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목천,장흥 마씨(木川,長興馬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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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씨(馬氏)는 삼한시대(三韓時代) 부족국가에서 발원(發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土着姓氏)로서 마한(馬韓)의 첫 군주(君 主)인 마 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는 백제(百濟) 건국의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보(左輔)의 벼슬을 역임한 마 려(馬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 수 없으므로 마육침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보(系譜)를 잇고 있다. 그는 서기 660년(백제 의자 왕 20, 신라 무열왕 7)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신라(新羅)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百濟)가 멸망하자 군사(軍士)를 일으켜 옛 목지국(目支國)의 성거산(聖居山: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復興戰)을 도모했던 장군(將軍)이다. 그후 마씨는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이 고려 문종(文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현(鉉:예빈전 태학사를 역임)이 목천파(木川派)로, 둘째 혁인(爀仁:선종 때 개성 윤을 지냄)은 장흥파(長興派)로 분관(分貫)하여 마씨(馬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목천(木川)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와서 목주(木 州)로 고쳤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으로 개칭하여 1913년 천원군(天原郡)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貫祖)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복주 (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가는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보리일등공신(輔理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목안군(木安君)에 봉해졌 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新安君)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송도(松都) 선죽교(善竹橋) 옆에 살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던 희경(羲慶: 경주의 9세손)은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선조(宣祖) 때 이율곡(李栗谷)의 천거로 북부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易學)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이 서경 유수(西京留守) 윤근수(尹根壽)는 송도를 지날 때 그를 찾아와 <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고 그의 깊이 있는 학문과 고결한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효렴(孝廉)으로 극찬을 받았던 희상(羲祥: 희경의 형)의 손자(孫子) 상원(尙遠)은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컫어진 차천로(車天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다. 희경의 손자 사종(嗣宗:덕룡의 맏아들)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에게 글을 배웠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서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문학으로는 세상에 사종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의 아유(雅儒)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며,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오륜통의(五倫通義)와 사례비요(四禮備要)를 저술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예법을 정립(定立), 윤리도덕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인호(仁浩:사종의 종숙)와 영조(英祖) 때 직강(直講)을 지낸 지휘(之徽)가 학유(學諭)를 역임한 맹하(孟河)와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려 선종(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남도 남쪽 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오차현(烏次縣)을 신라가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 때 영암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에 이어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조에 와서 다시 장흥부로 개칭,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장흥군이 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貫祖)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오르고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熙願)은 희종(熙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지백(智伯:혁인의 7세손)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태종(太宗)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司馬奉侍卿)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조종(祖宗)이 쌓은 수령산성(遂寧山城)을 보수하여왜구(倭寇)를 막는 한편 후학(後學)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谷城) 당상촌(堂上村)으로 이거(移居)하였고, 만년에 수령군(遂寧君)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를 두 번이나 역임하여 당시 해안(海岸)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항구적(恒久的)인 왜적방어책 (倭賊防禦策)으로 광주(光州)에 있던 병마본영(兵馬本營)을 도강(道康:강진)의 수인산(修因山)으로 옮겨 장수대(將帥臺)를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니, 그 후부터는 왜구가 접근하지 못했다.
1419년(세종 원년) 북방육진(北方六鎭) 개척(開拓)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여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對備)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都城修築都監提調)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城郭)을 완축(完築)하는데 공을 세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승(勝)은 세종 때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와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며 청백(淸白)한 관리로 유명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생동안 문의(文義) 와 충절(忠節)을 지켰다.
승의 아우 전의 6세손 하수(河秀)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비 아들과 함께 향선(鄕船) 10 여 척으로 이순신을 도우고 특전대를 조직하여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려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반(珊)의 6세손 응방(應房)은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동생 응허(應虛:병마도위), 응정(應井) 등과 남원성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한편 폭군 연산군(燕山君)의 불의(不義)와 패륜(悖倫)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 윤(倫 ), 응훈(應勳), 운종(蕓宗), 창종(昌宗) 5종형제(五從兄弟)가 모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 진주(晋州)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南江)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忠義)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송도(松都) 선죽교(善竹橋) 옆에 살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던 희경(羲慶: 경주의 9세손)은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선조(宣祖) 때 이율곡(李栗谷)의 천거로 북부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易學)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이 서경 유수(西京留守) 윤근수(尹根壽)는 송도를 지날 때 그를 찾아와 <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고 그의 깊이 있는 학문과 고결한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효렴(孝廉)으로 극찬을 받았던 희상(羲祥: 희경의 형)의 손자(孫子) 상원(尙遠)은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컫어진 차천로(車天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다. 희경의 손자 사종(嗣宗:덕룡의 맏아들)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에게 글을 배웠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서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문학으로는 세상에 사종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의 아유(雅儒)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며,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오륜통의(五倫通義)와 사례비요(四禮備要)를 저술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예법을 정립(定立), 윤리도덕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인호(仁浩:사종의 종숙)와 영조(英祖) 때 직강(直講)을 지낸 지휘(之徽)가 학유(學諭)를 역임한 맹하(孟河)와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려 선종(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남도 남쪽 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오차현(烏次縣)을 신라가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 때 영암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에 이어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조에 와서 다시 장흥부로 개칭,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장흥군이 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貫祖)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오르고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熙願)은 희종(熙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지백(智伯:혁인의 7세손)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태종(太宗)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司馬奉侍卿)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조종(祖宗)이 쌓은 수령산성(遂寧山城)을 보수하여왜구(倭寇)를 막는 한편 후학(後學)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谷城) 당상촌(堂上村)으로 이거(移居)하였고, 만년에 수령군(遂寧君)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를 두 번이나 역임하여 당시 해안(海岸)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항구적(恒久的)인 왜적방어책 (倭賊防禦策)으로 광주(光州)에 있던 병마본영(兵馬本營)을 도강(道康:강진)의 수인산(修因山)으로 옮겨 장수대(將帥臺)를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니, 그 후부터는 왜구가 접근하지 못했다.
1419년(세종 원년) 북방육진(北方六鎭) 개척(開拓)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여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對備)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都城修築都監提調)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城郭)을 완축(完築)하는데 공을 세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승(勝)은 세종 때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와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며 청백(淸白)한 관리로 유명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생동안 문의(文義) 와 충절(忠節)을 지켰다.
승의 아우 전의 6세손 하수(河秀)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비 아들과 함께 향선(鄕船) 10 여 척으로 이순신을 도우고 특전대를 조직하여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려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반(珊)의 6세손 응방(應房)은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동생 응허(應虛:병마도위), 응정(應井) 등과 남원성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한편 폭군 연산군(燕山君)의 불의(不義)와 패륜(悖倫)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 윤(倫 ), 응훈(應勳), 운종(蕓宗), 창종(昌宗) 5종형제(五從兄弟)가 모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 진주(晋州)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南江)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忠義)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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