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개성 내씨(開城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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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려(高麗)의 수도(首都)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었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내씨(乃氏)의 선계(先系)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신라(新羅) 소지왕(炤知王 : 제 21 대 왕, 재위기간 : 479 ~ 500)의 비(妃)인 선혜부인(善兮夫人)이 이벌찬(伊伐飡)의 내 숙(乃 宿)의 딸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高麗史)」에는 충혜왕(忠惠王 : 제 28대 왕, 재위기간 : 1330 ~ 1332, 1339 ~ 1344)의 사부(師傅 : 고려 때 세자와 세손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정1품 품계)가 내 원(乃 圓)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된 씨족(氏族)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내씨(乃氏)와의 관계는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내씨(乃氏)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망국의 한을 달래며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 왕씨(高麗王氏) 일족을 숙청(肅淸)할 때 화(禍)를 면하기 위하여 내씨(乃氏)로 변성(變姓)하고 관향(貫鄕)을 개성(開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병란(兵亂) 등으로 보첩(譜牒)과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여 조선(朝鮮) 현종 조(顯宗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내득균(乃得均 : 일명 득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 득균(得均)의 아들 용익(鎔翊)이 1655년(효종 6)에 출생하여 숙종(肅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장호(章澔)는 영조(英祖) 때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가 현달(賢達)하여 개성 내씨의 3 대 산맥(山脈)을 이루었다. 개성 내씨는 장호의 아들 3 형제 대(代)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호의 아들 3 형제 중 장남(長男) 정원(楨元) 은 선조의 대(代)를 이어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차남 정빈(楨彬)은 1777년(정조 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막내 정성(楨成)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그외 인물로는 용익(鎔翊)의 증손(曾孫) 홍섭(弘燮)·경섭(慶燮)·몽섭(夢燮)이 모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고,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오른 재욱(在郁)·재한(在漢)·재렴(在廉) 등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학륜(學崙 : 재한의 손자)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근래에 와서 개성 내씨는 전국에 산거(散居)하고 있는 성손(姓孫)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후손 성규(星圭)를 비롯한 문중(門中) 대표들이 뜻을 모아 족보 편찬(族譜編纂)을 추진 중에 있으며, 1988년 4월 5일에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오도 리(京畿道坡州郡交河面吾道里)에 위치한 일세조(一世祖)의 묘역을 단장하고 묘비(墓碑)를 건립하였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남 천원(忠南天原), 황해도 봉산(黃海道鳳山), 함북 청진(咸北淸津) 등지에 85가구 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71 가구, 308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씨(乃氏)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망국의 한을 달래며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 왕씨(高麗王氏) 일족을 숙청(肅淸)할 때 화(禍)를 면하기 위하여 내씨(乃氏)로 변성(變姓)하고 관향(貫鄕)을 개성(開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병란(兵亂) 등으로 보첩(譜牒)과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여 조선(朝鮮) 현종 조(顯宗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내득균(乃得均 : 일명 득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 득균(得均)의 아들 용익(鎔翊)이 1655년(효종 6)에 출생하여 숙종(肅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장호(章澔)는 영조(英祖) 때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가 현달(賢達)하여 개성 내씨의 3 대 산맥(山脈)을 이루었다. 개성 내씨는 장호의 아들 3 형제 대(代)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호의 아들 3 형제 중 장남(長男) 정원(楨元) 은 선조의 대(代)를 이어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차남 정빈(楨彬)은 1777년(정조 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막내 정성(楨成)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그외 인물로는 용익(鎔翊)의 증손(曾孫) 홍섭(弘燮)·경섭(慶燮)·몽섭(夢燮)이 모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고,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오른 재욱(在郁)·재한(在漢)·재렴(在廉) 등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학륜(學崙 : 재한의 손자)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근래에 와서 개성 내씨는 전국에 산거(散居)하고 있는 성손(姓孫)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후손 성규(星圭)를 비롯한 문중(門中) 대표들이 뜻을 모아 족보 편찬(族譜編纂)을 추진 중에 있으며, 1988년 4월 5일에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오도 리(京畿道坡州郡交河面吾道里)에 위치한 일세조(一世祖)의 묘역을 단장하고 묘비(墓碑)를 건립하였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남 천원(忠南天原), 황해도 봉산(黃海道鳳山), 함북 청진(咸北淸津) 등지에 85가구 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71 가구, 308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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