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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천永川 김씨 金氏
    영천永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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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 갈씨(南陽 葛氏)





     남양 갈씨(南陽 葛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시대의 당성군(唐城郡)이었다. 
     그 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되었으며 서기 1018 년(고려 현종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 남양부(南陽府)로 되었다. 
     남양 갈씨(南陽葛氏)는 본래 복성(複姓)인 제갈씨(諸葛氏)에서 갈라진 성씨(姓氏)이다.

     <남양제갈세보(南陽諸葛世譜)>에 의하면 제갈씨(諸葛氏)의 시조(始祖) 제갈 규(諸葛珪)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제갈 량(諸葛亮 : 제갈공명)의 아버지로 전하며, 그의 20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興德王:제42대 왕, 재위기간;826~836) 때 귀화(歸化)한 것이 우리나라 제갈씨(諸葛氏)의 시초라고 한다. 
     그 후 고려(高麗)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4 ~ 1259) 때에 이르러 제갈 홍(諸葛泓)과 제갈 형(諸葛瀅)의 두 형제가 복성(複姓)인 제갈씨(諸葛氏)를 한 자(字)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인 홍(泓)은 제씨(諸氏)로, 아우 형(瀅)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칠원제씨족보(漆原諸氏族譜)>에는 이들 홍(泓)과 형(瀅)의 형제가 고려 현종(顯宗) 때 사람인 제갈 한(諸葛漢)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갈씨(葛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서원(西原 : 청주의 다른 이름)을 비롯하여 양성(陽城), 양주(楊州), 청풍(淸風), 청산(靑山), 죽장(竹長), 해남(海南), 비안(比安) 등 22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남양(南陽)을 제외한 관향(貫鄕)은 미상이다.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 형(瀅)의 아들 현(俔)이 고려(高麗)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고, 손자(孫子) 은(隱)은 벼슬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서성백(西城伯)에 봉해졌다.
     그 외 고려 때 태수(太守)를 지낸 춘(椿)과 희(熙)의 부자(父子),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현(顯)이 유명했으며, 대구군(大丘君) 원( )은 부사(府使)를 역임한 지만(芝蔓), 효자(孝子)로 이름난 덕래(德來)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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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천熙川 김씨 金氏
    희천熙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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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月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박 혁거세
    (朴赫居世)가 개국하여 사로국(斯盧國),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불려오던 중
    65년(탈해왕 9)에 계림(鷄林)으로 개명되었고, 기림왕(基臨王) 때 다시 신라로 고쳤으나 고려 때 경주(慶州)로 개칭하였다.
     987년(성종 7)에는 동경(東京)이라 하고 목종(穆宗) 때 낙랑군(樂浪郡)으로 강등하였다가 현종(顯宗) 때 다시 경주라 하였으며, 이후 안동대도호부·경주목 등으로 변천해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불렀다.
     1415년(태종 15) 경주부로 다시 고치고 1895년(고종 32)에 경주군(慶州郡)이 되었으며, 1955년 8월 경주시를 설치하면서 종전의 경주군의 나머지 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제4대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 재위기간 : 57 ~ 80)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탈해왕(脫解王)의 탄생(誕生)에 대한 신화(神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왜국(倭國)의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 삼국사기에는 龍城國이라 함)의 왕이 여왕국(女王國)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이했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더니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좋겠다"고 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우고 떠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궤짝을 실은 배는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자, 배는 다시 계림(鷄林)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下西知村阿珍浦 : 지금의 영일만)에 닿으니 이때가 기원전 19년(신라 혁거세 39)이었다.
     이 때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이를 보고 새끼줄로 배를 매어 해안으로 끌어 올린 후 궤를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키가 9자나 되고 풍모가 준수하여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여 처음 배가 올 때 까치가 울면서 따라 왔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새조(鳥)를 떼어 버리고 석(昔)을 성으로 삼고, 포장한 궤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추호도 게으름을 피는 기색이 없었고, 자라면서 학문(學問)과 지리(地理)에 능통하여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남해왕(南解王)이 맏공주를 그에게 주고 대보(大輔)로 등용하여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57년 유리왕(儒理王 : 제3대 왕,  재위 기간 : 24 ~ 57)이 임종에 이르자 "아버지 남해왕이 고명(顧命)할 때 '내가 죽은 뒤 아들이나 사위를 논할 것 없이 연장자나 어진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라'하여 과인이 왕위에 올랐으니 지금에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신라 제4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석씨(昔氏)는 신라 56대왕 중 4대 탈해왕을 비롯하여 89대 벌휴왕(伐休王), 10대 내해왕(奈解王), 11대 조분왕(助賁王), 12대 첨해왕(沾解王), 14대 유례왕(儒禮王), 15대 기림왕(基臨王),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 8왕에 걸쳐 171년 간 왕통(王統)을 이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탈해왕을 시조로 받들고 월성(月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에서 교서랑(校書郞)을 지낸 석재흥(昔載興)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시종(時宗:재흥의 아들)과 밀직사(密直使) 운니(運尼)의 부자(父子)가 유명했으며, 좌복야(左僕射) 한일(漢一)의 아들 정민(貞敏)은 예의 시랑(禮儀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부사(府使) 상률(相律)과 판관(判官) 용진(龍眞), 부호군(副護軍) 광국(光國), 오위장(五衛將) 병권(炳權)이 뛰어났으며, 봉혁(鳳爀)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건민(鍵民)과 우성(羽盛)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월성 석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는 남한(南韓)에 총 1,932가구, 7,9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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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간 견씨(黃磵 甄氏)
    황간(黃磵)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소라현(召羅縣)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742~765) 때 와서 황간(黃磵)으로 고쳐 영동군(永同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견씨(甄氏)는 중국(中國) 중산(中山 : 광동성 남부의 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한(漢)나라 때 사람인 견풍(甄豊)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견씨(甄氏)는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을 시조(始祖)로 하는 황간견씨(黃磵甄氏)와 아자개(阿慈介)를 시조로하는 상주 견씨(尙州甄氏)가 있으며, 그외에도 남양(南陽), 청양(靑陽), 전주(全州) 등 9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견훤이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성(本姓)이 
    이씨(李氏)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동일혈족(同一血族)이 된다. 
     견훤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뜰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밥을 가져다 주느라고 아이를 숲 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고 하며, 고기(古記)에는 그의 출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한 부자(富者)가 살았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태가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을 찾아옵니다.”라고 하니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딸은 그 말을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 찾아가 보니 북쪽 담장 밑의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오늘날 견씨(甄氏)는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고,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전국에 90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60년 인구조사 때는 446명,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는 남한에 235가구, 990명이 세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23
  • 거제 반씨(巨濟潘氏)
     거제(巨濟)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해안(南海岸)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소가야국(小伽倻國)의 일부였던 독로국(瀆盧國)에 속했다가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상군(裳郡)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에 거제로 개칭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거창과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으로 불리다가, 1422년(세종4)에 거제현(巨濟縣)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895년(고종32)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반씨(潘氏)는 중국 형양(滎陽:지금의 하남성 개봉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의 아버지)의 여섯째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아들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은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유학자(儒學者)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족(名族)으로 일컬어진 반씨는 송(宋)나라 출신인 반 부(潘 阜)가 이종(理宗) 때 문과에 장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몽고정벌(蒙古征伐)을 간청했다.
     그런데 간신(奸臣)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은밀히 죽이게 하였으나, 원(元)의 세조(世祖:흘필렬)는 문무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사양한 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원재의 딸, 충렬왕비가 됨)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고려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巨濟)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반씨(潘氏)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挺)과 유항(有抗)을 시작으로 가세(家勢)가 일어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며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기성(岐城), 충주(忠州), 남평(南平), 결성(結城), 청도(淸道) 홍천(洪川), 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거제반씨정미대봉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에는 거제 반씨로 합보(合譜)하였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부(阜)의 증손(曾孫) 익순(益淳)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하평리(門下評理)을 거쳐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덕해(德海)와 복해(福海)이 현달하여 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신(名臣)으로 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복해는 왕이 사냥을 나가 말에서 떨어져 멧돼지의 습격을 받게 될 순간 활을 쏘아 왕을 위기에서 해낸 일화가 전하며, 밀직부사(密直府使)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추충양절익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에 올라 제성부원군(濟城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최 영(崔瑩)장군을 암살하려던 조 반, 임견미(林堅味)와의 관련 혐의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가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복권되었다.한편 복해의 아들 자건(自建)은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조(太宗朝)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영평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충(忠)도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좌명일등공신(開國原從佐命一等功臣)로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광주백(光州伯)에 추봉되었다. 세칭 절효선생(節孝先生)으로 불리웠던 유(儒)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해(德海)의 손자로서 부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에서 3년동안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湖)의손자 효손(孝孫)은 세조(世祖) 때 황주 목사(黃州牧使)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회령 부사(會寧部事)로 나갔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한 우형(佑亨)은 당세의 석학(碩學)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내고 기성군(岐城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청렴근엄(淸廉謹嚴)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던 석평(碩枰)은 1472년(성종 3) 부사과(副司果) 서린(瑞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광조(趙光祖)의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후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인후(仁後)은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조령(鳥嶺:문경 새재)에서 공을 세워,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순절한 중인(仲仁:공조 좌랑 응기의 아들), 중경(仲慶) 형제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과 싸우다가 강화(江華)에서 전사한 일량(日良)이 유명했고, 한말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분으로 할복자결한 하경(夏慶:일명 학영)이 가문을 대표했다.
     반씨(潘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12,881명, 1975년에는 3,548 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149가구, 21,5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19
  •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

     태원(太原)은 중국(中國) 산서성(山西省 : 서화현 급군)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기자(箕子)가
    상(商)나라 때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던 땅이다. 우리나라 선우씨(鮮于氏)의 성원(姓源)은 기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동래(東來)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우고 그의 맏아들 송(松)이 2대 장혜왕(莊惠王)으로 즉위하면서 아우인 중(仲)을 우(于) 땅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므로 조선의 <선(鮮)>자와 <우(于)>자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로 삼았다고 하며, 기자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태원(太原)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41대에 이르러 준(準 : 哀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천(南遷)하여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군)에 나라를 세워 마한(馬韓)이라 칭했으나 9대 계왕(稽王)에 이르러 백제(百濟)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 때 8대왕인 원왕(元王)에게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양(諒)이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龍岡郡)이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성(城:황룡산성)을 쌓고 창도(創都)하여 나라이름을 황룡(黃龍)이라 하며 선우씨의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양(諒)의 10세손 병(柄)이 301년(진나라 혜제 12) 고구려(高句麗) 미천왕(美川王 : 제15대 왕, 재위기간 : 300 ∼331)에게 나라를 빼앗겨 서민(庶民)으로 선우씨의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여 후손들은 고려 고종(高宗) 때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정(靖)을 일세조(一世祖) 받들어 계세(繼世)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지켜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신종(神宗) 때 중직대부(中直大夫)로 서운관정(書雲觀正)을 거쳐 죽주부윤(竹州府尹)을 지낸 석(碩 : 일 세조 정의7세손)과 그의 손자 당(  : 봉익대부로 상호군을 지냄), 증손 수(守 : 안흥부윤을 지냄)가 유명했다. 한편 부윤 수(守)의 아들 적(迪)은 공민왕(恭愍王) 때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소부시윤(小府시尹)을 지내고 태천(泰川)에 정착하여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는 데, 장남 경(景)이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신호위 중령별장(神虎衛中領別將)을 지내고 태천파(泰川派)를 이루었으며, 차남 현(賢)은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역임한 후 용천(龍川)에 별거(別居)하여 용천파(龍川派)의 파조(派 祖)가 되어, 이들 형제가 태원 선우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던 협(浹)은 1588년(선조 21) 숭인전감(崇仁殿監) 식(寔)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22세 때 김태좌(金台佐)에게 시 (詩)·서(書)·역(易)·춘추(春秋) 등을 배우고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가 퇴계 이 황(李滉)의 저서(著書)를 열람한 뒤 여헌(旅軒) 장현광 (張顯光)에게 도(道)를 물은 다음 용악산(龍岳山)에 들어가 후학(後學)을 가르치며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묘를 터득했다. 특히 그는 수차에 걸쳐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인조(仁祖) 말에 비로소 사업(司業)이 되어 치심궁리(治心窮理)의 요체와 입현무방(立賢無方)의 도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했으며, 예학(禮學)의 거두(巨頭) 김 준과 학문을 토론하여 당대에 이름난 학자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아 <관서부자(關西夫子)>로 일컬어졌다.
     그 밖의 인물로는 협의 8세손 석(석 : 연의 아들)이 순조(純祖) 때 등과하여 정언(正言)을 거쳐 찰방(察訪)·태안 군수(泰安郡守)·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 등을 지내고 철종(哲宗) 때 군자감정(軍資監正)과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으며, 후손 혁(爀)은 김 구(金九)·여운형(呂運亨)·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교통차관(交通次官)과 임시의정원 의원(臨時議政院議員)을 역임하여 태원 선우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는 남한(南韓)에 총 766가구, 3,0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17
  • 하남 정씨(河南程氏)
    하남(河南)은 중국(中國) 화북지구(華北地區) 남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북쪽은 하북(河北), 북동쪽은 산동(山東), 동쪽은 안휘(安徽), 남서쪽은 호북(湖北), 서쪽은 섬서(陝西), 북쪽은 산서(山西)의 각 성(省)과 접한다. 황하 중류 이남을 차지하며 북·서·남부는 산지로 쌓이고, 동방 평야에는 북에 황하, 남에 회하(淮河)가 흘러 수륙 교통이 편리하고 옛부터 한(漢) 민족의 활동 중심지였기 때문에 중원(中原)이라고도 한다.
     정씨(程氏)의 선계(先系)는 원래 중국(中國) 황제(皇帝)의 후손(後孫) 백부(伯符)에서 시작되며, 그의 45세손 원담(元潭)이 신안 정씨(新安程氏)로 분적(分籍)하였고, 원담의 31세손 우(羽 )는 하남 정씨(河南程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우(羽)의 18세손 사조(思祖)는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입국(入國)할 때 공한림(孔翰林)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려 충정왕조(忠定王朝)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냈고, 공민왕(恭愍王) 때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았으므로 후손들은 사조(思祖)를 동래조(東來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 헌(趙 憲)의 제자인 억강(億綱)이 당대에 뛰어났다. 그는 학문(學問)과 기절(氣節)이 뛰어난 선비로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충주(忠州) 달천(達川)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어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춘한(春漢)은 선조(宣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풍천 현감(豊川縣監)을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랐으며, 이복(履福)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또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연성(連城)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낸 진발(振發)과 진록(振錄)·부쾌(敷快) 등이 당대에 뛰어나 이름을 떨쳤으며, 대홍(大泓)·계홍(桂泓)·처근 (處根) 등은 다같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여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낸 병우(炳宇)와 함께 하남 정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남 정씨(河南程氏)는 남한(南韓)에 총 1,906가구, 8,0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17
  • 황주 변씨(黃州邊氏)
    황주 변씨(黃州邊氏)

     황주(黃州)는 황해도(黃海道) 중앙 북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동홀(冬忽 ) 또는 동어홀(冬於忽)이었으며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때 취성군(取城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高麗) 초에 황주(黃州)라 하였다. 983년(성종 2) 목(牧)을 두었고 그후 절도사(節度使)을 두었으며 천덕군(天德軍)이라 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가 또 목으로 고쳐 서해도(西海道)에 속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지고령군(知高寧郡)으로 강경, 후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으로 환원되었다. 1269년(원종 10)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고 1290년 서북면에 이관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서해도에 이관,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어 2도호부, 6군, 5현 등을 관할하여 오다가 1895년에 황주군이 되었다.
     황주 변씨(黃州邊氏)는 중국(中國) 농서 사람인 변 려(邊 呂)가 북송(北宋)이 망하자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황주(黃州)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황주로 하게 되었다.
     「황주변씨세보(黃州邊氏世譜)」에 의하면 변 려(邊 呂)는 1232년(고려 고종19) 몽고병(蒙古兵)이 송경(松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나간 고종(高宗)을 시종(侍從)하는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上將軍)로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은 것으로 전한다. 가통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려(呂)의 아들(允)이 고려 원종(元宗) 때 서해도  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제주도(濟州島)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우고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올랐으며, 9세손 정(靜)은 중군사정(中軍司正)을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참봉(參奉) 택(澤)의 둘째 아들 이중(以中)이 임진왜란 때 소모사(召募使)로 병마(兵馬)와 군기(軍器)를 수습했으며, 뒤에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화차(火車) 300량(輛)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 율(權 慄)을 도와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루게 하였고, 함안 군수(咸安郡守)로 나갔다가 사임하고 장성(長城)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중(以中)의 맏아들 경윤(慶胤)은 광해군(光海君)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학행(學行)로 명성을 떨쳤으며, 폐모론(廢母論)에 대의(大意)를 세워 반대하다가 삭직되자 두문불출( 杜門不出)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로 지평(持平)에 천거된 휴(烋)와 영조(英祖) 때 이름난 학자(學者)였던 괄( )이 유명했으며, 치명(致明)은 한성우윤(漢城右尹)과 공조 판서(工曹判書)을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치명의 아들 득양(得讓)은 정조(正祖) 때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라 아버지에 이어 기로소에 들어가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황주 변씨(黃州邊氏)는 남한(南韓)에 총 1,457가구, 6,3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9
  • 제주 초씨(濟州肖氏)
    제주 초씨(濟州肖氏)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島)으로 명칭은 도이(島夷)·주호(州胡)·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탁라(탁羅)·탐라(眈羅)·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新羅)의 속국이었던 탐라국(眈羅國)은 938년(태조 21)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숙종(肅宗) 때는 군(郡)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다가 1153년(의종 7) 군을 현으로 고쳤으며 1211년(희종 7)에 탐라를 제주라고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성주( 星主)·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어,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山北)을 제주, 산남(山南)을 양분하여 동쪽에 정의현(旌義縣),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여 통치하다가 1864년(고종 1) 대정·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 관찰사 관할하에 두었다.
     그 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910년(순종 4)에는 정의·대정 양현이 제주군으로 합군되는 동시에 추자면(楸子面)이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분리되어 제주군에 편입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5년 도사제(島司制)로 개편, 제주도(濟州道)가 되었고,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2시 2군 6읍 5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초씨(楚氏)의 연원(淵源)은 원(元)나라에서 투화(投化)했다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하고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시조(時調)인 초고도(肖古道)가 중국(中國) 한(漢)나라 사람으로 본성(本姓)은 조씨(趙氏)였는데 조자(趙字)의 주(走)를 떼어 버리고 초씨(肖氏)로 개성(改姓)하였다고 한다. 초씨(肖氏)의 본관(本貫)은 제주(濟州)가 단본(單本)이며, 역사상에 나타난 인물(人物)로는 조선조(朝鮮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초성기(肖星起) 한 사람이다. 현재 초씨(肖氏)는 제주도 좌면(濟州道左面)에 몇 가구(家口)가 살고 있는 것으로만 전하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초씨(濟州肖氏)는 남한(南韓)에 총 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9
  • 충주 평씨(忠州平氏)
    충주 평씨(忠州平氏)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 완장성( 長城), 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제24대왕, 재위기간:534-576) 때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태조23) 충주(忠州)로 개칭하고 뒤에 창화군(昌化郡)이라 하여 중원도(中原道)라 칭하다가 고종(高宗) 때 국원경(國原京)이 되었으며, 조선 명종(明宗) 때 유신현(維新縣)으로 부르다가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되었다. 그 후 많은 변천을 거쳐 고종때 20군(郡)을 다스리는 부(府)가 되었다가 1956년 충주면(忠州面) 일원은 충주시(忠州市)가 되었고 나머지는 중원군(中原郡)으로 고쳤다.
     평씨(平氏)는 중국 여남(汝南)에서 계출(系出)된 성씨(成氏)로서, 한(漢)나라 성제(成帝)때 평릉인(平陵人) 평 당(平 當)이 도위(都尉)를 지냈고, 식읍(食邑)의 지명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평씨(平氏)의 연원(淵源)은 문헌(文獻)이 전(傳)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931년(고려 태조14) 평 환(平 喚) 이라는 사람이 강덕진두(康德鎭頭)가 되었다는 기록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나타나 있다.
     평씨(平氏)의 본관(本貫)은 충주(忠州), 인주(仁州), 예산(禮山), 가흥(嘉興), 평원(平原)등 6본(本)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인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평씨(忠州平氏)의 시조(始祖)는 평우성(平友聖)으로 조선 인조(仁祖)와 선조대(宣祖代)의 사람이다. 우성의 아들 종현(宗鉉)이 호 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으며 그 외의 인물로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한 귀욱(貴郁)과 부사과(副司果) 왕손(旺孫), 주부(主簿) 경신(景臣)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 평씨(忠州平氏)는 남한에 총 116가구, 4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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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兪
    유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7
  • 평산 소씨(平山邵氏)
    평산 소씨(平山邵氏)

     평산(平山)은 황해도(黃海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 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 복구하였다. 1413 년(태종 13)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군이 되었다. 소씨(邵氏)는 중국(中國) 박릉(博陵: 산동성 동림도 박평현의 제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소공(召公)의 후예(後裔)가 소(召)자에다 우부방변(阜)을 붙혀서 성(姓)을 소씨(邵氏)로 삼았다고 전한다. 소씨의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익산(益山)·전주(全州)·경주(慶州)·서촉(西蜀)·남양(南陽) 등 무려 15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고 있으나 평산을 제외한 나머지 관항(貫鄕)에 대해서는 계대(系代)가 미상(未詳)하다. 평산 소씨(平山邵氏)의 시조(始祖) 소 옹(邵 雍)은 중국에서 영천단련추관(潁川團鍊推官)을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신안백(新安伯)에 봉해졌으며, 그 후 후손 태보(台輔)가 고려 선종(宣宗)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러 간신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를 시켜 그 일당을 주살케 하고 사전에 난을 평정(平定)시킨 공으로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가 되었으며 숙종(肅宗) 때 궤장을 하사(下賜)받았다. 명종(明 宗)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지낸 광빈(光賓)이 유명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를 역임한 은백(殷伯)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경휴(敬休)가 뛰어났고, 흥수(興秀)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한벽(漢璧), 장려원정(掌隷院正) 덕철(德哲)과 함께 평산 소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소씨(邵氏)는 남한(南韓)에 총 514가구, 2,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4
  • 개성 김씨(開城金氏)
    개성 김씨(開城金氏)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고려(高麗)의 수도(首都)로서 처음에는 송악(松岳)·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서기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주(開州)라 불렀고, 처음으로 시전(市廛 : 관설 상점가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점포를 대여,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점포세와 상세를 받음)을 설치하여 시가를 5부로 나누었으며, 서기 960년(광종 11)에 황도(皇都)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 개성으로 개칭, 1018 년(현종 9) 거란군의 침략으로 궁궐과 민가가 불에 타서 거의 없어지기도 하였다.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후손 충의공(忠毅公) 김용주(金龍珠)가 서기 1035년(정종 1)에 출생하여 1054년(문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功)을 세워 추충공신(推忠功臣)에 책록되고, 개성 부사(開城府使)와 평장사(平章事 :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거쳐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 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시조 용주(龍珠)의 손자 정신공(貞愼公) 준(晙)이 고려 예종(睿宗 : 제16대 왕, 재위기간 : 1106 ∼ 1122) 때 여진란(女眞亂)을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병부(兵部)·예부(禮部)·이부(吏部) 의 상서(尙書 : 육부에 속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그의 맏아들 지선(之宣)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차남 지경(之慶)은 상서(尙書)를 지냈고, 지선(之宣)의 맏아들 문원공(文元公) 원(源)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원(源)의 손자(孫子) 문민공(文敏公) 남보(南 寶)가 영상(領相 : 영의정의 별칭)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현덕(玄德)의 아들 무(茂)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당대의 이름난 화가(畵家)로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에 이른 응환(應煥)은 1788년(정조 12) 왕명(王命)으로 내·외 금강산(內外金剛山)을 유력(遊歷)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충장공(忠壯公) 절(節)은 일찍이 조 헌(趙 憲)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익혀 경학(經學)에 밝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 헌을 따라 고향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보은(報恩)·공주(公州)·청주(淸州) 등지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으나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과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宣祖) 임금이 시호(諡號 : 경상·유현들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와 함께 정려(旌閭)를 내려주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서기 1603년(선조 36)에 태어난 여량(汝亮)은 10세 때부터 김 집(金 集)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633년(인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겸 승문원 박사를 거쳐 1640년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시작으로 외직에 나가 1671년(현종 12)까지 32년 동안 해미(海美)·인제·재령·창원·영월 등 12읍의 군수(郡守)·현감·부사(府使) 등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다섯 고을에 <청백송덕동비(淸白頌德銅碑)>가 세워졌으며, 1672년에는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에 오르고 1682년(숙종 8) 승지(承旨)가 되어 3대에 걸쳐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하의 관계)의 영예를 추증받아, 현감(縣監)을 지낸 순룡(舜龍)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에 의하면 개성 김씨(開城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568가구, 18,7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1
  • 보첩의 제반 용어 해설

    가.  시조, 비조, 중시조 
      시조란 제일 처음의 선조로서 제일 첫번째 조상이며 비조란 시조 이전의 선계 조상 중 가장 높은 사람   을 일컫는다. 중시조란 시조 이하의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조상을, 모든 종중의 공론에 따라 정   하여 추존한 사람이다.

      나.  선계와  세계
      선계란 시조 이전 또는 중시조 이전의 조상을 일컫는 말이며, 세계란 대대로 이어가 는 계통의 체계를   말한다.

      다.  세(世)와  대(代)
      시조를 1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갈 경우에는 세라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로 하여 올라가며 계   산하는 것을 대라 한다. 또한 자기의 조상을 몇대조 할아버지라고 하고, 자신은 시조 또는 어느 조상으   로부터 몇세손 이라고 한다.

      라.  이름자
      요즘은 이름을 하나로 부르지만 옛날에는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을 아명, 우리   가 익히 아는 자는 20세가 되면 요즘의 성년식과 같이 관례를 행하는데 여기에는 식을 주례하는 주례   자가 있어 예식을 거행함과 함께 지어준 것이다. 또한 가문의 항렬자에 따라 족보에 오르는 항명과 특   별히 따로 부르는 별호가 있다. 우리는 보통 윗 어른의 이름자를 말할 때 결례를 범하는 경우가 많은데   살아 계신 분에 대하여는 함자라 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는 휘자라 한다.

      마.  항렬과  항렬자
      항렬이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 율법이며, 항렬자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돌림자라고도 한다. 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와 배합법까지를 미리 정해 놓아 후손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관례로 만들어 놓았다. 

      바.  후사와  양자
      후사란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계대를 잇는 자손을 말한다. 만약 계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   무후",  양자로  출계하였을 경우에는 "출후",  서얼로서 입적 되었을 경우에는 "승적", 그리고 후사가   확실치 않아 확인할 수 없을 때에는 "후부전" 이라 칭한다.  

      사.  묘소
      묘소란 분묘의 소재지를 말하는 것으로 족보에는 "묘"자만을 기록하고 좌향과 석물 등이 있을 경우에   는 이를 표시하며, 합장의 여부등도 기록한다. 좌향은 대개 ( )좌로 표시하는데 자좌라 하면 자는 정북   을 나타내며 북을 등졌다는 뜻으로 정남을 가리키 는 것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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