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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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原州② 이씨(李氏)
    원주原州②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98
  • 평산平山 김씨 金氏
    평산平山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97
  • 청주 근씨(淸州 斤氏)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에 위치한 도청소재지로써  원래 마한(馬韓)의 영토였으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상당현(上黨縣) 또는 낭비성,  낭자곡(娘子谷) 등으로 불리웠다.
      685년(신라 신문왕 5)에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제35대  왕, 재위기간:742∼765)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되었고, 그후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근씨(斤氏)의 본관(本貫)은 청주 단본(單本)으로  전(傳)하며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세도면(世道面) 청송리(靑松里)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근씨(斤氏)는 남한(南韓)에 110가구, 4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95
  • 영양,의령,고성 남씨(英陽,宜寧,固城南氏)
    영양(英陽)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의 고은현(古隱縣)을 신라 말(新羅末)에 영양(英陽) 또는 연양(延陽)이라 하였다가 940년(고려 태조 23) 영양현(英陽縣)으로 개칭하였다. 1018 년 예주(禮州)에 속하였다가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1413년(조선 태종 13)에 다시 영양으로 고쳐 숙종(肅宗) 때 현(縣)을 두었으며, 남면(南面), 동면(東面), 덕봉(德峰), 수비(首比)를 진보현(眞寶縣)에 청기(靑杞), 석보(石保)는 다시 영해현(寧海縣)으로 예속시켰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될 때 활속되었다.
    중국(中國)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인 김 충(金 忠)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日本)에 갔다가 귀로(歸路)에 태풍(颱風)을 만나서 신라(新羅)의 인근 지역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죽도(慶北盈德郡丑山面丑山洞竹島)에 표착(漂着)하였다.
     그는 신라에서 살기를 원하여 경덕왕(景德王)이 이러한 사실을 당천자(唐天子)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천자는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 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후에 영의(英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로 인하여 우리나라 남씨(南氏)가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왔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남씨(南氏)의 본관(本貫)은 60여 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는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들이 전국(全國)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지명(地名)에 불과하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이다.
     남 씨(南 氏)는 고려 중엽에 와서 시조(始祖)인 남 민(南 敏)의 후손 3형제가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갈라져서 맏형인 홍보(洪輔)가 선조(先祖)의 대(代)를 이어 영양(英陽)에,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에,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세 계통으로 분관(分貫)하였다.
     가문(家門)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영양 남씨에서 홍보의 손자 숙손(淑孫)이 고려 고종(高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걸쳐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을 지냈고, 숙손의 현손(玄孫) 영번(永蕃)은 신호위 보승중랑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조선(朝鮮) 최고의 역술가로 유명했던 사고(師古)는 이조 좌랑(吏曹佐郞) 희백(希伯)의 아들로 풍수(風水), 천문(天文), 점복, 상법 등에 통달하여 그의 예언은 적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명종(明宗) 말년에 조정의 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했으며, 선조(宣祖)가 잠저(潛邸) 때 사직동(社稷洞)에 있다가 왕위(王位)를 이은 것을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예언으로 적중시켜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외 임진왜란 때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경주(慶州)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된 의록(義祿)과 경훈(慶薰)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운 율(慄 : 감찰어사 수의 7세손)과 거창 부사(居昌府使) 노명(老明)은 [남종통기(南宗通記)]를 저술한 제명(濟明), [계 각촬요(溪刻撮要)]의 저자(著者) 공수(公壽)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으며,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한 구명(九明)은 숙종(肅宗)이 그의 이름을 대궐 기둥에 적어 모범으로 과시했다고 한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人財)를 배출한 의령(宜寧) 계통은 군보(君甫)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고려조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입사(入仕)하여 익대보조찬화공신(翊戴補祚贊化功臣)으로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재(在)는 초명(初名)이 겸(謙)이었으나 공신(功臣)으로 봉해지는 것을 사면하려고 지방(地方)으로 피신하자 태조(太祖)가 그를 찾으려고 무척 애쓴 끝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와 이름을 재(在)로 사명(賜名)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특히 그는 술을 좋아하고 도량이 컸으며 정승 반열에 있으면서도 정사(政事)에는 항상 비판적이었다. 그가 손님이 오면 바둑 두기를 좋아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산 사람은 기운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게 되면 조정의 일에 말을 비치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둑을 두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우 은(誾)은 성품이 호기롭고 뛰어나 어릴 때부터 기묘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우왕(禑王) 때 사직단직(社稷壇直)으로 있었던 그는 왜적이 침입해오자 자청하여 지군사(知郡事 : 군수)로 나가 기병(騎兵) 10여 명으로 대파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을번의 아우 을진(乙珍)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隱居)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며 일생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을진의 후손에 서는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치신(致信 : 을진의 손자)의 아들 포(褒)와 곤(袞)이 유명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청맹(靑盲)으로 행세하며 벼슬을 버리고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던포 는 항상 무명베갓에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 또는 소요자(逍遙子)라 일컬었고 가는 곳마다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세상에서는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그가 병이 나서 감파동(紺波洞) 재사(齋舍)로 돌아와 아들 정진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네가 여덟 번 고을 벼슬을 제수받아 세 번을 사양하고 다섯 번을 나간 것은 노부모가 있으므로 뜻을 굽힌 것이나 우리집에는 선대의 토지와 집이 있어 족히 바람과 비를 가릴만 하고 토지는 죽이나 밥을 이어 먹을 만하니 나 죽은 뒤로는 다시 벼슬에 나갈 생각은 말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진 휘(暉)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도승지(都承旨) 조서로(趙瑞老)의 친족간음(親族姦淫)을 탄핵했던 지(智)는 재(在)의 손자로서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재(人財)가 배출되어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켰다. 휘(暉)의 손자(孫子)로 명장(名將)의 웅지(雄志)를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의 죽음에 그쳤는 이(怡)는 태종(太宗)의 외손(外孫)이며 좌의정(左議政) 권 남의 사위로 17세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고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 : 남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의 하나)를 토평하여 27세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예종(睿宗) 즉위년에 주살(誅殺)되어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조선의 역사 속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아까운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그외 지(智)의 증손으로 성종(成宗)의 부마(駙馬)였던 섭원(燮元 : 성종의 딸 취정옹주와 혼인하여 선천위에 봉해짐)과 치원(致元 : 성종의 딸 경순옹주와 혼인하여 선성위에 봉해짐)이 유명했고, 목사(牧使) 치욱의 아들 언경(彦經)은 서경덕(徐慶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한 수(韓 脩)와 더불어 조선조(朝鮮朝)  경학(經學)의 쌍벽으로 일컬어졌으며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 양근(楊根) 영천동(靈川洞)으로 돌아와 67세로 세상을 마쳤다.
     조선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효온(孝溫)은 사림(士 林)의 추앙받는 인물(人物)로 세조에게 물가에 이장된 소릉(昭陵 : 단종 모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했으나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과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이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유랑생활로 일생을 마쳤다.그가 만년에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는데 그의 문인(門人)들이 화(禍)가 두려워 말리자 "어찌 죽기를 두려워 대현 (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 "하며 야사(野史)로 완성했으나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이웅(以雄 : 참판 응운의 손자)과 인조조에서 대사헌(大司憲)과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이흥(以興)이 뛰어났으며, 숙종조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던 이성(二星 : 현감 식의 아들)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던 용익(龍翼)은 약천(藥泉) 구만(九萬)과 함께 조선말에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1629년(인조 7) 현령(縣令) 일성(一星)의 아들로 태어난 구만은 효종(孝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문장과 서화로 이름을 떨쳤고, 숙종조에 소론(小論)의 영수가 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내며 당파싸움이 격렬했던 당시 정계(政界)를 주름잡은 명신(名臣)이었다.
     대제학 용익의 증손 유용(有容)은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1764년(영조 40) 우빈객(右賓客)이 되어 치사(致仕)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그의 아들 공철(公轍)은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당세의 명문장가로 손꼽혔다.
     고성(固城) 계통의 인맥(人脈)으로는 고려에서 은청광록대부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도정(途庭 : 광보의 증손)과 7 세손 금(琴)이 뛰어났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기(奇)의 아들로 태어난 금은 조선조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수문(秀文)은 세종 때 최초로 호당(湖堂)에 뽑힌 인물이다. 금의 손자 세주(世周)는 연산군의 황음(荒淫 :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을 직간(直諫)하다가 화(禍)를 입었고, 계신(繼身)의 아들 추는 중종(中宗) 때 장원급제하여 글재주로 명성이 높았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삼계(森溪)로 물러가 시작(詩作)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외 임진왜란 창의(倡義)하여 선무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던 수일(守一)과 정난공신(靖亂功臣)에 책록되었던 치공(致恭)이 대표적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씨는 남한에 총 53,011 가구, 222,246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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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동방씨(晋州東方氏)
    진주 동방씨(晋州東方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제30대 왕, 재위기간:661∼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동방씨(東方氏)는 중국 제남(濟南:지금의 산동성 역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고대 복희씨(伏羲氏)가 동방의 진(震) 땅에서 나왔다고 하여 동방(東方)을 성(姓)으로 삼은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동방씨(東方氏) 연원(淵源)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으로는 진주(晋州)와 청주(淸州)가 있으나 시조가 분명하지 않다. 진주 동방씨(晋州東方氏)는 중시조(中始祖)로 알려진 동방 숙(東方淑)이 1792년(정조 16)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60여 가구 중 50가구가 평안북도에 살고 있었으며 1960년 국세조사 때는 95명으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41가구, 1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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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양이씨(興陽李氏) 이씨(李氏)
    흥양이씨(興陽李氏)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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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산·봉주 지씨(鳳山·鳳州智氏)
    봉산·봉주 지씨(鳳山·鳳州智氏)

     봉산은 황해도 중앙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때 휴암군 또는 조파의·휴류성 등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 때 서암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개칭하여 방서사를 두었으나 현종 때 폐하고 황주(黃州)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충렬왕 때 봉양군으로 고쳐 지사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봉주로 개칭하였으며, 조선조에 와서 태종이 봉산군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봉산 지씨의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고려 때의 명장인데,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그는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아 난이 평정된 후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고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직했다.
     후에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덕종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봉산(鳳山 : 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지씨의 본관을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봉주 단본으로 전한다. 시조 채문의 증손 녹연(祿延)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고 1104년(숙종 9)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사어사(殿中寺御史)가 되었으며, 예종 때 내시지후를 거쳐 경상도 안무사(按撫事)·동북면 병마사(兵馬使) 등을 역임한 후 1125년(인조 3)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 현의 별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에 들어간 뒤 전세록·김여간·계숭로·임여택 등과 함께 선천의 월봉에서 천 여명의 의병을 모아 적을 대파하였으므로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봉주 지씨는 남한에 총 1,158가구, 4,9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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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씨(君氏)





     군씨(君氏)

      군씨(君氏)는 주(周)나라 성왕(成王:무왕의 아들) 때 중국(中國) 안문(上門:산시성  북부를 남북으로 달리는 내장성 연변의 요지)에서  계출(系出)된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傳)해지며,  우리 나라 군씨(君氏)는 동래(東萊)한 연유와 시대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남(慶南)  김해군(金海君) 진영읍(進永邑) 진영리(進永里)에 군점득(君鮎得) 1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군씨(君氏)는 남한(南韓)에 49가구, 2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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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령 사공씨(孝令司空氏)
    효령 사공씨(孝令司空氏)

     효령(孝令)은 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모혜현(芼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효령(孝靈)으로 고쳐 숭선군(崇善郡:선산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상주(尙州)에 속하였다가 1143년(인종 21) 일선군(一善郡:선산)에 환속하였으며, 공민왕조(恭愍王朝)에 군위(軍威)에 합해져 지금은 군위군에 속한 효령면(孝令面)으로 남아 있다.  사공씨(司空氏)는 중국(中國) 돈구(頓丘:직예성 대명도 청풍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진(晋 )나라 때 가신(賈辛)이란 사람이 사공(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왕으로부터 벼슬 이름을 성(姓)으로 하사(下賜)받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사공씨의 연원(淵源)은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낸 사공도(司空圖)가 897년(신라 효공왕 원년) 8학사의 한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동방의 거유(巨儒)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유하며 당문화(唐文化) 보급에 앞장섰고, 그후 귀화하여 사공씨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불명(不明)하고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고려 충숙왕(忠肅王:제27대 왕, 재위기간 : 1313 ∼1370, 복위 : 1332 ∼1339)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의시사(判儀시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효령군(孝令君)에 봉해진 사공중상(司空仲常)을 중조(中祖)로 받들고 봉군지명인 효령(孝令)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중상(仲常)의 아들 실(實)이 1353년(공민왕 2) 이 색(李 穡)·박상충(朴 尙衷)·정 추(鄭 樞) 등과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광흥창사(廣興倉使)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한림박사(翰林博士)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을 떨쳐「동방명현록(東方名賢錄)」에 수록되었으며,그의 아들 민(敏)은 공민왕(恭愍王)과 창왕대(昌王代)에 걸쳐 사복시정(司僕시正)과 삼사 부윤(三司府尹)을 지내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개성 유수(開城留守) 달(達:민의 아들)의 아들 주(周)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올랐으나 세조(世祖)가 왕위찬탈의 음모를 꾸미자 낙향하여 세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편 경어재(耕漁齋) 주(周)의 아들 발(發)은 문종(文宗) 때 통훈대부(通訓大 夫)에 올랐으나 강직(剛直)한 성품으로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이들이 종파(宗派)·중파(仲派)·계파(季派)로 갈라져 가문의 중추(中樞)를 이루었다.
     성종(成宗) 때 선무랑(宣務郞)으로 개성부 직장(開城府直長)을 지낸 맏아들 비( )의 후손에서는 효성(孝誠)과 학문(學問)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精:비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지낸 회(誨:정의 손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선(銑),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의 용(鎔) 3부자가 유명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습(習)의 아들로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지낸 양(亮 )과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을 역임한 기(琦)의 형제가 뛰어났고, 찰방 용(鎔)의 손자 지(祉)는 숙종(肅宗) 때 용양위 부호군(龍양衛副護軍)을 역임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균(均), 순조(純祖) 때의 병마절제사(兵馬切除使) 현(鉉), 장악원정(掌樂院正) 억( 檍) 등과 함께 효령 사공씨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효령 사공씨(孝令司空氏) 남한(南韓)에 총 915가구,
    3,6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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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평 야씨(原平夜氏)

    원평 야씨(原平夜氏)

     원평(原平)은 파주(坡州)의 옛 지명이다. 파주(坡州)는 경기도의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475년(고구려 장수왕 63)에 파주사현(坡州史縣)이라 칭하였고, 1398년(태조 7)에는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坡平縣)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였으며, 1415년(태종 15) 교하현(交河縣)을 폐지시켜 이에 병합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뒤에 교하현을 다시 복구시켰으나 도호부는 그대로 두었다.
     1461년(세조 7)에 파주 목(牧)으로 승격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본주(州)를 유행지소(遊幸之所)로 삼고 나머지 땅은 인접 고을에 소속시켰다가 1506년(중종 1) 파주목으로 복귀, 1895년 파주군(坡州郡)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하군을 폐합하였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야씨(夜氏)는 원평(原平), 개성(開城), 석천(石淺 : 교하지방), 봉성(奉城 : 파주지방)의 4본(本)이 전한다. 원평 야씨(原平夜氏)의 시조(始祖)인 야선조(夜先祖)는 대호군(大護軍)으로 1303년(충렬왕 29) 원(元)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고, 그 뒤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야씨(夜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북한지역에만 42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43가구, 1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75
  • 파릉 초씨(巴陵楚氏)
    파릉 초씨(巴陵楚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庭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景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온 옛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초씨(楚氏)는 중국(中國) 강릉(江陵)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초씨(楚氏)의 연원(淵源)은 1644년(인조 22)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초해창(楚海昌)이 명(明)나라가 망하고 청(淸)나라가 새로 일어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우리나라에 망명(亡命)하여 충의 장군(忠義將軍)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성주(星州)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그 후 그의 아들 수명(壽命)이 청(淸)나라가 밀파(密波)한 자객(刺客)을 피하여 명(明)자가 붙은 고을을 찾아 함북(咸北) 명천(明川)에 은거(隱居)한 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초해창(楚海昌)을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옛 고향인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초씨(楚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문헌(文獻)에 성주(星州)·청주(淸州)·강릉(江陵)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이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파릉(巴陵) 단본(單本)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른 성씨(姓氏)와는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초씨(楚氏)의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효행(孝行)으로 명성을 날려 효자 정문(孝子旌門)이 세워진 중연(重燕)과 용안 현감(龍安縣監)을 지낸 각(珏)이 유명했고, 헌종(憲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병덕(秉悳)은 정평 군수(定平郡守)를 지낸 우섭(禹燮)과 함께 파릉 초씨(楚氏) 가문을 빛냈다.
     이밖에도 효자(孝子)로 칭송을 받았던 원명(原明)과 선(璿)이 유명했으며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갑( )이 당대에 뛰어났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초씨(巴陵楚氏)는 남한(南韓)에 총 47가구, 2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74
  • 유적의 명칭(名稱)

     [전(殿)]
      궁궐,향교,절 등과 같이 여러 채의 건물이 있을 때,그 중에서 가장 큰 집을 일컫는 말이다.
      
      예) 대성전(大成殿), 대웅전(大雄殿)

     [묘(廟)]
      세상에 공적을 남기고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예) 종묘(宗廟), 문묘(文廟)

     [사우(祠宇)]
      학문과 덕행(德行)이나 무공(武功)을 세운 인물의 위업(偉業)과 그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   로 신주(神主)를 모신다.
      옛날에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3년상을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5대손에 이르러서 매주(埋主)하고 산   소에서 시제(時祭)를 지냈다.

     [부조묘(不조廟)·불천위(不遷位)]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명예로운 조상으로서 그 위패(位牌)를 옮기지 아니하고 대대로 모시는 건물이다.   교묘(郊廟) 또는 조묘(조廟)라고도 한다.

     [별묘(別廟)]
      묘와는 달리 특별하게 따로 지은 사당(祠堂)을 말한다.

     [영당(影堂)]
      조상의 영정(影幀: 肖像)을 모시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당(堂)]
      거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특별히 지은 집 또는 공청(公廳)을 뜻한다.
      
      예) 명륜당(明倫堂)

     [원(院)]
      거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건물과 정원을 뜻한다.

     [정사(精舍)]
      학문을 쌓고 수양하거나 또는 풍월(風月)을 즐기기 위하여 세운 집을 말한다.

     [정문(旌門)·정려(旌閭)]
      효행(孝行), 충절(忠節), 정절(貞節)이 뛰어난 사람의 그 뜻을 높이고 다른 사람에게 권장하기 위하여   국가 또는 사회에서 표창하는 문(門)이다.

     [유허비(遺墟碑)]
      선조(先祖)들이 살았던 곳 또는 그 위엄을 기리던 곳에 자손이나 친지들이 그 터를 보존하기 위하여 세   우는 비(碑)이다.

     [신도비(神道碑)]
      나라에 크게 공헌하며 거룩하게 산 사람의 일생 동안의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 세우   는 비(碑)이다.

     [재실(齋室)]
      조상의 제사를 경건하게 받들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단정히하고 제수를 장만하기 위하여 특별히 지어   놓은 집.

     [단(壇)]
      묘소를 실전(失傳)하였거나 아예 묘소가 없는 사람의 체백(體魄)을 모신 것처럼 묘소나 비를 세워놓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헌(軒)]
      마루 또는 공청(公廳)을 말 한다.
      
      예) 오죽헌(烏竹軒)

     [루(樓)와 각(閣)]
      높다랗게 지은 건물이다.
      
      예) 광한루, 촉석루

     [대(臺)]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관망이 좋은 곳에 세워진 건물 또는 축대이다.   
      
      예) 해운대, 경포대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73
  • 원주原州 김씨 金氏
    원주原州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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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산 감씨(檜山 甘氏)





     회산 감씨(檜山 甘氏)

      회산(檜山)은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창원(昌原)의 별칭(別稱)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6가야(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에 속했었다. 
     그 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제35대 임금,재위기간;742~765) 때 의안군(義安郡)이라 하였으며,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제25대 임금, 재위기간;1275~ 1308) 때는 의창현(義昌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서기 1413년(조선 태종13)에 이웃 회원현(檜原縣)과 합하여 창원부(昌原府)가 되었다.
     감씨(甘氏)는 본래 중국(中國) 발해(渤海) 주왕(周王)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땅 이름을 따서 감씨(甘氏)의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감씨(甘氏)의 본관(本貫)은 회산(檜山), 합포(合浦), 거창(居昌), 창녕(昌寧), 충주(忠州), 부령(富寧) 등 6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우리나라 감씨(甘氏)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임에는 틀림이 없다.
     <회산감씨대동보(檜山甘氏大同譜)>에 시조(始祖) 감 규(甘 揆 : 자는 양원, 호는 연강)는 원(元)나라  성종조(成宗朝 : 서기 1295 ~ 1307)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51년(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를 배행(陪行)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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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順天 김씨 金氏
    순천順天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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