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 노씨(萬頃盧氏)
만경(萬頃)은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두내산현(豆乃山縣)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만경현(萬頃縣)으로 고쳤으며, 고려 예종이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현(縣)으로 삼았고,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을 폐하고 김제(金堤)에 속하였다. 인조(仁祖) 때 다시 현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와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속한 만경면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만경 노씨(萬頃盧氏)는 평양백(平壤伯) 노 판(盧 坂)의 후손 극청(克淸)이 고려 명종조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만경군(萬頃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평양 노씨(平壤盧氏)에서 분적(分籍), 만경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극청(克淸)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일세조 극청의 아들 상귀(尙貴)가 고려조에서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璘)은 부사(副使)를 역임하여 동정(同正) 근(謹)과 함께 가맥(家脈)을 이어 왔으며, 7세손 혁(革)은 1401년(태종 1)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세종 때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한편 중봉(重峯)은 조 헌(趙 憲)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응환(應晥:세득의 아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의병이 되어 아우 응탁(應晫)·응호와 함께 여러 전투에서 왜군(倭軍)을 격퇴시키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용전(勇戰)하다가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절하여 향리(鄕里)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그의 아들 숙(潚)은 이 괄(李 适)의 난(亂) 때 공주(公州)로 피난간 인조의 시중을 극진히 하여 난이 평정된 후 왕이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벼슬을 내리고 공신(功臣)에 책록(策錄)하려 하자 이를 극구 사양하므로 인조(仁祖)는 그의 고향을 <조왕동(助王洞)>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의 아우 위(瑋)는 별제(別提)를 지냈고, 응호의 아들 찬(璨)은 좌랑(佐郞)을 역임하여 현감 삼방(三邦), 부사(府使) 이점(以漸), 군수(郡守) 이척(以倜)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만경 노씨(萬頃盧氏)는 남한에 총 1,3600가구, 5,8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