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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례 제사(祭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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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1:12 조회 2,05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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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제례(祭澧)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데 대한 여러가지 예(禮)를 일컫는 말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조상없는 자손은 있을 수 없다.  나를 낳아 길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선조에 대하여 인륜(人倫)의 도의(道義)로 정성껏 제사를 모시는 것은 자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 아무리 바쁜 생활에 쫓기는 현대인이지만 一年에 한번 돌아오는 조상의 기일(忌日)만이라도 보은감사(報恩感謝)의 마음을 가지고 예를 지킴이 옳다고 본다.

  우리의 제례범절(祭禮凡節)이 그렇게 난해(難解)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은 그만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제례를 등한히하고 조상에 대한 자손의 도리를 저버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제사를 모실 때는 많은 음식과 제수를 차려 놓아야 만 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사고(思考)로 모든 기제사 봉행은 본인의 형편에 따라 정갈하게 진설(제수를 상차림에 맞춰 차리는 것)하고 정성껏 지내면 된다.

  기제(忌祭: 忌日에 지내는 祭祀)의  봉사(奉祀)대상은  제주(祭主)로부터  五대조 까지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풍속이었으나  옛날  권문명가(權門名家)들은 八대조 봉사(奉祀)까지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정의례준칙(一八조)에 의하면  제주로부터 二대조 까지만 기제를 지낼 수 있다.  제사를 드리는 시간은 돌아가신 前날  자정이 지난 새벽 一시경 조용한 때에 엄숙히 드리는 것이 좋다.

  제사는 보통  제주(祭主)의 가정에서 드리며,  대청이나 방 한 곳에 제상을 차린다. 그러나  특별한 지위나  사회적인  기제(忌祭)일 경우에는 다른 장소를 마련하여 행사(行祀)한다.

  제주(祭主)는  고인의 장자(長子)나 또는 장손(長孫)이 되며,  장자나 장손이 없을 때는 차자(次子) 또는 차손(次孫)이 제사를 주관한다.

  상처(喪妻)를 한 경우에는  남편이나 그의 자손이 하고,  자손이 없이 상부(喪夫)한 경우는 아내가 제주가 된다. 참사자(慘祀者)는 고인의 직계 자손으로 하되 가까운 친척이나 친지도 참석할 수 있다. 부득이  참사할 수 없는 자손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묵념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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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씨(雲氏)
    운씨(雲氏)

     운씨(雲氏)는 중국 낭야(中國郎 : 지금의 산동성 기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수양제(隋煬帝) 때 사람인 운정흥(雲定興)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운씨(雲氏)의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와 장흥(長興)을 비롯 함흥(咸興) 등 3본(本)이 문헌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이 미상(未詳)하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강화군에 살던 운송복(雲松福)이란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의 조상이 2백 년 전에 육지(陸地)로부터 이주(移住)해 와서 처음 강화도에 정착(定着) 했을 때 벽공(碧空)에 백운(白雲)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성(姓)을 운(雲)이라 했다고 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운씨(雲氏)는 남한에 총 25가구, 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63
  • 수원水原 김씨 金氏
    수원水原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62
  • 목천,장흥 마씨(木川,長興馬氏)
    마씨(馬氏)는 삼한시대(三韓時代) 부족국가에서 발원(發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土着姓氏)로서 마한(馬韓)의 첫 군주(君 主)인 마 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는 백제(百濟) 건국의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보(左輔)의 벼슬을 역임한 마 려(馬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 수 없으므로 마육침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보(系譜)를 잇고 있다. 그는 서기 660년(백제 의자 왕 20, 신라 무열왕 7)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신라(新羅)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百濟)가 멸망하자 군사(軍士)를 일으켜 옛 목지국(目支國)의 성거산(聖居山: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復興戰)을 도모했던 장군(將軍)이다. 그후 마씨는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이 고려 문종(文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현(鉉:예빈전 태학사를 역임)이 목천파(木川派)로, 둘째 혁인(爀仁:선종 때 개성 윤을 지냄)은 장흥파(長興派)로 분관(分貫)하여 마씨(馬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목천(木川)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와서 목주(木 州)로 고쳤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으로 개칭하여 1913년 천원군(天原郡)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貫祖)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복주 (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가는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보리일등공신(輔理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목안군(木安君)에 봉해졌 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新安君)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송도(松都) 선죽교(善竹橋) 옆에 살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던 희경(羲慶: 경주의 9세손)은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선조(宣祖) 때 이율곡(李栗谷)의 천거로 북부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易學)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이 서경 유수(西京留守) 윤근수(尹根壽)는 송도를 지날 때 그를 찾아와 <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고 그의 깊이 있는 학문과 고결한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효렴(孝廉)으로 극찬을 받았던 희상(羲祥: 희경의 형)의 손자(孫子) 상원(尙遠)은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컫어진 차천로(車天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다. 희경의 손자 사종(嗣宗:덕룡의 맏아들)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에게 글을 배웠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서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문학으로는 세상에 사종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의 아유(雅儒)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며,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오륜통의(五倫通義)와 사례비요(四禮備要)를 저술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예법을 정립(定立), 윤리도덕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인호(仁浩:사종의 종숙)와 영조(英祖) 때 직강(直講)을 지낸 지휘(之徽)가 학유(學諭)를 역임한 맹하(孟河)와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려 선종(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남도 남쪽 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오차현(烏次縣)을 신라가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 때 영암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에 이어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조에 와서 다시 장흥부로 개칭,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장흥군이 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貫祖)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오르고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熙願)은 희종(熙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지백(智伯:혁인의 7세손)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태종(太宗)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司馬奉侍卿)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조종(祖宗)이 쌓은 수령산성(遂寧山城)을 보수하여왜구(倭寇)를 막는 한편 후학(後學)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谷城) 당상촌(堂上村)으로 이거(移居)하였고, 만년에 수령군(遂寧君)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를 두 번이나 역임하여 당시 해안(海岸)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항구적(恒久的)인 왜적방어책 (倭賊防禦策)으로 광주(光州)에 있던 병마본영(兵馬本營)을 도강(道康:강진)의 수인산(修因山)으로 옮겨 장수대(將帥臺)를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니, 그 후부터는 왜구가 접근하지 못했다.
     1419년(세종 원년) 북방육진(北方六鎭) 개척(開拓)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여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對備)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都城修築都監提調)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城郭)을 완축(完築)하는데 공을 세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승(勝)은 세종 때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와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며 청백(淸白)한 관리로 유명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생동안 문의(文義) 와 충절(忠節)을 지켰다.
     승의 아우 전의 6세손 하수(河秀)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비 아들과 함께 향선(鄕船) 10 여 척으로 이순신을 도우고 특전대를 조직하여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려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반(珊)의 6세손 응방(應房)은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동생 응허(應虛:병마도위), 응정(應井) 등과 남원성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한편 폭군 연산군(燕山君)의 불의(不義)와 패륜(悖倫)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 윤(倫 ), 응훈(應勳), 운종(蕓宗), 창종(昌宗) 5종형제(五從兄弟)가 모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 진주(晋州)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南江)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忠義)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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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주忠州 김씨 金氏
    충주忠州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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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례
    제사(祭祀)


     가. 제례(祭澧)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데 대한 여러가지 예(禮)를 일컫는 말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조상없는 자손은 있을 수 없다.  나를 낳아 길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선조에 대하여 인륜(人倫)의 도의(道義)로 정성껏 제사를 모시는 것은 자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 아무리 바쁜 생활에 쫓기는 현대인이지만 一年에 한번 돌아오는 조상의 기일(忌日)만이라도 보은감사(報恩感謝)의 마음을 가지고 예를 지킴이 옳다고 본다.

      우리의 제례범절(祭禮凡節)이 그렇게 난해(難解)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은 그만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제례를 등한히하고 조상에 대한 자손의 도리를 저버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제사를 모실 때는 많은 음식과 제수를 차려 놓아야 만 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사고(思考)로 모든 기제사 봉행은 본인의 형편에 따라 정갈하게 진설(제수를 상차림에 맞춰 차리는 것)하고 정성껏 지내면 된다.

      기제(忌祭: 忌日에 지내는 祭祀)의  봉사(奉祀)대상은  제주(祭主)로부터  五대조 까지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풍속이었으나  옛날  권문명가(權門名家)들은 八대조 봉사(奉祀)까지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정의례준칙(一八조)에 의하면  제주로부터 二대조 까지만 기제를 지낼 수 있다.  제사를 드리는 시간은 돌아가신 前날  자정이 지난 새벽 一시경 조용한 때에 엄숙히 드리는 것이 좋다.

      제사는 보통  제주(祭主)의 가정에서 드리며,  대청이나 방 한 곳에 제상을 차린다. 그러나  특별한 지위나  사회적인  기제(忌祭)일 경우에는 다른 장소를 마련하여 행사(行祀)한다.

      제주(祭主)는  고인의 장자(長子)나 또는 장손(長孫)이 되며,  장자나 장손이 없을 때는 차자(次子) 또는 차손(次孫)이 제사를 주관한다.

      상처(喪妻)를 한 경우에는  남편이나 그의 자손이 하고,  자손이 없이 상부(喪夫)한 경우는 아내가 제주가 된다. 참사자(慘祀者)는 고인의 직계 자손으로 하되 가까운 친척이나 친지도 참석할 수 있다. 부득이  참사할 수 없는 자손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묵념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58
  • 영해寧海 박씨朴氏
    영해寧海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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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송靑松 김씨 金氏
    청송靑松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55
  • 가족(家族)과 가정(家庭)예절


      가. 가정예절의 의미
       가정은 祖上으로부터 나에게로 이어졌고 나로부터 子孫에게로 물려지는 영원한 것이다.
       가정은 나라와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며 사람들의 대인관계를 이루는 사회    생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예절에는 기본 예절과 개인 예절등 여러 관점들이 있으나, 예절의 모체는 역시 가정 예절인 것이다.  

      나. 가족의 범위
       가정예절은 가족간의 예절이기 때문에 먼저 가족의 범위를 알아야 할 것이다.
       가족(家族)은 법률적으로 한 호적에 실려있는 구성원이며 같은 혈족이며 한 핏줄인 모든 친척을 의미    하기도 한다.

        (1) 호적법상의 가족
       현행 호적법상으로 볼 때 가족은 큰아들인 아버지와 어머니,자기와 그리고 혼인하지 않은 아버지의 동     생과 누이, 그리고 자기의 형제자매이다.

        (2) 근친·당내간·유복지친
       우리가 흔히 근친이라 말하는 집안은 고조할아버지 이하의 조상을 직계 할아버지로 하는 8촌이내의 모    든 사람이다.
       이 근친을 한 집에서 산다는 의미로 당내간(堂內間) 이라고 하고, 죽으면 상복을 입는 친척이라는 뜻으    로 유복지친(有服之親)이라고도 한다.

        (3) 핏줄·혈족(血族)·동성동본일가
       남자조상이 같은 집안을 핏줄 또는 혈족이라 하고,흔히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일가(一家) 라고도 한     다.

        (4) 살붙이·척족(戚族)
       척족이란 성(姓)이 다른 친족을 말한다.

          (가) 외척(外戚) 
           직계 여자조상(할머니,어머니)의 친정가족으로 외가(外家)의 친족(親族)이다.

           (나) 내척(內戚) 
           직계 존속남자의 자매(고모,대고모)나 자기의 자매(누이) 또는 딸이나 손녀가 시집 가서 그 배우자         와 낳은 자손을 말한다. 넓게 말할 때는 혈족인 여자가 시집 가서 그 배우자와 낳은 자손을 말한다. 

           (다) 인척(姻戚) 
          혼인으로 인해서 집안·친족(親族)이 된 사람이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아내의 친정가족, 여자에게 있        어서는 남편의 직계가 아닌 친족을 말한다.

     다. 촌수(寸數)와  친척관계
       친척간에 멀고 가까운 친소(親疏)를 말하려면 촌수(寸數)로 말한다. 
       그리고 상대와 자기와의 관계를 말할 때는 친척관계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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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천泗川 김씨 金氏
    사천泗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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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노씨(安東盧氏)
    안동 노씨(安東盧氏)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고,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고타야군(古陀耶郡)·고창군(高唱郡)으로 불리우다가 고려(考慮)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白濟) 견 훤(甄萱)과 싸워 전공을 세우자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詠歌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여러 변천을 거쳐 1914년 안동·예안(禮安)을 통합하여 안동군이라 하였다.
     안동 노씨(安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다섯째 아들 노 만(盧 滿)이 고려조(高麗朝)에 출사하여 안동백(安東伯)에 봉해졌고, 후손(後孫) 우(祐)는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안동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우(祐)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안동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안동 노씨는 일세조 우(祐)의 손자 영길(永吉)이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안동부원군(安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숭(崇)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원성(元成)은 도원수(都元帥)를, 셋째 원신(元信)은 감무(監務)를, 막내 원명(原明)은 사재감정(司宰監正)과 전서(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크게 중흥시켰다. 한편 원명(元明)의 맏아들 담(淡)이 조선조(朝鮮朝)에서 의금부(義禁府)의 으뜸벼슬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역임했고 그이 아들 윤적(允迪)은  판서(判書)를, 손자 경( )과 수(秀)는 참판(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일으켰으며, 원명의 둘째 아들 징(澄) 판사평부사(判司 平府事)를, 셋째 아들 결(潔)은 도사(都事), 막내 담(湛)은 대언(代言)을 각각 지냈다. 그외 담(湛)의 아들 윤정(允正)이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고 손자 인석(仁錫)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필(允弼)의 아들 우현(祐賢)은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 몽재(夢宰), 목사(牧師) 세영(世英), 한림학사(翰林學士) 덕린(德麟), 부호군(副護軍) 승주(承柱)와 함께 안동 노씨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 노씨(安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020가구, 4,5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51
  • 수씨(水氏)
    수씨(水氏)

     수씨(水氏)는 중국 오흥(吳興:절강성 전당도의 한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본래 공공씨(共公氏)의 후예(後裔)로 전하며 명(明)나라 때 은현인으로 어사(御史)를 지낸 수가윤(水佳允)이란 사람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수씨(水氏)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와「만성보(萬姓譜)」등의 기록에는 수씨의 본관이 운제(雲梯:고산지방)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강원도 김화(金化)에 2가구, 함북 온성(穩城)에 1가구 등 3가구가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6가구, 1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50
  • 하음河陰 김씨 金氏
    하음河陰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9
  • 진주 강씨(晋州 彊氏)





     진주 강씨(晋州 彊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이었는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서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그후 청주(菁州)로 개칭하였다가 고려(高麗)초(初)에 강주(康州)로 환원하고, 995년(성종 14)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처음 불리게 된 뒤 조선(朝鮮)조(朝)에 와서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강씨(彊氏)는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 중국 후한의 시조, 재위기간 ; 25 ~ 57) 때의 사람인 강 화(彊 華)의 후예로 전하며, 관향(貫鄕)이 진주(晋州) 단본(單本)으로 알려졌고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 강씨(彊氏)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경남(慶南) 통영군(統營郡) 우동리(牛洞里)에 1가구(家口)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427가구, 1,826명으로 전체 274개 성씨(姓氏) 중 174위(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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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천信川 김씨 金氏
    신천信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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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평 문씨(南平文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남평은 전라남도 나주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을 통일신라 때 경덕왕이 형웅현으로 고쳐 무주(武州:광주의 옛이름)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에서는 남평(南平) 또는 영평(永平)으로 불리웠고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에 합해져서 지금의 남평면이 되었다. 문씨의 본관은 남평을 비롯하여 단성(丹城)·감천(甘泉:경북 안동지방)·정선(旌善)·강성(江城)·함평(咸平)·파평(坡平) 등 156본까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관향은 모두가 남평 문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평문씨는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을 시조(始祖)로 하여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 태종 때 중국에 건너가 문명을 떨침으로써 문씨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정선 문씨(旌善文氏)는 본래 전씨(全氏)였으나 시조 문임간(文林幹)이 역시 중국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문씨로 사성받고, 돌아와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태조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씨의 대종인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은 신라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서기 472년(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 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 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으로 삼게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위 위에다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서원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주로 명성을 떨쳤던 남평 문씨는 중시조 익(翼)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98년(숙종 3) 좌·우찬선대부(左右贊善大夫)를 지내고, 급사중(給事中)과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라 상주국(上柱國)으로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당세에 명필로 유명했던 공유(公裕)는 익(翼)의 막내 아들로 예종과 의종조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창사 비문(創寺碑文)을 남겼다. 공유의 아들 극겸(克謙)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忠直)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앗고, 그의 아들이 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惟弼)이다.
     우리나라 의복혁명의기수 삼우당(三憂堂) 익점(益漸)은 남평 문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1329년(고려 충숙왕 16) 강성현 원당리 배양촌(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세칭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 숙선(叔宣)의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 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 때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의 폐위론을 의논하자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제의 노여움을 받아 교지국(校趾國 :지금의 월남)에 귀양갔다가 돌아올 때 금수품인 목화(木花)씨를 붓대 속에 넣어온 것으로 우리나라 의복의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공민왕 때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 간이나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자 이태조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려 하였으나 끝까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왕명으로 그가 살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효자정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익점의 아들 중용(中庸)·중성(中誠)·중실(中實)·중진(中晋)·중계(中啓)동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실의 맏아들 래(萊)는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천문·지리·산수·율려(律呂)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 율(權慄)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위세(緯世:익정의 9세손)가 용담 현감(龍潭縣監)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홍헌(弘獻)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강물에 투신자살하여 광해군 때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희성(希聖),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재도(載道),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기호(基浩)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문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40,419가구, 228,820명, 1975년에는 62,027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88,932가구, 375,7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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