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신창 맹씨(新昌孟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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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 맹씨(新昌孟氏)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 王)이 기량현(祁糧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高麗) 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히여 1018 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있다.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平陵:협서성 관중 도)에 연원(淵源)을 두고,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號)가 맹손(孟孫)이라서 맹(孟) 자(字)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아성(亞聖) 맹자(孟子)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기원전 372년 경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 있었던 추(趨)에서 태어난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발전시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제(齊), 양(梁) 등의 제후(諸侯)에게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한 인의(仁義)의 정치를 권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와 토론하였고,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으로 숭앙(崇仰)되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날렸다. 어릴 때 현모(賢母) 장씨의 밑에서 자라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아들의 면학을 위하여 세 번을 이사함)>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으며 짜던 베틀의 씨 날을 칼로 자름)>의 유명한 고사(故事)를 남겼다. 우리나라 맹씨(孟氏)는 맹자(孟子)의 40세손 맹승훈(孟承訓)이 888년(신라 진성왕 2) 당(唐)나라 한림원(翰林院)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경전(經典)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 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맹씨의 본관(本貫)은 신창(新昌)을 비롯하여 온양(溫陽), 파주(坡州), 양주(楊州), 청주(淸州), 안읍(安邑:옥천지방), 천안(天安), 전주(全州) 등 3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거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 전서(禮部典書)에 오른 맹 의(孟義)를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儀)는 역신 조 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충선왕(忠宣王)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신창(新昌)으로 하게 되었다. 신창 맹씨의 역대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의(儀)의 아들 유(裕)가 고려(高麗)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역임했고, 고려가 망하자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절(忠節)을 지켰다.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 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내며 길 재(吉再),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고, 공양왕(恭讓王) 때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나 어지러운 정계(政界)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온양(溫陽)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隱居)하면서 호(號)를 동포( 東浦)라 하였다.
희도(希道)의 아들이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상(名相)으로 손꼽히는 고불(古佛) 사성(思誠)이다. 고려 말의 명장 최 영(崔瑩)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성(天性)이 효도하고 청백(淸白)하여 정승의 벼슬 에서도 권세(權勢)를 철저히 배제했고, 청결하고 간고(簡古)하여 늘 상민차림으로 소(牛)를 타고 나들이를 하여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오가는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한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더니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그가 하인더러 이르기를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 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세종조상신편(世宗朝相臣編)>에 보면 그에 대한 유명한 <공당문답(公堂問答)>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가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렸더니, 행차를 성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그는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 시험에 응하러 가는 자였다. 그 선비는 맹정승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맹정승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다시 "무슨 벼슬인공"하니 "녹사 시험보러 간당" 하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하니 그 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후일 맹정승이 의정부에 앉아있는데 그 사람이 시험을 치러 들어왔다.
그 사람은 눈앞의 정승이 전날에 장기를 두며 농담하던 그 노인인줄 알지 못했으나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서 깨닫고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하니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김으로 맹정승이 그 까닭을 애기하자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고, 맹정승의 추천으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맹정승은 죽어서 곁에 남긴 것이 한 자루의 피리뿐이었다고 하며, 유명한 황 희(黃喜) 정승과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여 후세의 신망받는 명상으로 일컬어졌다.
사성(思誠)의 아들 귀미(歸美)와 득미(得美)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석흠(碩欽)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고, 후손 세형(世衡)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1623년(인조 1)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 선산(善山), 장흥(長興)의 부사(府使)를 거쳐 6차례나 시정(侍正)을 지냈다.
그외 세형의 아들 주서(胄瑞)가 황해(黃海)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주서의 아들 만택(萬澤)은 관찰사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지리(地理)에 글씨에 능했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의병(義兵)을 모아 동학난(東學亂)으로 혼란해진 치안(治安)을 유지하고,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순절한 영재(英在)가 유명했다.
신창 맹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11,000명, 1975년에는 2,928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926가구, 16,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 王)이 기량현(祁糧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高麗) 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히여 1018 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있다.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平陵:협서성 관중 도)에 연원(淵源)을 두고,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號)가 맹손(孟孫)이라서 맹(孟) 자(字)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아성(亞聖) 맹자(孟子)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기원전 372년 경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 있었던 추(趨)에서 태어난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발전시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제(齊), 양(梁) 등의 제후(諸侯)에게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한 인의(仁義)의 정치를 권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와 토론하였고,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으로 숭앙(崇仰)되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날렸다. 어릴 때 현모(賢母) 장씨의 밑에서 자라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아들의 면학을 위하여 세 번을 이사함)>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으며 짜던 베틀의 씨 날을 칼로 자름)>의 유명한 고사(故事)를 남겼다. 우리나라 맹씨(孟氏)는 맹자(孟子)의 40세손 맹승훈(孟承訓)이 888년(신라 진성왕 2) 당(唐)나라 한림원(翰林院)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경전(經典)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 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맹씨의 본관(本貫)은 신창(新昌)을 비롯하여 온양(溫陽), 파주(坡州), 양주(楊州), 청주(淸州), 안읍(安邑:옥천지방), 천안(天安), 전주(全州) 등 3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거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 전서(禮部典書)에 오른 맹 의(孟義)를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儀)는 역신 조 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충선왕(忠宣王)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신창(新昌)으로 하게 되었다. 신창 맹씨의 역대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의(儀)의 아들 유(裕)가 고려(高麗)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역임했고, 고려가 망하자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절(忠節)을 지켰다.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 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내며 길 재(吉再),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고, 공양왕(恭讓王) 때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나 어지러운 정계(政界)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온양(溫陽)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隱居)하면서 호(號)를 동포( 東浦)라 하였다.
희도(希道)의 아들이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상(名相)으로 손꼽히는 고불(古佛) 사성(思誠)이다. 고려 말의 명장 최 영(崔瑩)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성(天性)이 효도하고 청백(淸白)하여 정승의 벼슬 에서도 권세(權勢)를 철저히 배제했고, 청결하고 간고(簡古)하여 늘 상민차림으로 소(牛)를 타고 나들이를 하여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오가는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한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더니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그가 하인더러 이르기를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 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세종조상신편(世宗朝相臣編)>에 보면 그에 대한 유명한 <공당문답(公堂問答)>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가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렸더니, 행차를 성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그는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 시험에 응하러 가는 자였다. 그 선비는 맹정승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맹정승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다시 "무슨 벼슬인공"하니 "녹사 시험보러 간당" 하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하니 그 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후일 맹정승이 의정부에 앉아있는데 그 사람이 시험을 치러 들어왔다.
그 사람은 눈앞의 정승이 전날에 장기를 두며 농담하던 그 노인인줄 알지 못했으나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서 깨닫고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하니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김으로 맹정승이 그 까닭을 애기하자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고, 맹정승의 추천으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맹정승은 죽어서 곁에 남긴 것이 한 자루의 피리뿐이었다고 하며, 유명한 황 희(黃喜) 정승과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여 후세의 신망받는 명상으로 일컬어졌다.
사성(思誠)의 아들 귀미(歸美)와 득미(得美)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석흠(碩欽)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고, 후손 세형(世衡)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1623년(인조 1)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 선산(善山), 장흥(長興)의 부사(府使)를 거쳐 6차례나 시정(侍正)을 지냈다.
그외 세형의 아들 주서(胄瑞)가 황해(黃海)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주서의 아들 만택(萬澤)은 관찰사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지리(地理)에 글씨에 능했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의병(義兵)을 모아 동학난(東學亂)으로 혼란해진 치안(治安)을 유지하고,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순절한 영재(英在)가 유명했다.
신창 맹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11,000명, 1975년에는 2,928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926가구, 16,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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