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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김씨(高靈金氏)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단에 위치한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로서 16대 520년 간을 계승해오다가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23)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그후 서기 757년(경덕왕 16) 고양(高陽)으로 불리우다가 1018 년(고려 현종 9)에 영천현(靈川縣)이 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고양(高陽)의 고(高)자와 영천(靈川)의 영(靈)자를 따서 고령(高靈)으로 칭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려(高麗) 시대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11세손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장손(長孫)으로 고려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 의(金 宜)의 맏아들 김남득(金南得)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 사헌부에 소속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그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가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간관(諫官)을 지낸 무(畝 : 시조 남득의 아들)의 아들 4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사행(士行)은 조선 세종(世宗) 때 여산(礪山)·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고, 차남 사문(士文)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사충(士忠)은 승지(承旨)를, 막내 사신(士信)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한편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형조 참의(形曹參議)에 천거된 자숙(子肅)은 사행(士行)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이며, 그의 장남 형생(荊生)은 성종(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하양 군수(河陽郡守)를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오른 차남 장생(莊生)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서기 1510년(중종 5)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수(銖)는 고성 군수(固城郡守)·진주 목사(晋州牧使)·순천 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한 후 정3품 당상관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며, 아우 구(鉤)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하동(河東)·순천(順天)·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특진한 양촌(陽村)은 1559년(명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 걸친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여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리고 경원 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문절공(文節公) 면(沔)은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뒤에 효렴(孝廉)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居昌)·고령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격퇴시켜 그 공(功)으로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천장(千章), 현감(縣監) 충립(忠立), 동지중추부사 춘명(春明), 감찰(監察) 응수(應洙) 등이 유명했고, 현종(顯宗) 때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초중(楚重)은 어영 별장(御營別將) 자, 칠곡 군수(漆谷郡守) 한주(翰周)와 함께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남한에 총 3,712가구, 15,5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단에 위치한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로서 16대 520년 간을 계승해오다가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23)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그후 서기 757년(경덕왕 16) 고양(高陽)으로 불리우다가 1018 년(고려 현종 9)에 영천현(靈川縣)이 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고양(高陽)의 고(高)자와 영천(靈川)의 영(靈)자를 따서 고령(高靈)으로 칭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려(高麗) 시대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11세손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장손(長孫)으로 고려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 의(金 宜)의 맏아들 김남득(金南得)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 사헌부에 소속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그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가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간관(諫官)을 지낸 무(畝 : 시조 남득의 아들)의 아들 4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사행(士行)은 조선 세종(世宗) 때 여산(礪山)·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고, 차남 사문(士文)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사충(士忠)은 승지(承旨)를, 막내 사신(士信)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한편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형조 참의(形曹參議)에 천거된 자숙(子肅)은 사행(士行)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이며, 그의 장남 형생(荊生)은 성종(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하양 군수(河陽郡守)를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오른 차남 장생(莊生)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서기 1510년(중종 5)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수(銖)는 고성 군수(固城郡守)·진주 목사(晋州牧使)·순천 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한 후 정3품 당상관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며, 아우 구(鉤)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하동(河東)·순천(順天)·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특진한 양촌(陽村)은 1559년(명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 걸친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여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리고 경원 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문절공(文節公) 면(沔)은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뒤에 효렴(孝廉)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居昌)·고령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격퇴시켜 그 공(功)으로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천장(千章), 현감(縣監) 충립(忠立), 동지중추부사 춘명(春明), 감찰(監察) 응수(應洙) 등이 유명했고, 현종(顯宗) 때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초중(楚重)은 어영 별장(御營別將) 자, 칠곡 군수(漆谷郡守) 한주(翰周)와 함께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남한에 총 3,712가구, 15,5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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