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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섭씨(慶州葉氏)
    경주 섭씨(慶州葉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 )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 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섭씨(葉氏)는 중국(中國) 남양(南陽 : 하남성 여남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섭공제(葉公濟)가 장차정란(政亂)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주 잠(朱潛)·조 창(趙昶)·진조순(陳祖舜)·주세현(周世顯 )·유응규(劉應奎)·두행수(杜行秀)·도성하(陶成河) 등 7학사(七學士)와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전라도 금성(全羅道錦城)으로 들어와 능주(綾州)를 거쳐 담양(潭陽)에 이거(移居)한 것이 우리나라 섭씨(葉氏)의 시초(始初)가 된다. 그후 고려 고종(高宗)이 그에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취했고, 원(元)나라 사신(使臣)이 그의 종적을 탐색하므로 화(禍)를 피하여 경상도 경주 연해(慶尙道 慶州沿海)를 지나 강원도 강릉 인계(江原道江陵仁溪)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하니 세인들은 그를 만오선생(晩悟先生)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 공제(公濟)가 처음 들어온 담양(潭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선조(先祖)들의 직첩(職牒)과  예조(禮曹)에 제출한 입안(立案) 등 모든 문서(文書)에 관향(貫鄕)이 경주(慶州)로 기록되어 있어 본관을 경주(慶州)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섭씨의 본관은 경주 외에도 공촌(公村 : 수원지방)·처인(處仁 : 용인지방)·회미 (澮尾 : 옥구지방)·인의(仁義 : 태인지방)·니파산(泥波山 : 만경지방)·해평(海平 : 선산지방)·충주(忠州) 등 7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경주 섭씨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섭씨는 시조의 아들 근실(根實)이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지종성군사(知鍾城郡事)를 역임했고, 손자 후춘(後春)은 충선왕(忠宣王) 때 등과(登科)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충숙왕조(忠肅王朝)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일장(日長 : 사헌부 규정 후춘의 아들)은 함주 별장(咸州別將)이 되어 말갈(靺鞨)의 침입을 토벌하는 데 선봉장(先鋒將)으로 나아가 성무산(城茂山)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정순대부 (正順大夫)로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에 올라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의 칭호와 함께 담양(潭陽)과 강양(江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아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민수(敏秀)는 충목왕(忠穆王) 때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에 판전객시사(判典客시事)를 지냈던 기량(起良 : 민수의 맏아들)은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이를 개탄하여 김용장(金用莊) 등 7인과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키니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팔판사동(八判事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기량(起良)의 현손 평중(平仲 : 공주 판관 찬의 아들)이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단종(端宗)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오대산(五臺山)에 올라가 영월(寧越)을 향해 망배(望拜)하며 통곡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천지(千枝)는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겸
    지제교(知製敎)에 특별히 기용되었다. 그 외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수렴청정(垂廉聽政)으로 권신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山水)를 편력했던 죽림거사(竹林居士) 취영(翠永)과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깨물어 간호했던 장권(章權)이 유명했고, 방화(芳華)는 순조(純祖) 때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농기(濃起)·비서원승(秘書院丞) 농환(濃煥) 등과 함께 경주 섭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섭씨(葉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가구,  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83
  • 연기燕岐 김씨 金氏
    연기燕岐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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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독고씨(南原獨孤氏)
    남원 독고씨(南原獨孤氏)

     남원(南原)은 전라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일찌기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고룡군(古龍郡)이라 하다가 660년(신라 무열왕 7) 당(唐)나라 무장(武將) 소정방(蘇定方)이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 백제를 멸망시키고 대방주(帶方州)라 고쳐 일시 지배하였으나 신라에 합병되어 신문왕(神文王)이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南原)으로 고쳤다. 고려조에 한때 대방(帶方)이라 하였으나 남원부(南原府)로 지속되어 조선때 와서 남원대도호부(南原大都護府)로서 1군(郡) 12개현(縣)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군(南原郡)이 되었다.
     독고씨(獨孤氏)는 중국 고 양(高陽 : 지금의 직예성  보정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남원(南原), 광릉(廣陵 : 중국)을 비롯하여 나주(羅州), 황주 (黃州), 의주(義州)등 다섯 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한다. 남원 독고씨(南原獨孤氏)는 중국 하남(河南) 출신의 독고공순(獨孤公舜)이 신라 말엽에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해 정착세거(定着世居)한 것이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계대(系代)를 잇지 못하다가 그의 후손 독고 신(獨孤信)이 학행(學行)으로 경향(京鄕) 각지에 명성을 떨치고 나라에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郡)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신(信)을 기일세(起一世)하여 남원(南原)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남원독고시는 남원군(南原君) 신(信)의 아들 석(碩)과 청(淸)의 형제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져서 후대로 내려오며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조선 인조(仁祖) 때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이었던 입(立 : 교수 행의 맏아들)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주(義州)의 성(城)을 수비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아버지 행(行)을 비롯하여 아들 수와 함께 3대가 순절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우 성(成)도 성(城)이 함락되자 적진(敵陣)에 뛰어들어 수백명을 죽이고 자신도 장렬한 최후를 마침으로써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더욱 빛냈다.
     그외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오른 필(弼), 암(巖)의 부자와 판관(判官) 관(寬 : 호군을 역임한 산의 아들)이 유명했고,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 익(益)은 효자로 이름난 점(漸), 공조참의(工曹參議) 웅(雄)과 함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독고씨(南原獨孤氏)는 남한에 총 209가구, 674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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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흥 민씨(驪興閔氏)
    여흥 민씨(驪興閔氏)

     여흥은 경기도 남동단에 위치한 여주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효현(黃驍縣)으로 개명하여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치고 1018 년(현종 9) 원주에 속하였다가 고종 때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년(충렬왕 31) 여흥군으로 승격한 후 조선 태종 때 음죽현(陰竹縣)을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예종조에 천녕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으로 하고 1501년 충주부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민씨는 중국 농서현( 西縣: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된 성씨로 성인 공자의 10제자 중 한 사람인 민 손(閔 損:자는 자건, 노나라 현인)의 후손 민칭도(閔稱道:상의봉어를 역임)가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민씨의 시원(始源)이 된다.
     민씨의 본관은 여흥을 비롯하여 황려(黃驪)·영주(榮州)·여주(驪州)·대전(大田)·해남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여흥 민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고려 말기에서부터 명문의 지위를 굳혀 온 민씨는 시조의 증손 영모(令謨)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고, 신종조(神宗朝)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오른 아들 식(湜)과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를 지낸 공규(公珪) 형제를 낳아 가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두르러진 인맥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후손에서 그의 증손 지(漬)가 충렬왕과 충선왕조에 걸쳐 원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충숙왕 때 수정승(守政丞)으로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으며 문장이 탁월하여「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저술했고, 아들 상정(祥正)과 상백(祥伯)이 뛰어났다.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한 상정(祥正)은 충숙왕 때 장령(掌令)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조선 개국에 반기를 들었던 안부(安富)는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6세손으로 두문동에 은거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고, 상정(祥正)의 손자 여익(汝翼:도평의사 현의 아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개국 3등공신에 올랐으며 태종 때 공조판서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세종조에 호조 판서로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한편 여흥군 지(漬)의 증손 안인(安仁:찬성사 선의 아들)은 공민왕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조선이 개국된 후 왕명으로 악기(樂器)를 정리하고 제도를 바로잡아 대례(大禮)를 완성했으며 그의 아우 유의(由誼)는 판서(判書)를 지냈다.
     태자 소보(太子小保) 공규(公珪)의 증손 종유(宗儒)는 충렬왕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충혜왕 때 대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使)를 지냈으며 전고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으로 여평군(驪平君)에 봉해졌던 적(종유의 아들)의 아들 사평은 일찍이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공신의 호를 받고 첨의참리가 되었으며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뛰어나 당대의 학자였던 이제현(李齊賢)·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특히 조선 초기에 가문을 드러낸 인물로는 여평군 적의 손자 제(霽 : 여원군 변의 아들)와 개(開)의 형제가 두드러진다. 공민왕 때 19세로 문과에 올랐던 제는 창왕 대 예문관 제학과 예조판서에 이러 한양부윤을 역임했고, 조선 태조 때 정당문학이 되어 여흥백에 봉해졌으며 태종의 국구로 잡신을 섬기는 음사를 지극히 미워하여 그가 거처하는 관청이나 집의 벽에는 화공을 시켜 몽둥이를 든 하인과 개가 무당과 중을 쫓는 모양의 그름을 그리게 하여 붙여 두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치와 오만을 배격하고 건강 양성에 힘을 쏟아 병자에게 약을 주는 방을 전국에 보내 보건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와 같은 그의  관념으로 슬하의 아들 이름을 무구(참지승추부사·여강군)·무질(우군도총제·여성군)·무휼(한성윤)·무회(예문관 제학·여산군) 등으로 지었다.
     변의 막내아들 개(開)는 공양왕 때 한성부윤과 대사헌을 지내고 정도전 일파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피살 직전에 방원의 저지로 위기를 넘겼으며 그의 둘째 아들 불탐이 세종 때 등과하여 경상도 감사와 이조 참판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명성을 얻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음모에 완강히 거절했던 신(개의 손자, 불해의 아들)은 계유정난 때 현릉에 비를 세우는 공사를 감독하고 있다가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인 삼군진무 서 조에 의하여 다섯 아들과 함께 무참히 참살당했다.
     대제학 유의 7세손 제인(사간 수의 손자, 전적 귀손의 아들)은 중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인종 때 위사이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명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밀지를 내려 인종의 장인 윤 임과 류인숙·류 관 등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윤 임 일파의 처벌은 마땅하나 평지풍파를 일으켜 민심을 동요시키지 말 것을 건의했다.
     명종과 선조대의 명신 기(현령 세류의 아들)은 여흥 민씨의 중흥 인물이다. 다섯의 나이로 천자문을 배울 때 진(晋)·초(楚) 두 글자를 익힐 무렵 아버지에게 묻기를 "진나라와 초나라가 있기 전에는 이 글자의 뜻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하여 아버지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명종조에 좌의정 윤 개가 정치를 자기 주장대로 하는 독재성 때문에 조정이 모두 그를 싫어했을 때 기는 윤 개의 면전에서 "거만한 용이 후회함이 있다"라고 충고했으며 후에 윤 개가 왕의 미움을 받아 "대신에 합당치 않다"는 전교를 내렸을 때 기는 "대신을 예로써 대우해야 하며, 간하는 신하의 말을 받아들여 용납해야 합니다."하며 본인 앞에서는 대담하게 충고하고 또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제하는 데 힘써 그의 훌륭한 인격으로 선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랐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역리(易理)를 공부했던 순(純:대제학 유의 6대손)은 주정설(主靜說)을 생활을 철학으로 삼아 개성있는 일생을 살았으며, 제인(齊仁)의 현손 광훈(光勳)은 아들 정중(鼎重), 손자 진장(鎭長)과 함께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1628년(인조 6) 알성문과에 장원했던 광훈은 정언과 지평을 거쳐 홍문관 교리와 사간을 지낸 후 효종 때 승지에 오르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시중은 현종 때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 참판으로 치사했으며 충후한 인품과 학행으로 유명했다.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중(鼎重)은 인조 때 장원으로 등과하여 주요 관직을 역임한 후 참찬의정부사를 지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의 득세로 장흥부에 유배되었다가 경신대출적으로 풀려나와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 때 노론(서인)의 증진으로 경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사림의 명망이 높았던 유중은 영돈령부사로 여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장흥의 연곡서원과 벽동의 구봉서원에 제향되었고, 그의 딸이 남인과 서인의 격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비의 비운을 겪었던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이다.
     광훈(光勳:할아버지)·정중(鼎重:아버지)에 이어 모두 과거에 장원했던 진장(鎭長)은 형조와 호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내려졌다.
     유중의 아들 진원(鎭遠)은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당시 누이인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검열로 등용되어 병조 정랑과 사복시정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서원의 남설로 지방관철의 재정 소모가 심하고 당쟁의 원인이 된다고 상소하여 서원 건립을 줄이게 했고, 경종(景宗) 때 공조 판서로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숙종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신임사화로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경종 4) 풀려나와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영조 때는 판중추부사가 되어「가족제복론」을 찬진했으며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와 탕평을 기약했으나 끝까지 소론에 대한 반격을 멈추지 않고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기로소에 들어간 후 봉조하가 되었고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 판서 진주의 아들 응수(應洙)와 좌의정 진원(鎭遠)의 손자 백상(百祥)도 우의정을 역임하여 명문의 지위를 굳혔으며 첨지중추부사 단현(端顯)의 아들 치구(致九)는 흥선대원군의 장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자 공조 판서를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의 5대손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치록이 딸이 명성왕후(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비)가 되자 여흥 민씨의 세도 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명성왕후는 16세 때 왕비로 뽑혀 한말의 격동기에 국내외의 정치적 거센 바람을 한 몸으로 감당하여 대원군고 권력 싸움으로 파란 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치록의 아들 승호(升鎬)가 여동생 명성왕후를 도와 국정 전반에 참여하여 민씨 일족의 거두로서 세도가 등등했으며, 겸호는 고종 때 판돈평부사를 지내고 정치제도의 개혁 후에 선혜청 당상관에 올라 영의정에 오른 규호(奎鎬)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의 순국열사 영환(泳煥:겸호의 아들, 태호에게 입양)은 여흥 민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18 77년(고종 14) 문과에 급제, 동부승지와 대사성을 거쳐 예·형·병조의 판서를 비롯한 한성판윤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후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백관을 인솔하여 궁궐에 나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에 모여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로 시작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이듬해 봄 그 자리에서 대가 솟아 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외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상해로 망명한 영익(泳翊),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종식(판서 영상의 아들),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했던 강( ), 의병장으로 강원·충청·경상도를 누비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긍호(肯鎬), 대동단에 가입하여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 군자금을 조달했던 치도(致道),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형식(衡植), 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제호(濟鎬),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무장 경위대를 조직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필호(弼鎬) 등이 국운이 기울어가는 구한말과 일제 암흑기에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서 겨레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절의 가문인 여흥 민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민씨는 남한에 총 33, 706가구, 141,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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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흥始興 김씨 金氏
    시흥始興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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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궁龍宮 김씨 金氏
    용궁龍宮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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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安東① 김씨 金氏
    안동安東①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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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씨(荀氏)
    순씨(荀氏)

     순씨(荀氏)는 중국 하내(河內:하남성 필양현 신향의 한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 순후( 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순씨(荀氏)로 하였다고 한다.
     순씨의 본관은 홍산(鴻山)을 비롯하여 임천(林川)·창원(昌原)·연곡(連谷:강릉 지방) 등 4본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해지며 우리나라 동래(東來)한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홍산 순씨(鴻山荀氏)의 시조(始祖)는 한영(漢英)의 아들 경진(慶震)으로 벼슬은 진사(進士)를 지냈다고 하며 고려 현종 때 순 응(荀 凝)이란 사람이 임금의 이름인 순(詢)과 음이 같다고 하여 손씨(孫氏)로 사성(賜姓)을 받은 것이 일직손씨(一直孫氏)의 시초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나 현재의 순씨와는 관계는 미상하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충남 부여(扶餘)·서천(舒川) 등지에 40여 가구와 전북지방에 12가구가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35가구, 9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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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皮
    피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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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德水 김씨 金氏
    덕수德水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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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산善山 박씨朴氏
    선산善山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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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 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蔘姓)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 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 7세기 이전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신라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고구려 :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               (明臨), 을지(乙支)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치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               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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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진康津 이씨(李氏)
    강진康津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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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

     안음(安陰)은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양군(咸陽郡)과 거창군(居昌郡)의 일부 지역을 관장하였던 조선 초기(朝鮮初期)의 행정구역명으로, 고려(高麗) 때의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을 1415년(태종 15)에 합쳤다.
     그 후 1728년(영조 4)에 와서 안의현(安義縣)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1913년 지방행적구역 개편에 따라 군을 폐하고 함양군(咸陽郡)과 거창군(居昌郡)에 갈라 편입하여 지금은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으로 남아 있다. 서문씨(西門氏)는 본래 중국(中國) 양국(梁國 : 강소성 서해도 갈산)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정(鄭)나라 대부(大夫)가 살고 있던 지명(地名)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서문씨는 원(元)나라의 하남성(河南省)출신으로 진사(進士)를 지낸 서문 기(西門記)가 1351년(고려 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의 비(妃)인 노국대 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안음군(安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음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씨의 본관은 안음 외에도 청주(淸州)·감음(感陰: 안음의 옛 지명)·동주(東州 : 철원지방) 등 3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추정되며, 안음을 제외한 관향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충남 금산(忠南錦山)과 전북 장수(全北長水)에 대다수가 살고 있는 서문씨는 시조의 아들 존(尊)이 조선조에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사(師)가 정랑(正郞)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외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군수(郡守)를 지낸 식(湜 : 시조의 증손, 정랑 사의 아들)과 검상(檢詳) 질(秩)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는 남한(南韓)에 총 588가구, 2,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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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주洪州 김씨 金氏
    홍주洪州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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