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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손씨(密陽孫氏)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제23대 왕, 재위 기간 : 514∼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 孫)으로 효자보응(孝子報應)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 순(孫 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신라 모량리(牟梁里: 월 성군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면서 노모(老母)를 봉양했는데, 그의 어린아들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야 하겠소" 하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모량리 서북쪽) 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 그의 아내가 "이 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福)인 듯 하니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신기하리만큼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빨리 이를 알아보오" 하였다. 왕의 사자가 그의 집에 가서 알아보고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이 일을 알게 된 흥덕왕은 "옛날 한(漢)나라 곽 거(郭 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하고는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孝道)를 표창했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진다. 그 후 시조 순(順)의 손자 익감(翼減)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중흥조(中興祖) 긍훈(兢訓 : 시조의 7세손)이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긍훈(兢訓)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 데 많은 위훈을 남겼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 데 앞장섰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변( : 광리군 긍훈의 9세손)과 평장사(平章事) 효려(孝麗)가 유명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빈은 병부 상서(兵部 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일어난 조 적의 반란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 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한편 현감 중견(仲堅)의 증손 책(策)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 개국(開國)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을 원(元)나라에 호종(扈從)했던 수경(守卿)은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으로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와서는 문종(文宗) 때 별시문과(別試文 科)에 급제한 서륜( 倫)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세조 3)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및 장인인 순흥 부사 (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민(敏)의 아들 비장(比長)은 성종(成宗) 때 등과하여 시무사조(時務四條)를 왕(王)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진한 후 공조 참의(工曹 參議)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고, 홍록(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을 보존케 하여 역사(歷史)의 공신(功臣)으로 유명했다.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영제(英濟)는 선조(宣祖) 때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 때 사재(私財)를 털어 조력(助力)했으며, 덕심(德沈)과 덕순(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永川)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응록(應祿)과 광해군(光海君) 때의 난정을 개탄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성리학자(性理學者) 기양(起提)이 뛰어났으며, 상륭(尙隆)은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3인의 민족 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병희(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敎主)가 되어 구한말(舊韓末)과 일제의 암흑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망국(亡國)의 민족혼(民族魂)을 혁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선교사이자 항일투사인 정도(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 운동 후에는 상해(上海) 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 (興士團)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으며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쳐,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 섰던 일민(一民)과 함께 밀양 손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58,367가구, 243,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제23대 왕, 재위 기간 : 514∼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 孫)으로 효자보응(孝子報應)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 순(孫 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신라 모량리(牟梁里: 월 성군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면서 노모(老母)를 봉양했는데, 그의 어린아들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야 하겠소" 하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모량리 서북쪽) 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 그의 아내가 "이 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福)인 듯 하니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신기하리만큼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빨리 이를 알아보오" 하였다. 왕의 사자가 그의 집에 가서 알아보고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이 일을 알게 된 흥덕왕은 "옛날 한(漢)나라 곽 거(郭 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하고는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孝道)를 표창했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진다. 그 후 시조 순(順)의 손자 익감(翼減)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중흥조(中興祖) 긍훈(兢訓 : 시조의 7세손)이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긍훈(兢訓)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 데 많은 위훈을 남겼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 데 앞장섰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변( : 광리군 긍훈의 9세손)과 평장사(平章事) 효려(孝麗)가 유명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빈은 병부 상서(兵部 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일어난 조 적의 반란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 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한편 현감 중견(仲堅)의 증손 책(策)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 개국(開國)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을 원(元)나라에 호종(扈從)했던 수경(守卿)은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으로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와서는 문종(文宗) 때 별시문과(別試文 科)에 급제한 서륜( 倫)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세조 3)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및 장인인 순흥 부사 (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민(敏)의 아들 비장(比長)은 성종(成宗) 때 등과하여 시무사조(時務四條)를 왕(王)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진한 후 공조 참의(工曹 參議)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고, 홍록(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을 보존케 하여 역사(歷史)의 공신(功臣)으로 유명했다.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영제(英濟)는 선조(宣祖) 때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 때 사재(私財)를 털어 조력(助力)했으며, 덕심(德沈)과 덕순(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永川)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응록(應祿)과 광해군(光海君) 때의 난정을 개탄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성리학자(性理學者) 기양(起提)이 뛰어났으며, 상륭(尙隆)은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3인의 민족 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병희(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敎主)가 되어 구한말(舊韓末)과 일제의 암흑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망국(亡國)의 민족혼(民族魂)을 혁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선교사이자 항일투사인 정도(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 운동 후에는 상해(上海) 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 (興士團)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으며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쳐,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 섰던 일민(一民)과 함께 밀양 손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58,367가구, 243,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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