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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판씨(海州判氏)
해주(海州)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내미홀(內米忽)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해 있다고 하여 해주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별호(別號)로 대령(大寧), 서해(西海)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조선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고 1938년 부(府)로 승격,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었다. 해주 판씨(海州判氏)의 선조(先祖)는 고려 말엽(高麗末葉)에 충신(忠臣)으로서 왕을 보필하는 관직(官職)에 있었으나 간신배(奸臣輩)의 모함을 받아 반역의 누명을 쓰고 피화(被禍)되어 강화도(江華島) 근처의 섬으로 유배(流配) 도중에 풍파(風波)를 만나 배가 파선(破船)이 되어 표류(漂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한강(漢江) 하류에 있는 밤섬에 표착(漂着)하여 그 곳에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살고 있는 판영호(判榮鎬)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마포구 율도동(栗島洞:밤섬)에 살고 있었던 사손(嗣孫) 판봉석(判鳳石)이란 사람이 대대로 세전(世傳)되어 오던 보첩(譜牒)을 보관하다가 1925년 대홍수(大洪水)로 밤섬 전역이 침수되었을 때 유실(流失)하여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였다고 하며, 밤섬에 살고 있었던 후손들은 정부시책에 따라 1967년도에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옮겨 살다가 점차 전국 각처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몇가구 남지 않았다. 근대에 와서 해주 판씨(海州判氏)는 처음 밤섬에 정착했던 선조의 휘자(諱字)를 판해율(判海栗)로 존모(尊慕)하고, 전국에 흩어진 성손(姓孫)들이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족보(族譜) 편찬을 서두르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서울과 고양군(高陽郡)를 비롯한 북한 지역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59가구, 2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주(海州)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내미홀(內米忽)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해 있다고 하여 해주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별호(別號)로 대령(大寧), 서해(西海)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조선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고 1938년 부(府)로 승격,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었다. 해주 판씨(海州判氏)의 선조(先祖)는 고려 말엽(高麗末葉)에 충신(忠臣)으로서 왕을 보필하는 관직(官職)에 있었으나 간신배(奸臣輩)의 모함을 받아 반역의 누명을 쓰고 피화(被禍)되어 강화도(江華島) 근처의 섬으로 유배(流配) 도중에 풍파(風波)를 만나 배가 파선(破船)이 되어 표류(漂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한강(漢江) 하류에 있는 밤섬에 표착(漂着)하여 그 곳에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살고 있는 판영호(判榮鎬)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마포구 율도동(栗島洞:밤섬)에 살고 있었던 사손(嗣孫) 판봉석(判鳳石)이란 사람이 대대로 세전(世傳)되어 오던 보첩(譜牒)을 보관하다가 1925년 대홍수(大洪水)로 밤섬 전역이 침수되었을 때 유실(流失)하여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였다고 하며, 밤섬에 살고 있었던 후손들은 정부시책에 따라 1967년도에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옮겨 살다가 점차 전국 각처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몇가구 남지 않았다. 근대에 와서 해주 판씨(海州判氏)는 처음 밤섬에 정착했던 선조의 휘자(諱字)를 판해율(判海栗)로 존모(尊慕)하고, 전국에 흩어진 성손(姓孫)들이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족보(族譜) 편찬을 서두르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서울과 고양군(高陽郡)를 비롯한 북한 지역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59가구, 2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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