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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원漆原 김씨 金氏
    칠원漆原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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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韓
    한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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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김씨(公州金氏)
    공주 김씨(公州金氏)

     공주(公州)는 충청남도 동부(東部)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의 옛 도성(都城)이었다. 백제는 서기 475년(문주왕 1)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 곳에 수도를 옮기고 웅진(熊津)으로 이름하여 538년(성왕 16)에 부여(扶餘)로 천도(遷都)하기까지 약 60여년간 도읍으로 정했었다. 그후 서기 670년(신라 문무왕 10) 신라(新羅)에 속했으며 신문왕(신문왕 : 제 31대 왕, 재위기간 : 681 ∼ 692) 때 웅천주(熊川州)로 고쳤다가, 940년(고려 태조 23) 공주(公州)로
    개칭하였다. 공주 김씨(公州金氏)의 시조(始祖) 김의손(金義孫)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 오산군(鰲山君) 김지대(金之岱 : 청도 김씨의 시조)의 9세손이다. 그는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돈령부사(敦寧府事)에 오른 점(漸)의 아들 3형제중 둘째로, 어려서 사마시(司馬試 : 과거제도의 하나로 진사와 생원을 뽑는 소과)에 합격하고 참판(參判)을 거쳐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공주(公州)로 삼아 청도 김씨(淸道金氏)에서 분적(分籍)하였는데, 시조(始祖) 의손(義孫)의 아들중 여의(麗義)·일동(逸東)·응동(應東)은 청도 김씨를 계승하였고, 용(龍)은 공주파(公州派)로, 구(龜)는 평양파(平壤派)로, 타는 곽산파(郭山派)로 각각 세계(世系)를 이었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만의(萬義)의 아들 학기(學起)가 조선 세조(世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낸 후 1478년(성종 9) 서거정(徐居正)·최숙정(崔淑精) 등과 함께 [동문선(東文選 : 신라에서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모은 책)] 편찬에 참여하고, 집의(執義)를 거쳐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아우 학익(學益)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태좌(台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천경(天慶)은 1627년(인조 5)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응참(應參)·응철(應哲)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능한산성(綾漢山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헌종(憲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었다. 그외 덕량(德良)이 1546년(명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과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부호군(副護軍) 언충(彦沖)은 군자감(軍資監) 계로(繼老), 부총관(副摠管) 덕택(德澤), 감찰(監察) 변적(卞赤)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 김씨(公州金氏)는 남한에 총 1814가구, 75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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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평 모씨(咸平牟氏)
     함평 모씨(咸平牟氏)

     함평(咸平)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때 굴내현(屈乃縣)과 다지현(多只懸)에 속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 굴내현이 함풍현(咸豊懸)으로, 다지현은 다기현(多岐懸)으로 개칭되어 무안군(務安郡)에 이속 되었다가 고려 태조(太祖)때 모평현(牟平縣)으로 바뀌었다.
     그후 함풍현과 모평편이 영광현(靈光縣)에 이속되었고, 1409년(태종 9) 두 현(縣)을 합하여 함평(咸平)으로 개칭,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모씨(牟氏)는 본래 중국(中國) 평양(平陽:지금의 절강성 구해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하며, 고대(古代) 축융(祝融)의 후예(後裔)가 고을 이름을 성(性)으로 삼은 것이 시원(始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모씨(牟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관서지방의 홍농(弘農) 출신인 모 경(牟慶)이 고려(高麗)때 귀화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부터이다. 함평모씨세보(咸平牟氏世譜)에  의하면 모 경(牟 慶)은 북송(北宋)의 휘종조(徽宗朝:북송의 8대 왕, 재위기간: 1101 ∼1125)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호북 경서(湖北京西) 선무사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송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흠종(欽宗)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올랐다.
     고려에서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반역을 꾀하고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왕을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모 경이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이 모반 음모를 저지하고 왕권(王權)을 바로 세우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그후 귀국하여 홍농후(弘農侯)에 봉해졌으나 금(金) 나라가 송경(宋京)을 침입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납치해 가자 고려에 도움을 청하러 나왔다가 송나라가 패망하고 귀국길이 막히자 고려에 귀화하여 그대로 머무르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功)을 세운 모 경을 후대하여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내리고 모평군(牟平君)에 봉하여 우리나라 모씨(牟氏)의 터를 이루게 하였다. 모씨의 본관(本貫)은 함평(咸平) 외에도 진주(晋州), 인천(仁川), 영평(永平), 무안(務安), 해평(海平), 청도(淸道), 창성(昌城)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모두가 함평 모씨(咸平牟氏)의 분파(分派)이며, 현존(現存)하는 함평 모씨와 진주 모씨(晋州牟氏)는 계보(系譜)를 같이하고 있다. 함평 모씨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경(慶)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광정(光炡)이 고려 의종(毅宗)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광정의 맏아들 정린(挺麟)은 명종조(明宗朝)에 전서(典書)를 지냈다. 한편 부자(父子) 평장사(平章事)로 이름을 떨쳤던 여장(汝長)은 정린의 증 손(曾孫)이며, 그의 아들 호(皓)가 1306년(충렬왕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관(敎官)을 지내고 삼군도총제 부원수(三軍都 摠制副元帥)가 되어 원(元)나라 침공 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한편 함평 모씨의 중흥 인물인 순(恂)은 1417년(태종 1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재임동안 보릿고개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고 문을 열어 놓아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하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가 종기로 고생하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낫게 하였고, 늙어서 대변을 누자 맛을 보고 환후를 알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효행(孝行)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 세택(世澤)이 병으로 눕자 그는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병간호를 극진히 했으며 약을 구하러 가던 중 큰 비가 쏟아져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비가 그쳤고, 상(喪)을 당한 후 강물이 불어 건널 수 없게 되자 하늘을 향해 외치니 강물이 흐름을 멈췄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절강(截江)이라는 아호(雅號)를 얻게 되었으며, 그이 효행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경남 진양군 사봉면(慶南晋陽 郡寺奉面) 등건 마을 입구에다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그의 효행을 사표로 삼게 했다.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 하고 왕위(王位)을 천탈한 후 <절강일명 명어해동 종산일발 수양동청(截江一名 明於海東 種山一髮 首陽同靑:절강이라는 한 이름이 해동을 밝히고 종산의 한 머리칼은 수양과 함께 푸르리)>이라는 시(詩)을 지어 보내 은근히 자신을 따르도록 회유했으나, 그는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아 진주(晋州)의 삼가현(三嘉縣)에 유배되었다. 이때 순(恂)은 아들 3형제 중 수천(秀阡)을 데리고 귀양을 가서 진주(晋州)로 칭관(稱貫)하는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나, 함평(咸平)과 서로 큰집임을 주장하여 지금 껏 합보(合譜)를 하지 못해 문중단합에 큰 과제가 되고 있다.
     그밖에 모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 여 왜병(倭兵)과 대적했던 정(禎), 극심(克諶), 수명(受明), 윤성(允誠)이 의열(義烈)의 전통(傳統)을 이으며, 정(禎)의 증손 유 추(有秋)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양덕 현감(陽德縣監)을 지냈고,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한 일성(一成)은 숙종(肅宗)때 흥양 현감(興陽縣監)을 지낸 세무(世茂)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때 9,120명, 1975년에는 2,198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3,757가구, 16,0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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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太
    태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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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진씨(南原晋氏)





    남원 진씨(南原晋氏)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년(공민왕 9) 부(府)로 승격, 1739년(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 남원군이 되었다.
     진씨(晋氏)는 중국(中國) 괵군( 郡 : 지금의 하남성 하락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사람인 진휘자(晋暉者)의 후손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진씨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한 진함조(晋含祚)를 시조로 하는데 그는 역학(易學)과 술수(術數)에 정통하여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도참설(圖讖設)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와서 후손(後孫) 석(錫)이 거란군의 침입을 토평하는데 공(功)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남원(南原)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남원(南原)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진씨(晋氏)의 본관(本貫)은 남원(南原)을 비롯하여 13본(本)이 전(傳)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남원(南原) 단본(單本)으로 알려진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말에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지낸 우란(于蘭)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頭流山)에 은거(隱居)하여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선조(宣祖) 때 좌승지(左承旨)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한 벽(壁)은 여러 곳에서 왜군(倭軍)을 맞아 싸워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후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한편 인조(仁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종립(宗立)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김준용(金俊龍)의 휘하에서 수원 광교(水原廣橋) 전투에 참전하여 적장(敵將)을 사살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창복(昌復)은 박사(博士)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진씨(南原晋氏)는 남한(南韓)에 총 1,849가구, 7,8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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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原州① 이씨(李氏)
    원주原州①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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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산龜山 박씨朴氏
    구산龜山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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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연례(壽筵禮)

    가.수연례의 의미

      수연이란 어른의 생신에 아랫사람들이 상을 차리고 술을 올리며 오래 사시기를 비는 의식이다. 고래에는 수연례란 말이 없고 헌수가장례(獻壽家長禮)라 했다.

     나.수연의 종류

      아랫사람이 태어난 날은 생일(生日)이라 하고 웃어른의 생일은 생신(生辰)이라 한다. 웃어른의 생신에 자제(子弟)들이 술을 올리며 장수를 비는 의식이 수연이므로 아랫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수연례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활동을 하는 아들이 부모를 위해 수연의식을 행하려면 아무래도 어른의 나이가 60세는 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름있는 생일은 60세부터이고,구태여 종류를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육순(六旬) 60세 때의 생신이다. 육순이란 열(旬)이 여섯(六)이란 말이고, 육십갑자(干支六甲)를 모두 누리는 마지막 나이이다.

      ②회갑·환갑(回甲·還甲) 61세 때의 생신이다. 60갑자를 다 지내고 다시 낳은 해의 간지가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③진갑(陳·進甲) 다시 60갑자가 펼쳐 져 진행한다는 의미이다. 62세 때의 생신이다.

      ④미수(美壽) 66세 때의 생신이다. 옛날에는 66세의 미수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으나 77세 88세 99세와 같이 같은 숫자가 겹치는 생신을 이름 붙였으면서 66세를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현대 직장의 거개가 만 65세를 정년으로 하기 때문에 66세는 모든 사회활동이 성취되어 은퇴하는 나이이면서도 아직은 여력이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나이이므로 `美壽'라 하고, `美'자는 六十六을 뒤집어 쓰고 바로 쓴 자이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⑤희수·칠순(稀壽·七旬) 70세 때의 생신이다. 옛 글에 “사람이 70세까지 살기는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는 데서 희수란 말이 생겼는데 그런 뜻에서 희수라 한다면 “어른이 너무 오래 살았다”는 의미가 되어 자손으로서는 죄송한 표현이다. 열이 일곱이라는 뜻인 `칠순(七旬)'이 더 좋다.

      ⑥희수(喜壽) 77세 때의 생신이다. `喜'자를 초서로 쓰면 七十七이 되는 데서 유래되었다.

      ⑦팔순(八旬) 80세 때의 생신이다. 열이 여덟이라는 말이다.

      ⑧미수(米壽) 88세 때의 생신이다. `米'자가 八十八을 뒤집고 바르게 쓴 데서 유래되었다.

      ⑨졸수(卒壽·九旬) 90세 때의 생신이다. `卒'자를 초서로 쓰면 九十이라 쓰여지는 데서 졸수라 하는데 `卒'이란 끝나다, 마치다의 뜻이므로 그만 살라는 의미가 되어 자손으로서는 입에 담을 수 없다. 오히려 열이 아홉이라는 구순(九旬)이 좋다.

      ⑩백수(白壽) 99세 때의 생신이다. `白'자(字)는 `百'자에서 `一(하나)'를 뺀 글자이기 때문에 99로 의제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 나이(年齡)에 관한 호칭

      [해제(孩提)] (2~3세) 어린 아이(兒提)
      [지학(志學)] (15세) 15세가 되어야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
      [약관(弱冠)] (20세) 남자는 스무살에 관례(冠禮)를 치루어 성인이 된다는 뜻
      [이립(而立)] (30세) 서른살쯤에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뜻
      [불혹(不惑)] (40세) 공자는 40세가 되어서야 세상일에 미혹함이 없었다는 데서 나온 말
      [지천명(知天命)] (50세) 쉰살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뜻
      [이순(耳順),육순(六旬)] (60세) 논어에서 나온 말로 나이 예순에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원만하여 무슨 일이든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뜻
      [환갑(還甲),회갑(回甲)] (61세) 예순하나가 되는 해의 생일
      [고희(古稀)] (70세)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서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                       古來稀)에서 유래된 말
      [망팔(望八)] (71세) 팔십세를 바라본다는 뜻                                        [희수(喜壽)] (77세) 오래살아 기쁘다는 뜻. 喜字의 略字가 七七로 77을 뜻함에서 온말
      [산수(傘壽)] (80세) 산字가 八十을 의미함
      [미수(米壽)] (88세) 여든 여덟살의 생일. 米字는 八十八의 합성어임
      [백수(白壽)] (99세) 百(100)에서 一을 빼면(99세) 즉, 白字가 됨
      [기이지수(期이之壽)] (100세) 사람의 수명을 100년을 1期로 하므로 기라하고, 이는 양                                (養)과 같은 뜻으로 곧 몸이 늙어 기거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다는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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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창咸昌 김씨 金氏
    함창咸昌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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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로安老 김씨 金氏
    안로安老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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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씨(菜氏)
    채씨(菜氏)

     채씨(蔡氏)는 옛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지 않은 성씨(姓氏)로서 성원(姓源)과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자료가 없어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한다.
     우리나라 채씨(蔡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단본(單本)으로 알려졌으며, 1930연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남 통영(慶南統營)에 1가구(家口)가 살고 있었고, 1960년도에는 전국에 50여 명이 분포되어 있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채씨(蔡氏)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京畿道)와 인천(仁川) 지방에 2,108명이 세거(世居)하며, 남한(南韓) 전역에는 총 1,159가구, 5,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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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도淸道 김씨 金氏
    청도淸道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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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제金堤 김씨 金氏
    김제金堤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49
  • 태원太原 김씨 金氏
    태원太原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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