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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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固城 이씨(李氏)
    고성固城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7
  • 홍주洪州 이씨(李氏)
    홍주洪州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6
  • 행주 기씨(幸州 奇氏)
     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을 신라에서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逢)이라 하였고, 고려초에 행주로 개칭하여  성종 때는 고봉(高峰)·덕양(德陽) 등으로 불리우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 고양군이 되었다.
     기씨(奇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기원전 1122년 중국 3대의 하나인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되자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자조선인데,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준이 배를 타고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익산군)으로 내려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개칭한 후 50 여 소국(小國)을 통합하여  다스리며 한왕(韓王)이 되었다. 
     기준의 7세손 기훈(箕勳)은 아들 3현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이 덕양(德陽 : 행주)  기씨(奇氏),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 한씨(韓氏),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우성(友誠)은 백제 온조왕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고, 후손들이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도록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1688년(숙종 14) 「무진보(戊辰譜)」를 시작할 때 득성조(得姓祖) 이하의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고려 인종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순우(純祐)를 일세조로 하였다. 
      기씨의 본관(本貫)은 행주와  개성을 비롯하여  풍양(豊壤 : 양주지방)·서원(西原 : 청주의  별호)· 단양(丹陽) 등 21 본(本)까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행주 기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씨(奇氏)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문의 기틀을 다지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역사를 수(繡) 놓았다. 명문의 전통을 이어온 훌륭한 인맥을 살펴보면 중시조 순우의  10 세손 건(虔)이 뛰어났다. 
     공조 전서(工曹典書) 면(勉)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포의(布衣)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발탁되어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지방관(地方官)으로 있을 때 치적(治績)이 훌륭해서 이도(吏道 : 관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수범을 보였다.
      그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곳에 붕어가 나는 큰 못이 있는데 관리들이 공사간(公私間)에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붕어를 잡아 바치라고 하여 민폐가 막심하자 그 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하며 자신도 먹지 않고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평생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는데,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백성들이 전복 상납으로 괴로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제주에는 부모가 죽으면 언덕이나 구렁에 버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棺)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하루는 꿈 속에 삼백여명이 뜰 아래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폭록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응당 금년에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하였다. 
      그때까지 그의 아들 3형제가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장령(掌令) 축(軸)이 아들 찬을 낳아 뒤에 찬의 벼슬이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단종조에 수양대군의 야심을 낌새 챈 그가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두문불출하자,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던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으나 청맹(靑盲: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실지는 조금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핑계대고 나가 맞지도 않았다. 
     세조는 바늘을 가지고 눈을 찌를 것 같이하여 시험하매 그는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자 세조는 마침내 그를 자신의 정권에 이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진 준(遵)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건(虔)의 증손이자 응교(應敎) 찬의 아들로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로 아산에 귀양, 온성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었다,
      준이 어느날 궐내에서 숙직할 때 관외(關外)로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되,
    「낯선 땅  산과 물은 고향과도 같은데,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아득한 검은 구름에  강가 관문이 닫히었고, 고목 나무 잎 지는 소리에 빈 성곽이 쓸쓸하다.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망망한 벽해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하였다. 
     홀연히 깨어나 벽에다 꿈 속의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당적에 관련되어 아산으로 귀양갔다가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전일의 꿈 속의 시를 읊을 때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 가던 노비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선비들간에 크게 애송되었고, 특히 유배지의 선비들을 무척 감상적으로 달래고 울려주는 명시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명현 대승(大升)은  준(遵)의 조카이며 영상(領相) 자헌(自獻)의  삼촌이다. 그는 어릴 때 시골 서당에 나가 글을 읽었다.  
     어느날 손님이 연귀(聯句)로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밥식(食)자를 넣어 글을 지으라고 하니 「배부르도록 먹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 (食無求飽君子道)」하니 손님이 “너의 끝의 삼촌이 사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가업을 이을 사람은 너로구나”하였다.
      그는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히고 이조 정랑과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광국삼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특히 스승인 퇴계 이 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8년동안이나 서신논쟁(書信論爭)을 벌인 일화가 유명하다.
     그외 응세(應世)의 아들 자헌(自獻 : 광해군 때 영의정을 역임)과  윤헌(允獻 : 안악군수를 역임)이 유명했고, 정묘호란 때 선천  부사(宣川府事)로 남한산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협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토산(兎山) 전투에서 전사란 효일(孝一)은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 정진(正鎭)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에 와서는 삼연(參衍)이 장성(長城)의 수록산(隨綠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였고, 우만(宇萬)은 조부의 학문을 계승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고종 때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꼐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로 일컬어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 오대신(賣國五大臣)을 저격한 산도(山度)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근섭(近燮)과 함께 충절과 도학을 가통으로 이어온 행주 기씨(幸州奇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기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전남·북(全南北)에 집중세거(集中世居)하며, 1985년 11월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총 22,689명으로 전체 성씨 중 79위가 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5
  • 정주貞州 김씨 金氏
    정주貞州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4
  • 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江陵)은 본래 예국(濊國 : 1세기 초에 임둔 옛 땅에서 자립한 부족국가)의 도성지(都城地)로서 상고시대에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으며, 서기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하였다. 서기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新羅)의 영토가 되어 639년(선덕여왕 8) 2월 소경(小京)으로 삼았다가 685년(태종무열왕 5)하서주(河西州)로 개편, 서기 776년(경덕왕 16) 다시 명주(溟州)로 개편하였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인 936년(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다. 그후 우계(羽谿)·연곡의 두 현(縣)을 두었다가,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인 1675년(숙종 1)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 김주원(金周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으로, 서기 777년(신라 혜공왕 13) 이찬(신라 17등 관계중 두번째 관위)으로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785년 (선덕왕 6)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그의 후사(後嗣)가 없어 군신(群臣)들의 회의(會議) 끝에 왕(王)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그때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현재 경주부근의 하천)의 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어 입궐(入闕)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며 즉위를 포기하였다 한다. 이에 냇물왕(柰勿王)의 11세손
    경신(敬信: 원성왕)이 왕으로 추대되었고, 비가 개인 후 원성왕(元聖王)은 그에게 즉위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원성왕 (元聖王)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封)하고 명주(溟州)·익령(翼嶺: 지금의 양양)·근을어(斤乙於: 지금의 평해) 등 다섯 군(郡)을 다스리게 하여 그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하게 되었으며,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주원(周元)의 9세손 상기(上琦)가 고려 예종(睿宗: 제16대 왕, 재위기간: 1105 ∼ 1122)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인종(仁宗) 때 익성
    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명문의 전통을 이은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 대표적이다. 서기 1435년(세종 17) 성균관 부근에서 일성(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대사성 김 반(金 泮)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 상(尹 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 3)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世祖)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思想)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의 세계를 문학(文學)에서 찾으며 외롭게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북(北)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東)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南)으로는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탕유관동록]·[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 세종의 형)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경주(慶州)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누차에 걸쳐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끝마쳤다. 한편 사예(司藝) 충정(忠貞)의 아들 첨경(添慶)은 1549년(명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어사(御史)·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종윤(宗胤)의 아들 충렬(忠烈)이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 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평(國坪)의 아들 행(行)은 선조(宣祖)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 판서 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시혁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우참찬(右參贊)·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 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기종(起宗)은 철명(哲命)의 아들로 이 괄(李 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  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 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예·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상성(尙星)과 영조(英祖)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상적(尙迪)이 유명했다. 시현(始炫)의 아들 상중(尙重)은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상집(尙集)과 학자(學者)로 유명한 홍운(鴻運), 형조 판서(刑曹判書) 화진(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상철은 1775년(영조 51)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3
  • 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완장성( 長城)·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24대 왕, 재위기간 : 534 ∼ 576)이 소경(소경)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忠州)로 개칭되어 성종(成宗) 때 대원(大原)·예성 (蘂城) 등으로 불리웠고, 고종(高宗) 때 국원경(國原京)으로 하였으며, 1550년(명종 5) 유신현(維新縣)으로 부르다가 조선(朝鮮)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56년 시(市)로 승격되었다.
     석씨(石氏)는 본래 중국(中國) 무위(武威 : 감숙성 감량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85본(本)이다.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린(石  )은 1174년(고려 명종 4)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 (上將軍)에 오르고 동서북면 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석 린(石  )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6세손 양선(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이태조(李太祖)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고, 양선의 아들 천을(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후슬하에 아들 수명(壽明)과 여명(汝明)을 두어 이들이 충주 석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천을의 맏아들 수명(壽明)은 조선조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으며, 그의 아우 여명(汝明)은 고려 말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3등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하니 태종이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천 군수(泰川郡守)를 지낸 관(瓘 : 한성 판윤 수명의 아들)과 증좌찬성(贈左贊成) 여명(汝明)의 아들 문수(文守 : 자헌대부로 예조 참판을 역임)·문현(文賢 : 이천 현감을 역임)·문성(文成 : 직제학을 역임)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한편 직제학(直提學) 문성(文成)의 맏아들로 세조(世祖) 때 판서(判書)를 지낸 인정(仁正)은 예원군( 蘂原君)에 봉해지고, 차남 의정(義正)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여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한 예정(禮正)·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을 지낸 지정(智正)·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신정(信正)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의정의 아들 사진(斯珍)은 단종(端宗)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령(宜寧) 석천동(石川洞)으로 내려갔다. 그 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옥점(玉 )과 첨정 (僉正)을 역임한 옥진(玉 )이 뛰어났고, 좌부장(左副將) 경하(擎廈)의 아들 지형(之珩)은 인조(仁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거쳐 강화 교수(江華敎授)를 지내고 효종(孝宗) 때 「오행귀감(五行龜鑑)」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쳐 서적과 호피(虎皮)를 하사(下賜)받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청주(淸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국(成國)과 속리산(俗離山) 전투에서 선봉(先峯)으로 싸웠던 창문(昌文)이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충주 석씨의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홍주 석씨(忠州, 洪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8,137가구, 33,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3
  • 파평坡平 김씨 金氏
    파평坡平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1
  • 거창 장씨(居昌 章氏)

    거창 장씨(居昌 章氏)

     거창(居昌)은 경상남도 북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거열군(居烈郡)인데 통일신라때 경덕왕(景德王)이 거창으로 고쳤고, 1018 년(현종 9) 합주(陜州:합천)에 속하였다가 조선 태종 때 거제현(巨濟縣)과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
     후에 다시 거창이 되어 성종 때 군(郡)이 되었다가 중종때 현으로 강등, 1659년(효종 9) 안음(安陰)에 편입시켰으며 여러차례 변화를 거쳐 1895년(고종 32) 거창군(巨昌郡)이 되었다.

     장씨(章氏)는 중국 하간(河間:지금의 직예성 진해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문헌에 전해지는 본관은 거창과 복성(福城:보성 지방)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창 단본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 장씨의 시조 장종행(章宗行)의 선대는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으므로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지낸 그를 시조로하고 그의 아들 두민(斗民)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아림(娥林:거창의 별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거창으로 하게 되었다.
     그 후 두민(斗民)의 아들 영순(永巡)이 고려의 절신(節臣) 이양중(李養中)의 사위로 공임왕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등을 지냈으며, 후손 참장(參莊)은 공양왕 때 돈령부 부정(敦寧府副正)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군 웅양면 한현촌으로 퇴거(退居)하여 그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외 선조 때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순절한 헌휘(獻輝)와 판관(判官)을 지낸 헌서(獻瑞)가 유명했으며, 석규(錫奎)는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거창 장씨는 남한에 총 1,039가구, 4,2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1
  • 의흥義興 박씨朴氏
    의흥義興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0
  • 금성 범씨(錦城范氏)
    금성 범씨(錦城范氏)

     금성(錦城)은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을 통일신라 시대에 경덕왕(景德王)이 금성(錦城:일명 금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1011년(고려 현종2) 거란(거丹)의 2차 침입 때 현종(顯宗)이 이 곳에 피난 갔다가 돌아와 목(牧)으로 승격되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1981년 7월에 영산읍과 나주읍을 통합하여 금성시(錦城市)로 승격되었다.
     범씨(范氏)는 중국 고평(高平:산서성 기영도에 속해있는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원(元)나라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낸 범승조(范承祖)가 고려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나주(羅州)에 터를 잡은 것이 우리나라  범씨의 시초가 된다.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학자로서 고려에 올 때 북송(北宋)의 대학자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백가예설(百家禮說)' 등 많은 문헌을 가지고 들어와 널리 보급했으며, 그의 아들 유수가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을 세워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금성으로 삼게 되었다. 범씨의 본관(本貫)은 금성(錦城), 광주(光州), 안주(安州) 등 3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재는 금성 범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호남(湖南)의 선비 가문으로 일컬어진 금성 범씨는 시조의 증손(曾孫) 세동(世東)이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개성(開城) 근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며, 태종(太宗)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하여 뜻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나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동의 6세손 가용(可容), 가종(可鐘) 형제와 전창(傳昌), 천배(天培) 부자(父子)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학문과 고명한 인품으로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천배(天培)의 손자 기생(起生:만암 홍로의 맏아들)과 기봉(起鳳) 형제는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어 충절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외 후손 경문(慶文)이 영조(英祖) 때 17세로 <사문(辭文)>을 지었고, 순조(純祖) 때는 '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集)'을 저술하여 문벌가문(文伐家門)의 전통을 지켰으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양성당(養性堂) 윤덕(潤德)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크게 명성을 떨쳤다.근대에 와서 금성 범씨는 광주(光州)를 비롯한 전라도와 서울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1960년 국제조사 당시 1,373명, 1975년에는 243가구로 집계되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714가구, 3,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99
  • 수원 백씨(水原白氏)
    수원 백씨(水原白氏)

     수원(水原)은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 때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시대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으며, 고려 때 인주(仁州), 수주(水州)를 거쳐 1301년(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로 개칭되었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한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水原市)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은 화성군(華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백씨(白氏)는 고대 황제 헌원(軒轅)의 후예로 중국 풍익(馮翊)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씨의 연원(淵源)은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황제의 16세손 백을병(白乙丙:진나라 때 부를 지냄)의 후손 백우경(白宇經)이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여 당(唐)나라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자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우경(宇經)이 그 곳에다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고, 만세암을 찾아온 선덕왕(宣德王)은 정혜사(淨惠寺)로 명(改名)하고 영월당이 판에 어필(御筆)로 '경춘(景春)'이라 쓰고 아울러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함께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경덕왕(景德王:신라 제54대왕,재위기간:917∼924)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창직(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기일세(起一世)하며, 창직의 증손 휘(揮)가 고려 목종(穆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9세손 천장(天藏:임평부원군 원정의 아들)은 원(元)나라에서 이부 상서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충선왕(忠宣王) 때 수성백(城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게 되었다고 한다. 백씨(白氏)의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을 비롯하여 180여 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수원 백씨의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분명하여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 발간 당시 각 파의 대표들이 회합하여 관향(貫鄕)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역사상 학문과 도덕의 문으로 지휘를 굳혀온 백씨는  중시조 창직(昌稷)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창직의 증손 휘(揮:광평시랑 길의 손자)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육조(六朝)에 걸쳐 주요 관을 지내며 나라의 모든 문장(文章)을 지어낸 맏아들 간미(簡美)는 만년에 영해(寧海)로 낙향(落鄕)한 후 수차에 걸친 문종(文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우 행미(行美)는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역임했고, 막내 가미(可美)는 판삼사(判三司)를 거쳐 태자 사부(太子師傅)에 올랐다. 한편 대장군(大將軍) 간미(簡美)의 아들 5형제 중 세째 무신(武臣:선무 장군)의아들 후재(厚載)가 소용장군(昭勇將軍)으로 도통사(都統使)를 지내고, 그의 아들 유정(有貞)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손자 대민(大旻)은 문하성사(文下省事)를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벼슬을 지내 한때 후손들이 가림 백씨(嘉林白氏)로 칭관(稱貫)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조에서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은 문간공(文簡公) 문절(文節)의 아들 이정(이正)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거봉(巨峯)인 안 향(安 珦)의 고제(高弟)였던 그는 충렬왕(忠烈王)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10년간 머무르면서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의 꽃을 피웠으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그의 학맥을 잇게 하여 조선 유학(儒學)의 기틀을 마련했다.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던 장(莊:문하시중 경신의 7세손)은 공민왕(恭愍王) 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처자를 거느리고 원주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태종(太宗)이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문간공(文簡公) 양신(良臣)의 현손 문보(文寶:중랑장 견의 아들)는 강경한 배불론자(排佛論者)로 유명했으며, 공민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사부(師傅)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봉해졌고 문집(文集)으로 '담암일집(淡庵逸集)'을 남겼다. 조선 중기 중종(中宗)과 선조(宣祖) 양대에 걸쳐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던 인걸(仁傑)은 돐도 지나기 전에 왕자 사부(王子師傅)였던 아버지 익견(益堅)을 잃고 연산군의 수탈에 의해 집마저 강제 철거당해 편모가 셋방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어머니가 자는 것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에 어머니는 늘 불을 켜놓고 자는체 함으로써 그를 먼저 자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537년(중중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며 왕실외척(王室外戚)의 세도가(勢道家)인 심의겸(沈義謙: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의 세도에 줄곧 저항적이었으며, 대윤(大尹)과 소윤(少尹) 등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았던 기개 높은 인품으로 풍파 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는 허 자(許 磁:명종 때 이조 판서에 오름)와 이웃에 살면서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워낙 가난하게 살았기로 허 자가 별다른 음식이 있으면 꼭 나누어 주었다. 소윤(少尹)의 혁명인 을사사화(乙巳士禍: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윤 임 일파를 몰아내어 사림의 큰 화를 입힌 사건)의 전야(前夜)에 허 자가 인걸을 초청하여 저녁상을 차려놓고 거사에 가담할 것을 권고하자 끝내 거절하니 허자가 말하길 "내일이면 자네가 죽을 것이라"하였다.이 말에도 인걸은 태연하게 인사하고 나오는데 허자가 인걸의 손을 잡으며 "내일은, 자네는 군자(君子)가 되고 나는 소인(小人)이 되는 날이로다" 하며 친구의 위대한 인격을 자신에 대비시켰다. 특히 그는 1576년(선조  원년)에 양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집집마다 축수를 하며 노래 부르기를,  <흰 눈의 흰 빛은 임과 같이 희도다(白雲之白與君同白) 마음 속으로 사랑하노니 어찌 걸이 아닐소냐(心乎愛矣胡不爲傑)>하였고, 그가 떠난 뒤에는 관가의 현판에 이 글을 새겨 두었다고 한다. 일찌기 인걸과 함께 학문을 토론했던 율곡(栗谷) 이 이(李 珥)는 "나이가 80세인데도 학문연구에  애쓰며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 이는 오직 이 분뿐이다"라고 하였으며, 1578년(선조 11)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군비강화를 주장했으며,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83세로 일생을 마치니 송강(松江) 정 철(鄭 澈)이 만사(挽詞)를 짓기를 외로운 충성은 일대에 둘도 없는 선비요(孤忠一代無雙士)헌납으로 밤이라도 혼자서 말씀을 올리던 사이였다(獻納三更獨啓人)
    산악의 정기로 이 노인이 태어났으니(山岳精生此老)하늘에 돌아가서도 응당 빛나는 별이 되리로다(歸天應復作星辰) 인걸의 형 인호(仁豪)도 성품이 순후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국화를 좋아하고 탈속적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인호의 아들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모함을 받아 화를 당한 유양(惟讓)이며, 인걸의 아들 유함(惟咸)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에 올랐으나 격렬한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인(仁)에 내려와 야인생활을 하며 시폐(時弊)가 있을 때마다 상소(上疏)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임진왜란을 당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 직제학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정국공신(靖國功臣)로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던 수장(壽長)의 현손 민수(民秀)는 경(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義兵)을 모아 장수(長水) 지역에서 적을 대파시켰으며, 정유재란 때도 문위세와 합세하여 용담(龍潭)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한편 세인(世仁)의 아들 광홍(光弘)이 명종조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를 사직하고 돌아올 때 우리 말로 쓴 가사(歌辭) <관서별곡(關西別曲)>으로 유명하며, 그의아우 광훈(光勳)은 시서(詩書)에 현달하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고곡 이 달(李 達)과 함께 <삼당(三唐)>으로 일컬어졌다.
     그외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순절한 광언(光彦)과 초선장사(秒選壯士)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로 잡혀있던 수천명의 동포를 구한 광조(光祖)가 뛰어났으며, 광훈의 아들 진남(振南)은 시부(詩賦)와  글씨로 명성을 떨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義州)의 남성장(南城將)이 되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웠던 원의(元義)와 함께 명문의 가통을 지켰다.
     한말에 와서는 일본세력 침투에 반대했던 낙관(樂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義擧)를 결의했던 홍인(弘寅),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과  원수부군무국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을 지낸 성기(性基) 등이 유명했으며, 남규(南圭)는 한일합방이 되자 노백린(盧伯麟), 안중근(安重根) 등 23명의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하였고, 낙귀(洛龜)는 광양(光陽)과 하동(河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천(順天)을 점령했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운각(雲閣)은 3·1운동 때 고향인 정주(定州)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고, 일규(一圭)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창립하고 '국민보(國民報)' 주필이 되어 언론을 통한 한국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외 종렬(鍾烈)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소대장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했던 삼규(三圭)는 항일투쟁에 몸바쳤던 영촌(永村), 일진(日鎭), 남준(南俊), 광운(狂雲), 남채(南埰), 관수(寬洙), 인해(仁海) 등과 함께 의절(義節)의 가맥을 이어 명문의 수원 백씨(水原白氏)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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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성-영덕(野城-盈德) 김씨 金氏
    야성-영덕(野城-盈德)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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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양英陽 김씨 金氏
    영양英陽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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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김씨(慶州金氏)





     경주 김씨(慶州金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여 국명(國名)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謁智)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고쳐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신라(新羅)로 하였으며,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慶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 (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여 지방제도의 개편, 통치 지역의 변동 등으로 명칭의 변화가 많았으나 영남지방(嶺南地方)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지위에는 변동이 없다가 1413년(태종 13)에 와서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에서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진 김씨(金氏)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 1 신라본기(新羅本記)에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脫解王)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金)으로 하사(下賜)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이렇게 웅기(雄起)한 김씨(金氏)는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 미추(味鄒)가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慶順王 : 알지의 28세손)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여 587년 동안 신라(新羅)를 지배해 오면서 왕족(王族)의 지위를 지켰으며 경주(慶州)를 비롯한 600여 관향(貫鄕)으로 분적(分籍)되었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알지계통(閼智系統)의 김씨(金氏)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혈족으로 경순왕(慶順王)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系代)하는 계통(系統)이 대표적이며, 상계(上系)는 미상(未詳)하나 경순왕의 후예로 전하는 장유(將有 : 판도판서공파), 인관(仁琯 : 태사공파), 순웅(順雄 : 대장군공파)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 등 크게 5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영분공파조(永芬公派祖)인 명종(鳴鍾)은 경순왕(慶順王)이 손국(遜國)한 후 고려조(高麗朝)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의진(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宗主)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12세손 인경(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名臣)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詩)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대안군파조(大安君派祖)인 은열(殷說)은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거쳐 대안군(大安君)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관향(貫鄕)으로 분적되었으며, 판도판서공파조(版圖判書公派祖) 장유(將有)는 고려말(高麗末)에 정국(政局)이 혼란하자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 땅에 은거(隱居)하여 그곳에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한편 태사공파조(太師公派祖) 인관(仁琯)은 고려 예종(睿宗)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으며, 대장군파조(大將軍派祖) 순웅(順雄)은 고려 초에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외 병판공파조(兵判公派祖) 덕재(德載)는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2세손으로 조선(朝鮮) 창업에 공(功)을 세워 보좌공신(補佐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함경도(咸鏡道)정평(定平)으로 은거(隱居)하였으며, 장사랑공파조(將士郞公派祖) 존일(存一)은 대안군(大安君) 은열의 16세손으로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조선창업(朝鮮創業)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에 녹훈된 균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군되어 계림군파(鷄林君派)의 일문(一門)을 이루었다. 이렇게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지켜온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역사(歷史)의 흐름 속에서 훌륭한 인재(人才)들을 대거 배출시켜 신라(新羅)와 근대(近代)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김씨(金氏)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일들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가문(家門)의 기백(氣魄)을 지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영분공 명종(鳴鍾)의 6세손 예겸(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예겸의 손자(孫子) 의진(義珍)은 고려사학(私學)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조(文宗朝)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했다.
    의진의 증손(曾孫) 영고(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영고(永固)의 아들 인경(仁鏡)은 문무겸재(文武兼才)의 현신(賢臣)으로 고종(高宗) 때 조 충(趙 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功)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8세손 봉모(鳳毛)는 외국어(外國語)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봉모의 아들 태서(台瑞)는 고종(高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약선(若先 : 공부 시랑), 기손(起 孫 : 평장사), 경손(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장유(將有)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인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 명신(名臣) 정(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조(中宗朝)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졸도하였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 항(李 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友情)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 듯 한 글투였다. 이에 정(淨)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써 넣었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李氏)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을 했는가." 이 시(詩)에 앙심을 품은 이 항(李 沆)은 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정(淨)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외에도 그가 제주도(濟州道)로 귀양가다가 해남(海南) 바닷가 노송(老松)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사(賜死)당할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태사공(太師公) 인관(仁瓘)의 9세손 자수(自粹)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恨)을 안고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왕위(王位)에 올라 그의 둘째 형인 구에게 영결(永訣)하는 시(詩)를 지어 보냈는데 <병오년 8월 10일 아우는 형님과 멀리 하직합니다. 서쪽과 남쪽은 천리 길이어서 양쪽이 모두 연락할 길 없으니 사생간에 뒷 일을 부탁해야 되겠습니다. 장가든지 벌써 스물 두 해인데도 자식이 없는 외로운 몸입니다. 형님은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쓸 만하온 바, 둘째가 벌써 자랐기로 .........(중략)> 하며 형의 둘째 아들 여경(餘慶)을 동서 성공(成公)의 딸과 혼인시켜 양자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끝부분에 <이 글을 두고 나 본듯이 여기소서. 갈 길이 바빠 여러 말 할 수 없고, 글도 제대로 되지 아니하여 몽땅붓끝 가는 대로 써 올립니다.>라 하였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세필(世弼)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聖君)이 계셨기 때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십여 살이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하였다. 한편 자수(自粹)의 9세손 홍익(弘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홍욱(弘郁)은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仁祖)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孝宗)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홍욱(弘郁)의 손자(孫子) 흥경(興慶)은 영조조(英祖朝)의 상신(相臣)이었고, 흥경의 아들 한신(漢藎)은 영조(英祖)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參贊) 이주의 손자인 정희(正喜)는 학문(學問)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隸書)와 행서(行書)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호장(戶長) 위영(魏英)의 증손(曾孫) 부필(富弼)·부일(富佾 : 수태위를 역임)·부식(富軾)·부의(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고려 문종(文宗)과 의종대(毅宗代)에 걸쳐 문무(文武)를 겸한 명신(名臣)으로 유명한 부식(富軾)은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인종 23) 왕명(王命)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宋)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역사를 수(繡)놓은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한말(韓末)에 와서도 그 가통(家統)을 이어 훌륭한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高宗)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영작(永爵)의 아들 홍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부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人物)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집(鼎集)의 아들 창희(昌熙)는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철희(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 황해도(黃海道) 토산(兎山)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춘희(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圖書館)을 설립한 인정(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書藝顧問) 태석(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영제(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계선(桂善) 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었으며, 용원(庸源)과 도태(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쳐 헌신하였으므로 신라 왕성(新羅王姓)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61,189가구, 1,523,4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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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주文州 박씨朴氏
    문주文州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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