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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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완장성( 長城)·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24대 왕, 재위기간 : 534 ∼ 576)이 소경(소경)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忠州)로 개칭되어 성종(成宗) 때 대원(大原)·예성 (蘂城) 등으로 불리웠고, 고종(高宗) 때 국원경(國原京)으로 하였으며, 1550년(명종 5) 유신현(維新縣)으로 부르다가 조선(朝鮮)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56년 시(市)로 승격되었다.
석씨(石氏)는 본래 중국(中國) 무위(武威 : 감숙성 감량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85본(本)이다.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린(石 )은 1174년(고려 명종 4)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 (上將軍)에 오르고 동서북면 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석 린(石 )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6세손 양선(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이태조(李太祖)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고, 양선의 아들 천을(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후슬하에 아들 수명(壽明)과 여명(汝明)을 두어 이들이 충주 석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천을의 맏아들 수명(壽明)은 조선조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으며, 그의 아우 여명(汝明)은 고려 말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3등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하니 태종이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천 군수(泰川郡守)를 지낸 관(瓘 : 한성 판윤 수명의 아들)과 증좌찬성(贈左贊成) 여명(汝明)의 아들 문수(文守 : 자헌대부로 예조 참판을 역임)·문현(文賢 : 이천 현감을 역임)·문성(文成 : 직제학을 역임)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한편 직제학(直提學) 문성(文成)의 맏아들로 세조(世祖) 때 판서(判書)를 지낸 인정(仁正)은 예원군( 蘂原君)에 봉해지고, 차남 의정(義正)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여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한 예정(禮正)·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을 지낸 지정(智正)·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신정(信正)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의정의 아들 사진(斯珍)은 단종(端宗)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령(宜寧) 석천동(石川洞)으로 내려갔다. 그 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옥점(玉 )과 첨정 (僉正)을 역임한 옥진(玉 )이 뛰어났고, 좌부장(左副將) 경하(擎廈)의 아들 지형(之珩)은 인조(仁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거쳐 강화 교수(江華敎授)를 지내고 효종(孝宗) 때 「오행귀감(五行龜鑑)」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쳐 서적과 호피(虎皮)를 하사(下賜)받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청주(淸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국(成國)과 속리산(俗離山) 전투에서 선봉(先峯)으로 싸웠던 창문(昌文)이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충주 석씨의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홍주 석씨(忠州, 洪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8,137가구, 33,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완장성( 長城)·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24대 왕, 재위기간 : 534 ∼ 576)이 소경(소경)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忠州)로 개칭되어 성종(成宗) 때 대원(大原)·예성 (蘂城) 등으로 불리웠고, 고종(高宗) 때 국원경(國原京)으로 하였으며, 1550년(명종 5) 유신현(維新縣)으로 부르다가 조선(朝鮮)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56년 시(市)로 승격되었다.
석씨(石氏)는 본래 중국(中國) 무위(武威 : 감숙성 감량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85본(本)이다.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린(石 )은 1174년(고려 명종 4)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 (上將軍)에 오르고 동서북면 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석 린(石 )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6세손 양선(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이태조(李太祖)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고, 양선의 아들 천을(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후슬하에 아들 수명(壽明)과 여명(汝明)을 두어 이들이 충주 석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천을의 맏아들 수명(壽明)은 조선조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으며, 그의 아우 여명(汝明)은 고려 말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3등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하니 태종이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천 군수(泰川郡守)를 지낸 관(瓘 : 한성 판윤 수명의 아들)과 증좌찬성(贈左贊成) 여명(汝明)의 아들 문수(文守 : 자헌대부로 예조 참판을 역임)·문현(文賢 : 이천 현감을 역임)·문성(文成 : 직제학을 역임)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한편 직제학(直提學) 문성(文成)의 맏아들로 세조(世祖) 때 판서(判書)를 지낸 인정(仁正)은 예원군( 蘂原君)에 봉해지고, 차남 의정(義正)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여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한 예정(禮正)·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을 지낸 지정(智正)·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신정(信正)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의정의 아들 사진(斯珍)은 단종(端宗)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령(宜寧) 석천동(石川洞)으로 내려갔다. 그 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옥점(玉 )과 첨정 (僉正)을 역임한 옥진(玉 )이 뛰어났고, 좌부장(左副將) 경하(擎廈)의 아들 지형(之珩)은 인조(仁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거쳐 강화 교수(江華敎授)를 지내고 효종(孝宗) 때 「오행귀감(五行龜鑑)」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쳐 서적과 호피(虎皮)를 하사(下賜)받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청주(淸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국(成國)과 속리산(俗離山) 전투에서 선봉(先峯)으로 싸웠던 창문(昌文)이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충주 석씨의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홍주 석씨(忠州, 洪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8,137가구, 33,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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