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경주 설씨(淳昌,慶州薛氏)
순창,경주 설씨(淳昌,慶州薛氏)
순창(淳昌)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쪽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백제(百濟)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때에는 순창현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 군(郡)으로 승격, 조선(朝鮮) 시대에도 그대로 군으로 삼았다. 설씨(薛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원훈(元勳)으로 지금의 월성군 천북면(月城郡川北面) 화산(花山)·물천(勿川)·동산리(東山里)와 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다스렸던 촌장(村長)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7년 다른 5부(五部 )의 촌장들과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초대 왕(王)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웠다고 하며, 서기 32년 봄 3대 유리왕(儒理王) 때 고야촌이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설씨(薛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설씨는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서라벌(徐羅伐)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자승(子升)이 고려 인종(仁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순화 백(淳化伯 : 순창의 옛 지명)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이관(移貫)하게 되었다.신라시대에 불유사상(佛儒思想)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사(思 : 원효대사)와 총(聰 : 본명 설총지)의 부자(父子)는 설씨가 자랑하는 인물(人物)로 민족사에 남긴 찬란한 업적으로 후세에 추앙받고 있다. 아찬군(阿 君) 이금(伊琴)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慶北 慶山郡 慈仁面)에서 태어난 원효대사(元曉大師)는 그의 어머니 조씨(趙氏)가 유성(流星)이 품속에 드는 꿈을 주고 배었다고 하며, 그가 태어날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는 32살에 불문(佛門)에 들어가, 661년(문무왕 1)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나라로 유학 가는 길에 배를 기다리다가 큰 비를 만나 근처 토굴로 피신하여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그 곳은 토굴이 아닌 옛 무덤 속으로, 해골 옆에서 잠을 잤고 간밤에 마셨던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만사는 생각하기에 따라 망상이 생기니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토굴이나 무덤인들 어떠랴, 이 세상 갖가지 현상은 오직 자신의 마음가짐에서 유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요 스승이거늘 어디에 가서 스승을 따로 구하랴" 하며 다시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서 불교 보급에 힘써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그 후 그는 문무왕(文武王)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혼인하여 아들 총(聰)을 낳고 스스로 파계(破戒 )를 선언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칭하며 참선과 저술(著述)에만 전념, 한국불교사상(韓國佛敎史上) 가장 위대한 고승(高僧)으로 일컬어졌다.최치원(崔致遠)·강 수(强首)와 함께 <신라 삼문장>으로 손꼽히는 총은 이두(吏讀) 문학의 창시자로도 명성을 떨쳐 민족문학사에 찬란한 금자탑(金字塔)을 세웠다.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29세손 경(鏡)이 태조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39세손 신(愼)은 고종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순화백(淳化伯)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공검(公儉)과 인검(仁儉)이 뛰어났다. 고종 때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공검은 예부 낭중(禮部郎中)과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과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지내고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여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인검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한편 공검의 아들 지충(之沖)은 충숙왕(忠肅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봉(縫)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여 충정왕조(忠定王朝)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손자 안통(安統 : 봉의 아들)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위(緯)가 시(詩)와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덕궁 직장(昌德宮直長) 훈( )의 맏아들 효조(孝祖)는 목사(牧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계조(繼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功)을 세워 정난삼등공신(靖難三等功臣)으로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다.그 외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지낸 주(柱 : 계조의 아들)와 옥구 현감(沃溝縣監) 초(礎)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후손 우범(禹範)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남원(南原)·거제(巨濟)·옥포(玉浦)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의주(義州)로 피난가는 선조(宣祖)을 호종(扈從)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이르렀다.
영조(英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창후(昌 )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간성 군수(杆城郡守) 겸 수군 방어사(水軍防禦使)를 지낸 응정(應貞)·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술남(述男)·호조 정랑(戶曹正郞) 흥범(興範)·부호군(副護軍) 광윤(光潤)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설씨(薛氏)는 남한(南韓)에 총 8,177 가구, 34,2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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