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성씨(昌寧成氏)
창녕 성씨(昌寧成氏)
창녕(昌寧)은 경상남도(慶尙北道) 북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인데 555년(진흥왕 16) 하주(下州)라 칭하고 경덕왕(景德王) 때는 화왕군(火王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창녕(昌寧)으로 고치고 1018 년 (현종 9) 밀성군(密城郡)에 귀속되었다가 인조(仁祖) 때 현(縣)으로 복귀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영산군(靈山郡)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고려 때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戶長中尹)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고종(高宗 : 추정) 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하며, 창녕읍(昌寧邑)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 맥산(大地面牟山里麥山)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어느 해 정월 초 송경(松京)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 곳에 갔다가 병사(病死)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등에 엎고 울며 천리 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 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혀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만큼은 눈이 녹아 있어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그후 창녕 성씨는 시조의 손자 공필(公弼)·한필(漢弼) 대(代)에서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에 내려와 기(紀 : 판윤 한충의 아들, 판서를 역임)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명성을 떨쳐 영남지방의 명문(名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의 현손(玄孫) 여완(汝完 : 충랑 군미의 둘째 아들)이 공민왕(恭愍王) 때 민부 상서(民部尙書)를 거쳐 검열(檢閱)을 지내고 우왕(禑王) 때 정당문학(正堂文學)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태조 1)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抱川)의 왕방산(王方山) 아래에 은둔하고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로 불렀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한 후 이태조(李太祖)는 전조(前朝)의 원로(元老)라 하여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며 아들 석린(石璘)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 나는 왕씨(王氏)의 구신(舊臣)이니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이성계(李成桂)와 옛 친구로서 조선 창업(創業)에 공(功)을 세웠던 석린(石璘 : 창녕부원군 여완의 맏아들)은 정종(定宗) 때 평양부윤(平壤府尹)을 거쳐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이 되고 창녕백(昌寧伯)에봉해졌으며, 태종 때 좌명삼등공신(左命三等功臣)으로 창녕부원군에 진봉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석린의 아우 석용(石瑢 : 대제학을 역임)·석연(石 : 대사헌·우정승·호조 판서를 역임)·석번(石 : 낭장을 역임) 등도 크게 현달하여 이들이 조선 초기에 명문의 기틀을 마련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석용(石 )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달생(達生)이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세종(世宗)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로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한 승(勝)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을 거쳐 단종(端宗) 때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이르렀고 그후 고명(誥命)을 가져 온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昌德宮) 에서 개최될 때 도총관(都摠管) 유응부(兪應孚)와 함께 운검(雲儉)을 쥐게 되는 기회에 세조(世祖)를 칼로 베고 상왕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으나 갑자기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으로 거사가 어렵게 되자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가 김 질(金 質)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아들삼문(三問)·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손자 등과 더불어 죽음을 당했다.
승의 맏아들 삼문은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 적동리)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는데, 출생할 때 "났느냐" 하는 소리가 세 번 들렸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을 거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한 후 집현전(集賢殿)에서 학사(學士)·수찬(修撰) 등을 역임하며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 을 편찬하고, 한글 창제를 앞두고 당시 요동(遼東)에 유배되었던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 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서리발 같은 절의와 함께 그 공로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 와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1455년(세조 1)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박팽년(朴彭年)·이 개(李 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원)·유응부 (兪應孚)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거사 전에 탄로가 나서 아버지 승, 3형제의 동생, 아들 원(元)·맹첨(孟瞻)·맹평(孟平)·맹종(孟終) 4형제와 더불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그가 일찌기 사신(使臣)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절신·백이(伯夷)·숙제(叔劑)의 사당(祠堂)을 참배하고 시(詩)를 쓰기를, 말머리를 두들기며 고르다고 말한 것은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 같이 빛났건만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나라의 비 이슬에 자랐는데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고사리를 먹었는고 (愧君猶食首陽薇) 하여, 그 곳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으로 알았다 한다. 거사가 탄로나서 세조가 친국(親鞫)을 할 때 "내 녹(祿)을 먹고 어찌하여 반역을 꾀했느냐"하니, 삼문은 "나으리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면 나의 집을 적몰(籍沒)하여 따져 보라"고 하였다. 그가 순절한 뒤 세조가 그의 집을 적몰하여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을해년(乙亥年 : 14 55 년)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날짜를 기록해 두었으며 집에는 남은 것이 없고 침방에는 짚자리만 있었다고 한다. 그가 형장으로 갈 때 좌우 옛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을 이룩하라.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뵙겠다"고 하였고, 수레에 실릴 때에 임하여 시를 짓기를,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려니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今夜宿誰家) 하였다. 이 시는 <이 몸이 죽어가서∼>의 단가(短歌)와 더불어 그의 절의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尺度)이며,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명시(名詩)로 알려졌다. 그의 딸이 대여섯 살쯤 되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고 뛰었다. 삼문이 돌아다 보며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하였다. 그의 여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구부려서 마시고 시를 지어 이르되,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 입었으니 (食人之食衣人衣)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所一平生莫有違)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一死固知忠義在) 현릉이 송백이 꿈 속에 아른아른(顯陵松栢夢依依) 하였다. (「추강집(秋江集)」에는 성승의 시(詩)라 하였다.) 한편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사달(士達)의 아들 부(溥)와 승문원 교리 희(熺)의 아들 담수(聃壽)도 절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 말에 형부 총랑(刑部摠郞)을 역임했던 부(溥)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개성(開城)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며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후에 양주(楊州)의 서산(西山)에 숨어 살면서 송산(松山)의 조 견(趙 ), 사천(沙川)의 남을진(南乙珍)과 더불어 <유양삼은(維楊三隱)>으로 일컬어졌으며, 삼문과 재종간인 담수(聃壽)는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좌하여 심한 고문 끝에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선영(先塋)이 있는 파주 문두리(坡州文斗里)에 은거하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특히 담수는 높은 가문의 자제이면서도 농사군 같이 살았다. 그의 조카 몽정(夢井:담년의 아들, 몽선의 아우)이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순시도중 그가 사는 고을을 지나다가 만나보려고 찾아보니 고을 사람들이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하며, 살고 있는 초가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지경이고 토상(土床)이 겨우 무릎이나 놓을만 하였으며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이 탄식하고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냈으나 이 물건은 빈천한 집에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면서 돌려 보냈다고 한다. 담수의 아우 담년(聃年)과 사촌 담중(聃仲 : 참봉 소의 아들)도 불사담학(不仕聃學)의 가통(家統)을 이어 명망이 높았으며, 담년의 손자 제원(悌元 : 장흥 부사 몽선의 아들)은 초가집에서 죽을 먹어도 기상이 있었다는 학자(學者)로 이지함·서경덕(徐敬德) 등과 더불어 선도(仙道)에 기운 유학추향(儒學趨向)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유명했다.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정승(右政丞)을 거쳐 형·호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석연(石 )의 후손으로는그의 아들 암( )과 억(抑)의 인맥(人脈)이 두드러진다. 암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염조(念祖)는 세종(世宗)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도승지(都承旨)·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아우 봉조(奉祖)는 세조와 동서지간으로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우찬성·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지내고 성종(成宗) 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攻臣)으로 창성부원군에 봉해진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염조의 아들 임(任)과 간(侃)·현(俔) 3형제는 학문으로 대성(大成)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성종 때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을 역임했던 임(任)은 시문(詩文)중에서도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글씨는 촉체(蜀體:중국 촉나라 조맹부의 글씨 체)에 능하여 해서(楷書)·초서(草書)·예서(隸書)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글을 얻고저 하는 이가 중국에까지 치달았다. 고금(古今)의 이문(異聞)을 편집하여 「태평통재(太平通載)」를 저술했고,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여지승람(與地勝覽)」의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오례(五禮)」를 개수(改修)했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박학으로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간(侃)은 누군가가 색다른 책만 갖고 있으면 구해서 통독하여 동료들이 <서음(書淫)>을 한다고까지 말했고, "내가 능하지 못한 것은 음악뿐"이라면서 거문고를 배웠으나 서른 살에 요절했다.
부자문형(父子文衡)으로 유명했던 현(俔)은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漢文學)의 대가(大家)이다. 특히 그는 「용재총화( 齋叢話)」의 저자로도 명망이 높았고, 문학보다 그의 소활( 豁)하고 순탄한 성품으로 더욱 추앙을 받았다. 그의 저서(著書)인 「부휴자전(浮休自傳)」의 말미에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이 마치 떠 있는 것 같고,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쉬는 것 같으니 무엇이 영화로우며 쉰들 또 무엇이 슬프리요>라고 적었으며, 죽을 때 유서에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히 하도록 하고 문 앞에서 상여를 소가 끌게 하고, 만장(輓章)은 10여 장쯤으로 하여 나의 검소한 뜻을 표하게 하라. 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육경(六卿)에 이르렀으되 칭도할 만한 덕이 없으니 다만 표석(表石)이나 세우고 비(碑)를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연산군의 사랑하는 여인에 관한 일을 논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홍사부(洪士俯)가 그의 아들 세창(世昌)과 친하였다. 어느 정월 눈 내린 밤에 찾아와 동원(東園) 별실에서 밤중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거문고 소리가 나 문틈으로 내다보았더니, 한 노인이 매화나무 밑에서 눈을 쓸고 앉아서 허연 백발을 날리며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세창이 "나의 아버지다" 하였다. 뒷날 홍(洪)은 그날밤의 인상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써서 남겨 놓았다. <그때, 달빛이 밝아 대낮 같고 매화 꽃이 만개했었는데, 백발은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맑은 음향이 흐르니 마치 신선이 내려온 듯, 문득 맑고 시원한 기운이 몸에 가득참을 느꼈다. 용재( 齋:현의 아호)는 참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할만 하다> 현(俔)의 아들 세창은 중종 때 문형(文衡)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며, 문장과 필법이 묘정에 이르렀고 서화(書畵)와음률(音律)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리웠다. 염조의 조카 준(俊:순조의 둘째 아들)은 성종이 즉위하자 사간(司諫)이 되어 <시정십칠조(時政十七條)>를 올려 왕의 총애를 받았고 , 연산군 때는 좌의정으로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우의정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 )>를 주청,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영의정이 되었을 때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연산군이 요염한 기생을 껴안으니 그 자리에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러하지 못합니다" 하니 연산군이 꺼려서 그만 두었다. 그후부터 연산군은 준을 겉으로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체 하였지만 속으로는 꺼려하였다고 하며, 결국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직산(稷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絞殺)되었다. 그의 아들 경온(景溫)도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이르렀으나 아버지가 화(禍)를 입고 자손들까지 남겨두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말을 듣고 "나의 생명을 남의 손에 더럽힐 수 없다"고 유언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딸이 태종(太宗)의 네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 출가했던 억(抑 : 좌찬 성을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의 후손에서는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 수침(守 )과 수종(守琮)의 형제가 뛰어났다.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수침은 <도(道)는 앞에 놓인 큰 길만 같고, 성현(聖賢)의 가르침은 해와 달처럼 밝아서 알기가 어렵지 않으나 일월(日月) 밑의 그 밝은 길을 걷느냐 걷지 않느냐에 있다>고 하여 학문으로 크게 현달했고, 그의 아우 수종(守琮)은 문장이 뛰어나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고, 시(詩)도 청아했으며 학문이 깊었으나 청빈하게 살다가 일찍 죽어서 조선조에서 가장 맑게 숨어 산 사람으로 이름 났다. 그 외 선조 때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세장(世章)과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일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던 희안(希顔:돈령부 판관 찬의 아들)이 뛰어났으며, 수침의 아들 혼(渾)은 유학계(儒學界)의 거목(巨木)으로 문하에서 조 헌(趙憲)·이 귀(李貴)·정 엽(鄭曄) 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더욱 명성을 떨쳤다.
세평(世平)의 아들 영(泳 : 이조 판서를 역임)과 수익(壽益)이 손자 하종(夏宗 : 함경도 관찰사와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냄), 승지(承旨) 안의(安義)의 아들 이성(以性:부제학에 추증) 등도 수령(守令)으로 고을을 다스리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의익(義益)의 아들 기운(岐運)이 주일 공사(駐日公使)와 농상 공부 대신(農商
工部大臣)·중추원 부의장(中樞院 副議長) 등을 지내고 훈일등 팔괘장(勳一等 八卦章)을 받았으며,
아산(牙山) 출신인 재한(載翰)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홍주성(洪州城)을 지키다가 일본군(日本軍)의 기습으로 성이 함락될 때 장렬하게 전사하여 학문(學問)과 의절(義節)의 가문인 창녕 성씨의 가통을
세웠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남한(南韓)에 총 37,894가구, 158,3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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