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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창淳昌 박씨朴氏
    순창淳昌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63
  • 신창 노씨(新昌盧氏)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 경덕왕이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 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하여 1018 년(헌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형(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되었다.
     신창 노씨(新昌盧氏)는 교하 노씨(交河盧氏)의 일세조(一世祖) 노강필(盧康弼)의 증손(曾孫) 지유(智儒:평장사 영순의 둘째 아들)가 고려 공민왕 때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나라에 무공을 세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교하 노씨에서 분적(分籍)하여 지유(智儒)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일세조 지유(智儒)의 아들 후(珝)가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후의 손자 순(純)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진력하여 저서(著書)로 일생을 마쳤다.
     한편 선조(宣祖) 때 무명(武名)을 떨친 순(錞)을 당세에 유명한 성리학자 남 명(南冥) 조 식(曺 植)에게서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보급을 담당했으며, 이듬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정(鋌)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하여 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천익(天翼), 참의(參議) 희창(喜昌)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찬 노씨(新昌盧氏)는 남한에 총 474가구, 1,9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62
  • 의령 옥씨(宜寧玉氏)
    의령 옥씨(宜寧玉氏)

     의령(宜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앙,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장함현(獐含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의령으로 고쳐서 함안군(咸安郡)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에는 진주(晋州)에 편입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현(縣)으로 승격된 뒤 1895년(고종 32)에 의령군으로 개칭되었다.
     옥씨(玉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淵源)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唐)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 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新羅)에서 국학 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宜春 : 의령의 별칭) 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 할 수 없어 후손들이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옥 여(玉汝)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갈라져서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으로 전하나 이는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규(珪)가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학문이 깊고 청렴 결백했던 고(沽)는 조선(朝鮮) 정종(定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정언(正言)·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옥씨(宜寧玉氏)는 남한(南韓)에 총 4,622가구, 18,9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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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창,경주 설씨(淳昌,慶州薛氏)
    순창,경주 설씨(淳昌,慶州薛氏)

     순창(淳昌)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쪽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백제(百濟)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때에는 순창현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 군(郡)으로 승격, 조선(朝鮮) 시대에도 그대로 군으로 삼았다. 설씨(薛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원훈(元勳)으로 지금의 월성군 천북면(月城郡川北面) 화산(花山)·물천(勿川)·동산리(東山里)와 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다스렸던 촌장(村長)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7년 다른 5부(五部 )의 촌장들과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초대 왕(王)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웠다고 하며, 서기 32년 봄 3대 유리왕(儒理王) 때 고야촌이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설씨(薛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설씨는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서라벌(徐羅伐)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자승(子升)이 고려 인종(仁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순화 백(淳化伯 : 순창의 옛 지명)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이관(移貫)하게 되었다.신라시대에 불유사상(佛儒思想)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사(思 : 원효대사)와 총(聰 : 본명 설총지)의 부자(父子)는 설씨가 자랑하는 인물(人物)로 민족사에 남긴 찬란한 업적으로 후세에 추앙받고 있다. 아찬군(阿 君) 이금(伊琴)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慶北 慶山郡 慈仁面)에서 태어난 원효대사(元曉大師)는 그의 어머니 조씨(趙氏)가 유성(流星)이 품속에 드는 꿈을 주고 배었다고 하며, 그가 태어날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는 32살에 불문(佛門)에 들어가, 661년(문무왕 1)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나라로 유학 가는 길에 배를 기다리다가 큰 비를 만나 근처 토굴로 피신하여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그 곳은 토굴이 아닌 옛 무덤 속으로, 해골 옆에서 잠을 잤고 간밤에 마셨던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만사는 생각하기에 따라 망상이 생기니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토굴이나 무덤인들 어떠랴, 이 세상 갖가지 현상은 오직 자신의 마음가짐에서 유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요 스승이거늘 어디에 가서 스승을 따로 구하랴" 하며 다시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서 불교 보급에 힘써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그 후 그는 문무왕(文武王)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혼인하여 아들 총(聰)을 낳고 스스로 파계(破戒 )를 선언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칭하며 참선과 저술(著述)에만 전념, 한국불교사상(韓國佛敎史上) 가장 위대한 고승(高僧)으로 일컬어졌다.최치원(崔致遠)·강 수(强首)와 함께 <신라 삼문장>으로 손꼽히는 총은 이두(吏讀) 문학의 창시자로도 명성을 떨쳐 민족문학사에 찬란한 금자탑(金字塔)을 세웠다.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29세손 경(鏡)이 태조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39세손 신(愼)은 고종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순화백(淳化伯)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공검(公儉)과 인검(仁儉)이 뛰어났다. 고종 때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공검은 예부 낭중(禮部郎中)과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과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지내고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여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인검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한편 공검의 아들 지충(之沖)은 충숙왕(忠肅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봉(縫)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여 충정왕조(忠定王朝)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손자 안통(安統 :  봉의 아들)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위(緯)가 시(詩)와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덕궁 직장(昌德宮直長) 훈( )의 맏아들 효조(孝祖)는 목사(牧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계조(繼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功)을 세워 정난삼등공신(靖難三等功臣)으로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다.그 외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지낸 주(柱 : 계조의 아들)와 옥구 현감(沃溝縣監) 초(礎)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후손 우범(禹範)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남원(南原)·거제(巨濟)·옥포(玉浦)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의주(義州)로 피난가는 선조(宣祖)을 호종(扈從)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이르렀다.
     영조(英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창후(昌 )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간성 군수(杆城郡守) 겸 수군 방어사(水軍防禦使)를 지낸 응정(應貞)·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술남(述男)·호조 정랑(戶曹正郞) 흥범(興範)·부호군(副護軍) 광윤(光潤)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설씨(薛氏)는 남한(南韓)에 총 8,177 가구, 34,2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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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안,병산 손씨(比安,屛山孫氏)
    비안,병산 손씨(比安,屛山孫氏)

     비안(比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비옥(比屋)과 안정(安貞) 두 현(縣)의 합명(合名)인데, 비옥현(比屋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을 경덕왕(景德王) 때 비옥현으로 개명하였다. 한편 안정현(安貞縣)은 본래 신라의 아시혜현(阿尸兮縣)을 경덕왕이 안현현(安賢縣)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기에 안정현으로 개칭한 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두 현을 합해서 비안현이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그 후 현서면(縣西面)은 예천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의성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이 되었다.
     비안 손씨(比安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 구례마(俱禮馬)의 후손(後孫)으로 전하나 고증(考證)할 자료가 없으며, 시조(始祖)는 고려 때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한 손을구(孫乙口)로 보첩(譜牒)에 기록되어 있다.
     「병산손씨세보(屛山孫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약관(弱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北邊)에 침입한 외적(外賊)을 토벌(討伐)하는 데 훈공(勳功)을 세워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고 한다. 그러나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상계(上系)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관(都摠管)을 지내고 비안(比安)의 도락촌(道樂村)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한 안무(安懋)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본관(本貫)을 비안(比安)으로 하게 되었다. 그 후 비안 손씨는 도총관 안무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조선 세조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낸 상(庠)은 목민관(牧民官)에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대서성 (大司成)을 지낸 식(湜: 일세조 안무의 손자)과 문과에 급제하고 도사(都事)를 역임한 조의 형제가 유명했다.
     한편 음관(蔭官)으로 부사직(副司直)에 올랐던 승렬(承烈)의 아들 절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으며, 증손 윤업(胤業)이 뛰어났다. 일찍이 고응경(高應擎)의 문하(門下) 에서 학문을 닦았던 윤업은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생인 우 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 준(李 埈)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교유하며 예학(禮學)을 강론(講論)하여 크게 문명 (文名)을 떨쳤으며, 그의 둘째 아들 계창(啓昌) 이 봉렬대부(奉烈大夫)로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셋째 이창(以昌)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각각 추증되어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 외 익진(翼振: 극창의 현손)의 아들 흥조(興祖)가 순조(純祖)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러 벼슬을 사임하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입재(立齋) 정종로 (鄭宗魯), 귀와(龜窩) 김 굉(金 宏) 등과 더불어 예학(禮學)을 강론(講論)하며 여생을 보냈고, 통덕랑(通德郞) 덕항(德恒)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쳐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안 손씨(比安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134가구, 5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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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팽彭
    팽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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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산·성주 배씨(星山·星州裵氏)
     성산·성주 배씨(星山·星州裵氏)
       일세조 휘(諱):배위준(裵位俊), 벽상공신(壁上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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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慶州 이씨(李氏)
    경주慶州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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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김씨(固城金氏)
    고성 김씨(固城金氏)
     
     고성(固城)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6가야(六伽倻)중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이었고,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에는 고자(古自)로 불리다가 고려(高麗) 때 철성(鐵城)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朝鮮) 시대에 와서 고성현(固城縣)이 되었다. 고성 김씨(固城金氏)는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함께 구지봉(龜旨峰)에서 탄강(誕降)한 여섯 동자(童子)중 제일 막내인 김말로왕(金末露王)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금자광록대부(今紫光祿大夫)에 올라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고령백(固寧伯)에 봉해진 정렬공(貞烈公) 윤화(潤華)와 낙천군(洛川君) 수(隨)가 유명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양평공(良平公) 미(彌)의 맏아들 빈길이 뛰어났다. 그는 김말로왕의 34세손으로 1397년(태조 6)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워 삼도수군 도절제사(三道水 軍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재침한 왜구를 멸악산(滅惡山 :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과 문무면의 경계에 있는 산)에서 대파(大破)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정헌대부(正憲大夫)·검교정승(檢校正丞)에 오르고 뒤에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원량(原亮 : 이조 정랑을 지냄), 희량(希亮 : 수원 부사, 병조 판서를 역임), 문량(文亮 : 호조 판서를 지냄) 3형제도 모두 벼슬에 등용되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한편 경현(慶賢)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좌대장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功)을 세워 함길도 순무중군(咸吉道巡撫中軍)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 문무관의 품계)에 올랐으며, 세응(世應)도 이때 북청(北靑)에서 공을 세워 노성 현감(魯城縣監)을 지낸 후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왜적(倭賊)을 대파(大破)하여 수문장(守門將)에 오른 월촌(月村) 사홍(仕弘)과 숙종(肅宗) 때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거쳐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한 우추(遇秋)가 유명했으며, 복광(復光)은 효행(孝行)이 뛰어나 1718 년(숙종 44) 고향에서 효행비(孝行碑)를 세웠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봉섭(鳳燮)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자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오대산(五臺山)에 은거(隱居)하였고, 중오(重五)는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설립(設立)하여 민족정신(民族精神)을 고취시키다가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격분함을 이기지 못해 애사(哀死)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 김씨(固城金氏)는 남한에 총 3275가구, 148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5
  • 종씨(宗氏)
    종씨(宗氏)

     종씨는 중국 경조(京兆)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주나라 대부 종 백의 후예로 전한다.
     신라 문무왕 때 아찬으로서 대야성의 도독이었던 종 정(宗 貞)과 918 년(고려 태조 원년)에 대장군(大將軍)으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던 종 희(宗  熙) 등의 이름이「고려사」에서 보이나, 오늘날의 종씨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상고하기 어렵다.
     문헌에 전해지는 본관은 임진(臨津)을 비롯하여 통진(通津)·모압(毛押 : 괴산 지방)·니파(泥波 : 만경지방)·인의(仁義  : 태인지방)·황원(黃原 : 해남 지방)등이 있으며, 1930년 국세조사 때 황해도 서흥과 곡산(谷山) 등지에 3가구가 살고 있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종씨(宗氏)는 남한에 총 26가구, 1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5
  • 무장茂長 김씨 金氏
    무장茂長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3
  • 안성安城 김씨 金氏
    안성安城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3
  • 영씨(永氏)
    영씨(永氏)

     영씨(永氏)의 본관(本貫)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평해(平海)와 강령(康翎 :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의 고호) 2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원(姓源)과 상계소목(上系昭穆)은 상고(詳考)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당시 서울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2가구, 3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3
  • 태안 박씨(泰安朴氏)
    태안(泰安)은 충청남도(忠淸南道) 태안군(泰安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 또는 성대호현(省大號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소태(蘇泰)로 고치고 뒤에 소주(蘇州)로 개칭하여 부성(富城 : 서산)군(郡)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때 연주(蓮州 : 홍주)에 예속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태안(泰安)으로 고쳤고, 1416년(조선 태종 16)군(郡)으로 승격시켰다가 1913년 서산군(瑞山郡)에 병합되어 면이 되었다.
     태안 박씨(泰安朴氏)는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의 세자(世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枕)의 13세손 원의(元義)를 기일세(起一世)하여 세(世系)를 계하고 있다. <태안박씨족보(泰安朴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을재(乙材)의 현손(玄孫)으로 광록대부(光록夫)에 올라 상서좌복야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9형제 중 다섯째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형(白兄)인 세흥군(世興君) 원효(元孝 : 좌정승을 지냄)의 네째 아들 희문(喜文)을 사자(嗣子)로 맞아 대(代)을 잇게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원의(元義)를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태안(泰安)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으며, 2세 희문(喜文)이 고려조에서 좌정승(左政丞)을 지내고 태원부원군(泰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후 희문의 아들 보규(甫圭)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학(謔)은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손자 유는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내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상호군(上護軍) 인추(仁抽)의 아들 문거(文巨)가 뛰어났다.
     순성부원군(蓴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비(悲)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송경(松京) 출신으로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비는 고흥 감무(高興監務) 겸 권농병마 단련판관(勸農兵馬團鍊判官)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처자(妻子)를 데리고 청산현 동면 대동리(靑山縣 東面 大同里)에 은거(隱居)했으며, 조선조에서 신창(新昌),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임명하고 그를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한편 조선조에서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지낸 상덕(尙德)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자유가 김해 교수(金海敎授)를 지냈으며, 둘째 자주(自胄)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사(訓練院判事)를 역임했다.
     그 외 연천 현감(蓮川縣監)을 지낸 안종(安宗 : 안릉 참봉 세훈의 맏아들)과 청풍 군수(淸風郡守) 안방(安邦)형제가 유명했고, 세적(世勣)의 아들 안도(安道)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서 진주성(晋州城) 방어에 공을 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여러 장수들과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아들 시생(始生)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여 정 구(鄭 逑)의 문인(門人)으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던 민(敏)과 함께 태안 박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안 박씨(泰安朴氏)는 남한에 총 1,079가구, 4,4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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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택平澤 박씨朴氏
    평택平澤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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