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금성 범씨(錦城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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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범씨(錦城范氏)
금성(錦城)은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을 통일신라 시대에 경덕왕(景德王)이 금성(錦城:일명 금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1011년(고려 현종2) 거란(거丹)의 2차 침입 때 현종(顯宗)이 이 곳에 피난 갔다가 돌아와 목(牧)으로 승격되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1981년 7월에 영산읍과 나주읍을 통합하여 금성시(錦城市)로 승격되었다.
범씨(范氏)는 중국 고평(高平:산서성 기영도에 속해있는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원(元)나라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낸 범승조(范承祖)가 고려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나주(羅州)에 터를 잡은 것이 우리나라 범씨의 시초가 된다.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학자로서 고려에 올 때 북송(北宋)의 대학자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백가예설(百家禮說)' 등 많은 문헌을 가지고 들어와 널리 보급했으며, 그의 아들 유수가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을 세워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금성으로 삼게 되었다. 범씨의 본관(本貫)은 금성(錦城), 광주(光州), 안주(安州) 등 3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재는 금성 범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호남(湖南)의 선비 가문으로 일컬어진 금성 범씨는 시조의 증손(曾孫) 세동(世東)이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개성(開城) 근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며, 태종(太宗)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하여 뜻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나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동의 6세손 가용(可容), 가종(可鐘) 형제와 전창(傳昌), 천배(天培) 부자(父子)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학문과 고명한 인품으로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천배(天培)의 손자 기생(起生:만암 홍로의 맏아들)과 기봉(起鳳) 형제는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어 충절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외 후손 경문(慶文)이 영조(英祖) 때 17세로 <사문(辭文)>을 지었고, 순조(純祖) 때는 '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集)'을 저술하여 문벌가문(文伐家門)의 전통을 지켰으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양성당(養性堂) 윤덕(潤德)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크게 명성을 떨쳤다.근대에 와서 금성 범씨는 광주(光州)를 비롯한 전라도와 서울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1960년 국제조사 당시 1,373명, 1975년에는 243가구로 집계되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714가구, 3,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성(錦城)은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을 통일신라 시대에 경덕왕(景德王)이 금성(錦城:일명 금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1011년(고려 현종2) 거란(거丹)의 2차 침입 때 현종(顯宗)이 이 곳에 피난 갔다가 돌아와 목(牧)으로 승격되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1981년 7월에 영산읍과 나주읍을 통합하여 금성시(錦城市)로 승격되었다.
범씨(范氏)는 중국 고평(高平:산서성 기영도에 속해있는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원(元)나라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낸 범승조(范承祖)가 고려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나주(羅州)에 터를 잡은 것이 우리나라 범씨의 시초가 된다.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학자로서 고려에 올 때 북송(北宋)의 대학자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백가예설(百家禮說)' 등 많은 문헌을 가지고 들어와 널리 보급했으며, 그의 아들 유수가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을 세워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금성으로 삼게 되었다. 범씨의 본관(本貫)은 금성(錦城), 광주(光州), 안주(安州) 등 3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재는 금성 범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호남(湖南)의 선비 가문으로 일컬어진 금성 범씨는 시조의 증손(曾孫) 세동(世東)이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개성(開城) 근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며, 태종(太宗)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하여 뜻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나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동의 6세손 가용(可容), 가종(可鐘) 형제와 전창(傳昌), 천배(天培) 부자(父子)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학문과 고명한 인품으로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천배(天培)의 손자 기생(起生:만암 홍로의 맏아들)과 기봉(起鳳) 형제는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어 충절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외 후손 경문(慶文)이 영조(英祖) 때 17세로 <사문(辭文)>을 지었고, 순조(純祖) 때는 '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集)'을 저술하여 문벌가문(文伐家門)의 전통을 지켰으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양성당(養性堂) 윤덕(潤德)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크게 명성을 떨쳤다.근대에 와서 금성 범씨는 광주(光州)를 비롯한 전라도와 서울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1960년 국제조사 당시 1,373명, 1975년에는 243가구로 집계되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714가구, 3,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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