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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석씨(海州石氏)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 일명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이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다가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해주 석씨(海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성(石 星)은 중국(中國)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명(明)나라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혀 목종(穆宗) 즉위년에 직간(直諫)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신종(神宗) 때 다시 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명나라 신종 12, 조선 선조 17)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의 은인(恩人)이다. 그 후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사신(使臣)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 성(石星)에게 물어 투옥(投獄)시켜 옥사(獄死)케 하였다.「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의하면 석 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 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 석 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형제 중 차남 천은 1597년(만력 25, 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星州石氏)가 되었으며, 장남 담(潭)은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海 州)로 사적 (賜籍)하였다. 그 후 담(潭)의 작은 아들 귀당(貴棠)과 손자 난(亂 : 귀실의 아들)이 청인(淸人)을피하여 산음현 모호리(山陰縣毛好里 :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 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양군(首陽君) 담의 증손 중립(仲立 : 난의 맏아들)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진번(進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한편 천( )의 증손 숭길(崇吉 : 이수의 맏아들)과 선일(善一) 부자가 가선대부로 용양위호군(龍 衛護軍)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순조(純祖) 때 와서는 후손 준옥(俊玉)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좌승지(左承旨)을 지낸 재풍(在豊)과 군자감정(軍資監正) 관기(冠琦)가 유명했으며 , 한말(韓末)에는 상룡(祥龍)과 채룡(彩龍)이 항일 투쟁에 공헌하여 해주 석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 석씨(海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580가구, 2,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 일명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이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다가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해주 석씨(海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성(石 星)은 중국(中國)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명(明)나라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혀 목종(穆宗) 즉위년에 직간(直諫)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신종(神宗) 때 다시 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명나라 신종 12, 조선 선조 17)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의 은인(恩人)이다. 그 후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사신(使臣)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 성(石星)에게 물어 투옥(投獄)시켜 옥사(獄死)케 하였다.「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의하면 석 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 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 석 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형제 중 차남 천은 1597년(만력 25, 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星州石氏)가 되었으며, 장남 담(潭)은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海 州)로 사적 (賜籍)하였다. 그 후 담(潭)의 작은 아들 귀당(貴棠)과 손자 난(亂 : 귀실의 아들)이 청인(淸人)을피하여 산음현 모호리(山陰縣毛好里 :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 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양군(首陽君) 담의 증손 중립(仲立 : 난의 맏아들)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진번(進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한편 천( )의 증손 숭길(崇吉 : 이수의 맏아들)과 선일(善一) 부자가 가선대부로 용양위호군(龍 衛護軍)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순조(純祖) 때 와서는 후손 준옥(俊玉)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좌승지(左承旨)을 지낸 재풍(在豊)과 군자감정(軍資監正) 관기(冠琦)가 유명했으며 , 한말(韓末)에는 상룡(祥龍)과 채룡(彩龍)이 항일 투쟁에 공헌하여 해주 석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 석씨(海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580가구, 2,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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