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안동 노씨(安東盧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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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노씨(安東盧氏)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고,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고타야군(古陀耶郡)·고창군(高唱郡)으로 불리우다가 고려(考慮)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白濟) 견 훤(甄萱)과 싸워 전공을 세우자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詠歌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여러 변천을 거쳐 1914년 안동·예안(禮安)을 통합하여 안동군이라 하였다.
안동 노씨(安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다섯째 아들 노 만(盧 滿)이 고려조(高麗朝)에 출사하여 안동백(安東伯)에 봉해졌고, 후손(後孫) 우(祐)는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안동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우(祐)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안동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안동 노씨는 일세조 우(祐)의 손자 영길(永吉)이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안동부원군(安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숭(崇)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원성(元成)은 도원수(都元帥)를, 셋째 원신(元信)은 감무(監務)를, 막내 원명(原明)은 사재감정(司宰監正)과 전서(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크게 중흥시켰다. 한편 원명(元明)의 맏아들 담(淡)이 조선조(朝鮮朝)에서 의금부(義禁府)의 으뜸벼슬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역임했고 그이 아들 윤적(允迪)은 판서(判書)를, 손자 경( )과 수(秀)는 참판(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일으켰으며, 원명의 둘째 아들 징(澄) 판사평부사(判司 平府事)를, 셋째 아들 결(潔)은 도사(都事), 막내 담(湛)은 대언(代言)을 각각 지냈다. 그외 담(湛)의 아들 윤정(允正)이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고 손자 인석(仁錫)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필(允弼)의 아들 우현(祐賢)은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 몽재(夢宰), 목사(牧師) 세영(世英), 한림학사(翰林學士) 덕린(德麟), 부호군(副護軍) 승주(承柱)와 함께 안동 노씨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 노씨(安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020가구, 4,5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고,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고타야군(古陀耶郡)·고창군(高唱郡)으로 불리우다가 고려(考慮)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白濟) 견 훤(甄萱)과 싸워 전공을 세우자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詠歌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여러 변천을 거쳐 1914년 안동·예안(禮安)을 통합하여 안동군이라 하였다.
안동 노씨(安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다섯째 아들 노 만(盧 滿)이 고려조(高麗朝)에 출사하여 안동백(安東伯)에 봉해졌고, 후손(後孫) 우(祐)는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안동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우(祐)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안동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안동 노씨는 일세조 우(祐)의 손자 영길(永吉)이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안동부원군(安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숭(崇)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원성(元成)은 도원수(都元帥)를, 셋째 원신(元信)은 감무(監務)를, 막내 원명(原明)은 사재감정(司宰監正)과 전서(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크게 중흥시켰다. 한편 원명(元明)의 맏아들 담(淡)이 조선조(朝鮮朝)에서 의금부(義禁府)의 으뜸벼슬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역임했고 그이 아들 윤적(允迪)은 판서(判書)를, 손자 경( )과 수(秀)는 참판(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일으켰으며, 원명의 둘째 아들 징(澄) 판사평부사(判司 平府事)를, 셋째 아들 결(潔)은 도사(都事), 막내 담(湛)은 대언(代言)을 각각 지냈다. 그외 담(湛)의 아들 윤정(允正)이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고 손자 인석(仁錫)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필(允弼)의 아들 우현(祐賢)은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 몽재(夢宰), 목사(牧師) 세영(世英), 한림학사(翰林學士) 덕린(德麟), 부호군(副護軍) 승주(承柱)와 함께 안동 노씨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 노씨(安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020가구, 4,5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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