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해주 판씨(海州判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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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6:40 조회 2,02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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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판씨(海州判氏)

 해주(海州)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내미홀(內米忽)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해 있다고 하여 해주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별호(別號)로 대령(大寧), 서해(西海)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조선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고 1938년 부(府)로 승격,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었다. 해주 판씨(海州判氏)의 선조(先祖)는 고려 말엽(高麗末葉)에 충신(忠臣)으로서 왕을 보필하는 관직(官職)에 있었으나 간신배(奸臣輩)의 모함을 받아 반역의 누명을 쓰고 피화(被禍)되어 강화도(江華島) 근처의 섬으로 유배(流配) 도중에 풍파(風波)를 만나 배가 파선(破船)이 되어 표류(漂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한강(漢江) 하류에 있는 밤섬에 표착(漂着)하여 그 곳에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살고 있는 판영호(判榮鎬)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마포구 율도동(栗島洞:밤섬)에 살고 있었던 사손(嗣孫) 판봉석(判鳳石)이란 사람이 대대로 세전(世傳)되어 오던 보첩(譜牒)을 보관하다가 1925년 대홍수(大洪水)로 밤섬 전역이 침수되었을 때 유실(流失)하여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였다고 하며, 밤섬에 살고 있었던 후손들은 정부시책에 따라 1967년도에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옮겨 살다가 점차 전국 각처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몇가구 남지 않았다. 근대에 와서 해주 판씨(海州判氏)는 처음 밤섬에 정착했던 선조의 휘자(諱字)를 판해율(判海栗)로 존모(尊慕)하고, 전국에 흩어진 성손(姓孫)들이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족보(族譜) 편찬을 서두르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서울과 고양군(高陽郡)를 비롯한 북한 지역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59가구, 2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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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 내씨(開城乃氏)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려(高麗)의 수도(首都)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었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내씨(乃氏)의 선계(先系)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신라(新羅) 소지왕(炤知王 : 제 21 대 왕, 재위기간 : 479 ~ 500)의 비(妃)인 선혜부인(善兮夫人)이 이벌찬(伊伐飡)의 내 숙(乃 宿)의 딸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高麗史)」에는 충혜왕(忠惠王 : 제 28대 왕, 재위기간 : 1330 ~ 1332, 1339 ~ 1344)의 사부(師傅 : 고려 때 세자와 세손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정1품 품계)가 내 원(乃 圓)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된 씨족(氏族)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내씨(乃氏)와의 관계는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내씨(乃氏)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망국의 한을 달래며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 왕씨(高麗王氏) 일족을 숙청(肅淸)할 때 화(禍)를 면하기 위하여 내씨(乃氏)로 변성(變姓)하고 관향(貫鄕)을 개성(開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병란(兵亂) 등으로 보첩(譜牒)과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여 조선(朝鮮) 현종 조(顯宗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내득균(乃得均 : 일명 득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 득균(得均)의 아들 용익(鎔翊)이 1655년(효종 6)에 출생하여 숙종(肅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장호(章澔)는 영조(英祖) 때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가 현달(賢達)하여 개성 내씨의 3 대 산맥(山脈)을 이루었다. 개성 내씨는 장호의 아들 3 형제 대(代)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호의 아들 3 형제 중 장남(長男) 정원(楨元) 은 선조의 대(代)를 이어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차남 정빈(楨彬)은 1777년(정조 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막내 정성(楨成)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그외 인물로는 용익(鎔翊)의 증손(曾孫) 홍섭(弘燮)·경섭(慶燮)·몽섭(夢燮)이 모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고,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오른 재욱(在郁)·재한(在漢)·재렴(在廉) 등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학륜(學崙 : 재한의 손자)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근래에 와서 개성 내씨는 전국에 산거(散居)하고 있는 성손(姓孫)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후손 성규(星圭)를 비롯한 문중(門中) 대표들이 뜻을 모아 족보 편찬(族譜編纂)을 추진 중에 있으며, 1988년 4월 5일에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오도 리(京畿道坡州郡交河面吾道里)에 위치한 일세조(一世祖)의 묘역을 단장하고 묘비(墓碑)를 건립하였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남 천원(忠南天原), 황해도 봉산(黃海道鳳山), 함북 청진(咸北淸津) 등지에 85가구 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71 가구, 308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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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령 김씨(高靈金氏)
    고령 김씨(高靈金氏)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단에 위치한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로서 16대 520년 간을 계승해오다가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23)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그후 서기 757년(경덕왕 16) 고양(高陽)으로 불리우다가 1018 년(고려 현종 9)에 영천현(靈川縣)이 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고양(高陽)의 고(高)자와 영천(靈川)의 영(靈)자를 따서 고령(高靈)으로 칭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려(高麗) 시대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11세손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장손(長孫)으로 고려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 의(金 宜)의 맏아들 김남득(金南得)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 사헌부에 소속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그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가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간관(諫官)을 지낸 무(畝 : 시조 남득의 아들)의 아들 4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사행(士行)은 조선 세종(世宗) 때 여산(礪山)·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고, 차남 사문(士文)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사충(士忠)은 승지(承旨)를, 막내 사신(士信)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한편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형조 참의(形曹參議)에 천거된 자숙(子肅)은 사행(士行)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이며, 그의 장남 형생(荊生)은 성종(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하양 군수(河陽郡守)를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오른 차남 장생(莊生)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서기 1510년(중종 5)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수(銖)는 고성 군수(固城郡守)·진주 목사(晋州牧使)·순천 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한 후 정3품 당상관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며, 아우 구(鉤)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하동(河東)·순천(順天)·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특진한 양촌(陽村)은 1559년(명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 걸친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여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리고 경원 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문절공(文節公) 면(沔)은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뒤에 효렴(孝廉)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居昌)·고령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격퇴시켜 그 공(功)으로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천장(千章), 현감(縣監) 충립(忠立), 동지중추부사 춘명(春明), 감찰(監察) 응수(應洙) 등이 유명했고, 현종(顯宗) 때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초중(楚重)은 어영 별장(御營別將) 자, 칠곡 군수(漆谷郡守) 한주(翰周)와 함께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남한에 총 3,712가구, 15,5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1
  • 남평 문씨(南平文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남평은 전라남도 나주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을 통일신라 때 경덕왕이 형웅현으로 고쳐 무주(武州:광주의 옛이름)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에서는 남평(南平) 또는 영평(永平)으로 불리웠고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에 합해져서 지금의 남평면이 되었다. 문씨의 본관은 남평을 비롯하여 단성(丹城)·감천(甘泉:경북 안동지방)·정선(旌善)·강성(江城)·함평(咸平)·파평(坡平) 등 156본까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관향은 모두가 남평 문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평문씨는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을 시조(始祖)로 하여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 태종 때 중국에 건너가 문명을 떨침으로써 문씨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정선 문씨(旌善文氏)는 본래 전씨(全氏)였으나 시조 문임간(文林幹)이 역시 중국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문씨로 사성받고, 돌아와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태조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씨의 대종인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은 신라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서기 472년(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 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 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으로 삼게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위 위에다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서원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주로 명성을 떨쳤던 남평 문씨는 중시조 익(翼)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98년(숙종 3) 좌·우찬선대부(左右贊善大夫)를 지내고, 급사중(給事中)과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라 상주국(上柱國)으로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당세에 명필로 유명했던 공유(公裕)는 익(翼)의 막내 아들로 예종과 의종조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창사 비문(創寺碑文)을 남겼다. 공유의 아들 극겸(克謙)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忠直)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앗고, 그의 아들이 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惟弼)이다.
     우리나라 의복혁명의기수 삼우당(三憂堂) 익점(益漸)은 남평 문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1329년(고려 충숙왕 16) 강성현 원당리 배양촌(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세칭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 숙선(叔宣)의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 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 때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의 폐위론을 의논하자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제의 노여움을 받아 교지국(校趾國 :지금의 월남)에 귀양갔다가 돌아올 때 금수품인 목화(木花)씨를 붓대 속에 넣어온 것으로 우리나라 의복의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공민왕 때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 간이나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자 이태조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려 하였으나 끝까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왕명으로 그가 살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효자정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익점의 아들 중용(中庸)·중성(中誠)·중실(中實)·중진(中晋)·중계(中啓)동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실의 맏아들 래(萊)는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천문·지리·산수·율려(律呂)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 율(權慄)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위세(緯世:익정의 9세손)가 용담 현감(龍潭縣監)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홍헌(弘獻)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강물에 투신자살하여 광해군 때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희성(希聖),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재도(載道),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기호(基浩)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문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40,419가구, 228,820명, 1975년에는 62,027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88,932가구, 375,7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1
  • 제주 부씨(濟州夫氏)
    제주 부씨(濟州夫氏)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으로 명칭은 도이(島夷)·주호(州胡)·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탁라(탁羅)·탐라(耽羅)·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新羅)의 속국이었던 탐라국(耽羅國)은 938년(태조 21)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숙종(肅宗) 때는 군(郡)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다가 1153년(의종 7) 군을 현으로 고쳤으며 1211년(희종 7)에 탐라를 제주라고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성주(星州)·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어,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山北)을 제주, 산남(山南)을 양분하여 동쪽에 정의현(旌義縣),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여 통치하다가 1864년(고종 1) 대정·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 관찰사 관할하에 두었다.
     그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910년(순종 4)에는 정의·대정 양현이 제주군으로 합군되는 동시에 추자면(楸子面)이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분리되어 제주군에 편입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5년 도사제(島司制)로 개편, 제주도(濟州島)가 되었고,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2시 2군 6읍 5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부씨(夫氏)의 시조(始祖)는 유명한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設話)」에 등장하는 부을나(夫乙那)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탐라(耽羅)에는 본래 사람과 만물(萬物)이 없었는데 한라산(漢拏山) 북쪽 모흥혈(毛興穴)에서 세사람과 신인(神人)이 용출(湧出)하였으니, 이들이 곧 부을나(夫乙那)·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이다.
     이들 삼신인(三神人)은 후에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오곡(五穀)의 종자(種子)와 6축(六畜)을 가져온 세사람의 미녀(美女)를 맞아 각각 아내로 삼고, 각기 활을 쏘아 화살이 맞닿는 곳에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니 처음으로 탐라의 역사가 시작되어 문화(文化)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부씨(夫氏)는 탐라국 삼도(三徒)를 지배하여 오면서 왕자(王子)였던 부계량(夫繼良)이 신라 무열왕(武烈王) 때 안무사(按撫使)로 신라를 예방하여 외교에 길을 트고 왕으로부터 작록을 받았으며, 탐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부여계(夫麗季)는 탐라를 항복받기 위하여 침입한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애석하게 순절하였다.
     그러나 부씨(夫氏)는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조선(朝鮮) 초에 진용부위(進勇副尉)로 별장(別將)을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통을 지켜온 인물로는 언경(彦景)의 증손(曾孫) 삼로(三老)가 세종(世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형제 중 맏아들 유렴(有廉)은  어모장군(禦侮將軍)로 선조가 뿌리를 내린 제주도를 지켰고, 막내 유성(有成)이 육지로 건너가 경기도 연천(蓮川) 지방에 자리잡아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유렴(有廉)의 아들 세영(世榮)은 어모장군(禦侮將軍)로 슬하에 각(恪)·협·열(悅)·신(愼)·픽( )·홍(弘) 등 6형제를 낳아 이들이 제주6파(濟州六派)의파조(派祖)이 되었으며, 9세손 응호(應豪)는 어모장군으로 사과(司果)을 지냈고, 승일(承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10세손에 이르러 보공장군(保功將軍)로 겸사복정(兼司僕正)을 지낸 상필(尙弼)과 어모장군 경필(景弼)이 가세를 튼튼히 다졌고, 진운(進雲)은 절충장군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다경진 만호(多慶津萬戶)을 거쳐 감은당보안(感恩堂保安)이 된 시웅(時雄)은 해상(海上)에서 해적떼를 만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해적들의 물건을 도로 빼앗아 싣고 돌아왔다는 설화가 전해질 정도로 힘이 센 장사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절충장군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던 만원(萬元)과 통정대부(通政大夫) 만겸(萬謙)이 유명했고,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도성(道聖)은 영조(英祖) 때 효행(孝行)으로 이름난 천겸(千兼), 대정 현감(大 靜縣監)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 일컬어졌던 사민(士敏), 학문(學問 )이 뛰어나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았던 도일(道一) 등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정조(正祖) 때 문과(文科 )에 급제하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오른 종인(宗仁)은 제주 부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일찌기 대정 현감(大靜縣監)로 나가 문학진흥에 힘을 쏟아 그 공덕(功德)을 찬양받았으며 뒤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고, 항희(恒熙)는 무과에 올라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로 정사에 기록된 생종(生鍾)과 함께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이어 제주 부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부씨(濟州夫氏)는 남한(南韓)에 총 2,094가구, 8,5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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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주 석씨(海州石氏)
    해주 석씨(海州石氏)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 일명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이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다가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해주 석씨(海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성(石 星)은 중국(中國)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명(明)나라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혀 목종(穆宗) 즉위년에 직간(直諫)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신종(神宗) 때 다시 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명나라 신종 12, 조선 선조 17)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의 은인(恩人)이다. 그 후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사신(使臣)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 성(石星)에게 물어 투옥(投獄)시켜 옥사(獄死)케 하였다.「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의하면 석 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 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 석 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형제 중 차남 천은 1597년(만력 25, 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星州石氏)가 되었으며, 장남 담(潭)은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海 州)로 사적 (賜籍)하였다. 그 후 담(潭)의 작은 아들 귀당(貴棠)과 손자 난(亂 : 귀실의 아들)이 청인(淸人)을피하여 산음현 모호리(山陰縣毛好里 :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 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양군(首陽君) 담의 증손 중립(仲立 : 난의  맏아들)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진번(進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한편 천( )의 증손 숭길(崇吉 : 이수의  맏아들)과 선일(善一) 부자가 가선대부로 용양위호군(龍  衛護軍)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순조(純祖) 때 와서는 후손 준옥(俊玉)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좌승지(左承旨)을 지낸 재풍(在豊)과 군자감정(軍資監正) 관기(冠琦)가 유명했으며 , 한말(韓末)에는 상룡(祥龍)과 채룡(彩龍)이 항일 투쟁에 공헌하여 해주 석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 석씨(海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580가구, 2,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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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천 돈씨(木川頓氏)
    목천 돈씨(木川頓氏)

     목천(木川)은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목주(木州)로 개칭하여 청주(淸州)에 속하였다가 성종(成宗) 때는 별칭(別稱)으로 신정(新定)으로도 불렸다.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목천(木川)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어 오다가 1913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이웃 병천군과 합하여 천안군(天安郡)에 속했으며, 1963년 천안군이 천원군으로 개칭됨에 따라 천원군(天原郡) 목천면(木川面)이 되었다.
     돈씨(頓氏)는 중국 창오(蒼梧 : 지금의 광서성 창오현, 고대 순제가 죽었다고 전하는 곳)출신으로 한(漢)나라 때 효자로 유명했던 돈기(頓琦)의 후예(後裔)로 전해진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하자 목천(木川)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순응(順應)하지 않고 자주 소란(騷亂)을 일으켜 태조가 그 곳 사람들에게 동물의 이름으로 돈(頓), 상(象), 우(牛), 장(獐)등의 성(姓)을 가지게 했는데, 그 후손들이 돈(頓), 상(尙), 우(禹), 장씨(張氏)로 개성(改姓)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돈씨가보(頓氏家譜)]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조의 명성(名姓)인 을씨(乙氏)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때부터 을지씨(乙支氏)로 개성(改姓)하였다가, 고려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난(亂)에 의병장(義兵將)으로 서경(西京)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이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 고 돈뫼(頓山)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 곳에서 누대를 세거(世居)해 오면서 성(姓)을 돈씨(頓氏)로 개성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의 조방장(助防將)인 돈정신(頓貞臣)은 을지수(乙支遂)의 17대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묘청(妙淸)의 난(亂) 때 공을 세웠다는 을지수, 을지달. 을지원에 대한 기록이 사기(史記)에 정확하게 전하지 않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돈뫼(頓山)의 지명이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확성이 없다고 본다. 근대에 와서 돈씨는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평남(平南) 대동(大同)과 강서(江西)를 비롯하여 황해도(黃海道) 안악(安岳), 황주(黃州)에 36가구가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2가구, 1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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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성-진보(眞城-眞寶) 이씨(李氏)
    진성-진보(眞城-眞寶)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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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권씨(安東 權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시 조: 휘(諱):권 행(權 幸)
       묘 소: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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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평咸平 이씨(李氏)
    함평咸平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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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악安岳 김씨 金氏
    안악安岳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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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산-영동(永山-永同) 김씨 金氏
    영산-영동(永山-永同)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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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 판씨(海州判氏)
    해주 판씨(海州判氏)

     해주(海州)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내미홀(內米忽)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해 있다고 하여 해주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별호(別號)로 대령(大寧), 서해(西海)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조선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고 1938년 부(府)로 승격,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었다. 해주 판씨(海州判氏)의 선조(先祖)는 고려 말엽(高麗末葉)에 충신(忠臣)으로서 왕을 보필하는 관직(官職)에 있었으나 간신배(奸臣輩)의 모함을 받아 반역의 누명을 쓰고 피화(被禍)되어 강화도(江華島) 근처의 섬으로 유배(流配) 도중에 풍파(風波)를 만나 배가 파선(破船)이 되어 표류(漂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한강(漢江) 하류에 있는 밤섬에 표착(漂着)하여 그 곳에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살고 있는 판영호(判榮鎬)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마포구 율도동(栗島洞:밤섬)에 살고 있었던 사손(嗣孫) 판봉석(判鳳石)이란 사람이 대대로 세전(世傳)되어 오던 보첩(譜牒)을 보관하다가 1925년 대홍수(大洪水)로 밤섬 전역이 침수되었을 때 유실(流失)하여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였다고 하며, 밤섬에 살고 있었던 후손들은 정부시책에 따라 1967년도에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옮겨 살다가 점차 전국 각처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몇가구 남지 않았다. 근대에 와서 해주 판씨(海州判氏)는 처음 밤섬에 정착했던 선조의 휘자(諱字)를 판해율(判海栗)로 존모(尊慕)하고, 전국에 흩어진 성손(姓孫)들이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족보(族譜) 편찬을 서두르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서울과 고양군(高陽郡)를 비롯한 북한 지역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59가구, 2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27
  • 설,추석 차례지내기
     우리 한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과 추석날에는 조상의 음덕을 기리       며 차례를 올리고, 모든 가족이 한데 모여 화목을 다지는 날입니다. 
     

     

     설날과 추석날 아침에 지내는 차례는 가문마다 집집마다 예절이조금       씩 다릅니다. 여기 소개하는 차례상 차리기등 제례는 우리나라 향교       에서 권장하는 가장 표준에 가까운 전통적인 제례를 소개하니, 이대       로 따른다기 보다는 가풍의 예절을 지켜 지내되 잘못된것이 있으면       참조하기 바랍니다. 
     

     

     차례장소는 대청마루나 거실이 적당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차례를       사당에서 지냈으나 요즘 사당을 모신 집이 거의 없어 무의미 해졌습       니다. 복장은 한복차림이 좋으며 특히 설 차례는 색동저고리등 화려       한옷차림도 무관하다고 합니다. 한복을 입고 차례를 지낼 때는 두루       마기를 입는 것이 예의입니다. 
     

     

     차례의 특징은 기제사와 달리 축문이 없으며, 술은 한번만 올리는       단잔으로 하며 술대신 차를 올려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밥)대       신설에는 떡국을, 추석에는 송편을 올립니다. 제물은 가정형편에 맞       게준비하고 정성을 담아 장만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옛 어른들께       서 말씀하시기를 흉년이라고 거르지 말고 풍년이라고 지나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차례상 차리기

     


     

    다음은 우리나라 향교에서 권하는 차례상 차리는 법입니다.




    1. 과일을 놓는 줄 (그림의 1번 줄)
     조율이시라하여 좌측부터 대추, 밤, 배(사과), 감(곶감)의 순서로 차리며 그 이외의 과일들은 정해진 순서가 따로 없으나 나무 과일, 넝쿨과일 순으로 차린다. 과일 줄의 끝에는 과자(유과)류를 놓는다.

    2. 반찬을 놓는 줄(그림의 2번 줄)
     좌포우혜라하여 좌측 끝에는 포(북어, 대구, 오징어포)를 쓰며 우측 끝에는 수정과를 쓴다. 그 중간에 나물반찬은 콩나물, 숙주나물, 무나물 순으로 올리고, 고사리, 도라지나물등을 쓰기도 하며 청장(간장) 침채(동치미, 설명절)는 그 다음에 올린다.

    3. 탕을 놓는 줄(그림의 3번 줄)
     대개는 3탕으로 육탕(肉湯 ;육류 탕), 소탕(素湯 ;두부,채소류 탕), 어탕(魚湯 ;어류 탕)의 순으로 올리며, 5탕으로 할 때는 봉탕(닭,오리탕), 잡탕등을 더 올린다. 최근 들어서는 가정의례준칙등의 영향으로 한가지 탕으로 하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4. 적과 전을 놓는 줄(그림의 4번 줄);
     대개는 3적으로 육적(肉炙 ;고기류 적), 어적(魚炙 ;생선류 적), 소적(素炙 ;두부,채소류 적)의 순서로 올린다.

     * 적(炙) : 생선이나 고기,채소 따위를  대 꼬챙이에  꿰어서 양념하여  굽거나 번철에 지진 음식 
     * 전(煎) : 재료를 얄팍하게 썰어 밀가루를  뭍힌 다음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지진 음식(부침개)

    5. 술잔과 떡국(설), 송편(추석)을 놓는 줄(그림의 5번 줄);
     앞에서 보아 떡국(송편)은 우측에 술잔은 좌측에 차린다. 그림은 양위를 모시는 모습. 시접(수저를 놓는 빈 대접)은 단위제(한분을 모신)의 경우에 앞에서 보아 왼쪽에 올리며, 양위합제(두분을 모신)의 경우에는 중간 부분에 올린다.

    6. 향로 향합등
     향상은 제사상 앞에 두고 축문, 향로, 향합을 올려 놓으며 향로 뒤쪽에 모사 그릇을 놓는다, 퇴주 그릇과 제주(술) 등은 제사상 오른쪽에 별도의 상에 놓는다.

    7. 차례상 진설의 한문어구
      [棗栗梨枾:조율이시] 좌측부터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로 올린다.                      조율시이의 순서로 진설하기도 한다. 
      [紅東白西:홍동백서]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으로 놓는다. 
      [生東熟西:생동숙서] 김치는 동쪽에, 나물은 서쪽에 놓는다.
      [左脯右醯:좌포우혜] 포는 좌측에, 식혜,젓갈류는 오른쪽에 놓는다.  
      [魚東肉西:어동육서] 생선은 동쪽(앞에서 보아 우측)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頭東尾西:두동미서]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乾左濕右:건좌습우] 마른 것은 왼쪽에, 젖은 것은 오른쪽에 놓는다.
      [接東盞西:접동잔서]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右飯左羹:우반좌갱] 메(제삿밥)는 오른쪽에, 갱(국)은 외쪽에 놓는다.
      [男左女右:남좌여우] 제상의 왼쪽은 남자(考位), 오른쪽은 여자(비위)

    차례음식 조리할 때;



    조리하기 전 몸 가짐을 단정히 하여 정갈하게 조리를 합니다.
    차례에 쓰지 않는 음식; 복숭아, 꽁치, 삼치, 칼치, 고추, 마늘 등
    식혜, 탕, 면 등은 건더기 만 사용합니다.
    설 차례는 메 대신 떡국을, 추석차례는 메 대신 송편을 올립니다.









     


     

    차례 지내는 순서

     


     

    진설(進設)
      북쪽(방위상 북쪽을 뜻하나 제사를 모시는 장소의 형편상 북쪽을 택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신위를 모시는 방향을 북쪽이라 한다.즉,지방을 모신 방향을 북쪽이라 함)에 병풍을 치고 병풍 앞에 교의(神主나 혼백상자등을 모시는 의자)를 모신 다음(일반 가정 제사에서는 교의를 두지 않고 병풍에 지방을 모시던지 제사상머리에 사진을 모심) 제상에 식어도 괜찮은 음식부터 제물을 차린다.  제수는 간소하게 하되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의 표현인 만큼 일상 반상음식에 몇 가지를 더 장만함이 좋고, 고인이 생시에 좋아하던 음식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 진설이 다 되면 고인의 사진을 교의나 제사상에 모시고 혹은 미리 써둔  지방(지방,축문 쓰는 법 참조)을  병풍 앞면에 붙인다. 이는 상차림을 한 후 어른을 모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제주가 제사상을 바라보아 앞쪽이 北, 오른쪽을 東, 왼쪽을 西라 한다. 진설의 순서는 맨 앞줄에 과일, 둘째 줄에 포와 나물, 세째 줄에 탕(湯), 넷째 줄에 적(炙)과 전(煎), 다섯째 줄에 메(쌀밥)와 갱(제사 지낼 때 메 옆에 놓는 국. 무와 다시마 따위를 넣고 끓임)을 차례대로 놓는다.

    분향강신(焚香降神)
      제주는 꿇어 앉아 향을 살라 향로에 꽂고 재배한다. 왼쪽집사가 제주에게 강신잔을 주면 오른쪽 집사가 술을 따른다. 제주는 모사 그릇에 세번에 나누어 모두 따른다. 왼쪽집사가 강신잔을 받아 오른쪽 집사에게 건네주어 제자리에 놓게 한다. 제주는 재배한다.

    참신(參神)
      제주와 참석자 모두 재배한다. 요즘은 여자도 재배를 하나 원래는 4배였다.

    진찬(進饌)
      주부가 설 차례에는 떡국을, 추석 차례에는 송편(혹은 메(밥))을 제상에 올린다.

    헌다(獻茶)
      왼쪽 집사로부터 잔을, 오른쪽 집사로 부터 술(또는 茶)을 받아, 먼 조상 남자조상 순으로 올린다. 기제사와 달리 한번만 올린다.

    개반(開飯)
      주부나 집사가 떡국그릇의 뚜껑을 열고 적을 올린다. 순서는 좌측부터 조부 조모순이다. 가정의례준칙에서는 제례는 부모와 조부모등 2대 봉사만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삽시(揷匙)
      주부나 집사가 시접(수저를 놓는 빈 대접)에 담겨있는 숟가락을 떡국에 꽂고 젓가락은 시접 위에 가지런히 걸쳐 놓는다. 젓가락의 손잡이는 서쪽(왼쪽)을 보게 놓는다. 흔히 젓가락을 세번 굴리고 여기저기 제물 위에 올려 놓기도 하지만 시접 위에 가지런히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주는 재배한다.  
      모든 참석자는 조상이 진지를 드는 동안(수분동안) 조용히 서서 생전의 조상을 생각한다.

    철시복반(撤匙復盤)
      떡국 그릇의 뚜껑을 덮고 수저를 거두어 세 번 굴러 시접에 놓는다.

    사신(辭神)
      참사자 일동이 재배를 올리고 지방을 향로 위에서 사른다.

    철상(撤床)
      모든 제사 음식을 물리는 것을 말하며, 제상의 위쪽에서 부터 다른 상으로 공손히 옮겨 물린다.

    음복(飮福)
      제물을 제상에서 거두고 옷을 입은 그대로 조상이 드시고 남은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차례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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