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17 페이지
  • 기제 축문 쓰는 법






      (가) 조부모의 기제축

        조부모의 기제축은 예시와 같으며 , 조부모가 벼슬을 하였으면 '학생'과 '유인' 대신에 벼슬 이름과 봉한 명칭으로 쓴다.
        고조부모는 '현고조고(顯高祖考)', '현고조비(顯高祖妃)'라 하고 중조부모는 '현중조고', '현중조비' 라고 쓴다. 그리고 '감소고우' 앞에는 고조일 때 '효현손(孝玄孫)', 중조일 때 '효중손'이라 쓴다.

      [조부모의 기제축] 










    향饗



    공恭신伸전奠헌獻

    상尙



    불不승勝영永모慕

    근謹이以청淸작酌서庶수羞



    세歲서序천遷역易

    휘諱일日부復림臨

    추追원遠감感시時



    현顯조祖비妃유孺인人

    모某관貫
    모某씨氏

     



    현顯조祖고考학學생生부府군君




    효孝손孫

    모某

    감敢소昭고告우于



    유維세歲차次간干지支

    기幾월月간干지支삭朔

    기幾일日간干지支
     


     




     [풀이] 

       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손자 ㅇㅇ은(는) 감히 밝게 아뢰옵니다.

       해가 바뀌어 할아버님(할머님) 돌아 가신 날을 다시 맞아, 사모하는 마음 이기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약소한 제수를 올리오니 흠향 하옵소서.  










      (나) 부모의 기제축

        부모의 기제축도 조부모의 경우와 같으며 , 다만, '현조고 ...'를 '현고 ...'로 '현조비 ...'를 '현비 ...'로 바꾸며 '불승영모' 대신 '호천망극'을 쓴다.

      [부모의 기제축] 










    향饗



    공恭신伸전奠헌獻

    상尙 



    호昊천天망罔극極

    근謹이以청淸작酌서庶수羞



    세歲서序천遷역易

    휘諱일日부復림臨

    추追원遠감感시時



    현顯비妃유孺인人

    모某관貫
    모某씨氏

     



    현顯고考학學생生부府군君




    효孝자子

    모某

    감敢소昭고告우于



    유維세歲차次간干지支

    기幾월月간干지支삭朔

    기幾일日간干지支
     


     




     [풀이] 

       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아들ㅇㅇ은(는) 감히 밝게 아뢰옵니다.

       해가 바뀌어 아버님(어머님) 돌아 가신 날을 다시 맞아, 하늘과 같은 은혜 잊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제수를 올리오니 흠향 하옵소서.  










      (다) 남편(아내)의 기제축

        남편(아내)의 기제축도 부모의 기제축과 같은데, 다만 '현고 ...'를 '현벽 ...'으로 바꾸며, 호천망극을 '불승영모'로 대신 한다.

      [남편(아내)의 기제축] 










    향饗



    공恭신伸전奠헌獻

    상尙 



    불不승勝영永모慕

    근謹이以청淸작酌서庶수羞



    세歲서序천遷역易

    휘諱일日부復림臨

    추追원遠감感시時



    고故실室유孺인人

    모某관貫
    모某씨氏

     



    현顯벽壁모某관官부府군君



    부夫
    또는
    주主부婦

    모某

    감敢소昭고告우于



    유維세歲차次간干지支

    기幾월月간干지支삭朔

    기幾일日간干지支
     


     




     [풀이] 

       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주부) ㅇㅇ은(는) 감히 밝게 아뢰옵니다.

       해가 바뀌어 당신의 돌아 가신 날을 다시 맞아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을 공손히 올리오니 흠향 하소서.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23
  • 포씨(包氏)
    포씨(包氏)

     포씨(包氏)는 중국 상당(上黨:산서성 기령도 노성헌 노안부의 진나라 때 명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신백(申伯)의 후예인 신포서(申包胥)의 후손들이 이름자(字)를 성(姓)으로 삼은 것이 성원(姓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한(漢)나라 곡아인(曲阿人)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했던 포 함(包 咸)과 남북조(南北朝) 때 송(宋)나라 전첨(典籤)을 지냈던 포법영(包法榮)이 사기(史記)에 나타난 인물들이며 당(唐)나라 덕종(德宗:제9대황제, 재위기간 : 780 ~ 804) 때 염철사( 鐵使)를 역임했던 포 길(包 佶)은 윤주(潤州)에 있는 연릉(延陵)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포씨(包氏)의 연원(淵源)은 이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상고(詳考)할 수 없고, 문헌에 전해지는 본관으로는 풍덕(豊德)과 순천(順天) 두 본(本)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포씨(包氏)는 남한에 총 91가구 2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23
  • 익화益和 김씨 金氏
    익화益和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8
  • 전주 이씨(全州 李氏)
    전주 이씨(全州 李氏)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신라 진흥왕 16)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후 경덕왕(景德王)이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40여 년간 이 곳을 도읍으로 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완산부로 하였다. 조선 태조(太祖) 때는 선조(先祖)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 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가 되었으며,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
    에 따라 전주시(全州市)로 개편되었다.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 한(李 翰)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인 대성(大姓)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그 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
    (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 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
    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게 장가
    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
    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
    인 목조(穆祖)였다.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
    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德源)에 정착하였다가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리에 있었다.) 땅으로 이주(移住)하여 원주민 5천 호(五天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 때가 고려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3 ∼1259) 조(朝)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쫓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목조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공손히 뵈오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익조가 부인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
    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출생했던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彊)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
    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우왕(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수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환조의 둘째 아들 화(和)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으며, 두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義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1392년(태조 1) 7월 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王)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사공(司空) 이 한(李 翰)의 22세손이다.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를,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건국(建國) 이념으로  내세워 왕권을 중심의 권력구조를 확립하여 한국(韓國) 최대의 벌족(閥族)으로 발전해온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대소 120여 파(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를 시대(時代)에 따라
    세 갈래로 구분하면, 첫째 이태조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 안사(安社)의 상대(上代)에서
    갈려진 파로는 시조 한(翰)의 14세손 궁진(宮進)의 둘째 아들 단신(端信)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시중
    공파(侍中公派)와 15세손 용부(勇夫)의 둘째 아들 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세손
    양무(陽茂)의 셋째 아들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가 있으며, 둘째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서 갈려진 파로는 안사의 아들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
    안흥대군(安興大君) 파와 익조(翼祖) 행리(行里)의 아들 함녕(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대군(咸城大君) 등 12파가 있으며 탁조(度祖) 춘(椿)의 아들
    완찬(完昌)·완원(完原)·완천(完川)·완성대군(完城大君) 등의 4파와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아들 완풍대군(完豊大君)과 의안대군(義安大君) 등을 포함하여 총 18개 파가  있다.
     셋째 태조의 후대에서 갈려진 파로는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를 포함하여 99파(대군: 25, 군: 74)로 알려졌으나, 미취졸(未娶卒: 결혼전에 죽음)이거나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大君)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전주 이씨의 인맥(人脈)으로는 세종(世宗)의 아들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계통에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여 주목을 끌었고, 정종(定宗)의 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계통에서는 영의정(領義政) 1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시켜, 정승 3명을 배출시킨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세종의아들 여), 정승 2명의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종의 아들 무생),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文武官)을 배출해 낸 효령대군파(孝令大君派: 태종의 둘째아들 보)와 함께 화려한  명맥(名脈)을  이루었으며 정종의 막내아들인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과 중종(中宗)의 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의 계통은 무관(武官)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태조(太祖)가  <우리 가문의 백이숙제
    (伯夷淑齊)>라  칭했던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가 고려 말 우왕(禑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명(明)나라에 그 정변을 설명하러 갔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였다.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의 후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가 세종의 명을 받아 양자(養子)로 들어가 후계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溥)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종실(宗實)의 현자(賢者)>로 불리웠고, 20세에 요절했으나 그 이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계감(戒鑑)을 편수했으며, 효경(孝經)·소학(小學)·사서삼경(四書三經)·음율(音律)·산수(算數) 등에 모두 뛰어났었다. 부(溥)의 증손으로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역임했던 수한(守漢)의 아들 의건(義健)은 명종(明宗) 때 당시의 명현(名賢)들과 교유하며 시명(詩名)을 떨쳤고, 절(節)과 학(學)으로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군수(郡守) 욱(郁)의 아들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원(厚源)은 평생을 의롭게 생활하여 인간저울이란 뜻인  <의형(義衡)>으로 불리웠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강화(講和)가 진행되고 세자(世子)의 인질문제로 침통해 있는 인조(仁祖) 임금에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은 오직 나라를 위해 죽고,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담한 발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악신 김자점(金自點)의 축출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후원은 만년에 광주(廣州) 선형 곁에 집을 짓고 그 집이름을 <오재(五齋)>라 했다.
     정종(定宗)의 인맥으로는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의 후손들이 명맥(名脈)을 끈다. 선성군 무생의 증손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은 명종(明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종계변무사(宗系辯誣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광국 3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박학하였으며, 당쟁이나 흑백의 논쟁에 편당되지 않았다.  어느날 야대(夜對)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술을 권하고 <아로가(雅鷺歌)>를 지어 양원에게 화답(和答)을 청했다. <까마귀야 검지 말라, 백노야 희지 말라.(鴉兮莫黑鷺兮莫白)/ 흑백이 어지럽다. 수리야 너는 어찌 홀로 검지도 희지도 않느냐>하니 양원이 화답하기를,
     <주(朱)라 해도 내 아니요, 녹(綠)이라 하여도 내 아니라(謂朱非我兮謂綠非我),/ 주록(朱綠)이 현란함
    도 내 고움이 아니어늘(朱綠之眩晃兮又非我之娜也),/ 님은 어찌하여 날 몰라 보시고 물들었다 하시오(君胡爲平不我知謂我兮染夏)>하니 임금이 좌요에 편당됨이 없음을 알고 더욱 어질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한강(漢江)을 지키다가 해유치(蟹踰峙)에서 적군을
    크게 대파한 후 영의정에 올랐던 양원은 의주(義州)에 피란 중이던 선조 임금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식을 듣고 "국사를 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다"하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절곡(絶穀)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시경(蓍慶)은 임진왜란에 순절한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고 있는 동안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수를 갚는다고 아버지 영전에 맹세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전투에 참전하여 육신으로 적을 격살하고 물에 빠져 죽으니 시체도 못거두고 의관(衣冠)으로 장사를 지냈다.
     군수(郡守) 극인(克仁)의 아들 홍주(弘胄)는 40년간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領義政)에 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 초막뿐이었고 한 뙈기 공원에는 대(竹)와 화초가 조촐하게 피어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묘(文廟)의 중수비문을 남겼다.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의 후손에서는 수창부정(壽昌副正) 칭(稱)의 아들 헌국(憲國)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선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아들 효백(孝伯)은 이 복(李  復)·이 형(李  衡)과 더불어 당대에 활 잘 쏘는 <칠사종(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 뛰어난  지감(知鑑)으로도 유명했다.  <원교집(圓嶠集)>에
    의하면, 그의 무덤이 광주(廣州)  도논리(道論里)에 있는데 그 터는 효백이  평소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이다.  그는 항상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반드시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어느날 활 줄이 갓끈에 퉁겨져서 갓끈에 달렸던 큰 구슬을 잃었는데 장사할 때 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는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으나 세종(世宗)의 현명함을 위해서 <창광자자(猖狂自恣)>하여 세자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방랑하였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는 불교를 깊이 믿었다.
     그의 형인 양녕대군이 사냥개를 끌고 어깨에는 사냥매를  얹고서 그가 있는 절에 와서  마당에 사냥한 짐승을 늘어 놓고 자주 놀다가 갔는데,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효령대군이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하니, "이승에서는 임금의 형이요, 저승에서는  보살의 형이니  지옥에 갈 리가 있겠는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현손 중호(仲虎)는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의  이름난 학자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대쪽으로  만든 계명(戒銘)에  <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며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는 등의 구사(九思)와  <머리  모양은 곧게 하고 손가짐은 온순하게 하라>는 등의 구용(九容)을  빽빽하게 새겨서  허리띠에 차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함께 묻어 달라고 하였다.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직언(直彦: 효령대군의 5대손, 형의 아들)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 양의  손자 명(溟)은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 후 고갈된 재정을 맡아  국고(國庫)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 재정(財政) 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활을 잘 쏘아 장거리 사수로 이름을  떨쳤던 성
    녕대군(誠寧大君) 종의 후손에서는 <지봉유설(芝峰類說)>·<찬록군서(纂錄群書)>등 수십종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명망을 떨쳤던 수광과 억울한 사람을 너무  많이 구해주어서 지옥에서도 계속 영의정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성구(聖求 : 지봉  수광의 아들)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특히 성구는 인조 때 기생(妓生) 제도를 폐하여 모두 고향에 돌려 보냈던 일로 이름을 떨쳤고, 이 계의 온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 양화강(楊花江) 위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집에  불이 났었다.  
     그는 밭뚝에 나와 태연히 앉아 있다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도 않고 "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따라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익녕군(益寧君) 치의  후손에서는 정은(貞恩)의 증손 원익(元翼: 합천 군수  억재의 아들)이 서민적(庶民的)인 인품으로서 <오리정승(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원익이 연로(年老)해서 퇴임을 청하니 인조(仁祖)는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였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 하여 그의 검소한 덕을 표하며, "평생의 검소는 가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의 현황을 물었다.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은 "정승 40년에 초가 두어칸 뿐이더냐"하면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침(正寢)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세종(世宗)의 아들 18형제 중 가장 명맥(名脈)을 이룬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5대손 수록(綏祿)은 광해군(光海君) 때 원익(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 물러가 살았으며, 그의 아들 경여(敬與)가 가난한 일생을 살면서 기국(器局)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경여의 손자 관명(觀命: 대제학 민서의 아들)은  아우 건명(健命)의  죄목에 연좌, 덕천(德川)에 유배되어 관노(官奴)살이를 하면서 패랭이(平凉子)를 쓰고, 새벽 일찍 관가의 마당을 쓸어놓고 군수가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대령(待令)하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관명의 아우 건명은 경종(景宗)이 병석에  누어 후사(後嗣)를 정하는데, 아우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자 세자(世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무고를 받아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당했다.  
     건명의 사촌이 숙종조(肅宗朝)의 상신 이명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으며, 특히  청(淸) 나라의 실학사조(實學思潮)에 관심이 깊었고,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하였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영조(英祖)의 대리청정을 실현케 했으나 소론(少論)의 반대로 결정이 철회되자 파직,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무고로 사사당했다.  임영대군(臨瀛大君)  구의 아들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졌던 준(浚)은 문무 겸비의  명신(名臣)으로 이름났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1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병권(兵權)을 쥐자, 종실(宗室)에게 병권이 쥐이면 혁명이 있다는 한계희(韓繼禧)의 논척으로 파직당했다.
    중 보우(普雨)를 논척하다가 유배당했던  충작(忠綽)은 효행(孝行)이 뛰어났다. 부모의 복상(服喪)중에 너무 울어 눈이 멀었는데도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먼거리의  묘소(墓所) 참배를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임금이 그의 효행을 높이 치하하여 승지(承旨)로 임명하자 조정에서는 장님승지는 있을수 없다는 반론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 <신들은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사랑한다.  보고서  못된 일을 하는 눈보다  아예 못보는 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치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외 전주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완원군(完原君) 수(성종의 다섯째 아들)의 증손 몽설(夢設)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보령(保寧)에  은거하여 향풍(鄕風)을  세웠고, 그의 아들 성(城)과 원은 학명을 떨쳤다.
     진의 아들 상질(尙質)은 학문이 현달하여 <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훤은  언간(言諫)으로 절의(節義)를 세워, 대제학(大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손자 조(肇)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순조(純祖) 때 우의정을 지내고 명문장가로 시명(詩名)이  높았던 서구(書九)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손꼽혔으며,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 상황(相璜)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러,  헌종(憲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순조실록(純祖實錄)>을 편찬했던 지연(止淵), 철종(哲宗) 때 좌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던 헌구(憲球),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 철종 때  영의정 재원(載元),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大統領)을  지낸 승만(承晩) 등과 함께 가문을 빛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58,019  가구 2,379,5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8
  • 편씨(扁氏)
    편씨(扁氏)

     편씨(扁氏)는 성원(姓源)을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선계(先系)와 소목(昭穆)을 상고(詳考)하지 못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희천(熙川:평안북도 남동쪽에 위치하는 군) 단본(單本)이다.
     우리나라 편씨(扁氏)는 1930연도 국세조사(國稅調査)당시 충북 옥천(忠北沃川)에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5
  • 영암靈岩 김씨 金氏
    영암靈岩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4
  • 최崔
    최崔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3
  • 상원祥原 김씨 金氏
    상원祥原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2
  • 초산-정읍(楚山-井邑) 이씨(李氏)
    초산-정읍(楚山-井邑)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1
  • 설성雪城 김씨 金氏
    설성雪城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0
  • 진주晋州 김씨 金氏
    진주晋州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0
  • 원주 변씨(原州邊氏)
    원주 변씨(原州邊氏)

     원주(原州)는 강원도 원성군(原城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시대에 북원소경(北原小京), 940년(고려 태조23)에 원주(原州)로 고쳤다.그후 일신현(一新縣), 정원 도호부(靖原都護府),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 등을 거쳐 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나 1310년 성안부(成安府)로 강등, 1353년(공민왕 2) 치악산에 태(胎)를 안치하고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1895년(고종 32) 원주군(原州郡)이 되었으며,1955년 일부가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황주 변씨(黃州邊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고려 말의 절신(節臣)인 변안렬(邊安烈)을 시조(始祖)로 한다. '원주변씨족보(原州邊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조부(祖父)인 변 순(邊 順)이 1268년(고려 원종9) 원(元)나라 사신(使臣)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元世祖)를 알현(謁見)하고 심양(瀋陽)의 장수(將帥)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고 , 안렬(安烈)은 조카 숙(肅:안렬의 형인 안백의 아들)과 함께 공민왕(恭愍王)과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환국하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도(京都)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의 호(號)을 받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이 되어 나 세(羅 世), 조사민(趙思敏), 이성계(李成桂), 류 실(柳 實)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지역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을 폐립(廢立)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復位) 시키려다가 김 저(金 佇)와 함께 순절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진 절신으로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부흥을 위하여 강인한 절개를 굽힐 줄 몰랐으며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 이의 딸과 혼인하여 사적지(賜籍地 )인 원주(原州)에서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원주(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 )를 이어왔다.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李太祖)는 안렬의 충절(忠節)을 기리고 그의 아들 3형제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어 맏아들 현(顯)은 봉상시사(奉常寺事)를, 둘째 이는 도총제(都摠制)를, 막내 예(預)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사(訓鍊院事)를 각각 역임하였고, 손자 상복(尙服:이의 아들)은 덕천옹주( 德川翁主)와 혼인하여 원주위(原州尉)에 봉해졌다.
     한편 예조 참판(禮曹參判) 상회(尙會)의 아들 수(修)는 호조 및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충청, 경상, 함경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면천 군수(沔川郡守) 계윤(季胤)의 아들 협(協)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이르렀고,주역(周易),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에도 정통하였으며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특히 협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쾌하고 도량이 넓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여섯살 때 샘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우물 안에서 돌을 붙들고 밤새 버티고 있다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에게 큰 새끼를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쳤다고 하며, 1565년(명종 20)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귀양온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장살(杖殺)함으로써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난정을 개탄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던 사촌 동생 희리(希李)와 함께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로 낙향했던 희예(希乂)의 아들 광(廣)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고, 그의 아들 영청(永淸)은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은사나 헌상하는 옷의 겉감과 안감)와 안마(鞍馬)를 하사 받았으며, 단아하면서 근엄한 성품으로 공직에 있으면서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재임중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성력을 다했고 부모 봉양을 잘 하는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지급하는 등 밝은 치적을 거두었다.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양걸(良傑)은 임진왜란 때 강화(江華)를 방비하는데 공을 세우고 명(明)나라 낙오병(落伍兵)들의 반란을 재치로 진압하여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었으며, 왕자(王子)가 관련된 살인사건을 가차없이 다루다가 선조의 뜻에 거슬려 동래(東來)로 유배, 뒤에 수원 부사(水原府使)와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공조 좌랑(工曹佐郞) 열(悅)의 아들 응정(應井)은 임진왜란 때 조 헌(趙 憲), 정 담(鄭 湛) 등과 더불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자, 적장도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무덤을 크게 만들고 <조선국충간의담(朝鮮國忠肝義膽)>이라 쓴 푯말을 세웠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고향에 내렸다.
     또한 만취당(晩翠堂) 영순(永淳)의 아들 경회(慶會)는 임진왜란 때 임 흘(任 訖), 금윤선(琴胤先)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많은 훈공을 세웠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무과에 급제한 흡은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헌하여 진무이등공신(振武二等功臣)로 원흥군(原興君)에 봉군되어,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극태(克泰:경회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그외 효종(孝宗) 때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정하여 러시아군을 격파시켰던 급(급)과 경종(景宗) 때  통역관(通譯官)으로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을 편찬한 헌(憲)이 유명했으며, 근대에 와서는 의병대장(義兵大將) 학기(鶴基)가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충절(忠節)의 전통가문( 傳統家門)인 원주 변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 와서는 면와(勉窩) 태균(台均)의 주관으로 1924년 경북 봉화읍 거촌리(慶北奉化邑巨村里)에 구양사(龜陽祠)를 세워 백산(栢山) 경회(慶會)와 봉은(鳳隱) 극태(克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3월과 9월의 중정일(中丁日)에 제향(祭享)하여 왔다그후 1984년 후손 교우(敎雨)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강당(講堂)을 중수(重修)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여 묘우(廟宇), 전사청(典祀廳), 장서각(藏書閣), 동서재(東西齋), 주사(廚舍), 삼문(三門), 문루(門樓)를 비롯한 기타 부속건물의 신축사업비를 전담하고 구양서원(龜陽書院)이라 이름하여 시조 대은공(大隱公), 백산공(栢山公), 봉은공(鳳隱公)을 향사(享祠)하고 있으며, 약국(藥局)을 세워 봉화군(奉化郡) 지역 영세민에 대한 의약품 무료지급과 사회자선사업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철탑산업훈장(鐵塔産業勳章)과 새마을 포장(褒章)을 수상했고 사회봉사 부분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어 명문(名門) 원주 변씨의 전통을 살렸으며 문중단결(門中團結)을 위하여 전국에 산재(散在)한 증손(曾孫)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남한에 총 9,698가구, 39,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0
  • 창원昌原 김씨 金氏
    창원昌原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8
  • 외국의 성씨 제도


       외국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미국,영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여자는 결혼전의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남편의 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나, 법률로는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어느 한쪽의 성을 사용하거나 각자의 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의 성명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아내는 자기의 성 위에 남편의 성을 합하여 사용하는 복성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의 성은 두 글자 성씨가 된다.

       또한 지구상에는 성이 없는 국가도 많다.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이 한 예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개인적으로 필요하거나 취미로 이름 위에 이것 저것 덧붙여 사용한다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이름 위에 '우'나 '몽'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 와 '몽'이 우리나라의 김씨나 이씨 만큼 많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자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며 '몽'자는 미혼의 젊은 이에게 붙이는 것으로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성씨는 매우 복잡하고 그 숫자로도 13만 2천여 성씨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민족 중의 하나다. 일본의 성씨는 두 글자 성씨가 제일 많고 한 글자나 세 글자 성씨도 많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7
  • 정산定山 김씨 金氏
    정산定山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7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