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백씨(水原白氏)
수원 백씨(水原白氏)
수원(水原)은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 때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시대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으며, 고려 때 인주(仁州), 수주(水州)를 거쳐 1301년(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로 개칭되었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한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水原市)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은 화성군(華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백씨(白氏)는 고대 황제 헌원(軒轅)의 후예로 중국 풍익(馮翊)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씨의 연원(淵源)은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황제의 16세손 백을병(白乙丙:진나라 때 부를 지냄)의 후손 백우경(白宇經)이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여 당(唐)나라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자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우경(宇經)이 그 곳에다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고, 만세암을 찾아온 선덕왕(宣德王)은 정혜사(淨惠寺)로 명(改名)하고 영월당이 판에 어필(御筆)로 '경춘(景春)'이라 쓰고 아울러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함께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경덕왕(景德王:신라 제54대왕,재위기간:917∼924)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창직(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기일세(起一世)하며, 창직의 증손 휘(揮)가 고려 목종(穆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9세손 천장(天藏:임평부원군 원정의 아들)은 원(元)나라에서 이부 상서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충선왕(忠宣王) 때 수성백(城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게 되었다고 한다. 백씨(白氏)의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을 비롯하여 180여 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수원 백씨의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분명하여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 발간 당시 각 파의 대표들이 회합하여 관향(貫鄕)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역사상 학문과 도덕의 문으로 지휘를 굳혀온 백씨는 중시조 창직(昌稷)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창직의 증손 휘(揮:광평시랑 길의 손자)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육조(六朝)에 걸쳐 주요 관을 지내며 나라의 모든 문장(文章)을 지어낸 맏아들 간미(簡美)는 만년에 영해(寧海)로 낙향(落鄕)한 후 수차에 걸친 문종(文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우 행미(行美)는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역임했고, 막내 가미(可美)는 판삼사(判三司)를 거쳐 태자 사부(太子師傅)에 올랐다. 한편 대장군(大將軍) 간미(簡美)의 아들 5형제 중 세째 무신(武臣:선무 장군)의아들 후재(厚載)가 소용장군(昭勇將軍)으로 도통사(都統使)를 지내고, 그의 아들 유정(有貞)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손자 대민(大旻)은 문하성사(文下省事)를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벼슬을 지내 한때 후손들이 가림 백씨(嘉林白氏)로 칭관(稱貫)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조에서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은 문간공(文簡公) 문절(文節)의 아들 이정(이正)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거봉(巨峯)인 안 향(安 珦)의 고제(高弟)였던 그는 충렬왕(忠烈王)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10년간 머무르면서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의 꽃을 피웠으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그의 학맥을 잇게 하여 조선 유학(儒學)의 기틀을 마련했다.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던 장(莊:문하시중 경신의 7세손)은 공민왕(恭愍王) 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처자를 거느리고 원주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태종(太宗)이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문간공(文簡公) 양신(良臣)의 현손 문보(文寶:중랑장 견의 아들)는 강경한 배불론자(排佛論者)로 유명했으며, 공민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사부(師傅)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봉해졌고 문집(文集)으로 '담암일집(淡庵逸集)'을 남겼다. 조선 중기 중종(中宗)과 선조(宣祖) 양대에 걸쳐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던 인걸(仁傑)은 돐도 지나기 전에 왕자 사부(王子師傅)였던 아버지 익견(益堅)을 잃고 연산군의 수탈에 의해 집마저 강제 철거당해 편모가 셋방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어머니가 자는 것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에 어머니는 늘 불을 켜놓고 자는체 함으로써 그를 먼저 자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537년(중중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며 왕실외척(王室外戚)의 세도가(勢道家)인 심의겸(沈義謙: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의 세도에 줄곧 저항적이었으며, 대윤(大尹)과 소윤(少尹) 등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았던 기개 높은 인품으로 풍파 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는 허 자(許 磁:명종 때 이조 판서에 오름)와 이웃에 살면서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워낙 가난하게 살았기로 허 자가 별다른 음식이 있으면 꼭 나누어 주었다. 소윤(少尹)의 혁명인 을사사화(乙巳士禍: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윤 임 일파를 몰아내어 사림의 큰 화를 입힌 사건)의 전야(前夜)에 허 자가 인걸을 초청하여 저녁상을 차려놓고 거사에 가담할 것을 권고하자 끝내 거절하니 허자가 말하길 "내일이면 자네가 죽을 것이라"하였다.이 말에도 인걸은 태연하게 인사하고 나오는데 허자가 인걸의 손을 잡으며 "내일은, 자네는 군자(君子)가 되고 나는 소인(小人)이 되는 날이로다" 하며 친구의 위대한 인격을 자신에 대비시켰다. 특히 그는 1576년(선조 원년)에 양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집집마다 축수를 하며 노래 부르기를, <흰 눈의 흰 빛은 임과 같이 희도다(白雲之白與君同白) 마음 속으로 사랑하노니 어찌 걸이 아닐소냐(心乎愛矣胡不爲傑)>하였고, 그가 떠난 뒤에는 관가의 현판에 이 글을 새겨 두었다고 한다. 일찌기 인걸과 함께 학문을 토론했던 율곡(栗谷) 이 이(李 珥)는 "나이가 80세인데도 학문연구에 애쓰며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 이는 오직 이 분뿐이다"라고 하였으며, 1578년(선조 11)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군비강화를 주장했으며,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83세로 일생을 마치니 송강(松江) 정 철(鄭 澈)이 만사(挽詞)를 짓기를 외로운 충성은 일대에 둘도 없는 선비요(孤忠一代無雙士)헌납으로 밤이라도 혼자서 말씀을 올리던 사이였다(獻納三更獨啓人)
산악의 정기로 이 노인이 태어났으니(山岳精生此老)하늘에 돌아가서도 응당 빛나는 별이 되리로다(歸天應復作星辰) 인걸의 형 인호(仁豪)도 성품이 순후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국화를 좋아하고 탈속적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인호의 아들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모함을 받아 화를 당한 유양(惟讓)이며, 인걸의 아들 유함(惟咸)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에 올랐으나 격렬한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인(仁)에 내려와 야인생활을 하며 시폐(時弊)가 있을 때마다 상소(上疏)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임진왜란을 당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 직제학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정국공신(靖國功臣)로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던 수장(壽長)의 현손 민수(民秀)는 경(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義兵)을 모아 장수(長水) 지역에서 적을 대파시켰으며, 정유재란 때도 문위세와 합세하여 용담(龍潭)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한편 세인(世仁)의 아들 광홍(光弘)이 명종조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를 사직하고 돌아올 때 우리 말로 쓴 가사(歌辭) <관서별곡(關西別曲)>으로 유명하며, 그의아우 광훈(光勳)은 시서(詩書)에 현달하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고곡 이 달(李 達)과 함께 <삼당(三唐)>으로 일컬어졌다.
그외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순절한 광언(光彦)과 초선장사(秒選壯士)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로 잡혀있던 수천명의 동포를 구한 광조(光祖)가 뛰어났으며, 광훈의 아들 진남(振南)은 시부(詩賦)와 글씨로 명성을 떨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義州)의 남성장(南城將)이 되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웠던 원의(元義)와 함께 명문의 가통을 지켰다.
한말에 와서는 일본세력 침투에 반대했던 낙관(樂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義擧)를 결의했던 홍인(弘寅),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과 원수부군무국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을 지낸 성기(性基) 등이 유명했으며, 남규(南圭)는 한일합방이 되자 노백린(盧伯麟), 안중근(安重根) 등 23명의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하였고, 낙귀(洛龜)는 광양(光陽)과 하동(河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천(順天)을 점령했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운각(雲閣)은 3·1운동 때 고향인 정주(定州)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고, 일규(一圭)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창립하고 '국민보(國民報)' 주필이 되어 언론을 통한 한국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외 종렬(鍾烈)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소대장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했던 삼규(三圭)는 항일투쟁에 몸바쳤던 영촌(永村), 일진(日鎭), 남준(南俊), 광운(狂雲), 남채(南埰), 관수(寬洙), 인해(仁海) 등과 함께 의절(義節)의 가맥을 이어 명문의 수원 백씨(水原白氏)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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