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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성義城 김씨 金氏
    의성義城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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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손씨(密陽孫氏)
    밀양 손씨(密陽孫氏)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제23대 왕, 재위 기간 : 514∼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 孫)으로 효자보응(孝子報應)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 순(孫 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신라 모량리(牟梁里: 월 성군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면서 노모(老母)를 봉양했는데, 그의 어린아들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야 하겠소" 하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모량리 서북쪽) 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 그의 아내가 "이 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福)인 듯 하니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신기하리만큼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빨리 이를 알아보오" 하였다. 왕의 사자가 그의 집에 가서 알아보고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이 일을 알게 된 흥덕왕은 "옛날 한(漢)나라 곽 거(郭 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하고는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孝道)를 표창했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진다. 그 후 시조 순(順)의 손자 익감(翼減)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중흥조(中興祖) 긍훈(兢訓 : 시조의 7세손)이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긍훈(兢訓)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 데 많은 위훈을 남겼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 데 앞장섰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변(  : 광리군 긍훈의 9세손)과 평장사(平章事) 효려(孝麗)가 유명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빈은 병부 상서(兵部  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일어난 조 적의 반란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 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한편 현감 중견(仲堅)의 증손 책(策)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 개국(開國)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을 원(元)나라에 호종(扈從)했던 수경(守卿)은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으로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와서는 문종(文宗) 때 별시문과(別試文 科)에 급제한 서륜( 倫)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세조 3)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및 장인인 순흥 부사 (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민(敏)의 아들 비장(比長)은 성종(成宗) 때 등과하여 시무사조(時務四條)를 왕(王)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진한 후 공조 참의(工曹 參議)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고, 홍록(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을 보존케 하여 역사(歷史)의 공신(功臣)으로 유명했다.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영제(英濟)는 선조(宣祖) 때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 때 사재(私財)를 털어 조력(助力)했으며, 덕심(德沈)과 덕순(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永川)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응록(應祿)과 광해군(光海君) 때의 난정을 개탄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성리학자(性理學者) 기양(起提)이 뛰어났으며, 상륭(尙隆)은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3인의 민족 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병희(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敎主)가 되어 구한말(舊韓末)과 일제의 암흑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망국(亡國)의 민족혼(民族魂)을 혁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선교사이자 항일투사인 정도(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 운동 후에는 상해(上海) 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 (興士團)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으며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쳐,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 섰던 일민(一民)과 함께 밀양 손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58,367가구, 243,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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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성結城 이씨(李氏)
    결성結城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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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씨(俊氏)





    준씨(俊氏)

     준씨의 본관은 청주(淸州)가 단본이며, 역사에 나타난 두드러진 인물로는 936년(태조 19) 왕 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이천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우익장(右翼將)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던 준 량(俊 良) 장군과 대상(大相)을 지낸 준 홍(俊 弘), 신종 때 장군이 준존비(俊存庇)등이 대표적이다.
     1930년도 국제조사 당시 준씨는 충남 서천군 종천면 석촌리에 1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8가구, 1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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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주登州 김씨 金氏
    등주登州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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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잠鎭岑 김씨 金氏
    진잠鎭岑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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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설씨(慶州설氏)
    경주 설씨(慶州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 )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설씨( 氏)는 회골계(回 系)의 후예(後裔)가 설련하( 輦河)에 세거(世居)하면서 성(姓)을 설( )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원(元)나라 태부(太傅)인 극직(克直)의 6세손 설문질( 文質)이 원조(元朝)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후 설문질의 손자 설 손(정자(端本堂正字)로 있으면서 황태자(皇太子)에게 「경전(經典)」을 강론했으나 승상(丞相)의 비위에 거슬려 단주 유수(單州留守)로 좌천되었다가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1358년(고려 공민왕 7) 고려에 망명하자 공민왕(恭愍王)은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친히 사귄 친구 사이므로 그를 부원후(富原侯)에 봉하고 논과 밭을 내려주어 우대하였다.
      이듬해 아들 5형제가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화하여 맏아들 장수(長壽)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공양왕(恭讓王) 때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화(禍)를 입을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태조(太祖)에 의해 풀려나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계림(鷄林)을 사적(賜籍)받아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전후 8차례나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시(詩)·서 (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안렴부사(按廉副使)을 역임한 아우 경수(慶壽), 미수(眉壽)와 함께 가문(家門)을 반석(盤石)위에 올려놓았다.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미수(眉壽)는 태종(太宗) 때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전서(典書)를 거쳐 전후 다섯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시토록 했고, 여러 조(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1408년(태종  8)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순(循 : 경수의 아들)은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세종 때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지내고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왕명(王命)으로 「효행록(孝行錄)」을 증수(增修)했으며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수했다. 역사(歷史)에도 정통(精通)하였으며 문장(文章)으로 명망이 높았고, 윤 회(尹淮) 등과 함께 「통감훈의(通監訓義)」를 저술하여 더욱 학명(學名)이 떨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좌참찬(左參贊) 미수(眉壽)의 아들 유(猷)가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으며, 부승(副丞) 동인(同寅 : 순의 아들)의 아들 침(琛)은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장사랑(將仕郞)에 오른 종한(宗漢)·통덕랑(通德郞) 만구(萬 耉) 등과 함께 경주 설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설씨(慶州 氏)는 남한(南韓)에 총 442가구, 1,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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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성 배씨(達城裵氏)
    달성 배씨(達城裵氏)

     달성(達成)은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고, 757년(신라 경덕왕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달성 배씨(達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주역으로 개국공신에 책록된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 운룡(雲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배씨대동보(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 중엽에 벼슬을 지내고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달성(達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후 달성 배씨는 민부 전서(民部典書) 영(瑩:운룡의 7세손)의 아들 정지(廷芝)와 정란(廷蘭)의 형제 대에서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금위(禁衛)에 들어갔던 정지(廷芝)는 강화(江華)에 천도했던 원종(元宗)이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할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대정(隊正)이 되었고, 충렬왕(忠烈王) 때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 후(印侯)와 함께 연기(燕岐)에 침입한 거란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충청(忠淸)과 전라도 찰방(全羅道察訪)으로 나가서는 지방 관기(官紀)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고, 충숙왕(忠肅王) 때 일어난 제주도 반란사건을 존무사(存撫使)로서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도원수를 지낸 아우 정란(廷蘭)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천(果川)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다가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순절한 성경(成慶)은 밀직부사 정지의 맏아들로, 그의 아우 천경(天慶), 함경(咸慶)과 더불어 가문의 중추적(中樞的)인 인맥을 형성하였다. 신유당옥(辛酉黨獄)으로 아버지 정지가 무고를 받아 유배되자 대신하여 수형(受刑)할것을 간청했던 천경(天慶:성경의 아우)은 공민왕을 호종하여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으로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함경(咸慶)은 맏형인 성경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성경의 손자 균(均:광유의 아들)은 우왕(隅王) 때 함양(咸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이었고, 고려 말에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 했던 을서(乙瑞:균의아우)는 조선이 개국한 후 수차에 걸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부름에도 응하지않고 둔거하여 고려 말 절의충신(節義忠臣)으로 유명했으며, 야은(冶隱) 길 재(吉再)에게 글을 배웠던 인경(仁敬:성경의 증손, 문우의 아들)은 태종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내고 세종때 고주 수령(固州守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뒤에 고부군(古阜君)에 봉해졌다.
     그외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을 예견했던 두유(斗有)와 단종(端宗)이 손위하자 절의를 지켰던 효명(孝明)이 뛰어났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사원(師元)은 정언(正言)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성종(成宗) 때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낸 상경(尙絅)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한편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던 익신(益臣)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으며, 명종(明宗) 때 유일(遺逸)로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천거되었던 서(恕)는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귀양간 규암(圭庵) 송인수(宋隣壽)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파직되자 향리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선조(宣祖) 때 문과에 급제했던 승무(承武)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순절하여 승문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성유(聖有)는 영조(英祖)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상규(祥奎), 고종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은성(殷星), 좌승지(左承旨) 인기(仁基)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달성 배씨(達城裵氏)는 남한에 총 9,777가구, 41,2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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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河
    하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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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씨(占氏)
    점씨(占氏)

     점씨(占氏)의 본관(本貫)은 한산(韓山)과 괴산(槐山) 두 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살펴보면 중국(中國) 진유(陳留)에서 계출(系出)한 1본이 있고, 다른 1본인 괴산 점씨(槐山占氏)는 일본인(日本人) 투화인(投化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자료 부족으로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다. 점씨(占氏)는 주로 김제(金堤),옥구(沃溝), 익산(益山) 등지에 산거(散居)해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연구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40가구, 1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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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성月城 김씨 金氏
    월성月城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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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화金化 김씨 金氏
    김화金化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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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주 강씨(忠州 强氏)





     충주 강씨(忠州 强氏)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 난장성, 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 24대 왕, 재위기간 ; 540~576)이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중원경(中原京)이라 칭하였다.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에 충주(忠州)로 개칭하였으나 995년(성종 14) 창화군(昌化軍)이라 하여 중원도(中原道)라 칭했으며, 1254년(고종 41) 국원경(國原京), 1550년(명종 5) 유신현(維新縣) 등으로 불렸고,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하였다. 
     강씨(强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 : 감숙성 남동부 위수에 면한 상업도시)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진(晋)나라 때 사람인 강 일(强  )이 시조(始祖)가 되며, 
     우리나라 강씨(强氏)는 북송(北宋) 휘종(徽宗) 때의 전당(錢塘) 출신인 강준명(强浚明)의 후손으로 전하나 우리나라에는 언제 동래(東來)하였는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세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강씨(强氏)의 본관(本貫)은 충주(忠州) 외에도 괴산(槐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충주 강씨(忠州强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오늘날에 와서 충주 강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도(忠淸道)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24가구, 901명으로 전체 성씨(姓氏) 중 163위(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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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척三陟 박씨朴氏
    삼척三陟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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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羅州 김씨 金氏
    나주羅州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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