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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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全
    전全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30
  • 전통 혼례


      가. 맞 선

      맞선의 장점은 상대방의 여러 조건을 이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한편, 연애는 극히 감정적인 면에 치우쳐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나 비교적 상당 기간 동안의 연애는 상대방의 성격과 생활, 감정을 접할 수 있으므로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된다 하겠다. 
     맞선의 장소는 흔히 신부 쪽이 지정하는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에티켓이다. 가능하다면 식사시간, 야간, 현란한 조명 밑, 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   맞선의 시간은 두 시간이내에서 마치는 것이 좋다.
     복장은 평소에 입는 옷을 깨끗이 손질하여 다려 입고 잘 다듬은 손톱, 먼지 없는 신발, 평범한 액세서리에 진하지 않은 화장 정도가 적당하다.
     적당한 화제는 인사, 소개와 의례적인 말이 있은 다음 동반인과 중매인이 분위기를 살려가면서자연스러운 일상 생활의 주변에서부터 화제를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맞선 당사자 둘만의 기회를 마련하여 주어야 한다. 맞선 이후 양가와 본인들의 혼인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랑측은 사성(四星, 사주)을 신부 집에 보내게 된다.
     
       ① 사성 이란 ?
        신랑의 사주(생년월일시)와 편지를 신부 집에 보내어 공식적인 청혼을 하는 것이며, 천    간(天干), 지지(地支)에 의하여 궁합, 택일 등을 하게 하기 위함 인데 이는 형식에 지나    지 않는다. 청혼, 허혼과정에서 약식으로 다 거친 과정이다.

       ② 사성과 봉투
        흔히 사성봉투에는 신랑의 사주외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글(청혼서 혹은 강서)을 써넣어   보낸다. 사주를 받아 들이는 것은 약혼을 의미하며, 혼인을 거절하려면 사성을 받지 안    아야 한다.

       ③ 사성 편지글 
        이 내용을 한글로 쓰자면 이런 표현이 될 것이다. 엎드려 편지를 받자오니 매우 감사합   니다. 근간에 존체 만중하십니까. 저의 자식 혼사는 이미 허락하심을 받았사오니 저의    가문의 다행이며 경사이옵니다.가르치심에 따라 사성단자를 보내오니 혼인 일자를 회신    하여 주심이 어떠하오리까".

      나. 약혼  

      약혼은 앞으로 결혼하겠다는 약속이자 결혼의 전주곡이다. 약혼식 당일의 비용은 신부측에서 부담하는 전례가 있었지만 이것은 봉건적 사상에 의한 관습일 뿐 혼사는 양가의 경사이니 신랑측에서도 합당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약혼식장은 신부의 집을 주로 이용했으나 요즘에는 한적한 음식점을 많이 이용한다.

      다. 택일  

      결혼 날짜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의 신체적 컨디션이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생리일이 예정시일보다 늦거나 빨라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 점을 고려하여 생리가 끝난 날로 부터 일주일 이내에 식을 올리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연길(涓吉)이란
       사성을 받은 신부 집에서 결혼일자를 택일하여 신랑 집에 택일단자(날받이)를 보내는 의   식이다. 이 때에도 편지글(허혼서)과 함께 보낸다. 연길은 연길봉투에 넣는데 봉투와 편   지는 다음과 같이 쓴다. 위의 연길 편지글에서 장제(章製)란 신랑 옷의 칫수를 말하는데   신부 집에서 신랑의 옷을 만들어 주려고 할 때에 그 치수를 알려 달라는 뜻이다. 위의   내용을 한글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편지를 받자오니 감사한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근간   에 존체만안 하십니까. 저의 여아 혼사는 이미 사성단자를 받자오니 저희 가문의 경사이   옵니다. 결혼일자를 가려서 삼가 보내오니 신랑의 의복 치수를 알려 주심이 어떠하오리까

      라. 납폐 (함 보내기)

     납폐는 혼인 전날 신랑 집에서 혼인을 허락해 준 감사의 보답으로 홍색 청색 비단 등 신부용 혼수감과 혼서지 및 물목을 신부 집으로 보내는 것을 말하며, 옛날에는 하인이나 심부름꾼(함진아비)에게 함을 져 보냈으나 요즈음은 신랑 친구들이 가방으로 메고 간다.  이 때에 너무 무리한 수고비의 요구로 경사스런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에다 먹칠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의 어머니 또는 복 많은 여인이 상 위에 함을 받아놓고 북향 재배한다. 그리고 안방으로 바로 가져가 깔고 앉으면서 "복 많이 들었네!" 하고 소리친다.   납폐 편지글(혼서지; 혼인문서)은 길이 36 cm, 폭 60 cm정도로 하여 9칸을 접어 양편 1칸씩 비우고 7칸에다 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27
  • 성씨(姓氏)의 의의

      성씨란 혈통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부호로서 혈연 중심으로 모여 살았던 씨족사회가 부족사회로 발전하여 복잡하게 되어 감에 따라 서로 간의 가통을 호칭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했다 할 수 있다.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민족은 어느 누구나 부계를 중심으로 한 각자의 성씨를 갖고 있으며, 각 성씨 별로 씨족의 역사를 갖고 서로 융화하며 협동, 발전하여 왔다. 즉 성명(姓名)에 대해 알아 보면 성(姓)과 본관(本貫)은 가문을 , 명(名)은 가문과 대수(代數)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독특한 체계를 갖고 변천하여 왔다. 특히, 조상숭배사상과 애족사상이 강한 우리들은 성씨를 통해 선조들의 유현한 여운을 느끼고, 면면히 내려오는 가통의 맥락을 더듬으며 조상의 얼과 체취를 느끼는 동시에 가문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씨의 성장과정은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역할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25
  • 남양 방씨(南陽房氏)
    남양 방씨(南陽房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고, 1018 년 (고려 현종9) 수주(水州:수원)와 인주(仁州: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 말기에 남양군(南陽郡)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 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면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방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요(堯)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지명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방씨는 당(唐)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이 634년(당태종 정관8, 고구려 영류왕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사적(賜籍)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후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조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공(三重大匡輔國公)에 오른 방계홍(房季弘)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사적지(賜籍地)인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어왔다.
     방씨의 관향(貫鄕)은 남양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남원(南原), 온양(溫陽), 밀양(密陽), 양산(梁山)등 23본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남양 방의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수원 방씨(水原房氏)의 시조(始祖)로 전하는 방정유(房貞儒:일명 지유)는 남양 방씨의 일세조 방계홍(房季弘)의 손자임이 밝혀졌다.
     남양 방씨의 인물로는 계홍(季弘)의 아들 의강(儀康)이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진유(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한편 상호군(上護軍) 주(柱)의 아들 사량(士良)은 공양왕(恭讓王)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전의시승(典醫寺丞)을 지냈고,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구행(九行)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차남 구달(九達)은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사량(士良)의 증손귀원(貴元:봉교를 지냄)과 옥정(玉精:세자시강원 문학)이 유명했다. 특히 계문(戒文)의 아들 귀온(貴溫)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조(中宗朝)에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과 사간(司諫院)의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으며, 남명(南溟) 조 식(曺植)에게 글을 배운 응현(應賢)은 선조(宣祖) 때 농사(農事)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학자로 명망이 높았다.그외 응현의 손자 원진(元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광해군(光海郡) 때는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찰방(찰訪)에 천거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김장생(金長生)의 휘하에서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했으며, 복령(復齡)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선조(宣祖)로부터 <가히 대장부>라는 칭찬을 받고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방씨(房氏)는 남한에 총 5,371가구, 22,5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24
  • 전田
    전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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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풍淸風 김씨 金氏
    청풍淸風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22
  • 화산花山 이씨(李氏)
    화산花山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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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씨(姚氏)
    요씨(姚氏)

     요씨(姚氏)는 중국(中國) 오흥(吳興)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소종(昭宗) 때 사람인 요 계(姚  )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요씨(姚氏)는 고려(高麗)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물장경(物藏卿)에 오른 요인휘(姚仁暉)가 있었으며,「전고대방(典古大方)」등의 문헌에는 수원 요씨(水原姚氏)로 나온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성진군(城津郡)에 살던 요재룡(姚在龍)에 의하면, 휘주요씨(徽州姚氏)는 그 당시로 해서 290여년 전에 병란(兵亂)을 피해귀화(歸化)해 온 명(明)나라 유신(遺臣)의 후예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본관은 휘주(徽州)를 비롯하여 수원(水原)·충주(忠州)·서원(西原 : 청주 별호) 등이 있는 것으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요씨(姚氏)는 남한(南韓)에 총 64가구, 2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21
  • 울산蔚山 박씨朴氏
    울산蔚山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9
  • 청양靑陽 김씨 金氏
    청양靑陽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8
  • 삼가 삼씨(三嘉森氏)
    삼가 삼씨(三嘉森氏)

     삼가(三嘉)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삼기(三 岐)·가수(嘉樹)·양현(兩縣)의 합명(合名)이다.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양현을 합하여 삼가(三嘉)로 개명하였다가 고종(高宗) 때 삼가군(三嘉郡)으로 승격되었으며, 1913년 일부는 거창(居昌)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합천군(陜川郡)에 속한 삼가면(三嘉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삼씨(森氏)는 역사(歷史)가 오래된 성씨(姓氏)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성원(姓原)과 유래(由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처음으로 14가구가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7
  • 창평昌平 김씨 金氏
    창평昌平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6
  • 해남-당악(海南-棠岳) 김씨 金氏
    해남-당악(海南-棠岳)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4
  • 강음 단씨(江陰段氏)
     강음 단씨(江陰段氏)

     강음(江陰)은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속해있는 현(縣) 이름으로 상해(上海)와 남경(南京)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교통의 요지로 면사(綿絲)·면직물(綿織物) 공업이 성한 곳이다. 단씨(段氏)는 본래 중국 경조(京兆: 협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정장공(鄭莊公)의 아우 숙단(叔段)의 후손이 이름자인 단(段)을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 나라 단씨(段氏)는  강음(江陰)과 연안(延安)을 비롯하여 대흥(大興)·풍덕(豊德)·청주(淸州)·고산(高山)·강릉(江陵) 등 19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강음과 연안을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선계(先系)는 중국(中國) 강음현(江陰縣) 출신인 단일하(段一河)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강음단씨세계(江陰段氏世系)」에 의하면 그는 1509년(명 무종 정덕4, 조선 중종4)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내원직각(內院直閣)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재성(載聖)은 1522년(가정 원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기주(冀州)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일하(一河)의 현손(玄孫) 희상(希詳)이명나라 참정(參政)에 입명되어 1597년(선조 30) 원병(援兵)을 이끌고 총병장(摠兵將)으로 조선에 건너온아버지 단만리(段萬里)를 따라 동래하여 평양(平壤)에 정착(定着), 풍양 조씨(豊壤趙氏) 익보(益輔)의 딸과 혼인하고 우리나라에 머물러 살게 되어 동래조(東來祖)로 받들고 있다. 그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린 강음 단씨는 희상(希詳)의 아들 사량(仕良)이 부조(父祖)의 공훈(功勳)으로 좌랑(佐郞)이 되었고, 손자 모동(慕東)은 종사랑(從仕郞)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후 희상의 현손(玄孫)인 오성(五星)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후 슬하에 태형(兌炯)·진형(震炯) 형제를 두어 강음 단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하였는데, 맏아들 태형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오른 아들 붕서(鵬瑞)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복현(福顯)과 그의 아들 기완(基完 : 오위장을 역임)이 유명 했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윤호(潤浩)는 한말(韓末)에 내장원 통신감(內藏院通信監)을 역임한 동주(東柱)와 함께 가문 (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음 단씨(江陰段氏)는 남한에 총 174가구, 7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2
  • 울산蔚山 김씨 金氏
    울산蔚山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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