 가치형성과정으로 고찰해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각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량에 의해, 즉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결과로 자본가가 손에 넣은 생산물(生産物)에도 해당한다. 예컨대 그 생산물이 면사라 하고, 이 생산물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을 계산해 보자.
    면사의 생산에는 우선 원료[예컨대 10파운드의 면화]가 필요하다. 이 면화의 가치가 얼마인가를 여기서 새삼스럽게 따져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시장에서 그것을 그 가치대로, 예컨대 10원에 구매했기 때문이다. 면화의 가격에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이미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면화의 가공 중에 소모된 방추량이 [다른 모든 사용된 노동수단을 대표한다고 가정하고] 2원의 가치를 가진다고 하자. 만약 12원으로 표현되는 금량을 생산하는 데 24노동시간[즉, 2노동일1이 걸린다면, 이 면사에는 우선 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는 셈이 된다{면화소비량 10원과 방추소모량 2원}
    우리는 면화가 그 형태를 바꾸었으며 소모된 방추가 아무 흔적없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정 때문에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일반적 가치법칙에 따라, 40파운드의 면사의 가치=40파운드의 면화의 가치+한 개의 방추의 가치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 등식의 양변을 생산하는 데 동일한 노동시간이 필요하다면, 10파운드의 면사는 10파운드의 면화와 1/4개의 방추의 등가물(等價物)이다. 이 경우 동일한 노동시간이 한편에서는 면사라는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면화와 방추라는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가치가 면사, 방추, 또는 면화 어느 것으로 나타나는가는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방추와 면화가 조용히 나란히 놓여 있지 않고 방적과정에서 결합되고 이 결합(結슴)에 의해 그것들의 형태가 변화해 면사로 전환(轉換)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가치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것은 마치 이 물건들이 단순한 교환을 통해 면사라는 등가물로 바뀌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면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이고, 따라서 그것은 면사에 포함된다. [면화로부…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1292
  • 자본론8
    구매하고 상품으로 화폐를 구매한다는 단일운동을 가리킨다. (주석 2: "화폐로 상품을 구매하고 상품으로 화폐를 구매한다"(메르시에 드 라 리비에르, ?정치사회의 자연적 . 본질적 질서?, p. 543).) 이 전체 과정이 끝난 다음에 남는 결과는 화폐와 화폐의 교환, 즉 M-M이다. 만약 내가 100원으로 2,000파운드의 면화를 구매하고 이 2,000파운드의 면화를 다시 110원에 판매한다면, 결국 나는 100원을 110원과, 즉 화폐를 화폐와 교환한 셈이다.
    그런데, 만약 위와 같은 우회적인 경로를 거쳐 어떤 화폐가치를 그것과 동일한 화폐가치와 교환하려고 한다면, 예컨대 100원을 100원과 교환하려고 한다면, 유통과정 M-C-M은 아무런 의미도 내용도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가진 100원을 유통의 위험에 내
    놓지 않고 꽉 움켜쥐고 있는 화폐퇴장자의 방법이 훨씬 더 간단하고 안전할 것이다. 다른 한편, 상인이 100원에 구매한 면화를 다시 110원에 판매하건, 또는 그것을 100원에,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50원에라도 투매(投賣)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건, 그 어떤 경우에도 그의 화폐는 하나의 독특하고 특이한 운동경로를 밟게 된다. 그 운동경로는 단순한 상품유통의 경로[예컨데, 곡물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받은 화폐로 옷을 구매하는 농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운동경로]와는 전혀 그 종류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순환 M C- M과 C-M-C의 형태상 차이의 특징을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이들 형태상 차이의 배후에 숨어 있는 내용상의 차이도 밝혀질 것이다.
    우선 두 형태에 공통적인 것을 보도록 하자.
    이 두 순환은 모두 동일한 두 개의 대립적 국면, C-M(판매)과 M-C(구매)로 나누어진다. 이 두 국면의 어느 것에서나 상품과 화폐라는 동일한 두 개의 물적 요소가 서로 대립하며, 또한 구매자와 판매자라는 동일한 경제적 등장인물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이 두 순환은 어느 것이나 모두 동일한 대립적인 두 국면의 통일이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도, 이 통일은 세 사람의 계약당사자가 등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중의 한 사람은 판매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구매만 하며, 세번째 사람은 구매와 판매를 모두 한다.
    그러나 이 두 순환 C-M-C와 M-C-M을 처음부터 구별하는 것은, 두 개의 대립적 유통국면의 순서가 서로 한대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단순상품유통은 판매로 시작해서 구매로 끝나며,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유통은 구매로 시작해서 판매로 끝난다. 전자에서는 상품이, 후자에서는 화폐가 운동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이룬다. 첫째 형태에서는 화폐가, 둘째 형태에서는 반대로 상품이 전체 과정을 매개한다.
    유통 C-M-C에서는, 화폐는 끝에 가서 상품으로 전환하고, 이 상품은 사용가치로 소비(消費)된다. 따라서 화폐는 영원히 써버린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반대의 유통형태인 M-C-M에서는, 구매자가 화폐를 지출하는 것은 판매자로서 화폐를 취득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상품을 구매할 때 화폐를 유통에 투입하지만, 그것은 [구매한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화폐를 다시 유통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그가 화폐를 손에서 내어놓는 것은 다시 그것을 손에 넣으려는 저의(底意: cunning intention)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소비된 것이 아니라 투하(投下)된 것에 불과하다. (주석 3: "어떤 물건을 다시 판매하기 위해 구매하는 경우 ,거기에 사용된 금액은 투하(投下)된 화폐라고 부른다. 그 물건을 다시 판매하기 위해 구매하지 않는 경우, 그 금액은 소비(消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스튜어트[James Steuart], ?저작집?, 그의 아들 Sir James Steuart 장군편, 런던, 1805년, 제1권, p.274)
    유통형태 C-M-C에서는, 동일한 화폐조각이 그 위치를 두 번 바꾼다. 판매자는 화폐를 구매자로부터 받아 그것을 다른 판매자에게 지불한다. 상품과의 교환으로 화폐를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총과정은 상품과의 교환으로 화폐를 넘겨주는 것으로 끝난다. 유통형태 M- C-M에서는 그 반대다. 여기에서는, 그 위치를 두 번 바꾸는 것은 동일한 화폐조각이 아니라 동일한 상품이다. 구매자는 상품을 판매자의 손으로부터 받아 그것을 다른 구매자의 손으로 넘겨준다. 단순상품유통에서는 동일한 화폐의 두 번의 위치변환이 그 화폐를 한 사람의 손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손으로 최종적으로 넘어가게 하지만, 여기에서는 동일한 상품의 두 번의 위치변환이 화폐를 그 최초의 출발점으로 환류(還流: flow back)시킨다.
    그 출발점으로 화폐가 환류하는 것은 상품이 [그것의 구매시에 지불한 값보다] 비싸게 판매되는가 안 되는가와는 관계가 없다. 이러한 사정은 오직 환류되는 화폐액의 크기에만 영향을 미칠 따름이다. 환류 현상 그 자체는, 구매한 상품이 다시 판매되기만 한다면, 즉 순환 MC-M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이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유통과 단순한 화폐로서의 화폐의 유통 사이의 쉽게 알 수 있는 차이점이다.
    어떤 상품의 판매에 의해 화폐가 들어오고 그 화폐가 다른 상품의 구매에 의해 다시 나가버린다면, 순환 C-M-C는 완전히 끝난다. 만약 화폐가 그 출발점으로 환류한다면, 그것은 오직 전체 과정의 갱신 또는 반복 때문에 일어날 뿐이다. 만약 내가 1쿼터의 밀을 3원에 판매하고 이 3원으로 의복을 구매한다면, 나에게는 이 3원이 결정적으로 지출된 것이다. 나는 이미 이 3원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의복 상인의 것이다. 이제 내가 두번째로 1쿼터의 밀을 판매한다면 화폐는 나에게 환류하겠지만, 그것은 첫번째 거래의 결과가 아니고 그와 같은 거래가 반복된 결과일 따름이다. 내가 새로운 구매에 의해 두 번째의 거래를 완성시키자마자 그 화폐는 다시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따라서 유통 C-M-C에서는 화폐의 지출은 그 환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M-C-M에서는, 화폐의 환류는 화폐가 지출되는 방식 그 자체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환류가 없다면 그 활동은 실패하거나, 아니면 그 과정이 중단되어 미완성이다. 왜냐하면, 보완적이고 최종의 국면인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 C-M-C는 어떤 한 상품의 극에서 출발해 다른 한 상품의 극에서 끝나는데, 이 상품은 유통에서 빠져나와 소비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소비[욕망의 충족], 한 마더로 말해 사용가치(使用價値)가 이 순환의 최종목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순환 M-C-M은 화폐의 극에서 출발하여 최후에는 동일한 화폐의 극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이 순환을 야기시키는 동기 및 그것을 규정하는 목적은 교환가치(交換價値) 그 자체이다.
    단순상품유통에서는 양쪽의 극이 동일한 경제적 형태를 가진다. 양쪽 모두 다 상품이다. 그것들은 또한 동일한 가치량의 상품이지만, 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용가치, 예컨대 밀과 의복이다. 여기에서 운동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생산물교환, 즉 사회적 노동이 대상화되어 있는 상이한 물질 사이의 교환이다. M-C-M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유통은 동어반복적이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아무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두 극은 동일한 경제적 형태를 가지지만 화폐이기 때문에, 질적
    으로 다른 사용가치가 아니다. 왜냐하면, 화폐는 바로 상품들의 전환된 모습이며, 상품들의 특수한 사용가치가 소멸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처음 100원을 면화와 교환하고, 그 다음 이 면화를 다시 100원과 교환하는 것, 다시 말해 우회적인 경로를 짧아 화폐를 화폐와, 동일한 것을 동일한 것과 교환하는 것은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주석 4: "화폐를 화폐와 교환하는 일은 없다"라고 메르시에 드 라 리비에르는 중상주의자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위의 책, p. 486). '상업'이나 '투기'를 특히 다루고 있다는 한 저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모든 상업은 종류가 서로 다른 물건들의 교환이다. 그리고 이익"(상인을 위한?)"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차이에서 생긴다. 1파운드의 빵을 1파운드의 빵과 교환하면....전혀 아무런 이익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여기에 상업과 [화페를 화폐와 단순히 교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도박과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토마스 코베트[T. Corbet], ?개인의 부의 원인과 형태에 관한 연구” 런던, 1841년, p. 5). 코베트는 비록 M-M, 즉 화폐를 화폐와 교환하는 것이 상업자본뿐 아니라 모든 자본의 특징적인 유통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나, 적어도 이 형태가 도박과[상업의 일종인] 투기에 공통적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 매컬록이 나타나 판매를 위한 구매는 투기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투기와 상업과의 구별 은 없어지게 된다. "개인이 생산물을 다시 판매하기 위해 구매하는 거래는 모두 사실상 투기다 "(매컬록[MacCulloch], ?상업 . 상업항해의 실무 . 이론 . 역사사전?, 런던, 1847년, p. 109). 이보다 훨씬 소박하게,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의 핀다로스{그리스의 서정시인}인 핀토(Pinto)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업은 도박이고'(이 한 구절은 J. 로크로부터 빌어온 것이다) "거지로부터는 아무 것도 딸 수 없다. 만약 어떤 바람이 오랫동안 모든 사람으로부터 몽땅 돈을 다 땄다면, 그가 다시 도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딴 돈의 대부분을 자발적으로 다시 돌려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핀토, ?유통 신용론?, 암스테르담, 1771년, p. 231).) 어떤 화폐액을 다른 화폐액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금액의 차이다. 그러므로 과정 M-C-M은, 그 양극이 모두 화폐이기 때문에, 양극의 질적인 차이에 의해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고 오직 양극의 양적인 차이에 의해서만 내용을 가진다. 다시 말해, 최초에 유통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화폐가 유통으로부터 끌려나와야 한다. 예를 들면, 100원에 구매한 면화가 100+10원, 즉 110원에 다시 판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다. 여기서 M'=M+AM이다. 다시 말해, M'은 최초에 투하한 화폐액에 어떤 증가분(增價分)을 더한 것과 같다. 이 증가분, 즉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나는 잉여가치(剩餘價値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최초에 투하한 가치는 유통중에서 자신을 보존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치량을 증대시키고 잉여가치를 첨가한다. 바꾸어 말해, 자기의 가치를 증식(增殖)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운동이 이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물론 C-M-C에서 양극인 C와 C[예컨대 밀과 의복]가 양적으로 다른 가치량일 수도 있을 것이다. 농민은 자기의 밀을 가치보다 비싸게 판매할 수 있으며 의복을 가치보다 싸게 구매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는 의복상인에게 속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치의 차이는 이 유통형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것이다. 이 유통형태는, M-C-M과는 달리, 그 양극(예컨대 밀과 의복)이 등가물로 되어 있더라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양극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것은 여기에서는 오히려 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구매를 위한 판매(販賣)의 반복 또는 갱신은 [이 과정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이 과정 밖에 있는 최종적 목적으로서의 소비[즉, 특정한 욕망의 충족]에서 그 한도와 목표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판매를 위한 구매(購買)에서는 시작과 끝이 동일한 것[즉, 화폐 또는 교환가치]이므로, 이 운동은 무한한 것으로 된다. 확실히, M은 M+AM으로 되며 100원은 100+10원으로 된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110원은 100원과 동일한 것, 즉 화페다. 또 양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110원은 100원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한정된 가치액이다. 만약 이 110원이 화폐로 지출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자기의 역할을 포기해 버린 것으로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다. 또 만약 그것이 유통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그것은 퇴장화폐로 화석화되며 세상 최후의 날까지 그대로 보존되더라도 단 한 푼도 더 늘어나지 않는다. 가치의 증식(valorization)이 문제로 되는 한, 증식의 욕구는 110원의 경우에도 100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재한다. 왜냐하면, 양쪽은 모두 교환가치의 한정된 표현이고, 따라서 양쪽 모두 양적 증대에 의해 절대적 부(富)로 접근해 가야 할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에 투하한 가치 100원은[유통 중에 거기에 첨가된] 10원의 잉여가치와 잠시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별은 곧 사라져 버린다. 과정이 끝날 때, 한 쪽에는 100원의 원래의 가치가 나오고, 다를 쪽에는 10원의 잉여가치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오는 것은 110원이라는 하나의 가치며, 그것은 최초의 100원과 꼭 마찬가지로, 가치증식과정을 다시 개시하기에 적합한 형태에 있다. 운동의 종착점에서 화폐는 또다시 운동의 출발점으로 나타난다. (주석 5: "자본(資本)은....원래의 자본과 [자본의 증가분인] 이윤(利潤)으로 나누어진다....비록 실제로는 이 이윤은 곧바로 자본에 합쳐져 자본과 함께 운동하기 시작하지만"(F . 엥겔스,?국민경제학 비판 개요?, ?독불연보?, 루게[Arnold Ruge]와 마르크스 공편, 파리 1844년, p. 99).) 그러므로 (구매와 그 뒤의 판매가 완성되는) 각 순환의 최종결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순환의 출발점을 이룬다. 단순상품유통[구매를 위한 판매]은 유통의 외부에 있는 최종목적[사용가치의 취득, 욕망의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의 내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주석 6: 아리스토텔레스는 화식술(貨殖術)과 가정학(家政學: economics)을 대비하고 있다. 그는 가정학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생계술(生計術)인 한, 그것은 [생활에 필요하고 가정이나 국가에 유용한] 재화의 조달에 한정된다. "진정한 부는 이와 같은 사용가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왜냐하면, 쾌적한 생활에 필요한 재산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재화를 조달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보통 화식술이라고 부르는 제2의 종류가 있는데, 이 경우 부나 재산에는 한계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상품거래"(소매상업을 가리키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형태를 채용한 이유는 여기에서는 사용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는 원래 화식술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품거래에서 교환은 그들 자신(구매자와 판매자)에게 필요한 물건에 관해서만 행 해지기 때문이다. "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품거래의 최초의 형태는 물물교환(物物交換)이었지만, 이것이 확대됨에 따라 화폐에 대한 필요성이 발생했다. 화폐의 발명과 더불어 물물교환은 필연적으로 상품거래(商品去來)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리고 상품거래는 [그 본래의 경향과는 모순되는] 화식술(貨殖術)로, 즉 화폐를 증가시 키는 기술로 성장해 갔다. 이제 화식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가정학과 구별된다. "화식술에 서는 유통이 부의 원천이다. 그리고 화식술은 화폐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다. 왜냐하면 화폐가 이러한 종류의 교환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식술이 추구하는 부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을 추구할 뿐인 기술은 목적 자체가 수단에 한계를 설정하므로 무한히 전개될 수 없지만, [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 적 그 자체를 추구하는 기술은 모두 그 목적에 끊임없이 접근하려고 시도하므로, 그 추구에 는 한계가 없다. 기와 마찬가지로 화식술에도 그 목표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것이 목표로 하 는 것은 절대적 치부(致富)이다. 가정학은 화식술과는 달리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다....가정 학은 화폐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화식술은 화폐의 증식을 목적으로 한 다....[서로 겹쳐지는 면을 가진] 이 두 형태를 혼동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은 무한히 화폐를 보 유하고 증식시키는 것이 가정학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 ?정 치학“, 베커[Bekker] 편, 제1권, 제8, 9장의 이곳저곳).)
    이 운동의 의식적 담지자(conscious bearer)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資本家)로 된다 그의 일신(一身)[또는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주머니]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이러한 유통의 객관적 내용[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이 되고 추상적 부(富)를 점점 더 많이 취득하는 것이 그의 행동의 유일한 추진적 동기로 되는 한, 그는 자본가로 [즉, 의지와 의식이 부여된 인격화된 자본으로]기능한다. 그러므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주석 7: "상품"(여기에서는 사용가치라는 의미다)"은 거래를 행하는 자본가의 최종목적이 아니다. 화폐 가 그의 최종목적이다"(토마스 차머즈[T. Chalmers), ?정치경제학에 대해", 제2판, 글래스고우, 1832년, pp. 165-166).), 또한 어떤 하나의 거래에서의 이윤도 그렇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는 이윤추구운동만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다.(주석 8: "상인은 이미 획득한 이윤을 경시하지는 않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장래의 이윤으로 향하고 있다"(제노베시[A. Genovesi], ?시민경제학강의?, 1765년, 쿠스토디 편, ?이탈리아 경제학자?, 근세편, 제8권, p. 139).) 이 무한한 치부(致富)의 충동, 이 정열적인 가치추구(주석 9: "이윤을 추구하는 억누를 수 없는 정열, 금에 대한 거룩한 갈망이 항상 자본가들의 행동을 규정한다"(매컬록, ?정치경제학원리?, 런던, 1830년, p. 179). 물론 이와 같은 견해는 매컬록 자신이나 그의 일파가 이론적 난관에 빠졌을 때, 예컨대 과잉생산[의 불가능성]을 논할 때, 동일한 자본가를 하나의 선량한 시민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이 자본가들은 오직 사용가치만을 문제로 삼으며, 장화 .모자. 달걀 . 면화 그리고 기타의 평범한 종류의 사용가치에 대해서까지도 완전히 이리와 같은 탐욕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용 가치가 과잉생산될 수가 없다.})는 자본가와 수전노(守錢奴: miser)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수전노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자본가는 합리적인 수전노이다. 수전노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냄으로써(주석 10: "끌어낸다"는 말은 화폐퇴장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특유의 표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어의 "to save"도 '끌어낸다'는 의미와 '저축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치의 쉴새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더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한다.(주석 11: "물건들은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가지지 못하는] 무한성을 순환할 때에는 가진다"(갈리아니[F. Galiani], ?화폐에 대해?, p. 156).)
    단순상품유통에서 상품들의 가치가 취하는 독립적인 형태[즉, 화폐형태]는 상품교환을 매개할 뿐이고 운동의 최후의 결말에 가서는 사라져 버린다. 이와는 반대로, 유통 M-C-M에서는 상품과 화폐는 모두 가치 그 자체의 상이한 존재양식으로, 즉 화폐는 가치의 일반적 존재양식으로 그리고 상품은 가치의 특수한 [이를테면 가장(假裝:disguised)된] 존재양식으로 기능할 뿐이다.(주석 12: "자본을 구성하는 것은 소재(素材)가 아니라 그 소재의 가치이다"(세이[J. B. Say], ?정치경제 학개론?, 제3판, 파리, 1817년, 제2권, p. 429).) 가치는 이 운동에서 없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행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자동적인 주체로 전환한다. 만약 자기증식하는 가치(self-valorizing value)가 자기의 생애에서 연달아 취하는 독특한 현상형태들을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자본은 화폐이고 자본은 상품이다.(주석 13: "물건의 생산에 사용되는 통화(!)는.....자본이다"(매클라우드[Macleod], ?은행업의 이론과 실제?, 런던, 1855년, 제1권, 제1장, p. 55). "자본은 상품이다"(제임스 밀[James Mill], ?정치경제학원리?, 런던, 1821년, p. 74)) 그러나 사실상 가치는 이 경우 한 과정의 주체이며, 이 과정에서 가치는 끊임없이 번갈아 화폐와 상품의 형태를 취하면서 그 크기 자체를 변화시키며, 원래의 가치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내뽑으면서 자기 자신을 증식시킨다. 왜냐하면,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고, 따라서 가치의 증식은 자기증식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 자체가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스러운 성질을 얻었다. 가치는 살아 있는 자식을 낳거나 적어도 황금의 알을 남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가치는 화폐형태와 상품형태를 취하고 벗어버리기를 번갈아 하며, 동시에 이러한 변환을 통해 자기를 유지하고 증대시키는데, 이러한 과정을 지배하는 주체로서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정체를 맞힐 수 있는 하나의 독립적인 형태를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형태를 가치는 오직 화폐의 모습으로 가진다. 그러므로 화폐는 가치증식 과정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이룬다. 그것은 전에는 100원이었으나 지금은 110원이다. 등등. 그러나 화폐 그 자체는 가치의 두 형태 중 하나일 따름이다.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화폐는 자본으로 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화폐퇴장의 경우와 같은 화폐와 상품 사이의 적대는 없다. 모든 상품은 [그것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이며 아무리 흉악한 냄새를 풍기더라도] 진실로 화폐이며, 날 때부터 할례를 받은 유태
    인이며, 더욱이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드는 기적의 수단이라는 것을 자본가는 알고 있다.
    단순상품유통 C-M-C에서 상품의 가치는 기껏해야 그 사용가치와는 무관한 화폐형태를 취할 뿐이지만, M-C-M{자본의 유통}에서는 가치가 스스로 발전하며 스스로 운동하는 하나의 실체로 갑자기 나타난다. 상품과 화폐는 모두 그 실체에 대해 단순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치는 미제 상품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자기 자신과 사적인 관계를 맺는다. 가치는 최초의 가치로서의 자기 자신을 잉여가치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별한다.[이것은 성부(聖父)가 자기 자신을 성자(聖子)로서의 자기 자신과 구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부자(父子)는 둘 다 나이가 같고 또 실제로는 둘이 한 몸이지만]. 왜냐하면 10원이라는 잉여가치에 의해 비로소 최초에 투하한 100원은 자본으로 되며. 또 그것이 자본으로 되자마자[즉, 아들이 생기고 아들에 의해 아버지가 생기자마자] 둘의 구별은 다시 소멸해버리고 둘은 하나, 즉 110원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가치는 이제 과정 중의 가치(value in process), 과정 중의 화폐로 되며, 이러한 것으로서 가치는 자본이 된다. 가치는 유통에서 나와 다시 유통에 들어가며, 유통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증식시키며, 더 커져서 유통으로부터 나오고, 그리고 이 동일한 순환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1(주석 14: "자본은....자기를 증대시키는 영구적인 가치"(시스몽디[Sismondi], ?신경제학원리", 파리, 1819년, 제1권, p. 89).) M-M', 즉 '화폐를 낳는 화폐', 이것이 자본의 최초의 해설자인 중상주의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자본의 묘사이다.
    판매하기 위한 구매, 또는 [더 정확히 말해] 더 비싼 값으로 판매하기 위한 구매, 즉 M-C-M'은 자본의 한 종류인 상인자본에만 해당하는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업자본(産業資本)도 역시 [상품으로 전환되었다가 상품의 판매에 의해 더 많은 화폐로 재전환되는] 그러한 화폐이다. {M-C(MP, LP) ....P...C'-M'}. 구매와 판매 사이의 중간에 [즉, 유통분야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 운동형태를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자 낳는 자본(interest-bearing
    capital)의 경우 유통 M-C-M'은 단축되어 나타난다. 중간단계 없이 그 최종결과를 M-M'[즉, 화폐가 더 많은 화폐로 되며, 가치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가치로 된다]로 간결하게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실상 M- C- M'은 [유통분야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형태의] 자본의 일반공식이다.



    제 5 장
    자본의 일반공식의 모순



    앞의 유통형태[그 안에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한다]는 상품 . 가치 . 화폐 . 유통 그 자체의 성질에 관해 앞에서 전개한 모든 법칙들과 모순된다. 이 유통형태가 단순상품유통과 구별되는 점은 두 대립 과정인 판매와 구매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과정들의 순전히 형태적인 차이가 이 과정의 성질을 마치 요술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이 전도(轉到)된 순서는 서로 매매관계를 맺고 있는 3인의 매매당사자 중 오직 한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만약 내가 자본가라면 나는 상품을 A에게서 구매하고 다음에 그것을 B에게 판매하지만, 만약 내가 단순한 상품소유자라면 나는 상품을 B에게 판매하고 다음에 다른 상품을 A로부터 구매한다. 위의 두 경우 매매당사자 A와 B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그들은 구매자 또는 판매자로 등장할 뿐이다. 나 자신도 그들에게는 각각 단순한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로, 즉 구매자 또는 판매자로 대면한다. 더욱이 나는 A에게는 구매자로 B에게는 판매자로, 즉 전자에게는 화폐로 후자에게는 상품으로 대면할 뿐이고, 결코 양쪽 중의 어느 쪽에게도 자본 또는 자본가로 대면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화폐나 상품 이상의 그 어떤 물건의 대표자로, 또는 화폐나 상품의 영향력 이외의 어떤 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의 대표자로 대면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A로부터의 구매와 B에게의 판매가 하나의 순차적 계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행위 사이의 관련은 나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A는 나와 B와의 거래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며, 또 B는 나와 A와의 거래에 아무 관심도 없다. 만약 내가 그들에게 매매의 순서를 거꾸로 한 내 행위의 장점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나에게 내가 순서 자체를 틀리게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래 전체는 구매에서 시작해 판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판매에서 시작해 구매로 끝난 것임을 나에게 지적해 줄 것이다. 사실, 나의 제1행위인 구매는 A의 입장에서는 판매였고, 나의 제2의 행위인 판매는 B의 입장에서는 구매였다. A와 B는 더 나아가, 이 계열 전체는 불필요한 것이고 하나의 속임수였으며, 앞으로는 A는 그 상품을 직접 B에게 판매할 것이며, B는 그것을 직접 A로부터 구매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래 전체는 보통의 상품유통의 하나의 [일면적인] 국면으로 축소되어 A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판매로, B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구매로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서를 거꾸로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단순상품유통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순상품유통이 [거기에 들어가는] 가치의 증식[따라서 잉여가치의 형성]을 그 성질상 허용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
    유통과정을 단순한 직접적인 상품교환의 형태에서 고찰하자. 두 상품소유자가 서로 상대방의 상품을 구매하고 그들 상호간의 화폐 청구권(請求權)의 차액을 그날에 결제하는 경우가 바로 이 형태이다. 이 경우 화폐는 계산화폐(計算貨幣)로 상품의 가치를 그 가격으로 표현하며, 화폐상품의 형태로 상품에 대립하지는 않는다. 사용가치에 관한 한, 분명히 교환 당사자는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양쪽은 모두 그들 자신에게 사용가치로서는 쓸모없는 상품을 양도하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이익은 아닐 것이다. 포도주를 판매하고 곡물을 구매하는 A는, 아마 [곡물경작자 B가 동일한 노동시간 안에 생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포도주를 생산할 것이며, 또 곡물경작자 B는 [포도재배자 A가 동일한 노동시간 안에 생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곡물을 생산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각자가 포도주와 곡물을 모두 스스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 비하면, 동일한 교환가치로 A는 더 많은 곡물을, B는 더 많은 포도주를 얻게 된다. 따라서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거래다"(주석 1: "교환은 쌍방 모두가 언제나(!) 이득을 보는 훌륭한 거래다"(데스튜트 드 트라시[Destute de Tracy], ?의지 및 의지작용론?, 파리, 1826년, p. 68).) 이 책은 그 뒤 ?정치경제학개론?이라 는 표제로도 출판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환가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포도주는 많이 가지고 있지만 곡물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곡물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포도주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어떤 사람과 거래를 해서, 그들 사이에 50의 가치를 가지는 밀이 50의 가치를 가지는 포도주와 교환된다고 하자. 이 교환은 전자에게나 후자에게나 교환가치를 증대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교환 이진에도 그들 각자는 [이 거래를 통해 얻은 것과] 동일한 가치를 벌써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 2: 메르시에 드 라 라비에르, ?정치사회의 자연적 및 본질적 질서?, p. 544.)

    화폐가 유통수단으로 상품과 상품 사이에 개입함으로써 구매행위와 판매행위가 구별된다고 하더라도 사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주석 3: "이 두 가치 중 하나가 화폐이든, 그 둘이 모두 보통의 상품이든, 그 자체로서는 전혀 아무런 차이도 없다"(같은 책, p. 543).) 상품의 가치는 상품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에 그 가격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유통의 전제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 (주석 4: "계약당사자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는 계약체결 전에 벌써 확정되어 있다"(르 트로느[Le Trosne), ?사회적 이익에 대해?, p. 906).)
    추상적으로 고찰한다면 [즉, 단순상품유통의 내재적 법칙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사정들을 도외시한다면], 교환에서 일어나는 것은 (한 사용가치의 다른 사용가치에 의한 대체를 무시하면) 상품의 변태, 즉 상품의 단순한 형태변화뿐이다. 동일한 가치[즉, 동일한 양의 대상화된 사회적 노동]가 동일한 상품소유자의 수중에서 처음에는 상품의 모습으로 다음에는 [이 상품이 전환된] 화폐의 모습으로, 마지막에는 [이 화폐가 재전환된] 상품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변화는 가치량의 어떤 변화도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과정에서 상품의 가치가 경험하는 변화는 가치의 화폐형태상의 변화에 국한된다. 즉, 처음에는 이 화폐형태는 판매에 제공된 상품의 가격으로 다음에는 이미 가격으로 표현되어 있던 화폐액으로, 최후에는 어떤 등가상품의 가격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변화가 그 자체로서는 가치량의 변화를 조금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은, 5파운드짜리 은행권을 소브린화{l파운드 짜리 금주화}나 반(半) 소브린화나 실링화로 바꾸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상품의 유통이 상품가치의 형태변환만을 일으키는 한, 그것은 [만약 현상이 순수한 형태로 진행된다면] 등가물(等價物: equivalent)끼리의 교환임에 틀림없다. [가치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속류경제학까지도 자기 식으로나마 현상을 순수한 형태에서 고찰
    하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는 것[다시 말해서, 수요와 공급의 영향은 없다는 길]을 가정한다. 그러므로 가령 사용가치에 관해서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교환가치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는 "평등(平等)이 있는 곳에는 이익(利益)이 없다"(주석 5: 갈리아니(F. Galiani), ?화폐에 대해?, 쿠스토디 편, 근세편, 제4권, p. 244) 고 말해야 할 것이다. 상품은 그 가치로부터 벗어난 가격으로 팔릴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차이는 상품교환법칙의 위반으로 나타난다.(주석 6: "어떤 외부 사정이 가격을 인상 또는 인하시킨다면, 교환은 두 당사자의 일방을 불리하게 한다. 그 경우에는 평등이 침해받지만, 그 침해는 외부 원인에 기인한 것이지 교환 자체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르 트로느, 앞의 책, p. 904).) 상품교환은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등가물끼리의 교환이고, 따라서 가치증식의 수단으로 될 수 없다.(주석 7: "교환은 그 성질상 평등에 의거한 계약이며, 두 개의 동일한 가치 사이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그것은 치부의 수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받는 것만큼 주기 때문이다"(같은 책, p. 903).)
    그러므로 상품유통을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의 배후에는 대체로 하나의 오해[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혼동]가 숨어있다. 예컨대 콩디약(Condillac)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품교환에서 동등한 가치가 동등한 가치와 교환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반대다. 두 계약 당사자는 어느 쪽이나 항상 더 큰 가치에 대해 더 작은 가치를 내어준다. 만약 사람들이 실제로 동등한 가치만을 서로 교환한다면 계약 당사자의 어느 쪽도 아무런 이익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 러나 쌍방은 모두 이익을 보고 있으며, 어떻게든 이익을 보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물건의 가치는 오직 우리들의 욕망과 그 물건 사이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덜 필요하며, 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우리가 자기 자신의 소비 에 불가결한 물건을 판매에 내놓는 일은 결코 없다....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쓸모없는 물건을 내놓으려 한다. 더 필요한 것과의 교환으로 덜 필요한 것을 주려고 한 다....교환되는 두 물건이 통일한 양의 금으로 표현될 때, 교환에서는 등등한 가치가 동등한 가치 와 교환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했다....그러나 또한 다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들 모두가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 여분의 물건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주석 8: 콩디약(Condillac), ?상업과 정부?(1776년), 데르[Daire]와 몰리나리[Molinari] 편, “경제학총 서”, 파리, 1847년, pp . 267, 291)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콩디약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혼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참으로 유치하게도] 상품생산이 발달한 사회에서 생산자가 자기의 생활수단을 자신이 생산하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남는 초과분(잉여분)만을 유통에 투입한다고 가정하고 있다.(주석 9: 그러므로 르 트로느는 자기의 벗 콩디약에게 “발달한 사회에서는 여분의 것이라고는 없다"라고 아주 옳바르게 답변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만약 쌍방의 교환당사자가 모두 똑같이 덜주고 똑같이 많이 받는다면 그들 쌍방은 모두 똑같이 받는 것으로 된다. "고 콩디약을 야유하고 있다. 콩디약이 교환가치의 성질에 관해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로셔{William Roscher)는 콩디약을 자기 자신의 유치한 개념을 논증하늘 네 가장 적당한 증인으로 삼았던 것이다. 로셔의 ?국민경제학원리?, 제3판, l858년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디약의 논의는 가끔 근대의 경제학자들에 의해서도 반복되고 있는데, [상품교환이 발전한 모습인] 상업(商業)을 잉여가치의 원천이라고 설명하는 경우 특히 그러하다. 예컨대 다음을 보라.

    "상업은....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생산물도 생산자의 수증에서보다는 소 비자의 수중에서 더 많은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업은 엄밀히 말해 생산행위로 간주 되어야 한다. "(주석 10: 뉴먼(S. P. Newman), ?정치경제학요강?, 앤도버 및 뉴욕, 1835년, p. 175.)

    그러나 사람들은 상품에 대해 이중으로 [즉, 한 번은 그 사용가치에 대해, 또 한 번은 그 가치에 대해] 지불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만약 상품의 사용가치가 판매자에게보다도 구매자에게 더 유용하다고 한다면, 상품의 화폐형태는 구매자에게보다도 판매자에게 더 유용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판매자가 상품을 판매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구매자는 예컨대 판매자의 양말을 화폐로 전환시켜 즘으로써 '엄밀히 말해 생산행위'를 수행하는 것
    이다라고.
    만약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들, 또는 상품과 화폐, 따라서 등가물(等價物)들이 서로 교환된다면, 분명히 누구도 자기가 유통에 투입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잉여가치의 형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품의 유통과정은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등가(물)끼리의 교환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태가 순수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서로 등가가 아닌 것끼리의 교환을 가정해 보자.
    어떤 경우에도 상품시장에서는 상품소유자와 상품소유자가 대면할 뿐이며, 그들이 서로서로에게 미치는 힘은 그들의 상품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상품의 소재적 차이는 교환의 실질적 동기(動機)로 되며, 상품소유자들로 하여금 상호의존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구도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물건을 소유하지 않고, 그들 각자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물건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상품들의 사용가치의 이러한 소재적 차이 외에는 여러 상품들 사이에 단 하나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즉, 상품들의 현물형태와 그 전환된 형태 사이의 구별, 다시 발해 상품과 화폐 사이의 구별뿐이다. 그리하여 상품소유자들은 오직 상품의 소유자인 판매자와 화폐의 소유자인 구매자로 서로 구별될 뿐이다.
    이제 판매자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특권에 의해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예컨대 100의 가치가 있는 것을 110으로, 즉 그 가격을 명목상 10% 높여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판매자는 10의 잉여가치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는 판매자로 된 다음 구매자로 된다. 이번에는 어떤 제3의 상품소유자가 판매자로 그의 앞에 나타나는데, 이 판매자도 역시 자기의 상품을 10%비싸게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그 사람은 판매자로서는 10의 이익을 얻었으나 구매자로서는 10을 잃어버리게 된다.(주석 11: "생산물의 명목가치의 인상에 의해서는....판매자는 부(富)를 증가시키지 못한다....왜냐하면 그가 판매자로서 얻는 것을 구매자로서 지출하기 때문이다"(그레이[F. Gray] ?국부의 주요원리?, 런던, 1797년, p. 60).) 모든 상품소유자는 자기의 상품을 그 가치보다 10% 비싸게 판매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들이 상품을 가치대로 판매한 것과 완전히 똑같다. 상품가격의 이와 같은 일반적인 명목적 인상(名目的 引上)은 상품가치가 예컨대 금 대신 은으로 평가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상품들의 화폐명칭, 즉 가격(價格)은 인상되겠지만 상품들의 가치관계(價値關係)는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구매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구매자가 다시 판매자로 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조차 없다. 그는 구매자로 되기 전에 이미 판매자였던 것이다. 그는 구매자로서 10%의 이익을 얻기 전에 벌써 판매자로서 10%를 잃어버렀던 것이다.(주석 12: "만약 어떤 판매자가 24원의 가치를 가진 일정한 양의 생산물을 10원에 판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판매에 의해 얻은 기 화폐를 구매에 사용하는 경우 이번에는 24원을 지불해야 할 물건을 18원에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르 트로느, 앞의 책, p.897).) 상황은 역시 이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의 형성, 따라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은 판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한다는 것으로써도, 또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다.(주석 13: 어떤 판매자가 자기의 상품을 언제나 비싼 값으로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도 언제나 다른 판매자의 상품에 비관 값을 지불하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어떤 소비자도 언제나 싼값으로 구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가 판매하는 상품도 마찰가지로 값 을 낮추는 것에 동의해야만 한다"(메르시에 드 라 리비에르, 앞의 책, p. 555).)
    토렌즈(Torrens)처럼 우리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관계들을 끌어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도 문제는 조금도 더 간단하게 되지 않는다.

    "유효수요(有效需要)란, 직접적 교환에 의해서건 간접적 교환에 의해서건, 상품의 대가로 그 상품의 생산비보다 더 많은 자본을 지불하는 소비자의 능력과 성향( ! )이다“.(주석 14: 토렌 즈(R. Torrens), “부(富)의 생산에 관한 논문” 런던, 1821년, p. 349.)

    유통의 내부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는 판매자와 구매자로 대립할 뿐이다. 생산자가 획득하는 잉여가치는 소비자가 상품에 대해 가치보다 높은 값을 지불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품소유자가 판매자로서 가치 이상의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단순한 명제를 분식(粉飾: disguise)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판매자가 그 상품을 자신이 직접 생산했거나 그 상품의 생산자를 대표하고 있듯이, 구매자 역시 [그의 화폐로 실현된] 상품을 자신이 직접 생산했거나 그 상품의 생산자를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은 생산자와 생산자인데, 그들을 구별하는 것은, 한 쪽은 구매하고 다른 쪽은 판매한다는 것이다. 상품소유자는, 생산자{판매자}라는 이름에서는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싼 값으로 판매하고, 소비자{구매자}라는 이름에서는 상품에 그 가치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한다고 말해 보았자 우리는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주석 15: “이윤이 소비자에게 의해 지불된다는 생각은 확실히 아주 불합리하다. 이 소비자란 누구인가?” (람지[G. Ramsy], "부의 분배에 관한 논문“, 에딘버러, 1836년, P. 183.)
    그러므로 잉여가치가 명목상의 가격인상으로부터 생긴다든가 [상품을 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판매자의 특권에서 발생한다고 하는 환상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판매하
    지 않고 구매만 하는, 따라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급의 존재는 우리가 이때까지 도달한 입장, 즉 단순상품유통의 입장에서는 아직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하자. 이와 같은 계급이 끊임없이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하는 화폐는 [교환없이, 무상으로, 어떤 권리 또는 강제에 근거해] 상품소유자들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이 계급에게로 흘러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계급에게 상품을 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것은, 무상으로 준 화폐의 일부를 속여 다시 찾아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주석 16: "어떤 사람의 상품이 잘 팔리지 않을 때, 맬더스는 이 사람에게 자기의 상품을 팔기 위해 타인들에게 화폐를 주라고 충고하겠는가?" 이것은 리카도학파에 속하는 어떤 사람이 분노해 맬더스에게 던진 질문인데, 맬더스는 그의 제자인 목사 차머즈(Chalmers)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구매자 또는 소비자 계{[예;목사 . 관리 . 군인}을 경제적으로 찬양했던 것이다. ?최근 맬더스 가 주장하는 수요의 성질 및 소비의 필요에 관한 원리의 연구?, 런던, l821년, p. 55를 보라.) 예컨대 소아시아의 도시들은 고대 로마에 매년 화폐공납을 바쳤다. 로마는 이 화폐를 가지고 이 도시들로부터 상품을 구매했는데, 그것도 대단히 비싼 값으로 구매했다. 소아시아인들은 상업(商業)이라는 방법을 통해 로마인을 속임으로써 자기들의 정복자들로부터 자기들이 바친 공납의 일부를 회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은 자는 역시 소아시아인들이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상품의 대가는 여전히 자기들이 바친 화폐로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결코 치부하는 방법 또는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매자는 동시에 구매자이며, 구매자는 동시에 판매자라는 상품교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하자. 우리가 곤란에 빠지게 된 것은 아마 등장인물들을 인격화된 범주(personified category)로서만 고찰하고 개인으로서는 고찰하지 않은 데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품소유자 A는 대단히 교활해서 자기의 동료인 B 또는 C를 속일 수 있지만 B나 C는 아무리 해도 보복할 수가 없다고 하자. A는 B에게 40원의 가치가 있는 포도주를 팔고 그 대신 50원의 가치가 있는 곡물을 얻었다고 하자. A는 자기의 40원을 50원으로 전환시켰다. 적은 화폐를 많은 화폐로 만들었으며, 자기의 상품을 자본으로 전환시켰다.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의 수중에는 40원어치의 포도주가 있었고, B의 수중에는 50원어치의 곡물이 있어 총가치는 90원이었다. 교환 뒤에도 총가치는 동일한 90원으로 변함이 없다. 유통중의 가치는 한 푼도 증가하지 않았으나 A와 B사이에 그 가치의 분배는 변했다. 한 쪽에는 잉여가치(剩餘價値)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쪽에는 가치손실(價値損失)로 되며, 한 쪽에는 플러스로 되는 것이 다른 쪽에는 마이너스로 된다. 이와 동일한 변동은 A가 [교환이라는 위장된 형태에 의거하지 않고] B로부터 10원을 직접 훔쳤다 하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유통중의 가치총액은 그 분배상의 어떤 변화에 의해서도
    증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마치 어떤 유태인이 앤여왕 시대의 1파싱화{0.25펜스의 금화}를 1기니{252펜스의 금화}에 판매하더라도 그것으로써는 일국 내의 귀금속의 양을 증가시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국의 자본가계급 전체가 자기 자신을 속임으로써 돈벌이를 할 수는 없다. (주석 17: 데스튜트 드 트라시는 학술원 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마 그렇기 때문에-이와는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업자본가들은, "모든 물건을 그 생산에 든 비용 이상으로 비싸게 판매한다"는 것에 의해 이윤을 얻는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에게 판매하는가? 우선 상호간에 판매한다"(데스튜트 드 트라시, 앞의 책, p. 239).)
    아무리 말을 이리저리 돌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만약 등가물끼리 서로 교환된다면 아무런 잉여가치도 발생하지 않으며, 또 비등가물끼리 서로 교환된다고 하더라도 잉여가치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주석 18: "두 개의 동등한 가치 사이의 교환은 사회에 있는 가치 총량을 증가시키지도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동등하지 않은 가치 사이의 교환은....이 역시 사회의 가치 총액을 조금도 변동시키지 않고, 타인의 재산으로부터 빼앗아 온 것을 자기의 재산에 첨가할 뿐이다"(세이[J. B. Say), ?정치경제학개론?, 파리, 1817년, 제2권, pp.443-444). 세이는 물론 이 명제에서 나오는 결론에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이 명제를 거의 글자 그대로 중농주의자로부터 차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 당시에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농주의자들의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했는가는 다음의 예로부터 알 수 있다. "생산물은 오직 생산물에 의해 구매된다"(같은 책, 제2권, p.441)라는 세이의 '가장 유명한' 명제는 중농주의자의 원 문에는 "생산물은 오직 생산물에 의해 지불된다"로 되어 있다(르 트로느, 앞의 책, p. 899).) 유통(流通), 즉 상품교환은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않는다.(주석 19: "교환은 생산물에 어떤 가치도 첨가하지 않는다"(웨일랜드[F. Wayland] ?정치경제학개요?, 보스톤, 1843년, p. 169).)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왜 우리가 자존의 기본형태[즉, 근대사회의 경제조직을 규정하는 자본형태]를 분석하면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옛날부터의 자본형태인 상인자본(商人資本)과 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통형태 M-C-M‘[더 비싸게 판매하기 위한 구매]가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는 것은 진정한 상인자본에서다. 그러나 이 상인자본의 운동 전체는 유통분야의 내부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과 잉여가치의 형성을 유통 그 자체로부터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등가물끼리 서로 교환되는 한, 상인자본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주석 20: "불변적인 등가물들이 지배하는 한, 상업은 불가능할 것이다"(옵다이크.[G. Opdyke], ?정치경제학에 관한 논문?, 뉴욕, 1851년, pp. 66-69), "실질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차이는 바로 다음과 같은 하나의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어떤 물건의 가치는 상업에서 그 물건과의 교환으로 주는 이른바 등가물과는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등가물은 등가물이 아니라는 것이다"(F. 엥겔스, ?국민경제학비판 개요?, p.96)) 따라서 상인자본은 [구매하는]상품생산자와 [판매하는] 상품생산자 사이에 기생적으로 개입해 그들을 사취(詐取: fraud) 함으로써 형성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랭클린은 "전쟁은 약탈이고, 상업은 사기다"(주석 21: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국민의 부에 관해 검토해야 할 견해들“ 스팍스(Sparks) 편, ?저작집?, 제2권, p. 376.)라고 말한 것이다. 상인자본의 가치증식을 상품생산자들에 대한 단순한 사취 이외의 것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 상품유통이 우리의 유일한 전제로 되어 있는 여기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일련의 긴 중간고리가 필요하다. {제3권 제4편을 참조하라.}
    상인자본에 대해 적용되는 앞의 내용은 고리대자본에게는 더욱 타당하다. 상인자본에서는 그 양극[즉, 시장에 투입되는 화폐와 시장에서 끌려나오는 증식된 화폐]은 적어도 구매와 판매에 의해, 유통운동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 고리대자본에서는 형태 M-C-M‘가 매개고리가 없는 양극 M-M'로, 더 많은 화폐와 교환되는 화폐[즉, 화폐의 본성과 모순되며 따라서 상품교환의 입장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형태]로 단축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식술은 이중(二重)의 과학인바, 일부는 상업에 속하고 다른 일부는 가정학에 속한다. 후자 는 필요한 것으로 칭찬받을 가치가 있지만, 전자는 유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에 입각하지 않고 상호간의 사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고리대(高利貸)가 미움을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화폐 그 자체가 영리 (營利)의 원천으로 되고 있으며, 그것이 발명된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화폐는 상품교환을 위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자(利子)는 화폐로부터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 낸다. 이자라는 명칭"(이자,자식)"도 이로부터 나왔다. 왜냐하면 자식은 어버이를 닮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자는 화폐로부터 나온 화폐이고, 따라서 고리대는 모든 생계형태 중에서 가장 반자연 적인 것이다.“(주석 22: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정치학?. 제1권, 제10장, p. 17.)
    우리는 우리의 연구과정에서 상인자본과 이자낳는 자본이 파생적(派生的: derivative)인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 그와 동시에 어째서 이 두 형태가 역사적으로 자본의 근대적인 기본형태보다도 먼저 나타났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밝힌 대로 잉여가치는 유통에서 발생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형성되려면 유통 그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유통의 배후에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주석 23: "시장의 보통의 조건 하에서는 이윤(利潤)은 교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윤이 교환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환 이후에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람지, ?부의 분배에 관한 논문?, p. 184).) 그러나 잉여가치는 유통[즉, 상품소유자들의 모든 상호관계의 총체] 이외의 다른 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가? 유통 밖에서는 상품소유자는 자기 자신의 상품과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 상품의 가치에 관해 말한다면, 이 관계는 그의 상품이 [일정한 사회적 기준에 따라 측정되는] 자기 자신의 노동량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이 노동량은 그의 상품의 가치량으로 표현되며, 그리고 가치량은 계산화폐에 의해 측정되므로, 그의 노동량은 예컨대 10원이라는 가격으로도 표현된다. 그러나 그의 노동은 그 상품가치와 [그 상품가치를 넘는)]어떤 초과분 양자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즉, 10이면서 동시에 11이기도 한 가격으로 표현되지는 않으며, 자기 자신보다 더 큰 하나의 가치로 표현되지도 않는다. 상품소유자는 자기의 노동으로 가치를 창조할 수 있지만 자기증식하는 가치를 창조할 수는 없다. 그는 현존의 가치에 새로운 노동[따라서 새로운 가치]을 첨가함으로써-예컨대 가죽을 장화로 만듦으로써-자기 상품의 가치를 증가시킬 수 있다. 동일한 소재가 더 많은 노동량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제 더 많은 가치를 가진다. 그러므로 장화는 가죽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지만, 가죽의 가치는 원래 그대로다. 가죽은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킨 것도 아니며 장화를 만드는 중에 잉여가치를 첨가 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상품생산자는 다른 상품소유자들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즉, 유통분야의 외부에서는] 가치를 증식시킬 令 있으며, 따라서 화폐나 상품을 자본으로 전환시킬 수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이중적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주석 24: 이상의 설명을 통해 독자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품의 가격(價格)과 가치(價値)가 동일한 경우에도 자본의 형성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의 형성을 가격과 가치 사이의 편차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가격들이 현실적으로 가치들과 다르다면, 우선 가격을 가치로 환원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상품교환의 토대 위에서 자본형성(資本形成)이라는 현상을 순수한 형태로 고찰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고찰함에 있어 과정의 진행과는 관계가 없는 교란적이고 부차적인 사정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격과 가치의 편차를 무시해야 한다. 또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환원은 결코 과학의 영역에서만 일어 나는 것은 아니다. 시장가격의 끊임없는 동요[그 상승과 하락]는 서로 보상하고 서로 상쇄되어 시장가격을 자기의 내적 규제자인 평균가격(平均價格)으로 환원시킨다. 이 평균가격은 비교적 장기간이 걸리는 모든 사업에서 상인이나 제조업자들을 인도하는 별이다. 비교적 긴 기간을 전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상품들은 평균가격 이하나 이상으로가 아니라 바로 평균가격으로 판매된다는 것을 제조업자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공평무사한 사고(思考)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는 자본형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할 것이다. 가격이 평균가격에 의해, 즉 결국은 상품가치에 의해 규제되는 경우, 어떻게 자본이 발생할 수 있는가? 내가 여기서 결국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평균 가격은 스미스, 리카도 등등의 생각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상품의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제3권 제2편을 참조하라.})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해 그 가치대로 판매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나비로의 성장[즉, 완전한 자본가로의 발전]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 보라!(역자 주: 이솝 우화에 나오는 것인데, 로두스 섬에서 매우 높게 뛴 적이 있다고 뽐내는 사람에게 행한 응 수다.)



    제 6 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자본으로 전환되어야 할] 화폐의 가치변화는 화폐 그 자체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화폐는 구매수단과 지불수단으로서는 [그것이 구매하거나 지불하는] 상품의 가격을 실현할 뿐이며, 그리고 또 그 자신의 형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화폐는 불변의 가치량(價値量)으로 화석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주석 1: "화폐형태로는 이 자본은 아무런 이윤도 낳지 않는다"(리카도,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한글판, 310쪽) 이 가치변화는 제2의 유통행위인 상품의 재판매로부터도 발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상품을 다만 현물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 재전환시키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가치변화는 바로 제1의 유통행위 M-C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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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7
    금의 주화로서의 기능은 금의 금속적 가치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물건[예컨대 지폐]이 금을 대신해 주화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주화의 순전히 상징적인 성격은 금속토큰에서는 어느 정도 감추어져 있지만, 지폐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사실, 어려운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
    여기에서는 국가가 발행해 강제통용력을 부여한 불환지폐(不換紙幣: inconvertible paper money)만을 문제로 삼는다. 그것은 금속화폐의 유통에 직접적 기원을 두고 있다. 이에 반해, 신용화폐{예; 어음 .수표}는 단순상품유통의 맥락에서는 아직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관계들을 전제로 한다. 덧붙여 말하면, 진정한 지폐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부터 발생한다면, 신용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그 자연발생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주석 34: 중국(19세기 중엽의 청 나라)의 재정관 왕마오인(王茂蔭)은 중국의 국가지폐를 은밀히 태환은행권으로 전환시키려는 계획안을 천자에게 제출하려고 생각했다. 1854년 4월의 지폐 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큰 야단을 맞았다. 그가 대나무 몽둥이로 매를 맞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보고의 결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위원회는 그의 계획안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 내용은 모두가 상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했고 황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북경 주재 러시아제국 공사관의 중국에 관한 연구?,K. 아벨 및 F. A. 메클렌부르크에 의해 러시아어로부터의 번역, 제1귄, 베를린, 1858년, p. 54). 금화가 그 유통으로 말미암아 마멸되는 현상에 관해 어느 영란은행 총재는 은행법에 관한 상원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매년 일부의 새로운 소브린(sovereign)"('군주'라는 의미가 아니고 1 파운드 금화의 명칭이다)"은 지나치게 가벼워진다. 어느 해에는 완전한 중량을 가지고 유통하던 것들이 그 다음 해에는 저울대가 반대쪽으로 기울어질 정도로 마모되어 버린다"(상원위원회, 1848 년, 제429호).)
    1 파운드, 5 파운드 등의 화폐명칭이 인쇄된 종이쪽지가 국가에 의해 외부로부터 유통과정에 투입된다. 그것이 실제로 동일한 양의 금을 대신해 유통하는 한, 그것의 운동은 화폐유통 그 자체
    의 법칙들을 반영할 따름이다. 지폐유통의 독자적인 법칙은 오직 지폐가 금을 대표하는 비율로부터 생길 수 있다. 이 법칙은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지폐의 발행은 실제로 유통될 금량(또는 은량)을 지폐가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범위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통분야가 흡수할 수 있는 금량은 일정한 평균수준의 상하로 끊임없이 변동한다. 그러나 유통수단의 양은 어떤 나라에서라도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일정한 최소량 이하로는 결코 내려가지 않는다. 이 최소량이 끊임없이 자기의 구성부분들을 바꾼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것을 구성하는 금조각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금조각들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이 최소량의 크기에도 그리고 그것의 끊임없는 유통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최소량은 금의 종이상징(paper symbol)에 의해 쉽게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모든 유통수로가 [그들이 화폐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한도까지] 지폐로 가득 차버린다면, 이 수로들은 상품유통의 변동에 따라 내일에는 범람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가격의 도량표준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지폐가 자기의 한도[즉, 실제로 유통했을 같은 명칭의 금화의 양]를 초과한다면, 지폐의 신용이 일반적으로 손상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지폐는 [상품유통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금량만을 대표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지폐의 유통액이 자기의 한도보다 두 배로 늘어난다면, 사실상 l 파운드 지폐는 예컨대 금 1/4온스가 아니라 금 1/8온스의 화폐 명칭으로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 금의 기능에 변동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l 파운드의 가격으로 표현되었던 가치가 이제는 2 파운드의 가격으로 표현된다.
    지폐는 금 또는 화폐의 상징이다. 상품가치에 대한 지폐의 관계는, 상품가치는 일정한 금량으로 관념적으로 표현되며 그 금량을 종이쪽지가 상징적으로 대표한다는 점에 있다. [다른 모든 상품처럼] 가치를 가진 금을 지폐가 대표하는 한, 지폐는 가치의 상징이다.(주석 35: 화폐에 관한 가장 훌륭한 저술가들까지도 화폐의 여러 가지 기능을 얼마나 불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는, 예컨대 풀라턴(Fullarton)의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여준다 "우리의 국내유통에 관한 한, 금화 . 은화에 의해 보통 수행되는 화폐의 모든 기능이 [법률로 제정된 인위적인 또는 관습적인 가치 이외에는]아무런 가치도 없는 불환지폐의 유통에 의해서도[동일하게]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지폐의 발행액이 적당한 한계를 넘지만 않는다면, 지폐는 내재적 가치를 가진 주화가 충족시키고 있는 모든 목적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며, 또 도량표준의 기능까지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풀라턴, ?통화조절론?, 제2판, 런던, 1845년, p.21). 즉, 화폐상품은 유통에서 단순한 가치 상징에 의해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화폐상품은 가치의 척도로서도 가격의 도랑표준으로서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째서 금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기 자신의 상징{즉, 주화나 지폐}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금이 그와 같이 대체될 수 있는 것은 금이 오직 주화[즉, 유통수단1로 기능하는 경우뿐이다. 그런데 화폐는 이 밖에도 다른 기능들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한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이 금화에 부여된 유일한 기능은 아니다[물론 계속 유통하고 있는 마멸된 금화의 경우는 그러하지만]. 금화가 단순한 주화[즉, 유통
    수단]인 것은 오직 그것이 현실적으로 유통하고 있는 동안이다. 물론 이것은 지폐에 의해 대리될 수 있는 최소량의 금화에도 해당된다. 이 최소량의 금화는 항상 유통분야에 머물러 계속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오직 그 기능의 담지자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금화의 운동은 상품변태 C-M-C의 반대 국면들의 계속적인 반복을 표시하고 있을 뿐인데, 이 국면들에서는 상품과 화폐와의 대면은 다만 순간적이다. 상품의 교환가치의 독립적 실재(獨立的 實在: independent entity)는 여기에서는 다만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상품은 곧바로 다른 상품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므로 화폐를 끊임없이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에서는 화폐의 단순한 상징적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를테면, 화폐의 기능적 존재가 화폐의 물질적 존재를 흡수하는 것이다. 화폐가 상품가격의 순간적인 [객체화된] 반영일 경우, 화폐는 다만 그 자신의 상징으로서 기능할 뿐이고, 따라서 다른 상징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주석 36: 금과 은은 주화인 한[즉, 유통수단의 기능만을 가지는 한], 자기 자신의 상징으로 된다는 사실로부터, N. 바본은 '화폐의 가치를 올리는' 정부의 귄리를 도출하고 있다. 즉, 실링(shiiling이라고 부르는 은량에 크라운(crown)이라는 더 큰 은량의 명칭을 붙이고, 그리하여 채권자들에게 크라운 대신 실링을 갚는다는 것이다. "화폐는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침으로써 마멸되어 가볍게 된다....거래할 때 사람들이 고려하는 것은 은의 양이 아니라 화폐의 명칭과 통용력이다.... 금속을 화폐로 만드는 것은 금속에 부여한 공적 권위{public authority) 때문이다"(N. 바본, ?더 가벼운 신화폐의 주조에 관한 논술?, pp 29, 30, 25).) 그러나 화폐의 상징은 자기 자신의 객관적인 사회적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지폐는 이 정당성을 강제통용력에 의해 얻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강제는 한 공동체의 국내 유통 분야 안에서만 유효하다. 또한 이 유통분야 안에서만 화폐는 오로지 유통수단의 기능에 전념하며, 따라서 지폐의 형태로 순수히 기능적인 존재양식[이 경우 화폐는 금속실체와 외부적으로 분리된다]을 얻을 수 있다.



    제 3 절 화 폐


    가치척도로 기능하고, 따라서 또한 자신이 직접 또는 대리물을 통해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상품이 화폐(貨幣)미다. 그러므로 금(또는은)은 화폐이다. 그런데 금이 화폐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금이라는 몸체 그대로 나타나야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금은 [가치 척도의 기능에서와 같이 순전히 관념적인 것도 아니고 또 유통수단의 기능에서와 같이 대리가능한 것도 아닌] 화폐상품(貨幣商品)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폐의 기능[금 자신이 이 기능을 직접 수행하든 대리물을 통해 수행하든]이 다른 모든 상품에 대립시켜 금을 유일한 가치모습 또는 교환가치의 유일한 적절한 존재형태로 고정시키는 경우 금이 화폐로 기능한다.



    (a) 퇴장화폐


    두 개의 대립적인 상품변태의 연속적인 순환운동[즉, 판매와 구매의 끊임없는 교체]는 화폐의 쉴새없는 회전[즉, 유통의 영구적 자동기관(永久的 自動機關)으로서의 기능]에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변태의 계열이 중단되어 판매가 그것에 뒤따르는 구매에 의해 보충되지 못하면 화폐는 유통정지된다. 보아규베르(Boisguillebert)가 말한 바와 같이, 화폐는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즉 주화[유통수단]로부터 화폐로 전환한다.
    상품유통의 최초의 발전과 함께 제1변태의 산물[즉, 상품이 전환된 모습, 다시 말해 금](주석 37: "화폐형태의 부는....화폐로 전환된 생산물로서의 부에 불과하다"(메르시에드 라 리비에르, ?정 치사회의 자연적 및 본질적 질서?, p. 573). "생산물이라는 형태의 가치가 오직 자기의 형태 를 변화시킨 것이다"(같은 책, p. 486).) 을 확보하려는 필요성과 열망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상품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형태를 화폐형태로 바꾸기 위해 판매된다. 이러한 형태변환은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된다. 이제 상품이 변화한 형태{화폐}는 상품의 절대적으로 양도가능한 모습[또는 오직 순간적인 화폐형태]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고 이리하여 화폐는 퇴장화폐(退藏貨幣: hoard)로 화석화되며, 상품판매자는 화폐퇴장자로 된다.
    상품유통이 시작된 바로 그 초기에는 사용가치의 잉여분만이 화폐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금과 은은 그 자체로서 여유분[또는 부]의 사회적 표현으로 된다. 이와 같은 소박한 형태의 화폐퇴장은 [전통적인 자급자족적 생산방식에 대응해 욕망의 범위가 고정되고 제한되어 있는] 민족들 사이에는 영구화되고 있다. 예컨대 아시아인 특히 인도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상품가격은 그 나라에 존재하는 금과 은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공상하고 있는 반더린트(J. Vanderlint)는 어째서 인도의 상품이 그처럼 싼가라고 자문한 뒤, 인도인은 화폐를 땅 속에 파묻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에 의하면 1602-1734년에 인도인은 1억 5천만 파운드 스털링의 은을 땅 속에 파묻었는데,(주석 38: "이와 같은 행위에 의해 그들은 모든 재화들과 제품들의 가격을 그처럼 낮게 유지하고 있다" (반더린트, ?화폐만능론?, pp. 95-96).) 이것은 원래 아메리카로부터 유럽으로 이송되어 왔던 것이었다. 1856-66년의 10년간에 영국은 인도와 중국에 1억 2천 만 파운드 스털링의 은을 수출했는데 [중국에 수출된 은은 그 대부분이 다시 인도로 흘러 들어갔다], 이 은은 그 전에 호주의 금을 주고 얻었던 것이다.
    상품생산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상품생산자는 누구나 사회가 제공하는 담보[즉, 화폐]를 확보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주석 39: "화폐는....하나의 담보물이다"(존 벨러즈[John Bellers], "빈민, 공업, 상업, 식민 및 비행(非行)에 관한 논문“ 런던, 1699년, p. 13) 그의 욕망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다른 사람의 상품을 끊임없이 구매해야 하지만, 그 자신의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는 시간이 걸리고 또 그것은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 판매하지 않고 구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는 이전에 구매하지 않고 판매했어야 한다. 이러한 행위가 일반적 규모로 행해지는 것은 자기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귀금속은 그 생산지에서는 다른 상품들과 직접 교환된다. 거기에서는 (금 또는 은의 소유자에 의한) 구매가 (상품소유자에 의한) 판매 없이 진행된다.(주석 40: 엄격한 의미의 구매는 상품의 전환된 모습[즉, 판매의 결과]으로서의 금이나 은을 전제한다.) 그리고 구매가 뒤따르지 않는 판매는 귀금속을 상품소유자들 사이로 분배할 뿐이다. 그리하여 교환의 모든 지점에서 각종 규모의 금과 은의 퇴장이 나타난다. 교환가치를 상품의 형태로 보유하거나 상품을 교환가치로 보유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금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 상품유통의 확대에 따라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의 부(absolutely social form of wealth)인 화폐의 권력이 증대한다.

    "금은 놀라운 물건이다. 그것을 가진 자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지배할 수 있다. 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가게 할 수도 있다“
    (콜롬버스의 자메이카로부터의 편지, 1503년).

    화폐는 무엇이 화폐로 전환되었는지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모든 것이 화폐로 전환될 수 있다.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으로 될 수 있다. 유통은 모든 것이 그곳에 뛰어들어갔다가 금 결정체(gold crystal)로 되어 다시 나오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도가니로 된다. 이 연금술에는 성자조차도 견뎌낼 수 없거늘 하물며 그보다 연약한 [인간들의 상거래에서 제외되고 있는] 성스러운 대상들{여기에서 는 페니키아 처녀들을 가리킨다.}이야 말할 것도 없다.(주석 41: 가장 기독교적인 프랑스의 왕 앙리 3세는 수도원 등으로부터 성유물(聖遣物)을 약탈해 그것을 돈으로 바꾸었다. 페니키아인에 의한 델피 신전(神嚴)의 재산약탈이 그리스 역사에서 어떤 역할 을 했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고대인들에게는 신전은 상품신(商品神)의 거주지로 되어 있었다. 신전은 '신성한 은행‘이었다. 탁월한 상업민족이었던 페니키아인은 화폐를 모든 물건의 변형된 모습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여신의 축제일에 외국인에게 몸을 바친 처녀들이 보수로 받은 돈을 이 여신에게 헌납하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폐에서는 상품의 온갖 질적 차이가 없어지고 있듯이 화폐 자체도 철저한 평등주의자로 일체의 차이를 제거해 버린다.(주석 42:
    "금! 황색의 휘황찬란한, 귀중한 황금이여!
    이것만 있으면 검은 것도 희게, 추한 것도 아름답게,
    악한 것도 착하게, 천한 것도 귀하게, 늙은 것도 젊게,
    겁쟁이도 용감하게 만들 수 있구나.
    ....신들이여! 이것은 웬일인가?
    이 물건은 당신들의 제사장과 하인 모두를 당신편으로부터 끌어내며,
    아직은 살 수 있는 병자의 머리 밑에서 베개를 때가기도 하니...
    이 황색의 노에,
    이 놈은 신앙을 만들었다 부수며, 저주받은 자에게 축복을 주며,
    문둥병자 앞에서 절하게 하며,
    도둑에게도 원로(元老)와 같은 지위나 작위나 명예를 준다.
    늙어빠진 과부를 시집가게 하는 자도 이것.
    ....에이, 이 망할 놈의 물건,
    인류 공동의 창녀야."(세익스피어, ?아테네인 티몬?, 제4막, 제3장)) 그러나 화폐는 그 자신이 상품이며, 누구의 사유물(私有物)로도 될 수 있는 외적인 물건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고대사회는 화폐를 그 사회의 경제적 .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다.(주석 43: "세상에 돈 같이 간악한 것은 다시 없다.
    돈 때문에 도시는 멸망하며 사람도 집에서 쫓겨난다.
    돈은 순결한 심정을 타락시키며
    염치없는 행위와 간악한 생각과 배신을
    사람에게 가르친다. "(소포클레스[Sophocles], ?안티고네?)) 태어나자마자 플루톤{Pluto: 부(富)와 저승의 신}의 머리털을 잡고 그를 땅속에서 끌어올린(주석 44: "탐욕은 플루톤 그 자신을 땅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한다"(아테나이오스, ?학자들의 향연?, 슈바이크호이저 편, 1802년, 제2권, 제1부, 제6편, 제23절, p.397)) 근대사회는 황금을 성배(聖杯: Holy Grail)[또는 자기의 가장 내면적인 생활원리의 휘황찬란한 화신]로서 환영하고 있다.
    사용가치로서의 상품은 어떤 특정 욕망을 충족시키며 물질적 부(富)의 특정 요소를 형성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이 물질적 부의 모든 요소를 어느 정도 지배하는가를 나타내며, 따라서 그 상품 소유자의 사회적인 부의 크기를 나타낸다. 미개사회의 단순한 상품소유자에게는, 또 심지어 서유럽의 농민에게도, 가치는 가치형태와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금과 은의 퇴장의 증가는 가
    치의 증가로 된다. 물론 화폐의 가치는 그 자체의 가치변동이나 상품가치의 변동에 의해 변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는 200온스의 금이 100온스의 금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금의 금속적 현물형태가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형태[즉,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화신]로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화폐를 퇴장하려는 충동은 그 성질상 한이 없다. 화폐는 어떤 상품으로도 직접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물질적 부(富)의 일반적 대표라는 점에서 질적으로나 형태상으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화폐액은 모두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구매수단으로서 한정된 효력만을 가진다. 화폐의 이러한 양적 제한성과 질적 무제한성 사이의 모순은 화폐퇴장자를 축적의 시지프스적 노동으로 끊임없이 몰아넣는다. 그는 [아무리 정복을 통해 국토를 넓히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국경과 마주치게 될 뿐인] 세계정복자와 비슷하다.
    금을 화폐로 보유하기 위해서는 [즉, 퇴장화폐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금이 유통되는 것[또는 향락의 구매수단으로 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화폐퇴장자는 황금물신(黃金物神: fetish of gold)에게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희생으로 바친다. 그는 금욕(禁慾)의 복음을 진심으로 믿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상품의 형태로 유통에 던져넣은 것보다 더욱 큰 것을 화폐의 형태로 유통으로부터 끌어낼 수는 없다. 그는 더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그만큼 리 많이 판매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근면과 절약과 탐욕이 그의 주된 덕목으로 되며,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경제학 전체를 이룬다.(주석 45: "각 상품의 판매자의 수는 될 수 있는 한 늘리고, 구매자의 수는 될 수 있는 한 줄이는 것, 이것이 경제학의 모든 정책이 귀결하는 회전축이다"(베리[Pietro Verri], ?경제학에 관한 고찰?, pp. 52-53).)
    퇴장화폐라는 직접적 형태와 아울러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상품의 소유라는 퇴장의 미적(美的) 형태가 발전한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부의 증가와 더불어 증가한다 "부자가 되자. 그렇지 못하면 부자로 보이도록 하자"(디드로).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금과 은의 화폐적 기능과는 관계없는] 금과 은의 시장이 끊임없이 확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폐의 잠재적 공급원[특히 사회의 격변기에는 거기에서 화폐가 나온다]이 형성된다.
    퇴장화폐는 금속유통의 경제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의 기능은 금 . 은 주화의 유통조건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미 보았듯이, 상품유통의 규모와 속도 및 상품가격의 끊임없는 변동 때문에 화폐의 유통량도 쉬지 않고 증감한다. 그러므로 화폐유통량은 수축할 수도 팽창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화폐[금]가 주화로서 끌려 들어가야 하며, 어떤 때에는 주화가 화[금]로서 밀려나와야 한다. 현실적으로 유통하는 화폐량이 항상 유통분야의 흡수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국 안에 존재하는 금은의 양은 주화의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금은의 양보다 많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화폐가 퇴장화폐로 전환됨으로써 충족된다. 퇴장화폐의 저수지는 화폐가 유통으로 흘러
    들어가고 유통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수로로 되며, 이리하여 유통하고 있는 화폐는 결코 그 유통수로에서 범람하지 않는다.(주석 46: "한 나라의 산업이 영위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금액의 화폐가 필요하나, 금액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화폐의 증감은 정치가들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조절된다... 두레박은 교대교대로 움직인다. 즉, 화폐가 부족하게 되면 금은덩어리가 주조되고, 금은덩어리가 부족하게 되면 화폐가 녹여진다"(더들리 노스, ?교역론?, 후기, p. 3). 오랫동안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던 J. S. 밀은 인도에서는 아직까지도 은제 장식품이 직접 퇴장화폐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은제 장식품은 이자율이 높아지면 끌려 나와 주조되고, 이자율이 떨어지면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J. S. 밀의 증언, ?은행법, l857“, 제2084, 2101호). 인도의 금과 은의 수출입에 관한 1864년의 의회문서에 의하면, 1863년에는 금과 은의 수입이 수출을 19,367,764 파운드나 초과했다. 1864년까지의 8년 간에는 귀금속의 수출에 대한 수입의 초과는 109,652,919 파운드에 달했다. 19세기 중 인도에 서는 200,000,000 파운드 이상이 주화로 주조되었다.)



    (b) 지불수단


    지금까지 고찰한 상품유통의 직접적 형태에서는 주어진 가치량(價値量)이 항상 두 개의 모습으로-한 쪽 끝에는 상품(商品)으로, 반대쪽 끝에는 화폐(貨幣)로-존재했다. 그러므로 상품소유자들은 현존하는 등가물의 대표자로 접촉한 데 불과했다. 그러나 상품유통의 발전과 더불어, 상품의 양도를 상품가격의 실현과 시간적으로 분리시키는 사정들이 발전한다. 여기에서는 이 사정들 중 가장 단순한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어떤 상품종류는 그 생산에 비교적 긴 시간을 필요로 하며 다른 상품종류는 비교적 짧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상품이 다르면 그것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계절도 달라진다. 어떤 상품은 그 자체의 시장소재지에서 생산되지만, 다른 상품은 원격지 시장으로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어떤 상품소유자는 다른 상품소유자가 구매자로 등장하기 전에 판매자로 등장할 수 있다. 동일한 거래가 동일한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경우에는, 상품의 판매조건은 그것의 생산조건에 의해 조정된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종류의 상품(예: 가옥)의 이용은 일정한 기간 판매{임대}되고 있는데, 그 기간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구매자{남이 세든 집을 산 구매자}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를 실제로 받게 된다. 어쨌든 구매자는 그 상품의 대가를 지불하기 전에 그 상품을 사는 것이다. 판매자는 현존의 상품을 판매하는데, 구매자는 화폐의 단순한 대표자로, 또는 장래의 화폐의 대표자로 구매한다. 판매자는 채권자로 되며 구매자는 채무자로 된다. 이 경우 상품의 변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의 전개가 달라지기 때문에 화폐도
    다른 하나의 기능을 획득한다. 화폐는 지불수단(支佛手段)으로 된다.(주석 47: {엥겔스: 루터는 구매수단으로서의 화폐와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를 구별하고 있다. “너 [채무자]는 나에게, 한편으로는 지불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살수도 없다는, 이중의 손해를 주고 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목사 여러분께.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 비텐베르크, 1540년).})
    채권자 또는 채무자의 역할은 여기에서는 단순상품유통으로부터 발생한다. 유동형태의 변화가 판매자와 구매자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역할은 처음에는 판매자와 구매자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이며 동일한 유통당사자에 의해 번갈아 가면서 수행된다. 그렇지만 이 대립은 처음부터 별로 기분 좋은 것이 못 되며, 더 엄격하게 응고될 수 있다.(주석 48: 다음의 문장은 18세기 초 영국 상인들 사이에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를 보여 준다. "여기 영국에서는, 다른 어떤 인간사회에서나 또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일찍이 보지 못한 잔 인한 정신이 상인들 사이에 지배하고 있다"(?신용 및 파산법에 대한 논문“, 런던, 1707년, p. 2).) 그러나 동일한 등장인물은 상품유통과 관계없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대세계의 계급투쟁은 주로 채권자와 채우자 사이의 투쟁의 형식으로 행해졌는데, 로마에서는 평민 채무자들의 몰락으로 끝났다. 이 채무자들은 노예로 되었다. 중세에는 이 투쟁은 영주채무자들의 몰락으로 끝났고, 이 채무자들은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그 경제적 기반과 함께 상실했다. 그렇지만 이 두 시기에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존재하던 화폐관계는 경제적 생활조건에 존재하는 뿌리깊은 적대관계를 반영했을 뿐이다.
    유통의 분야로 되돌아가자. 상품과 화폐라는 두 개의 등가물이 판매과정의 두 끝에 동시에 나타나는 일은 없어졌다. 이제 화폐는, 첫째,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결정에서 가치척도로 기능한다. 계약에 의해 확정된 그 상품의 가격은 구매자의 채무[즉, 정해진 기한 안에 그가 지불해야 할 화폐액]의 크기를 측정한다. 둘째, 화폐는 관념적인 구매수단으로 기능한다. 화폐는 오직 구매자의 지불약속으로 존재하지만, 상품의 소유자를 바꿀 수 있다. 지불기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지불수단{화폐}
    은 현실적으로 유통에 들어간다. 즉, 구매자의 손에서 판매자의 손으로 옮아간다. 유통수단이 퇴장화폐로 전환된 것은 유통과정이 제1단계 이후에 곧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전환된 모습{즉, 화폐}이 유통으로부터 끌려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불수단이 유통에 들어가는 것은 상품이 이미 유통에서 빠져나온 이후의 일이다. 화폐는 이제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절대적 존재형태[즉, 일반적 상품]로서 독립적으로 개입해 유통과정을 종결짓는다. 판매자가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킨 것은 화폐로 어떤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고, 화폐퇴장자가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킨 것은 상품을 화폐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서였으며, 채무를 진 구매자가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킨 것은 지불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가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의 소유물은 강제매각을 당한다. 그리하여 상품의 가치형태, 즉 화폐가 이제 [유통과정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필연성으로 말미암아] 판매의 자기목적으로 된다.
    구매자는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키기 전에 화폐를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다시 말해, 그는 상품의 제1변태{C-M}에 앞서서 제2변태{M-C}를 수행한다. 판매자의 상품은 유통하지만, 그 상품의 가격은 오직 민법상의 화폐청구권으로 실현된다. 그 상품은 화폐로 전환되기 전에 사용가치로 전환된다. 그 상품의 제1변태는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된다.(주석 49: 내가 본문에서 이것과 반대되는 형태를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1859년에 간행한 나의 저서의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대로 M-C라는 거래에서는, 화폐의 사용가치가 실현되기 전에 [즉. 상품을 양도받기 전에 화폐가 현실적 구매수단으로 양도되어 상품가격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은 예컨대 선불(先拂: advance-payment)이라는 일상적인 형태로 수행되고 있다. 영국정부가 인도의 농민으로부터 아편을 구매하는 경우도 이와 같은 형태다.... 그러나 이 경우 화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구매수단이라는 형태로 기능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물론 자본은 화폐의 형태로 선대(先貸)되지만....이것은 단순한 유통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140))
    유통과정의 일정한 기간 안에 만기가 되는 채무들은 상품들(이 상품들의 판매 때문에 채무가 발생했다)의 가격총액을 대표한다. 이 가격총액의 실현에 필요한 화폐량은 우선 지불수단의 유통속도에 달려 있다. 이 유통속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에 의해 규정된다. 첫째, A가 자기의 채무자 B로부터 화폐를 받아 그것을 다시 자기의 채권자 C에게 지불하는 등,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의 연쇄이고, 둘째, 지불만기일과 지불만기일 사이의 시간상의 간격이다. 채무의 연쇄[즉, 지체된 제1변태의 연쇄]는 이전에 고찰한 변태계열들의 뒤엉킨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통수단의 유통은 단순히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관련을 표현할 뿐 아니라, 이 관린 자체가 화폐유통 안에서 일어나며 또 화폐유통과 더불어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지불 수단의 운동은 이미 그 이전에 형성된 사회적 관련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많은 판매가 동시에 병행해 일어난다는 사실은, 유통화폐량이 유통속도에 의해 보충될 가능성을 제한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사실은 지불수단의 절약을 위한 새로운 자극을 준다. 여러 지불이 한 장소에 집중됨에 따라 지불의 결제를 위한 독특한 시설과 방법이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한다. 예컨대, 중세 리용의 어음교환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B에 대한 A의 채권과 C에 대한 B의 채권, A에 대한 C의 채권 등등은 서로 대면하기만 하면 일정한 금액까지는 정(+)의 양(量)과 부(-)의 양(量)으로 상쇄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머지 채무차액만이 청산되면 된다. 지불들이 많이 집중되면 될수록 그만큼 차액은 상대적으로 적어지며, 이에 따라 유통되는 지불수단의 양도 적어진다.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는 하나의 내재적인 모순이 있다. 여러 지불이 상쇄되는 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계산화폐(計算貨幣) 또는 가치척도로서 오직 관념적으로 기능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한, 화폐는 유통수단[즉, 상품교환의 오직 순간적인 매개물]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개별적 화신, 교환가치의 독립적 존재형태, 일반적 상품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모순은 산업 .상업의 공황 중 화폐공황(貨幣恐慌: monetary crisis)으로 알려진 국면에서 폭발한다.(주석 50: {엥겔스: 본문에서 모든 일반적 산업 . 상업공황의 특수한 국면으로 규정되고 있는 화폐공황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종류의 공황-즉, 화폐공황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산업과 상업의 공황과는 독립적으로 나타나 그 여파로 산업과 상업에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종류의 공황-과는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의 화폐공황에서는 화폐자본이 그 운동의 중심이며, 따라서 은행. 증권거래소 . 금융계가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 화폐공황은, 지불들의 연쇄와 지불결제의 인위적 조직이 충분히 발전한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 메커니즘에 전반적 교란이 일어날 때, 그 교란의 원인이 무엇이든, 화폐는 계산화폐라는 순전히 관념적인 모습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화{금속화폐}로 변해버린다. 더 이상 보통의 상품은 화폐를 대신할 수 없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그 자신의 가치형태{화폐}앞에서 사라지고 만다{예; 상품가격의 폭락}.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르주아는 호경기에 도취되어 자신만만하게 '상품이야말로 화폐'라고 하면서, 화폐를 순전히 관념적 산물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시장에서 화폐만이 상품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슴이 신선한 물을 갈망하듯 부르주아의 영혼은 유일한 부(富)인 화폐를 갈망한다.(주석 51: "신용제도로부터 {금속}화폐제도로의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전환은 실제의 공황에 이론적 당황을 첨가한다. 그리고 유통과정의 당사자들은 자신들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앞에 몸을 떤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146). "빈민들에게 일거리가 없는 것은, 부자들이 식량 . 의복의 생산에 필요한 토지와 일꾼들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지만 빈민들을 고용할 화폐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참된 부(富)는 바로 이 토지와 일꾼이지, 화폐는 결코 아니다"(벨러즈, ?산업전문학교의 설립에 관한 제안?, 런던, 1696년, pp. 3-4).) 공황에서는 상품과 그 가치형태인 화폐 사이의 대립은 절대적 모순으로까지 격화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화폐의 현상형태가 어떠하든 상관이 없는데, 지불을 금으로 하든 은행권과 같은 신용화폐로 하든 화폐기근(貨幣饑饉: monetary famine)은 여전히 완화되지 않는다.(주석 52: 다음은 이와 같은 순간이 '상업의 벗' {은행가}에 의해 어떻게 악용되는가를 보여준다 . “옛날(1839년 런던 시티의) 구두쇠인 한 늙은 은행가는 자기의 서재에서 책상뚜껑을 열고 자기 친구에게 몇 뭉치의 은행권을 보여주면서 매우 즐거운 듯이 말했다. '여기에 60만 파운드 스털링이 있는데 이것은 금융 핍박을 조성하기 위해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오늘 3시 이후에는 전부 시장에 방출할 예정이다'라고"(로이[H. Roy], ?거래소이론, 1844년의 은행특허법?, 런던 1864년, p. 81). 준 정부기관지인 ?옵저버?(Observer)는 1864년 4월 24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은행권의 부족을 조성하려고 취한 수단에 관해 매우 괴상한 소문들이 떠돌고 있다....그린 종류의 술책이 취해졌으리라고 생각하기는 매우 의심스럽지만, 앞에서 말한 소문이 상당히 널리 퍼지고 있는 만큼 그것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일정한 기간에 유통하는 화폐의 총액을 보면, 유통수단과 지불수단의 회전속도가 일정한 경우, 그 총액은 실현되어야 할 상품가격의 총액에 만기가 된 지불총액을 더한 다음, 상쇄되는 지불들을 빼고, 끝으로 동일한 화폐조각이 번갈아 유통수단과 지불수단으로 기능하는 회수에 해당하는 만큼의 금액을 편 것과 같다. 예컨대 농민이 자기의 곡물을 2원에 판다면, 이 화폐는 유통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는 이 2원으로 이전에 직포자가 공급한 아마포의 값을 그 지불기일에 지불한다. 동일한 2원이 이번에는 지불수단으로 기능한다. 다음에 직포자는 성경책을 현금으로 구매한다. 그리하여 2원은 다시 유통수단으로 기능한다. 등등. 그러므로 가격과 화폐유통의 속도와 지불수단의 절약이 일정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간[예컨대 1일간]에 유통하는 화폐량과 유통하는 상품량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 전에 유통에서 이탈한 상품을 대표하는 화폐가 계속 유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품들은 유통하지만 그 등가(물)인 화폐는 장래에 가서야 비로소 그 모
    습을 나타낸다. 더욱이 매일 계약이 맺어지는 채무와 [같은 그 날짜에 만기가 되는] 채무의 상환은 서로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주석 53: "어느 하루에 이루어지는 구매액 또는 계약액은 바로 그날에 유통하는 화폐량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다소 뒷날에 유통하게 될 화폐량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형태의 어음으로 되어 있다... 오늘 수취한 어음이나 제공한 신용은, 그 거래 건수 . 금액 . 기한에서 내일 또는 모레에 수취하거나 제공하는 것과 비슷해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오늘 수취한 어음이나 제공한 신용 중 많은 것의 만기일이, 과거의 전혀 다른 날짜에 이루어진 일단의 채무의 만기일[그 만기가 12개월 . 6개월 . 3개월, 또는 1개월 짜리 어음들의 만기일과 흔히 서로 일치함으로써, 특정한 어떤 날짜에 만기가 되는 채무액을 팽창시킨다"(영국의 한 은행가, ?통화이론의 검토,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에딘버러, 1845년, pp. 29-30).)
    신용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부터 직접 발생하는데, 그것은 구매한 상품에 대한 채무증서{예. 수표}그 자체가 유통됨으로써 발생한다. 다른 한편, 신용제도가 확대되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도 확대된다.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여러 가지 특유한 존재형태를 취하는데, 이 형태의 화폐는 대규모 상거래 분야에서 사용되고, 금과 은의 주화는 주로 소매상업의 분야로 밀려나간다.(주석 54: 본래의 상거래에서 현금이 얼마나 적게 사용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런던의 가장 큰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 중의 하나인 모리슨 딜른(Morrison, Dillon & Co.)의 1년간 수입과 지출명세서를 여지에 제시한다. 1856년도 이 회사의 거래총액은 수백만 파운드 스털링에 달했으나, 여기에서는 그것을 1백만 파운드 스털링이 되도록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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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입 (단위: 파운드) 지출 (단위; 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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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어음 및 기한부 상업어음 533,596 기한부 어음 302,674
    일람불 은행수표 및 기타 357,715 런던의 여러 은행 앞 수표 663,672
    지방은행권 9,627 뱅크 오브 잉글랜드 은행권 22,743
    뱅크 오브 잉글랜드 은행권 68,554 금화 9,427
    금화 28,089 은화 및 동화 1,484
    은화 및 동화 1,486
    우편환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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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계 1,000,000 합계 1,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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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법 특별위원회보고서”, 1858년 7월, 부록 p. 71))
    상품생산이 일정한 수준과 범위에 도달하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상품유통의 영역을 뛰어넘게 된다. 화폐는 모든 계약(契約)의 일반적 재료(材料)로 된다.(주석 55: "거래과정은 재화와 재화의 교환[즉, 인도와 수취]으로부터 판매와 지불로 변했으므로, 모든 매매계약은 ....이제 화폐가격에 근거해 작성된다"(디포[D. Defoe], ?공신용(公信用)에 관한 논문?, 제3판, 런던, 1710년, p. 8).) 지대나 조세 등은 현물납부로부터 화폐지불로 변한다. 이 변화가 생산과정의 전체 성격에 의해 얼마나 제약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예컨대 모든 공납을 화폐로 징수하려던 로마제국의 시도가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보아규베르나 보방장군 등이 그처럼 설득력 있게 비난하고 있는]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농민들의 극심한 빈곤은 고을의 세금 때문일 뿐 아니라 현물조세가 화폐조세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주석 56: "화폐는 만물의 사형집행자로 되었다. " 재정은 "이 재앙 덩어리 {화폐}를 짜내기 위해 방대한 양의 재화와 상품을 증발시키는 증류기다. " "화폐는 전 인류에게 전쟁을 선포한다"(보아규베르[Boisguillbertl, ?부 . 화폐 . 조세의 본질에 관한 논술?, 데르편, ?재정경제학자?, 파리, 1843년, 제1권, pp. 413-417, 419).) 다른 한편, 아시아에서는 [국가 조세수입의 주요한 요소이기도 한] 지대(地代)의 현물형태는 [자연조건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고 재생산되는] 생산관계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지불형태가 반작용함으로써 맞은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터키제국이 유지되는 비밀의 하나다. 만약 유럽에 의해 강제된 외국무역이 일본에서 현물지대를 화폐지대로 전환시킨다면, 일본의 모범적 농업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농업의 협소한 경제적 존립조건은 붕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관습적으로 1년 중의 어떤 날들이 정기적인 지불결제일로 설정된다. 이러한 지불기일은, 재생산의 다른 순환운동들을 무시한다면, [계절의 교대와 결부된] 자연적 생산조건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또 [상품유통과 직접 관련이 없는]지불, 예컨대 조세나 지대등의 지불기일도
    규제한다. 사회 전체에 분산되어 있는 이들 지불에 필요한 화폐량이 1년 중 며칠에 집중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은 지불수단의 절약에 주기적인 [그러나 전적으로 표면적인] 교란을 일으킨다. (주석 57: 1826년의 하원조사위원회에서 크레이그(Craig)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24년의 성령강림일 당일에 에딘버러의 여러 은행들에 대한 은행권의 수요가 너무나 막대해 11시경에는 은행의 수중에 단 한 장의 은행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은행권을 벌리려고 여러 은행에 사람을 보냈 으나 전혀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거래의 대부분을 종이쪽지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오후 3시경에는 벌써 모든 은행권은 그것을 발행한 은행에 되돌아왔다! 그것은 이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쳤을 뿐이다. " 스코틀랜드에서 은행권의 실제 평균유통액은 3백만 파운드 스 털링 미만이지만, 1년 중 어떤 지불결제일에는 모든 은행의 수중에 있는 약 7백만 파운드 스 털링에 달하는 모든 은행권이 동원된다. 이 경우 은행권은 단 하나의 특수한 기능[지불수단의 기능]을 수행하며, 그 기능을 수행하자마자 발행한 은행에 도로 흘러 들어간다. (J. 풀라턴, ? 통화조절론?, 제2판, 런던, 1845년, p. 86의 주). 이해를 들기 위해 덧붙여 말하면, 풀라턴의 저작이 발간된 그 당시의 스코틀랜드에서는 예금을 찾을 때 수표를 내주지 않고 오직 은행권 만 내주었다는 사실이다.) 지불수단의 유통속도에 관한 법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모든 주기적 지불에 요구되는 지불수단의 양은, 그 지불의 원인이 무엇이든, 지불주기(支拂週期)의 길이에 정비례한다. (주석 58: "만약 1년 동안 총지불액으로 4천만 파운드 스털링이 필요하다면, 6백만 파운드 스털링(금)으로 산업에 필요한 회전과 유통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페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재치있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지불총액이 4천만이므로, 만약 예컨대 매주 토요일마다 지불받고 지불하는 가난한 수공업자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보는 것처럼 회전이 1주일이라는 짧은 주기로 실현된다면, 1백만의 40/52으로도 4천만의 지불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l백만 X 40/52 X 52주=4천만}. 그러나 그 주기가 우리나라의 지대지불이나 조세징수의 관례와 같이 4분기로 되어 있다면, 1천만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지불이 1주일과 13주일 사이의 여러 가지 주기를 가진다고 가정하면, 1백만의 40/52 에 1천만을 더한 다음 그것을 2로 나누면 5 1/2 백만이 되므로, 5 1/2 백만이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W. 페티,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 1672년, 런던판, 1691년, pp. 13-14).)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가 발전하면 채무의 지불기일에 대비하기 위한 화폐축적(貨幣蓄積)이 필
    요하게 된다. 부르주아사회의 발전과 함께 독립적인 치부형태로서의 퇴장화폐는 없어지지만, 지불수단의 준비금(準備金)이라는 형태로서의 퇴장화폐는 증대한다.



    (C) 세계화폐


    화폐는 국내 유통분야의 범위를 넘어서자마자 국내에서 가지고 있던 국지적(局地的) 기능[즉, 가격의 도량표준이나 주화 . 보조화폐 . 가치상징 둥의 국지적 기능]을 벗어버리고 귀금속의 원래의 덩어리형태로 되돌아간다. 세계무역에서는 상품은 자기의 가치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한다. 그러므로 상품의 독립적인 가치형태도 세계화폐(世界貨幣)로서 상품에 대립한다. 세계시장에서 비로소 화폐는 [그 현물형태에 추상적 인간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으로 실현되어 있는] 상품으로서 완전히 기능한다. 화폐의 존재양식이 그 개념에 부합하게 된다.
    국내 유통분야에서는 오직 어떤 한 상품이 가치척도로 역할함으로써 화폐가 된다. 그러나 세계시장에서는 두 개의 가치척도 [즉, 금과 은]가 지배한다. (주석 59: 그러므로 한 나라의 은행들로 하여금 국내에서 화폐로 유통하고 있는 귀금속만을 준비금으로 보유하게 하는 온갖 입법들은 불합리하다. 예컨대 뱅크 오브 잉글랜드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조성한 '즐거운 곤란'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금과 은의 상대적 가치의 변동이 심했던 역사상의 시대들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155 이하를 보라. 로버트 필(Robert Peel)은 그가 제정한 1844년의 은행법에서 뱅크 오브 잉글랜드에 대해 은 보유가 금 보유의 1/4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을 허가함으로써 이 곤란을 극복하려고 했다. 이때 은의 가치는 런던시장의 은의 시장가격(금에 대한)에 따라 평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엥겔스; 우리는 이제 다시 금과 은의 상대적 변동이 심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약 25년 전에는 금 대 은의 가치 비율은 15 1/2 : 1 이었으나 지금은 대략 22 : 1이고, 아직도 계속 금에 대한 은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주로 이 두 금속의 생산방법의 변혁의 결과다. 이전에는 금은 거의 전부가 금을 함유한 충적지층[즉, 금을 함유한 암석의 풍화물]의 세광(洗鑛)에 의해 얻었다. 현재는 이 방법은 벌써 불충분한 것으로 되었으며, 금을 포함하고 있는 석영광(石英鑛: quartz lodes) 그 자체의 정련 [벌써 고대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으나(디오도로스, 제3권, 12-14결) 이때까지는 부차적으로만 실시되고 있던 방법]에 의해 쫓겨나고 있다. 다른 한편, 미국의 로키산맥 서부에서 새로운 대규모 은광맥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이 은광과 멕시코 은광이 철도의 개통으로 근대적 기계와 연료를 쉽게 공급받아 은을 최대규모로 또 최소비용으로 채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금속이 광맥 속에 존재하는 형태는 판이하다. 금은 대체로 혼합물이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 대신 매우 적은 양으로 석영 속에 산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금을 채취하는 데는 많은 광석을 분쇄해 금을 물로 일궈 내든지 수은으로 추출해 내야 한다. 1백만 그램의 석영에서 겨우 1 내 지 3 그램의 금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30-60그램의 금이 나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다. 은은 혼합물 없이 순수한 형태로 나오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그 대신 [비교적 쉽게 광맥 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독특한 광석 안에 있으며, 또 이와 같은 광석에는 보통 40-90%의 은이 포함되어 있다. 은은 비록 소량이기는 하지만 구리나 아연 등 그 자체로서 채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광석 속에 포함되어 있다. 벌써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금의 생 산에 지출되는 노동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으나 은의 생산에 지출되는 노동은 결정적으로 감소 했기 때문에 은의 가치하락은 매우 당연하다. 이와 같은 가치하락은, 만약 은의 가격을 현재에 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인위적 수단에 의해 높게 유지하지 않는다면, 더 격심하게 하락할 것이다. 미국의 은 매장은 이제 겨우 그 일부만 채굴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은 가치는 아직 도 오랜 시일에 걸쳐 계속 하락할 전망이다. 또 여기에는, 일용품과 사치품을 위한 은 수요의 상대적 감소[즉, 은도금 제품과 알루미늄 등등이 은을 대체한다]도 이 경향을 조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국제적인 강제적 시세조작에 의해 금에 대한 은의 가치를 종전 의 비율인 1 : 15 1/2 까지 다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는 복본위론자(復本位論者: bimetalist) 들의 생각은 공상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은은 세계시장에서 점점 더 화폐로서의 자격을 상실 하게 될 것이다.})
    세계화폐는 일반적 지불수단, 일반적 구매수단, 그러고 부:富) 일반의 절대적 . 사회적 체현물(體現物)로 기능한다. 세계화폐의 주된 기능은 국제수지의 결제를 위한 지불수단이다. 이로부터 중상주의의 구호, 즉 무역차액(貿易差額)(주석 60: 중상주의는 금과 은에 의한 무역흑자의 결제를 국제무역의 목적으로 취급하지만 그 반대자들도 역시 세계화폐의 기능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다. 유통수단의 양을 규제하는 법칙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어떻게 귀금속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가는 내가 이미 리카도를 예로 들면서 상세하게 지적했다.(“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174). “무역적자는 오로지 유통수단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 주화가 수출되는 것은, 그것이 싸기 때문이고 무역적자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이다.” 라는 리카도의 그릇된 설명은 다음과 같은 바본의 말에서도 볼 수 있다. “무역의 차액은(만약 그러한 것이 나타난다면) 어떤 나라로 하여금 화폐를 수출하도록 하는 원인은 아니다. 이 화폐의 수출은 금은덩어리의 가치가 각 나라마다 다른데 기인한다. ”(N. 바본, 앞의 책, p. 59, 60) 매컬록(MacCulloch)은 “정치경제학 문헌분류목록”(런던, 1845)에서, 바본의 이 선견지명을 찬양하고 있으나, 그는 또 용의주도하게도 바본의 저서에서 가장 소박한 형태로 나타나 있는 ‘통화주의(通貨主義: currency principle) 의 불합리한 전제들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회피하고 있다. 이 목록의 무비판성과 심지어 불확실성은 화폐이론의 역사에 관한 편들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매컬록은 거기에서 오버스톤(이전의 은행가 로이드)을 ‘제1의 은행가’라고 부르면서 아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왔다. 금과 은이 국제적 구매수단으로 역할하는 것은 주로 여러 나라들 사이의 생산물 교환의 종래의 균형이 갑자기 파괴되는 때이다. 끝으로, 세계화폐가 부의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적 체현물로 역할하는 것은, 구매나 지불에서가 아니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부기 이전되는 경우이며, 그리고 상품형태에 의한 부의 이전(移轉: transfer)이 상품시장의 경기 상황이나 이전 목적 그 자체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에 그러하다.(주석 61: 예컨대 해외에 대한 지원금, 전쟁수행을 위한 대출금 또는 은행의 금태환 재개를 위한 대출금등의 경우, 가치는 바로 화폐형태로 요구돨 것이다.)
    각국은 국내유통을 위해 준비금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시장의 유통을 위해서도 준비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퇴장화폐의 기능들은 부분적으로는 국내의 유통수단과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부터 발생하며, 부분적으로는 세계화폐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부터 발생한다.( 주석 62: “금태환국(金兌換國: 금속화폐가 유통하는 나라)에서 퇴장화폐가 일반적 유통화폐로부터 이렇다할 도움 없이 국제적 채무결제를 능률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증거로서는, 프랑스가 일찍이 파괴적인 외적(外敵) 침입의 타격으로부터 겨우 회복하고 있던 당시, 자국에 부과된 약 2 천만 파운드 스털링의 배상금[그 대부분은 금화]을 자기의 국내통화에 이렇다할 아무런 수축 이나 교란도 일으키지 않고, 또 자국의 환율에 큰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27개월 안에 지불했 다는 사실 이상으로 더 확실한 증거를 바랄 수는 없다"(풀라턴, 앞의 책 p. 141). {엥겔스: 우 리가 알고 있는 더 적절한 실례는 프랑스가 1871-1873년에 그 10배 이상에 달하는 전쟁배상 금의 대부분을, 마찬가지로 금속화폐로 30개월 동안 쉽게 지불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후자의 역할을 위해서는 언제나 현실적인 화폐상품, 즉 금과 은의 실물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rt)는 금과 은을 [그 단순한 국지적 대리물(局地約 代理物: local representative)과 구별하기 위해] '세계화폐'라 부르고 있다.
    금과 은의 흐름은 두 개의 방향이다. 한편으로 금과 은은 자기의 원산지로부터 세계시장 전체로 흘러나가, 각 나라의 국내 유통분야에 흡수되어 그 나라들의 국내 유통수로에 들어가며, 마멸된 금과 은의 주화를 보충하고, 사치품의 재료를 제공하며, 퇴장화폐로서 응고한다.(주석 63: “화폐는....언제나 생산물에 이끌리어....화폐에 대한 각국의 필요에 따라 그들 사이에 배분된다"(르 트로느, ?사회적 이익에 대해?, p.916). "끊임없이 금과 은을 산출하는 광산들은 각국에 이와 같은 필요량을 공급하는 데 충분하다"(J. 반더린트, ?화폐만능론?, p. 40).) 이 흐름은 상품에 실현되어 있는 각국의 노동과, 귀금속에 실현되어 있는 금은 생산국의 노동 사이의 직접적 교환에 의해 매개된다. 다른 한편으로 금과 은은 각국의 유통분야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는데, 이 흐름은 환율의 끊임없는 변동에 뒤따라 일어난다. (주석 64: "환율은 매주 오르거나 내리며, 1년 중 어떤 특정한 시기에는 한 나라에 불리하게 높아지고, 또 다른 시기에는 유리하게 높아진다"(N. 바본, 앞의 책, p. 39).)
    부르주아적 생산이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에서는 [은행의 금고에 집적되는] 퇴장화폐는 자기의 독특한 기능에 필요한 최소한도로 제한된다.(주석 65: 이들 여러 가지 기능은 금과 은이 은행권의 태환준비금(兌換業備金)으로 역할해야 하는 경우에는 상호 위험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이 퇴장화폐가 그 평균 수준을 크게 능가하는 것은 상품유통의 경제[즉, 상품변태의 진행의 중단]를 가리킨다.(주석 66: 국내 사업에 절대로 필요한 양 이상의 화폐는 죽은 자본이고....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에 아무런 이익도 가져오지 않으므로 외국무역에서 수입되거나 수출되거나 한다"(J. 벨러즈, 앞의책, p. 13). "만약 우리가 너무 않은 주화? 가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녹여 금은제(金銀製)의 화려한 접시나 그를 또는 집기를 만들든지, 또는 그것이 요망되는 곳에 상품으로 보내든지, 또는 이자가 높은 곳에 이자를 받고 빌려주든지 해야 할 것이다"(W. . 페티, ?화폐소론?, p. 39). "화폐는 국민의 지방(脂肪: fat)에 지나지 않는다. 지방이 과다하면 국민의 민활성을 방해하는 일이 많고 또 과소하면 국민을 병들게 한다....지방은 근육의 운동을 원활하게 하며, 영양이 부족할 때 그것을 보충하며, 주름살을 펴주며, 그리하여 신체를 아름답게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화폐도 그 나라의 행동을 민첩하 게 하며 국내에 기근이 있을 때 외국으로부터 식량을 가져오며, 채무를 갚으며.....전체를 아름 답게 한다. 하기는 그것을 듬뿍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인간들을 주로 더 아름답게 해주고 있지만 "(W. 페터,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 pp. 14 -15).)



    제 2 편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




    제 4 장 자본의 일반공식
    제 5 장 자본의 일반공식의 모순
    제 6 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제 4 장
    자본의 일반공식



    상품유통은 자본(資)의 출발점이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 그리고 상품유통의 발달된 형태인 상업(商業)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을 이룬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때로부터 현대적인 자본의 역사가 시작된다.
    상품유통의 소재적 내용[즉, 사용가치의 교환]을 무시하고 다만 이 유통과정에 의해 발생하는 경제적 형태만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의 최후의 산물로 화폐를 발견하게 된다. 상품유통의 이 최후의 산물은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現象形態: form of appearance)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은 반드시 처음에는 화폐의 형태로 [다시 말해 화폐재산, 상인자본, 고리대자본의 형태로] 토지계산에 대립한다.(주석 1: [신분적 지배,. 예속관계에 근거하는] 토지소유 권력과 화폐의 비신분적 권력 사이의 대립은 다 음과 같은 두 개의 프랑스 속담에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영주없는 토지는 없다. " "화폐에는 주인이 없다. ") 그러나 화폐가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라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자본의 기원(起源)을 회고해 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자본은 처음에는 언제나 화폐[일정한 과정을 거쳐 자본으로 전환할 화폐]의 형태로 무대에, 즉 시장[상품시장이나 노동시장이나 화폐시장]에 등장하고 있다.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우선 양자의 유통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상품유통의 직접적 형태는 C-M-C [즉, 상품의 화폐로의 전환과 화폐의 상품으로의 재전환, 다시 말해 구매를 위한 판매]이다. 그러나 이 형태와 아울러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 즉 M-C-M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환과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환, 다시 말해 판매를 위한 구매]을 발견하게 된다. 후자의 형태로 유통하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하여 자본이 되고, 그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자본이다.
    이제 유통 M-C-M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이 유통은 단순한 상품유통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국면을 통과한다. 제1국면인 M-C(구매)에서는 화폐가 상품으로 전환한다. 제2국면인 C-M(판매)에서는 상품이 화폐로 재전환한다. 그러나 이 두 국면의 통일은, 화폐를 상품과 교환한 다음 그 상품을 다시 화폐와 교환한다는 단일운동[즉,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구매한다는 단일운동]을 가리킨다. 또는 구매와 판매 사이의 형식적 차이를 무시한다면, 화폐로 상품을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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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6
    그 조직은 상품생산자의 배후에서 이미 짜여진 것이고 또 계속해 짜여지고 있다. 아마도 한 상품은 어떤 새로운 종류의 노동의 생산물일 수도 있으며, 어떤 새로운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어떤 새로운 욕망을 창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는 동일한 상품생산자의 많은 작업 중의 하나였던 어떤 작업이 오늘은 그 관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하고, 그 부분생산물을 이제는 독립상품으로 시장에 내보내게 된다. 주위의 사정은 이 분리과정을 위해 성숙되어 있을 수도 있고 성숙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는 생산물이 내일에는 어떤 유사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더욱이 아마포 직포자의 노동이 비록 사회적 분업의 일환으로 공인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그의 20미터의 아마포가 유용하리라는 보장은
    되지 않는다. 만약 [기타의 모든 사회적 욕망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한계가 있는 아마포에 대한 사회적 욕망이 벌써 그 경쟁자들에 의해 충족되어 버렸다면, 우리 친구의 생산물은 여분(餘分)의 것으로, 따라서 쓸모없는 것으로 된다. 만약 선물로 줄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우리의 친구는 결코 선물로 주기 위해 시장에 간 것은 아니다. 그의 생산물이 사용가치를 유지하며 따라서 화폐와 교환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번에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화폐와 교환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상품의 가격[즉, 상품의 가치량의 지표]에 의해 예상되고 있다. 여기서 상품 소유자의 주관적인 계산착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곧바로 객관적으로 정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자기의 생산물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평균노동 시간만을 지출했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그 상품의 가격은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사회적 노동량의 화폐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포 직포업의 종래의 생산조건이 우리의 아마포 직포자의 동의도 없이 그의 배후에서 급변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제까지는 틀림없이 1미터 아마포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었던 것이 오늘은 그렇지 않게 된다. 그것은 화폐소유자가 우리 친구의 여러 경쟁자들이 내놓은 가격에 근거해 열심히 증명하는 바이다. 우리 친구에게 불행한 일은, 세상에는 동업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시장에 있는 모든 조각의 아마포에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포함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각들의 총량(總量)은 과잉으로 지출된 노동시간을 포함할 수 있다. 만약 시장이 아마포의 총량을 미터당 10전이라는 정상적인 가격에서는 흡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사회적 총 노동시간 중 너무나 많은 부분이 아마포 직포의 형식으로 지출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결과는 각각의 개별 직포자가 자기의 개인적 생산물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을 지출한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죽더라도 다 함께'라는 식이다. 시장에 있는 모든 아마포는 단 한 개의 거래품목으로 간주되고, 그 어떤 한 조각도 그것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1미터의 가치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동질의 인간노동량의 체현(體現)일 뿐이다.(역자 주: 마르크스는 1878년 11월 28일자로 다니엘슨[N. F. Danielson: ?자본론?의 러시아어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정정할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사실상 1미터의 가치는 아마포의 총량에 지출되어 있는 사회적 노동의 일부의 체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 마르크스가 가지고 있던 ?자본론?, 제1권, 독일어 제2판에 이차 같은 수정이 가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크스의 글씨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 사회의 생산유기체의 양적 편성[유기체의 각종 요소들을 분업체계로 통합하는 것]은 그 질적 편성과 마찬가지로 자연발생적이고 우연적이다. 그러므로 상품소유자들은, [자기들을 독립된 사적 생산자로 만드는] 바로 그 분업이 사회적 생산과정과 이 과정에서의 그들의 관계를 그들 자신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과, 그들 상호간의 독립성은 그들의 생산물을 통한 전면적인
    상호의존체제에 의해 보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분업은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전환시키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생산물의 화폐로의 전환을 불가피하게 한다. 동시에, 분업은 이 전환의 성공 여부를 우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현상을 순수한 상태에서 고찰해야 하기 때문에, 전환의 정상적인 진행을 전제할 것이다. 어쨌든 상품이 팔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형태변환은 항상 일어난다. 비록 변환되는 실체-가치량-가 비정상적으로 감소하거나 증가할 수도 있지만 판매자는 자기의 상품을 금과 바꾸며, 구매자는 자기의 금을 상품과 바꾼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상품과 금이 [즉, 20미터의 아마포와 2원이] 소유자의 손과 위치를 바꾸었다는 사실, 즉 그것들이 서로 교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상품은 무엇과 교환되는가? 그 자신의 가치(價値)가 취하는 일반적 모습과 교환된다. 그리
    고 금은 무엇과 교환되는가? 그 자신의 사용가치(使用價値)의 하나의 특수한 모습과 교환된다. 어째서 금은 아마포에 대해 화폐로 대립하는가? 2원이라는 아마포의 가격, 즉 아마포의 화폐 명칭이 벌써 화폐로서의 금에 대한 아마포의 관계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이 그 본래의 상품형태를 벗어버리는 것은 상품의 판매에 의해 완수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사용가치가 [그 상품의 가격에 오직 상상적으로만 표현되어 있는] 금을 현실적으로 자기 측에 끌어오는 그 순간에 완수된다. 그러므로 상품가격의 실현[즉, 상품의 단순한 관념적인 가치형태의 실현]은 동시에 역( 逆)으로 화폐의 단순한 관념적인 사용가치의 실현이며, 상품의 화폐로의 전환은 동시에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환이다. 이 하나의 과정은 이면적(二面的)인 과정으로서, 상품소유자의 측에서는 판매이고 반대의 극인 화폐소유자의 측에서는 구매이다. 바꾸어 말해, 판매는 구매이며, C-M은 동시에 M-C이다.(주석 17: "모든 판매는 구매다"(케네, ?상업 및 수공업자의 노동에 대한 대화“, ?중농학파?, 데르 편, 제1부, 파리, 1846년, p. 170). 또는 케네가 그의 ?일반준칙? 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는 "파는 것은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경제적 관계는 상품소유자들 사이의 관계[자기의 노동생산물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줌으로써만 다른 사람의 노동생산물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관계]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품 소유자에게 다른 사람이 화폐소유자로서 상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후자의 생산물이 처음부터 화폐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든지[즉, 화폐재료인 금이든지], 또는 후자의 상품이 벌써 그 본래의 유용한 물건 형태를 벗어버렸기 때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금이 화폐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어떤 지점에서 상품시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지점은 금의 생산지인데, 거기에서 금은 직접적인 노동생산물로 동일한 가치의 다른 노동생산물과 교환된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금은 언제든지 어떤 상품의 실현된 가격을 표현한다.(주석 18: "한 상품의 가격은 오직 다른 상품의 가격으로 지불할 수 있다"(메르시에 드라 리비에르[Mercier de la Riviere), ?정치사회의 자연적 및 본질적 질서?, 데르 편, ?중농학파?, 제2부, p. 554).) 금의 생산지에서 상품과 금이 교환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금은 어떤 상품소유자의 수중에 있든 그가 양도한 상품의 전형(轉形)된 형태이며, 판매[즉, 제1의 상품 변태인 C-M]의 산물이다.(주석 19: "화폐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먼저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같은 책, p. 543)) 금이 관념적 화폐 또는 가치척도로 된 것은, 모든 상품이 자기의 가치를 금으로 측정하며 그리하여 금을 자기들의 가치모습[재화로서의 자기들의 본래의 모습의 상상적인 대립물]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이 실제의 화폐로 된 것은, 상품들이 자기들의 전면적인 양도에 의해 재화로서의 자기들의 본래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금을 자기들의 가치의 현실적인 화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치모습을 취하면 상품은 그 본래의 사용가치[또한 그 상품을 창조한 특수한 유용노동]의 온갖 흔적을 벗어버리고 무차별적 인간 노동의 한결같은 사회적 체현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화폐를 보아서는 [그것으로 전환된] 상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화폐형태 하에서는 모든 상품이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쓰레기가 결코 화폐는 아니지만 화폐는 쓰레기를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의 아마포 직포자가 자기의 상품을 양도하고 얻은 두 개의 금화는 이전에 1쿼터의 밀이 전환된 형태라고 가정하자. 아마포의 판매[C-M]는 동시에 아마포의 구매[M-C]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마포의 판매의 측면에서 보면 성경책의 구매로 끝나는 과정을 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아마포의 구매의 측면에서 보면 밀의 판매로부터 시작된 운동을 끝내는 것이다. C-M-C(아마포-화폐-성경책)의 첫 단계인 C-M(아마포-화폐)은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운동 C-M-C(밀-화폐-아마포)의 마지막 단계인 M-C(화폐-아마포)이다. 어떠한 상품의 제1변태[즉, 상품형태로부터 화폐로의 전환]는 언제나 다른 한 상품의 제2[반대의] 변태, 즉 화폐형태로부터 상품으로의 재전환이다.(주석 20: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금이나 은의 생산자는 예외인데, 그는 자기의 생산물을 미리 판매하지 않고도 다른 것과 교환한다.)

    M-C. 상품의 제2의 또는 최종의 변태, 즉 구매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의 전환된 모습, 또는 그것들의 일반적 양도 (讓渡)의 산물이므로 아무런 제약이나 조건없이 양도할 수 있는 상품이다. 화폐는 모든 가격을 반대방향으로 읽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화폐 자신의 상품화에 재료를 제공하는 모든 상품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l원=1미터의 아마포, 또는 1그램의 커피, 또는 1개의 저고리 등을 생각하라.} 그와 동시에 상품의 가격[즉, 상품들이 화폐에 던지는 사랑의 눈짓]은 화폐의 전환능력의 한계를, 즉 화폐 자신의 양을 표시한다. 상품은 화폐로 되면 그 자체는 사라져 버리므로 화폐만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떻게 그 소유자의 손에 들어왔는지 무엇이 그것으로 전환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화폐가 어디로부터 왔건 화폐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화폐는 한편으로는 판매한 상품을 대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매할 상품을 대표한다.(주석 21: "우리 수중에 있는 화폐는 우리가 구매하려는 물건들을 대표하며, 또한 우리가 이 화폐를 받고 판매한 물건들을 대표한다"(메르시에 드 라 라비에르, 앞의 책, p. 586).)
    M-C[구매]는 동시에 C-M(판매)이다. 따라서 어떤 상품의 최후의 변태는 동시에 다른 상품의 최초의 변태이다. 우리의 아마포 직포자에게 그의 상품의 생애는 그가 2원을 재전환시킨 성경책으로 끝난다. 그러나 성경책의 판매자는 아마포 직포자로부터 받은 2원을 위스키로 전환시킨다고 하자. M-C, 즉 C-M-C(아마포-화폐-성경책)의 최종단계{최종변태}는 동시에 C-M, 즉 C-M-C(성경책-화폐-위스키)의 제1단계다. 상품생산자는 오직 어떤 한 가지 생산물만을 시장에 공급하기 때문에 그는 생산물을 보통 대량으로 판매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욕망은 다방면에 걸치므로 실현된 가격[즉, 손에 넣은 화폐액]을 끊임없이 수많은 구매로 분산시키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판매는 여러 가지 상품의 수많은 구매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한 상품의 최종변태는 다른 상품들의 제1변태의 합계로 이루어지고 있다{성경책을 판 사람이 위스키뿐 아니라 구두 . 신문 . 아이스크림 등등을 산다.}
    이제 여기서 한 상품의 변태 전체를 고찰해 보면,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상호보완적인 두 개의 반대의 운동, 즉 C-M 과 M-C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상품의 이 두 가지 반대의 변태는 상품소유자가 참가하는 두 개의 반대의 사회적 과정을 통해 행해지며, 또 그 상품소유자의 두 개의 반대의 경제적 역할에 반영된다. 그는 판매의 당사자로서는 판매자로 되며, 구매의 당사자로서는 구매자로 된다. 그러나 상품의 변태에서 상품의 두 형태인 상품형태와 화폐형태는 오직 서로 대립하는 두 극에서만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동일한 상품소유자도 그가 판매자인 경우에는 다른 사람은 구매자로 대립하고, 그가 구매자인 경우에는 다른 사람은 판매자로 대립한다. 동일한 상품이 서로 반대되는 두 변태[즉, 상품으로부터 화폐로, 또 화폐로부터 상품으로의 변태]를 연속적으로 경과하는 것처럼, 동일한 상품소유자가 역할을 바꾸어 가면서 판매자로도 구매자로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판매자로 되는 것과 구매자로 되는 것은 결코 고정된 역할이 아
    니고 상품유통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경된다.
    한 상품의 변태 전체는, 그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도, 4개의 극과 3인의 등장인물을 전제로 한다(역자 주: 밀 - 화폐 - 아마포
    아마포 -화폐 - 성경책
    성경책 - 화폐 -위스키) 우선 상품은 그 가치모습으로서의 화폐와 대면하는데, 이 화폐는 구매자의 주머니 속에서 견고한 물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상품소유자는 화폐소유자와 대립한다. 이제 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면 그 화폐는 상품의 일시적인 등가형태로 되는데, 이 등가형태의 사용가치는 다른 상품체들 속에서 발견된다. 제1의 상품변태의 종점으로서의 화폐는 동시에 제2변태의 출발점으로 된다. 따라서 제1변태에서의 판매자는 제2변태에서는 구매자로 되며, 거기에서는 제3의 상품소유자가 판매자로 그에게 대립한다.(주석 22: "따라서 4개의 종점과 3인의 계약당사자가 있고, 그 중의 한 사람은 두 번 등장한다"( 르 트로느, 앞의 책, p. 909).)
    상품변태를 이루는 서로 반대방향의 두 운동국면은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즉, 상품형태, 상품형태의 탈각, 상품형태로의 복귀가 그것이다. 어쨌든 상품 그 자체는 여기서는 모순적으로 규정된다.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 출발점에서는 비사용가치고 종점에서는 사용가치다. 또한 화폐도 첫째 국면에서는 상품이 전환된 견고한 가치결정체로 나타나지만, 둘째 국면에서는 상품의 순간적인 등가형태로 해소되어 버린다.
    어떤 하나의 상품의 순환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변태는 동시에 다른 두 개의 상품의 반대방향으로의 부분적 변태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상품(아마포)이 그 자신의 변태의 계열을 개시하는 동시에 다른 상품(밀)의 변태를 종결짓는다. 아마포는 자기의 제1변태인 판매에서는 이와 같은 두 개의 역을 한 몸으로 연출한다. 그러나 일단 금으로 전환된 뒤에는, 그것은 그 자신의 제2의 최종적인 변태를 완성하고, 그와 동시에 제3의 상품의 제1변태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이와 같이 각
    상품의 변태계열이 그리는 순환은 다른 상품들의 여러 순환과 뗄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 이러한 과정 전체가 상품유통(circulation of commodities)을 구성한다.
    상품유통(商品流通)은 형태에서뿐 아니라 본질에서도 직접적 생산물교환{물물교환}과는 구별된다. 사태의 경과를 잠시 되살펴 보자. 아마포 직포자는 사실상 아마포를 성경책과, 즉 자신의 상품을 타인의 상품과 교환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오직 그 자신에게만 진실인 것이다. 차가운 책보다는 뜨거운 위스키를 좋아하는 성경책 판매자는 성경책을 주고 아마포를 손에 넣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마포 직포자도 밀이 자기의 아마포와 교환되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B의 상품이 A의 상품으로 바꾸어지지만, A와 B가 서로 자기들의 상품을 교환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A와 B가 상호간 서로 구매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이와 같은 특수한 관계는 상품유통의 일반적 조건들에 의해 생기는 필연적 결과는 결코 아니다 상품유통에서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상품교환이 어떻게 직접적인 생산물교환의 개인적 및 지방적 한계를 타파하고 인간노동의 물질대사를 발전시키는가를 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교환이 어떻게 완전히 당사자들의 통제밖에 있는 자연발생적인 사회적 연결망을 발전시키는가를 보게 된다. 직포자가 아마포를 팔 수 있는 것은 농민이 이미 밀을 팔았기 때문이고, 애주가가 성경책을 팔 수 있는 것은 직포자가 이미 아마포를 팔았기 때문이며, 위스키 양조업자가 위스키를 팔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미 영원한 생명의 물 {성경책}을 팔았기 때문이다. 등등.
    그러므로 유통과정은 직접적 생산물교환과 같이 사용가치의 장소나 소유자를 바꾸는 것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 화폐는 한 상품의 변태계열로부터 마지막으로 탈락한다고 하더라도 소멸하지는 않는다. 화폐는 언제나 상품들이 비워준 장소에 가라앉는다. 예컨대, 아마포의 총변태(아마포-화폐-성경책)에서는, 우선 아마포가 유통에서 탈락하고 화폐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그 다음 성경책이 유통에서 탈락하고 화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 상품이 다른 상품을 대체하면 화폐상품은 제3자의 손에 붙게 된다.(주석 23: 이 현상은 매우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 특히 속류자유무역론자들은 대체로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유통은 끊임없이 화폐라는 땀을 쏟아낸다.
    모든 판매는 구매이고 모든 구매는 판매이기 때문에, 상품유통은 판매와 구매 사이의 필연적인 균형을 낳는다는 이론처럼 황당무계한 이론도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현실에서 행해진 판매의 수가 현실에서 행해진 구매의 수와 동일하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판매자가 자기 자신의 구매자를 시장에 데려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판매와 구매는 대극적(對極的)으로 대립하고 있는 두 인물, 즉 상품소유자와 화폐소유자 사이의
    교환관계로서는 하나의 동일한 행위이다. 그러나 판매와 구매는 동일한 인물의 행동으로서는 대극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행위다. 그러므로 판매와 구매의 동일성 {C-M}은, 만약 상품이 유통이라는 연금술사의 증류기 속에 투입된 뒤 화폐의 모습으로 다시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즉, 상품소유자에 의해 판매되지 못하며 따라서 화폐소유자에 의해 구매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상품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동일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즉, 만약이 과정(C-M)이 완성된다면 그 상품은 더 이상의 변태를 중단하고 장단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도 내포하고 있다. 상품의 제1변태는 판매이기도 하고 구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부분과정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구매자는 상품을 가지게 되고 판매자는 화폐[즉, 언제나 유통할 수 있는 형태의 상품]를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 누군가가 구매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판매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 자신이 판매했다고 해서 즉시로 구매할 필요는 없다. 유통은 물물교환에 존재하는 [자기 생산물의 양도와 타인 생산물의 취득 사이의] 직접적 동일성을 판매와 구매라는 대립적 행위로 분열시킴으로써 물물교환의 시간적. 장소적 .개인
    적 한계를 타파한다. 서로 독립적이고 대립적인 과정들[판매와 구매]이 하나의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바로 그 과정들의 내적 통일이 외적 대립을 통해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두 과정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적으로는 독립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두 과정의 외적 독립화가 일정한 점에 도달하면 그 내적 통일은 공황(crisis)이라는 형태를 통해 폭력적으로 관철된다. 상품에는 다음과 같은 대립과 모순이 내재한다.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 사적 노동이 동시에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모순, 특수한 구체적 노동이 동시에 추상적 일반적 노동으로서만 계산된다는 모순, 물건의 인격화와 인격의 물건화 사이의 대립. 상품에 내재하는 이러한 대립과 모순이 한 상품의 변태의 대립적인 국면들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의 운동형태{예: 판매와 구매 사이의 시간적 간격}를 전개한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들은 공황의 가능성을, 그러나 오직 가능성만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상품유통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온갖 조건들이 필요하다. (주석 24: J. 밀에 대해 내가 말한 것,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p. 96-98 참조. 여기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의 변호론적 특징을 두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상품유통과 직접적 생산물교환 사이의 차이점을 무시함으로써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 둘째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당사자들의 관계[착취관계]를 상품유통에서 발생하는 단순한 관계로 해소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모순을 부정하려는 시도. 그러나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비록 그 범위와 중요성은 다를지라도] 매우 다양한 생산양식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공통적인 상품유통의 추상적 범주들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 생산양식들의 특징적 차이점을 전혀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판단할 수 없다. 초보적인 평범한 것을 가지고 그처럼 굉장히 떠들어대는 것은 경제학 이외의 다른 과학에서는 없는 일이다. 예컨대, J. B. 세이는, 상품이 생산물이라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해서 공황에 관해 판단을 내리려고 덤벼든다{그는 생산물과 생산물 사이의 교환을 전제로 공황(과잉 생산)의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b) 화폐의 유통


    노동생산물의 물질대사가 완수되는 형태변환 C- M- C는, 동일한 가치가 상품으로서 과정의 출발점이 되고, 또 상품으로서 다시 동일한 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상품운동은 순환(循環)이다. 다른 한편, 이 운동형태는 화폐를 순환으로부터 배제한다. 그 결과 화폐가 그 출발점으로부터 끊임없이 멀리 떨어져나 가고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없다. 판매자가 자기 상품의 전환된 모습(즉, 화폐)을 붙잡고 있는 동안은 상품은 여전히 제1변태의 단계에
    있고, 그 유통의 전반(前半)을 경과했을 뿐이다. 그의 판매가 구매에 의해 보완되자마자, 화폐는 그 본래의 소유자의 손으로부터 또다시 멀어진다. 물론 아마포 직포자가 성경책을 구매한 뒤 또 다른 아마포를 판매한다면 화폐는 자기의 수중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화폐는 최초의 20미터의 아마포의 유통에 의해 되돌아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유통은 이미 화폐를 아마포 직포자의 수중으로부터 성경책 판매자의 수중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화폐가 직포자에게 들어오는 것은 새로
    운 상품으로 동일한 유통과정을 새로 시작하거나 반복하기 때문이며, 이 경우도 이전의 과정과 마찬가지 결과로 끝난다. 그러므로 상품유통이 화폐에 직접 부여하는 운동형태는 화폐가 출발점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져간다는 것, 화폐가 어떤 상품소유자의 수증으로부터 다른 상품소유자의 수중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화폐의 유통이다.
    화폐의 유통은 동일한 과정의 끊임없는 단조로운 반복이다. 상품은 언제나 판매자측에 있고 화폐는 구매수단으로 언제나 구매자측에 있다. 화폐는 상품의 가치를 실현시킴으로써 구매수단으로 기능한다. 화폐는 가격을 실현하면서 상품을 판매자의 수중으로부터 구매자의 수중으로 이전시키며, 그와 동시에 자신은 구매자의 손으로부터 판매자의 손으로 넘어가는데, 거기에서 또한 다른 상품에 대해 동일한 과정을 반복한다. 화폐운동의 이 일면적인 형태가 상품운동의 양면적인 형태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은 감추어져 있다. 상품유통의 성질 그 자체가 바로 이러한 외관을 빚어낸다. 상품의 제1변태는 화폐의 운동일 뿐 아니라 상품 자체의 운동으로 보이지만, 상품의 제2변태는 오직 화폐의 운동인 것처럼 보인다. 상품은 그 유통의 전반에서 화폐와 위치를 바꾼다. 그와 동시에 상품의 사용대상으로서의 모습은 유통에서 탈락하여 소비로 들어간다.(주석 25: 같은 상품이 여러 차례 판매되는 경우[이러한 현상은 아직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지만]에도 그 상품이 최종적으로 팔리면 유통영역을 떠나 소비영역으로 들어가 생활수단 또는 생산수단으로 역할한다.) 그 자리를 상품의 가치모습[즉, 화폐라는 유충(幼蟲)]이 차지한다. 상품은 유통의 후반을 더 이상 그 자신의 자연적인 모습대로가 아니라 화폐의 모습으로 통과한다. 이와 함께 운동의 연속성은 전적으로 화폐측에 달려 있으며, 이 동일한 운동이 상품의 입장에서는 두 개의 반대 과정을 포함하지만 화폐의 운동으로서는 언제나 동일한 과정[즉, 화폐와 다른 상품과의 끊임없는 자리바꿈]이다. 그러므로 상품유통의 결과[즉, 다른 상품에 의한 한 상품의 교체]는 마치 그 상품 자신의 형태변환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니라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의해 매개된 듯이 보이며, 마치 화폐가 [그 자체로서는 운동하지 않는] 상품을 유통시켜, 상품을 [그것이 비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것이 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 언제나 화폐 자신의 진행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이전시키는 듯이 보인다. 화폐는 끊임없이 상품이 차지하고 있던 유통장소를 차지하며,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출발점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나가면서, 상품을 끊임없이 유통영역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러므로 화폐유통은 사실상 상품유통의 표현에 지나지 않지만, 외관상으로는 반대로 상품유통이 화폐운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인다.(주석 26: "그것(화폐)은, 생산물에 의해 그것에 부여되는 운동밖에는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는다"(르 트로느, 앞의 책, p. 885).)
    다른 한편, 화폐가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상품가치가 화폐에서 독립적인 모습을 가지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운동은 실제로는 상품 자신의 형태변환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상품의 변태는 일목요연하게 화폐유통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엥겔스; 예컨대, 아마포는 우선 자기의 상품형태를 자기의 화폐형태로 바꾼다. 아마포의 제1변태(C-M)은의 두번째 항인 화폐형태는 다음에는 아마포의 최후의 변태(M-C), 즉 아마포의 성경책으로의 재전환의 첫번째 항으로 된다. 그러나 두 형태변환 중 어느 것도 상품과 화폐의 교환을 통해 [즉, 그것들 상호간의 위치변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동일한 화폐조각이 상품의 양도된 모습으로 판매자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절대적으로 양도가능한 형태의 상품으로 그 수중으로부터 떠나간다. 화폐는 두 번 위치를 바꾼다. 아마포의 제1변태는 이 화폐조각을 직포업자의 주머니 속에 넣어주며, 제2변태는 그것을 다시 끄집어낸다. 이와 같이 동일한 상품이 겪는 대립적인 두 형태변환은 동일한화폐조각이 겪는 반대방향으로의 화폐의 두 번의 위치변환에 반영된다.
    오직 일면적인 상품변태[즉, 판매나 구매 중 어느 하나]가 이루어지면, 동일한 화폐는 한 번만 위치를 바꾼다. 이 화폐의 제2의 위치변환은 언제나 상품의 제2변태[즉, 화폐로부터 상품으로의 재전환]를 표현하고 있다. 동일한 화폐조각의 위치변환의 빈번한 반복은 어떤 단하나의 상품의 변태계열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품세계 전체의 무수한 변태들의 뒤엉킨 관계도 반영하고 있다. } 그러나 물론 이 모든 사실은 오직 [여기서 고찰하는 형태인1]단순상품유통에만 타당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명하다 {C- M- C와 M- C- M은 상이하다는 점을 장조하고 있다.}.
    어떤 상품도 유통에 처음 들어와 제1의 형태변환을 겪으면 유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거기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이 들어온다.
    이에 반해 화폐는 유통수단으로서는 언제나 유통영역에 머물러 있고 언제나 그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하여 이 유통영역이 얼마만큼의 화폐를 흡수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한 나라 안에서는 매일 동시적으로 [그러나 공간적으로 상이한 곳에서] 수많은 일면적인 상품변태가 [다시 말해, 한 편에서는 단순한 판매가,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단순한 구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상품은 그 가격에 의해 이미 상상적인 일정한 화폐량에 등치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고찰하는 직접적인 유통형태[예컨대 외상거래는 제외한다]에서는 상품과 화폐가 항상 물체로서 서로 대립하기 때문에-한 쪽은 판매라는 극(極)에 있고, 다른 쪽은 구매라는 반대 극에 있다-필요한 유통수단의 양은 이미 상품들의 가격총액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사실 화폐는 [상품들의 가격총액으로 이미 관념상 표현되어 있는)]금량을 현실적으로 대표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총액이 동등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상품가치가 불변인 경우에도 상품가격은 금(화폐재료)의 가치와 함께 변동한다. 즉, 금의 가치가 떨어지면 그에 비례하여 상승하고, 금의 가치가 상승하면 그에 비례하여 떨어진다. 그리하여 금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상승
    한 결과 상품들의 가격총액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면, 그에 따라 유통되는 화폐량도 같은 비율로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많을 수 있다. 이 경우 유통수단의 양의 변동은 분명히 화폐 그 자체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척도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기인하는 것이다. 상품들의 가격이 먼저 화폐의 가치에 반비례해서 변동하고, 그로부터 유통수단의 양이 상품들의 가격에 정비례해서 변동하는 것이다.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경우-금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 아니라 은이 가치척도로서의 금을 대체하는 경우, 또는 은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금이 가치척도로서의 은을 대체하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다. 앞의 경우에는 이전의 금보다도 많은 양의 은이, 뒤의 경우에는 이전의 은보다 적은 양의 금이 유통될 것이다. 이 둘 중 어느 경우에도 먼저 화폐재료[즉, 가치척도로 기능하는 상품]의 가치가 변동하고, 그 때문에 상품가치의 화폐표현인 상품가격이 변동하고, 또 그 때문에 이들 가격의 실현에 필요한, 유통화폐량이 변동하게 될 것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상품의 유통영역에는 하나의 구멍이 있어, 그것을 통해 금[또는 은, 요컨대 화폐재료]이 일정한 가치를 가지는 상품으로 유통 영역에 들어온다. 그러므로 화폐가 가치척도로 기능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 사용될 때, 화폐의 가치는 전제되고 있다. 가치척도 그 자체의 가치가 하락하면, 그것은 우선 귀금속의 생산지에서 귀금속과 직접 교환되는 상품들의 가격변동{가격상승}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특히 부르주아사회가 털 발전한 단계에서는] 상품들의 대부분은 오랜 기간 가치척도의 종래의 가치[이미 오래 전에 비현실적으로 되었지만]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 상품은 그들 공통의 가치관계를 통해 다른 상품에 영향을 주므로, 상품들의 금가격[또는 은가격]은 점차 그들의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비율로 고정되고, 드디어 모든 상품가치가 화폐금속의 새로운 가치에 따라 평가된다. 이와 같은 조정과정은, [귀금속과 직접 교환되는] 상품의 대금으로 귀금속이 유입되기 때문에, 귀금속량의 계속적인 증대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상품들의 가격이 조정되어 가는 데 비례하여, 다시 말해 상품들의 가치가 귀금속의 새로운 가치(이미 떨어졌거나 어느 수준까지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에 따라 평가되는 데 비례하여, 그것과 같은 속도로 이 새로운 가격의 실현에 필요한 귀금속의 추가량도 이미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금은의 새로운 생산지 발견에 뒤이어 일어난 여러 사실들을 일면적으로 관찰했기 때문에, 17세기와 특히 18세기의 사람들은 상품 가격이 오른 것은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금과 은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화폐수량설에 대한 비판은 뒤에 있다.} 이하에서 우리는 금의 가치를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는데, 우리가 한 상품의 가격을 평가하는 순간에는 실제로도 주어져 있다.
    이러한 가정 하에서는 유통수단의 양은 실현되어야 할 여러 상품들의 가격총액에 의해 규정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상품의 가격을 주어진 것으로 가정한다면, 상품들의 가격총액은 분명히 유통 중에 있는 상품량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만약 1쿼터의 밀의 가치가 2원이라면 100쿼터의 밀의 가치는 200원일 것이며, 200쿼터는 400원일 것이라는 것, 따라서 밀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그것이 판매될 때 그것과 위치를 바꾸는 화폐의 양도 증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특별히 머리를 쓰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상품량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면, 유통하는 화폐량은 상품가격의 변동에 따라 증감한다. 유통화폐량이 증감하는 것은, 상품들의 가격 총액이 각 상품의 가격변동의 결과 증감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모든 상품가격이 동시에 상승하거나 하락할 필요는 없다. 상품들의 가치총액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따라서 또한 화폐의 유통량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의 주요 상품의 가격이 상승 또는 하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상품의 가격변동에 반영되는 것이 상품의 현실적인 가치변화이건 단순히 시장가격의 변동이건, 유통 수단의 양에 대한 그것의 영향은 동일하다.
    1쿼터의 밀과 20미터의 아마포와 1권의 성경책과 4갤론의 위스키가 동시에 상이한 장소에서 판매된다고 [즉, 부분적인 변태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하자. 각 상품의 가격이 2원, 따라서 실현되어야 할 가격총액은 8원이라고 한다면, 8원만큼의 화폐량이 유통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동일한 상품들이 다음과 같은 상품변태의 고리[즉, 1쿼터의 밀-2원-20미터의 아마포-2원-1권의 성경책-2원-4갤론의 위스키-2원이라는 고리]를 이루고 있다면, 2원은 여러 가지 상품을 유통시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2원은 여러 상품들의 가격을 순차적으로 실현시켜 8원이라는 가격총액을 실현시키고 나서, 최후에는 위스키 양조자의 수중에서 쉬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번 회전했으며 4
    개의 유통행위를 수행했다. 동일한 화폐조각의 이와 같은 반복적인 위치변환은 상품의 이중의 형태변환[즉, 두 해의 대립적인 유통단계를 통과하는 상품의 운동]과 각종 상품의 변태의 뒤엉킨 관계에 대응하는 것이다.(주석 27: "생산물은 그것(화폐)을 운동시키며 유통시킨다....그것(화폐)의 운동속도는 그 양을 보충해 준다. 필요한 경우 그것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아간다"(같은 책, pp. 915-916).) 이 변태과정을 이루는 대립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국면들은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연속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이 과정의 길이를 측정하는 척도로 된다. 다시 말해, 주어진 시간 안에 동일한 화폐조각의 회전횟수에 의해 화폐의 유통속도가 측정된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상품의 유통과정에 하루가 걸린다면, 실현시켜야 할 가격총액은 8원이고, 동일한 화폐조각의 1일간의 유통횟수는 4회고, 유통하는 화폐량은 2원이다. 그리하여 일정한 기간의 유통과정에서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화폐량

    상품의 가치 총액
    = -----------------------------------
    동일한 명칭의 화폐조각의 회전회수

    이 법칙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흔히 말하는 M= PT/V.}
    주어진 기간의 한 나라의 총상품유통은, 한편으로는 동일한 화폐 조각이 단 한 번만 위치를 바꾸는[1회만 유통할 뿐인] 다수의 분산적이고 동시적인 부분적 변태[즉, 일방적인 판매 또는구매]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동일한 화폐조각이 많든 적든 여러 차례 회전하는 [부분적으로는 서로 병행하고 부분적으로는 서로 뒤엉켜 있는] 수많은 변태계열로 이루어지고 있다. 각 화폐조각이 얼마나 자주 회전하는가는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통 중에 있는 동일한 명칭의 모든 화폐의 총회전회수를 알기만 하면 개개의 화폐조각의 평균회전횟수, 또는 화폐
    유통의 평균속도를 알 수 있다. 예컨대 하루의 시초에 유통과정에 투입되는 화폐량은 [나란히 동시에 유통하는] 상품들의 가격총액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유통과정 안에서는 한 개의 화폐조각{예: 10,000원 권}은 다른 화페조각{예: 5,000원 권}과 연대책임을 지고 있다. 만약 그들 중의 하나가 자기의 유통속도를 빠르게 하면, 다른 화폐조각은 유통속도가 둔화되거나 유통 영역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유통영역은 오직 일정한 금량[이 금량에 평균회전회수를 곱하면 실현되어야 할 가격총액과 같아진다]을 흡수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조각의 회전회수가 증가하면 유통과정에 있는 화폐조각의 총량은 감소하고, 화폐조각의 회전회수가 감소하면 그 양은 증가한다. 평균유통속도가 주어져 있을 때는 유통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는 화폐량도 주어지기 때문에, 일정한 수의 1 파운드 짜리 금화(sovereign)를 유통으로부터 빼내려고 한다면 동일한 수의 1 파운드 짜리 은행권을 유통에 투입하면 된다. 이것은 모든 은행이 잘 알고 있는 술책이다.
    화폐유통은 일반적으로 상품들의 유통과정[즉, 대립적인 변태들을 통한 상품들의 순환]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유통속도는 상품의 형태변환의 속도, 변태계열들의 연속적인 뒤엉킴, 사회의 물질대사의 속도, 유통분야로부터 상품들이 사라지는 속도, 그리고 또한 새로운 상품들에 의한 교체의 속도 등을 반영한다. 즉, 화폐의 유통이 빨라진다는 것은 상품이 유용한 물건모습으로부터 가치모습으로 전환하고 또 가치모습으로부터 유용한 물건모습으로 재전환한다는 대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과정들[즉, 판매와 구매]의 원활한 통일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화폐유통이 완만해진다는 것은 두 과정들이 분리되어 독립과 상호대립을 날아 형태전환[따라서 물질대사과정]에 정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유통 그 자체는 이 정체가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를 물론 가르쳐주지 않으며 다만 그 현상{예: 팔리지 않는 재고의 누적}을 보여줄 뿐이다. 통속적 견해는 이 현상을 유통수단의 양적 부족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화폐유통이 완만해짐에 따라 유통부문의 모든 곳에서 화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회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주석 28: "화폐는....판매와 구매의 일상적인 수단이므로, 판매할 물건을 가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구매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국내의 화폐부족 때문에 자기의 상품이 잘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하여 화폐가 부족하다는 불평이 도처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화폐가 필요하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농업경영자는....국내에 더 많은 화폐가 있다면 자기의 생산물을 적당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불평한다. 그렇다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고 [그가 팔기를 원하나 팔리지 않는 자기의 곡물과 가축의]적당한 가격일 것이다....어째서 그는 이 적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는가?....그 이유는 (1) 국내에 곡물과 가축이 너무 많아 시장에 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와 마찬가지로 팔려고만 하고 사기를 원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든가, 또는 (2)수송문제 때문에 평상시의 해 외판로가 두절되어 있든가. 또는 (3)사람들이 가난해져 가정생활을 위한 지출을 이전에 비해 감 축하여 소비가 감소되었든가, 그 중의 어느 하나다 그러므로 농업경영자의 생산물의 가격을 조 금이라도 올려주는 것은 화폐 그 자체의 증가가 아니라 실제로 시장을 압박하고 있는 이 세 가 지 원인 중 어느 하나를 재거하는 것이다.... 상인과 소상점주도 꼭 마찬가지로 화폐를 요구하고 있다. 즉, 시장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거래하는 물품의 판로를 구하고 있다....부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끊임없이 이전하고 있을 때 한 나라는 가장 번영한다"(더들리 노스, ?상업론 “, 런던, 1691년, pp. lI-15 이곳 저곳). 헤렌슈반트(Herrenschwand)의 모든 공상적인 제안은 결 국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상품의 본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따라서 상품유통에서 나타나는] 모 순이 유통수단을 증가시킴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산과정 및 유통과정의 정체 (停滯; stagnation)를 유통수단의 부족으로 설명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컨대 정부의 졸렬한 '통화조절(通貨調節)'로 말미암은 유통수단의 현실적 부족이 정체를 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정한 기간에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화폐의 총량은, 한편으로는 유통하는 상품의 가격총액에 의해 규정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통의 대립적 과정들의 변환속도에 의해 규정된다. 이 가격총액 중 평균적으로 몇 분의 1이 동일한 화폐조각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가는 이 변환속도에 의해 규정
    된다. 그런데 상품들의 가격총액은 각 상품종류의 양과 가격에 의존한다. 이 세 가지 요소-가격, 유통상품의 양, 그리고 화폐의 유통속도-는 각각 상이한 조건에서 다른 방향으로 변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현되어야 할 가격총액과 이것에 의해 제약되는 유통수단의 양도 역시 이 세 개 요소의 수많은 조합에 따라 변동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 조합들 중 상품가격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들어보기로 한다.
    상품가격이 불변(不變)인 경우, 유통수단의 양이 증가할 수 있는 것은 유통상품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든가 화폐의 유통속도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품량의 감소 또는 유통속도의 증가에 따라 유통수단의 양은 감소할 수 있다.
    상품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上昇)하면서, 유통수단의 양이 불변일 수 있는 것은, 유통상품의 양이 상품가격이 오르는 것과 같은 비율로 감소하는 경우나, 유통상품의 양은 불변인 채 화폐의 유통속도가 가격의 상승과 같은 속도로 증가하는 경우다. 유통수단의 양이 감소할 수 있는 것은 상품량이 가격상승보다 더 급속하게 감소하거나 유통속도가 가격의 상승보다 더 급속하게 증가하는 경우다.
    상품가격이 전반적으로 하락(下落)하면서, 유통수단의 양이 불변일 수 있는 것은, 상품가격이 하락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상품량이 증가하거나, 가격이 하락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화폐의 유통속도가 떨어지는 경우다. 유통수단의 양이 증가할 수 있는 것은, 상품가격이 하락하는 것보다 더 급속히 상품량이 증가하던가, 상품가격이 하락하는 것보다 더 급속히 유통속도가 떨어지는 경우다.
    여러 가지 요소들의 변동은 서로 상쇄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요소들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어야 할 상품가격의 총액과, 그에 따른 유통화폐량은 불변일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교적 장기간을 두고 관찰할 때, 각국에서 유통하는 화폐량은 [산업공황과 상업공황으로부터, 또 드물게는 화폐가치 자체의 변동으로부터 야기되는 주기적인 격렬한 혼란을 제외하면] 첫눈에 예상하는 것보다는 그 평균수준으로부터의 편차가 훨씬 작다.
    유통수단의 양은 유통상품의 가격총액과 화폐유통의 평균속도에 의해 규정된다는 법칙(주석 29: "한 나라의 산업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화폐에는 일정한 한도와 크기가 없다. 그보다도 많거 나 적으면 산업에 해를 미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소매상업에서 은화의 거스름돈을 주거나 최 저 액면의 은화로도 결제할 수 없는 지불을 위해 일정한 금액의 파싱 {farthing: 영국의 청동 화, 1/4페니 }이 필요한 것과 꼭 마찬가지다....이제 상업에 필요한 파싱화의 규모가 사람들의 수나 그들의 교환의 빈도로부터 추정할 수 있고 또 특히 최저 액면의 은화의 가치로부터 추정 할 수 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산업에 필요한 화폐(금화와 은화)의 크기도 역시 교환 의 빈도로부터, 또 지불액의 대소에 의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W. 페티, ?조세공납론?, 런던, 1667년, p. 17). 영(A. Young)은 그의 저서 ?정치산술?(런던, 1774년) 가운데 "물가는 화폐량에 의존한다"라는 하나의 특별한 장(p. 112 이하)에서 스튜어트(James Steuart) 등의 비 판으로부터 흄(David Hume)의 학설을 옹호했다. 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168 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그(A.. 스미스)는 전혀 그릇되게 화폐를 단순한 상품으로 고찰함으로써, 유통하는 화폐량에 관한 문제를 슬그머니 젖혀 놓고 있다." 이 말은 A. 스미스 가 자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화폐를 고찰하고 있는 곳에서만 타당하다. 그러나 그는 때 때로 예컨대 이전의 경제학설들을 비판할 때에는 옳은 발을 하고 있다. "주화량(화폐유통량)은 유통되어야 하는 상품량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며....한 나라 안에서 매년 구입. 판매되는 재화 의 가치는 그것을 유통시키고 정당한 소비자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일정한 화폐랑을 필요로 하 며, 그 이상의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다. 유통의 수로(水路: channel)는 그것을 채우기에 충분한 금액을 필연적으로 끌어들이며 그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국부론?,동아출판사, (상)419쪽, 420쪽). 이와 마찬가지로 스미스는 자기의 저서를 정식으로는 분업에 대한 예찬으 로 시작하고 있으나, 뒤에 재정수입의 원천을 논하고 있는 마지막 편에서는 때때로 자기의 스 승인 퍼거슨(Adam Ferguson)이 행한 분업 비난을 재생산하고 있다{“국부론?,(하) 272-273 쪽 참조}) 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상품들의 가치총액과 그 변태의 평균속도가 주어져 있을 때, 유통하는 화폐량[또는 화폐재료량]은 화폐 자신의 가치에 달려 있다고. 이와는 반대로, 상품가격은 유통수단의 양에 의해 결정되며, 유통수단의 양은 또한 한 나라에 존재하는 화폐재료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환상(주석 30: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들 사이에 유통하는 금과 은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물가는 분명히 올라갈 것이다. 또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금과 은이 감소할 때 모든 물가는 화폐의 이러한 감소에 비례해서 하락하지 않을 수 없다"(반더린트[Jacob Vanderlint], ?화폐만능론?, 런던, 1734년, p. 5). 반더린트의 저서와 흄의 ?논문집?을 상세히 비교해 보면, 흄이 반더린트의 이 [확실히 중요한] 저서를 알았고 또 이용했다는 것을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유통수단의 양이 가격을 규정한다는 견해는 바본(Nicholas Barbon)과 그보다도 훨씬 더 이전의 저술가들에서도 볼 수 있다. 반더린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무역에 의해서는 아무런 불편도 일어날 수 없고, 막대한 이익만이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나라의 금이 자유무역 때문에 감소한다면-보호 관세와 수입금지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그 금을 받아들이는 나라에서는 국내에 금이 늘어나서 물가가 한꺼번에 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의 공업제품과 기타 온갖 물건의 가격은 떨어져 무역수지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며, 화폐는 국내로 다시 흘러 들어오게 될 것이다"(같은 책, pp. 43-44).)은, 그 최초의 주창자들이 채택한 엉터리 가설-즉, 상품은 가격을 가지지 않고 유통과정에 들어가며, 또 화폐도 가치를 가지지 않고 유통과정에 들어가, 거기에서 잡다한 상품집단의 일정한 부분이 귀금속더미의 일정한 부분과 교환된다. -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석 31: 개별적 상품종류가 각각의 가격에 의해 모든 유통상품의 가격총액의 한 요소를 구성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금과 은의 총량과 교환되는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상품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상품총체로 간주하고 각 개별 상품은 오직 그 총체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 대담하게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훌륭한 계산 예가 나온다. 상품총체=X킬로그램의 금, 상품 A=상품총체의 일정부분=X킬로그램의 금 중 그에 해당하는 부분.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이 엉터리를 매우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세계에 현존하는 금과 은의 총량을 세계에 현존하는 전체 상품의 총량과 대비시킨다면, 하나 하나의 생산물 또는 상품을 금과 은의 총량의 일정한 부분과 대비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에는 오직 한 종류의 생산물 또는 상품이 존재한다고 [다시 말해 오직 한 가지 물건만이 판매된다고] 가정하며, 또 그것은 화폐와 마찬가지로 분할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이 상품의 일정량은 화폐총량의 해당부분과 대응하게 되며, 전체 상품의 절반은 전체 화폐의 절반과 대응하게 될 것이다....물건의 가격 결정은 근본적으로는 항상 물건의 총량과 화폐상징의 총량 사이의 비례에 의존할 것이다"(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저작집?, 제3권, pp. 12-13). 리카도와 그의 제자들인 제임스 밀, 오버스톤(Lord Overstone) 등이 이 이론을 한층 더 발전시킨 데 대해서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p. 179-185 및 p. 169-177을 보라. J. S. 밀은 그의 특유 한 절충주의적 논리를 가지고 자기의 부친인 제임스 밀의 견해와 그것에 정반대되는 견해를 동 시에 수용하는 재주를 피우고 있다. 그의 개설서인 ?정치경제학원리?의 본문과 [그가 현대의 애덤 스미스라고 자처하고 나선] 제1판 서문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이 사람의 소박성이나 이 사람을 정말 새로운 애덤 스미스로 믿은 일반 독자의 소박성 중 어느 것에 더 놀래야 할지 모르게 된다. 애덤 스미스에 대한 J. S. 밀의 관계는 바로 웰링턴 공작에 대한 월리엄즈 장군 {크리미아 전쟁 중 아르메니아의 카스 성을 수비한 터키 군대를 지휘한 영국 군인인데, 그 성 이 러시아 군대에게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장군과 준남작(barbonet)이 되었다.}의 관계 와 비슷하다. 경제학 분야에서 J. S. 밀의 독창적 연구는 [넓이에서나 깊이에서나 보잘것없는 것인데] 1844년에 발간된 ?정치경제학의 약간의 미해결 문제들?이라는 그의 소책자에 모두 그대로 들어있다. 로크(J. Locke)는 금과 은에는 가치가 없다는 것과, 금과 은의 가치는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과의 관련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금과 은에 상상 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데 동의했으므로....이 두 금속의 내재적 가치는 그것들의 양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몇 가지 고찰?,1691년, ?저작집?, 1777년판, 제2권, p. 15).)



    (c) 주화(coin). 가치의 상징


    화폐는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에 의해 주화의 형태를 취한다. 상품의 가격[즉, 화폐명칭]이 머리 속에서 대표하고 있는 금의 중량은 유통과정에서는 그것과 동일한 명칭을 가지는 금조각 또는 주화로서 상품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격의 도량표준의 확 {예: 1 파운드=20s.=240d.}과 마찬가지로 주화의 제조도 국가의 일이다. 금과 은이 주화로서 몸에 두르는 [그리고 그것들이 세계시장에 나타날 때는 다시 벗어버리는] 여러 가지 국민적 제복은 상품유통의 국내 [또는 국민적] 영역과 그 일반적인 세계시장 영역이 분리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금주화와 금덩어리(bullion)는 단지 외형상으로만 구별될 뿐이고, 금은 언제라도 한 형태에서 다른 형xo로 전환될 수 있다.(주석 32: 주조수수료(seigniorge)와 같은 상세한 것을 논하는 것은 물론 나의 목적 밖의 일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무료로 주조한다"고 하는 '관대한 아량'에 감탄하고 있는 낭만주의적 아첨꾼인 아담 뮬러(Adam Muller)에 대해서는 더들리 노스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금과 은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스페인으로부터 다량의 금과 은이 도착하면....그것은 조폐소로 운반되어 주조된다. 머지않아 수출될 금덩어리에 대한 수요가 다시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때 금덩어리는 없고 전부 다 주조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들을 다시 녹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손실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유자는 주조에 따른 비용, 즉 주조수수료를 부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국민은 쓸데없는 손해를 보는데, 그것은 마치 노새에게 먹이기 위해 짚으로 새끼를 꼰 셈이기 때문이다. 만약 상인{노스 자신은 찰즈 2세 시대(1660-85)의 최대의 상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이 주조수수료를 지불해야 된다면 그는 자기가 소유한 은을 상당한 이유 없이는 조폐소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조된 화폐는 주조되지 않은 은보다 항상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노스, 앞의 책, p. 18).) 주화는 조폐소로부터 나오자마자 곧 용해될 수도 있다. 유통하는 동안 금주화는 어떤 것은 많이 어떤 것은 적게 마멸된다. 금화의 명칭[즉, 법정 무게]과 그것의 실체[즉, 실질적 무게]가 점차 서로 분리되는 과정이 시작된다. 명칭이 같은 금화들도 중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치가 동일하지 않게 된다. 유통수단으로서의 금의 무게는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의 금의 무게로부터 이탈하고, 그리하여 가격을 실현할 상품들의 진정한 등가물로 될 수 없게 된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세 및 근세의 주화사는 이와 같은 혼란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화를 금의 금속적 실재로부터 금과 닮은 것으로 전환시키는 [즉, 주화를 그 공인된 금속실체의 상징으로 전환시키는] 유통과정의 자연발생적 경향은[금속상실의 정도에 따라 금화를 통용불능이라고 폐기시키는]가장 근대적인 법률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는 바이다.
    만약 화폐의 유통 그 자체가 주화의 실질적 무게를 그 법정 무게로부터 분리시키고, 기능으로서의 주화를 금속으로서의 주화와 분리시킨다면, 화폐유통에는 벌써 금속화폐를 다른 재료로 만든 토큰(token)[즉, 주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상징]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 금 또는 은의 매우 작은 중량을 주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곤란하다는 사정과, 최초에는 고급금속 대신 저급금속-금 대신 은, 은 대신 구리-이 가치척도로 쓰였고 [고급금속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저급금속이 화폐로 유통하고 있었다는 사정은, 은제나 동제의 토큰이 금화의 대리자로 역할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해 준다. 은과 구리가 금을 대리하는 것은, 금화가 가장 급속하게 유통하는, 따라서 가장 급속히 마멸하는 상품유통영역 [다시 말해 매매가 매우 소규모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역]에서다. 이러한 금의 대리물이 금 자체의 지위를 영구히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률은 금 대신 이들 금속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비율을 매우 낮게 규정하고 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주화가 각각 유통하는 특수한 경로들은 물론 서로 뒤엉켜 있다. 은제나 동제의 토큰은 가장 작은 금화의 몇 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의 지불을 위해 금과 나란히 나타난다. 금은 끊임없이 소액유통에 들어오지만, 은 . 동제의 토큰과 교체되어 끊임없이 거기에서 쫓겨난다.(주석 33: "만약 은화가 소액지불용에 필요한 양을 결코 초과하지 않는다면, 다액지불에 사용할 만큼 거대한 은화를 모을 수가 없다. 다액의 지불에서 금화를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소매상업에서도 금화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금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액의 구매에 금화를 지불하고 거스름돈으로 은화를 받게된다. [소매상의 수중에 집중되어 그를 귀찮게 만들었을] 과잉의 은화는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의 손을 때나 일반적 유통으로 살포된다. 그러나 만약 은화가 금화 없이도 소액거래를 감당할 만큼 많이 있다면, 소매상은 소액의 구매에 대해 은화만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은화는 필연적으로 그의 수중에 축적되지 않을 수 없다"(뷰캐넌[David Buchanan], ?영국의 조세 및 상업 정책의 연구?, 애딘버러, 1844년, pp. 248-249).)
    은제나 동제의 토큰의 금속무게는 법률에 의해 임의로 규정된다. 그것들은 유통에서 금화보다 더 빨리 마멸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주화기능은 사실상 그것들의 중량[즉, 가치]과는 관계없다. 금의 주화로서의 기능은 금…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1154
  • 자본론5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1권, 제9장).) 그러므로 상품소유자는 자신을 만족시켜 줄 사용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을 얻기 위해 자기 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모든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는 비(非)사용가치이고, 그것의 비(非)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이다. 따라서 상품은 모두 그 소유자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소유자를 바꾸는 것이 상품의 교환(交換)인데, 이 교환이 상품을 가치(價値)로 서로 관련시키며 상품을 가치로 실현한다. 그러므로 상품은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먼저 가치로 실현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상품은 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먼저 자신이 사용가치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동이 과연 타인에게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그 생산물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가 시켜주지 못하는가는 오직 상품의 교환만이 증명할 수 있다.
    상품의 소유자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사용가치를 지닌] 다른 상품과의 교환에서만 자기의 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그러한 한, 교환은 그에게는 개인적 과정일 따름이다. 다른 한편, 그는 자기의 상품을 가치로 실현하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의 상품이 다른 상품소유자에게 사용가치를 가지든 안 가지든, 자기의 상품을 자기의 마음에 드는 동일한 가치의 다른 상품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교환은 그에게는 일반적 사회적 과정이다. 그러나 동일
    한 과정이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오로지 개인적인 것이면서 또한 동시에 오로지 일반적 사회적인 것으로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더 상세하게 고찰하면, 어떤 상품소유자에게도 다른 모든 상품은 자기 상품의 특수한 등가(물)로 간주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점은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타당하기 때문에, 어떤 상품도 사실상 일반적 등가(물)로 되지 못하며, 따라서 상품들은 [서로 가치로 동등시되며 가치량으로 서로 비교되는] 일반적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결코 상품으로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산물 또는 사용 가치로서만 서로 상대하게 된다.
    이 곤경에 직면하여 우리의 상품소유자들은 파우스트와 같이 생각한다. "태초에 행함이 있었다. " 그리하여 그들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행동했던 것이다. 상품소유자들은 본능적으로 상품 본성의 법칙들에 순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인 다른 하나의 상품과 대비시킴으로서만 자기들의 상품을 서로 가치로서, 따라서 상품으로서 관계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품의 분석을 통해 이 결과를 얻은 바 있다. 그러나 오직 사회의 행동만이 일정한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상품의 사회적 행동이[자신들의 가치를 모두 표시하는] 특수한 상품을 분리해 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선발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등가형태로 된다. 사회적 과정을 통해 일반적 등가(물)는 이 선발된 상품의 독자적인 사회적 기능으로 된다. 그리하여 이 상품은 화폐(貨幣)로 된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자기들의 능력과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더라." "그 짐승의 이름이 나 그 이름을 표시하는 숫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 외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 라."
    [요한계시록, 17장 13절: 13장 17절]

    화폐는 [종류가 다른 노동생산물이 실제로 서로 동등시되고, 따라서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교환현상의 역사적 확대와 심화는 [상품의 성질 속에 잠자고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을 발달시킨다. 원활한 상거래를 위해 이 대립을 외부로 표현하려는 욕구는 독립적인 가치형태를 만들려는 충동을 낳게 되는데, 이 충동은 [상품이 상품과 화폐로 분화됨으로써] 하나의 독립적 가치형태를 얻을 때까지 중지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에 발맞추어 특정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 (주석 4: 상품생산을 영구화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화폐와 상품 사이의 대립'을, 따라서 화폐 그 자체를 [왜냐하면, 화폐는 오직 이 대립에서만 존재하므로] 폐지하려고 하는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의 교활함을 이것에 의해 평가할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카톨릭교를 존속시키면서 교황을 폐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 더 상세한 것은 나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61 이하를 보라.)
    생산물들의 직접교환은 한 측면에서 보면 단순한 가치표현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순한 가치표현의 형태는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였다 그런데 직접적인 생산물교환의 형태는 X량의 사용가치 A=Y량의 사용가치 B이다.(주석 5: 두 개의 상이한 유용한 물건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미개인 사이에서 가끔 보는 바와 같이) 한 개의 물건에 대해 잡다한 물건들이 등가(물)로 제공되는 동안은, 직접적인 생산물교환도 아직 시작단계에 있을 뿐이다.) 이 경우 A와 B라는 물건은 교환 이전에는 상품이 아니고 교환에 의해 비로소 상품으로 된다. 어떤 유용한 물건이 교환가치로 될 가능성을 획득하는 최초의 방식은 그 유용한 물건이 비(非)사용가치[즉, 그 소유자의 직접적 필요량을 초과하는 양의 사용가치]로 존재하는 것이다. 물건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해 외적인 것이며 따라서 양도할 수 있다. 이 양도가 상호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이 양도될 수 있는 물건들의 사적 소유자로,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서로 독립된 인격으로, 서로 상대하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호간에 타인이라는 관계는 자연발생적인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공동체가 가부장적 가족이거나, 고대 인도의 공동체이거나, 페루의 잉카국이거나 그것은 마찬가지다. 상품교환은 공동체의 경계선[즉,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물건들이 한 번 공동체의 대외적 관계에서 상품으로 되기만 하면 그것들은 반사적으로 공동체 안에서도 상품으로 된다. 이러한 물건들의 양적 교환비율은 최초에는 완전히 우연적이다. 그 물건들이 교환될 수 있는 것은, 그 물건 소유자들이 그것들을 서로 양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타인 소유의 유용한 물건에 대한 욕망이 점차로 확립된다. 교환의 끊임없는 반복은 교환을 하나의 정상적인 사회적 과정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노동생산물의 적어도 일부는 처음부터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이 순간부터 직접적 소비를 위한 물건의 유용성과 교환에서의 물건의 유용성 사이의 구별이 굳어져 간다. 물건의 사용가치가 물건의 교환가치로부터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물건들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은 물건들의 생산 그 자체에 의존하게 된다. 관습은 이 물건들의 가치를 일정한 크기로 고정시킨다.
    직접적인 생산물교환에서는 각 상품은 그 상품의 소유자에게는 직접적 교환수단으로 되며, 그 상품의 비소유자에게는 [상품이 그에게 사용가치로 되는 한] 등가(물)로 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교환되는 물건은 아직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나 교환자의 개인적 욕망과는 관계없는]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한다. 가치형태의 필요성은 교환과정에 들어오는 상품의 수와 다양성이 증가함에 따라 발전한다. 문제와 그 해결의 수단은 동시에 생긴다. [상품소유자들이 자기 자신의 물품을 여러 가지 다른 물품과 교환하고 비교하는] 상거래는, 상품소유자들의 여러 가지 상품들이 하나의 제3의 상품종류와 교환되고 가치로서 비교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제3의 상품은 기타의 여러 상품의 등가(물)로 됨으로써, 비록 좁은 범위 안에서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또는 사회적인 등가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이 보편적인 등가형태는 [자기를 낳은] 일시적인 사회적 접촉과 함께 발생하고 또 소멸한다. 즉, 때로는 이 상품이, 때로는 저 상품이, 일시적으로 보편적인 등가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상품교환의 발달에 따라 그것은 배타적으로 특수한 상품종류에만 고착된다. 즉, 화폐형태(貨幣形態)로 응고한다. 화폐형태가 어떤 종류의 상품에 부착되는가는 처음에는 우연이다. 그러나 대체로 두 가지 사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화폐형태는 교환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물품[사실 이 물품은 토착 생산물들의 교환가치를 최초로 자연발생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에 부착되거나, 양도가능한 토착재산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는 유용한 물건 [예: 가축]에 부착된다. 유목민족은 화폐형태를 최초로 발전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재산 전체가 이동할 수 있는 따라서 직접 양도가능한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의 생활방식이 그들을 끊임없이 다른 공동체와 접촉하도록 함으로써 생산물의 교환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를 [노예의 형태로] 원시적인 화폐재료로 삼은 일은 가끔 있었으나 토지를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토지를 화폐재료로 삼으려는 착상은 발전된 부르주아 사회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착상이 나타난 것은 17세기의 마지막 1/3의 일인데, 그것의 실행을 전국적 규모에서 시도한 것은 그보다 1세기 뒤인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기 [몰수한 교회토지를 근거로 1789년에 발행한 아시냐 assignats]였다.
    상품교환이 좁은 국지적(局地的) 한계를 타파하고, 따라서 상품가치가 인간노동 일반의 체현물[응고물]로 발전해 감에 따라 화폐형태는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자연적으로 적합한 상품인] 귀금속으로 옮아간다.
    "금(金)과 은(銀)은 처음부터 화폐는 아니지만, 화폐는 성질상 금과 은이다"(주석 6: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135. "귀금속은....본질상으로 화폐다"(갈리아니[F. Galiani], ?화폐에 대해?, 쿠스토디 편 근세편, 제3권, p. 137) 라는 말은, 금과 은의 자연적 속성이 화폐의 여러 기능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주석 7: 이 점에 대해 더 상세한 것은 앞의 나의 저서의 「귀금속」의 절 참조.)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는 화폐의 한가지 기능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즉, 화폐가 상품가치의 현상형태[즉, 상품의 가치량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는 재료]로 역할하는 기능이다. 가치의 적당한 현상형태(즉, 추상적인, 따라서 동등한 인간노동의 체현물]로 될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보아도 동일하고 균등한 질을 가지고 있는 물질뿐이다. 다른 한편, 가치량의 차이는 순전히 양적인 것이므로, 화폐상품은 순전히 양적인 구별이 가능한 것, 즉 그것을 마음대로 분할할 수 있고 또 그 부분들을 다시 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금과 은은 성질상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화폐상품은 이중(그重)의 사용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특수한 사용가치(예컨대 금은 이빨을 때우거나 사치품의 원료로 쓰인다) 외에도, 그것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형태적 [화폐형태] 사용가치를 가진다.
    다른 모든 상품은 화폐의 특수한 등가(물)일 뿐이지만,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들의 일반적 등가(물)이므로, 다른 모든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특수한 상품과 일반적 상품(주석 8: "화폐는 일반적 상품이다"(베리[P. Verri], 앞의 책, p. 16).) 사이의 관계와 같다.
    이미 본 바와 같이, 화폐형태는 다른 모든 상품들 사이의 관계가 한 상품에 반사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화폐가 상품이라고 말하는 것은(주석 9: "우리가 귀금속이라는 일반적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금과 은은....그 가치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상품이다....귀금속의 더 작은 중량이 그 나라의 생산물이나 제조품의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다면, 그때에는 귀금속의 가치가 오른다고 인정된다"(클레먼트[S. Clement], ?상호관계에 있는 화폐 . 상업 . 외환의 일반적 관념에 관한 연구. 한 상인의 저?, 런던, 1695년, p. 7). "금과 은은 (주조되든 않든) 비록 다른 모든 물건의 척도로 사용되지만, 포도주 . 기름. 담배 . 의복. 천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다"(차일드[J. Child], ?상업, 특히 동인도의 그것에 관한 연구?, 런던, 1689년, p. 2). "이 나라의 자본과 부를 오직 화폐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또 금과 은을 상품에서 제외시켜서도 안 된다"(파필론[T. Papillon], ?가장 유리한 무역으로서의 동인도무역?, 런던, 1677년, p. 4).) 화폐의 완성된 모습으로부터 출발해서 화폐를 분석하려는 사람을 위한 발견에 불과하다. 교환과정은 [자기가 화폐로 전환시킨] 상품에게 가치를 주는 것이 아니란 독특한 가치형태를 준다. 이 두 가지 개념[가치와 가치형태]의 혼동은, 금과 은의 가치를 상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한다.(주석 10: "금과 은은 화폐이기 이전에 금속으로서 가치를 가진다"(갈리아니, 앞의 책 p.72). 로크는 다 음과 같이 말한다 "은은 화폐로 되는데 적합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전반적 합의에 의해 하나의 상상적 가치가 은에게 주어졌다"(로크[J. Locke], "이자 인하의 결과들에 관한 몇 가지 고찰?, 1691년 ?저작집?, 1777년 제2권, p. 15). 이와 반대로 로(Law)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상이한 국민들이 어떤 하나의 물건에 동일한 상상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또는 어떻게 이 상상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자신이 이 문제 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다. "은은 자신이 가진 사용 가치에 비례해, 따라서 그 참된 가치에 비례해 교환되었다. 화폐로 채택됨으로써 은은 추가적인 가치를 얻었다"(로[J. Law], ?통화와 상업에 관한 고찰?, 데르편, ?18세기의 재정경제학자 들?, pp. 469, 470).) 또 화폐는 어떤 기능들[예: 유통수단의 기능]에서는 자기 자신의 단순한 상징(象徵)에 의해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또 하나의 오류[즉, 화폐는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류]가 생겼다. 그렇지만, 이 그릇된 생각에는, 물건의 화폐형태는 물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외적인 것이고 물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인간관계의 현상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모든 상품이 일종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가치로서 상품은 거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물적 외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주석 11: "화폐는 그것들(상품들)의 상징이다"(포르보네[de Forbonnais], ?상업원리?, 신판, 라이덴, 1776년, 제2부, p. 143). "상징으로서 화폐는 상품들에 의해 매혹된다"(같은 책, p. 155). "화폐는 물건의 상징이며 그것을 대표한다"(몽테스키외[Montesquieu], ?법의 정신?, ?저작집?, 런던, 1767년, 제2권, p. 3). "화폐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부(富)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등가(물)이다"(르 트로느[Le Trosne], ?사회적 이익에 대해?, p. 910). "가치의 개념을 고려한다면 물건 그 자체는 다만 상징이라고 말해야한다. 물건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헤겔, ?법철학“, p. 100). 경제학자들보다 훨씬 이전에 법학자들은 ,화폐는 단순한 상징이며 귀금속의 가치는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을 고취했는데, 그것은 왕권에 아첨한 것으로서, 그들은 중세 전체를 통해 로마제국의 전통과 로마민법의 화폐개념에 의거해 왕의 주화변조권(鑄貨變造權)을 옹호했던 것이다. 이 법학자들의 눈치 빠른 제자인 필립 드 발루아는 1346년의 한 칙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화의 제조 . 형상 . 발행고 .주화에 관한 법령 제정권....그리고 주화를 우리가 마음먹은 가격으로 유통시키는 권리가 오로지 우리와 우리의 국왕폐하에게 속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 황제의 칙령이 화폐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로마법의 정설이었다. 화폐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명문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화폐를 구매해서는 안 된다. 화폐는 공공의 사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상품으로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이 점에 관한 좋은 설명은 파니니(G. F. Pagnini),
    "물건들의 정한 가격에 관한 시론“, 1751년, 쿠스토디 편, 근세편, 제2권을 보라. 파니니는 이 책의 제2부에서 특히 법률가들을 논박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생산양식 하에서 물건이 취하는 사회적 특성[또는 노동의 사회적 규정이 취하는 물적 특성]을 단순한 상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특성들이 인간 이성의 자의적인 산물이라고 발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설명은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이 즐겨 썼던 수법이었다. 그들은 이 수법에 의해 인간관계의 불가사의한 모습[그 발생과정을 그들은 해명할 수 없었다]으로부터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기이한 외관을 제거하려고 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한 상품의 등가형태는 그 상품의 가치량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금이 화폐며 따라서 기타의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것은 예컨대 10그램의 금이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모든 상품처럼 화폐도 그 자신의 가치량을 상대적으로 다른 상품들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화폐 자신의 가치는 화폐의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며, 동일한 양의 노동시간이 응고되어 있는 다른
    상품의 양으로 표현된다.(주석 12: "만약 사람들이 1부셀의 밀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에 1온스의 은을 페루의 광산으로부터 런던 에 공급할 수 있다면, 1온스의 은은 1부셀의 밀의 자연가격이 된다. 이제 만약 채굴하기 더 쉬운 새로운 광산이 발견되어 2온스의 은을 종전에 1온스를 생산하던 것과 같은 정도로 쉽게 생산할 수 있다면, 기타 조건이 동일하다면, 밀 값이 1부셀당 10실링으로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종전의 1실링일 때와 마찬가지로 싸다"(페티[W. Petty], ?조세공납론“, 런던, 1667년, p. 32).) 화폐의 상대적 가치의 확정은 그것의 원산지에서 직접적 물물교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화폐상품이 화폐로서 유통에 들어갈 때 그 가치는 이미 주어져 있다. 17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화폐분석의 첫 단계[즉, 화폐는 상품이라는 발견]가 이미 개시되었지만, 그것은 역시 단서에 불과했다. 어려움은 화폐가 상품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 왜 . 무엇에 의해 상품이 화폐로 되는가를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다.(주석 13: 로셔(Wilhelm Roscher)는 "화폐의 잘못된 정의는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화폐를 상품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상품 이하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것이다. "라고 말한 다음, 화폐의 본질에 관한 저술의 잡다한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목록은 화제이론의 현실적 역사에 대한 지식을 조금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훈이 나타난다. "화폐를 다른 상품들로부터 구별하는 특수성들"(그렇다면 화폐는 역시 상품 이하의 것이거나 상품 이상의 것이다)"을 최근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충분히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그러한 한에서는, 가널(G. Ganilh)의 반(半)중상주의적 반동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로셔, ?국민경제학원리“, 제3판, 1858년, pp. 207-210). 이상! 이하! 충분하지 않게! 그러한 한에서! 전혀 아니다! 이것이 개념규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절충주의적 교수식 잡담을 로셔는 겸손하게도 경제학의 '해부학적 . 생리학적 방법'이라고 명명(命名)한다! 그러나 한 가지 발견만은 그의 공적인데, 그것은 화폐는 '하나의 기분 좋은 상품'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 표현으로부터 안 바와 같이, 다른 물건의 가치량을 표현하는 물건은 이러한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자기의 성질 속에 내재하는
    사회적 속성으로] 등가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잘못된 외관이 확립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그 과정은, 일반적 등가형태가 하나의 특정 상품의 현물형태와 동일시되어 화폐형태로 고정될 때, 완성되었다. 외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
    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렇게 이끌어 온 운동은 운동 그것의 결과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이리하여 상품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가치모습을 [자신들의 외부에서 자신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체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상품체, 즉 금
    또는 은은 지하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 화신(化身:incarnation)으로 된다. 여기에 화폐의 신비성이 있다. {상품생산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기의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순전히 원자론적으로 상호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그들의 생산관계는 그들의 통제와 의식적인 개인적 행동으로부터 독립된 물적 모습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그들의 노동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폐물신( 貨幣物神: money fetish)의 수수께끼는 상품(물신商品物神)의 수수께끼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제 3 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제 1절 가치의 척도


    나는 이 책의 어디에서나 설명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금을 화폐상품이라고 전제한다.
    금의 첫째 기능은 상품세계에 그 가치표현의 재료를 제공한다는 점, 또는 상품들의 가치를 동일한 명칭의 크기[즉, 질적으로 동일하며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 크기]로 표현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금은 가치의 일반적 척도(一般的 尺度)로 기능하는데, 오직 이 기능에 의해서만 금이라는 특수한 등가상품은 화폐로 되는 것이다.
    화폐 때문에 상품들이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모든 상품이 가치로서는 대상화된 인간노동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상품의 가치는 한 개의 특수한 상품에 의해 공동으로 측정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 특수한 하나의 상품이 자기들의 공통적인 가치척도(價値尺度), 즉 화폐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가치척도로서의 화폐는 상품들에 내재하는 가치척도(즉, 노동시간)의 필연적인 현상형태다.(주석 1: 어째서 화폐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노동시간을 대표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예컨대 한 장의 종이 쪽지가 X노동시간을 대표하지 못하는가 라는 문제는 어째서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노동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문제로 귀착한다. 왜냐하면 상품의 형태를 취하면 노동생산물은 상품과 화폐상품으로 분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어째서 사적 노동은 그 대립물인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 취급될 수 없는가 라는 문제도 있다. 상품 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61 이하).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다.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 노동증명서는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여한 부분과 [공동생산물 중 소비용으로 예정된 부분에 대한]그의 청구권을 확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웬은, 상품생산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상품생산의 필연적 조건들을 [화폐에 관한 속임수에 의해] 제거해 보려는 엉뚱한 생각[프루동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 상품의 가치를 금으로 표현하는 것-X량의 상품 A=Y량의 화폐상품-은 그 상품의 화폐형태, 즉 그 상품의 가격(價格)이다. 이제 철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형태로 표시하기 위해서는 1톤의 철=2온스의 금이라는 단 한 개의 등식으로 충분하다. 이 등식은 이제 다른 상품들의 가치등식과 열을 지어 행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등가상품인 금은 이미 화폐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품들의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이제 다시 그것의 최초의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을 띠게 된다. 다른 한편, 전개된 상대적 가치표현[즉, 수많은 상대적 가치표현의 끝없는 시리즈]은 이제 화폐상품의 독특한 상대적 가치형태로 된다. 그러나 이 끝없는 시리즈는 이제 상품들의 가격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주어져 있다. 가격표를 거꾸로 읽으면 온갖 상품들로 표현된 화폐의 가치량[또는 화폐의 구매력]을 보게 된다.(역자 주: 2온스의 금 = 20미터의 아마포 또는 = 1개의 저고리 또는 = 10그램의 차 또는 = 기타 등등.) 그런데 화폐는 가격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상품들의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화폐는 자기 자신의 등가(들)로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화폐는 가격을 가지지 않는다. }
    상품의 가격 또는 화폐형태는 [상품의 가치형태 일반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물체형태와는 구별되며, 따라서 순전히 관념적인 또는 개념적인 형태이다. 쇠 . 아마포 . 밀 등의 가치는,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1, 이 물건들 속에 존재한다. 이 가치는 이 물건들과 금과의 동등성에 의해, 말하자면 이 물건들의 머리 속에만 있을 뿐인 금과의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상품의 보호자가 상품의 가격을 외부세계에 전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혀를 이 상품에게 빌려주던가[상품의 가격을 말하던가], 또는 상품에 정가표를 매달아 주던가 해야 한다.(주석 2: 미개인이나 반(半)미개인은 혀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선장 패리(Perry)는 배핑만{그린랜드}의 서해안 주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경우(물물교환의 경우) 그들은 그것(그들에게 제공된 물건)을 혀로 두 번씩 핥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교환이 만족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부 에스키모인적 경우에 교환자는 물건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핥곤 했다. 이와 같이 북방에서는 혀가 소유권 취득의 기관(器官)으로 간주되어 있다면, 남방에서는 위(stomach)가 축적된 재산의 기관(organ)으로 간주되어 카피르인[남동아프리카의 혹인]들이 사람의 부(富)를 그 사람의 아랫배가 나은 정도에 따라 평가하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카피르인은 매우 영리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1864년의 영국정부의 위생보고서가 노동자계급의 대다수에게는 지방질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탄식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에 의사 하비(혈액순환을 발견한 하비와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사람은 부르주아지나 귀족계급의 지방과다를 제거하는 처방을 광고함으로써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에 의한 상품가치의 표현은 순수히 관념적인 행위[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므로, 이 기능을 위해서는 단순히 상상적인, 관념적인 금을 사용할 수도 있다. 상품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가 자기 상품의 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또는 상상적인 금의 형태」를 부여하더라도 아직은 자기의 상품을 금으로 전환시킨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그가 몇 백만의 상품가치를 금으로 평가하는 데도 현실적인 금은 한 조각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화폐는 가치척도의 기능에서는 다만 상상적인 또는 관념적인 화폐로서만 역할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엉터리 화폐이론(貨幣理論)이 나타나게 되었다.(주석 3: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중의 ‘화폐의 도량표준에 관한 학설’,p. 76 이하를 보 라.) 그러나 상상적일 뿐인 화폐가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한다 할지라도 가격은 전적으로 실제의 화폐재료에 달려 있다. 예컨대 1톤의 쇠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노동량, 즉 가치는 그것 동일한 양의 노동을 포함하고 있는 상상 속의 화폐상품량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금, 은 또는 구리 어느 것이 가치척도로 쓰이는가에 따라 1톤의 쇠의 가치는 전혀 다른 가격표현을 얻게 된다. 즉,금, 은 또는 구리의 전혀 다른 양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만약 두 개의 서로 다른 상품, 예컨대 금과 은이 동시에 가치척도로 쓰인다면, 모든 상품은 두 개의 다른 가격표현, 즉 금가격과 은가격을 가지게 된다. 이 가격표현들은 은 대 금의 가치비율[예컨대 1 : 15]이 불변인 한 아무 일 있이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치 비율이 변동할 때마다 상품의 금가격과 은가격 사이의 비율은 교란되는데, 이 사실은 이중의 가치척도가 가치척도의 기능과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석 4: "금과 은이 법률상 화폐로[즉, 가치척도로] 병존하는 경우, 그것들을 동일한 물질로 간주하려는 헛된 시도가 끊임없이 있었다. 만약 일정한 노동시간이 변함없이 일정한 비율로 은과 금에 대상화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은과 금이 동일한 물질이며, 가치가 적은 금속인 은은 금의 일정한 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3세 {1327-1377}의 시대로부터 조지 2세 {1727-1760}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영국 화폐의 역사는 금과 은의 법정 가치비율과, 금과 은의 현실의 가치변동 사이의 충들에 기인하는 끊임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어떤 때는 금이, 어떤 때는 은이 너무 높게 평가되었다. 현실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된 금속은 유통에서 끌려나와 용해되어 수출되었다. {법정가치율은 금화 1온스=은화 15온스이지만, 시장가치비율은 금 1온스=은 온스라면, 금화를 녹여 시장에서 은을 구매해 주조하면 이익이 된다.} 그리하여 두 금속의 가치 비율은 다시 법률에 의해 변경되었으나, 새로운 명목비율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현실적인 가치비율과 충돌했다. 우리 자신의 시대에는, 인도와 중국의 은수요 때문에 은에 비해 금의 가치가 매우 미미하게 그리고 일시적으로 하락한 것이 프랑스에서 동일한 현상{즉, 은이 수출되고 금에 의해 유통에서 추방되는 것}을 대규모로 발생시켰다. l855년, 1856년 및 185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금 수출에 대한 금 수입의 초과액은 41,580,000파운드에 달했지만, 은 수입에 대한 은 수출의 초과액은 34,704,00파운드이었다. 두 금속이 법률상 가치척도로 되어 있고, 따라서 법화(法貨; legal tender)이며, 지불하는 측에서는 마음대로 은으로나 금으로 지불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가치가 등귀하고 있는 금속에는 프리미엄이 붙어,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과대평가된 금속으로 자신의 가격을 계산하며, 이 과대평가된 금속만이 사실상 가치척도로 된다. 이 분야의 모든 역사적 경험은 간단히 다음의 것으로 귀착된다. 즉, 법률상 두 상품이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그 중의 한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p. 75-76).)
    가격이 정해져 있는 상품들은 모두 a량의 상품 A=X량의 금, b량의 상품 B=Y량의 금, c량의 상품 C=Z량의 금 등의 형태로 표시된다. 여기서 a, b, c는 A, B, C라는 상품들의 일정한 양을 표시하며, X Y, Z는 금의 일정한 양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상품들의 가치는 여러 가지 크기의 상상적인 금량(金量)으로, 즉 상품체의 다종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금량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양으로 전환되고 있다. 상품들의 가치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금량으로 서로 비교되고 측정된다. 그리고 기술상의 이유로 어떤 고정된 금량을 가치들의 도량단위(unit of measurement)로 삼을 필요성이 발생한다. 이 도량단위 자체는 또다시 그 세부단위로 분할됨으로써 도량표준(度量樣準)으로 발전한다. 금이나 은이나 동(銅)은 그것들이 화폐로 되기 전에 벌써 이와 같은 도량표준을 그것들의 금속무게 속에 가지고 있다. 예컨대 도량단위로 쓰이는 1파운드는 한편으로는 다시 분할되어 온스로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합해져서 젠트너{Zentnar; 100파운드}로 된다.(주석 5: 영국에서 화폐의 도량표준 단위로 역할하는 1온스의 금이 정수(整數)의 단위 부분들로 분할될 수 있다는 기이한 사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우리나라의 주화제도는 본래 은의 주화에만 적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1온스의 은은 언제든지 일정한 수의 동등한 주화로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금이 그뒤 [오직 은에만 적합한] 주화제도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1온스의 금은 정수의 소주화로 분할 주조될 수 없게 된 것이다"(매클라렌[J. Maclaren), ?통화사?, 런던, p. 16).) 그러므로 모든 금속유통에서는 중량의 도량표준에 적용되던 명칭들이 그대로 화폐 또는 가격의 도량표준에도 적용되고 있다.
    가치의 척도 및 가격의 도량표준은 화폐의 전혀 다른 두 가지 기능이다. 화폐가 가치의 척도인 것은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化身)이기 때문이고, 가격의 도량표준인 것은 고정된 금속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척도로서 화폐는 다종다양한 상품의 가치를 가격[즉, 상상적인 금량]으로 전환시키는 데 봉사하며,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 화폐는 이러한 금량을 측정한다. 가치척도는 가치로서의 상품들을 측정한다. 이와는 반대로, 가격의 도량표준은 여러 가지 금량을 금의 단위량으로 측정하는 것이지 금의 하나의 양인 가치를 금의 다른 양인 중량으로 측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격의 도량표준으로 되기 위해서는 금의 일정한 무게가 도량단위로 고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동일한 명칭의 양들이 측정되는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량의 고정성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일정한 금량을 나타내는 도량단위가 변하지 않을수록 가격의 도량표준은 그 기능을 더 잘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금이 가치척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금 자체가 노동생산
    물이며 따라서 가치가 잠재적으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주석 6: 영국의 저서들에서는 가치의 척도와 가격의 도량표준('가치의 도량표준')에 관한 혼동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양자의 기능과 양자의 명칭은 끊임없이 혼동되고 있다.)
    우선 금의 가치변동은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의 금의 기능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금의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여러 가지 금량 사이의 가치관계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가령 금의 가치가 1,000%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12온스의 금은 여전히 1온스의 금의 12배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격에서는 여러가지 금량의 상호관계만이 문제로 된다. 다른 한편, 1온스의 금이 그 가치의 증감에 따라 그 중량을 바꾸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에, 온스를 세분한 각 부분의 중량도 변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금은 그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가격의 고정된 도량표준으로 여전히 역할한다. 금의 가치변동은 모든 상품에 대해 동시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상품들 가치의 상호관계에는 변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비록 이제는 상품들의 가치가 모두 이전보다 높거나 낮은 금가격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한 상품의 가치를 다른 한 상품의 사용가치로 평가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품들을 금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거기에 전제되고 있는 것은 일정량의 금을 일정한 시기에 생산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상품가격의 변동 일반에 관해서는 제1장에서 말한 단순한 상대적 가치표현의 법칙들이 적용된다.
    상품가격(商品價格)이 일반적으로 오르는 것은, 화폐가치(貨幣價値)가 불변이라면 상품가치가 오르는 경우뿐이고, 상품가치가 불변이라면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경우뿐이다. 그와 반대로, 상품가격이 일반적으로 내리는 것은, 화폐가치가 불변이라면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경우뿐이고, 상품가치가 불변이라면 화폐가치가 오르는 경우뿐이다. 그러므로 화폐가치의 상승은 반드시 상품가격의 비례적 하락을 초래하고, 또 화폐가치의 하락은 반드시 상품가격의 비례적 상승을 초래한다는 결론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치가 변동하지 않은 상품에 대해서뿐이다. 그런데 그 가치가 화폐가치와 같은 정도로 동시에 오르는 상품은 동일한 가격을 유지한다. 상품가치가 화폐가치보다 더 완만하게 오르거나 더 급속하게 오르는 경우에는, 그 상품가격의 하락 또는 상승은 상품의 가치변동과 화폐의 가치변동 사이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등등.
    이제는 가격형태(價格形態)의 고찰로 되돌아가자. 금속무게의 화폐명칭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점차 그 원래의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된다. 이 원인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발전 정도가 낮은 민족들에게 외국화폐가 수입된 것. 예컨대 고대 로마에서는 금과 은의 주화는 처음에는 외국상품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 외국주화의 명칭은 국내의 무게 명칭과 달랐다. (2) 부(富)의 발전에 따라 저급 금속은 고급 금속에 의해 가치척도의 기능으로부터 쫒
    겨난다는 점. 동(銅)은 은에 의해, 은은 금에 의해 쫓겨난다. 비록 시적(詩的) 연대기에서는 이 순서가 다르다 할지라도.(주석 7: 이 연대기의 순서가 반드시 일반적 역사적 타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파운드는 현실적인 은 1파운드의 중량을 표시하는 화폐 명칭이었다. 금이 가치척도로서의 은을 몰아내게 되자 이 동일한 명칭은 금과 은의 가치비율에 따라 대체로 1/15파운드의 금에 적용되었다. 이제는 화폐 명칭으로서의 파운드와 금의 관습적인 무게 명칭으로서의 파운드는 분리되어 버렸다. (주석 8: 그리하여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은 그 원래 중량의 1/3 이하를 대표하고 있으며, 잉글랜드와의 합병 {1707년} 이전의 스코틀랜드의 파운드는 겨우 1/36을, 프랑스의 리브르는 1/74을, 스페인의 마라베디는 1/1,000 이하를, 포르투갈의 레이는 그보다도 더 작은 부분을 대표하고 있다.) (3) 몇 백 년에 걸친 군주들의 끊임없는 화폐변조. 이로 말미암아 금 주화는 원래 중량과는 전혀 관계없이 명칭만을 가지게 되었다.(주석 9: "그 명칭이 오늘날에는 전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 주화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한때는 실질적인 가치를 가진 주화들이었고, 또 그것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계산했던 것이다"(갈리아니, ?화폐에 대해?, p. 153).)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화폐 명칭이 그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국민적 관습에 속하는 것으로 되었다. 화폐의 도량표준은 한편으로는 순수히 관습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효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므로, 결국은 법률에 의해 규제된다. 귀금속의 일정한 중량, 예컨대 1온스의 금은 공식적으로 더욱 작은 부분으로 분할되고, 이 부분에 대해 파운드, 탈러 등과 같은 법정 세례명이 주어진다. 이 분할된 부분이 현실적인 화폐단위로써 역할하는데, 그것은 이번에는 또다시 실링, 페니 등과 같은 법정 세례명을 가지는 다른 일정한 부분으로 세분된다. (주석 10“ 데이비드 어콰트(David Urqhart)는 그의 ?상용어(常用語)?에서 영국의 화폐 도량표준의 단위인 파운드(파운드 스털링)는 현재 약 1/4온스의 금과 같다는 말도 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도량표준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척도를 변조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이러한 금 무게의 '거짓 명칭'에서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찰가지로 문명이 미치는 위조작용 (僞造作用)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속의 일정한 중량이 금속화폐의 도량표준으로 되는 것은 여전히 전과 같다. 달라진 것은 화폐의 분할방식과 명칭뿐이다.
    그리하여 가격[즉, 상품의 가치가 관념적으로 전환되어 있는 금량]은 이제 금의 도량표준의 화폐 명칭[또는 법률상 유효한 계산 명칭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1쿼터의 밀이 1온스의 금과 그 가치가 같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것이 3파운드 17실링 10 1/2펜스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1971년 1월 이전에는 1파운드 스털링=20실링, 1실링:12팬스였으나, 그 뒤부터 1파운드 =100팬스(p)가 되었다 ] 이와 같이 상품들은 자기들의 가치가 얼마인가를 자기들의 화폐명칭으로 표현하며, 그리고 화폐는 어떤 물건을 가치로, 따라서 화폐형태로 고정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계산화폐로 역할한다.(주석 11: "사람들이 아나카르시스에게, 희랍 사람들은 화폐를 무엇에 사용하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계산을 위해서'라고 대답했다"(아테나이오스[Athenaeus], ?학자들의 향연?, 슈바이크호이저[Schweighauser] 편, 1802년, 제2권, 제1부, 제4편, 제49절, p. 120).)
    물건의 명칭은 그 물건의 성질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야곱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파운드, 탈러, 프랑, 두카트 등등의 화폐 명칭에는 가치관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신비한 명칭에 어떤 숨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야기되는 혼란은, 이 화폐 명칭이 상품가치를 표현함과 동시에 일정한 금속무게[즉, 화폐의 도량표준으로 역할하는 금속무게]까지도 표현하게 됨으로써 더욱 심하
    게 된다.(주석 12: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의 금은 상품가격과 동일한 계산명칭으로 표현되므로 (예컨대 1온스의 금은 1톤의 쇠와 꼭 마찬가지로 3파운드 17실링 10 1/2펜스로 표현되므로) 금의 이와 같은 계산명칭은 금의 '주조가격'(mint-price)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금은 마치 그 자체의 재료로 평가되고, 다른 모든 상품과는 달리 어떤 고정된 가격을 국가로부터 받는다는 괴상한 관념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금의 일정한 중량을 계산명칭으로 고정하는 것을 이 중량의 가치를 설정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74).) 다른 한편에서는, 가치가 상품세계의 잡다한 물체들로부터 구별되어 이러한 형태[즉, 물적일 뿐 아니라 순수히 사회적인 형태]로 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주석 13: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76 이하의 ‘화폐의 도량단위에 관한 학설’ 참조. 금이나 은 의 고정된 무게에 이미 붙인 법정 화폐명칭을 국가가 더 큰 또는 더 작은 무게에 붙임으로써 (예컨대 1/4온스의 금으로 20실링을 주조하는 대신 40실링을 주조함으로써) 화폐의 '주조가격'을 인상하거나 인하하려는 환상적인 생각을 몇몇의 이론가들은 가지고 있었다. 이 생각이 공공및 사적 채권자에 대한 졸렬한 금융조작이 아니라 경제적 기적요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폐티가 ?화폐 소론(小論). 하리팍스 후작에게?(1682년) 에서 충분히 논술했으므로, [그 후세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직접적 계승자인 더들리 노스(Dudley North) 및 존 로크까지도 그가 말한 것을 더 세속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페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한 나라의 부(富)를 하나의 포고(布告)에 의해 10배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훨씬 이전에 그와 같은 포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묘한 일일 것이다"(같은 책, p. 36).)
    가격(價格)은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勞動)의 화폐명칭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품과 [그 상품가격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화폐량이 등가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동어반복이다.(주석 14: "그렇지 않다면, 화폐로 백만 원의 가치는 상품의 동원한 가치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 으면 안 된다"(르 트로,느?사회적 이익에 대해?, p. 919). 즉, "어떤 가치는 그것과 동일한 크 기의 다른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표현은 두 상품의 등가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가치량의 지표로서의 가격은 그 상품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표이기는 하지만, 그 상품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즉, 가격]는 반드시 그 상품의 가치량의 지표로 되지는 않는다. 가령 동일한 양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1쿼터의 밀로도 표현되고 2 파운드(약 1/2온스의 금)로도 표현된다고 하자. 2 파운드는 밀 1쿼터의 가치량의 화폐적 표현, 즉 그 가격이다. 이제 만약 어떤 사정 [예 수요 . 공급의 사정]이 1쿼터의 밀을 3 파운드로 가격을 올리거나 또는 l 파운드로 가격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1 파운드와 3 파운드는 이 밀의 가치량의 표현으로서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이 밀의 가격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첫째로 이 밀의 가치형태, 화폐[형태]이며, 둘째로 이 밀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생산조건 또는 노동생산성이 변하지 않는 한, 1쿼터의 밀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가격의 변화 이전에나 이후에나 여전히 동일한 양의 사회적 노동시간이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밀 생산자의 의지와도, 또는 다른 상품소유자의 의지와도 관계가 없다. 이와 같이 상품의 가치량(價値量)은 사회적 노동시간(勞動時間)과 어떤 필연적인 관계[그 상품의 가치가 형성되는 과정에 내재한다]를 가진다. 가치량이 가격(價格)으로 전환되는 것과 더불어 이 필연적인 관계는 한 상품과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는] 화폐상품 사이의 교환비율(交換比率)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환비율은 그 상품의 가치량을 표현할 수 있음과 동시에 주어진 조건하에서는 그 상품이 더 많은 또는 더 적은 화폐량과 교환될 수 있다는 것도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가격(價格)과 가치량 (價値量)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즉, 가격이 가치량과 괴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가격형태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결코 가격형태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 가격형태를 다음과 같은 생산양식-즉, 여기에서 법칙은 끊임없는 불규칙성 사이에서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평균으로서 자신을 관철할 뿐이다-에 적합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가격형태는 가치량과 가격 사이[다시 말해, 가치량과 그 화폐적 표현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을 허용할 뿐 아니라, 하나의 질적 모순[화폐는 상품의 가치형태에 지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가격이 전혀 가치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내포할 수가 있다. 그 자체로서는 상품이 아닌 것[예컨대 양심이나 명예 등]이 그 소유자에 의해 판매용으로 제공될 수 있으며, 그 가격을 통해 상품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태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물건은 가치(價値)를 가
    지지 않지만 가격(價格)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의 가격표현은 수학상의 어떤 양{예: 허수}과 같이 상상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 상상적인 가격형태, 예컨대 미개간지[거기에는 인간노동이 대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의 가격은 현실의 가치관계 또는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관계를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상대적 가치형태 일반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격은 일정량의 등가물(예: 1온스의 금)이 어떤 상품(예: 1톤의 쇠)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그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지, 거꾸로 쇠가 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것에 의해 쇠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상품이 실제로 교환가치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현물형태를 벗어버리고 단순한 상상적인 금으로부터 현실적인 금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상품으로서는 이 형태변화가 헤겔의 '개념'에서 필
    연으로부터 자유로 이행하는 것, 또는 가재가 자기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 또는 성(聖) 제롬이 아담의 원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주석 15: 제롬은 청년시대에 육체적 정욕과 격렬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이것은 그가 사막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환상과 싸웠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정신적 정욕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컨대 그는 말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주의 심판자 앞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목소리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라고. '나는 기독교도올시다.’ '거짓말이다. 너는 키케로(Cicero)의 한 패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심판자의 큰 소리가 울렸다. ")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상품은 그 실제의 모습(예컨대 쇠라는 모습)과 나란히 [자기의 가격 형태에서1]관념적인 가치모습 또는 상상적인 금모습을 가질 수 있지만. 상품은 현실적으로 쇠인 동시에 현실적인 금일 수는 없다. 상품에 가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상상적인 금을 상품에 등치하면 되지만, 상품이 그 소유자에게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금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만약 쇠의 소유자가 어떤 다른 상품의 소유자와 대면하여 그에게 쇠의 가격을 가리키면서 그것은 쇠가 이미 화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상대방은 천국에서 성베드로가 자기 앞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한 단테에게 대답한 것처럼 대답할 것이다.

    "이 돈의 품질과 무게는 이미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말해 보라, 그것이 네 주머니에 있는가 없는가."

    가격형태는, 상품이 화폐와 교환될 수 있다는 것과 이러한 교환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다른 한편, 금은 교환과정에서 이미 화폐상품으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념적인 가치척도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관념적인 가치척도 속에는 경화( 硬貨 hard cash)가 숨어 있다.



    제 2 절 유통수단



    (a) 상품의 변태(變態: metamorphosis)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상품의 교환은 모순되고 서로 배제하는 관계들을 내포하고 있다. 상품의 발전[상품과 화폐로의 상품의 분화]은 이 모순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제공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현실의 모순이 해결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물체가 끊임없이 다른 한 물체를 향해 낙하하면서 동시에 그 물체로부터 끊임없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타원은 이 모순이 실현되는 동시에 해결되는 운동형태다.
    교환과정이 상품들을 [그것들이 비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것들이 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 이전시키는 한, 그것은 사회적인 물질대사(物質代謝)이다. 어떤 유용노동의 생산물이 다른 유용노동의 생산물을 대체한다. 사용가치로 쓰이는 장소에 도달하면, 상품은 교환(交換)의 영역을 떠나 소비(消費)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상품교환의 영역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 과정을 형태의 측면에서, 즉 사회적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상품들의 형태변환(變煥) 또는 변태(變態)만을 고찰해야 한다.
    이 형태변환에 대한 이해가 지금까지 불충분했던 것은, 가치의 개념 그 자체가 명료하지 않았다는 점을 별도로 하면, 어떤 한 상품의 형태변환은 언제나 두 종류의 상품[즉, 보통상품과 화폐상품]의 교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정 때문이다. 상품과 금의 교환이라는 교환의 소재적(素材的) 요소에만 집착할 때에는, 정말로 보아야 할 것[즉, 상품의 형태상의 변화]을 간과하게 된다. 단순한 상품으로서의 금은 아직 화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다른 상품들은 그들의 가격을 통해 [그들 자신의 화폐모습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금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상품은 우선은 도금(鍊金)도 하지 않고 사탕도 넣지 않고 타고난 모습 그대로 교환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교환과정은 상품을 상품과 화폐라는 두 개의 요소로 분화시키는데, 이 두 개의 요소는 상품에 내재하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을 표현하는 외적 대립이다. 이 대립에서 사용가치로서의 상품들이 교환가치로서의 화폐와 대립한다. 다른 한편, 이 대립의 어느 쪽도 상품이며, 따라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은 두 극(極)
    의 각각에서 서로 반대로 표현되며, 또 이것에 의해 두 극의 상호관계가 표현된다. 등식의 한 편에는 보통의 상품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 그것의 가치로서의 존재는 가격에서 다만 관념적으로 나타날 뿐이며, 이 가격을 통해 상품은 [상품가치의 진정한 화신인] 금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등식의 다른 한편에 있는} 금이라는 물건은 오직 가치의 화신, 화폐로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금은 현실적으로 교환가치(交換價値)이다. 금의 사용가치는 일련의 상대적 가치표현들[여기서 금은 다른 모든 상품들을 자신의 유용성의 물질적 표현의 총체로 대면한다]에서 다만 관념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상품들의 이와 같은 대립적 형태들은 교환과정의 현실적인 운동형태들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상품소유[예컨대 우리의 첫 친구인 아마포 직포자]와 함께 교환장소인 시장(市場)에 가보기로 하자. 그의 상품인 20미터의 아마포는 2원이라는 가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것을 2원과 교환하고, 그 다음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답게 이 2원을 같은 가격의 가정용 성경책과 다시 교환한다. 그에게는 단순한 상품이며 가치의 답지자인 아마포가 그것의 가치모습인 금과 교환되어 양도되고, 이 가치모습은 다시 다른 하나의 상품, 즉 성경책과 교환되어 양도된다 이제 이
    성경책은 사용대상(object of utility)으로서 직포자의 집으로 가서 신앙의 욕망을 만족시키게 된다. 이와 같이 상품의 교환과정은 대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두 개의 변태-상품의 화폐로의 전환과, 화폐로부터 상품으로의 재전환- 에 의해 수행된다.(주석 16: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가 불에서 만물이 발생하며 만물에서 불이 발생한다고 말한 것은, 금은 재화들과 교환되며 재화들은 금과 교환되는 것과 같다"(F. 라살, ?에페소스의 은사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 베를린, 1858년, 제1권, p. 222). 이 문맥에 대한 라살의 주(p. 224주3)는 화폐를 부당하게도 단순한 가치상징(價値象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변태의 두 계기(契機: moments)는 직포자의 상이한 거래행위[즉, 상품을 화폐와 교환하는 판매와, 화폐를 상품과 교환하는 구매]임과 동시에 두 행위의 통일(구매를 위한 판매)이다.
    이제 아마포 직포자가 이 거래의 최종결과를 검토해 본다면, 그는 아마포 대신 성경책을, 즉 그의 최초의 상품 대신 그것과 가치(價値)는 같으나 유용성(有用性)은 다른 별개의 한 상품을 가지고 있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기타의 생활수단과 생산수단도 얻는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전체 과정은 그의 노동생산물과 다른 사람의 노동생산물과의 교환[즉, 생산물들의 교환]을 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상품의 교환과정은 다음과 같은 형태변환을 하면서 이루어진다.

    상품 - 화폐 - 상품

    C - M - C

    그 소재적 내용을 본다면, 이 운동은 C-C, 즉 상품과 상품의 교환이며, 사회적 노동의 물질대사인데, 이 물질대사가 결말을 지을 때에는 과정 자체도 사라진다.

    C - M. 상품의 제1 변태 또는 판매
    가치가 상품체로부터 금체(金體: body of gold)로 건너뛰는 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salto mortale)이다.(역자 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88.)
    만약 이 도약에 실패한다면, 상품 자체로서는 고통스러울 것이 없으나 상품소유자에게는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회적 분업은 상품소유자의 노동을 일면적(一面的)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그의 욕망을 다면적(多面的)인 것으로 만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산물은 그에게 오직 교환가치로서만 역할한다. 그러나 그의 생산물은 화폐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화폐는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있다. 화폐를 다른 사람의 주머니로부터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상품은 우선 화폐소유자에게 사용가치로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 상품에 지출된 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형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노동은 사회적 분업(分業)의 일환이어야 한다. 그러나 분업은 하나의 자연발생적인 생산조직이고, 그 조직은 상품생산자의 배후에서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1473
  • 자본론4
    즉 아마포로 표현하게 된다. 여기서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10그램의 차, 또는 =기타 등등이라는 시리즈를 거꾸로 하면, 다시 말해 이 시리즈에 이미 암시되어 있는 역의 관계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나온다.

    C. 일반적 가치형태

    1개의 저고리
    10그램 차
    40그램의 커피 = 20미터의 아마포
    1쿼터의 밀
    2온스의 금
    1/2톤의 철
    X량의 상품 A
    기타 등등의 상품


    1. 가치형태의 변화된 성격


    여러 가지 상품들은 자기의 가치를 이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단순하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 한 개의 상품으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 통일적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일한 상품으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단순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일반적이다.
    제1형태와 제2형태는 한 상품의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또는 상품체]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다.
    제1형태는 1개의 저고리=20미터의 아마포, 10그램의 차=1/2톤의 철 등과 같은 가치등식을 제공했다. 저고리의 가치는 아마포와 동등하고 차의 가치는 쇠와 동등하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저고리와 차의 이러한 가치표현들은 [아마포와 쇠가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것이다. 이 형태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우연적인 때때로의 교환행위에 의해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의 초기 단계에서 뿐이다.
    제2형태는 제1형태보다 더 완전하게 한 상품의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저고리의 가치는 아마포 . 쇠 . 차, 요컨대 저고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물건과 동등한 것으로 되어 저고리의 현물형태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는 모든 상품들의 공통된 가치표현은 직접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왜냐하면, 각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다른 모든 상품들이 등가(물)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개된 가치형태는 어떤 특수한 노동생산물[예컨대 가축]이 예외적으로가 아니라 관습적으로 각종 상품들과 교환되는 그때에 비로소 실제로 나타난다.
    새로 얻어진 형태[제3형태]는 상품세계의 가치들을 그 세계에서 선발된 한 개의 상품종류[예컨대 아마포]로 표현하며, 그리하여 모든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과 아마포와의 동등성(同等性)을 통해 표현된다. 이제는 어떤 상품의 가치도 아마포와 등등한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될 뿐 아니라 일체의 사용가치로부터 구별되며, 또 바로 그렇게 됨으로써 모든 상품의 가치는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형태에 의해 비로소 상품들은 실제로 가치로 서로 관련맺거나 상호간에 교환가치로 나타나게 된다.
    이전의 두 형태는 각 상품의 가치를 단 하나의 다른 종류의 상품으로 표현하거나, 그 상품과는 다른 일련의 많은 상품으로 표현한다. 어느 경우에나 개별상품이 하나의 가치형태를 얻게 되는 것은 말하자면 개별상품의 개인적인 일이고, 개별상품은 다른 상품들의 협력 없이 이 일을 달성한다. 다시 말해, 다른 상품들은 그 상품에 대해 등가(물)이라는 수동적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반적 가치형태는 오로지 상품세계 전체의 공동사업으로 생길 수 있을 뿐이다. 하나의 상품이 자기의 가치를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이 자기들의 가치를 동일한 등가(물)로 표현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새로 등장하는 상품종류도 반드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가치로서의 상품들의 객관적 실재는 순전히 이 물건들의 '사회적 존재'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이 객관적 실재는 상품들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모든 상품들이 아마포와 동등하게 되는 이 형태에서는, 모든 상품들은 이제 질적으로 동등한 것[즉, 가치 일반]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가치량으로 나타난다. 모든 상품들의 가치량이 동일한 재료인 아마포로 표현되기 때문에 서로 비교된다. 예컨대, 10그램의 차= 20미터의 아마포이고, 40그램의 커피=20미터의 아마포라면, 10그램의 차=40그램의 커피가 된다. 바꾸어 말해, 1그램의 커피에는 가치의 실체인 노동이 1그램의 차에 들어 있는 것의 1/4만 들어 있다.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상품세계로부터 제외된 등가(물) 상품인 아마포에 일반적 등가(물)(universal equivalent)의 성격을 부여한다. 아마포의 현물형태는 모든 상품들의 가치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형태며, 따라서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 아마포의 현물형태는 온갖 인간노동의 눈에 보이는 화신(visible incarnation), 즉 온갖 인간 노동의 사회적 번데기 상태로 간주된다. 직포[아마포를 생산하는 사적 노동]는 이리하여 일반적인 사회적 형태[즉, 다른 모든 종류의 노동과 동등하다는 형태]를 획득한다. 일반적인 가치형태를 구성하는 무수한 등식은 아마포에 실현되어 있는 노동을 다른 상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노동과 차례 차례로 등치시키며, 그리하여 직포를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일반적 현상형태로 만든다. 이처럼 상품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은, 현실적 노동의 모든 구체적 형태와 유용한 속성이 사상(捨象)된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소극적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현실적 노동을 인간노동 일반[인간노동력의 지출]이라는 공통된
    성질로 환원시킨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모든 노동생산물을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로 표현하는 일반적 가치형태는,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해 일반적 가치형태가 상품세계의 사회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상품세계 안에서는 노동의 일반적 인간적 성격이 노동의 독자적인 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2.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과 등가형태의 발전 사이의 관계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 정도와 등가형태(等價形態)의 발전 정도는 서로 대응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등가형태의 발전은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의 표현이며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상품의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다른 한 상품으로 하여금 '개별적인‘ 등가(물)로 되게 한다. 상대적 가치의 전개된 형태[즉, 한 상품의 가치를 다른 모든 상품들로 표현하는 것]는 다른 모든 상품들에게 상이한 종류의 '특수한 ’등가(물)이라는 형태를 부여한다. 끝으로, 특수한 한 가지 상품이 '일반적' 등가(물)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타의 모든 상품들이 그 상품을 자기들의 통일적인 보편적 가치표현의 재료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형태 그 자체가 발전함에 따라 가치형태의 두 극 [즉,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사이의 대립도 또한 발전한다.
    이미 제1형태-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도 이 대립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고정(fix)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등식을 좌로부터 우로 읽는가 또는 그 반대인가에 따라 아마포와 저고리라는 두 개의 상품극(商品極) 각각은 어떤 때는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고 어떤 때는 등가형태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극의 대립성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아직 곤란하다.
    제2형태에서는 한 번에 단 한 가지 상품만이 자기의 상대적 가치를 완전히 전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 다른 모든 상품이 그 한 가지 상품에 대해 등가(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에만, 그 한가지 상품은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미 여기에서는 가치등식-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 =10그램의 차, 또는 =1쿼터의 밀 등등-의 양변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만약 바꾸어 놓는다면, 이 등식의 전체 성격이 변경되어 전개된 가치형태가 일반적 가치형태로 전환된다.
    끝으로, 마지막 형태[제3형태]가 상품세계에 일반적 사회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를 주는데, 그것은 상품세계에 속하는 모든 상품[단 하나의 상품을 제외하고]이 등가형태로부터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때에만 그렇다. 따라서 아마포라는 하나의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과의 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즉,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이러한 형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때에만 그렇다.(주석 26: 일반적 . 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가 [마치 자석의 양극이 음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의 대립적인 형태라는 사실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 이 때문에 모든 상품이 동시적으로 직접적 교환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이 생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 모두가 교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품생산을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독립의 최고봉으로 보는 소시민에게는 상품들이 직접적으로 교환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들(이것들은 상품생산에 내재하고 있다) [반대편에서 보면 화폐가 지닌 특권]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다. 이 속물적 유토피아는 프루동(Proudon)의 사회주의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철학의 빈곤? 제1장} 결코 독창적인 것도 아니고 프루동보다 훨씬 이전에 그레이(J. Gray), 브레이(J. F. Bray) 등등에 의해 더 잘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이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과학'(科學)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어떤 학파도 프루동학파처럼 '과학'이라는 말을 남용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상(思想)이 없는 곳에는 사상을 대신해 말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는 상품은, 통일적인 따라서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만약 아마포[또는 일반적 등가(물)로 역할하는 어떤 한 상품]가 동시에 상대적 가치형태에도 참가한다면, 그 상품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20미터의 아마포=20미터의 아마포로 되며, 이것은 가치도 가치량도 표현하지 않는 하나의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일반적 등가(물)의 상대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히려 제3형태를
    거꾸로 놓아야 한다. 일반적 등가(물)은 기타의 상품들과 공통된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않으며, 그것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체의 무한한 시리즈로 상대적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되면 전재된 상대적 가치형태[즉, 제2형태]가 등가(물) 상품의 독자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로 나타난다.



    3. 일반적 가치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의 이행


    일반적 등가형태는 가치 일반의 한 가지 형태다. 따라서 어떤 상품도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어떤 한 상품이 (제3형태에서) 일반적 등가형태로 되는 것은, 그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에 의해 그들의 등가(물)로 선출되어 배제되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될 때에 한해서다. 이러한 배제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품종류에 한정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상품세계의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객관적인 고정성과 일반적인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인 등가형태로 간주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이제 화폐상품(貨幣商品)으로 된다. 다시 말해, 화폐로 기능한다. 상품세계 안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상품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 되며, 그 상품이 그 역할을 사회적으로 독점하게 된다. 제2형태에서 아마포의 특수한 등가(물)로 기능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그리고 제3형태에서 자기들의 상대적 가치를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상품이 이 특권적 지위를 역사적으로 획득했다. 그것은 금(을)이다. 제3의 형태에서 아마포의 자리에 금을 놓으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D. 화폐형태

    20미터의 아마포
    1개의 저고리
    10그램의 차
    40그램의 커피 = 2온스의 금
    1쿼터 의 밀
    1/2톤 철
    X량의 상품 A

    제1형태에서 제2형태로, 또 제2형태에서 제3형태로 이행하면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반해, 제4형태는 아마포 대신 이제 금이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제3형태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제4형태에서는 금이 [아마포가 제3형태에서 한 역할과 똑같은 역할, 즉]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수행한다. 진보한 것은, 직접적인 일반적 교환가능성의 형태[즉, 일반적 등가형태]가 이제는 사회적 관습에 의해 최종적으로 상품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형태와 일체화되었다는
    점뿐이다.
    금이 다른 여러 상품에 대해 화폐로 상대하는 것은, 금이 그들에 대해 이미 이전부터 상품으로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금도 개별적인 교환에서는 개별적 등가(물)로서, 그리고 전개된 교환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등가(물) 상품과 나란히 특수한 등가(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금은 어떤 때는 좁은 범위에서, 어떤 때는 더 넓은 범위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이 상품세계의 가치표현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독점하자마자 화폐상품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금이 화폐상품으로 되었을 때 비로소 제4형태는 제3형태와 구별되었다. 바꾸어 말해, 일반적 가치형태는 화폐형태(貨幣形態)로 전환되었다.
    한 상품[예컨대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를 화폐상품으로 기능하는 상품[예컨대 금]에 의해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는 가격형태(價格形態: price form)이다. 그러므로 아마포의 '가격형태'는 다음과 같다.

    20미터의 아마포 = 2온스의 금

    또는 만약 금 2온스 주화의 명칭이 2원이라면,

    20미터의 아마포 = 2원

    화폐형태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일반적 등가형태(一般的 等價形態), 따라서 일반적 가치형태[즉, 제3형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제3형태는 거꾸로 하면 제2형태[전개된 가치형태]로 환원되고, 이 제2형태의 구성요소는 제1형태[즉,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다. 그러므로 단순한 상품형태[또는 단순한 '가치'형태]는 화폐형태의 맹아인 것이다.



    제 4 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상품은 첫눈에는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하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로 차 있는 기묘한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상품이 사용가치(使用價値)인 한,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든, 인간노동의 생산물로 비로소 이러한 속성들을 획득한다는 관점에서 보든, 상품에는 조금도 신비한 요소가 없다. 인간이 자기의 활동에 의해 자연소재의 형태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변경시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면, 목재로 책상을 만들면 목재의 형태는 변경된다. 그러나 책상은 여전히 목재이고 보통의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책상이 상품으로 나타나자마자 초감각적인 물건으로 되어버린다. 책상은 자기의 발
    로 마루 위에 설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에 대해 거꾸로 서기도 하며, [책상이 저절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망상(妄想)을 자기의 나무 두뇌로부터 빚어낸다. (주석 27: 세계 전체가 완전히 정지상태에 있는 것같이 보였던 바로 때 {1848년 혁명의 패배 직후의 반동기} 다른 것들을 고무하기 위해 중국{태평천국의 난}과 책상{독일상류계급의 신비주의}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한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또 가치를 규정하는 요소들의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 여러 가지 유용노동 또는 생산활동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유기체의 기능이고, 각각의 기능은 [그 성격과 형태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인간의 뇌 . 신경 . 근육 . 감각기관의 지출이라는 것은 생리학상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치의 양적 규정의 토대[즉, 위의 지출의 계속시간 또는 노동량]에 관해 말한다면, 노동량(勞動量)은 노동의 질과는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태에서도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사람의 관심사[비록 발전단계가 빠름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주석 28: 고대의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토지 면적은 하루의 노동을 기준으로 측량되었다. 이로부터 에이커는 Tagwerk(또는 Tagwanne) {하루의 일}(jurnale, terrajurnalis 또는 diornalis), Mannwerk {남자 한 사람의 일}, Mannskraft{남자 1인의 힘}, Mannsmaad {남자 1인의 풀베기}, Mannshauet{남자 1인의 수확}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게오르그 루드비히 폰 마우러(Georg Ludwig von Maurer),?마르크. 농지.? 촌락 도시제도 및 공권력의 역사에 대한 서설?, 뮌헨 1854년, p. 129 이하를 보라.) 끝으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서로를 위해 노동하게 되면, 그들의 노동도 또한 사회적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자마자 발생하는 노동생산물의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이 형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종 인간노동이 동등하다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로서 동등한 객관성을 가진다는 구체적 형태를 취하며, 인간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에 의해 측정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의 가치량(價値量)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끝으로,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그 속에서 그들의 노동의 사회적 성적이 증명된다]는 노동생산물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치환(置換: substitution)에 의해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되며,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 [즉, 사회적] 물건으로 된다. 이것은 마치 물건이 시신경에 주는 인상은 시신경 자체의 주관적 흥분으로서가 아니라 눈밖에 존재하는 물건의 객관적 형태로 파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시각의 경우에는 광선이 현실적으로 한 개의 물건[외부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물건[눈]으로 던져진다. 이것은 물리적인 물건들 사이의 하나의 물리적 관계다. 이에 반해,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와 가치관계[이 속에서 상품형태가 나타난다]는 상품의 물리적인 성질이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물적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위해 우리는 몽롱한 종교세계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는 인간 두뇌의 산물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가진 자립적인 인물로 등장해 그들 자신의 사이 그리고 인간과의 사이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찬가지로 상품세계에서는 인간 손의 산물들이 그와 같이 등장한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物神崇拜: fetishism)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부착되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상품세계의 이와 같은 물신숭배는, 앞의 분석이 보여준 바와 같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발생된다.
    유용한 물건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이 [서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적 개인의 노동생산물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적 개인들의 노동총계가 사회의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도 오직 이 교환 안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바꾸어 말해, 교환행위가 노동생산물들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들과, [노동생산물을 매개로] 생산자들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적 개인의 노동은 사회의 총노동의 한 요소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자기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개인들이 자기들의 작업에서 맺는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이1]물건을 통한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 그리고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노동생산물은 교환에 의해 비로소 [유용한 물건이라는 감각적으로 다양한 물체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적으로 등등한 객관적 실재, 즉 가치(價値)를 획득한다. 노동생산물이 유용(有用)한 물건과 가치(價値)를 가진 물건으로 분할되는 것은, 교환이 이미 충분히 보급되어 유용한 물건이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따라서 물건의 가치로서의 성격이 이미 생산 중에 고려되는 때에만 실제로 나타난다. 이 순간부터 개별 생산자의 사적 노동은 이중의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한편으로, 사
    적 노동은 일정한 유용노동으로서 일정한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켜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총노동의 한 요소로서, 자연발생적인 사회적 분업의 한 분야로서, 자신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 다른 한편, 사적 노동이 개별 생산자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특수한 유용한 사적 노동들이 서로 교환될 수 있으며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서다. 서로 상이한 각종 노동의 완전한 동등화(同等化)는, 우리가 그들의 현실적 차이들을 사상(拾象)함으로써만, 즉 모든 노동을 인간노동력의 지출[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으로 환원(還元)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적 생산자들의 두뇌에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은 실제의 거래[생산물의 교환]에서 나타나는 형태로만 반영된다. 그리하여 사적 노동의 사회적인 유용성은 노동생산물이 타인에게 유용해야 한다는 형태로 반영되며, 각종 노동의 동등성이라는 사회적 성격은 물질적으로 상이한 노동생산물들이 모두 하나의 공통된 성질[즉, 가치]을 가지고 있
    다는 형태로 반영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이 단순히 동질의 인간노동의 물적 외피(外皮)이기 때문에 서로 가치로서 관계를 맺는다고 보지 않고. 그 반대로 생각한다. 즉, 사람들은 그들의 상이한 생산물을 교환에서 서로 가치로 등치(等値)함으로써 그들의 상이한 노동을 인간노동으로서 동등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주석 29: 그러므로 갈리아니가 "가치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물적 외피에 숨어 있는 관계라고 첨가했어야 했다(갈리아니[Galiani], ?화폐에 대해?, 쿠스토디 편, ?이탈리아 경제학고전집?, 근세편, 제3권, 밀라노, 1803년, p. 221).) 가치는 자기의 이마에 가치라고 써붙이고 있지는 않다. 가치는 오히려 각각의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象形文字)로 전환시킨다. 뒤에 인간은 이 상형문자의 의미를 해독하여 그들 자신의 사회적 산[가치]의 비밀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유용한 물건이 가치라는 성격을 가지는 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노동생산물은, 그것이 가치인 한, 그 생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물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후일의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발전사에 획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물 자체의 객관적인 성격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상을 결코 없애 버리지는 못한다. 이 특수한 생산형태[상품생산]에서만 타당한 것[즉, 서로 독립된 사적 노동들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은 사적 노동들이 인간노동으로서 동등하다는 데 있으며, 그 사회적 성격이 노동생산물에서 가치라는 존재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상품생산의 관계에 파묻힌 사람들은 [위의 과학적 발견 이전에나 이후에나 마찬가지로] 절대적 타당성-마치 과학에 의해 공기의 구성요소들이 발견된 뒤에도 공기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의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산자들이 교환할 때 실제로 우선 관심을 갖는 것은 자기의 생산물과의 교환으로 타인의 생산물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는가, 즉 어떤 비율로 생산물들이 교환되는가이다. 이 비율이 어느 정도의 관습적인 고정성을 얻게 되면, 그 비율은 노동생산물의 본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1돈의 쇠와 2온스의 금이 가치가 같다는 것은, 1그램의 금과 1그램의 쇠가 [물리적 . 화학적 속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사실과 같은 것처럼 생각한다. 노동생산물의 가치로서의 성격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량으로 작용할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 가치량은 교환자들의 의지 . 예견 행위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이다. 사회 안에서 교환자들 자신의 운동은 그들에게는 물건들의 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들은 이 운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운동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서로 독립적으로 수행되면서도 사회적 분업의 자연발생적인 일환으로 전면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사적 노동이 사회가 요구하는 양적 비율로 끊임없이 조정된다는 과학적 인식이 경험 자체로부터 생기기 위해서는, 상품생산이 완전히 발전해야 한다. 위와 같은 조정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생산물 사이의 우연적인 . 끊임없이 변동하는 교환관계 중에서, 생산물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마치 우리의 머리 위로 집이 무너져 내릴 때의 중력의 법칙과 같이] 규제적인 법칙으로서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기 때문이다.(주석 30: "주기적인 공황을 통해서만 자기를 관철시킬 수 있는 법칙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사자들의 의식과 무관한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국민경제학비판개요?, 아놀드 루게[Arnold Ruge]와 칼 마르크스가 핀집한 ?독불연보?, 파리, 1844년에 있음).) 그러므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량(價値틀)의 결정은 상품의 상대적 가치의 현상적인 운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의 발견은,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크기가 순전히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듯한 외관(外觀)을 제거하기는 하나, 결코 가치의 크기가 결정되는 물적 형태를 철폐하지는 못한다.
    인간생활의 여러 형태들에 관한 고찰, 따라서 이 형태들의 과학적 분석은 그것들의 현실의 역사적 발전과는 반대의 길을 밟는다. 왜냐하면, 그 분석은 사후적으로, 따라서 발전과정의 기성(旣成)의 결과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노동생산물에 상품이라는 도장을 찍는 [따라서 상품유통의 전제조건으로 되고 있는] 형태들은, 사람들이 그 형태들의 역사적 성격이 아니라[그들에게는 그것들이 불변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내용과 의미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사회생활의 자연적 형태라는 견고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상품가격의 분석이 가치량의 결정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모든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화폐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상품은 가치라는 성격을 확정시킨 것이다. 그러나 바로 상품세계의 이 완성형태-화폐형태-가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 따라서 개별 노동자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냄으로써 은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저고리나 장화는 [아마포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반적 화신이기 때문에] 아마포와 관계를 맺는다고 말하면, 이 표현은 황당무계하게 들린다. 저고리와 장화의 생산자들이 자기 상품들을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아마포[또는 마찬가지지만 금이나 은]와 관계를 맺게 한다면, 사회의 총노동과 그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관계는 그 생산자들에게는 전혀 황당무계한 개념일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들은 바로 부르주아 경제학의 범주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범주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일정한 사회적 생산양식[상품생산]의 생산관계에서는 사회적으로 타당하며 따라서 객관적인 사고형태(思考形態)다. 그러므로 상품의 모든 신비[즉,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 노동생산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상과 황당무계]는 우리가 다른 생산형태로 이행하자마자 곧 소멸한다.
    경제학자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좋아하므로(주석 31: 리카도조차도 자기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리카도는 원시적 어부와 원시적 사냥꾼을 상품소유자로 만들고, 물고기와 짐승을 그들의 교환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시간에 비례해 교환시킨다. 이때 그는 원시적 어부와 원시적 사냥꾼이 1817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통용되고 있던 금리계산표에 의거해 자기들의 노동도구의 가치를 계산한다는 시대착오에 빠지고 있다. ‘오웬(Owen)의 평행사변형' {노동자촌}이 부르주아 사회형태 이외에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사회형태인 듯하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베를린, 1859년, pp. 38-39)), 우선 로빈슨 크루소의 섬생활을 보기로 하자. 로빈슨 크루소는 본성이 검소하지만 각종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며 따라서 도구를 만들고 가구를 제작하고 염소를 길들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 등 각종 유용노동(有用勞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나 그와 유사한 것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로빈슨 크루소는 자기의 온갖 활동을 즐기고 위안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의 생산적 기능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여러 기능들이 동일한 자신의 여러 가지 활동형태, 따라서 인간노동의 여러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절실한 필요 때문에 자기의 시간을 정확하게 여러 가지 기능들 사이에 배분한다. 어떤 기능이 그의 총활동에서 더 큰 시간을 차지하는가는, 목적하는 유용효과를 얻는 데 부닥치는 곤란이 큰가 작은가에 달려 있다. 그는 경험으로 이것을 안다. 난파선에서 시계 . 장부 . 잉크 . 펜을 구해낸 우리의 로빈슨 크루소는 훌륭한 영국사람답게 즉시 자기 자신의 일들을 장부에 적기 시작한다. 그의 장부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유용한 물건들이나, 그것들의 생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작업이
    나, 끝으로 이들 생산물의 일정량의 생산에 평균적으로 걸리는 노동시간 등의 명세가 포함되어 있다. 로빈슨 크루소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든 부(富)를 구성하는] 물건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너무나 간단명료하여 누구라도 특별히 머리를 쓰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들은 벌써 가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밝은 섬으로부터 음침한 유럽의 중세(中世)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는 여기에서 독립적인 사람 대신 모두가 의존적이라는 것-농노와 영주, 가신과 제후, 속인과 성직자-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는 인격적 예속이 물질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와 이에 의거하고 있는 생활의 여러 부문들을 특징짓는다. 그러나 바로 인격적 예속관계가 주어진 사회적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노동과 노동생산물은 그것들의 진정한 모습과는 다른 환상적인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다. 노동과 생산물은 사회의 거래에서 부역(賦役)과 공납(貢納)의 모습을 취한다. [상품생산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와 같은 노동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여기에서는 노동의 특수하고 자연적인 형태가 노동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인 것이다. 부역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만, 어떤 농노도 자기의 영주를 위해 지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일정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교회에 바쳐야 하는 10 . 1조는 자기가 성직자로부터
    받는 축복에 비하면 훨씬 더 분명하다. 중세 사람들의 상호관계에서 각자가 하는 상이한 역할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든, 개인들이 노동의 수행에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인격적 관계로 나타나며, 물건들[노동생산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지는 않는다.
    공동노동[직접적으로 결합된 노동]의 예를 찾아보기 위해 [모든 문화민족의 역사의 초기에 나타
    나는] 그러한 노동의 자연발생적 형태로까지 소급해 갈 필요는 없다.(주석 32: "자연발생적인 공동체 소유는 명백히 슬라브적 형태이며, 심지어는 전적으로 러시아적 형태라고까지 하는 가소로운 편견이 최근에 널리 퍼지고 있다. 사실 이것은 로마인 . 게르만인 . 켈트인들에게도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원시적 형태이며, 이 형태의 수많은 표본들은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볼 수 있다. 아시아적, 특히 인도적 공동체소유 형태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는, 자연발생적 원시적 공동체소유의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어떻게 그 붕괴의 여러 가지 형태가 발생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로마적. 게르만적 사적 소유의 여러 가지 원형은 인도적 공동체소유의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같은 책, p 10) ) 가까운 예로 자신의 필요를 위해 곡물. 가축 .실 .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가족의 가부장적 생산이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그들 가족노동[집단노동]의 여러 가지 생산물이지만, 상품으로 서로 상대하지는 않는다. 이 생산물들을 생산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들(즉, 농경 .목축. 방적 . 직포 . 재봉 등)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회적 기능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상품생산에 의거한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자연발생적인 분업체계를 가지는] 가족의 기능들이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의 성별 . 연령별 차이 그리고 계절의 교체와 더불어 변동하는 노동의 자연적 조건이 가족들 사이의 노동배분이나 가족 구성원 각자의 노동시간을 규제한다. 이 경우 각 개인의 노동력은 처음부터 가족의 전체 노동력의 일정한 부분으로 작용할 따름이므로, 개별 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노동 자체의 사회적 특징의 하나로 나타난다.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Association of free men)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적 노동의 모든 특징들이 재현再現)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 그 자신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 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매분은 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따라서 총생산물 중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 몫의 척도가 된다. 개별생산자들이 노동이나 노동생산물과 관련해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생산이나 분배에서 투명하고 단순하다.
    상품생산자 사회의 일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는, 생산자들이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따라서 가치로 취급한다는 점, 그리고 이물적 형태에서 자기들의 개별적 사적 노동을 동질적인 인간노동으로 서로 관련지운다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은 상품생산자 사회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종교는 추상적 인간에게 예배드리는 기독교, 특히 그것의 부르주아적 발전형태인 프로테스탄트교나 이신론(理神論) 등의 기독교이다. 고대 아시아적, 고전고대적 생산양식에서는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환, 따라서 인간의 상품생산자로서의 존재는 하나의 종속적인 역할[물론 공동체가 붕괴단계에
    들어감에 따라 그 중요성이 증대하긴 했지만]을 했다. 진정한 상업민족은, 에피쿠로스의 신들[상이한 세계 사이의 공간에 존재하며 인간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처럼, 또는 폴란드 사회의 틈새에 끼여 사는 유태인들처럼, 오직 고대세계의 틈새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대의 사회적 생산유기체는 부르주아적 생산유기체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그 생산유기체는 [다른 사람들과의 자연적인 종족관계의 탯줄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미성숙에 입각한 것이거나, 직접적인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생산유기체의 상황은 노동생산력의 낮은 발전단계, 그리고 그에 대응해 물질적 생활의 생산과정 안에서의 제한된 인간관계, 따라서 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제한된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한성이 고대의 자연숭배나 민중신앙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세계의 종교적 반영은,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일상생활의 현실적 관계가 투명하고 이해할 수있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 사회적 생활과정(즉, 물질적 생산과정)이 자유롭게 연합한 인간들에 의한 생산으로 되고 그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여지게 될 떼,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이 벗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는 물질적 토대 또는 일련의 물질적 생존조건을 가져야 하는데, 이 조건 자체도 또한 하나의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의 자연발생적 산물이다.
    경제학은 가치와 가치량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분석했고,(주석 33: 리카도의 가치량 분석의 불충분한 점-그래도 그것은 최량의 분석이다-은 이 책의 제3권 및 제4권?잉여가치학설사“에서 보게 될 것이다. 가치 일반에 관해 말한다면, 고전파경제학은 생산물의 가치(價値)로 나타나는 노동과 생산물의 사용가치(使用價値)로 나타나는 노동을 어디에서도 뚜렷하게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못했다. 고전파경제학이 실제로 이러한 구별을 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노동을 질적 측면에서, 또 어떤 때는 양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노동을 단순히 양적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질적 동일성 또는 동등성을, 따라서 각종 노동의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의 환원을 전제한다는 것을 고진파경제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컨대 리카도는 데스튜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v)의 다음과 같은 말에 찬의를 표명하고 있다. "우리의 육체적 및 정신적 능력만이 우리의 본원적 부(富)라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러한 능력의 사용, 즉 어떤 종류의 노동은 우리의 유일한 본원적 재보(財寶)이며, 또 우리가 부(富)라고 부르는 모든 물건들, 즉 가장 순수하게 기호에 맞는 것들뿐만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들이 창조되는 것은 언제나 이 능력의 사용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그 모든 물건들은 그것들을 창조한 노동을 대표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하나의 가치를 갖는다면, 또는 심지어 두 가지 별개의 가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 물건들은 그 가치들을 그것들이 발생한 노동의 가치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도 확실하다"(리카도,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비봉출판사, 365쪽). 우리는 다만 리카도가 데스튜트의 말에 그 자신의 한층 더 깊은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만을 지적해 둔다. 사실, 데스튜트는 한편으로 부를 형성하는 모든 물건들은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을 대표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물건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가치'(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노동의 가치로부터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선 한 상품(이 경우에는 노동)의 가치를 가정하고, 다음에는 또 그것으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규정하려고 하는 속류경제학의 흔한 오류?순환논법?에 빠지고 있다. 그런데 리카도는 데스튜트의 이 말을,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모두에 노동(노동의 가치가 아니고)이 표현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리카도 자신도 이처럼 두 개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이중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가치와 부, 그것들의 상이한 특성“이라는 장[제20장] 전체에 걸쳐 세이(J.B. Say)와 같은 사람들의 시시한 주장을 꼼꼼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가치의 원천이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데스투트가 자기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다른 한편, 가치의 개념에 관해서는 데스튜트가 세이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나 경제학은 어째서 이 내용이 그러한 형식을 취하는가, 즉 어째서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며, 그리고 어째서 노동시간에 의한 노동의 측량(測量)이 노동생산물의 가치량(價値量)으로 표현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주석 34: 고전파경제학의 근본적인 결함의 하나는 상품[특히 상품가치]의 분석으로부터 [가치를 교환가치로 되게 하는] 가치형태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같은 고전파경제학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들조차도 가치형태를 전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또는 상품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고전파경제학이 가치량의 분석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좀더 깊은 곳에 있다. 노동생산물의 가치형태는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가장 추상적인,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바로 이 형태에 의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한 종류가 되며 역사적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만약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사회적 생산의 영원한 자연적 형태라고 잘못 본다면, 필연적으로 가치형태, 따라서 상품형태,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한 화폐형태나 자본형태 등의 특수성까지도 간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시간이 가치량의 척도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경제학자들도 화페[즉, 일반적 등가(물)의 완성된 형태]에 관해서는 매우 괴상하고 모순된 관념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보통의 화폐 정의가 통용되지 않는 은행업의 고찰에서 특히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하여 고전파경제학에 반대해 중상주의가 부활했는데(가닐 등), 이들은 가치에서 오직 사회적 형태만을, 또는 오히려 사회적 형태의 실체없는 외관만을 보고 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 둘 것은, 내가 말하는 고전파경제학은 W. 페티 이래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의 내적 관련을 연구한 모든 경제학을 속류경제학(俗流經濟學: vulgar economics)에 대비시켜 지칭한다는 것이다. 속류경제학은 오적 외관상의 관련 속에서만 헤매면서 가장 조잡한 현상을 부르주아지의 자가수요에 맞도록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미 훨씬 전에 과학적 경제학에 의해 제공된 자료들을 되풀이해 음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속류경제학은 부르주아적 생산 당사자들이 자기들 자신의 세계[그들에게는 가장 좋은 세계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친부하고 독선적인 관념을 현학적으로 체계화하며 또 이 관념을 영원한 진리라고 선포하는 일만을 하고 있다.) [생산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생산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구성[체]에 속하고 있다는 도장이 분명히 적혀있는] 그러한 형태들도 경제학자의 부르주아적 의식에서는 생산적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명한 자연적 필연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경제학이 부르주아 이전의 사회적 생산유기체의 형태들을 취급하는 태도는 대체로 교부(敎父)들이 기독교 이전의 종교를 취급하는 태도와 흡사하다.(주석 35: "경제학자들은 하나의 기묘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제도[인위적인 제도와 자연적인 제도]가 있을 뿐이다. 봉건제도는 인위적인 제도이고, 부르주아제도는 자연적인 제도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두 가지 증류의 종교를 설정하고 있는] 신학자들과 비슷하다. 자기 자신의 종교 이외의 종교는 모두 인간이 발명해낸 것이고, 자기 자신의 종교는 신의 계시인 것이다....그리하여 이때까지는 역사라는 것이 존재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대답“. 1847년, p. 113). 고대 희랍인과 로마인은 오직 약탈에 의해서만 생활했다고 생각하는 바스티아(Bastiat)는 우습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약탈에 의해 살아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약탈할 수 있는 무엇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 약탈의 대상이 끊임 없이 재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희랍인과 로마인도 역시 그들 세계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하나의 생산과정, 즉 하나의 경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부르주아경제가 현대세계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는 바스티아는 노예노동에 입각한 생산양식은 약탈 체제에 입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위험한 근거 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이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까지도 노예노동의 평가를 잘못했었는데 하물며 바스티아와 같은 보잘것없는 경제학자가 어떻게 임금노동의 평가를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나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년)가 나왔을 때 미국의 어떤 독일어 신문이 나에게 제기한 반대를 간단히 반박하려 한다. 그 신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견해[즉, 일정한 생산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생산관계, 간단히 말해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실질적 토대로 해 그 위에 하나의 법률적 .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또한 그 실질적 토대에 조응하는 일정한 형태의 사회적 의식이 생긴다“고 하는 것과,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은 사회적 . 정치적 . 정신적 생활의 일반적 과정을 제약한다"고 하는 것]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대세계에 대해서는 분명히 정당하지만, 카톨릭교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나, 정치가 지배하고 있던 아테네와 로마에 대해서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선 첫째로 놀라운 것은, 중세와 고대세계에 관한 위와 같은 진부한 문구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세도 카톨릭에 의해서는 생활할 수 없었고, 고대세계도 정치에 의해서는 생활할 수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 세계가 자기의 생활을 영위한 방식 그것이 왜 한 경우에는 정치가, 다른 경우에는 카톨릭교가 지배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뿐 아니라, 예컨대 토지소유의 역사가 로마공화국의 이면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공화국의 역사에 그다지 정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또한 [편력기사 (knight errantry) 가 사회의 어떤 경제형태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한 대가는 이미 오래 전에 동키호테가 지불했던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이 상품세계에서 나타나는 물신성[또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의 객관적 현상형태]
    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혼란에 빠지고 있는가는, 특히 교환가치의 형성에서 자연의 역할에 관한 지리하고 무의미한 논쟁에서 잘 나타난다. 교환가치는 어떤 물건에 투하된 노동을 표현하는 일정한 사회적 방식이므로 [예컨대 환율 등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소재를 포함할 수가 없다.
    상품형태[화폐형태나 자본형태와 구별되고 있다]는 부르주아적 생산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미발달한 형태이므로, 그것은 [비록 오늘날과 같이 지배적 . 특징적인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비교적 일찍부터 출현했으며, 그 때문에 그 물신적 성격은 비교적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인{발달한} 형태에서는 이 단순성이라는 외관까지도 소멸한다. 중금주의(重金主義)의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중금주의자들은 금과 은이 하나의 사회적 생산관계로서의 화폐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금과 은이라는 자연물이 독특한 사회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의 경제학은 거만한 태도로 중금주의를 비웃고 있지만, 그것의 물신숭배성은 그것이 자본을 취급하자마자 아주 뚜렷해지는 것은 아닌가? {제3권 제24장을 참조하라.}지대(地代)는 토지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사회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중농주의자들의 환상이 소멸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 아닌가? {제3권 제38장을 참조하라.}
    그러나 너무 앞질러 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상품형태 자체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드는 데 그치려 한다. 만약 상품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使用價置)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모르지만, 사용가치는 물건인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다; 물건인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價値)이다, 우리 자신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교환가치(交換價値)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라고. 그러면 이제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상품의 심정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가치(교환가치)는 물건의 속성이고, 부(富: 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는 필연적으로 교환을 포함하고 있지만 부는 그렇지 않다.“(주석 36: ?경제학의 약간의 용어논쟁에 관한 고찰, 특히 가치와 수요공급에 관해?, 런던, 1821년, p. 16.) "부(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고 가치는 상품의 속성이다. 인간이나 사회는 부유하고. 진주나 금강석은 가치 있는 물건이다....진주나 금강석은 진주나 금강석만큼 가치를 가진다. "(주석 37: 베일리, ?가치의 성질, 척도 및 원인에 관한 비판적 논문?, p. 165)

    진주나 금강석 속에서 교환가치를 발견한 화학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이 화학적 실체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예리한 통찰력을 자부하고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물건의 사용가치는 물건의 물질적 속성과는 관계없이 존재하지만, 물건의 가치는 물건으로서의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와 같은 견해[엉터리 견해]를 확증해 주는 것은, 물건의 사용가치는 교환 없이 [즉, 물건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실현되지만, 물건의 가치는 오직 교환에서만 [즉,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서만] 실현된다고 하는 기묘한 사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라도 저 선량한 독베리(Dogberry)가 경비원 시콜에게 가르쳐 준 충고[전혀 말이 되지 않는 충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역자 주: 세익스피어의 희극, ?헛소동?, 제3막, 제3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운명의 덕택이지만, 읽고 쓰는 것은 자연히 알게 된다"라고.(주석 38: 앞의 ?고찰?의 저자나 베일리는, 리카도가 교환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고 그를 비난한다. 사실은 이것과 반대다. 리카도는 [예컨대 금강석이나 진주와 같은] 물건들이 교환가치로서 가지고 있는 외관상의 상대성을 이 외관의 배후에 숨어 있는 그것들의 진정한 관계[즉, 인간노동의 단순한 표현으로서의 그것들의 상대성]로 환원시켰던 것이다. 만약 리카도의 후계자들이 베일리에 대해 조잡하고 적절하지 못한 답변을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리카도 자신에게서 가치와 가치형태[또는 교환가치] 사이의 내적 관련에 관한 아무런 해명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제 2 장
    교환과정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상품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물건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만약 상품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그것을 점유할 수 있다.(주석 1: 경건했던 것으로 평판이 난 12세기에도 상품들 중에는 매우 미묘한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그 당시 프랑스의 한 시인은 랑디시장에서 볼 수 있는 상품들 중에 천 . 구두 . 가죽 . 농기구 . 모피 등과 아울러 ‘몸을 파는 여자’까지 들고 있다.) 이 물건들이 상품으로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품의 보호자들은 이 물건들에 자신들의 의지를 담고 있는 인물로 서로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한 상품의 소유자는 다른 상품의 소유자의 동의하에서만, 따라서 각자는 쌍방이 동의하는 하나의 의지행위(意志行爲)를 매개로 해서만,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고 타인의 상품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사적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계약(契約)의 형식을 취하는 이 법적 관계는 [합법적으로 발달한 것이든 아니든] 경제적 관계를 반영하는 두 의지 사이의 관계다. 이 법적 관계[또는 의지 관계]의 내용은 경제적 관계 그 자체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주석 2: 프루동(Proudhon)은 처음에 정의 . 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치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소규모 상품생산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인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理想: ideal)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 분자(分子)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진정한 법칙들을 연구하고 이에 의거해 일정한 과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그 대신 '자연상태'나 '친화성'이라는 '영원한 이념'에 의거해 이러한 상호작용을 개조하려는 화학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고리대(高利貸)는 '영원한 정의', '영원한 공정성', '영원한 상호부조' 및 기타의 '영원한 진리'와 모순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고리대'에 대해 아는 것은, 교부들이 고리대가 '영원한 은총', '영원한 신앙‘, '신의 영원한 의지'와 모순된다고 말했을 때 교부들이 고리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보다 과연 더 많은가?)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만 상품의 대표자, 따라서 소유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제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제적 관계들의 인격화(人格化 personification)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이 경제적 관계들의 담지자(擔持者)로 서로 상대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상품소유자와 상품 사이의 주된 차이는,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체를 오직 자기 자신의 가치의 현상형태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태어날 때부터 평등주의자며 냉소주의자인 상품은, 빠른 어떤 상품과도, 비록 그것이 마리토르네스(Maritornes)보다 더 추한 외모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정신뿐 아니라 몸까지도 교환할 용의를 항상 가지고 있다. 상품은 다른 상품체의 구체적 속성을 파악할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상품소유자가 자기 자신의 다섯 개 이상의 감각으로 보충해 준다. 그의 상품은 자기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상품을 시장에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상품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가치(使用價値)를 가지고 있다. 상품소유자에게는 상품은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담지자[따라서 교환수단]라는 점에서만 직접적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주석 3: "왜냐하면 모든 물건에는 두 개의 용도가 없기 때문이다....그 하나의 용도는 그 물건에 고유한 것이고, 다른 용도는 고유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구두에는, 한편으로 구두로서 신는다는 용도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환될 수 있다는 용도가 있다. 두 가지 모두 구두의 사용방식이다. 왜냐하면, 구두를 자기가 필요로 하는 화폐 또는 식료품과 교환하는 사람까지도 구두를 구두로서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두 고유의 사용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두는 교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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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3
    이 경우 두 가지 서로 다른 노동방식은 동일한 개인의 노동의 변종에 지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개인들의 고정된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재봉사가 오늘은 저고리를 만들고 내일은 바지를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의 개인노동을 변경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방향이 변함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부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의 형태로 또는 직포의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노동형태의 이와 같은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만약 생산활동의 규정적인 성격, 따라서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무시한다면, 생산활동은 다만 인간노동력(人間勞動力)의 지출에 지나지 않는다. 재봉과 직포는, 비록 질적으로 다른 생산활동이기는 하나, 모두 인간의 두뇌 근육 . 신경 . 손등의 생산적 소비이고, 이 의미에서 모두 인간노동이다. 재봉과 직포는 인간노동력 지출의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노동력이 다양한 형태로 지출되기 위해서는 노동력 그 자체가 어느 정도의 발전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순전한 인간노동(Human labour pure and simple)[즉, 인간노동력 일반의 지출]을 표현하고 있다. 부르주아사회에서는 장군이나 은행가는 거대한 역할을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매우 보잘것 없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데(주석 14: 헤겔(G. W. F Hegel), ?법철학“ 베를린, 1840년, p. 250, 제190단락을 보라)., 인간노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노동은 특수한 방향으로 발달하지 않은 보통의 인간이 자기의 육체 속에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순한 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평균적 노동(simple average labour) 자체도 나라가 다르고 문화의 발전단계가 다르면 그 성격도 달라지지만, 일정한 사회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다. 더 복잡한 노동은 강화된 또는 몇 배로 된 단순노동(intensifed or rather multiplied simple labour)으로 간주될 뿐이며, 따라서 적은 양의 복잡노동(複雜勞動)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單純勞動)과 동등하게 간주된다. 이와 같은 환산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 어떤 상품이 복잡한 노동의 생산물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가치를 통해 단순노동의 생산물과 동등하게 되고 일정한 양의 단순노동을 대표할 뿐이다.( 주석 15: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노동자가 예컨대 하루의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 또는 가치가 아니라 [그의 하루의 노동이 대상화되어 있는]상품의 가치다. 임금이라는 범주는 우리 발표[서술]의 이 단계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이 그 측정단위로서의 단순노동으로 환원되는 비율은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진행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생산자들에게는 관습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것처럼 보인다. 단순화를 위해 이하에서는 각종 노동력을 단순노동력으로 간주할 것인데, 이것은 오직 환산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이다.
    가치로서 저고리와 아마포를 고찰할 때 우리가 사용가치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가치로 표시되는 노동에서 우리는 재봉과 직포라는 노동의 유용형태상의 차이를 무시한다. 사용가치로서의 저고리와 아마포는 특정 목적의 생산활동이 천이나 실과 결합된 것이지만, 가치로서의 저고리와 아마포는 동질노동의 응고물(congealed quantities of homogeneous labour)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가치에 들어 있는 노동도 천이나 실에 대한 생산적 작용에 의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노동력의 지출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재봉과 직포는 질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에 사용가치로서의 저고리와 아마포의 형성요소로 된다. 그러나 재봉과 직포의 특수한 질이 무시되고 양자가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질을 가지는 한, 제봉과 직포는 저고리와 아마포의 가치의 실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저고리와 아마포는 가치일반(價値一般)일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의 가치이며, 우리의 가정에 의하면, 1개의 저고리는 10미터 아마포의 두 배의 가치를 가진다. 가치량價値量)의 이와 같은 차이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아마포는 저고리에 들어 있는 노동의 절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저고리의 생산에는 아마포의 생산에 걸리는 시간보다 두 배나 길게 노동력이 지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은 사용가치와의 관련에서는 질적으로만 고려되고, 가치와의 관련에서는 [노동이 벌써 순전한 인간 노동으로 환원되어 있으므로] 양적으로만 고려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노동이 '어떻게' 수행되며, 또 '무엇을' 생산하는가가 문제로 되며, 후자의 경우에는 노동력이 '얼마나' 지출되는가, 즉 노동의 계속시간이 문제로 된다. 상품 가치의 크기는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량만을 표시하기 때문에, 상품들은 어떤 일정한 비율을 취하면 그 가치가 등일하게 된다.
    만약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일체의 유용노동의 생산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생산된 저고리의 가치량은 저고리의 양에 비례해 증가할 것이다. 만약 1개의 저고리가 X일(日)의 노동을 대표한다면, 2개의 저고리는 2X일의 노동을 대표하게 된다. 그런데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두 배로 증가하거나 절반으로 감소한다고 가정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1개의 저고리가 미전의 2개의 저고리의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2개의 저고리가 이전의 1개의 저고리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할 것이다. 비록 두 경우에 1개의 저고리가 변함없이 동일한 편의를 제공하고, 저고리에 들어 있는 유용노동이 변함없이 유용하더라도, 그렇다. 어쨌든 저고리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勞動量)이 변한 것이다.
    상품의 양적 증가는 그 자체로 물적 부(富)의 증가이다. 2개의 저고리는 1개의 저고리보다 더 많은 물적 부다. 왜냐하면 2개의 저고리는 두 사람을 입힐 수 있지만 1개의 저고리는 오직 한 사람을 입힐 수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물적 부의 양적 증대가 그 가치량의 감소를 동반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되는 운동은 노동의 이중성에서 발생한다. '생산성'(productivity)은 물론 언제나 구체적 유용노동(concrete useful labour)의 생산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어떤 특수한 생산활동이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하는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용노동은 그 생산성의 상승 또는 저하에 비례해서 생산물을 많게나 적게 생산한다. 이와는 반대로, 생산성의 변동은 [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그것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산성은 구체적 유용형태의 노동의 속성이므로, 노동의 구체적 유용형태가 무시되어 버린다면 생산성은 [가치로 표현되는] 노동과 아무런 관련도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동일한 시간에 수행되는 노동은 생산성의 변동과는 관계없이 항상 동일한 가치량을 창조한다. 그러나 생산성이 변동할 때 노동은 동일한 길이의 시간에 상이한 양의 상품을 생산한다. 즉, 생산성이 상승하면 더 많은 상품을, 생산성이 감소하면 더 적은 상품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성과[따라서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량]를 증대시키는 생산성의 상승이, 이 증대된 상품 총량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총계를 단축시킨다면, 상품 총량의 가치량을 감소시키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로 된다.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인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價値)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使用價値)를 생산한다.(주석 16: "노동은 가치의 유일하고 정확한 보편적인 척도이며, 모든 시기와 장소에서 상이한 상품들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일한 노동량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동자에게는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는 건강 . 체력 . 혈기의 보통 상태에서는, 그리고 숙련 . 기교의 보통 정도에서는, 동일한 노동량에 대해 동일한 분량의 안락 . 자유 . 행복을 희생해야만 한다 (“국부론”, 동아출판사, 상, 43쪽, 39쪽). 한편, 스미스는 여기에서(그러나 모든 곳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상품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에 의한 가치 결정을 노동의 가치 [임금]에 의한 상품가치의 결정과 혼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량의 노동은 항상 동일한 가치 [임금]를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동이 상품가치로 표현되는 한, 노동은 노동력의 지출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 지출을 그는 다시 안락 . 자유 . 행복의 희생으로만 생각하며 인간의 정상적인 생명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근대적 임금노동자다. 주 9)에 인용한 익명의 필자인 스미스의 선행자가 훨씬 더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이 생활 필수품을 제조하는 데 1주일이 걸렀다....그리고 그것과 교환으로 어떤 다른 물건이 제공된다면, 그는 그 물건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동일한 노동과 시간을 들이게 했는가를 계산함으로써, 그 물건이 자기 물건의 적당한 등가(물)인가를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사실상 일어나는 일은, 어떤 사람이 일정한 시간에 어떤 물건을 생산하는 데 지출한 노동이 그와 동일한 시간에 다른 사람이 다른 물건을 생산하는 데 지출한 노동과 교환되는 것이다“(?금리 일반 및 특히 공채이자에 관한 고찰”, p. 39). {엥겔스: 영어에는 노동의 이 두 측면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다른 단어가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질적으로 규정된 노동은 work라고 부르며, 가치를 창조하는, 오직 양적으로만 측정되는 노동은 labour라고 부른다.})



    제 3 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상품은 철. 아마포. 밀 등과 같은 사용가치 또는 상품체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다. 이것이 상품의 평범한 현물형태(現物形態)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품인 것은 그것들의 이중적인 성격, 즉 사용의 대상임과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오직 이중적 형태(현물형태와 가치형태)를 가지는 경우에만 상품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상품이라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적 실재는 우리가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과부 퀵클리(Dame Quicly)와는 구별된다.(역자 주: 세익스피어, ?헨리 4세?, 제1부, 제3막, 제3장.) 가치로서의 상품의 객관적 실재에는 [상품체의 감각적이고 거친 객관적 실제와는 정반대로] 단 한 분자의 물질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돌려가며 만지면서 조사해 보더라도 그것이 가치를 가진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모든 상품은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실체의 표현일 경우에만 가치로서의 객관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 따라서 가치로서의 상품의 객관적 성격은 순수히 사회적인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가치는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실 우리는 상품들의 교환가치 또는 교환관계로부터 출발해 상품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찾아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가치의 이 현상형태로 되돌아가야 하겠다.
    상품들은 그 사용가치의 잡다한 현물형태와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형태[즉, 화폐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부르주아 경제학이 일찍이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수행해야 한다. 즉, 이 화폐형태의 발생기원을 밝혀야 한다. 다시 말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표현의 발전을 그 가장 단순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부터 휘황찬란한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추적해야 한다. 이것이 달성될 때 화폐의 신비는 곧 사라질 것이다.
    가장 단순한 가치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어떤 상품과 다른 종류[그것이 어떤 것이든]의 한 상품과의 가치관계이다. 그러므로 두 상품의 가치들 사이의 관계는 한 상품의 가치의 가장 단순한 표현을 제공한다.


    A.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는 Y량의 상품 B와 가치가 같다.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또는, 20미터의 아마포는 1개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다. )


    1. 가치표현의 두 극(極: pole):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모든 가치형태의 비밀은 이 단순한 가치형태 속에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 가치형태의 분석이 우리의 중요한 난관이다.
    종류가 다른 두 상품 A와 B(우리의 예에서는 아마포와 저고리)는 여기서 분명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아마포는 자기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며, 저고리는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제1상품은 능동적 역할을 하며, 제2상품은 수동적 역할을 한다.(역자 주: 20미터의 아마포를 가진 사람이 시장에서 1개의 저고리를 주면 자기의 아마포를 팔겠다고 외치는 상황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경우 저고리를 가진 사람은 틀림없이 아마포를 가질 수 있다.) 제1상품은 자기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해, 그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다. 제2상품은 등가(물)(等價: equivalent)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은 등가형태로 있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상호 의존하고 상호 제약하는 불가분의 계기들이지만, 그와 동시에 상호 배제하는 또는 상호 대립하는 극단들[즉, 가치표현의 두 극]이다. 이 두 극은 가치표현에 의해 상호관련 맺는 상이한 상품들이 맡는다. 예를 들어 아마포의 가치를 아마포로 표현할 수는 없다. 20미터의 아마포=20미터의 아마포는 결코 가치표현이 아니다. 이 등식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이다. 즉,20미터의 아마포는 20미터의 아마포[즉, 사용대상으로 고찰한 아마포의 일정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마포의 가치는 상대적으로만 [다시 말해 다른 상품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어떤 다른 상품이 등가형태로 아마포와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한편, 등가(물)의 역할을 하는 다른 상품은 동시에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다른 상품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1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재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즉 20미터의 아마포는 1개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다는 표현은, 1개의 저고리=20미터의 아마포, 즉 1개의 저고리는 20미터의 아마포와 가치가 같다는 역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고리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등식을 거꾸로 놓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저고리 대신 아마포가 등가(물)로 된다. 따라서 동일한 상품은 동일한 가치표현에서는 동시에 두 형태를 취할 수 없다. 두 형태는 정반대의 것으로 서로 배제한다.
    어떤 상품이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등가형태로 있는가는 오로지 가치표현에서 그 상품이 차지하는 현실적인 위치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이 자기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인가 또는 남의 가치를 표현해 주는 상품인가에 달려 있다.



    2. 상대적 가치형태


    (a)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한 상품의 가치의 단순한 표현이 어떻게 두 상품의 가치관계 속에 숨어 있는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 가치관계를 우선 그 양적 측면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와 정반대의 연구방법을 취해, 가치관계에서 두 가지 상품의 일정한 양이 서로 등치되는 비율만을 본다. 그들은 이때 상이한 물건들의 크기는 동일한 단위로 환원된 뒤에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동일한 단위로 표현했을 때에만 그 물건들의 크기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따라서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역자 주: 베일리(S. Baily)와 같이 가치형태의 분석에 전념해온 소수의 경제학자들이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첫째 들이 가치형태를 가치 자체와 혼동했기 때문이고, 둘째 그들이 실무적 부르주아의 조잡한 영향하에서 처음부터 오로지 가치형태의 양적 측면에만 주의를 돌렸기 때문이다. “양(量)에 대한 지배가....가치를 형성한다"(베일리, ?화폐와 그 가치변동?, 런던, 1837년, p. 11).)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든, 20미터의 아마포=20개의 저고리든, 또는 20미터의 아마포=X개의 저고리든, 다시 말해, 일정한 양의 아마포가 다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소수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든, 그러한 비율의 존재 자체는 가치량(價値量)으로서는 아마포와 저고리가 동일한 단위의 표현들이며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건들이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고 있다. 아마포=저고리라는 것이 이 등식의 기초이다.
    그러나 질적으로 등치되는 이 두 상품이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등식에서는 아마포의 가치만이 표현될 뿐이다. 어떻게 표현되는가? 아마포가 자신의 '등가(물)', 또는 자신과 '교환될 수 있는 물건'인 저고리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의 가치를 표현한다. 이 관계에서 저고리는 가치의 존재형태(즉, 가치의 물적 형상)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저고리는 오직 그러한 것으로서만 아마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관계에서 아마포 자신의 가치로서의 존재가 독립적인 표현을 얻는다. 왜냐하면, 오직 가치초서만 아마포는 저고리[등가이자 자기와 교환될 수 있는 물건]와 관계를 몇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학으로부터 예를 빌린다면, 부티르산과 포름산 프로필은 서로 다른 물질이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동일한 화학적 실체인 탄소(C)와 수소(H)와 산소(0)로, 그것도 동일한 비율[즉, C4H8O2)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만약 부리르산이 포름산 프로필과 등치된다면, 이 관계에서는 첫째로 포름산 프로필은 C2의 존제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둘째로 부티르산도 역시 C4H8O2 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부티르산을 포름산 프로필과 등치시킴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의 물적 형태와는 다른 화학적 구성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치로서의 상품은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이라고 말할때, 우리의 분석은 상품을 추상적 가치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현물형태와는 다른 가치형태를 상품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1상품의 제2상품에 대한 가치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제1상품의 가치성격이 제2상품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를 통해 표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가치물(價値物: a thing of value)로서의 저고리를 아마포와 등치시킴으로써 저고리에 들어 있는 노동을 아마포에 들어 있는 노동과 등치시킨다. 저고리를 만드는 재봉과 아마포를 만드는 직포는 그 종류가 다른 구체적 노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봉을 직포에 등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재봉을 두 가지 노동에서 진실로 똑같은 것 [즉, 인간노동이라는 양쪽에 공통된 성격]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직포도 또한 [가치를 짜는 한] 재봉과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추상적 인간노동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우회적 방식이다. 상이한 상품들 사이의 등가의 표현이 상이한 상품들에 들어 있는 각종 노동을 그것들에 공통된 것[즉, 인간노동 일반]으로 실제로 환원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형성 노동의 독자적인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주석 18: 페티에 이어 가치의 성질을 파악한 최초의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유명한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업이란 일반적으로 한 노동을 다른 노동과 교환하는 행위에 불과하므로 모든 물건의 가치는....노동에 의해 가장 정당하게 측정된다"(?프랭클린 저작집?, 스팍스 편, 보스턴, 1836년, 제2권, p. 267). 프렝클린은 모든 물건의 가치를 '노동'으로 측정함으로써 교환되는 노동 종류들 사이의 차이를 사상(捨象)하며 그것들을 동일한 인간노동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의식하지 않은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에는 어떤 ‘한 노동’에 관해 말하고, 다음에는 ‘다른 노동’에 관해 말하고, 끝으로 모든 물건의 가치와 실체로서는 아무런 수식어 없는 ‘노동’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포의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의 독특한 성격을 표현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노동력이 유동상태에 있는 것[즉, 인간노동]은 가치를 창조하지만 그 자체가 가치는 아니다. 인간노동은 어떤 대상의 형태로 응고된 상태에서만 가치로 된다. 인간노동의 응고물인 아마포 가치는 [아마포 그 자체와는 물적으로 구별되며 또 동시에 아마포와 기타 모든 상품에 공통된]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다.
    저고리에 대한 아마포의 가치관계에서 저고리는 질적으로 아마포와 같은 것(같은 종류의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저고리가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저고리는 가치가 표현되는 물건[즉, 가치를 감촉할 수 있는 현물형태로 표현하는 물건]이다. 그러나 저고리 그 자[상품인 저고리의 물체]는 순수히 사용가치다. 저고리 그 자체가 가치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임의의 아마포 한 조각이 가치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나하면, 상품은 자기의 가치를 가치 관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사실은 저고리가 아마포와의 가치관계 안에 있을 때에는 그 외부에 있을 때보다 큰 의의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약간의 사람들이 금으로 장식된 제복을 입을 때에는 그것을 입지 않을 때보다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 것과 같다.
    저고리의 생산에는 실제로 재봉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 따라서 저고리에는 인간노동이 쌓여 있다. 이 측면에서 본다면, 저고리는 '가치의 담지자(擔持者)'이다. 물론 이러한 저고리의 속성은 저고리가 아무리 닳아 얇아져도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마포와의 가치관계에서 저고리는 이러한 자격[즉, 구체적 형상을 띠고 있는 가치 또는 가치체(價値體: body of value)]으로 역할한다. 저고리가 단추를 채우고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마포는 그 속에 있는 아름다운 동류의식[가치라는 동류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아마포에 대해 저고리가 가치를 대표하려면 아마포에게 있어 가치가 저고리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개인 A가 개인 B로부터 '국왕(國王)'으로 숭배를 받으려면, B의 눈에 국왕이 A의 육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더욱이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국왕의 용모와 머리털과 기타 여러 가지가 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라서 저고리가 아마포의 등가(물)로 되는 가치관계에서 저고리의 형태는 가치형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상품 아마포 가치는 상품 저고리의 물체로 표현된다. 즉, 한 상품의 가치는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된다. 사용가치로서 아마포는 저고리와 분명히 구별되는 물건이지만, 가치로서 아마포는 저고리와 같은 것이며, 따라서 저고리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아마포는 자기의 현물형태와는 다른 가치형태를 얻는다. 아마포의 가치로서의 존재는 아마포와 저고리와의 동등성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마치 기독교도의 양(羊)과 같은 성질을 기독교도=신의 새끼양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품가치의 분석이 이전에 우리에게 말해준 모든 것을, 아마포 자신이 저고리와 교제하게 되자마자 우리에게 또다시 이야기해 주고 있다. 다만 아마포는 자기만 아는 언어, 즉 상품어(商品語)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한다. 노동은 인간노동이라는 추상적 속성에서 아마포 자신의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마포는 저고리가 자기와 동등하다고 간주되는 경우에만 [즉, 가치일 경우에만] 자기와 동일한 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치로서의 .자기의 고상한 객관적 실재는 자기의 거친 육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마포는 저고리의 형태로 자기의 가치를 표현하며, 따라서 그 자신도 가치물인 한, 저고리와 추호도 다름이 있다고 말한다. 덧붙여 말해, 상품어도 히브리어 이외에[다소 정확한] 많은 방언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상품 B를 상품A에 등치하는 것이 상품A의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타냄에 있어 독일어의 'Wertsein'[가치가 있다]은 라틴어 계통의 동사 'Vllere','Valer','Valoir'보다 적절하지 못하다. 파리는 확실히 미사를 받을 만하다!
    이와 같이 가치관계를 매개로 상품 B의 현물형태는 상품 의 가치형태로 된다. 다시 말해, 상품 B의 물체는 상품 A의 가치의 거울로 된다.(주석 19: 어떤 의미에서 인간도 상품과 같은 상황에 있다. 인간은 손에 거울을 들고 탄생하는 것도 아니며, "나는 나빠"라고 주장하는 피히테(Fichte)류의 철학자로 탄생하는 것도 아니므로, 인간은 우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된다. 인간 베드로는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인간 바울과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관계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됨으로써 바울은 [바울이라는 온전한 육체를 가진 그대로] 베드로에 대해 인간이라는 종족의 현상형태로 되는 것이다.) 상품 A는 [가치체이자 인간노동의 체현물인] 상품 B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용가치 B를 자기 자신의 가치의 표현재료로 삼는다. 상품 A의 가치는 이와 같이 상품 B의 사용가치로 표현되어 상대적 가치 형태를 얻게 된다.



    (b) 상대적 가치형태의 양적 규정성
    자기의 가치를 표현해야 하는 각 상품은, 예컨대 15부셸의 밀, 100그램의 커피 등등과 같이, 일정한 양의 유용한 물건이다. 이 주어진 상품량에는 인간노동의 일정한 양이 들어 있다. 따라서 가치형태는 가치일반뿐 아니라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즉, 가치량]도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품 A의 상품 B에 대한 가치관계, 아마포의 저고리에 대한 가치관계에서는 저고리라는 상품 종류가 가치체 일반으로 아마포에 질적으로 등치될 뿐 아니라, 일정한 양의 가치체 또는 등가(물)[예컨대 1개의 저고리]이 일정한 양의 아마포[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에 등치된다.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즉 20미터의 아마포는 1개의 저고리와 가치가 같다"라는 등식은, 1개의 저고리에는 20미터의 아마포에 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 양의 가치 실체가 들어 있다는 것, 따라서 양쪽의 상품량은 등량의 노동 또는 동일한 노동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20미터의 아마포나 1개의 저고리의 생산에 걸리는 노등시간은 재봉
    또는 직포의 생산성이 변동할 때마다 변동한다. 이제 이러한 변동이 가치량의 상대적 표현에 미치는 영향을 한층 더 상세하게 연구해야 한다.

    i.아마포의 가치는 변동하는데(주석 20: 여기에서는 '가치'라는 표현을 이미 앞의 몇 곳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 즉 가치량(價値量)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저고리의 가치는 불변인 경우

    만약 아마포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이 예컨대 아마를 재배하는 토지의 비옥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두 배로 된다면, 아마포의 가치도 두 배로 될 것이다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 대신 20미터의 아마포=2개의 저고리로 될 것이다. 왜냐하면, 1개의 저고리는 이제 20미터의 아마포에 드는 노동시간의 반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만약 아마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예컨대 토지개량에 의해 반으로 감소한다면, 아마포의 가치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20미터의 아마포=1/2개의 저고리로 된다.
    이와 같이 상품 B의 가치는 불변이라도 상품 A의 상대적 가치[즉,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A의 가치에 정비례해 상승 또는 하락한다.

    ii. 아마포의 가치는 불변인데 저고리의 가치가 변동하는 경우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예컨대 양털의 흉작 때문에두 배로 된다면,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가 아니라 이제는 20미터의 아마포=1/2개의 저고리로 될 것이다. 반대로 저고리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진다면 20미터의 아마포=2개의 저고리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품 A의 가치는 불변이라도 상품 B로 표현하는 상품 A의 상대적 가치는 상품 B의 가치변동에 반비례해 하락 또는 상승한다.

    i과 ii의 여러 가지 경우를 비교해 보면, 상대적 가치의 동일한 양적 변동이 정반대의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라는 등식이 20미터의 아마포=2개의 저고리로 되는 것은, 어떤 때는 아마포의 가치가 두 배로 되기 때문이고, 또 어떤 때는 저고리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등식이 20미터의 아마포=1/2개의 저고리로 되는 것은, 어떤 때는 아마포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이고, 또 어떤 때는 저고리의 가치가 두 배로 등귀하기 때문이다.

    iii. 아마포와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으로 그리고 동일한 비율로 변동하는 경우

    이 경우 이 상품들의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여전히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다. 이 상품들의 가치변동은 이 상품들을 [가치가 변하지 않은] 제3의 상품과 비교할 때에만 드러난다. 만약 모든 상품의 가치가 동시에 동일한 비율로 상승하거나 하락한다면, 그 상품
    들의 상대적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상품가치의 현실적인 변동은 동일한 노동시간에 생산되는 상품량이 이전에 비해 더 많은가 더 적은가로 드러날 것이다.

    iv. 아마포와 저고리 각각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즉, 그것들의 가치]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이면서 서로 상이한 정도로, 또는 반대방향으로 변동하는 경우

    이와 같은 각종 조합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에 주는 영향은 i, ii, iii의 경우를 적용해 간단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가치량의 현실적 변동은 가치량의 상대적 표현[즉, 상대적 가치의 크기]에 명확하고 완전하게 반영되지는 않는다.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는 자기의 가치가 불변이라도 변동할 수 있으며, 또한 자기의 가치가 변동하더라도 여전히 불변일 수도 있다. 끝으로, 그 상품의 가치량과 이 가치량의 상대적 표현이 동시에 변동하더라도 그 변동
    이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주석 21: 가치량과 그 상대적 표현 사이의 이와 같은 불일치를 속류경제학은 [늘 그랬던 것처럼 교묘하게 이용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와 교환되는 B가 등귀하기 때문에, A에 지출되는 노동이 이전에 비해 감소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A가 하락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당신들의 일반적 가치이론은 붕괴할 것이다....만약 A의 가치가 B에 대해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결과 B의 가치가 A에 대해 상대적으로 하락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한 상품의 가치는 언제나 거기에 체화된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는 리카도의 대명제의 토대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A의 생산비 변동이 [A와 교환되는 B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변경시킬 뿐 아니라, [B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는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A에 대한 B의 가치까지도 변경시킨다면, 어떤 상품에 지출된 노동량이 그 상품의 가치를 규제한다는 학설뿐 아니라 상품의 생산비가 그것의 가치를 규제한다는 학설도 무너지기 때문이다"(브로드허스트[J. Broadhurst], ?정치경제학?, 런던, pp. 11, 14). 브로드허스트는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엉터리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20나 10/50이나 10/100 등의 분수를 보라. 10이라는 수는 언제나 불변이지만, 20, 50, 100에 대한 10의 상대적 크기는 끊임없이 감소한다. 따라서 어떤 정수(整數)[예를 들어 10]의 크기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1이라는 단위 수에 의해 '규제'된다는 대원칙은 무너지게 된다고.)



    3. 등가형태


    이미 본 바와 같이, 상품 A(아마포)는 자기의 가치를 자기와는 다른 종류의 상품 B(저고리)의 사용가치로 표현함으로써, 상품 B에 하나의 독특한 가치형태[즉, 등가(물)이라는 가치형태]를 부여한다. 상품 아마포는, 저고리가 자기의 현물형태와는 구별되는 가치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아마포와 등치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가치로서의 자기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낸다. 저고리는 직접 아마포와 교환될 수 있는데, 이러한 형식을 통해 아마포는 사실상 가치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다 따라서 어떤 상품이 등가형태(等價形態)로 있다면, 등가형태의 상품은 다른 상품들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하나의 상품종류[예컨대 저고리]가 다른 상품종류[예컨대 아마포]를 위해 등가(물)로 역할하며, 그리하여 아마포와 직접 교환될 수 있는 독특한 속성을 획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의해 저고리와 아마포가 서로 교환되는 비율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비율은 아마포의 가치량이 주어진 것이라면 저고리의 가치량에 의해 결정된다. 저고리가 등가(물)로 표현되고 아마포가 상대적 가치로 표현되든, 또는 반대로 아마포가 등가(물)로 표현되고 저고리가 상대적 가치로 표현되든, 저고리의 가치량은 여전히 저고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저고리의 가치형태와는 관계없이] 규정된다. 그러나 저고리가 가치표현에서 등가(물)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저고리의 가치는 양적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저고리는 가치등식에서 사용가치의 일정량으로 나타날 뿐이다.
    예컨대, 40미터의 아마포는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 2개의 저고리와 같다. 상품종류인 저고리가 여기에서는 등가(물)의 역할을 하며, 사용가치인 저고리가 아마포에 대해 가치체로서 인정되고 있으므로, 일정량의 저고리는 아마포의 가치량을 표현하는 데 충분하다. 그러므로 2개의 저고리는 40미터 아마포의 가치량을 표현할 수 있지만 결코 자기 자신의 가치량을 표현할 수는 없다. 가치등식에서 등가(물)는 항상 어떤 물건[어떤 사용가치]의 양의 형태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베일리(S. Bailey)나 그의 선행자 . 후계자의 다수는 가치표현에서 오직 양적 관계만을 보는 오류를 범했다. 그런데 사실 어떤 상품이 등가(물)로 역할할 때, 그 상품가치의 양적 크기는 표현되고 있지 않다.
    등가형태를 고찰할 때 눈에 띄는 첫째 특징은 사용가치가 자기의 대립물인 가치의 현상형태로 된다는 점이다.
    상품의 현물형태가 가치형태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이러한 전환을 상품 B(저고리나 밀 또는 철)가 겪는 것은, 임의의 다른 상품 A(아마포 등)가 상품 B와 가치관계를 맺기 때문이며 그리고 오직 이 가치관계 만에서의 일이다. 어떤 상품도 자기 자신에 대해 등가(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현물형태를 자기 자신의 가치의 표현으로 삼을 수는 있기 때문에, 상품은 반드시 다른 상품을 등가(물)로 삼아 그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다른 상품의 현물형태를 자기 자신의 가치형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상품체로서의 싱품[즉, 사용가치로서의 상품]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 척도를 예로 들어보자. 덩어리 사탕은 물체인 까닭에 무겁고 따라서 일정한 무게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 무게를 직접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감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게가 미리 확정되어 있는 각종의 쇠조각[저울 추]을 가져온다. 추(錘)의 물체형태는 그 자체로 보면 덩어리 사탕과 마찬가지로 무게의 현상형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어리 사탕을 무게로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사탕을 추와의 중량관계에 놓는다. 이 관계에서 추는 무게 이외에는 아무 것도 표시하지 않는 하나의 물체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추의 크기는 사탕의 무게를 측정하는 데 역할하며, 덩어리 사탕에 대해 오직 무게의 화신(化身) 또는 무게의 현상형태를 대표한다. 추가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 무게가 측정되어야 할] 사탕 또는 어떤 물체가 추와 맺는 관계의 내부에서뿐이다. 만약 이 두 물체가 모두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이러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중의 한 쪽이 다른 쪽의 무게를 표현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두 물체를 저을 위에 놓을 때, 우리는 그들이 무게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며, 따라서 일정한 비율을 취하면 동일한 무게를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추라는 물체가 무게의 척도로서 덩어리 사탕과의 관계에서 오직 무게만을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치표현에서는 저고리라는 물체가 아마포와의 관계에서 오직 가치만을 대표한다.
    그러나 유사성은 여기에서 끝난다. 덩어리 사탕의 무게표현에서 추는 두 물체에 공통된 자연적 속성, 즉 그 무게를 대표하고 있지만, 아마포의 가치표현에서 저고리는 두 물건의 그 어떤 초자연적 [순수히 사회적인] 속성, 즉 그들의 가치를 대표한다.
    어떤 한 상품[예컨대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형태(相對的 價値形態)는 아마포의 가치존재를 아마포의 물체나 그 속성들과는 전혀 다른것으로 [예컨대 저고리와 공통점이 있는 그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표현 자체가 벌써 그 배후에 어떤 사회적 관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등가형태(等價形態)는 이것과는 반대이다. 등가형태에서는 어떤 상품체(예컨대 저고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가치를 표현하며, 따라서 처음부터 가치형태이다. 물론 이것은 상품인 저고리가 상품인 아마포에 대해 등가(물)로 되어 있는 가치관계 안에서만 그러하다.(주석 22: 이와 같이 상호관계에 의거한 규정은 일반적으로 기묘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물건의 속성은 그 물건과 다른 물건과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실증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고리가 무게가 있다든가 체온을 보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등가형태[즉, 다른 상품과의 직접적 교환가능성이라는 속성]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등가형태의 신비성이 이로부터 발생하는데, 경제학자의 조잡한 부르주아적 안목은 이 등가형태가 완성되어 화폐로 자기 앞에 나타날 때 비로소 이 신비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때에 경제학자는 금과 은의 신비성을 타파하기 위해 금과 은을 그보다 털 찬란한 상품들로 대체하며 일찍이 상품의 등가(물)로 역할한 바 있는 일체의 보통 상품들의 목록을 항상 새로운 만족감으로 암송하곤 한다. 그는 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표현이 벌써 우리가 풀어야 할 등가형태의 수수께끼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등가(물)의 역할을 하는 상품체는 항상 추상적인 인간노동의 체현물로 나타나고, 항상 특정의 유용한 구체적 노동의 생산물이다. 그리하여 구체적 노동이 추상적 인간노동을 표현하게 된다. 예컨대 저고리가 단순히 추상적 인간노동의 실현이라면, 저고리에 실제로 실현되어 있는 재봉은 단순히 추상적 인간노동의 실현형태다. 아마포의 가치표현에서, 재봉의 유용성은 의복 [그리하여 인품(人品)]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가치[즉, 아마포의 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 노동의 응고물]로 안정하는 물체를 만드는데 있다. 가치의 거울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재봉 그 자체는 인간노동이라는 그 추상적 속성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반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노동력은 재봉의 형태로도 직포의 형태로도 지출된다. 그러므로 두 형태는 인간노동이라는 일반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경우[예컨대 가치의 생산]에는 오직 이 관점에서만 고찰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조금도 신비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표현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직포는 직포라는 구체적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노동이라는 일반적 속성에 의해 아마포의 가치를 형성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아마포의 등가(물)을 생산하는 구체적 노동(즉, 재봉]을 직포와 대비시키고 있다. 지금 재봉은 추상적 인간노동의 눈에 보이는 실현형태로 나타난다.
    등가형태의 제2의 특징은 이와 같이 구체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추상적 인간노동의 현상형태로 된다는 것이다.
    이 구체적 노동(즉, 재봉)이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표현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이 노동은 다른 노동[즉, 아마포에 들어 있는 노동]과 동일하다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생산 노동처럼 사적 노동이지만 또한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의 노동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노동은 [다른 상품들과 직접 교환될 수 있는] 생산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적 노동이 그 대립물의 형태[즉,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의 노동]로 된다는 것이 등가형태의 제3의 특징이다.
    등가형태의 마지막 두 특징은 [사고(恩考)형태 .사회형태 . 자연형태와 함께 가치형태를 처음으로 분석한] 저 위대한 연구자에게 거슬러 올라가면 한층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상품의 화폐형태는 단순한 가치형태[즉, 어떤 상품의 가치를 임의의 다른 한 상품으로 표현한 것]가 한층 발전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5개의 침대=한 채의 가옥"
    이라고 말하는 것은

    "5개의 침대=얼마의 화폐"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가치표현 그 자체를 제공하는] 가치관계는 가옥이 침대와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감각적으로 다른 물건들은 이와 같은 본질상의 동일성 없이는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는 크기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환은 동일성(同一性) 없이는 있을 수 없고, 동일성은 측량(測量)의 공통성 없이는 있을 수 없다. "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난관에 봉착해 가치형태의 더 이상의 분석을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종류가 서로 다른 물건들이 같은 단위로 측정된다는 것은", 즉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 그와 같은 등식은 물건들의 진정한 성질과는 다른 것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오직 '실제상의 필요를 위한 임시변통'일 따름이다.(역자 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니코마쿠스윤리학?, 제5편, 제5장.)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게 된 것이 무엇인가를 몸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치개념의 결여이다. 이 동일한 것[즉, 침대의 가치표현에서 가옥이 침대를 위해 표현하는 그 공통적 실체]은 무엇인가? 그러한 것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없기는 왜 없어? 가옥이 침대와 가옥 모두에서 진실로 똑같은 것을 대표하는 한, 가옥은 침대에 대해 어떤 동일한 것을 표현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인간노동이다.
    상품가치의 형태에서는 일체의 노동은 동등한 인간노동, 따라서 동등한 질의 노동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형태의 분석으로부터 끌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리스사회는 노예노동에 의거하고 있었고, 따라서 인간과 인간노동력의 부등성(不等性: inequality)을 사회의 자연적 토대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노동은 인간노동 일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경우에만, 동등하며 동일하다는 가치표현의 비밀은, 인간의 동등성(同等性)이라는 개념이 대중의 선입관으로 확립되었을 때 비로소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품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일반적 형태며, 따라서 상품소유자로서의 인간관계가 지배적인 사회관계로 되는 사회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재는 바로 그가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하나의 동등관계를 발견한 데서 훌륭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만, 그가 살고 있던 사회의 역사적 한계 때문에 바로 이 동등관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4. 단순한 가치형태의 총체



    어떤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종류가 다른 한 상품에 대한 가치관계 속에 (즉, 종류가 다른 어떤 상품과의 교환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상품 A의 가치는, 질적으로는, 상품 B가 상품 A와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표현되고 있으며, 양적으로는, 일정한 양의 상품 B가 주어진 양의 상품 A와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바꾸어 말해, 한 상품의 가치는 자신의 '교환가치'(交換價値)가 주어져야만 독립적인 표현을 얻게 된다.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보통 말하는 방식에 따라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교환가치(交換價値)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옮지 않다. 상품은 사용가치(즉, 유용한 물체)임과 동시에 가치(價値)인 것이다. 상품은, 자기의 가치가 자기의 현물형태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표현형태[즉, 교환가치]를 가지게 될 때, 그 이중성을 드러낸다. 상품은 고립적으로 고찰할 때에는 교환가치라는 형태를 취하는 일이 있고, 그와 종류가 다른 한 상품에 대한 가치관계 또는 교환관계에서만 이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있기만 한다면, 앞에서 말한 부정확한 표현방식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교환가치다]도 유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편한 것으로 된다.
    우리의 분석에서 증명한 바와 같이, 상품의 가치형태 또는 가치표현은 상품가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가치와 가치량이 상품의 교환가치의 표현방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후자의 사고방식은 중상주의자들(과 그들의 근대적 추종자인 페리에, 가닐 등(주석 23: 페리에(F. L. A. Ferrier: 세관부검사관), ?상업과의 관계에서 고찰한 정부?, 파리, 1805년; 가닐(C. Ganil), ?정치경제학의 체계?, 제2판, 파리, 1821년)이 지니고 있던 망상이었으며, 또한 그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던 근대의 자유무역론자인 바스티아(Bastiat)나 그의 동료들이 지니고 있던 망상이었다. 중상주의자들은 가치표현의 질적인 측면, 따라서 [화폐를 그 완성형태로 하는] 상품의 등가형태에 중점을 두지만, 이와는 반대로 어떤 가격에서든 자기의 상품을 팔아치우지 않으면 안 되는] 근대의 자유무역 행상인들은 상대적 가치형태의 양적인 측면에 중점을 둔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상품의 가치 . 가치량은 교환관계의 표현에만 존재하며, 따라서 매일의 상품시세표에만 존재할 뿐이다. 롬바르드가(Lombard Street) [런던의 금융중심지]의 매우 혼란된 관념들을 매우 그럴 듯하게 정리하는 것을 자기의 직책으로 삼고 있는 스코틀랜드사람 매클라우드(Macleod)는 미신적인 중상주의와 개화된 자유무역 행상인 사이의 훌륭한 혼혈아다.
    상품 A와 B의 가치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상품 A의 가치표현을 더욱 상세하게 고찰하면, 이 관계 안에서는 상품 A의 현물형태는 오직 사용가치의 모습으로, 상품 B의 현물형태는 오직 가치형태[또는 가치의 모습]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상품 안에 숨어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내적 대립은 하나의 외적 대립을 통해, 즉 두 상품 사이의 관계-자기의 가치를 표현해야 할 한 쪽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사용가치로서만 간주되고, 반면에 전자의 가치를 표현해야 할
    다른 쪽 상품은 직접 교환가치로서만 간주된다-를 통해 밖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그 상품 안에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의 단순한 현상형태다.
    노동생산물은 어떤 사회제도에서도 유용한 대상이지만, 그것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이 그 물건의 '객관적' 속성, 즉 가치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역사적으로 특수한 발전단계에 속하는 일이다. 바로 그러한 발전 단계에서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동시에 노동생산물의 단순한 상품형태이며, 상품형태의 발전은 가치형태의 발전과 일치하게 된다.
    단순한 가치형태가 불충분한 것임은 첫눈에도 명백하다. 그것은 가격형태[상품의 가치를 화폐량으로 표현하는 것]로 성숙하기 전에 일련의 형태변화를 거쳐야 하는 맹아(萌芽)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상품A의 가치를 다른 어떤 상품 B로 표현하는 것은 상품 A의 가치를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상품 A를 다른 어떤 하나의 상품종류와 교환관계에 놓을 뿐이고, 다른 모든 상품들과 상품 A사이의 질적인 동등성과 양적인 비율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한 상품의 단순한 상대적 가치형태에는 다른 한 상품의 개별적인 등가형태가 대응한다. 그리하여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표현에서 저고리는 이 하나의 상품종류 아마포에 대해서만 등가형태[직접적 교환가능성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단순한 가치형태는 스스로 더 완전한 형태로 이행한다. 물론 단순한 가치형태는 한 상품 의 가치를 하나의 다른 종류의 상품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이 제2의 상품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즉, 저고리나 쇠나 밀이나 기타 그 무엇이든]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상품 A가 다른 어떤 상품종류와 가치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상품 A의 단순한 가치표현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주석 24: 예를 들어 호머(Homer)의 ?일리아드?에는 한 물건의 가치가 일련의 다른 물건들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가치표현의 수는 상품 A와는 다른 상품의 종류 수에 의해서만 제한될 뿐이다. 그러므로 상품 A의 개별적인 가치표현은 무한한 시리즈의 각종의 단순한 가치표현들로 전환된다.



    B.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


    z량의 상품 A = u량의 상품 B 20미터의 아마포 = 1개의 저고리
    또는 = v량의 상품 C 또는 = 10그램의 차
    또는 = w량의 상품 D 또는 = 40그램의 커피
    또는 = x량의 상품 E 또는 = 1쿼터의 밀
    또는 = 기타 등등. 또는 = 2온스의 금
    또는 = 1/2톤의 철
    또는 = 기타 등등.


    1.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
    어떤 하나의 상품[예컨대 아마포] 의 가치는 이제 상품세계의 무수한 다른 상품들로 표현된다. 다른 상품체는 어느 것이나 아마포의 가치의 거울로 된다.(주석 25: 그러므로 사람들은 아마포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는 경우에는 아마포의 저고리가치라고 말하고, 아마포의 가치를 밀로 표현하는 경우에는 아마포의 밀가치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표현은, 아마포의 가치가 저고리 . 밀 등등의 사용가치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각 상품의 가치는 그것의 교환관계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과 비교되는 상대방의 상품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상품의 밀가치 . 직물가치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상품 종류와 동일한 수의 각종 가치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동일하게 실질적이며, 또 동일하게 명목적이다"(?가치의 성질, 척도 및 원인에 관한 비판적 논문, 주로 리카도와 그 추종자들의 저작들에 관련해. 의견의 형성과 공표에 관한 시론의 저자의 저?, 런던, 1825년, p. 39). 그 당시 영국에서 큰 소동을 일으킨 이 익명 저서의 저자인 베일리는 동일한 상품가치의 이러한 잡다한 상대적 표현을 제시함으로써 가치에 관한 모든 개념규정의 가능성을 분쇄했다고 망상하고 있었다. 그의 식견의 편협함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가 리카도이론의 큰 약점을 찔렀다는 사실은 리카도추종자들이 예컨대 ?웨스트민스터 리뷰?에서 그를 공격하면서 나타낸 격분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야 비로소 이 가치 자체가 참으로 무차별적인 인간노동의 응고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아마포의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은 이제야 다른 어떤 인간노동[그것이 어떤 현물형태를 취하든, 따라서 저고리 . 밀 . 쇠 . 금 어느 것에 대상화되어 있든] 과도 동일한 노동으로 아주 뚜렷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아마포는 자기의 가치형태를 통해 이제는 단 하나의 다른 상품종류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상품세계 전체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상품으로서의 아마포는 상품세계의 한 시민이다. 그와 동시에 아마포의 가치의 무한한 표현시리즈로부터 우리는 아마의 가치는 그것을 나타내는 사용가치의 특수한 형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형태(20미터의 아마포=1개의 저고리)에서는 이 두 상품이 일정한 양적 비율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우연적 사건일 수도 있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제2형태에서는 이 우연적 현상의 배경[우연적 현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것을 규정하는 배경]이 곧 드러난다. 아마포의 가치는, 수많은 서로 다른 소유자들에게 속하는 서로 다른 상품들인 저고리. 커피. 철 등 어느 것으로 표현되든, 그 크기가 언제나 같다. 두 개인적 상품소유자 사이의 우연적 관계는 소멸된다. 상품의 교환이 상품의 가치량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상품의 가치량이 상품의 교환비율(交換比率)을 규제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2. 특수한 등가형태


    저고리 . 차 . 밀 . 철 등의 상품은 어느 것이나 아마포의 가치표현에서는 등가(물), 따라서 가치체(價値體)로 역할한다. 이 상품들 각각의 특정한 현물형태는 이제는 다른 많은 상품과 나란히 하나의 특수한 등가형태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상품체에 들어 있는 각종의 구체적인 유용노동은 이제는 인간노동 일반의 특수한 실현형태 또는 현상형태로 간주된다.


    3.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의 결함


    첫째, 상품의 상대적 가치표현은 미완성이다. 왜냐하면 상품의 가치를 표시하는 시리즈가 끝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가치등식이 고리를 이루고 있는 이 사슬은 [새로운 가치표현의 재료를 제공하는] 새로운 상품종류가 등장할 때마다 연장된다. 둘째, 이 사슬은 조각조각 끊어진 잡다한 가치표현의 다채로운 모자이크를 이룬다. 끝으로,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만, 만약 각 상품의 상대적 가치가 이 전개된 형태로 표현된다면, 상품들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서로 상이한 무한의 가치표현 시리즈로 된다.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의 결함은 이번에는 거기에 대응하는 등가형태에도 반영된다. 각각의 상품종류의 현물형태가 무수히 많은 등가형태들 중 하나의 특수한 등가형태로 되어 각각의 등가형태가 서로를 배제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오직 제한적인 등가형태가 있을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특수한 등가(물)상품에 들어 있는 특정의 구체적인 유용노동도 인간노동의 특수한 종류일 뿐이며, 따라서 인간노동 일반의 유일한 현상형태는 아니다. 물론
    인간노동의 완전한 또는 전체적인 현상형태는 그 특수한 현상형태들의 총체로 구성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 경우에는 인간노동은 한 개의 통일적인 현상형태를 가지지 못한다.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는 단순한 상대적 가치표현들의 총계, 즉 제1형태에 속하는 여러 등식들의 총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20미터의 아마포 = 1개의 저고리
    20미터의 아마포 = 10그램의 차 등등.

    그러나 이 등식들은 각각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어 놓은 다음과 같은 등식도 암시하고 있다. 즉

    1개의 저고리 = 20미터의 아마포
    10그램의 차 = 20미터의 아마포 등등.

    사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아마포를 다른 많은 상품들과 교환하고, 따라서 아마포의 가치를 일련의 다른 상품들로 표현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상품의 소유자들도 자기들의 상품을 아마포와 교환하고, 따라서 자기들의 여러 가지 상품의 가치를 동일한 제3의 상품, 즉 아마포로 표현하게 된다. 여기서 20미터의 아마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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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2
    1872년 3월 18일
    런던
    칼 마르크스






    프랑스어판 후기



    독자에게

    로아(J. Roy)는 될수록 정확한, 심지어 직역하는 식의 번역을 시작해 아주 깨끗하게 완수했습니다. 바로 그의 정확성이 나로 하여금 독자들이 한층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을 수정하게 했습니다. 책이 시리즈로 발간됨에 따라 그때그때 수정했기 때문에 수정이 한결같이 면밀하지는 못했고, 따라서 문체가 균일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교열작업에 착수했을 때, 나는 원본(독일어 제2판)도 개정해 어떤 논의는 간략하게 하고 어떤 논의는 보충하며 역사적 또는 통계적 자료를 추가하고 비판적 주석을 붙이는 것 등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 프랑스어판에 어떤 문장상의 결함이 있다하더라도, 프랑스어판은 원본과는 독립적인 과학적 가치를 가지므로 독일어판을 읽은 독자들도 이 프랑스어판을 참조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독일의 경제학 발전과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을 설명한] 독일어 제2판 후기의 발췌문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여기에서는 생략했음]

    1875년 4월 28일
    런던
    칼 마르크스






    제3판 서 문



    마르크스는 이 제3판의 출판을 몸소 준비 수가 없었다. 그의 위대함에 그의 적대자들까지도 지금은 머리를 숙이는 위력있는 사상가는 1883년 3월 14일에 죽었다.
    40년간에 걸친 나의 가장 훌륭한 벗,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은혜를 입은 벗 마르크스를 잃어버린 나에게 이제 이 제1권 제3판과 또 마르크스가 원고의 형태로 남긴 제2권의 발간을 준비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내가 이 의무의 첫 부분을 어떻게 수행했는가에 대해 여기서 독자에게 보고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처음에는 제1권 본문의 대부분을 개작하고, 많은 이론적 명제들을 더 명확하게 정식화하고, 새로운 것을 삽입하며, 역사적 . 통계적 자료를 최신의 것으로 만들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환과 제2권의 최종적 편집을 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것을 단념했다. 가장 필요한 것만을 정정하고, 이 시기에 발간된 프랑스어판(“Le Capital”, par Karl Marx, Paris, Lachatre, 1872-1875)에 이미 실려 있는 보충만을 삽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크스가 남긴 책들 가운데서 [마르크스 자신이 군데군데 정정했고 또 프랑스어판을 참조하라고 명시한] 독일어판 ?자본론? 한 권이 발견되었고, 또 [마르크스가 새로운 독일어판에 이용하려고 생각한 모든 단락이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프랑스어판 한 권이 발견되었다. 이 정정과 보충은 거의 예외없이 "자본의 축적과정"이라는 편?[영어판으로는 제7편과 제8편]에 국한되어 있다. 이 편의 본문은 최초의 초고를 거의 그대로 반영한 부분이었다[비록 다른 편들은 최초의 초고를 근본적으로 개작했지만]. 그러므로 여기에는 문체가 더 생기발랄하며 더 미끈하기는 하나, 다른 부분에 비해 보다 경솔했으며 영어식 어법이 혼용되었고, 군데군데 명확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 논증의 제시에는 여기저기 들이 있었고 약간의 중요한 점들이 언급될 뿐이었다.
    문체에 관해 말하면, 마르크스 자신이 여러 절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는데, 이 수정과 많은 대화로부터 내가 어느 정도로 영어식 용어와 영어식 어법을 제거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추가와 보충을 더욱 검토했을 것이며, 유창한 프랑스어를 자기의 간결한 독일어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원래의 본문과 가장 적합하도록 번역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 제3판에서 나는, 저자 자신도 정정했으리라고 확신하지 않는 한, 일언반구도 정정하지 않았다. 나는 독일 경제학자들이 흔히 쓰는 통용어들-예컨대 현금을 주고 타인의 노동을 얻는 자를 노동[또는 일]공급자라고 부르며, 삯을 받고 자기 노동을 제공하는 자를 노동[또는 일]수취자라고 부르는 이 잠꼬대 같은 말-을 ?자본론?에 도입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프랑스어에서도 역시 일상생활에서 '일'이라는 의미로 '노동'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그러나 경제학자가 자본가를 노동
    공급자, 노동자를 노동수취자라고 부른다면, 프랑스 사람들도 응당 그 경제학자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원문에서 계속 사용하고 있는 영국식 화폐와 도량형을 신독일의 그것들로 전환하지 않았다. ?자본론? 제1판이 나왔을 당시 독일에는 1년의 날짜 수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도량형이 있었다. 그 위에 또 두 종류의 마르크가 있었고(라이히스 마르크[Reichsmark]는 당시에는 30년대 말에 그것을 고안해 낸 죄트베르[Soetbeer]의 머리 속에서만 통용되고 있었다), 두 증류의 길더(Gulden)가 있었고, 적어도 세 종류의 탈러(taler)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노이에스 쯔바이드리텔(neues Zweidrittel)이었다. 자연과학은 미터제도가 지배하고 세계시장은 영국 도량형이 지배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그 사실적 예증들을 거의 전적으로 영국의 산업사정에서 취해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책에서 영국의 도량형 단위를 이용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세계시장의 사정들이 거의 변경되지 많았고, 특히 가장 중요한 공업부문, [즉, 철공업과 면공업]에서는 현재도 거의 전적으로 영국의 도량형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거의 이해되고 있지 않은 마르크스의 인용방식에 관해 약간 말하려 한다. 인용이 사실의 순수한 진술(예: 영국청서로부터의 인용)이라면 그 인용은 문헌상의 단순한 예증이다. 그러나 다른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견해가 인용되는 경우에는 사정이 빠르다. 이 경우의 인용은, 자기의 이론적 전개과정에서 형성된 경제사상이 어디에서,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명백하게 표명되었는가를 지적하려 할뿐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은, 문제의 경제학적 견해가 학문의 역사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 당시의 경제상태의 다소 적절한 이론적 표현이라는 것뿐이다. 그 견해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아 아직도 절대적 또는 상대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용들은 오직 본문에 대한 부수적인 주석, 경제학의 역사에서 빌어온 주석에 불과하며, 경제이론 분야에서 달성한 몇 개의 중요한 진보의 연대와 창시자를 확정해 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경제학과 같은 학문에서는 특히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경제학의 역사가들은 출세주의자들의 특징인 편파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독자들은 왜 마르크스가, 제2판 후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독일 경제학자들을 매우 예외적으로만 인용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2권은 1884년 중에 발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제2권은 1885년에 발간되었다].

    1883년 11월 7일
    런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어판 서 문



    ?자본론?의 영어판 출판을 해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반대로, 이 책에서 전개된 이론이 과거 수년간 영국과 미국의 정기간행물과 시사문제지에서 끊임없이 논의의 대상으로, 공격과 옹호, 해석과 곡해의 대상으로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영어판이 지금까지 지연되었는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1883년 ?자본론?의 저자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이 책의 영어판이 실제로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을 때, [마르크스와 이 서문 필자의 옛 벗이며 아마 누구보다도 이 책의 내용에 정통하고 있는 사람인] 사뮤엘 무어(Samuel Moore)가 [마르크스가 남긴 저작의 관리인들이 그 발간을 열망하고 있던] 번역을 담당할 것을 승낙했다. 나는 그의 원고를 원본과 대조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정정을 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어는 자기의 전문사업 때문에 우리 전체가 요망하는 것처럼 빨리 그 번역을 완료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아 판명되었을 때, 우리는 이 번역의 일부를 담당하겠다는 애빌링(Aveling) [마르크스의 막내 사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시에 마르크스의 막내딸인 애밀링 부인[엘리너]은 인용문들을 원문과 대조하며 또 [마르크스가 영어 저서들과 청서로부터 발췌해 독일어로 번역한] 무수한 인용문을 그 원문대로 회복시키는 일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애빌링 부인은 이 작업을 몇 개의 불가피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완수했다.
    이 책의 다음 부분들은 애빌링이 번역했다. (1) 제10장(노동일)과 제11장(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2) 제6편(제19장에서 제22장에 걸치는 임금), (3) 제24장 제4절(잉여가치가....사정들)로부터 제25장 및 제8편 전부(제26장-제33장)를 포함하는 이 책의 마지막까지, (4) 저자의 두 개의 서문* 그 외의 부분은 모두 무어가 번역했다. 이와 같이 각 번역자는 오직 자기 작업부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나는 작업 전체에 대해 공동책임을 진다.
    우리 작업의 토대로 된 독일어 제3판은 1883년에 내가 준비했다. 그 준비에서 나는 [제2판의 어떤 부분을 1872-75년에 발간된 프랑스어판1) 의 것으로 바꾸라는] 저자의 비망록을 이용했다. 제2판 본문에 가한 변경은 [약 10년 전 미국에서 계획했다가 적당한 역자가 없었던 탓으로 포기한] 영어번역판에 대한 마르크스의 일련의 각서에서 지적한 변경과 대체로 일치했다. 이 각서를 뉴저지주 호브켄의 우리의 오랜 벗 조르게(F. A. Sorge)가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거기에는 프랑스어판으로부터의 약간의 추가적 삽입이 지적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각서는 독일어 제3판을 위한 최후의 지시보다 여러 해 전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직 예외적으로만 [주로 그것이 우리들의 곤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이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원문의 전체 의미 중 어떤 것을 번역에서 희생시켜야 했을 때, 저자 자신은 어떤 것을 희생시켰을까 알기 위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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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엥겔스는 영어판에서 마르크스의 편과 장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변경시켰다.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영어판의 구분을 따랐다.
    독일어판 영어판
    장 1-3 1-3
    4 4-6
    5-23 7-25
    24 26-32
    25 33
    편 1-6 1-6
    7 7-8
    1) ?Le Capital" , par Karl Marx. Traduction de M.J.Roy, entierement revisee par l`auteur, Paris, Lachatre. 이 번역 특히 후반 부분에는 독일어 제2판의 본문에 대한 상당한 정정과 추가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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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으로, 프랑스어판도 대다수의 어려운 단락들에서 참조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독자들의 어려움을 가볍게 해 줄 수 없었던 한가지 점이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약간의 용어를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보통 경제학에서 쓰는 것과도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했다. 과학의 모든 새로운 진보는 그 과학의 용어 혁명을 수반한다. 이것은 화학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데, 화학에서는 용어 전체가 약 20년에 한 번씩 근본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며, 일련의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르지 않는 유기화합물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경제학은 일반적으로 상공업계의 용어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에 만족해 왔는데, 경제학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용어들이 표현하는 관념들의 좁은 범위 안에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예컨대 고전파 경제학은, 이윤과 지대는 생산물 중 노동자가 자기의 고용주에게 제공해야 하는 불불부분(不拂部分: 고용주는 이 부분의 최초의 취득자일 뿐이고 그 궁극의 배타적인 소유자는 아니다)의 분할부분 . 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윤과 지대에 관한 통속적 관념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생산물의 불불부분(마르크스가 잉여생산물이라고 부른 부분)을 하나의 전체로서 연구한 적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이 불불부분의 기원과 성질에 관해, 또는 그 가치적 분배를 규제하는 법칙에 관해 명백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농업과 수공업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업이 구별없이 매뉴팩쳐라는 용어에 포괄되어 왔다. 그리하여 경제사의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큰 시기-즉, 손 노동의 분업에 근거하고 있는 진정한 매뉴팩쳐의 시기와 기계의 사용에 근거하고 있는 근대적 공업의 시기-사이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근대적 자본주의 생산을 인류 경제사의 과도적 단계로 보는 이론은 [이 생산형태를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저술가들의 상용용어와는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저자의 인용방법에 대해 한 마디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경우 인용문은 본문의 주장을 옹호하는 문헌적 증거로 역할한다. 그렇지만 일정한 명제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명백하게 표명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경제저술가로부터 구절들이 인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용되는 명제가 그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사회적 생산 . 교환의 다소 적절한 표현으로서 중요성을 가지는 경우에는, 그것의 일반적 타당성을 마르크스가 인정하는가 않는가에 전혀 관계없이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용문들은 경제학의 역사에서 취해온 부수적인 주석으로 본문을 보충하는 것이다.
    우리의 번역은 이 책의 제1권만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 제1권은 현저하게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또 20년 동안 독립적인 저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885년에 내가 독일에서 편집 .출판한 제2권은 제3권 없이는 분명히 불완전하다. 제3권은 아마 1887년 말 이전에는 발간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1894년에 발간되었다]. 제3권이 독일어 원문으로 출판되는 그때에 이 두 권의 영어판을 준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유럽대륙에서는 ?자본론?을 가끔 '노동자계급의 성경'이라고 부른다. 노동운동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도달한 결론들이 나날이 더욱더 독일과 스위스뿐 아니라 프랑스 . 네덜란드 . 벨기에 미국 심지어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까지도 거대한 노동운동의 기본원리로 되고 있다는 것, 모든 곳에서 노동자계급은 이 결론들을 자기의 처지와 희망의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 영국에서도 바로 지금 마르크스의 이론은 {노동
    자계급의 대열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양있는' 사람들[페이비안협회원] 사이에도 보급되고 있는} 사회주의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영국의 경제사정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국민 전체의 과제로 등장할 시대가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 영국 산업체계의 운동은 생산과 시장의 계속적이고 급속한 확대없이는 불가능한데, 지금 완전한 정지상태에 빠지고 있다. 자유무역은 그 밑이 드러났고, 맨체스터까지도 자기가 주장해 온 이 경제적 복음에 의심을 품고 있다.2)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외국공업은 모든 곳에서 영국의 생산물과 경쟁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보호관세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중립시장에서도, 심지어 영국에서까지도 그렇다.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고 있는데 시장은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1825년부터 1867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정체 . 번영 . 과잉생산 공황의 10년 주기의 순환은 사실상 끝난 것같이 보이고, 우리는 영속적이고 만성적인 불황이라는 절망의 진흙탕 속에 빠지고 말 것 같다. 그처럼 열렬히 기다리는 번영기는 즘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번영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듯한 징조가 감촉되자마자 곧 또다시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다. 겨울이 닥쳐올 때마다 "실업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문제가 또다시 제기된다. 실업자의 수는 해마다 증가하지만 누구도 이 문제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실업자들이 참다 못해 자기의 운명을 자기의 수중에 틀어쥐게 될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확실히 예상할 수있다. 그와 같은 순간에는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응당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영국의 경제사와 경제사정을 연구한 뒤 자기의 전체 이론을 수립했고, 이 연구에 의거해 적어도 유럽에서는 영국만이 전적으로 평화적 . 합법적 수단에 의해 필연적인 사회 [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국의 지배계급들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반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반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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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늘 오후에 개최된 맨체스터 상공회의소 분기별 정기회의에서는 자유무역에 관해 열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동의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영국 자유무역 모델을 뒤따르리라고 40년이나 기다렀으나 쓸모없이 되었으므로, 이 상공회의소는 이제 자기의 입장을 재검토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 결의문은 단 1표의 다수로 부결되었다. 즉, 찬성 21표, 반대 22표"(?이브닝 스탠다드?, 1886년 11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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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평화적 . 합법적 혁명에 굴복하리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고 첨언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1886년 11월 5일
    프리드리히 엥겔스




    제4판 서 문



    제4판에서 나는 본문과 주를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이 과업을 수행했는가를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프랑스어판과 마르크스의 친필 각서를 대조한 다음, 프랑스어판에서 약간의 부분을 취해 독일어판 본문에 새로 보충했다. 그것들은 [한글판에서] 149쪽, 660-662쪽, 795-800쪽, 855-858쪽 및 861쪽의 주 13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나는 프랑스어판과 영어판의 예에 따라 광산노동자에 관한 긴 주를 본문(663-675쪽)에 첨가했다. 기타의 사소한 변경들은 순전히 기술적 성격을 띤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로 말미암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약간의 해설적인 주를 보충했다. 이러한 보충적 주는 모두 괄호 속에 넣고 나의 성명의 약자를 기입했다. [한글판에서는 {엥겔스: }로 표시했음] .
    얼마 전에 영어판이 나왔기 때문에 수많은 인용문을 완전히 교열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영어판을 위해 마르크스의 막내 딸 엘리너(Eleanor)가 인용 전체를 원전과 대조해 준 결과 [인용문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영어인용문이 영어판에서는 독일어판의 재번역이 아니고 영어 윈문 그대로다. 그러므로 나는 제4판에서는 이 영어판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러 곳에서 사소한 부정확한 점이 발견되었다. 인용 쪽수의 잘못이 있었는데, 일부는 노트에서 옮겨 쓸 때 잘못 쓴 데서, 일부는 판을 세 번 거듭하는 동안 쌓인 오식에서 생긴 것이었다. 인용부호 또는 생략점의 위치가 잘못된 곳이 있었는데, 이것은 발췌장에서 대량으로 인용할 때 불가피하게 생긴 착오였다. 또한 그리 적절하지 못한 번역어가 여기저기 있었다. 특히 마르크스가 아직 영어를 몰라 영국경제학 서적들을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읽고 있었을 때인 1843-1845년 파리에서 작성한 낡은 노트로부터 인용되어 이중(二童)번역 때문에 인용문의 의미가 약간 달라진 곳 [예컨대 스튜어트, 유어등등의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나는 영어 원문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밖에도 이와 비슷한 사소한 부정확성과 부주의는 있었다. 그러나 만약 독자들이 이 제4판을 이전 판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 모든 힘드는 교정과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금도 변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의 인용문만이 그 출처를 찾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리처드 존스(Richard Jones)로부터 인용한 것(p.746, 주35)이었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책의 이름을 잘못 쓴 것 같다. [나중에 존스로부터의 인용임이 밝혀졌다] . 기타의 인용문은 모두 올바르게 인용
    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정확한 형태를 갖춤으로써 인용의 정확성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하나의 오래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기로는 마르크스가 인용한 인용문의 정확성이 의심받았던 경우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도 이것이 문제로 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묵과할 수가 없다.
    1872년 3월 7일 독일 공장주협회의 기관지인 베를린의 ?콘코르디아?(Concordia) [화합]에 "칼 마르크스는 어떻게 인용하는가"라는 하나의 익명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도덕적으로 분개해 무례한 말들을 한껏 써가면서, 1863년 4월 16일의 글래드스톤의 예산연설로부터의 마르크스의 인용(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에 인용되었고, ?자본론?, 제1권, p.890에 인용되었다)은 위조라고 주장했다. 즉, 마르크스가 인용한 "이 실신할 정도의 부와 권력의 증대는.....전적으로 유산계급에 국한되어 있다"라는 문구는 ?한사드?(Hansard) [의회 의사록]의 준관보적 속기록에는 한 마디도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구는 글래드스톤의 연설에는 아무데도 없다. 그 연설에서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이 다음부터는 굵은 활자로) "마르크스는 이 문장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조 첨가했다"라고.
    그 해 5월에 ?콘코르디아?의 이 호를 받은 마르크스는 이 익명의 필자에게 ?폴크스슈타트?(Volksstaat)[인민국가] 6월 1일호에서 답변했다. 그는 자기가 어떤 신문기사로부터 인용했던가를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두 개의 영국 간행물에 있는 위와 같은 의미의 인용문을 지적한 다음, ?더 타임즈?의 보도를 인용하는 데 국한했다. ?더 타임즈?에 의하면, 글래드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이 나라의 부의 현상이다. 만약 실신할 정도의 부와 권력의 증대가 오직 부유한 계급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그것을 거의 불안하고 비통한 마음으로 주시할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현상은 노동자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자료에 의하면, 내가 방금 진술한 부의 증대는 전적으로 유산계급에게만 국한되고 있다. "

    여기서 글래드스톤은, 만약 그렇다면 유감천만한 일인데, 사실은 바로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실신할 정도의 부와 권력의 증대는 전적으로 유산계급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준관보적인 ?한사드?에 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래드스톤은 나중에 그 연설문을 수정하여, 영국의 대장성 장관의 말로서는 확실히 말썽이 일어날 수 있는 그 단락을 삭제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국 의회의 전통적인 관례이지 결코 베벨(Bebel)을 반대하기 위해 꼬마 라스커(Lasker)가 만들어낸 발명 [독일의회에서 라스커가 데벨에게 행한 자기의 욕설을 속기록에서 때도록 한 사건]은 아니다. "

    익명의 필자는 더욱 화를 냈다. 7월 4일 ?콘코르디아?의 자기의 답변에서, 그는 일체의 이차적인 자료는 젖혀놓은 채, 의회연설은 속기록으로부터 인용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 ?더 타임즈?의 보도(이 속에는 '위조'된 문구가 들어 있다)와 ?한사드?의 보도(여기에는 이 문구가 없다)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며, 또 ?더 타임즈?의 보도는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 중의 그 악명 높은 단락과는 정반대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더 타임즈?의 보도에는 이 이른바 '정반대'의 것과 아울러 바로 그 '악명높은 단락‘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필자는 자기가 난처하게 되었다는 것과 오직 새로운 탈출구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철면피한 거짓'으로 가득
    찬 자기의 논문에서 '악의', '부정직', '허위주장', '이 허위인용', '철면피한 거짓', '완전히 위조된 인용', '이러한 위조', '단순히 수치스러운' 등등과 같은 극단적인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동시에 논쟁점을 슬며시 다른 분야로 넘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우리가 글래드스톤의 말의 내용에 어떤 의의를 부여해야 하는가를 별개의 논문에서 설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혀 보잘것없는 그의 견해가 마치 조금이라도 그 문제[부(富)와 권력의 불균등분배]와 관계가 있는 듯이! 이 별개의 논문은 7월 11일의 ?콘코르디아?에 실렸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8월 7일의 ?폴크스슈타트?에서 다시 한 번 답변했는데, 이번에는 해당 단락을 1863년 4월 17일의 ?모닝 스타?(Morning Star) [샛별]와 ?모닝 애드버타이저? (Morning Advertiser) [조간광고]로부터도 인용했다. 이 두 신문에 의하면, 글래드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실신할 정도의 부와 권력의 증대가 실제로 '부유한 계급'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자기는 그것을 불안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증대는 '완전히 재산소유자계급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라고. 이와 같이 이 기사들에도 마르크스가 '위조첨가'했다는 문구가 문자 그대로 들어있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그 다음 날 아침 서로 독립적으로 나온 세 개의 신문기사가 그 점에서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사실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그 문장이 잘 알려진 '관례' [연설자가 검열하는 관례]에 따라 ?한사드?의 의사록에는 실려 있지 않다는 것과, 글래드스톤은 그것을, 마르크스의 말을 빌린다면, "그 뒤 슬쩍 삭제했다"는 것을 ?더 타임즈?와 ?한사드?의 원문들을 대비함으로써 다시 한 번 확증했다. 끝으로 마르크스는
    익명의 필자를 때 이상 상대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익명의 필자도 더 할 말이 없었던지 적어도 마르크스는 그 뒤 ?큰코르디아?를 받지 않았다.
    이로써 사건은 종말을 짓고 망각된 것같이 보였다. 하기는 그 뒤 캠브리지대학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언어도단의 문필상 죄악을 법했다는 정체불명의 풍문이 한두 차례 전해온 적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확실한 것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1883년 11월 9일, 즉 마르크스가 죽은 뒤 8개월이 지나 ?더 타임즈?에 캠브러지 트리니티대학의 세들리 헤일러(Sedley Taylor)라는 사람의 편지가 실렸다. 매우 온건한 협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소인은 그 편지에서 전혀 뜻밖에도 캠브리지의 풍문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콘코르디아?의 익명 필자에 관해서도 말했다.
    트리니티대학의 소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주 기이하게 생각되는 것은, 글래드스톤의 연설로부터의 인용을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에 넣도록 했던 마르크스의 악의를 브렌타노(Lujo Brentano) 교수(당시에는 브레슬라우 대학에 있었고 현재는 슈트라스부르그대학에 있다)가 비로소 폭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인용문을 변호하려고 시도한....칼 마르크스는 브렌타노가 한 번 멋있게 치자 넘어졌으나, 그래도 뱃심좋게 주장하기를, 글래드스톤은 1863년 4월 17일의 ?더 타임즈?에 실린 자기의 연설 보도를 ?한사드?에 싣기 전에 뜯어고쳐 영국 대장성 장관의 말로서는 '확실히 말썽이 일어날 수 있는' 단락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브렌타노가, 교활하게도 앞뒤를 끊어버리고 인용함으로써 글래드스톤
    의 발이 가지게 된 그러한 의미를 절대로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더 타임즈?와 ?한사드?의 보도가 일치한다는 것을 원문을 세밀히 대조해 증명했을 때, 마르크스는 '시간이 없다'는 구실로 퇴각해 버렸던 것이다. "

    사건의 진상은 바로 이러했다! 그리고 ?콘코르디아?의 브렌타노의 익명 논쟁은 캠브리지의 생산협동조합원의 관념에 그처럼 휘황하게 반영되었던 것이다. 독일 공장주협회의 성 조지인 브렌타노가 칼을 휘둘러 '멋있게 한 번 치니', 저승의 용 마르크스는 그만 '넘어져' 그의 발 밑에서 '최후의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아리오스토(Ariosto)적 친기(戰記)는 우리의 성(聖) 조지의 탈출구를 은폐하려는 데 불과하다. 여기서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이미 '위조 첨가된 것', '위조'가 아니라 오직 '교활하게도 앞뒤를 끊어버리고 인용한 것'이다. 문제 전체는 어느새 다른 분야로 옮겨졌는데, 성(聖) 조지와 캠브리지의 방패잡이는 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너 마르크스(Eleanor Marx)는 ?더 타임즈?가 자기의 편지를 게재하는 것을 거절했으므로, 월간잡지 ?투데이?(1884년 2월호)에서 레일러에게 답변했다. 이 답변에서 그녀는 논쟁을 일찍이 문제로 되었던 단 한 점, 즉 마르크스가 문제의 문장을 '위조 첨가'했는가 아니했는가에 집중시켰다. 데일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브렌타노 사이의 논쟁에서는

    "글래드스톤의 연설 가운데 어떤 한 문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라는 문제는, 인용의 의도가 글래드스톤의 말의 진의를 그대로 전달하는 데 있었는가 그것을 왜곡하는 데 있었는가라는 문제에 비하면 매우 부차적인 의의밖에 가지지 못했다. "

    그 다음 그는 ?더 타임즈?의 보도가 "실제로 모순되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만약 문맥을 정당하게, 다시 말해, 자유주의적-글래드스톤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 문맥은 글래드스톤이 말하기를 원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투데이? 1884년 3월호). 여기서 가장 우스운 것은, 캠브리지의 소인이 이제는 연설을 ?한사드?로부터 인용하지 않고-익명 필자 브렌타노의 의견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그 보도가 "조잡하지않을 수 없다"고 브렌타노가 특징지은] ?더 타임즈?로부터 열심히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사드?에는 이 시끄러운 문장이 들어 있지 않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엘리너 마르크스가 ?투데이?의 같은 호에서 이 논의를 분쇄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둘 증에 하나일 것이다. 테일러가 1872년의 논쟁을 읽었다면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없던 것을 '위조 첨가'할 뿐 아니라 있던 것을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그가 이 논쟁을 읽지 않았다면 발언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마르크스가 '위조 첨가'했다는 자기 벗 브렌타노의 고발을 감히 지지하지 못한 것만은 확실하다. 반대로 이제는 마르크스가 위조 첨가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중요한 문장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문장은 창립선언 제5쪽에 이른바 '위조 첨가'되었다는 문장보다 몇 줄 앞에 인용되어 있다. 글래드스톤의 연설 가운데 있는 '모순'에 관해 말한다면,'1863년과 1864년의 글래드스톤의 예산안 제안연설에 나타난 끊임없는
    놀라운 모순들'을 ?자본론? [한글판 p.891, 주40]에서 지적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가 아니고 누구인가? 그는 다만 이 모순들을 테일러식으로 자유주의적 자기만족감 속에 해소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엘리너 마르크스는 답변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인용할 가치 있는 것을 삭제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위조 첨가'하지 않았다. 그는 글래드스톤의 연설에서는 확실히 말했으나 어떻게 되어 ?한사드?의 기록에는 탈락된 한 문장을 부활시켜 망각으로부터 구해냈던 것이다. "

    이것으로 세들리 테일러도 진정했다. 20년 동안 두 큰 나라에 걸쳐 진행된 교수들의 공모 전체를 부수어버린 결과 누구도 마르크스의 문필적 양심을 비방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 금후 브렌타노는 ?한사드?에는 절대로 과오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세들리 테일러는 브렌타노의 문헌적 전투보고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다.

    1890년 6월 25일
    런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제 1 편

    상품괴 화폐

    제 1 장 상 품
    제 2 장 교환과정
    제 3 장 화페 또는 상품유통





    제1장 상 품


    제 1 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
    (가치의 실체, 가치의 크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富)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集積)(주석1: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베를린, 1859년, p. 3.) 으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상품(商品)은 우선 우리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이다. 이 욕망의 성질이 어떠한가, 예컨대 욕망이 위로부터 나오는가 또는 환상으로부터 생기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주석 2: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한다. 욕망은 마음의 식욕(食欲)으로서, 육체의 배고픔처럼 자연스럽다. 대다수의 물건은 마음의 결핍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다"(바본[N. Barbon], ?더욱 가벼운 신화폐의 주조에 관한 논술: 로크의 고찰들에 대한 대답?, 런던, 1696년, pp. 2-3). 또한 물건이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만족시키는가, 즉 생활수단(소비재)으로서 직접적으로 만족시키는가, 아니면 생산수단으로서 간접적으로 만족시키는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 ?종이 등과 같은 유용한 물건은 질(質)과 양(量)의 두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유용한 물건은 수많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다양하게 유용할 수 있다. 물건들의 다양한 용도를 발견해 내는 것은 역사의 과업이다.(주석 3: "물건은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재적 속성"(이것은 사용가치를 나타내는 바본의 독특한 용어이다)"을 가진다. 예컨대 철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능력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바본, 같은 책, p. 6). 철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속성은, 자극이 발견되고 나서야 비로소 유용하게 되었다.
    유용한 물건의 양을 측정하는 사회적 척도[예:kg, m]를 찾아내는 것도 또한 그렇다. 상품의 척도들이 다양하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측정되는 대상의 성질이 다양하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관습 때문이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使用價値: use-value)가 되게 한다. (주석 4: "물건의 자연적 가치(natural worth)는 그것이 인간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편의에 이바지하는 데 적합하다는 점에 있다. "(로크[J. Locke], ?이자인하의 결과들에 관한 몇 가지 고찰?, 1691년, ?저작집?, 런던, 1777년, 제2권, p. 28). 우리는 17세기의 영국 저술가들이 'worth'를 사용가치의 의미로, 'value'를 교환가치의 의미로 사용한 것을 자주 발견하는데, 이것은 현실적 사물은 게르만계통의 언어로, 사물의 반영은 라틴 계통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영어의 정신에 아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이 유용성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주어지고 있으며, 그 상품체( physical body of the commodity)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철 . 밀 .금강석 등과 같은 상품체 자체가 사용가치 또는 유용한 물건인 것이다. 상품의 이러한 속성은, 그 유용성을 취득하는 데 인간 노동이 많이 소요되는가 적게 소요되는가와는 관계가 없다. 사용가치를 고찰할 때 우리는 항상 일정한 양(예: 몇 개의 시계, 몇 톤의 철, 몇 미터의 아마포)을 다루고 있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상품학(商品學)이라는 특수 분야의 연구대상이다.(주석 5: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누구나 상품구매자로서 상품에 관한 백과사전식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법적 가설이 지배하고 있다.) 사용가치는 오직 사용 또는 소비에서만 실현된다. 사용가치는 부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건 부의 소재적 내용(material content)을 형성한다. 우리가 고찰하는 사회형태에서 사용가치는 동시에 교환가치(交換價値: exchange value)의 물적 담지자다.
    교환가치는 우선 양적 관계, 즉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주석 6: "가치란 어떤 물건과 다른 물건, 어떤 생산물의 일정한 양과 다른 생산물의 일정한 양이 교환되는 비율이다"(르 트로느(Le Trosne), ?사회적 이익에 대해?, ?중농주의자?, 데르[Daire]편. 파리, 1846년, p. 889).)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비율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므로, 교환가치는 어떤 우연적이며 순전히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상품 자체에 고유한 내재적 교환가치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인 것처럼 보인다.(주석 7: "어떤 물건도 내재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바본, 앞의 책, p. 6). 또는 버틀러(Butler)가 말한 바와 같이, "물건의 가치는 그 물건이 가져오는 것과 똑같은 크기다. ")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일정한 상품(예컨대 1쿼터의 밀)은 X량의 구두약, Y량의 명주, Z량의 금 등등, 요컨대 상이한 상품과 다양한 비율로 교환된다. 따라서 밀은 단 하나의 교환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교환가치를 가진다. X량의 구두약, Y량의 명주, Z량의 금 등은 모두 밀 1쿼터의 교환가치를 표현한다. 따라서 X량의 구두약, Y량의 명주, Z량의 금 등은 교환가치로서는 서로 대체할 수 있는 동일한 크기임에 틀림없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특정한 상품의 서로 다른 교환가치들은 동일한 그 무엇을 표현하고 있으며, 둘째 교환가치는 교환가치와는 구별되는 그 어떤 내용의 표현양식 또는 '현상형태'(現像形態: form of Apearance)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개의 상품, 밀과 철을 예로 들어 보자. 그들이 교환되는 비율은 [그 비율이 어떻든] 밀의 주어진 양이 철의 일정한 양과 등치되는 하나의 등식, 예컨대 1쿼터의 밀= X킬로그램의 철로 표시할 수 있다. 이 등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개의 서로 다른 물건-즉 1쿼터의 밀과 X킬로그램의 철-에는 양자에 공통된 것의 동일양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양자는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닌) 제3자와 동등하며, 각각은 (교환가치인 한) 이 제3자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한 기하학의 실례를 가지고 이것을 설명해 보자. 다수의 다각형의 면적을 결정하고 비교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삼각형으로 분해한다. 또 그 삼각형 자체를 그 외견상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표현[즉, 밑변과 높이의 곱의 1/2]으로 환원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의 교환가치들도 하나의 공통적인 것-교환가치는 그것의 어떤 양을 표시한다-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 공통적인 그 무엇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일 수 없다. 그러한 속성들은 그 상품들의 유용성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그것들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한에서만 우리의 관심 대상이 된다. 그러나 상품들의 교환비율은 분명히 상품의 사용가치를 사상(捨象)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상품의 교환 관계에서는 어떤 하나의 사용가치는, 그것이 적절히 존재하기만 한다면, 다른 어떤 사용가치와 마찬가지로 유용하다. 또는 노련한 바본(Barbon)이 말하는 바와 같이,

    "어떤 한 종류의 상품과 다른 종류의 상품은, 만일 그 교환가치가 같다면, 다를 것이 없다. 같은 크기의 교환가치를 가지는 물건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구별도 없다....100원의 가치를 가지는 납이나 철은 100원의 가치를 갖는 금이나 은과 똑같은 크기의 교환가치를 가진다. " (주석 8: 바본, 앞의 책, pp. 53, 57)
    사용가치(使用價値)로서의 상품은 무엇보다도 질적(質的)으로 구별되지만, 교환가치로서의 상품은 오직 양적(量的) 차이를 가질 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사용가치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만약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 즉 그것이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物)이라는 속성만 남는다. 그러나 그 노동생산물 자체도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만약 우리가 노동생산물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 노동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되게 하는] 물적 구성요소 . 형태들까지도 무시하게 된다. 이제 이 노동생산물은 책상 . 집 . 면사 또는 기타의 어떤 유용한 물건도 아니다.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그것의 모든 속성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더 이상 가구공 . 벽돌공 . 방적공의 노동생산물이 아니며, 기타 어떤 특정한 생산적 노동의 생산물도 아니다. 노동생산물의 유용성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동생산물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유용한 성질도 사라지고, 따라서 노동의 상이한 구체적 형태도 사라진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abstract human labour)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들은 유령 같은 형상[즉, 동질적인 인간노동이 응
    고되어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노동이 그들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結晶體: crystal)로서 가치(價値), 상품가치이다.
    우리는 이미 상품들이 교환될 때 그들의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보았다. 만약 우리가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해 버린다면, 남는 것은 위에서 규정한 바와 같은 상품의 가치(價値)뿐이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관계 또는 교환가치에서 나타나는 공통인자는 바로 상품의 가치이다. 우리는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교환가치야말로 가치의 필연적인 표현양식 또는 현상형태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 가치의 성질을 그 현상형태와는 관계 없이 고찰해야 한다.
    사용가치 또는 유용한 물건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다만 거기에 추상적 인간노동(人間勞動)이 체현되어 있거나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역자 주: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모순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으므로, "사용가치가 가치를 가진다"는 표현은 "유용한 물건 또는 상품이 가치를 가진다"고 고쳐 쓰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 그러면 그 가치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하는가? 그 물건에 들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인 노동의 양에 의해 측정한다. 노동의 양은 노동의 계속시간으로 측정하고, 노동시간은 시간 . 일 . 주 등을 기준으로 측정한다.
    만약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지출된 노동량(勞動量)에 의해 결정된다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가 나태하거나 미숙련이면 일수록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므로)]그 상품의 가치는 그만큼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치의 실체를 이루는 노동은 동등한 인간노동이며, 동일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다. 상품세계의 가치로 자기를 표현하는 사회의 총노동력(總勞動力)은, 비록 무수한 개인 단위의 노동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거대한 하나의 동질의 인간노동력으로 간주된다. 각 단위의 노동력은 [노동력의 사회적 평균단위라는 성격을 가지고 또 그와 같이 작용하는 한, 다시 말해 한 상품의 생산에 평균적으로 필요한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 걸리는 한] 서로 다름이 없는 동일한 인간 노동력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socially necessary labour-time)이란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과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숙련도와 노동강도 하에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노동시간이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증기직기의 도입으로 일정량의 실을 직물로 전환시키는 데 걸리는 노동을 반감시켰다. 증기직기가 도입된 뒤에도 영국의 수직공들은 이러한 전환에 종전과 같은 노동시간을 소비했지만, 이제는 그의 개별노동 1시간의 생산물은 1/2 시간의 사회적 노동밖에 대표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생산물의 가치는 이전 가치의 절반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어떤 물건의 가치량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 즉 그것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걸리는 노동시간이다.(주석 9: "그것들(소비품들)이 서로 교환될 때, 그것들의 가치는 그것들의 생산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또 일반적으로 소요되는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금리 일반 및 특히 공채이자에 관한 고찰?, 런던, pp. 36-37. 18세기의 이 주목할 만한 익명의 저서는 발행연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조지 2세 시대인 1739년 또는 1740년에 발간된 것이 분명하다.) 이 경우 개개의 상품은 그것이 속한 종류의 평균적 표본으로 간주될 뿐이다.(주석 10: "동일한 종류의 생산물 전체는 본래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며, 그것의 가격은 개별적인 조건과는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결정된다"(르 트로느, 앞의 책, p.893).) 따라서 동일한 노동량이 들어 있는 상품들[즉, 동일한 노동시간에 생산할 수 있는 상품들]은 동일한 가치량(價値量)을 가진다. 한 상품의 가치와 다른 상품의 가치 사이의 비율은 전자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과 후자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 사이의 비율과 같다.

    "가치로서는, 모든 상품은 일정한 크기의 응고된 노동시간(勞動時間)에 불과하다. " (주석 11: 마 르크스, 앞의 책, p. 6.)

    그러므로 만약 상품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이 불변(不變)이라면, 그 상품의 가치도 불변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은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이 변할 때마다 변한다. 노동생산싱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들의 평균적 숙련도(熟練度),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의 발전 정도,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 생산수단의 규모와 능률, 그리고 자연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동일한 양의 노동이라도 예컨대 풍년에는 8부셸의 밀을 생산하고 흉년에는 겨우 4부셸의 밀을 생산한다. 동일한 양의 노동이라도 풍부한 광산에서는 빈약한 광산에서보다 더 많은 금속을 생산해 낸다. 금강석은 지표에 나와 있는 경우가 없으므로 그것을 발견하는 데는 평균적으로 더 많은 노동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금강석은 적은 양으로 많은 노동을 대표한다. 제이콥(Jacob)은 금에 대해 그 완전한 가치가 지불된 적이 있었는지를 의심하고 있다.(역자 주: 제이콥(W. Jacob), ?귀금속의 생산 및 소비의 역사적 연구?, 런던, 1831년, 제2권, p. 101.) 이것은 금강석에 더욱 적합한 말이다. 에슈베게(Eschwege)에 의하면, 1823년까지의 80년간 브라질 금강석 광산의 총산출액은 브라질의 사탕 또는 커피농장의 1년 반 분의 평균생산물의 가격에도 미달했다[비록 금강석이 훨씬 더 많은 노동을, 따라서 더 많은 가치를 대표하고 있었지만]. 만약 광산이 더 풍부하다면 동일한 양의 노동은 그만큼 더 많은 양의 금강석으로 대상화될 것이며, 따라서 금강석의 가치는 그만큼 떨어질 것이다. 만약 아주 적은 노동으로 석탄을 금강석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금강석의 가치는 벽돌의 가치보다 낮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한 물품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작아지며, 그 물품에 응고되는 노동양도 그만큼 적어지고, 따라서 그 물품의 가치도 그만큼 작아진다. 반대로 노동생산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물품의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커지며, 그 물품의 가치도 그만큼 커진다. 이와 같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勞動量)에 정비례하고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에 반비례한다. (역자 주: 초판에는 이후 다음과 같은 단락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가치의 실체를 알았다. 그것은 노동이다. 우리는 가치의 크기의 척도를 알았다. 그것은 노동시간이다. 가치에 교환가치라는 도장을 찍는 가치의 형태는 아직 분석되어야 한가.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찾아낸 규정들을 좀더 상세히 전개해야 되겠다.“)
    어떤 물건은 가치가 아니면서도 사용가치일 수 있다. [가치를 가지지 않으면서도 사용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그 물건의 유용성이 노동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경우에 그러하다. 예를 들면 공기 . 처녀지 . 자연의 초원 . 야생의 수목 등이 그러하다. 어떤 물건 그리고 인간노동의 어떤 생산물은 상품이 아니면서 유용할 수 있다. 자기 노동의 생산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사용가치를 만들기는 하지만 상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할 뿐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 즉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엥겔스; 또 단순히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세의 농민은 봉건영주를 위해 공납으로 바칠 곡물을 생산했고, 승려를 위해 10 . 1조(1/10세)로 바칠 곡물을 생산했다. 그러나 공납으로 바친 곡물이나 10 . 1조로 바친 곡물은, 타인을 위해 생산되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아직 상품이 되지 않았다. 그 생산물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쓰는 사람에게 교환을 통해 이전되어야 한다.}(주석 11: {엥겔스; 이 괄호 속에 들어 있는 말이 없었던 탓으로 마치 마르크스가 생산자 이외의 사람들이 소비하는 생산물은 무엇이든 상품으로 간주했다는 오해가 아주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삽입하기로 했다.}) 끝으로, 어떤 물건도 사용 대상이 아니고서는 가치일 수 없다. 만약 어떤 물건이 소용없는 것이라면, 거기에 들어 있는 노동은 소용없는 것이고, 노동으로 계산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런 가치도 형성하지 못한다.



    제 2 절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처음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이중성(二重性)을 가진 물건으로 나타났다. 그 뒤 노동도 또한 이중성을 가지고 나타났다. 즉,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는 경우에는 더 이상 사용가치의 창조자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은 내가 처음으로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했다.(주석 12: 마르크스, 앞의 책, pp. 12-13을 참조하라.) 노동의 이중성은 경제학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두 상품, 즉 1개의 저고리와 10미터의 아마포를 예로 들어 보자. 전자의 가치는 후자의 가치의 두 배라고 하고, 10미터의 아마포=W라면, 1개의 저고리=2W다.
    저고리는 특정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이다.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종류의 생산활동이 필요하다. 이 생산활동은 그 목적 . 작업방식 . 수단 .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동-즉 그것의 유용성이 그 생산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또는 그것의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들어 스스로를 표하는 노동-을 간단히 '유용노등'(有用勞動: useful labour)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우리는 노동의 유용효과만 고려한다.
    저고리와 아마포가 질적으로 다른 사용가치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만들어 낸 노동도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즉,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이다. 만약 이 두 물건이 질적으로 다른 사용가치가 아니라면, 따라서 질적으로 다른 유용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결코 상품으로 서로 대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저고리는 저고리와는 교환되지 않으며, 어떤 사용가치가 동일한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일은 없다.
    다양한 사용가치들[또는 상품체들]의 총체는 다양한 유용노동들[유(類). 속(屬). 변종(變種)으로 분류된다]의 총체, 즉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이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반대로 상품생산이 사회적 분업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고대 인도의 공동체에서 노동은 사회적으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그 생산물은 상품이 아니었다. 더 가까운 예를 든다면, 어떤 공장에도 노동은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노동자들이 자기의 개별 생산물을 교환하는 것에 의해 이 분업이 매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독립적으로 행해지고 상호 의존하지 않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만이 서로 상품으로 대면한다.
    이제 이상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각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유용노동 [즉, 일정한 종류의 합목적적인 생산활동]이 들어 있다. 여러 가지 사용가치는, 만약 거기에 질적으로 다른 유용노동이 들어 있지 않다면, 상품으로 서로 대면할 수 없다. 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회[즉, 상품생산자 사회]에서는, [개별 생산자들이 상호 독립적으로 사적으로 수행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유용 노동 사이의 질적 차이는 하나의 복잡한 체계[즉, 사회적 분업(social division of labour)]로 발전한다.
    재봉사 자신이 저고리를 입든 그의 고객이 저고리를 입든, 저고리는 사용가치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저고리와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사이의 관계도 재봉일이 특수한 직업[즉, 사회적 분업의 독립적인 일환]으로 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인간은 옷을 입어야만 했기 때문에 전문적인 재봉사가 나타나기 몇 천년 전부터 재봉일을 했다. 물적 부(material wealth) 중 자연이 미리 제공하지 않는 모든 요소[예:저고리, 아마포]는 언제나 [특정의 자연소재를 특정의 인간욕망에 적응시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산활동을 거쳐 창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
    저고리 ? 아마포 등등의 사용가치, 한 마디로 말해 상품체(商品體)는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 저고리 ? 아마포 등등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유용노동의 총량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어떤 개입 없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일정한 물질적 바탕뿐이다. 인간은 생산과정에서 오직 자연 자체가 운동하는 것처럼 운동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오직 소재의 형태를 변경할 수 있을 뿐이다.( 주석 13: "우주의 모든 현상은 인간의 손에 의해 야기되든 물리학의 일반법칙에 의해 야기되든, 창조가 아니고 오직 물질의 재배치에 지나지 않는다. 결합과 분리는 인간의 정신이 재생산이라는 관념을 분석할 때마다 발견하는 유일한 요소이다. 이것은 가치"(사용가치를 말한다. 비록 베리 자신은 중농주의자와의 논쟁에서 자기가 어떤 종류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가를 똑똑히 알지는 못했지만)"와 부의 재생산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토지 . 공기 . 물이 들에서 밀로 전환되든, 곤충의 분비물이 인간의 손에 의해 명주로 전환되든, 몇 개의 금속조각이 결합되어 시계가 만들어지든, 그러하다"(베리[P. Verri], ?경제학에 관한 고찰?(1771년, 초판), 쿠스토디[Custodi] 편, ?이탈리아 경제학고전집“, 근세편, 제15권, pp. 21-22).) 더구나 이러한 형태를 변경하는 노동에서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력의 도움을 받는다. 따라서 노동은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사용가치[즉,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월리엄 페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 (역자 주: 페티(W.Petty), ?조세공납론?, 런던, 1667년, p. 47.)
    이제 사용대상으로서의 상품에서 상품의 가치(價値)로 넘어가자.
    우리의 가정에 의하면, 저고리는 아마포보다 두 배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이 양적 차이는 지금 당장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만약 1개의 저고리의 가치가 10미터의 아마포의 가치의 두 배라면, 20미터의 아마포는 1개의 저고리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치(價値)로서 저고리와 아마포는 동일한 실체를 가진 물건이며, 동질의 노동의 물체적 표현이다. 그러나 재봉과 직포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형태다. 그렇지만 동일한 인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도 하고 직포도 하는 사회상태도 있다. 이 경우 두 가지 서로 다른 노동방식은 동일한 개인의 노동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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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1
    도서명 : 자본론(상)
    저자명 : 칼 마르크스
    옮긴이 : 김수행
    펴낸이 : 박기봉
    출판사 : 비봉출판사
    출판년도 : 1989년 3월 10일
    봉사자 : 김선형



    1818. 5. 5. 독일의 트리어(Trier) 출생
    1841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
    1844 “정치경제학과 철학의 초고”
    1845 “독일 이데올로기”(에겔스와 공저)
    1846-47 “철학의 빈곤”
    1847 “임금노동과 자본”
    1847-48 “공산당선언”(엥겔스와 공저)
    1850 “프랑스의 계급투쟁. 1848-1850”
    1857-58 “정치경제학비판요강”
    1859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1861-63 “잉여가치학설사”
    1865 “임금, 가격 및 이윤”
    1867 “자본론” 제1권
    1871 “파리콤뮨”
    1871 “프랑스의 내전”
    1875 “고타강령 비판”
    1883. 3. 14. 영국 런던에서 사망.
    1885 “자본론” 제2권
    1894 “자본론” 제3권



    약력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석사
    런던대학교 경제학 석사. 박사
    한신대학교 부교수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저서 “마르크스. 슘페터. 케인즈”(중앙신서, 1984)
    “경제변동론”(비봉출판사, 1986)
    “정치경제학원론”(한길사, 1988)
    “자본론 연구”(한길사, 1988)
    “정치경제학 에세이”(새날, 1991)Q
    “정치경제학 특강”(새날, 1993)
    “21세기 정치경제학”(새날, 1998)
    “알기 쉬운 정치경제학”(서울대출판부, 2001)
    역서 “국부론”(동아출판사, 1992)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동아출판사, 1993)
    “금융자본”(새날, 1994)







    이번의 개역(改譯)은 책에 있는 한자를 제거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점점 더 독자들이 한자를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은, 우리말은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는데 추상적 개념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자본론” 과 같은 경우에는 한자를 모르면 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에서 한자를 제거하는 것에 계속 반대해 왔다. 그러나 나는 독자들이 읽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이 마당에 한자를 고수하는 것은 “자본론” 의 대중화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리하여 하나의 타협으로 한자를 괄호안에 넣기로 했는데, 어떤 단어는 한자보다는 영어가 더 나을 것 같아 영어도 가끔 넣었다.
    물론 한자를 제거하려면 문장 전체를 우리발로 다시 쓸 필요도 있었다. 또한 번역의 정확성을 점검하기 위해 한글판을 영어판과 다시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번역을 완전히 다시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책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문장이 더욱 알기 쉽고 읽기 쉽게 되었다.
    또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는 이미 한글판이 나왔으므로, ?자본론?에 인용되고 있는 두 책에 한글판을 사용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사용한 한글판은 김수행 역 ?국부론?(상)(하)(동아출판사, 1992년)과 정윤형 역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비봉출판사, 1991년)이다. 나의 조교인 서울대 대학원의 정혁 군과 오종석 군이 한글판의 쪽수를 찾아내는 작업을 맡아 주었다.
    이전에는 제3권 끝에 색인을 모두 모아 두었는데, 이제는 제1권을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간주해 색인을 하권 끝에 붙였다. 독자들이 관심있는 용어나 단어를 찾아볼 때 언제나 색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제2차 개역판이 지금과 같은 대혼란기에 나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자본가들을 살리려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실직과 임금삭감과 고용불안과 노동3권의 상실과 기아를 경험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은 자기의 세금이 '공적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깨진 독에 물 붙기 식으로 낭비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현실이 자본주의의 비합리성, 잔인성 , 폭력성을 그대로 폭로하기 때문에, ?자본론?을 읽으면 금방 "이 이야기가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
    혁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분명히 ?자본론?에 숨어 있다. 쉽게 말해, 모든 주민이 부(富)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고 한다면, ?자본론?은 그런 사회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블황과 공황을 겪으면서 모든 사람들은 '주류경제학'이 엉터리라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다.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것이 잘 된다", "임금을 깎으면 경제가 회복된다", "해고를 자유롭게 하면 경제가 산다", "기업은 가정이고 사용자와 노동자는 한 가족이다",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으로 된다" 등등.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론?을 읽으면 전혀 다른 경제관을 가질 뿐 아니라 참신한 진보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본론?을 번역한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불만인 것은, 마르크스는 천지를 진동시킬 이론을 발견하는 데 일생을 보냈는데, 나는 왜 마르크스의 책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데 일생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최근 ?알기쉬운 정치경제학?(서울대 출판부, 2001)을 출판해 현실의 한국경제와 세계경제를 분석하는 전반적인 틀을 제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다음 책은 “자본론 해설?과 ?현대마르크스경제학?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6년 뒤 정년퇴임하지만, 그 동안이라도 계속 연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엥겔스가 본문이나 주에 첨가한 부분은 {엥겔스:}로 표시했고, ( )는 원문에 있는 그대로며, 원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 ]로 문장을 잘랐다. 역주는 { } 속에 넣었고, 역주가 긴 경우에는 *로 표시해 그 쪽의 밑에 추가했다.

    2001년 6월 20일
    경제연구소 소장실에서
    김 수 행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가 죽은 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원고를 편집해 출판했지만, 제1권은 마르크스가 직접 제2판까지 출판한 책이다. 따라서 제1권에는 마르크스의 학문과 인격이 더욱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제1권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계급 관계인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관계를 직접적으로 해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지위와 상태, 그리고 그들의 투쟁 대상과 투쟁 목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제1권에 전념하게 된다.
    나는 제1권(상)(하)를 1989년 3월 번역출판한 이래 그 번역을 좀더 알기쉽게 표현할 수 없을까 하고 고심해 왔다. 특히 그 초판은 내가 누구에게 읽혀 상의할 겨를도 없이 출판되었으므로 용어와 체제에서 제2권과 제3권의 그것과 조금 상이했다. 그리하여 제3권(상)의 번역출판(1990년 2월) 이후 상대적으로 쉬운 제1권(하)를 개역하기 시작해 1990년 6월에 출판했다. 그리고 제3권(하)의 번역출판(1990년 11월)을 끝마친 이후 제1권(상)의 개역에 착수한 것이다.
    제1권(상)의 번역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은 제1편의 상품과 화폐, 특히 가치분석에는 매우 어려운 용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될수록 풀어 번역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다행히 초판의 경우와는 달리 서울대학교 대학원의 정치경제학 전공자들이 나의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었으므로 문체가 더욱 현대적인 우리 글로 되었다.
    이 개역판이 초판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자를 크게 줄였다.
    둘째, 문장은 소설을 읽듯 진행되도록 알기 쉽게 했다.
    셋째, 애매모호한 점은 역자주를 넣으면서 분명하게 했다. 다시 말해, 나의 지식을 동원해 마르 크스의 문장을 나의 식으로 이해했다.
    넷째, 역주는 { } 속에 넣어 작은 글자로 표시하고 역주가 긴 경우에는 *로 표시해 그 쪽 밑에 추가해 두었다.
    이제 ?자본론? 세 권 전체의 번역은 용어와 체제에서 일관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동안 ?자본론?을 구독해 준 독자 여러분, 여러 가지의 개선책을 제시해 준 여러분,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나의 조교 신현호 군과 신기선 군, 그리고 비봉출판사 편집부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한다.

    1991년 10월 5일
    서울대학교 교수아파트에서
    김 수 행







    1. 번역에는 다음의 책들을 이용했다.
    Penguin Books limited(Ben Fowkes역), Capital, I (1976), ll (1978),
    111(1981).
    Progress Publisher(Moscow)[이것은 뒤에 Lawrence & Wishart(London)에 의해 복사 출판되었다], Capital, I (1954: 1970), II(1956 : 1972), III(1959 :1972).
    대월서점, ?자본론?, 1982.
    조선로동당 출판사, ?맑스 엥겔스 전집?, 제23권(1965), 제24권(1980), 제25권(1984).
    2. ?자본론?의 이론적 토대는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현실적 예증은 주로 영국사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며, 번역자 자신이 영국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연구했다는 사실도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이 번역서의 편 ? 장 ? 절의 구성은 엥겔스가 감수한 영어판에 따랐다. 일본의 대월서점판과 북한판은 내용의 이해와 문장의 구성 및 단어의 선택에서 나의 노력을 크게 경감시켜 주었다. "후발자의 모든 이익"을 누렸음에 거듭 감사를 표시한다.
    3. 이 책을 번역해야지 하면서도 선뜻 착수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악법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번역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중 1988년 9월 「이론과 실천사」의 대표가 ?자본론?의 일부를 번역해 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또한 나의 작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월의 시민항쟁 이후 학문과 사상의 공간이 점차로 넓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 위에 이 번역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모든 민주영령과 민주투사 및 양심세력에게 감사를 드린다.
    4. 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에 모든 정력을 쏟았다. 문장을 알기 쉽게 짧게 쓸 것이며, 관계대명사에 의한 수식구가 문장 전체의 의미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것이며, 마르크스의 그 박식(성경 ? 문학 ? 과학 ? 역사 등)에 뒤따라가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역주를 달아야 할 것이데, 마르크스가 잘못 사용한 용어는 앞뒤가 맞게 고쳐야 할 것 등등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쏟았음을 밝혀둔다.
    5. 이 번역에 미쳐 세 아들의 고뇌에 동참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며, 또한 가장을 대신해 성공적으로 가사를 꾸려온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6.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은 역자가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작업의 진행을 독려해 주었고, 거의 매일 역자의 집을 방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집념이 번역기간을 단축시킨 큰 계기가 되었음을 자인하면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편집부의 모든 분들이 이 일에 정성을 다해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김현미 양의 노고에 더욱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7. 엥겔스가 본문이나 주에 첨가한 부분은 (엥겔스: )로 표시했고, ( )는 원문에 있는 그대로며, 원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 ]로 문장을 잘랐는데 이 때에는 [ ]속의 활자는 본문보다 조금 작은 크기다. 역주는 { }속에 넣어 아주 작은 글자로 표시했는데, 역주가 긴 경우에는 *로 해 그 쪽의 밑에 추가해 두었다. 그리고 영국의 화폐단위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으로 고쳤다.
    8. 인명색인과 문헌색인은 각권의 마지막에 붙였으며, 사항색인은 모두를 제3권 말에 붙여 두었다.

    1989년 2월 송파동에서
    김 수 행




    제 I 권 자본의 생산과정 (상)

    목차
    제2차 개역에 부쳐
    제1차 개역에 부쳐
    번역자의 말
    목차
    제1판 서 문
    제2판 후 기
    프랑스어판 서문
    프랑스어판 후기
    제3판 서 문
    영어판 서 문
    제4판 서 문


    제 1편 상품과 화폐

    제 1장 상 품
    제1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의 실체, 가치의 크기)
    제2절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제3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A.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1. 가치표현의 두 극: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
    2. 상대적 가치형태
    (a) 상대적 가치형태의 내용
    (b) 상대의 가치형태의 양적 규정성
    3. 등가형태
    4. 단순한 가치형태의 총체
    B.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
    1.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
    2. 특수한 등가형태
    3.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의 결함

    C. 일반적 가치형태
    1. 가치형태의 변화된 성격
    2. 상대적 가치형태의 발전과 등가형태의 발전 사이의 관계
    3. 일반적 가치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의 이행
    D. 화폐형태
    제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제2장 교환과정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제1절 가치의 척도
    제2절 유통수단
    (a) 상품의 변태
    (b) 화폐의 유통
    (c) 주화. 가치의 상징
    제3절 화 폐
    (a) 퇴장화폐
    (b) 지불수단
    (c) 세계화폐



    제2편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

    제4장 자본의 일반공식
    제5장 자본의 일반공식의 모순
    제6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1절 노동과정 (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제2절 가치증식과정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제9장 잉여가치율
    제1절 노동력의 착취도
    제2절 생산물의 가치를 생산물의 비례배분적
    부분들로 표시
    제3절 시니어의 '최후의 한 시간'
    제4절 잉여생산물
    제10장 노동일
    제1절 노동일의 한계
    제2절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 공장주와 보야르
    제3절 착취의 법적 제한이 없는 영국의 산업부문
    제4절 주간노동과 야간노동. 교대제
    제5절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 14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의 노동일의 연장을 위한 강제법
    제6절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 법률에 의한 노동시간의
    강제적 제한(1833~64년의 영국의 공장법)
    제7절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 영국의 공장법이
    타국에 준 영향

    제11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12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제13장 협 업
    제14장 분업과 매뉴팩쳐
    제1절 매뉴팩쳐의 두 가지 기원
    제2절 부분노동자와 그의 도구
    제3절 매뉴팩쳐의 두 가지 기본형태: 이질적 매뉴팩쳐와
    유기적 매뉴팩쳐
    제4절 매뉴팩쳐 안의 분업과 사회안의 분업
    제5절 매뉴팩쳐의 자본주의적 성격

    - 이상 제 1 권 (상)-



    제 I 권 자본의 생산과정 (하)

    목차

    제15장 기계와 대공업
    제1절 기계의 발달
    제2절 기계가치가 생산물로 이전
    제3절 기계제 생산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직접적 영향
    제4절 공장
    제5절 노동자와 기계 사이의 투쟁
    제6절 기계에 의해 축출되는 노동자들에 관한 보상이론
    제7절 기계제 생산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의 축출과 흡수.
    면공업의 공황
    제8절 대공업이 매뉴팩쳐 .수공업 . 가내공업에 미친
    혁명적 영향
    제9절 공장법의 보건. 교육 조항. 공장법의 일반적 적용
    (영국의 경우)
    제10절 대공업과 농업


    제5편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16장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
    제17장 노동력의 가격 및 잉여가치의 양적 변동
    제1절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강도는 불변인데 노동생산성이
    가변인 경우
    제2절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생산성은 불변인데 노동강도가
    가변인 경우
    제3절 노동생산성과 노동강도는 불변인데, 노동일의 길이가
    가변인 경우
    제4절 노동의 지속시간, 생산성 및 강도가 동시에 변동하는
    경우
    제18장 잉여가치율을 표시하는 여러 가지 공식


    제6편 임 금

    제19장 노동력의 가치(또는 가격) 가 임금으로 전환
    제20장 시간급제 임금
    제21장 성과급제 임금
    제22장 임금의 국민적 차이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

    제23장 단순재생산
    제24장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
    제1절 확대된 규모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이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 전환
    제2절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에 관한 경제학상의 잘못된 이해
    제3절 잉여가치가 자본과 소득으로 분할. 절제설
    제4절 잉여가치가 자본과 소득으로 분할되는 비율과는
    관계없이 축적의 규모를 결정하는 사정들. 즉, 노동력의
    착취도, 노동생산성, 사용하는 자본과 소비되는
    자본 사이의 차액의 증대, 투하자본의 크기
    제5절 이른바 노동기금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제1절 자본의 구성이 불변이면, 축적에 따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제2절 축적과 그에 수반하는 집적의 진행과정에서
    가변자본부분의 상대적 감소가 발생한다
    제3절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의 누진적 생산
    제4절 상대적 과잉인구의 상이한 존재형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제5절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의 예증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

    제26장 시초축적의 비밀
    제27장 농촌주민으로부터 토지수탈
    제28장 15세기 말 이후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임금인하를
    위한 법령들
    제29장 자본주의적 차지농업가의 발생
    제30장 공업에 대한 농업혁명의 영향. 산업자본을 위한
    국내시장의 조성
    제31장 산업자본가의 발생
    제32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제33장 근대적 식민이론

    [인명해설1
    [문학 . 성서 . 신화의 등장인물 해설1
    [참고문헌]
    [색 인]

    -이상 제 I권 (하)-







    제ll권 자본의 유통과정
    목차
    서문

    제 1편 자본의 변태들과 그들의 순환

    제1장 화폐자본의 순환
    제2장 생산자본의 순환
    제3장 상품자본의 순환
    제4장 순환의 세 가지 형태
    제5장 유통시간
    제6장 유통비용


    제2편 자본의 회전

    제7장 회전시간과 회전수
    제8장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제9장 투하자본의 총회전. 회전의 순환
    제10장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에 관한 학설.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
    제11장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에 관한 학설. 리카도
    제12장 노동시간
    제13장 생산시간
    제14장 유통시간
    제15장 회전시간이 투하자본의 크기에 미치는 영향
    제16장 가변자본의 회전
    제17장 잉여가치의 유통


    제3편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

    제18장 서 론
    제19장 연구대상에 관한 이전의 서술
    제20장 단순재생산
    제21장 축적과 확대재생산

    [인명해설]
    [참고문헌]
    [색 인]



    제III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 (상)

    목차

    제 1편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전환하고
    잉여가치율이 이윤율로 전환

    제1장 비용가격과 이윤
    제2장 이윤율
    제3장 이윤율과 잉여가치율 사이의 관계
    제4장 회전이 이윤율에 미치는 영향
    제5장 불변자본의 사용상의 절약
    제6장 가격변동의 영향
    제7장 보충설명


    제2편 이윤이 평균이윤으로 전환

    제8장 상이한 생산부문들에서 상이한 자본구성과 이로부터 나오는
    이윤율의 차이
    제9장 일반적 이윤율(평균이윤율)의 형성과 상품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
    제10장 경쟁에 의한 일반적 이윤율의 균등화. 시장가격과 시장가치.
    초과이윤
    제11장 임금의 일반적 변동이 생산가격에 미치는 영향
    제12장 보충설명


    제3편 이윤율의 저하경향의 법칙

    제13장 법칙 그 자체
    제14장 상쇄요인들
    제15장 법칙의 내적 모순들의 전개


    제4편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즉 상인자본)으로 전환

    제16장 상품거래자본
    제17장 상업 이윤
    제18장 상인자본의 회전. 가격
    제19장 화폐거래자본
    제20장 상인자본의 역사적 고찰



    제5편 이윤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으로 분할

    제21장 이자낳는 자본
    제22장 이윤의 분할. 이자율 '자연' 이자율
    제23장 이자와 기업가소득
    제24장 자본관계의 피상적 형태인 이자낳는 자본
    제25장 신용과 의제자본
    제26장 화폐자본의 축적. 이자율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
    제27장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신용의 역할
    제28장 유통수단과 자본. 투크와 풀라턴의 견해


    -이상 제III권(상)-



    제III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 (하)

    목차

    제29장 은행자본의 구성
    제30장 화폐자본과 실물자본: I
    제31장 화폐자본과 실물자본: II
    제32장 화폐자본과 실물자본: III (결론)
    제33장 신용제도의 유통수단
    제34장 통화주의와 영국의 1844년 은행법
    제35장 귀금속과 환율
    제36장 자본주의 이전의 관계


    제6편 초과이윤이 지대로 전환

    제37장 서론
    제38장 차액지대 일반
    제39장 차액지대의 제1형태(차액지대 I )
    제40장 차액지대의 제2형태(차액지대 II)
    제41장 차액지대II: 제1의 경우-생산가격이 불변인 경우
    제42장 차액지대II: 제2의 경우-생산가격이 하락하는 경유
    제43장 차액지대II: 제3의 경우-생산가격이 상승하는 경유. 결론
    제44장 최열등경작지에서도 생기는 차액지대
    제45장 절대지대
    제46장 건축지지대 . 광산지대. 토지가격
    제47장 자본주의적 지대의 발생


    제 7편 수입과 그 원천

    제48장 삼위일체의 공식
    제49장 생산과정의 분석
    제50장 경쟁이 야기하는 환상
    제51장 분배관계와 생산관계
    제52장 계 급


    엥겔스의 “자본론? 제III권에 대한 보충설명

    I. 가치법칙과 이윤율
    II. 증권거래소

    [인명해설]
    [문학. 성서. 신화의 등장인물 해설]
    [참고문헌]
    [색 인]

    이상 제III권 (하)





    자 본 론

    -정치 경제학 비판-

    제 I 권 자본의 생산과정 (상)



    제 1판 서 문



    내가 이제 제1권을 세상에 내놓는 이 책은 1859년에 발간된 나의 책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영역판은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다. 그 책과 이 책 사이에 이처럼 긴 간격이 생긴 것은 몇 해 동안의 질
    병으로 나의 작업이 거듭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나온 위 책의 내용은 이 책 제1장[제2판 이후부터 제1-3장]에 요약되어 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서술의 전후 연결과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서술 자체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전의 책에서는 지적하는 데 그친 많은 점들을 이 책에서는 더 상세하게 전개했고, 또 반대로 거기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된 점들이 여기에서는 다만 간단하게 지적되어 있다. 가치와 화폐의 학설사에 관한 절들이 여기에서는 완전히 삭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읽은 독자는 이 책 제1장의 주들에서 이 학설사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부분이 항상 어렵다는 것은 어느 과학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제1장, 특히 상품분석이 들어 있는 절을 이해하기가 가장 힘들 것이다. 나는 가치의 실체와 가치량의 분석을 될 수 있는 한 쉽게 했다.1) 화폐형태로 완성되는 가치형태는 매우 초보적이고 단순하다. 그럼

    1) 나의 쉬운 설명이 더욱 필요하게 된 것은, 슬체-딜리치(Schulze-Delitzsch)를 반박한 라살(Ferdinand Lasslle)의 저작 중 그가 이 제목에 관한 나의 연구의 '정신적 진수'를 제공한다고 언명하고 있는 절에서조차 중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라살은 자기의 경제학 저작의 모든 일반적인 이론적 명제들[예컨데 자본의 역사적 성격, 생산관계와 생산방식 사이의 관련 등등에 관한 명제들]과 용어에 이르기까지 나의 저작에서 거의 문자 그대로[출처도 밝히지 않고] 차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선전을 고려한 데서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이 명제들에 관한 그의 자세한 서술과 실제의 적용에 대해 나는 물론 언급하지 않겠다. 그것들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혜는 2,000년 이상이나 이 화폐형태를 해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반면에, 훨씬 더 내용이 풍부하고 복잡한 형태들의 분석에는 적어도 거의 성공했다. 무슨 까닭인가? 발달한 신체는 신체의 세포보다 연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이다. 겉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이 형태의 분석은 아주 사소한 것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은 미생물 해부학이 다루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작은 것이다.
    가치형태에 관한 절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물론 무엇이건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며 따라서 또 독자적으로 사색하려는 독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물리학자는 자연과정이 가장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며 교란적인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곳에서 그것을 관찰하든가, 또는 가능하다면 그 과정이 순수하게 진행될 수 있는 조건 밑에서 실험을 한다. 이 책에서 나의 연구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이다. 이 생산양식이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나라는 지금까지는 영국이다. 영국이 나의 이론전개에서 주요한 예증으로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독일의 독자가 누구든지 영국의 공업 . 농업 노동자들의 형편에 대해 위선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든가, 독일에서는 사태가 결코 그렇게는 나쁘지 않다고 낙관적으로 자기를 위안하려 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외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가 높은가 낮은가는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해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 공업이 더 발달한 나라는 덜 발달한 나라에게 후자의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독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완전히 확립되어 있는 곳[예컨대 진정한 공장]에서는, 공장법이라는 규제가 없기 때문에 사태는 영국보다 훨씬 더 나쁘다. 기타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서유럽 대륙의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 발전의 불완전성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있다. 현대의 고난과 아울러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고난[이것은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방식이 진부한 사회적 . 정치적 관계들과 함께 존속하기 때문에 발생한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죽은 것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죽은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독일과 서유럽 대륙의 기타 나라들의 사회통계는 영국의 통계에 비하면 형편이 없다. 그렇지만 그 통계는 메두사(Medusa)의 대가리가 보일 만큼은 면사포를 걷어 올려주고 있다. 만약 우리 정부와 의회가 영국에서처럼 경제상태에 관한 정기조사위원회를 임명한다면, 만약 이 위원회가 영국에서처럼 진실을 규명할 그러한 전권을 가진다면, 그리고 만약 이 목적을 위해 [영국의 공장감독관, 공중위생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영국의 의사, 그리고 여성 . 아동의 착취, 주택 . 영양 등등의 상태를 조사하는 영국의 위원회 위원들과 같은] 전문지식이 있고 편견이 없고 공정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깜짝 놀랄 것이다. 페르세우스(Perseus)는 괴물을 추격하기 위해 도깨비감투를 써야 했지만, 우리는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도깨비감투를 눈과 귀밑까지 깊이 눌러쓰고 있다.
    우리의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미국 독립전쟁 [1775~1783년]이 18세기에 유럽의 중산계급에게 경종을 울린 것과 마찬가지론 19세기에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년]이 유럽의 노동자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영국에서는 변혁과정이 이미 뚜렷이 보인다.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그것은 응당 대륙으로 옮아올 것이다. 대륙에서 변혁과정은 노동자계급 자체의 발전 정도에 따라 더 가혹한 형태를 취하든가 더 인도적인 형태를 취할 것이다. 더 고상한 동기가 있든 없든, 현재의 지배계급은 노동자계급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 법률에 의해 제거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영국 공장법의 역사 . 내용 . 결과에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어떤 국민이든 다른 국민으로부터 배워야 하며, 또 배울 수 있다. 한 사회가 비록 자기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사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는 있다.
    있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하겠다.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미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人格化: Personification),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擔持者: Trager, bearer)인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는 달리,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
    경제학 분야의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부닥칠 수 있는 그러한 적들과 부닥치는 것만은 아니다. 경제학이 취급하는 문제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사람의 감정 중에서 가장 맹렬하고 가장 저열하며 가장 추악한 감정-즉 사리사욕(私利私慾)이라는 복수의 여신-이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를 저지하는 투쟁 마당에 들어오게 된다. 예컨대 영국의 국교는 그의 신앙조항 39개 중 38개를 침해하는 것은 용서할지언정 그의 수입의 1/39을 침해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무신론(無神論) 그 자체는 기존의 소유관계에 대한 비판에 비하면 사소한 죄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 한 예로 최근 몇 주일 사이에 발표된 청서(靑書), ?공업문제와 노동조합에 관한 제국 재외 사절의 보고?를 지적하고 싶다. 영국왕의 재외 사절들은 이 보고에서 독일과 프랑스, 요컨대 유럽 대륙의 되든 문명국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현존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명해지고 있으며 또 불가피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대서양 저쪽에서 미국 부통령 웨이드(Wade)는 공개집회에서, 노예제도의 폐지 다음으로 현재의 자본관계와 토지소유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문제로 되고 있다고 언명했다. 시대의 대세가 이러하므로, 이 대세는 진홍색 망토[왕권]로도 흑색 법의[종교]로도 감추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내일이라도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가 딱딱한 고체가 아니라 변화할 수 있으며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유기체(有機體)라는 예감이 지배계급 안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의 제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제2부)과 자본의 총과정의 각종 형태들(제3부)을 취급하게 될 것이며, 마지막 제3권(제4부)은 경제학설사를 취급하게 될 것이다.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제2권(자본의 유통과정)과 제3권(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엥겔스에 의해 편집되어 출판되었다] .
    나는 과학적 비판에 근거한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한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양보한 일이 없는 이른바 여론이라는 편견에 대해서는 저 위대한 플로렌스사람[단테]의 다음과 같은 말이 항상 변함없이 나의 좌우명이다.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1867년 7월 25일
    런던
    칼 마르크스



    제2판 후 기



    나는 우선 제1판의 독자들에게 제2판에 가한 변경에 대해 말해야겠다. 언뜻 보아도 분명한 바와 같이, 책의 구성이 한층 더 알기 쉽게 되어 있다. 추가한 주는 모두 제2판의 주라고 명시했다. 본문 자체에 관해 말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제1장 제1절에서는 교환가치가 표현되는 등식의 분석을 통해 가치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학적으로 한층 더 엄밀하게 진행되었으며, 또 제1판에서는 간단히 언급한 데 지나지 않았던 가치의 실체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량의 결정 사이의 관련이 특히 강조되었다. 제1장 제3절(가치형태)은 완전히 개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제1판에서는 서술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중적 서술은 나의 벗인 하노버의 쿠겔만(L. Kugelmann)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1867년 봄 내가 그를 방문했을 때 함부르크로부터 초교지가 도착했는데, 그때 그는 대다수의 독자를 위해 가치형태의 보충적인, 한층 더 강의식의 해설이 필요하다고 나를 설득했던 것이다. 제1장의 마지막 절 "상품의 물신적..."은 대부분 개정했다. 제3장 제1절(가치척도)은 면밀하게 수정했다. 그 이유는, 제1판에서 이 절은 산만하게 서술되었고 독자들에게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베를린, 1859년)에 있는 설명을 참조하라고 했던 까닭이다. 제7장 특히 제2절?가치증식과정“은 많이 개작했다.
    때로는 단순히 문체를 고친 곳도 군데군데 있는데, 이러한 수정을 일일이 다 지적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이러한 수정은 책 전체에 걸쳐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파리에서 발간되고 있는 프랑스어판을 교열하면서, 독일어 원본의 어떤 곳은 근본적으로 개작해야 하며 또 어떤 곳은 문장을 고치거나 우연적인 착오를 면밀히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시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왜냐하면, 책이 다 팔려 1872년 1월에는 재판의 인쇄를 시작해야 한다는 소식을 (내가 다른 긴급한 일을 하고 있었던) 1871년 가을에야 들었기 때문이다.
    ?자본론?이 독일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층에서 이처럼 빨리 평가받게 된 것은 나의 노력에 대한 최대의 보상이다. [경제문제에서는 부르주아적 입장을 대변하는] 비엔나의 공장주 마이어(Sigmund Mayer)는 보불전쟁(普佛戰爭) 때 발간한 소책자에서, 독일인의 세습재산이라고 인정되어 온 이론적 사색의 탁월한 재능은 독일의 이른바 식자층에서는 완전히 소멸했으나 그 대신 독일의 노동자계급 속에서 부활되고 있다고 아주 옳게 말한 바 있다.
    독일에서 경제학이 오늘날까지 외국의 학문으로 되어 있다. 구스타프 폰 귈리히(Gustav von Gulich)는 자기의 저서 ?상공업과 농업의 역사적 서술? [전 5권, 예나, 1830~45], 특히 1830년에 발간된 이 책의 첫 두 권에서, 독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따라서 또 현대적 부르주아 사회의 형성]을 저해한 역사적 사정을 이미 대부분 해명했다. 즉, 경제학이 육성될 수 있는 토양이 없었던 것이다. 경제학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기성품의 형태로 수입될 수밖에 없었고 독일의 교수들은 항상 학생이었다. 외국 현실의 이론적 표현을 그들은 자기 주위의 소부르주아적 세계의 정신으로 해석해 (즉, 곡해해) 하나의 교리집으로 만들어버렀다. 그들은 학문적 무능에 대한 인식[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인식]과 사실상 서투른 분야를 정복해야 한다는 불안감을 은폐하려고 애쓴 나머지, 문헌사적 박식으로 풍을 떨거나 이른바 관방학(cameralism)에서 빌어온 전혀 관계없는 자료들을 혼합하는 것을 일삼아 왔다. 희망에 넘치는 독일 관리후보자들은 이러한 잡다한 지식의 시련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1848년 이래 자본주의적 생산은 독일에서 급속히 발전했고 현재는 벌써 투기와 협잡이 성행하는 시기에 들어섰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아직도 독일의 경제학 교수들에게 미소를 짓지 않고 있다. 그들이 편견없이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었을 때에는 독일의 현실에 근대적 경제관계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러한 관계가 나타났을 때에는 [부르주아적 시야를 가지면서도 그것을 편견없이 연구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어 버렸던 것이다. 경제학이 부르주아적인
    한, 즉 그것이 자본주의제도를 사회적 생산의 하나의 과도적인 역사적 발전단계로 보지 않고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형태로 보는 한, 부르주아 경제학은 계급투쟁이 아직 잠재적 상태에 있거나 오직 고립적이고 불규칙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동안만 과학으로 존속할 수 있다.
    영국을 예로 들어 보자. 고전파 경제학은 계급투쟁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의 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최후의 위대한 대표자 리카도(D. Ricardo)는 사실상 의식적으로 계급적 이익의 대립[즉, 임금과 이윤, 그리고 이윤과 지대 사이의 대립]을 자기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그는 소박하게도 이 대립을 자연에 의해 강요된 사회법칙으로 보았다. 그러나 리카도의 공헌을 마지막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 리카도가 살아 있을 때에 벌써 그에 대립해 시스몽디(Sismondi)라는 인물을 통해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다.1)
    다음 시기인 1820~30년에 영국에서는 경제학 분야에서 활기찬 학문적 활동이 눈에 띈다. 이 시기는 리카도 이론이 속류화하고 보급된 시기인 동시에 그의 이론이 종래의 학파와 투쟁한 시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나의 책,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베를린, 1859년), p. 39를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였다. 볼만한 편싸움이 벌어졌다. 이 시기의 논쟁 내용은 유럽 대륙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논쟁은 대부분 잡지 . 임시간행물 . 소책자 등에서 분산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의 공평무사한 성격은-비록 리카도의 이론이 그때 벌써 예외적으로는 부르주아 경제체제를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되었지[예 :리카도파 사회주의]-그 당시의 사정에 의해 설명된다. 한편으로 대공업 자체는 겨우 유년기를 벗어난 데 불과했는데, 이것은 1825년의 공황에 의해 비로소 대공업이 주기적 순환이라는 자기의 근대적 생애를 개시하게 된다는 사실만 보아도 명백하다. 다른 한편,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왜냐하면, 정치분야에서는 신성동맹의 주위에 뭉친 정부들과 봉건영주들을 한편으로 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도하는 국민대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의 알력 때문이었고, 경제분야에서는 산업자본과 귀족적 토지소유 사이의 반목 때문이었다. 이 후자의 반목은 프랑스에서는 분할지소유와 대토지소유 사이의 이해대립의 배후에 숨어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곡물법의 실시이래 공개적으로 폭발했다. 이 시대의 영국의 경제학 문헌들은 케네(F Quesnay)의 사망뒤 프랑스에 있었던 경제학적 질풍노도의 시기를 상기시키지만, 그것은 오직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봄을 상기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다시 말해, 1830년에는 최종적인 결정적 위기가 닥쳐왔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쟁취했다. 이 순간부터 계급투쟁은 실천과 이론 모두에서 더욱더 공개적이고 위협적인 형태를 취했다. 그와 더불어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은 조종을 울렸다. 그 뒤부터는 벌써 어떤 이론이 옳은가 옳지 많은가가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본에 유리한가 불리한가, 편리한가 볼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가 문제로 되었다. 객관적인 학자들 대신 고용된 앞잡이들이 나타났으며,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 비양심적인 사악한 변호론이 나타났다. 그러나 공장주 콥덴 (Cobden)과 브라이트(J. Bright)를 선두로 한 곡물법 반대동맹이 세상에 내놓은 건방진 글들도 지주 귀족을 반대해 논쟁을 걸었다는 점에서, 비록 과학적인 흥미는 아닐지라도 일정한 역사적인 흥미는 준다. 그러나 그 뒤 로버트 필(Robert
    Peel)의 자유무역법은 이 최후의 자극조차 속류경제학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1848년의 대륙혁명은 영국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아직도 약간의 과학적 명성을 얻고 있으며 지배계급의 단순한 궤변가 . 아첨꾼으로 되는 데 만족하지 않던] 사람들은 자본의 경제학을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프롤레타리아의 요구와 조화시키려고 했다. 이로부터 존 스튜어트 밀(Jhon Stuart Mill)을 대표자로 하는 천박한 절충주의가 나왔다. 이것은 러시아의 위대한 학자이며 평론가인 체르니세브스키 (H. Chernyshevsky)가 그의 저서 ?밀(Mil)의 정치경제학개론? [186l년]에서 훌륭하게 해명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경제학의 파산선고였다.
    독일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것의 적대적 성격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역사적인 소란스러운 투쟁을 통해 나타난 뒤에야 겨우 성숙했다. 더욱이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독일 부르주아지보다 훨씬 더 이론적으로 명확한 계급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이 드디어 가능할 것 같았던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은 다시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의 대변자들은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총명한 실무가들은 [변호론적 속류경제학의 가장 천박한, 따라서 가장 성공적인 대표자] 바스티아(Bastiat)의 깃발 아래 뭉쳤고, 교수인 체하며 자기들의 학문적 위신을 자랑하는 인간들은 [타협불가능한 것을 타협시키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뒤를 따랐다. 독일사람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몰락기에도 그 고전적인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외국학자의 단순한 학생 . 맹종자 . 모방자. 외국회사 제품의 소행상인이었다.
    독일사회의 역사적 발전의 이와 같은 특수성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의 독창적인 발전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비판까지 불가능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비판이 하나의 계급을 대변하고 있는 한,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타도와 모든 계급의 최종적 철폐를 자기의 역사적 사명으로 하고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할 수 있을 뿐이다.
    독일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은 학자든 아니든 [나의 이전 저작에 대해 그렇게 해서 성공한 것처럼] ?자본론?을 우선 묵살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이 더 이상 시대의 정세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그들은 나의 책을 비판한다는 구실 밑에 '부르주아적 의
    식을 진정시키기 위한 처방들을 써냈다.2)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신문에서 유력한 반대자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예컨대 ?인민국가?지의 요제프 디츠겐(Joseph Dietzgen)의 논문들을 보라], 지금까지 이들에게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론?의 훌륭한 러시아어 번역[번역자는 로파틴(Lopatin)과 다니엘슨(Danielson)]이 1872년 봄에 상트 폐테부르그에서 나왔다. 3,000부가 발간되었으나 현제 거의 다 팔렀다. 이미 1871년에 키예프대학 경제학 교수 지베르(H. Sieber) 는 자기의 저서 “ 리카도의 가치이론과 자본이론”

    2) 독일 속류경제학의 서투른 수다장이들은 나의 책의 문체를 비난한다. ?자본론?의 문체상 결함은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러나 이 신사들과 그들의 독자층의 편의와 기쁨을 위해 나는 여기에 영국인의 의견과 러시아인의 의견을 하나씩 인용하려 한다. 매우 적대적인 ?세터데이 리뷰?는 제1판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술방식은 가장 무미건조한 경제문제에까지도 독특한 매력을 주고 있다. " ?싼크트 페데르부르그스케 베드모스치?는 1872년 4월 20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없다. "그의 서술은 매우 전문적인 약간의 부분을 제외하면 쉽고 명료하며, 그리고 그 대상이 과학적으로 복잡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생동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보통의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 모호한 말로 책을 쓰는....독일의 대다수 학자들을 전혀 닮지 않고 있다. "

    에서 나의 가치 . 화폐 . 자본에 관한 이론이 그 기본적인 점에서 스미스와 리카도 학설의 필연적인 발전임을 증명했다. 그의 가치있는 책을 읽고 서유럽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순수이론적인 입장을 철저하게 관철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론?에 적용된 방법이 거의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상호모순되는 해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컨대 파리의 ?실증주의 철학평론?은 한편으로는 내가 경제학을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무엇인지 추측해 보라!-내가 '주어진 사실의 비판적 분석'에 국한하고 미래의 음식점을 위한 요리법(콩트류의 ?)을 서술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지베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론 그 자체에 관한 한, 마르크스의 방법은 영국학파 전체가 사용하는 연역적 방법인데, 이 방법의 결점과 장점은 가장 우수한 이론경제학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

    블로크(M. Block)는 논문 「독일의 사회주의 이른가」[?경제학자 잡지?, 1872년 7월 및 8월호]에서 나의 방법이 분석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저작으로 가장 탁월한 분석적 재능이 있는 사상가의 하나로 되었다. "

    독일 평론가들은 물론 나의 '헤겔식 궤변'에 대해 욕하고 있다. 상트 페테부르그의 ?유럽 통신?은 ?자본론?의 방법만을 취급한 논문(1872년 5월호. pp. 427~436)에서 나의 조사방법은 엄격히 실재론적(realistic)이지만 서술방법은 불행하게도 독일 변증법적(dialectic)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논평자[카우프만(I. I. Kaufman)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서술의 외부형식에 의해 판단한다면 마르크스는 최대의 관념론자, 그것도 이 말의 독일적 의미[즉, 나쁜 의미]에서 관념론 철학자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경제(학)적 비판에서는 그의 모든 선행자들보다 훨씬 더 실재론자다....그를 관념론자라고 말할 수는 도저히 없다. "

    이 논평자 자신의 비판으로부터 약간 발췌하는 것이 그에 대한 나의 가장 훌륭한 회답이 될 것이다. 또한 이 발췌는 러시아어 원문을 입수할 수 없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를 일으킬 것이다.
    나의 방법의 유물론적 바탕이 설명되어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베를린, 1859년) 서문 4-7쪽으로부터 인용한 다음, 논평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조사하고 있는 현상들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상들의 일정한 형태가 주어진 역사적 시기와 상호관련을 가지는 경우] 그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만이 아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현상들의 변화의 법칙, 현상들의 발전의 법칙, 즉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의 이행의 법칙, 상호관계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의 이행의 법칙이다. 그는 일단 이 법칙을 발견하자 [이 법칙이 사회생활에서 실현하는] 결과들을 상세하게 조사힌타....따라서 마르크스는 오직 다음 하나에 전념한다. 즉, 정밀한 과학적 조사에 의해 사회관계의 일정한 계기적 질서의 필연성을 증명하며, [그의 출발점과 거점으로 되는] 사실들을 될수록 완전무결하게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질서의 필연성과 (현재의 질서가 반드시 이행하게 되는) 다른 질서의 필연성을 동시에 증명하면 충분하다. 사람들이 이 필연성을 믿든 안믿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전혀 상관이 없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운동을 법칙-인간의 의지 . 의식 . 의도와는 독립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지. 의식 . 의도를 결정하는 그러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이라고 본다....만약 의식적 요소가 문명사에서 이러한 종속적인 역할을 한다면, [문명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비판적 조사가 의식의 어떤 형태나 어떤 결과를 자기의 토대로 삼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다시 말해, 조사의 출발점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이 아니고 오직 외부현상이다. 이와 같은 조사는 한 사실을 관념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실과 비교하고 대조하게 될 것이다.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개의 사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탐구하고 실제로 그것들이 발전의 상이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이한 발전단계를 표현하는 일련의 순서 . 순차성 . 관련성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경제생활의 일반법칙은 현재에 적용되든 과거에 적용되든 동일하다고 말할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마르크스는 부인한다. 그에 의하면, 그와 같은 추상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반대로 각각의 역사적 시기는 자기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경제생활이 일정한 발전시기를 경과해 일정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이행하자마자, 경제생활은 다른 법칙에 의해 지배받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경제생활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의 역사와 비슷한 현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종래의 경제학자들은 경제법칙을 물리학. 화학의 법칙과 동일시함으로써 경제 법칙의 성질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현상을 더 깊이 분석하면, 사회적 유기체들도 식물 . 동물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나의 동일한 현상이라도 이 유기체들의 상이한 총체적 구조, 그것들의 개개의 기관 organ)의 다양성, (기관이 기능하는) 조건들의 차이 등등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마르크스는 예컨대 인구법칙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는 반대로 각각의 발전단계는 자기 자신의 인구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생산력의 발전 수준의 차이에 따라 사회적 관계들과 그것들을 규제하는 법칙들도 달라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연구하고 해명하려는 마르크스는 경제생활의 정확한 연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목표를 엄밀히 과학적으로 정식화하고 있을 따름이다....이와 같은 연구의 과학적 가치는 일정한 사회유기체의 발생 . 생존 . 발전 . 사별과 더 높은 다른 사회유기체에 의한 교체를 규제하는 특수법칙들을 해명하는 데 있다. 또 이러한 가치를 마르크스의 책은 실제로 가지고 있다. "

    이 논평자는 나 자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또 나 자신에 의한 이 방법의 적용을 아주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변증법적 방법'이 아닌가?
    물론 발표[서술]방법은 형식의 면에서 조사[탐구]방법과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조사는 마땅히 세밀하게 소재(素材: material)를 파악하고, 소재의 상이한 발전형태들을 분석하고, 이 형태들의 내적 관련을 구명해야 한다. 이 조사가 끝난 뒤에라야 비로소 현실의 운동을 적절하게 발표[서술]할 수 있다. 조사가 잘 되어 소재의 일생이 관념에 반영된다면, 우리가 마치 선험적인 논리구성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 근본에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정반대다. 헤겔에게는 [그가 이념(Idea)이라는 명칭하에 자립적인 주체로까지 전환시키고 있는] 사고과정( process of thinking)이 현실세계의 창조자고, 현실세계는 이념의 외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약 30년 전에 [헤겔 변증법이 아직 유행하고 있던 시기에] 헤겔 변증법의 신비로운 측면을 비판했다. 그러나 내가 ?자본론? 제1권을 저술하고 있던 때에는,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개치는 볼평많고 거만하고 또 형편없는 아류들이 헤겔을 [일찍이 레싱(Lessing) 시대에 용감한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이 스피노자(Spinoza)를 대하듯이] '죽은 개'로 취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공언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는 군데군데 헤겔의 특유한 표현방식을 흉내내기까지 했다.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별)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 . 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 . 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운동이 모순들로 꽉 차 있다는 사실은 산업활동의 주기적 순환[이것의 봉우리가 일반적 공황(general crisis)이다]을 통해 실무적인 부르주아지에게 매우 분명히 알려져 있다. 이 일반적 공황은 비록 아직은 그 초기단계에 있지만 또다시 박두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그 영향권의 전면성(universality)과 그 작용의 강도에 의해 새로운 신성 프러시아-독일제국의 졸부들의 머리 속까지 변증법을 새겨넣을 것이다.
    1873년 1월 24일
    런던
    칼 마르크스




    프랑스어판 서문


    모리스 라 샤트르(Maurice La Chatre) 귀하

    ?자본론? 번역판을 시리즈로 발간하려는 당신의 제안에 나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와 같은 형태로 출판되면 이 책은 노동자계급에게 한층 더 접근하기 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이것은 당신 제안의 좋은 측면입니다. 나 그 반대측면도 있습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분석방법은 지금까지 경제문제에 적용된 적이 없기 때문에 첫 몇 장은 읽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따라서 염려되는 것은 [항상 결론을 얻으려고 성급히 서두르며 일반적인 원리가 자기들이 직접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를 알려고 갈망하는] 프랑스 독자들이 당장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이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불리한 점입니다만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진리를 갈망하는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려주고 그들에게 미리 경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귀하, 충심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1654
  • 불교의 인식론 관련 자료
    http://blog.daum.net/slowdream/2932472



    http://blog.daum.net/_blog/search.do?blogid=0HHwQ&query1=%EB%B6%88%EA%B5%90%EC%9D%B8%EC%8B%9D%EB%A1%A0&x=12&y=10#ajax_history_home…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1-08 조회 835
  • 64. 화수미제(火水未濟)
    『 미완성 』
     
     ○    완성된 일은 조금씩 기울어 집니다. 달이 차면 기울듯
     ●    이 완성된 일은 반드시 어그러지게 됩니다. 이렇게 주
     ○    역은 미완성을 통해 다시금 완성을 도모하게 됩니다.
           비존재의 세계를 통해 존재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입니
     ○    다. 무슨 일이든 완성된 상태에서는 만족을 해서는 안
     ●    됩니다. 만족하는 순간 다시금 어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    이것은 바로 우주가 생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처해 있을 때는 뭔가 새로운 일을 추구하고 이
           루려고 하지만 완성된 자리에서는 그 자리를 고수하려
           고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족을 고집하는 사람은
           그 만족하는 자리가 어그러질때 함께 망하게 됩니다.
     
                         화수미제(火水未濟)
     
         조화는 또 다른 부조화를 불러 일으킵니다. 때문에 주역
         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부조화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이 64번째의 괘는 63번째 괘의 아래와 위의 괘상
         이 뒤 바뀌어 졌습니다. 각각의 음과 양이 거꾸러 자리를
         잡고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1,4의 효와 2,5의 효와 3,
         6의 효는 서로 대응하여 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합이 같아 서로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
         합은 되어 있으나 뭔가 하나씩 균형이 어긋나 있습니다.
         주역은 이렇게 좋은것과 안 좋은것 상호의 관계를 보여주
         고 있습니다. 육효의 효가 음양의 조화는 이루었으나 그
         있어야 할 음양의 자리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 괘
         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있지만 그 자리가 뒤바뀐 상태
         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위에서 밑으로 내
         려가는 현상이 아니고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현상입니다. 
     
         未濟:亨,小狐汔濟,濡其尾,無攸利
         彖曰:未濟,亨;柔得中也  小狐汔濟,未出中也  濡其
                 尾,無攸利;不續終也 雖不當位,剛柔應也
         象曰:火在水上,未濟;君子以愼辨物居方
        대상. 불이 물위에 있어서 장소를 얻지 못한다. 이것
        이 미제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신중하게
        사물을 구별하고 적소에 두는 것을 주의한다.
     
     먹을 것이 없을 때 사람들은 그 먹을 것을 채우기 위해 허리 띠를 조여
    메게 됩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풍부할 때는 그 사람의 마음도 나태해져
    서 더 이상 먹을 것을 창고에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주역은 우리에게 만족의 어그러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의 만족을 품고 있다면 언젠가는 그로
    인해 허물을 안게 될 것입니다. 만약 만족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다면 상대방은 증오를 불러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만족
    이 채워졌을 때 상대방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상대방을 떠
    나 보내지 않으려면 만족하는 마음을 비워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가 가득 찰 수 있는 이유는 우주가 텅 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역은 마지막으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괘는 마치 단
    추가 하나 어긋나 있는 것과 같이 똑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옷이 몸에
    붙어 있듯이 잘 못 채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하나식 다시 풀어서 채워야
    하는 것처럼 성급하게 옷을 맞추기 위해서 잡아 당기면 옷이 찢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화수미제는 바로 이렇게 성급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63괘(수화기제)가 처음은 길하고 마지막은 흩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이 마지막 괘는 그 혼란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완성을 향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밑의 물은 곤란을 뜻하며 위의 불은 광명을 뜻합니
    다. 또한 무한한 광영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유하고 겸손한 군주가 왕위
    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망한 것을 유하고 겸손한 태도
    로 받아 들이는 사람은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강경한 마
    음으로 어려움을 받아 들이지 않을 때는 결국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실패를 통해 그 어려움을 받아들이
    고 머리를 쓰면 다시금 성공을 바라볼 수 있지만 고난과 어려움을 받아
    들이지 않고 강경한 자세로 굽힘이 없으면 인생 자체가 망하게 되는 것
    입니다.
     
     [화수미제]괘는 바로 난처함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 난처함을 받아
    들여 세상이 여러분에게 주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코 만족함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이 결국 인생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비록 미제(未濟)괘는 그 자리의 위치가 어긋나 있지
    만 상호 대응하는 효의 강약이 서로 합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치협력하면
    어려운 목표도 달성할 수 있는 가망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은 받아
    들이되 경계하고 고난은 받아들이고 겸손해 할 줄 알아야 화를 면할 수
    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저절로 일치협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初六:濡其尾,吝
       象曰:濡其尾,亦不知極也
        첫 번째 음효. 작은 여우(小狐)가 강을 다 건너고 나서 강
        물에 꼬리를 적신다. 이로움이 없도다.
     
     작은 여우가 강을 다 건너고 나서 강물에 꼬리를 적신다고 했습니다.
    여우가 꼬리를 적신다는 말은 결국 실패를 함을 의미합니다. 강을 다
    건너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금 물에 빠진다는 것이 물에 적신
    꼬리의 뜻입니다. 작은 여우가 내를 건널 때에 처음에는 자신있는듯이
    보여도 나중에는 능력부족으로 결국 꼬리를 적시는 격으로 미제는 아
    직 다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대체로 좋은 위치에 있지 못하
    고 시기적으로 뜻대로 되지않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매한
    전망이나 역량부족으로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중간에서 좌절하게 됩니
    다. 현재는 이런 상태이지만 희망은 있으므로 당신의 노력 여하에 따
    라 앞날은 차츰 밝아질 것입니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신중하게 사
    물을 분별하게 하여 각각이 알맞는 자리에 있게 합니다. 고난이 닥쳤
    을 때는 먼저 그 고난을 세세하게 관찰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할 일만 했다고 해서 고난이 물러 가는것이 아닙니다. 차량의 문을 잠
    글 때도 무선스위치만 작동하고 잠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
    다 반드시 도어를 당겨 보고 확인을 해야 합니다. 이 1효에는 음에네르
    기가 있습니다. 상대의 4효는 양에네르기입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관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九二:曳其輪,貞吉
      象曰:九二貞吉,中以行正也
        두 번째 양효. 앞으로 나아가는 차 바퀴를 잡아 당기며
        전진하지 하지 아니한다.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마차를
        멈춘다. 이러한 견실한 태도를 유지하여 간다면 길하리라.
     
     나아가는 것의 이유는 나아가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는
    만큼 들어올 수 있는 결실이 있어야만 합니다. 가는것은 바로 목적지에 도
    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목적지 없이 마구 가는 것은 바퀴가 없는 차를 운행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달려도 결실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나갈 수 없을 때는 더욱 더 치밀해 져야 합니다.
     
      六三:未濟,征凶,利涉大川
      象曰:未濟征凶,位不當也
        세 번째 음효.  아직은 뜻을 이룰 수 없는 때 맹진하면
        흉하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서 큰 강을 건넌다면 그때
        는 위험도 무릎 쓰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본성의 겸
        허한 태도로 내일을 대비하면 장차 큰 강을 건너도 어려
        움이 없다.
     
     나아갈 바를 살피지 않고 내가 해야지하는 마음을 갖고 시작하는 사람은
    작심삼일이 되고 맙니다. 현실적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나아가려고만 하는
    심정으로 하는 사람은 그 결과가 흉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역은 맹진하면
    흉하다고 했습니다. 혼란 속에 위험과 곤란을 무릅쓰고 광명을 구하는 것
    이 이 괘인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도 있고 고통도 따릅니다. 해야 할 일
    이 계속 닥치지만 그것을 단숨에 처리하려 들지 말고 끈질기고 차근차근
    하게 대처해 나가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야 어려운 난관도 뚫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九四:貞吉,悔亡,震用伐鬼方,三年有賞于大國
      象曰:貞吉悔亡,志行也
        네 번째 양효. 지조(志操)를 관철하면 길하다. 후회는 없
        어진다. 위무도 당당하게 북방의 야만족을 토벌한다.  삼
        년 후에는 상을 받아 대국의 제후로 봉함을 받게 될 것이
        다.
     
      사업이란 것도 법칙에 맞게끔 건실하게 운영해 나아가면 길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고 이제 서서히 위로 걸어 갈 수 있을 때에 이르러서는
    평지를 걸어갈 때의 위세로 간다면 그 실력은 약한 것입니다. 아직은 단숨
    에 올라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지만 무리하게 올라가려고 해서도 안되겠지
    만 그러나 자신의 겸손한 본성을 살려서 겸허한 태도로 조금은 위를 대비하
    면서 나아간다면 아무리 가파른 미끄럼틀과 같은 위험하고 벅차 일일지라도
    순조롭게 올라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럴때에 이르러 적응력
    이 붙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파른 미끄럼틀을 꺼꾸로 올라갈때는 잠시의 방
    심도 있어서도 안됩니다.  한결같이 바른 도리로 변함이 없으면 그 뜻을 실
    현할 수 있게 되어 길한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은 해소되는 것입니다.
      "분발하여 북방의 왜적을 징벌하라. 분발하여 마지막 정상을 차지하라.
    3년이면 승리를 거두워 영광을 누릴 것이다. 23번만 들이키면 정상에 올라
    가 3번만 자제하면 정상에 오를 것이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바른 도리를
    지키니 길하다. 올라왔을 때는 항상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가져야 합니다.
     
      六五:貞吉,無悔,君子之光,有孚,吉
      象曰:君子之光,其暉吉也
        다섯 번째 음효. 지조(志操)를 관철하면 길하니 후회는
        없다.  군자의 덕은 빛나고 그 성의는 만백성의 신뢰를
        받고 길하리라.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얼핏 보면 부자가 강한것 같지만 가난한 사
    람이 강할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진자와 싸울 때는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지만 즉 가난한 사람은 잃을 것이 없지만 부자는 있는것을 지키기가 힘
    든 법입니다. 만약 부자가 되었더라면 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
    은 항상 가난한 시절의 기억을 잊어 버려선 안된다는 점입니다.  부자가 망하
    는 순간은 바로 가난한 시절을 잊어 버렸을 때입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효는
    한결같은 바른도리 즉 올라왔음에는 다시 떨어질 수 있음을 알라는 것이며 그
    것을 가슴 깊숙이 지킬 수 있는 위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중심된 것
    을 지키면 길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걱정은 없어질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로 가난한 자의 참된 마음입니다.  이렇게 처음 마음이 변함이
    없을 때 그 성의가 만민의 믿음을 얻어 길하다 한 것입니다.
     
      上九:有孚于飮酒,無咎,濡其首,有孚失是
      象曰:飮酒濡首,亦不知節也
        여섯 번째 양효. 성의를 다해 술잔을 들고 모든 사람과
        함께 큰 소원이 성취되기를 축복한다면 탈이 없으리라.
        다만 마음이 느슨해져서 환락에 빠져서는 안된다. 성의
        가 있어도 정도(正道)를 잃는다.
     
      즐겁다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노래를 부를수도 있지만 술을 마시는 중
    에도 지금까지 이 위치에 올라 왔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허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술에 머리를 적시는 꼴이 된
    다면 아무리 노력했다는 마음의 성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렵게 올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올라 갈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
    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자신을 저버릴 만큼 술에 취한다면 마치 에레베이
    트의 끈이 끊어져 미끄름틀 타듯이 공중에서 떨어져 즉사할 것입니다.  아
    무리 성의가 있어서 마시기 시작한 술일지라도 절제를 잃는 일은 삼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령 우주의 법칙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간다 할지라도 안
    정을 잃지 않고, 이 자연이 온전하듯이 온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 세상
    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머물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도 없습니다. 지금 만족하다고 해서 만족에 빠질 수가 없습니
    다. 항상 절제를 잃지 않고 보이지 않는 흐름조차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해
    야 합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치 못하더라도 최소한도 보고 들을 수는 있어
    야 합니다.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고집한다면 항상 법칙에 밀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면 온전함은 얻지 못하고 항
    상 노력해야만 되는 고달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막혀 있는 벽 너머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
    서 자신의 주장과 생각의 틀을 내려놓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
    다. 그러했을때 우주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노력이 만물의 법칙과 만나지 못한다면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즉, 우주
    의 법칙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다, 볼 수 있다, 가려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다른 말로한다면 듣는다,
    들을 수 있다, 가려져 있는 것도 들을 수 있다. 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봐야지 하고 맘 먹었을 때만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다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다를 모르면 상황에 깨어 있지를 못합니
    다. 또한 주의력이 있는 사람은 벽으로 가려져 있는 곳에 있다할지라도 그
    주변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법은 안테나를 항상
    뽑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불시의 상황하에서도 당황하는 법이 없습
    니다. 이미 그렇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 있어서 불안이 있다거나 단조로운 생활에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본
    인의 안목이 위 세 가지 중에  첫번째 경우에 해당할 경우 더 심하게 됩니
    다. 안목을 기르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자꾸 정당화 시킨다면 우주의 법
    칙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안목을 길게 내어써서 도리어 우주의 법칙
    이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화수미제(火水
    未濟)괘는 주역(周易)의 마지막 괘상입니다. 이 64괘 모두는 바로 살아 있
    는 생생한 우주의 동작인 것입니다. 살아 숨쉬는 우주의 법칙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을 통해서 삶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도 매 순간의 상황에 대한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주역을 통해 매 순간의 상황에서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작용을 만들어 놓은 이 광대한 우주는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
    입니다.  "나로부터 나에게로 가는 나에 의한 나의 힘이여!"
     
     주역강의 終..
     
     2006. 1. 26. (木) 유성이 스승님의 강의록을 정리해서 올림..
     
     ※안내※
     본 강의는 소공자선생님께서
     1988년 7월 2일(토)부터 1992년 4월 25일(토)까지의 4년여간의
     강의한 내용을 제자 유성이 정리하여 올린 글입니다.
     그동안 주역 강의를 경청한 인연있는 님들께 행운이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__)…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567
  • 63. 수화기제(水火旣濟)
    『 완성 』
     
     ●   [기제(旣濟)]괘는 온전히  빠져서 더  이상 발전하는
     ○   것이 적은 것을 상징한다. 모든  강효와 유효가 제자
     ●   리에 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모두 적재적소에
          적당하게 자리잡은 완전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
     ○   한 상태가 변함없이 계속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   이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상태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
     ○   다.
     
                           수화기제(水火旣濟)
     
      바이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라고. 이  세가지는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똑같은 한 몸입니다. 그 몸의 정체는 곧  진실이라는 것입
    니다. 진실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실에서부터
    시작하고, 진실이 있어야지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진실이 있어야만 믿음이 됩니다. 진실에서 출발한 사랑이  믿음
    을 만들어 냅니다. 때문에 믿음은 곧 진실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
    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희망은 역시 진실로 인한 믿음으로 시작
    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왜  해내지 못
    했을까? 왜 사업이 망했을까? 그것은 믿음이 없이 시작했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본인이 진실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분명하면 사랑을 통해서 소망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여
    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
    닙니다. 내가 정성을 갖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약 그대가 사
    업에 성공하고자 한다면, 사업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믿
    음이 생겼을 때 길이 보일 것이며, 드디어 소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해야한다는 강박관념만 가지고 한다면  그대가 하
    는 일은 파괴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믿음이 없이 하는 공부는 종이만 날려버립니다. 믿음이 없는 인
    생은 시간만 낭비합니다. 때문에 믿음이 없이  소망을 갖는다라는
    것은 절망밖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과학자중에 [하이젠베르그]가 있습니다.  그가
    밝혀놓은 이론 가운데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측정할 수 없는 오차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마음안에 해야겠다
    는 믿음이 분명해야 하는데, 마음안에서 정확성을  자꾸 찾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안에서 정확성을 자꾸 찾으려고  하는 것부
    터가 불확정성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완벽한  것은 창조력
    을 잃어버립니다. 때문에 이 우주는 항상 완벽에서부터 조금씩 어
    긋난 상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 이 괘가 바로  그것을 설명
    하고 있습니다.
      이 괘는 일, 삼, 오  양의 자리에 양효가 있고, 이, 사, 육 음의
    자리에 음효가 있습니다. 즉 완벽한  상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렇게 완벽한 상태가 되면 이 우주는 변합니다. 자연은 항상 '변한
    다.'라고 하는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완벽한 상태는 결
    국 쇠락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며, 이런 상태가 오면 항상 조심
    해야 됩니다. 만약 지금 나의 상태가 집안일이나 회사일이니 아주
    좋은 상태라면 마음을 편하게 갖지 말고 오히려 경계해야 됩니다.
    오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곧 서서히 작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대상. 물이 불위에 있어서 왕성하게  타고 있는 불을
        꺼버리려고 하는 것이 기제(旣濟)이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환란이 일어날 것을 경계하여 예방에
        노력한다.
     
      [기제(旣濟)]의 아래 괘는 불을 뜻합니다. 바깥으로 훨훨  퍼져
    나가고 안으로는 끌어 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불입니다.
    불을 보면 훨훨 타고 있지만 구심점을  향해 모여있기 때문에 흩
    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위의 괘는 물입니다. 물은 바깥에서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으면
    서 안에서 바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은 떼어 놓으면
    없어져 버리지만, 물은 갈라 놓으면 동그랗게 뭉쳐 버립니다.
      그런데 가운데가 물은  양에너지이고 불은 음에너지이  때문에,
    양에너지가 음에너지보다 행사하는 힘이 강해서, 물은 불을 끌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 한 그릇이 불 하나를  끌 수 있지
    만, 조그마한 불이 물을 끓이지는 못합니다. 즉 물의 행사력이 더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기제(旣濟)]와 같이 완벽한 상태는
    물이 불을 끄듯이 곧 사라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완벽한 상태에서는 항상  경계심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완벽하라. 온전하라. 그러나 경계심을 잃지마라."  이것이
    [기제(旣濟)] 괘가 주는 교훈입니다.
     
        첫 번째 양효. 함부로 전진할 때가 아님을 알고 앞으
        로 굴러가는 차바퀴를 잡아당긴다. 여우가 그 꼬리를
        적시면 되돌아 나오는  법. 자제하여  몸을 조심하면
        탈이 없다.
     
      "여우가 그 꼬리를 적시면 되돌아 나오는 법" 여우라는 짐승은
    물을 지나갈 때 꼬리를 치켜들고 젖지 않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물이 꼬리에 닿아 꼬리가 젖는다면  여우는 그 물을 가지
    않고 되돌아 나옵니다. 그런 물에는 자기가 휩쓸려 간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여우가 꼬리를 적시면 되돌아 나오는 것처럼 잘된
    다고 해서 함부로 나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고속도로에 왕창 부서져 있는 자동차들은  악셀을 밟으면 무조
    건 나간다고 신나게 가다가 저승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여우가 꼬
    리를 적시는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나간 사람들입니다. 물론 자동
    차는 앞으로 굴러가야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적당
    한 한계성을 갖고 굴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언덕을 내려갈  때는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내려가야지 가속도가 붙도록 신나서 내려가
    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음효. 여자가 예복에  쓰는 머리의 장식품을
        잃어버린다. 찾으려고 소란을 피우지  말고 포기하는
        게 좋다. 칠일이 지나면 자연히 되돌아 온다.
     
      잘된다고 신나게 하면 상황에 맞는 경계선을 잃어버립니다. 권
    력이 좋다고 무조건 오래하게  되면 어디선가 날라오는  한 방의
    총격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맛있다고 해서 한 입에 먹으려
    고 하면 음식은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입이  아파서 씹을 수가 없
    습니다.
      "여자가 예복에 쓰는 머리의  장식품을 잃어버린다." 잘된다고
    신나서 하면 장식품과 같이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래도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너
    무 자기 만족에 치우친  상태로 해서는 안됩니다. 주머니에  돈이
    가득 들었다고 즐거워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도둑놈이 뒤따라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상황을 살피지 않아 여자가 장식품을  잃어버리듯이 행동하면 안
    되겠습니다.
      "찾으려고 소란을 피우지  말고 포기하는게 좋다."   그렇다고
    그 장식품을 찾으려고 쫓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에 맞는 마
    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면 저절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신은  항상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
    순간을 놓쳤다고 해서 타임머신을 가지고  찾아다닐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같은 기회는 다시 주어지고 있습니다.
      로미오가 죽었다고 로미오가 떠난 것은 아닙니다. 3년도 넘기전
    에 또 다른 로미오가 찾아옵니다. 단지 이름을 피노키오라고 바꿨
    습니다. 도리에 맞는 바른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면 상황은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약간의 잘못이 저질러 졌다고 해서  그 잘못에
    너무 매어져 있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크게 갖고
    멀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양효. 은나라의 왕 고종이 3년만에 오랑케를
        토벌하였으나 3년동안 국력이 매우 피폐하였다. 고종
        같은 훌륭한 임금도 그러하였거늘 소인은  이러한 벅
        찬 일을 하지 말 것이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반드시 노력한 만큼 이득이 오는 것은 아닙
    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면서
    한 번도 놀러가지 않고 평생을 돈버는 일에만 열중하다보니까 금
    고안에 돈은 가득 쌓였으나 머리털은 다 빠지고 손발은  늙고, 줄
    리엣 같은 아내와 놀러가야지 하고  아내를 쳐다보니까 줄리엣은
    간데없고 쭈글탕 할망구만 앉아 있었습니다. 너무  치우쳐서 하면
    겨우 성취는 했을는지 몰라도  힘이 다 빠져서  오히려 회복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때문에 잘될수록 잘못된 것은 항상 예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용을 통해서 주변을 풍요롭게 가꾸는 것, 그것이 인생의 땀에
    의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무리하지 말 것이며, 능히 꼬리가 물
    에 닿지 않는 곳에서 중단하지 말 것이다." 그 두가지만 병행해서
    한다면 하이젠 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주는 우주의 비밀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음효. 배 밑에 스며드는 물을 헝겊으로 막는
        다. 방심치 말고 항상 경계 하여야 한다.
     
      앞마음과 뒷마음이라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할 때 작심삼일이 되
    는 것은 뭔가를 해야지 하고 시작하는 것은 바로 앞마음이 했기 때
    문입니다. 일의 완성은 뒷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설수 있
    는 것은 뒷마음입니다. 일이라는 것은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일은 사실은 없습니다. 뒷마음은 어찌보면 상당히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하기 때문에 도리어 희망을 빨리
    느끼지를 못합니다. 희망에 마음 빼앗기지 않으며 나아가기에 희망
    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란 뒷마음으로 해야 합
    니다. 배 밑에 스며드는 물은 나쁜 조짐을 말한 것입니다.  헝겊으
    로 막는 것은 불안한 조짐을 보고 일에 실수함이 생기지 않도록 방
    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항상 방심하지 말고 경계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앞마음으로 하면 기분이 들뜨게 됩니다. 그러나 뒷
    마음은 들뜬 기분으로 갑자기 열심으로 하거나 감격의 눈물을 쏟아
    내며 미리 감동에 겨워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미리 감정이
    움직이면 이미 그 일을 하기도 전에 에네르기를 다 소비해 버린 것
    처럼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마음과
    뒷마음의 성과가 다른 것입니다. 앞마음이 열심히 하는 것은 뒤에
    큰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만족은 앞마음으로 해서는 않됩니다. 뒷
    마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그 때가 바로 안심을 할 수 있는 때
    입니다.
     
        다섯 번째 양효. 동쪽 이웃에서는 소를 희생으로 바쳐
        서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서쪽 이웃에서의 성
        의를 다한 검소한 제사가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이 우선하지만 짐승은 가슴이 우선합니다. 사람은 생
    각에 의해서 가슴을 배신할 수는 있지만 짐승은 생각 때문에 가슴을
    배신하는 일은 없습니다. 단, 가슴을 오래토록 지탱시키지는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병 중에 하나가 바로
    정신적인 병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 들어 두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는 싫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안경 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안경
    낀 사람을 멀리 합니다. 그 생각이 안경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것! 즉, 꺼림직하다는 것은 가슴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안경 낀 사람과 함께 밥을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
    다. 중요한 사실은 왜 소화가 되지 않는지를 스스로가 모른다는 사
    실입니다. 가슴에 안경이 걸려 있는 사람이 안경 낀 사람과 키스를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입에 경련이 일어 날 수도 있습니다. 하
    기 싫어하는 가슴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대편의 안경에서
    추하다고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은 자신
    이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가슴에 걸리는 일
    은 하지 말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받아 들여라
    하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힘들다는 일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졌을
    때,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을 때 결코 그것이 자기
    의 한계라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가슴에서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
    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슴만 열줄 안다면 항상 돈을 만나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을 열어 놓치 않는다면 들어 오는 돈이
    벌레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결코 돈을 모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쪽 이웃에서는 소를 희생으로 바쳐서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그
    러나  서쪽 이웃에서의 성의를 다한 검소한 제사가 더 많은 복을 받
    을 것이다." 즉 가슴이 열린 뒤에 머리를 쓰면 발전이 되지만 가슴
    이 열리지 않은 상태로 하면 모든 것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쪽 이웃이란 바로 이 앞에 나타
    난 흥분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를 희생으로 바쳐서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기분에 의해서 일을 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완전한 결과가 도출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쪽이웃인
    뒷마음으로서 결과의 끝을 가지고 성심성의를 다한다면 큰 복을 누
    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섯 번째 음효. 지나치게 나아가서 깊은 곳에 빠져
        머리까지 적셔진다. 위험하다. 몸을 보전하기가 어렵
        다.
     
      이 여섯번째는 음효입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응축됨이 있는
    것이니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나치게 나아가면 깊
    은 곳에 빠져 더 이상 진전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험하니 몸
    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없는 곳에 이르러서는 빨리 되돌아 올
    줄도 알아야 합니다.
     
      수화기제(水火旣濟)는 곧 '수승화강'입니다. 수승화강은 생명의 존
    재모습이기도 합니다. 인체로 보면 명문(命門)의 화(火)를 기르는 것
    이니 이 수승화강이 되어야 중앙의 토(土)를 이루어 단(丹)이 형성되
    고 생명이 유지되어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수승(水昇)이란 명문의
    진수(眞水), 진화(眞火)가 상승하는 것이며, 화강(火降)이란 음화 탁
    기가 하강하는 것입니다.  물은 아래로 흘러내리고 불은 위로 오르고
    자 하니 수화기제는 온전히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어 변화가 없
    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뒤집어야 하는 것입니다. 외경의 첫편
    '음양전도편'은 바로 수행을 통해 음양을 바로잡아 몸을 온전케 한다
    하였으니 바로 수승화강(水昇火降)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순역(順
    逆)을 뒤집는 것이기도 합니다.  수(水)는 하강하고자 하고 화(火)는
    상승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 마음(心)을 다스려 정(精)을 다스림을
    말합니다. 수화(水火)는 원래 서로가 쫓는 것이라 火가 없으면 水가
    불안하고, 수(水)가 없으면 화(火)가 역시 불안합니다. 건널 수 없는
    미제(未濟)와 상대적으로 기제(旣濟)는 건너감을 의미합니다. 즉, 물
    이 머리에 있고 불이 아랫배에 있는 상태를 상징하니 이는 건강의 균
    형을 상징합니다.  마치 한라산의 꼭대기에 백록담이 있고 그 지하에
    는 마그마가 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내재되어 있는 상서로움을 상징하
    고 있습니다.
     
     수화기제는 완벽한 상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
    상은 더는 발전하지 않고 허물어진다는 것을 암시 합니다. 위에는 물
    이고 밑에는 불을 상징합니다. 급한 불은 물로서 끄면 됩니다. 불 위
    에 물을 끼얹으면 불이 꺼집니다. 그러나 불이 물을 증발시켜버릴 수
    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불이 물을 끓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해를 머리로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한 것은 자기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것 그것은 가슴입니다. 만약 연애를 하는데  사랑하는 상대
    방의 얼굴에 키스를 하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보고 왜 내 뺨에다 침을
    묻히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가슴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열리
    지 않은 사람은 변화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곧 만물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822
  • 62. 뇌산소과(雷山小過)
    『 저자세로 나아가다 』
     
     ●     정치가는 국민들로부터 선출을 받지만 결국은 그 정
     ●     치가가 국민을 움직입니다.  유능한 기업가는  돈이
     ○     있는 세계에서 돈을 버는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돈 위에서 돈을 움직입니다. 아주 유능한 인간은 자
     ○     기라고 하는 속안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자기
     ●     자신을 마음대로 내어 쓸 수 있게 됩니다. 자기라는
     ●     것의 안과 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뇌산소과(雷山小過)
     
        [소과(小過)]괘는 크게 발전한다. 시세에 순응하여 저
        자세로 일관하는 것이  좋다. 중위(中位)에는  유효가
        있어서 내세워야할 자리에서 유효가  약하다. 강효가
        중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큰 일에  좋지 못하다. 소
        과(小過)괘는 날라가는 새의  형상이다. 새가  위로만
        올라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러나  내려오는 것은
        좋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우리가 사는  길을 그렇게 어렵게 만들
    어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매우 복잡하게  생겼지
    만, 사는 길은 아주 단순하게도 살 수 있게끔 신은 배려해 놓았습
    니다. 이 세상은  3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있고, 둘째는 내가 할 수  있게끔 움직일 수 있는 물체의  세계가
    있고, 셋째는 법칙을 구사할 수 있는 하늘의 세계가 있습니다. 때
    문에 법칙의 세계를 무시하고 활동해서는 안되며, 할 수  있는 만
    물의 세계, 즉 땅의 세계를  거부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하려는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는 뜻이 없는 자도 되지 않습니다.
      뜻이 있고, 뜻에 걸맞는 준비물은 되어져 있으나 법칙의 세계를
    뚫고 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맨 처음
    에 자동차가 나왔을 때는  앞에 유리창이 없었습니다. 그저  차가
    달리기만 하면 된다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차의 속력이
    빨라지게 되자 아무 것도  없는 눈앞에서 무언가가  자꾸 부딪쳐
    왔습니다. 즉 바람이었습니다.
      내가 일정한 행동을 하면 압력이라고 하는 반사적인 힘이 일어
    나게 됩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갖고 시작했는데 되지  않는 사
    람은 세상으로부터의 압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압력과 싸우지
    말고 조화하라." 신은 아주 단순한 조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조
    화를 아는 자에게 신은 축복과 영광과 번영을 주고  있습니다. 성
    공을 원한다면 먼저 법칙과 조화되어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압력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를 할 때도 머리속안에서 상황을 묘사해 가면서 생각을 하
    면 정확한 추리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머리속에  정확한 그림을
    갖고 표현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외국에  가면 비록 언어는 통하
    지 않더라도 뜻을 전달합니다. 뜻을 전달하려면  먼저 머리속안에
    서 구체적인 것을 확실하게  가져야만 됩니다. 여러 가지  압력을
    미리 생각해서 작전을 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뜻밖의 상황을 만
    나게 되면 우리의 두뇌는 기발한 재치를 발동하게 됩니다.  그 재
    치는 신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또 하나의 보너스입니다.
      소과(小過)괘는 가운데 두  개가 양효이고  가장자리는 음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운데는 굳건하게 생겼고 양쪽으로는 포근하
    게 감싼다는 뜻에서 날개가 달려있는 새를  의미합니다. 주역에서
    는 이 괘는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발전한다고 해서 반드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역은 조심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는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새가 높이 하늘을 날려면 대기로부터의  저항을 뚫고 나가야만
    합니다. 인간도 내면으로부터의  갈등을 뚫고 나아가야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미 대기의 기압을 뚫고 오른 사람은  마음안에 갈
    등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자신을 묶어놓지는 않습니
    다. 그러나 기압을 뚫을 수 없는 날개는 하늘이  가차없이 추락시
    켜 버립니다.
      우리의 삶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이
    괘는 가운데 양성에너지가 강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외부 압력에
    항상 불안한 상태입니다. 이럴 때는 남이 볼 때  치사하리만큼 조
    심해야 합니다. 이 괘는 주변이 음효로서 모든 만물을  흡수할 수
    있는 형상입니다. 즉 강한 자기 자신의 뜻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세로  겸손해야 합
    니다. 이 괘가 말하는  핵심은 아무리 자신감이 넘친다  하더라도
    저자세로 냉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가 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소과(小過)괘는 지나치리만큼 작게 살아가면 발전합니다.  세상
    이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못마땅하더라도,  분노가 일어나는 자기
    자신을 낮췄을 때 우리는 진리와 세상으로부터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강효가 가운데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큰  일에 좋
    지 못하다." 그래서 속은 강하고 겉은 부드럽게 외유내강의  정신
    을 갖고 세상에 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크게 발전을 하게 됩
    니다.
      정치가는 국민들로부터 선출을 받지만 결국은  그 정치가가 국
    민을 움직입니다. 유능한 기업가는 돈이 있는 세계에서 돈을 버는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돈 위에서 돈을 움직입니다. 아주 유능
    한 인간은 자기라고 하는 속안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내어 쓸 수 있게 됩니다. 희노애락에  빠지지 않
    기 위해서는 이 뇌산소과(雷山小過)괘를 거쳐가야 합니다.
      "소과(小過)괘는 날라가는 새의 형상이다. 새가 위로만 올라가
    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러나 내려오는 것은  좋다." 날라오르는
    것은 대기의 압력을 거슬러야 하지만 날아내리는 것은 지구의 압
    력에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못마땅한 것을 참고 나
    아갈 때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래로 땅을 향하는 착
    실한 자세를 가지면 대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상. 산위에서 우뢰가  치는 것이 소과괘의  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지나칠 만큼 공손한  태도를
        가지고 상(喪)이 있을 때는 지나칠 만큼 슬퍼하며, 금
        전은 인색하다고 할 만큼 절약한다.
     
      "지나칠 만큼 공손한 태도를 가지고  상(喪)이 있을 때는 지나
    칠 만큼 슬퍼하며, 금전은 인색하다고 할 만큼 절약한다." 우리가
    너무 자신감에 차있으면 항상 우뢰가 치게 됩니다. 이  세상은 기
    차가 지나가는 것도  번개입니다. 즉 위험한  것입니다. 자동차가
    쌩쌩 거리를 달리는 것도  위험한 것입니다. 항상 어느  곳에든지
    번개는 치고 있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높은 산이 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번개와 싸워서는 안됩니다. 겸손하게, 공손하게 태도
    를 가지면 결국은 발전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음효. 자기 힘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새처럼
        비약을 꿈꾸면 결과는 난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것
        이다. 흉하다.
     
      "자기 힘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새처럼  비약을 꿈꾸면 결과는
    난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충분한
    준비가 되어져 있느냐를 항상 생각하고 나가야 됩니다. 번개가 친
    다고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공소한 마음으로 번개에 대처할 수 있
    는 준비를 해야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면 도리어 번개로부터 수
    없이 많은 전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군가가 번개로부터 전기를 얻었기 때문입니
    다.
     
        두 번째 음효. 할아버지와 먼저 만날 수 있지만 일부
        러 그 앞을 지나서 할머니와 먼저 만나는  것처럼 임
        금의 앞에 직접 나아가지 않고 그 신하와 만난다. 이
        렇게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있으면 허물은 없을 것이
        다.
     
      "할아버지와 먼저 만날 수 있지만 일부러 그 앞을 지나서 할머
    니와 먼저 만나는 것처럼 임금의 앞에 직접 나아가지 않고 그 신
    하와 만난다." 부득이 사장을 만나고 싶으면 자기 위의  상사로부
    터 허락을 얻어서 만나야 된다는 뜻입니다. 즉 작은  것부터 먼저
    만난다는 것입니다. 안하무인격으로 해서는 안되고 겸손해야 된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다고 해서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물러
    서는 사람은 중심이 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완전히 부서
    져 버립니다.
     
        세 번째 양효. 밟고 넘어갈 생각을 하지 말고 이것을
        방지하도록 힘써라. 잘못하면 해침을  당할지도 모른
        다. 흉하다.
     
      지나치게 나가려고 하는 마음을  막아야 합니다. "밟고 넘어갈
    생각을 하지 말라. 도리어 그것을  방지하라." 우주의 메카니즘을
    터득하게 되면 시나리오의 장애를 받지 않습니다. 나는 영화를 보
    면 다 예언을 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 영화를 미리 보았기 때문이
    아니고 아주 환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도 영화가  훤히 보
    이게끔 되면 이제 인생의 시나리오로부터 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숨을 죽이면서  스크린을 쳐다보
    듯 삶과 밀접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네 번째 양효. 탈은 없다. 지나치게 나아가지 말고 주
        위와 조화되게 가라. 자기 마음대로  일을 행하면 몸
        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고 위험하다. 항상 스스로 경
        계하고 때를 기다려라. 오랫동안 정도를 계속 지켜나
        아감이 좋다.
     
      "지나치게 나아가지 말고 주위와 조화되게  가라." 1단계 성공
    을 했다고 해서 자신감을 갖는 것은  좋으나 자신감만 믿고 무조
    건 나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잘되었다고 해서 기분이 좋다고 웃
    으면 그 다음 단계에 난관에 부닥치게 됩니다. "항상 스스로 경계
    하고 때를 기다려라."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고 자신의
    자신감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개가 부러질 지도 모
    릅니다.
     
        다섯 번째 음효. 구름이 생겼으나 아직 비가 되어 만
        물을 적셔주지 못한다.  임금이 주살을  가지고 나는
        새를 쏘지 않고 바위틈에  엎드려 있는 새끼를  잡는
        다.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아직까지 자유자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항아리를 만들다가 그것을 깨뜨려
    접시를 만들었다면 본인의 마음은 무슨 창조를 한 것같은 만족감
    이 들겠지만 신의 입장에서 보면 항아리가 접시가 되었다는 지극
    히 평범한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내 마음을 믿지  말고 능력이
    곧 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이 될 수 있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습니다. 중소기업이 성공했다고 해서  비를 내릴 수 있을  만큼의
    구름이 된 것은 아닙니다. 대기업은 비를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이
    것 저것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새를 쏘지  않고 바위틈
    에 엎드려 있는 새끼를 잡는다." 아직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능
    력을 갖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착
    실히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에 힘쓴다는 뜻입니다.
     
        여섯 번째 음효. 만나야 할 것을 만나지 않고 지나간
        다. 너무나 자신이 높다하여 교만하기 때문이다. 새가
        함부로 날아 설치면  그물에 걸린다.  이것은 자신이
        불러들인 재앙인 것이다.
     
      아직 수준이 낮은 사람이 다  된 것처럼 "부라보"를 외치면 그
    로 인해 큰 화를 입는 법입니다. 성공은 눈 앞의 목표를 정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앞을 정복하면서 전진하는데서 오
    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받쳐서 따라오는  것입니
    다. 한 번 성공했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 또 다
    른 시작인 것입니다.
      "너무 멀어요."하고 말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왜냐면 진정한
    충만은 옆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를 성공했다고 해서 외부
    의 압력을 터득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에든지 압력은  있습니
    다. 성공은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압력을 파괴하고 지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을 때 날개 품안에 행복이 찾아온다고
    이 괘는 말했던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4915
  • 61. 풍택중부(風澤中孚)
    『 성실한 믿음 』
     
     ○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습니다. 주역은 인류학
     ○     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학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이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사람이 자신의 마음만 갖고서는  그 마음먹은대로
     ●     되어지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만물에게 전
     ○     달 되어서 어떻게 만물을 따르게 하는가하는 이것
     ○     이 곧 과제입니다. 바로 이것을 알면 우주의 찬란
            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비우고 이 괘가 말하고 있는 가르침을 깊이 명심
            해서 들어야만 합니다. 가운데 두 개만이 음효이
            며 나머지는 양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풍택중부(風澤中孚)
     
        중부(中孚)란 마음안에 성실함이 충만함을 뜻하며 孚
        라는 글자는 爪(손톱)과 子(자식)의 글자의 합성어로
        어미 새가 날개 밑에  알을 품고 부화하는 것을 나타
        낸다. 어미새의 사랑이 알의 생명을 불러일으키듯 성
        의는 반드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괘의 형상은
        위에는 바람이 사방에 불어닥쳐 아래 있는 연못을 움
        직이니 물결이 치는 모습이다. 즉, 윗사람의 성의 있
        는 마음이 아랫 사람을 감동시켜 즐겁게 따르도록 하
        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성의를 갖고 나아가면
        위난을 극복하고 뜻을 성취할 수 있다.  또한 상하의
        괘가 입을 맞대고 있는 형상이므로  진실하게 결합된
        두 사람을 상징하는 괘이다. 중부(中孚)는 유효(3,4
        효)가 괘의 중심에 있어 허심(虛心)을 나타내고 강효
        (2,5효)가 중위(中位)를 얻어 성의(誠意)가 충실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성의로서 국가를 태평하게 이끈다
        면 백성은 즐겁게(兌) 따른다(巽). 무지한 돌고래일
        지언정 따르게 된다. 길하다. 근본이 성실하다면 설
        사 큰 강을 건너는 위험을 범하여도 만사가 순조로운
        것이다. 괘상은 가운데가 그늘지고 비었으니 나무를
        파서 구멍을 뚫는 형상이다. 크게 보면 火의 離괘를
        나타내기도 한다. 무슨 일에나 성의를 다해야 한다.
        그래야 하늘의 의지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중부(中孚)는 성실한 믿음을 통해서 충만함을 얻는 길괘(吉卦)
    입니다. 모든 성장하는 것들은 이미 그 마음이 성장되어져 있어
    야 합니다. 만약에 위로 나아감이 무서우면 더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두려우하면 더 이상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착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이 하늘을 감동시키
    지 못한다면 큰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어미닭과 같이 사랑
    을 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두려움이 있으면
    발전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람이 위에서 불어야지 밑에
    있는 물결이 움직이듯이 위에 있는 마음이 밑에까지 크게 작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작은 물건을 꾸밀때도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짜증이 날 것입니다. 해야되겠다는 마음이 짜증보
    다 크면 짜증 나는 가운데서도 일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지만
    마음이 짜증보다 작다면 일의 중간에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하기 싫은것이 생길 때 바로 그럴 때 정성을 쏟아
    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늘로 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
    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은 작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집
    하지 않고 내 마음을 쓰면 그것은 곧 하늘의 마음이 됩니다. 바
    로 그 때 자신이 정성을 들여 신경을 쓴 대상은 자기 앞으로 끌
    려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결코 하늘은 도와주지 않
    을 것입니다. 정성을 쏟으면 세상은 즐겁게 따르게 되는 것입니
    다. 커다란 사랑이 아랫사람을 감동 시켜서 따르게 만드는 것입
    니다. 자기 보다 작은 것들이 말을 듣지 않을때일수록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겨하여
    따르니 하늘을 감화 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음덕은 돼지와 물고기
    에까지도 감화를 미치는 것입니다.
     
      중부의 괘상은 빈배를 형상합니다. 빈 배는 나를 고집하지 않
    고 성리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순하게
    흘러 가는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 중에 하나는 선입견을 갖지 않
    고 만물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 성의만 차 있고 만물
    을 바라보는 눈이 사랑으로 차 있으면 또한 그것이 한결같이 변함
    이 없으면 크게 발전하고 번영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하는 법입니다. 피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좁기 때문입니다. 피하는 자는 하늘이 돕지 않는 것입니
    다. 내가 하늘로 가고자 하면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고
    자 하는 자리 또한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늘을 느낄 수 없
    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로써만 살지 말고 하늘로써 살아야만
    합니다. 나의 인생이 아니라 하늘과 함게한 인생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랬을 때 크게 발전하고 번영하게 되는 하늘로부터
    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대상. 연못(兌) 위에 바람이 불어서 물결을 움직인다.
        이것이 중부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통해 따듯
        한 정을 가지고 재판을 판결하고 사형수를 감형시킨다.
     
      성리와 사랑을 가지고 잘잘못을 재판하고 사형수까지도 감형을
    한다. 즉 죄지은 사람까지도 감화 시켜서 그 사람을 바꾼다는 것
    이니 결국 죄수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양효. 현상(現狀)에 만족하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길하다. 지나친 야심을 품으면 안식을 얻지 못
        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안정되게 하고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길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을 품으면 불안하게 될 것입니
    다. 즉,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처해져 있는 환경을 끌어
    올리는 것이 바로 성공인 것입니다. 자동차가 달릴때는 달리는
    차 안에서는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합니다. 빨리 가고자 한다면 차
    를 빨리 가도록 해야지 사람이 앞으로 튀쳐 나가면 안된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지나친 야심은 안식을 얻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바로 양성 에네르기가 현상을 떠나서 움직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양효. 학(鶴)이 산 그늘에서 울고 그 새끼가
        이 소리에 대답하여 응답한다. 마음으로 동지를 구하고
        서 로 부르며 산다. 나에게 좋은 술잔이 있으니 동지와
        함께 술을 마신다. 진심으로 뜻이 맞으니 즐겁다.
     
      자기 사랑을 진심으로 베풀때 그 때 비로소 응답이 온다는 것입
    니다. 좋은 것은 니것 내것을 따지지 않고 공평히 나누었을때  진
    심이 통하는 친구를 만날 수가 있으니 충심을 얻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음효. 적을 만난다. 어떤자는 진격하고 어떤
        자는 도망친다. 우는자가 있고 노래하는 자가 있으니
        대열은 지리멸렬하고 계통이 깨어진다. 지휘자가 지휘
        를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 효는 음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장을 하려고 합니다.
    재벌의 한 사람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회사에 오래되고
    고참이더라도 능력이 안되는 사람은 사장을 시켜선 안된다고 하
    였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사가 커지면 잘 돌아가면 자연히 커다
    란 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회사는 커지지 않고 마음만 사장이 되
    려고 하면 결국 회사는 망하는 것입니다. 매사가 되어지지 않습
    니다. 작다고 생각하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싫은 것이라 하더
    라도 그 모든 것을 이끌어 갈 수 있을 때 진정한 높은 지위를 스
    스로 얻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과도 없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음효. 달은 만월에 가깝다. 지금이야말로 한
        패들과의 관계를 끊고 위에 5양에 봉사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탈은 없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시기하는 자들에게 조차도 정성을 들여야 합니
    다. 바로 그렇게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들과 평행
    선상의 친분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서로의 뜻이 맞는다고해서 동
    급에서 어울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
    입니다. 남자가 여자와 평행선상에 서게 되면 꼭 남자는 여자에게
    종속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위아래서 당기고는 있지만 그 차원이
    같아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차원이 같은 곳에서는 분리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헤어지게 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
    서 그 눈높이가 5양의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높은쪽
    을 택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양효. 성실한 마음으로 손을 잡고 나아가면
        탈은 없다. 허물이 있을리가 없다. (中正)
     
      소리가 난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소리가 아니듯이 사람은 눈높
    이를 키워야 합니다. 그것에서 끊임없는 노력과 발전이 나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만족에서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늙어서도
    젊게 살려면 어느 한 곳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양효. 학이 하늘로 오르려 한다. 분수에 넘치
        는 일을 해보지만 오래 계속되지 못한다. 설사 정도(正
        道)를 지키더라도 흉하리라.
     
      실력에 맞지도 않는데 오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자리에
    올랐을 때는 반드시 제대로 되었는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사람
    들을 이끌어 갈때는 반드시 제대로 따라오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
    니다. 항상 어느 부분에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야 하며
    좋지 않은 부분은 메꾸고 먼저 좋은 일로 만든 연후에 굳건하게 움
    직여야 함을 이 중부괘를 보고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4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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