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성 구씨(綾城 具氏)
능성 구씨(綾城 具氏)
시조 휘(諱):구존유(具存裕),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단 소: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 연주산
능성 구씨(綾城 具氏)
능성(綾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綾州)의 옛 지명으로 백제시대에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또는 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인부리군(仁夫里郡)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敬德王) 때 능성현이라 개칭되었고, 1913년에 능주면으로서 화순군(和順郡)에 편입되었다.
구씨(具氏)의 선계(先系)는 중국 진나라 대부(大夫) 구 병(具 丙)으로 전하며, 「동사보유(東史補遺)」와 「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裕)가 1224년(고종 11)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 잠(朱潛)과 함께 고려에 귀화(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능성구씨세보(綾城具氏世譜)」에는 그가 고려조에서 벼슬이 벽상공신 삼중대광(壁上功臣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에 이르렀고, 전남 능성현(현 능주면 고정리)에 은거하던 주 잠의 딸과 혼인하여 능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구씨(具氏)의 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고려(高麗) 후반기에 문호(門戶)를 연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조선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권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시조 존유(存裕)의 7세손 때부터 가세가 크게 번창하여 사재감 판사(司宰監判事) 현좌(賢佐)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사공파(判事公派), 공조 전서(工曹典書) 현로(賢老)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侍郞) 영량(英良)을 파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를 비롯하여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판안동공파(判安東公派)·도원수파(都元帥派)·재신파(宰臣派)·낭장공파(郎將公派)·감무공파(監務公派)·임천군사공파(林川郡事公派)·참판공판(參判公派)·문천군사공파(文川郡事公派) 등 10여 파(派)로 크게 갈리었다.
각 파별 인맥을 살펴보면 판사공 현좌(賢佐)의 아들 인문(人文)이 세종 때 등과하여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을 비관하여 눈뜬 소경으로 행세하며 고향인 봉생(鳳生)에 돌아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고, 그의 아들 효근(孝謹)은 함창 현감(咸昌縣監)을 지냈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의강(義剛)은 현좌의 7세손이며 선공감역(繕工監役) 경서(慶瑞)의 아들로 수찬(修撰)·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강원도 암행어사(江原道暗行御史)로 백성의 억울함을 다스렸으며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시랑중파 영량(英良)의 7세손 환(桓)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냈으며 도량이 넓고 준직(峻直)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392년(태조 원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응하고 능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며 절의를 지켰다.
그의 7세손 두남(斗南)은 부사정(副司正) 정(綎)의 아들로 중종 때 효행이 뛰어나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특제(特除)되어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명종 때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가 되었고, 그의 손자 희(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로 들어가 금산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진주성(晋州城) 수비에 가담,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충효의 전통을 지켰다.
좌정승파(左政丞派)에서는 파조(派祖) 홍(鴻)의 손자 익수(益壽)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미리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사직한 후 은거하였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봉령(鳳齡)은 겸(謙)의 아들로 어려서 이퇴계(李退溪)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 동서(東西)의 당쟁에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詩)와 문장과 학행의 <삼절(三節)>로 일컬어졌고, 그가 죽은 후 만년에 학도(學徒)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던 집 동쪽에 학도묘(學徒廟)가 세워졌다.
판안동파 서(緖)는 성량(成亮)의 아들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능성군(綾城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우 강(綱)은 공주 목사(公州牧使)를 거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진 문신(文信)과 문정(文靖 : 은산 현감을 역임)·문로(文老 : 병마절도사를 역임) 3형제는 능성군 서(緖)의 아들로 유명했으며,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오른 신충(信忠)의 손자 수연(壽延)·수복(壽福)· 수담(壽聃)·수팽(壽彭) 4형제가 뛰어났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 8권 <기묘당적(己卯黨籍)>의 기록에 의하면 수복(壽福)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파직되자 갈 곳이 없었다. 그의 장인이 딱하게 여겨 보은(報恩)에 있는 자기 농장에 가서 살도록 했더니 얼마 후에 농장의 종이 그를 싫어해서 장인에게 중상하기를 “구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장차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인은 자세히 알아 보지도 않고 종말만 듣고 그를 쫓아 내었다. 이 때는 겨울철이었는데 수척한 말과 허약한 종 하나를 데리고 길에 나와 갈 곳이 없어 행색이 참으로 비참했다.
때마침 한 호걸남자가 사냥하러 갔다가 수많은 종을 데리고 사냥개와 매를 이끌고 지나가는데 수복(壽福)이 오랫동안 길에서 방황하여 잠깐동안에 두 번이나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읍하고 묻기를 “당신은 누구이기에 길에서 홀로 머뭇거리고 있소”하였다.
수복(壽福)은 그 연유를 대략 말하였던 바 그 호걸남자는 즉시 말에서 내리기를 청하여 눈 위에 털요를 깔고 서로 마주 앉아 담화하면서 꿩을 굽고 술을 부어 권하기를 숙친한 사이같이 하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 호걸남자는 찰방(察訪)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보은에 내려온 김태암(金泰岩)이었다. 태암(泰岩)은 수복에게 집과 밭 수십경(頃)을 주어 잘 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수복은 부인과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편히 살면서 단장과 짚신으로 명산승지를 두루 돌면서 마음껏 탐승(探勝)했는데 속리산의 경치를 가장 좋아 했다고 하며 학풍을 일으켜 많이 배출했다.
수복의 아우 수담(壽聃)은 일찍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에게 글을 배우고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박사(博士)를 거쳐 검토관(檢討官 : 이조 때 경연청의 정 6품 벼슬)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유림의 서용을 청했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며,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서는 강직한 성품으로 권신(權臣) 이 기를 탄핵하여 갑산에 유배당했다.
인조(仁祖) 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봉서(鳳瑞)는 수복의 현손으로 이조랑(吏曹郞)에 올라 인조의 사친추숭(賜親追崇)을 반대했으며, 평안 감사(平安監事)로 재직시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 계가 잠상(潛商 : 법령으로 금하는 물건을 암암리에 팔고 사는 장사) 문제로 청나라에 가서 망군부국(忘君負國)의 고자질로 조선의 조정을 믿고 전횡을 일삼자 이를 잡아 효수(梟首)하여 민심을 통쾌하게 했다. 그가 평양에서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애도의 뜻을 표하였는데 평안도가 생긴이래 가장 큰 상사(喪事)였다고 한다.
도원수파에서는 목사(牧使) 양(揚)의 아들 치관(致寬)의 형제 대(代)에서부터 크게 현달하여 능성 구씨(綾城具氏)의 중추역할을 담당하였다.
치관(致寬)은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에 가담하여 재능을 인정받아 일약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 :승정원에 속하였던 정3품의 벼슬)에 올랐고 좌익삼등공신(佐翼三等功臣)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진하여 능성부원군(綾城附院君)에 봉해졌다.
뒤에 우의정(右義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불안정한 북변의 야인대책에 치중하여 세조는 항상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치하했으며 특히 이조(吏曹)의 인재 등용에 청탁을 배제하는 신풍(新風)을 세운 조선 최초의 판서(判書)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의 기록에 어느날 참의(參議) 서거정(徐居正)이 정방(政房)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마침 치관(致寬)이 그를 보고 꾸짖기를 “참의의 생각에는 구치관이 인물을 전형하는데 제멋대로 할 것이라 하여 간섭하지 않으려 하는가 뒷날 사람을 잘못 썼을 때에 참의는 ‘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했다’고 하겠는가”하였다고 한다.
치관의 아우 치홍(致洪)은 세조 때 문무겸재(文武兼才)의 인물로 발탁되어 80이 넘어서도 입궁할 때 말을 타지 않고 걸어 들어가 마치 심어 놓은 굽은 소나무처럼 서 있었다고 한다.
치홍의 아들이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지낸 수종(壽宗)과 중종 때 정국이등공시(靖國二等功臣)으로 능성부원군에 봉해진 수영(壽永)이며 수영의 손자 한(澣)은 중종의 딸 숙정옹주(淑靜翁主)와 혼인하여 능창위(綾昌尉)에 봉해졌고 명종 때 위사워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순(淳)의 아들 사맹(思孟)은 지경연사(知經筵事 : 경연청의 정 2품 벼슬)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때까지 청렴결백하여 권세가들과의 접촉을 회피했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仁獻王后 : 원종의 비)가 되었다.
그밖에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능해군(綾海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성(宬)과 인조 반정의 공신 굉(宏)은 좌찬성(左贊成) 사맹(思孟)의 아들이다.
특히 굉(宏)은 인조조 40년간 벼슬에 있는 동안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세번,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네 번,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두 번 지냈고 별직(別職)으로 도총관(都摠官)을 비롯하여 무신직(武臣職)을 거치면서 치적(治績)을 많이 남긴 명신으로 손꼽히며, 성(宬)의 아들 인후는 인조와 고종사촌간으로 광해군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신경진·김 유 등과 함께 인조 반정을 성사시킨 인물이다.영조 때 부사직(副司職)으로 찬집당상(簒輯堂上)에 올라 「속대전(續大典)」을 찬술하고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훈석한 택규(宅奎)와 그의 아들 윤명(允明)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윤명(允明)은 백부 몽규(夢奎)에게 입양하여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에 올라 사관(史官)·장령(掌令)·승지(承旨) 등을 역임했고 봉사손(奉事孫)으로 능은군(綾恩君)을 습봉했다.
낭장파에서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철경(哲卿)과 전주 판관(全州判官) 승희(承禧), 김제 군수(金提郡守) 승유(承裕) 등이 유명했고, 현록(玄祿)은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올라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지낸 정현(廷賢), 대구 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황(滉), 홍원 현감(洪原縣監) 산두(山斗)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 외 감무파의 암(巖 : 현감을 역임)과 임천군사파의 충로(忠老 : 지임천군사를 역임), 참판파) 석린(碩麟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을 비롯하여 문천군사파의 순(順 : 소강진 수군절도사)과 신동(信童 : 경성 판관을 역임), 대우(大佑 : 예산 현감을 역임), 치용(致用 : 인조 때 학자) 등이 충렬의 전통을 이어 명문의 능성 구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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