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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성鶴城 이씨(李氏)
    학성鶴城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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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창 맹씨(新昌孟氏)
    신창 맹씨(新昌孟氏)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 王)이 기량현(祁糧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高麗) 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히여 1018 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있다.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平陵:협서성 관중 도)에 연원(淵源)을 두고,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號)가 맹손(孟孫)이라서 맹(孟) 자(字)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아성(亞聖) 맹자(孟子)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기원전 372년 경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 있었던 추(趨)에서 태어난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발전시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제(齊), 양(梁) 등의 제후(諸侯)에게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한 인의(仁義)의 정치를 권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와 토론하였고,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으로 숭앙(崇仰)되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날렸다. 어릴 때 현모(賢母) 장씨의 밑에서 자라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아들의 면학을 위하여 세 번을 이사함)>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으며 짜던 베틀의 씨 날을 칼로 자름)>의 유명한 고사(故事)를 남겼다. 우리나라 맹씨(孟氏)는 맹자(孟子)의 40세손 맹승훈(孟承訓)이 888년(신라 진성왕 2) 당(唐)나라 한림원(翰林院)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경전(經典)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 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맹씨의 본관(本貫)은 신창(新昌)을 비롯하여 온양(溫陽), 파주(坡州), 양주(楊州), 청주(淸州), 안읍(安邑:옥천지방), 천안(天安), 전주(全州) 등 3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거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 전서(禮部典書)에 오른 맹 의(孟義)를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儀)는 역신 조 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충선왕(忠宣王)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신창(新昌)으로 하게 되었다. 신창 맹씨의 역대 인물을 살펴보면 일세조의(儀)의 아들 유(裕)가 고려(高麗)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역임했고, 고려가 망하자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절(忠節)을 지켰다.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 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내며 길 재(吉再),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고, 공양왕(恭讓王) 때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나 어지러운 정계(政界)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온양(溫陽)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隱居)하면서 호(號)를 동포( 東浦)라 하였다.
     희도(希道)의 아들이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상(名相)으로 손꼽히는 고불(古佛) 사성(思誠)이다. 고려 말의 명장 최 영(崔瑩)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성(天性)이 효도하고 청백(淸白)하여 정승의 벼슬 에서도 권세(權勢)를 철저히 배제했고, 청결하고 간고(簡古)하여 늘 상민차림으로 소(牛)를 타고 나들이를 하여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오가는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한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더니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그가 하인더러 이르기를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 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세종조상신편(世宗朝相臣編)>에 보면 그에 대한 유명한 <공당문답(公堂問答)>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가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렸더니, 행차를 성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그는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 시험에 응하러 가는 자였다. 그 선비는 맹정승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맹정승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다시 "무슨 벼슬인공"하니 "녹사 시험보러 간당" 하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하니 그 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후일 맹정승이 의정부에 앉아있는데 그 사람이 시험을 치러 들어왔다.
     그 사람은 눈앞의 정승이 전날에 장기를 두며 농담하던 그 노인인줄 알지 못했으나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서 깨닫고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하니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김으로 맹정승이 그 까닭을 애기하자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고, 맹정승의 추천으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맹정승은 죽어서  곁에 남긴 것이 한 자루의 피리뿐이었다고 하며, 유명한 황 희(黃喜) 정승과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여 후세의 신망받는 명상으로 일컬어졌다.
     사성(思誠)의 아들 귀미(歸美)와 득미(得美)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석흠(碩欽)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고, 후손  세형(世衡)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1623년(인조 1)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 선산(善山), 장흥(長興)의 부사(府使)를 거쳐 6차례나 시정(侍正)을 지냈다.
     그외 세형의 아들 주서(胄瑞)가 황해(黃海)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주서의 아들 만택(萬澤)은 관찰사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지리(地理)에 글씨에 능했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의병(義兵)을 모아 동학난(東學亂)으로 혼란해진 치안(治安)을 유지하고,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순절한 영재(英在)가 유명했다.
     신창 맹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11,000명, 1975년에는 2,928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926가구, 16,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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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성 선씨(寶城宣氏)
    보성 선씨(寶城宣氏)

     보성(寶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 (太祖)는 삼양군
    (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개칭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전라도에 소속되면서 다시 보성군이 되었다. 선씨(宣氏)는 중국(中國) 시평(始平:협서성 관중도 흥평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선백(宣伯)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선씨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인 선윤지(宣允祉)가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우문각 대제학(右文閣 大提學)을 지낸 선원지(宣元祉)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선천계(宣天桂)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이 있었는데,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밝혀져서 1978년 합의에 의하여 동행(同行)으로 합보(合譜)를 하였다.조선조에서 충렬(忠烈)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진 보성 선씨는 시조의 아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고, 증손 화(和:호조 참판 광유의 아들)는 태종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군수(郡守) 화의 아들 형(炯)은 1451년(문종 1) 17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과 경성 부사(鏡城府使)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라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할 때 무공(武功)을 세워 좌리사등공신(左理四等功臣)으로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뒤에 영안북도 수군절도사(永安北道水軍節度使)로 북면의 야인 정벌에 유공하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고, 시조를 비롯하여 거이(居怡:형의 증손)·세강(世綱:시조의 9세손)·약해(若海:시조의 10세손)와 더불어 <선씨오충신(宣氏五忠臣)>으로 일컬어졌다. 문종(文宗)때 순무사(巡撫使)를 지낸 청유(淸裕)의 아들 국충(國忠)은 세조(世祖)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형(炯)의 증손 거이(居怡:도사 상의 아들)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비장(飛將) >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특히 지략(智略)이 뛰어났던 거이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녹둔도(鹿屯島)에서 여진족(女眞族)을 격퇴시키는데 무용(武勇)을 떨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부원수(副元帥)를 겸하여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慄)과 함께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운봉(雲峰) 싸움에서 큰 공(功)을 세웠으며, 7도의 병마사(兵馬使)를 겸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함대에 종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울산(蔚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 從功臣)에 책록되고 정문(旌門) 이 세워졌다. 부사(府使) 의문(義問)의 아들 약해(若海)는 선조(宣祖)와 인조대(仁祖代)에 문·무(文·武)양과에 급제하여 사신(使臣)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심양일기(瀋陽日記)」를 남겼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롭게 순절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사기(史記)에는 약해(若海)의 마지막 전투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43년(인조 21)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고기 떼와 같이 행진해 오는 것을 보고 아군이 맞이하여 한바탕 쏘아서 적병의 용감한 자가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총을 함부로 쏘아 화약이 이미 다 되었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보내라고 연달아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독전하여 앞으로 나
    와 아군의 목책(木柵)에 다 가왔다. 이 때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감 당하며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자기 자리에 딱 버티고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약해와 함께 충절(忠節)로 가세(家勢)를 드높인 세강(世綱 : 봉장의아들)은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때 경기 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을 감축(監築)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광주 쌍령(廣州雙嶺)에서 적과 대전중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선조 4위와 더불어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9세손 극례(克禮)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무용(武勇 )을 떨쳐 명망이 높았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왜군 섬멸에 전공을 세웠으나 잔적을 소탕하다가 아깝게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해수(海壽)는 판관(判官)으로 전장에서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계승하였다. 세강의 아우 세휘(世徽)는 문신(文臣)으로 유명했는데, 전적(典籍)과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장령(掌令)을 지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데 가담했다가 화(禍)를 입었다.
      여경은 임진왜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 였고 평양(平壤) 전투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여룡(汝龍), 호조 참의(戶曹參議) 중의(仲義 ), 좌랑(佐郞) 경백(敬伯), 군수(郡守) 의경(義卿) 등과 함께 보성 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씨(宣氏)는 남한(南韓)에 총 7,754  가구, 33,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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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천-연일(烏川-延日) 김씨 金氏
    오천-연일(烏川-延日)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65
  • 기제사 지내기




    제사 지내는 전통예절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음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제사를 등한히 하고 조상에 대한 자손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결과로 생각된다. 자기를 낳아 길러주고 돌보아 주신 선조에 대해 정성을 다하는 예(禮)로서 제사는 자손의 당연한 도리라 하겠다.





     

     






    기제사 상 차리기

     


     

    다음은 우리나라 향교에서 권하는 기제사상 차리는 법입니다.




    1. 과일을 놓는 줄 (그림의 1번 줄);
     조율이시라하여 좌측부터 대추, 밤, 배(사과), 감(곶감)의 순서로 차리며(조율시이의 순서로 하기도 한다), 그 이외의 과일들은 정해진 순서가 따로 없으나 나무 과일, 넝쿨과일 순으로 차린다. 과일 줄의 끝에는 과자(유과)류를 놓는다.

    2. 반찬을 놓는 줄(그림의 2번 줄);
     좌포우혜라하여 좌측 끝에는 포(북어, 대구, 오징어포)를 쓰며 생채 다음 우측 끝에는 혜(식혜)를 쓰기도 한다. 그 중간에 나물반찬은 콩나물, 숙주나물, 무나물 순으로 올리고, 고사리, 도라지나물등을 쓰기도 하며 청장(간장) 침채(동치미,겨울철)는 그 다음에 올린다.

    3. 탕을 놓는 줄(그림의 3번 줄);
     대개는 3탕으로 육탕(肉湯 ;육류 탕), 소탕(素湯 ;두부,채소류 탕), 어탕(魚湯 ;어류 탕)의 순으로 올리며, 5탕으로 할 때는 봉탕(닭,오리탕), 잡탕등을 더 올린다. 최근 들어서는 가정의례준칙등의 영향으로 한가지 탕으로 하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4. 적과 전을 놓는 줄(그림의 4번 줄);
     대개는 3적으로 육적(肉炙 ;고기류 적), 어적(魚炙 ;생선류 적), 소적(素炙 ;두부,채소류 적)의 순서로 올린다.

     * 적(炙) : 생선이나 고기,채소 따위를  대 꼬챙이에  꿰어서 양념하여 굽거나 번철에 지진 음식 
     * 전(煎) : 재료를 얄팍하게 썰어 밀가루를  뭍힌 다음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지진 음식(부침개)

    5. 반,잔,갱을 놓는 줄(그림의 5번 줄);
     앞에서 보아 메(밥)는 좌측에 갱(국)은 우측에 차린다. 시접(수저와 대접)은 단위제(한분을 모신)의 경우에 메의 왼쪽에 올리며, 양위합제(두분을 모신)의 경우에는 중간 부분에 올린다.

    6. 향로 향합등;
     향상은 제사상 앞에 두고 축문, 향로, 향합을 올려 놓으며 향로 뒤쪽에 모사 그릇을 놓는다, 퇴주 그릇과 제주(술) 등은 제사상 오른쪽에 별도의 상에 놓는다.

    7. 제삿상 진설의 한문어구 
      [棗栗梨枾:조율이시] 좌측부터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로 올린다.  조율                       시이의 순서로 진설하기도 한다. 
      [紅東白西:홍동백서]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으로 놓는다. 
      [生東熟西:생동숙서] 김치는 동쪽에, 나물은 서쪽에 놓는다.
      [左脯右醯:좌포우혜] 포는 좌측에, 식혜,젓갈류는 오른쪽에 놓는다.  
      [魚東肉西:어동육서] 생선은 동쪽(앞에서 보아 우측)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頭東尾西:두동미서]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乾左濕右:건좌습우] 마른 것은 왼쪽에, 젖은 것은 오른쪽에 놓는다.
      [接東盞西:접동잔서]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右飯左羹:우반좌갱] 메(제삿밥)는 오른쪽에, 갱(국)은 외쪽에 놓는다.
      [男左女右:남좌여우] 제상의 왼쪽은 남자(考位), 오른쪽은 여자(비위)

     제사음식 조리할 때 주의할 점 
     -조리하기 전 몸 가짐을 단정히 하여 정갈하게 조리를 합니다. 
     -제사에 쓰지 않는 음식; 복숭아, 꽁치, 삼치, 칼치, 고추, 마늘 등은 제사음식에 사용하지 않으며 식혜, 탕, 면 등은 건더기 만 사용합니다. 
      




     


     

    기제사 지내는 순서

     


     

    진설(進設)
       북쪽(방위상 북쪽을 뜻하나 제사를 모시는 장소의 형편상 북쪽을 택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신위를 모시는 방향을 북쪽이라 한다.즉,지방을 모신 방향을 북쪽이라 함)에 병풍을 치고 병풍 앞에 교의(神主나 혼백상자등을 모시는 의자)를 모신 다음(일반 가정 제사에서는 교의를 두지 않고 병풍에 지방을 모시던지 제사상머리에 사진을 모심) 제상에 식어도 괜찮은 음식부터 제물을 차린다.  제수는 간소하게 하되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의 표현인 만큼 일상 반상음식에 몇 가지를 더 장만함이 좋고, 고인이 생시에 좋아하던 음식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 진설이 다 되면 고인의 사진을 교의나 제사상에 모시고 혹은 미리 써둔  지방(지방,축문 쓰는 법 참조)을  병풍 앞면에 붙인다. 이는 상차림을 한 후 어른을 모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제주가 제사상을 바라보아 앞쪽이 北, 오른쪽을 東, 왼쪽을 西라 한다. 진설의 순서는 맨 앞줄에 과일, 둘째 줄에 포와 나물, 세째 줄에 탕(湯), 넷째 줄에 적(炙)과 전(煎), 다섯째 줄에 메(쌀밥)와 갱(제사 지낼 때 메 옆에 놓는 국. 무와 다시마 따위를 넣고 끓임)을 차례대로 놓는다.

    분향강신(焚香降神)
      제주는 꿇어 앉아 향을 살라 향로에 꽂고 재배한다. 왼쪽집사가 제주에게 강신잔을 주면 오른쪽 집사가 술을 반잔 정도 따른다. 제주는 모사그릇에 세 번에 나누어 모두 따른다(모사그릇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술잔을 향로 위에 세번 돌린 다음 퇴주그릇에 따른다). 왼쪽집사가 강신잔을 받아 오른쪽 집사에게 건네주어 제자리에 놓게 한다. 제주는 재배한다.

    참신(參神)
      제주이하 참석자 모두 재배한다. 요즘은 여자도 재배를 하나 원래는 4배였다.

    초헌(初獻)
     좌집사가 잔을 제주에게 건네주면 제주는 우집사가 딸아 주는 술잔을 좌집사로 하여금 제상에 올리게 한다.

    독축(讀祝)
      제주 이하 모든 사람이 꿇어앉고 참사자중에 한 사람이 축을 읽는 것이다. 예전엔 축문 읽기가 끝나면 곡(哭)을 했으나 지금은 생략하는 가정이 많다. 축문 읽기가 끝나면 제주는 두번 절을 한다.

    아헌(亞獻)
      두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주부(主婦)가 올리는 것이 예이지만 주부가 올리기 어려울 때는 제주의 근친자나 장손이 올린다. 아헌을 한 사람이 재배를 올린다.

    종헌(終獻)
      3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아헌자 다음 가는 근친자가 올리며 집안에 따라서는 이때 적을 올리기도 한다. 아헌을 한 사람이 재배를 올린다.

    개반(開飯)
      집사(또는 주부)가 메와 탕 그릇의 뚜껑을 열고 저를 올린다. 순서는 좌측부터 조부 조모 순이다. 가정의례준칙에서는 제례는 부모와 조부모등 2대 봉사만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삽시(揷匙)
     주부나 집사가 시접(수저를 놓아 두는 빈 대접)에 담겨있는 숟가락을 메그릇에 꽂고 젓가락은 시접 위에 가지런히 걸쳐 놓는다. 젓가락의 손잡이는 서쪽(왼쪽)을 보게 놓는다. 흔히 젓가락을 세번 굴리고 여기저기 제물 위에 올려 놓기도 하지만 시접 위에 가지런히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주는 재배한다.

    첨작(添酌)
      첨작이라 함은 제주가 무릎 꿇고 다른 잔 혹은 그릇에 술을 따루어, 종헌자가 다 채우지 않은 술잔에 좌우 집사를 통하여 술잔을 채우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합문(合門)
      참사자 일동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부복(엎드린)한다. 대청일 경우 뜰 아래로 내려선다. 모든 참석자는 조상이 진지를 드는 동안(9수저 드시는 시간) 조용히 엎드려 생전의 조상을 생각한다.

    개문(開門)
      제주가 앞서서 기침을 한 다음 조용히 문을 열고 일동과 함께 들어간다.

    헌다(獻茶)
      숭늉을 갱과 바꾸어 올리고 메(밥)를 조금씩 3번 떠서 말아놓고 정저(잠시 묵념)한다. 메에 꽂았던 숫가락은 반드시 손잡이가 집사의 좌측으로 가도록 하여 숭늉그릇에 담그어둔다.

    철시복반(撤匙復盤)
      메 그릇의 뚜껑을 덮고 숭늉그릇에 있는 수저를 거두어 세 번 굴러 시접에 담는다.

    사신(辭神)
      참사자 일동이 재배를 올리고 신주를 모신 기제사일 경우에는 사당으로 옮겨 모시고, 지방과 축문을 향로 위에서 사른다.

    철상(撤床)
      모든 제사 음식을 물리는 것을 말하며, 제상의 위쪽에서 부터 다른 상으로 공손히 옮겨 물린다.

    음복(飮福)
      옷을 입은 그대로 조상이 드시고 남은 제물을 참사자 모두가 나누어 먹고, 이웃에도 나누어 먹는 것으로 기제사 절차는 모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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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당씨(密陽唐氏)
    밀양 당씨(密陽唐氏)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 제23대  왕, 재위기간: 514 ∼ 540)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 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조(高麗朝)에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 그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당씨(唐氏)는 중국(中國) 진 양(晋陽 : 산서성 기영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본래 도당씨(陶唐氏 : 제요를 일컫음)의 후예(後裔)가 당(唐)나라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밀양당씨세보(密陽唐氏世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당씨(唐氏)는 위(魏)나라 때 대부(大夫)였던 당 저(唐雎)의 후손으로,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 북송의 8대 임금, 재위기간: 1101 ∼1125)에서 승상(丞相)에 올랐던 당 각(唐恪)의 7세손 당 성(唐誠)이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출신으로 원(元)나라 말기에 동래(東來)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후 그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공조 전서(工曹典書)로서 외교문서(外交文書)를 전담관장(傳擔管掌)하였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어 녹권(錄券)과 상전(賞田) 15결(結)을 하사(下賜)받았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거쳐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이르러 밀양(密陽)을 사적(賜 籍)받아 본적(本籍)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 특시 당 성(唐誠)은 학문(學問)에 정통(精通)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야사(野史)의 기록에는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성석린(成石璘)을 위기에서 구해준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 말에 왜 구(倭寇)가 승천부(昇天府 : 강화도)에 침입했을 때 이를 격퇴시키고 개선한 양백연(楊伯淵)이 법률(法律)을 어기어 죽음을 당하자 막료(幕僚)로 있던 성석린이 연루되었는데, 도통(都統) 최 영(崔瑩) 장군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자 사평부평사 (司評府評事)로 있던 당 성이 말하기를 " 죄(罪)는 법(法)에 맞게 다스리는 것인데, 법문이 이와 같거늘 법률을 고치라 하니 법률이 먼저요? 공(公)이 먼저요?" 하면서 성석린의 억울함을 알고 가볍게 다스렸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한 성석린은 당 성이 세상을 뜨자 매우 슬퍼하며 " 생전에 마땅히 갚아야 할 은혜를 죽었다고 어찌 잊을 것인가, 일생동안 다 못 갚아 죽어도 못 잊겠네." 라고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예부 상서(禮部尙書) 박정수(朴廷秀)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한 당 성은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몽현(夢賢)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했고, 차남 몽량(夢良)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맥(家脈)을 이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원사공(院使公) 몽현(夢賢)의 손자(孫子) 유징(有徵)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3형 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언우(彦佑)는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둘째 언필(彦弼)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원 도호부사(慶源都護 府使)를 역임했으며, 막내 언량(彦良)은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공(武功)을 세워 선무원 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한편 동추공(同樞公) 몽량(夢良)의 후손에서는 세종(世宗) 때 출생하여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詞果)를 지낸 효원(孝元 : 몽량의 맏아들)과 그의 아들 적(勣: 통훈대부로 삭녕 군수를 지냄 )이 유명했으며, 윤문(允文)은 중종(中宗) 때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봉상시정 (奉常寺正)·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된 득흥(得興)과 계흥(繼興)이 뛰어났고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윤흥(胤興)은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호 건(好健),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건(健), 학자(學者) 후민(厚民),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국(國)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당씨(唐氏)는 남한에 총 206 가구, 932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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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산,광주 노씨(光山,光州盧氏)
    광산,광주 노씨(光山,光州盧氏)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신라(新羅)에서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제 51대 왕, 재위기간 : 887 - 897)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나, 940년(고려 태조 23) 태조(太祖)가 신 검(神 劍)을 토멸(討滅)하고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칭하였다. 성종(成宗) 때 해양현(海陽縣)으로 불리우다가 1259년(고종 46) 기주(冀州 : 일명 기양주)라 고쳤으며, 충선왕(忠宣王)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는 현(縣)으로 강등되어 광산(光山)이라 칭하다가 연산군(燕山君 ) 때 다시 주(州)로 승격하였고,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35년 광주(光州)가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아들 9형제 중 맏아들 노 해( 盧 垓)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아버지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신라(新羅)에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광산(光山)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광산백(光山伯) 해(垓)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때 정승(政丞)을 지내고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진 만(蔓)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系統)과 대호군(大護軍) 서(恕)를 일세조로 계대(繼代)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대호군(大護軍) 서(恕)의 증손 숭(嵩)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우왕(禑王) 때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놀기만 좋아하는 왕에게 극간(極諫)을 서슴치 않다가 미움을 받기도 했으나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창업에 공(功)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태종(太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대제학(大提學) 유간(有幹)의 손자 준공(俊恭)은고려 말 단상제(短喪制)가 성행하던 때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3년상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정려(旌閭)를하사(下賜) 받았으며, 중종(中宗)과 선조대(宣祖代)에 걸쳐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던 수신(守愼)은 1515년(중종 10)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청환요직(淸宦要職)을 역임했으나 간신의 무리들이 그 명성을 시기하여 귀양보내졌다. 특히 그는 적소(謫所)에서도 학문(學問)에 힘썼으며, 항상 임금과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으로 읊은 시(詩)가 많다. 그가 진도(珍島)로 유배갔을 때의 일이다. 진도 군수 홍인록(洪仁祿)이 집권자의 비위를 맞추어 백단(百端)으로 곤욕을 주면서 "죄인이 어찌 옥식(玉食 : 쌀밥)을 먹을 수 있나" 하고 산간에 있는 고을에서 일부러 좁쌀을 바꾸어다가 주었으며, 하룻밤에는 달이 밝은데, 수 신이 아이종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군수가 말하기를 "죄인이 어찌 연락(宴樂)을 할 수 있는가" 하고 피리를 분 아이 종을 가두었다. 선조(宣祖) 때 다시 등용되어 높은 관직에 오르자 언관(言官)들이 유배지에서 악독하게 굴었던 홍인록을 공격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그가 극력 구해(求解)하여 마침내 풍천 부사(豊川府使)로 임명받도록 하였다. 19년동 안의 귀양살이 속에서도 이 황(李 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하여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깊은 교제로 불교학문(佛敎學問)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별제(別提)와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던 흠(欽)이 시(詩)와 글씨에도 능하여 삼가(三嘉)의 고암서원(古岩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정 구(鄭 逑)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했던 극홍(克弘)은 임진왜란 때 자제(子弟)와 일가 장정을 이끌고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참모(參謀)로 활약하여 창녕(昌寧)의 화왕산성(化旺山城) 방어에 결정적인 공(攻)을 세웠다. 생원(生員) 대성(大成)의 아들 극복(克復)은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학행(學行)으로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했고, 정묘호란 때는 고성(固城)에서 의병을 모아 군량(軍糧) 조달에 앞장섰으며, 수신(守愼)의 증손 준명(峻命)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王)을 호종하여 홍원 목사(洪原牧使)를 역임했다. 숙종(肅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던 계원(啓元)은 학행(學行)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연구에만 진력,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오행설(五行說)」과 「정성서의(定性書義)」를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7,682가구, 72,3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57
  • 연안 차씨(延安車氏)
    연안 차씨(延安車氏)

     연안(延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염성(고鹽城)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해고군(海皐郡), 고려(高麗)에서는 염주(염州)·영웅현(永鷹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충선왕(忠宣王:제26대 왕, 재위기간 : 1309 ∼1314) 때 연안부(延安部)로 고쳤다.
     1895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백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배군(延白郡)이 되었다. 연안(延安)을  단본(單本)으로 하는 차씨(車氏)는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명군(名君)인 황제(黃帝: 姓은 姬, 諱는 軒轅)의 후예이다.
     우리나라 차씨(車氏)의 연원(淵源)은 황제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중국에서 고대조선(古代朝鮮)으로 망명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여 살며 왕조명(王祖明)으로 변성명하였고, 그 후손 왕 몽(王 蒙)이 정치적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전(田)·신(申) 등으로 개성(改姓)하였다가 후에 차무일(車無一)로 변성명하여 차씨(車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新羅) 초기에 승상(承相)을 지냈던 차무일(車無一)의 아들 8형제중 일곱째 차신을(車神乙 : 본명 주림)이 차씨(車氏)의 성(姓)을 계승하여, 후손대에서 25명의 승상(承相)이 배출되어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기틀을 다졌으며, 차무일(車無一)의 32세손 차건신(車建申)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 제40대왕, 재위기간 : 800∼809)의 서삼촌(庶三寸) 김언승(金彦昇 : 헌덕왕)이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황해도 유주(黃海道儒州 : 현 신천군 문화면)로 달아나 숨어 살며 조모(祖母 : 조부는 승상 儉夫)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씨(柳氏)로 변정하고 자기 이름을 류 환(柳 桓)으로, 아들 공숙(恭叔)은 류 숙(柳 淑)으로 개명하였고, 그의 6세원 류차달(柳車達)의 아들 대(代)에서 류씨(柳氏)와 차씨(車氏)로 갈라졌다.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 : 본명은 柳海)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남정(南征)하여 후백제(後百濟)를 칠 때 부호로서 그가 수레 천 대를 만들고 창고에 있던 양곡을 실어 군량미로 보급하여 줌으로서 왕건이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태조(太祖) 왕건이 그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며 벽상2등공신(壁上二等功臣)으로 대승(大承)에 봉착하고 이름도 차달(車達)로 하사(下賜)하였다.
     그 후 대승공 차달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효전(孝全)에게는 <차씨(車氏)의 홍렬은 잊을 수 없다>하며 상조(上祖)의 본성(本姓)인 차씨(車氏)의 성(姓)을 잇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하면서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은 소윤(少尹)의 벼슬과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여 류씨(柳氏)의 성을 계전하도록 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직사관(直史館) 거수(擧首)의 아들 약송(若松)이 고려 신종(神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내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병마사(兵馬使) 덕위(德威)의 아들 척(倜)이 고종(高宗)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와 참지정사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원부(院  : 지방어사 종로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목은(牧隱)이 색(李  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당대에 명유(名儒)로 일컬어졌으며, 고려 말에 정국이 혼란해지자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隱居)하였다. 「운암실기(雲巖實記)」에 의하면 원부가 은거하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찾아와 그의 혁명 계략을 상의하였다.
     이에 원부는 부당하다고 극구 만류했으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정권을 잡은 다음 조 준(趙 浚) 등을 차례로 보내어 벼슬과 녹권(錄券)을 하사(下賜)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수차례 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거절했다가 정도전(鄭道傳)·하 윤(河 崙) 등이 보낸 병력(兵力)에 의하여 추살(椎殺)되고 내외 당족 80여 명이 함께 참살당했다.
     한편 원부(原 )의 조카 운혁(云革)은 경성(鏡城)에 살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정휴명(鄭休明)·박성장(朴成章)·조 두(曺  ) 등과 더불어 이시애 납치 작전을 수행하다가 적에게 잡혀 단천(端川)에서 살해당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고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으며, 교수(敎授) 광운(廣運)의 아들 식(軾)은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역임했고, 경사(經史)와 학문이 뛰어났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천로(天輅 : 식의 아들)는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지내고 정자(正字)가 되어 고향 사람인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 주어 장원급제를 시킨 일로 명천(明川)에 유비되었으나 문재(文才)가있어 풀려 나와 명(明) 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컬어졌다. 선조(宣祖) 때의 일이었다.명나라에서 중국 강남(江南)의 쟁쟁한 문사인 주지번(朱之蕃)을 사신으로 보내왔을 때 조정에서는 이정귀(李廷龜)를 반접사(伴接使)로 하고 이안눌(李安訥)을 연위사(延慰使)로 하여 대접케 하였다. 그런데 주지번이 평양(平壤)에 이르던 저녁에 기도회고(箕都懷古) 오율(五律) 백운(百韻)을 내어서 빈막(貧幕)에 보내고 다음날 새벽까지 지어 보내라고 하였다. 이정귀가 몸이 달아 사람들을 모아 그 대책을 물으니 모두가 밤이 짧아 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니 운을 나누어 지어서 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정귀는 "사람마다 명의(命意)가 같지 않으니 한 사람에게 위촉함만 같지 못하다. 이는 차천로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천로는 "술 한 동이와 큰 병풍 하나에다 한석봉(韓石蜂)의 글씨를 얻지 못한다면 될 수 없다."고 하자 이정귀는 곧 갖추어 주었다. 천로가 큰 병풍을 대청(大聽) 위에 두르고 술 수십 사발을 마신 뒤에 병풍 안에 들어가 앉고, 한석봉은 병풍 밖에서 화전지(花箋紙)를 펴놓고 붓과 먹을 갖추어 대기하였다.
     천로는 병풍 안에서 철서진(鐵書鎭 : 책장 또는 종이 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시상(詩想)을 고르다가 높은 소리로 "한석봉아 나의 일귀(逸句) 준어(駿語)를 받아 쓸지어다."하며 글귀를 부르자 한석봉의 속필로서도 받아 쓰기가 바빴다.
     밤이 깊지 않아서 벌써 오언백율(五言百律)이 이루어지자 천로는 크게 한 소리를 외치고 취도
    하였다. 특히 천로는 뛰어난 문장력과 활달한 성품을 갖추어 당대 제일의 문사(文士)로서 한석봉의 글씨, 최 입(崔  )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가사(歌辭)와 글씨에 뛰어났다.천로의 아우 운로(雲輅)는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의 현감(全義縣監)과 봉상시 판관(奉常侍判官)을 거쳐 교리(敎理)를 지냈고,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문장(文章)이 탁월하여 형 천로(天輅)와 더불어 당대의 명사(名士)였던 마상원(馬尙遠)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웠다.
     천로(天輅)의 아들 전곤(轉坤 : 군수를 지냄)과 서곤(瑞坤)도 모두 시서화(詩書畵)로 이름났으며, 소근의 5세손 좌일(佐一)이 명문장가(名文章家)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좌일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노고산(老故山) 밑에서 그를 잉태할 때 꿈에 당(唐)나라 하지장(賀知章 : 당나라 산음 사람으로 문사와 초예에 뛰어났음)을 보고 낳았다고 하여 호(號)를 사명자(四名子)라 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따를 사람이 없었고, 정성하면서 경사(經史)와 시화(詩畵)에 정통하여 당시의 문장가로  손꼽았던 홍양호(洪良浩)·윤행임(尹行恁)·윤사국(尹師國)·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비워 좌일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이 우수하나 벼슬이 높지 못해 항상 세상을 불평하며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울분을 술과 시(詩)로 달랬다. 어떤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충고하자, 그는 시로서 답하기를 <내 살아서는 취향백이 되고, 죽어서는 수문랑이 되리라.(生爲취鄕伯 死作修文郞)>라고 했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최 북(崔 北)·천수경(千壽慶)·장 혼(張 混)·왕 태(王 太) 등과 더불어 성(城) 서쪽에다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松石圓)>이라 이름하고 시문(詩文)으로 여생을 보내며,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외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아우 예량(禮亮)과 함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충량(忠亮)이 화의(和議)가 성립됨을 통탄하여청태종(淸太宗)을 죽이고 원수를 갚겠다고 최효일(崔孝一)을 중국에 보내고 아우 예량을 심양(瀋陽)에 보내는 계획을 하다가 거사 전에 탄로나서 남별궁(南別宮) 밖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아우 예량(禮良)은 형이 죽자 청나라 태종을 암살하겠다고 만주땅을 누볐던 사명척화
    (事明斥和)의 골수분자였는데 전답을 팔고 가산을 털어 큰 배를 만들어 심양에 갔다가 정보를 입수한 청태종의 계략에 말려 거사전에 참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차씨와 최씨의 가족 수십명이 의주(義州)에 연행되어 참형을 당했고,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예량의 종제(從弟) 원철(元轍)도 연좌되어 잡혀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 형관(刑官)들은 이 음모가 조선을 괴롭혔던 청국 황제를 암살하려는 음모였기에 가급적 죄인들을 두둔하고 사건을 축소하려고 노력하였기에 청인(청人) 형관들이 둘러앉은 재판정에 차원철(車元轍)이 들어서자, 조선의  형관이 "아니 원씨(元氏)가 무슨 죄로 잡혀들었는가?" 하며 차씨라는 성(姓)을 빼고 두자 성명인 원 철(元轍)로 조작해서 석방시킬 내심이었다.
     이에 원철은 "나의 성은 원씨가 아니라 엄연한 차씨이다. 나라를 위해 두 번도 아닌 단 한번 죽는데 성을 속여가며 살고 싶지 않다."하고는 참형을 당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단체인 <포우단(砲牛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도선(道善)과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하여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앙양하고 애국지사의 독립투쟁을 배후에서 후원했던 석보(錫甫)가 유명했으며, 희식(喜植)은 화성군 쌍봉산(華城郡雙峰山) 만세시위의 총지휘자로 일본 경찰을 살해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9년 2개월간이나 복역했고, 이석(利錫)은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한 후 임시정부 비서장(秘書長)을 역임하여 충절(忠節)의 전통가문인 연안 차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차씨(延安車氏)는 남한(南韓)에 총 37,092가구, 154,6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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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천白川 김씨 金氏
    배천白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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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촉,연안 명씨(西蜀, 延安明氏)
    서촉,연안 명씨(西蜀, 延安明氏)

     서촉(西蜀)은 고대 중국(中國)의 진(秦)나라 서쪽에 속해있던 지명이다. 원(元)나라가 기울어 가는 1362년(고려 공민왕 11)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하(夏)나라를 세웠던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은 1366년(고려 공민왕 16)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현군(賢君)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371년(공민왕 20)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세력에 굴복하고 이듬해 어머니 팽씨(彭氏)와 함께 가족 27명을 거느리고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였다. 고려에서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국빈(國賓)의 대우를 하였고, 집과 노비를 내려 왕족(王族)으 지위를 지켜주었다. 그는 송도(松都)의 북부(北部) 이정리(梨井里:흥국사 북쪽 산밑)에 정착(定着)하고 총랑(摠郞) 윤희종(尹熙宗)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아들 4형제를 낳아 우리나라 명씨(明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 명승(明昇)은 이성계(李成桂)와 친분을 맺어 두터운 교분으로 자주 바둑을 즐겼으며, 그의 어머니 팽씨(彭氏)는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할 때 용포곤의(龍袍 袞衣:임금이 입던 정복, 황색이나 적색의 비단으로 지으며 가슴과 두 어깨에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용의 무늬를 금실로 둥글게 수 놓았음)를 지어 올려 태조가 감읍(感泣)했다고 한다.
     태종(太宗)때에 승(昇)은 화촉군(華蜀君)에 봉군되어 충훈세록(忠勳世祿)의 예우를 받았으며, 영조조(英祖朝)에 와서는 그의 후손들에게 병역과 납세를 면제토록 하였다. 그로부터 명씨(明氏)는 문호(門戶)를 대하(大夏)의 왕(王)인 명옥진(明玉珍)을 시조(始祖)로 삼고 선조(先祖)의 원향지(原鄕地)인 서촉(西蜀)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명승의 아들 자헌공(資憲公) 의(儀), 총랑공(摠郞公) 현(俔), 부사공(副使公) 준(俊), 시랑공(侍郞公) 신(信)의 후예들이 전국 각지에 분산 세거(世居)하면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였다.
     명씨(明氏)의 본관(本貫)은 서촉(西蜀)을 비롯하여 연안(延安), 해주(海州), 황해(黃海), 한양(漢陽), 양산(陽山:옥천지방), 태안(泰安) 등 24본(本)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한 핏줄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여, 황해도(黃海道) 연안(延安)은 자헌공 의(儀)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던 지역으로 선조(先祖)의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일부에서는 아직도 관향(貫 鄕)을 연안(延安)으로 쓰고 있으나 1986년에 간행된 명씨대동보(明氏大同譜)에서는 서촉과 연안의 합본(合本)으로 되어 있다.
     명씨의 인맥을 살펴보면 6세손 진사(進士) 극겸(克謙)의 맏아들 광계(光啓)가 임진왜란 때 평택 현감(平澤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중봉(重峰) 조 헌(趙憲)의 의병(義兵)과 합세, 유명한 금산(錦山)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후손 정구(廷耉)는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보령 현감(保寧縣監)을 지냈다.한편 광계의 증손(曾孫) 천득(天得)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자현(自賢)은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을 역임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거쳐 용양위 부호군(龍衛副護軍)을 지낸 치상(致庠:광계의 11세손)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고종(高宗) 때 효자(孝子)로 유명했던 우진(祐鎭)과 연안 군수(延安郡守)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범석(範錫)이 뛰어났다.
     명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14,452명, 1975년에는 3,840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촉 명씨는 2,725가구, 11,837명, 연안 명씨는 2,506가구, 10,6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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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보(族譜) 보는 법(기본)





    첫째


    족보를 보려면 우선 '나(자신)'이 어느 파에 속해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파를 알지 못한다면 조상이 어느 지역에 살았고, 그 지방에 어떤파가 살았던가를 알아야 한다.  




    둘째


    시조로부터 몇 세(世)인지를 알아야 한다. 족보로는 가로로 단을 나누어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혈손을 같은 단에 가로로 배열하였으므로 자기 세의 단만 보면 된다. 세수를 모른다면 항렬자로 세수를 헤아려야 한다.




    셋째


    항렬자와 족보에 기록된 이름(譜名)을 알아야 한다. 예로부터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나 호적에 올린 이름에는 항렬자를 넣지 않았더라도 족보에 실을 때는 반드시 항렬자를 넣은 이름을 기재했으므로 이를 알아야 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53
  • 추씨(鄒氏)
    추씨(鄒氏)

     추씨(鄒氏)는 중국 범양(中國范陽:지금의 경조성 순의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한(漢)나라 헌제(獻帝:후한의 마지막 황제, 재위기간190-219) 때 어양 태수(漁陽太守)를 지낸 추 단(鄒丹)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 나라 추씨(鄒氏)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비류부장(沸流部長)을 지낸 추발소(鄒勃素)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으며,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부하 장수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사로잡힌 추허조(鄒許組)가 문헌에 전해진다.
     근대에 와서 추씨(鄒氏)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북 상주(慶北尙州)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53
  • 청주 좌씨(淸州左氏)
    청주 좌씨(淸州左氏)

     청주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도청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 또는 낭자곡으로 불리우다가  685년(통일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조에 청주로 고치고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청주군이 되었으며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시가 되었다.
     좌씨는 중국 노나라 때의 태사 좌구명(左丘明)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春秋左氏傳」을 주석한 대학자이자 유학자로 후배인 공자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청주 좌씨는 원나라때 중국 변경( 京)에 살다가 고려 말 탐라 목마장의 감목관(監牧官)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된 좌형소(左亨蘇)를 시조로 한다.
     제주도가 발상지인 좌씨는 형소(亨蘇)가 죽음에 이르러 "사람은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하며 대대로 살아오던 중국 산동성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으나, 1922년 조선 호적령에 따라 청주라는 지명이 한국에 없어 음이 이같은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후손들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고려 때의 명의 자이(自以)는 고려 왕후의 중병을 완쾌시켜 이에 탄복한 왕으로부터 그가 살던 한동리(漢東里)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지금도 그 곳은 <좌가장(左哥場)>으로 불리운다.
     후손 시우(時祐)는 한말의 철종(哲宗)과 고종대(高宗代)에 걸쳐 유학으로 학명을 떨쳤으며, 향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좌씨는 남한에 총 455가구, 1,7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50
  • 대흥 필씨(大興弼氏)
    대흥 필씨(大興弼氏)

     대흥(大興)은 층청남도 예산군에 속한 지명(地名)으로 원래는 백제(百濟)시대의 임존성(任 城)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초에 대흥으로 개칭한 것을 조선 태종 때 군(郡)이 되었다가 1934년 대흥면(大興面)으로서 예산군에 편입되었다. 대흥 필씨(大興弼氏)의 시조는 무과에 급제한 필몽량(弼夢良)이며 전해지는 관향(貫鄕)은 대흥(大興)과 전주(全州) 2본(本)이 전한다.
     대흥 필씨(大興弼氏)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몽량의 후손 두만(斗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부사(府事)의 증손(曾孫) 성뢰(聖 )는 1798년(정조 22)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다.
     한편 성뢰(聖 )는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에도 올라 있는데, 대대로 함흥(咸興)에 살았다고 적혀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흥 필씨(大興弼氏)는 남한(南韓)에 총 45가구, 2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46
  • 족보(보첩)의 현황

    가. 우리나라의 족보 현황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가장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따라서 우리의 족보를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실정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람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세대가 자라나면서 한문으로 된 족보가 읽혀지기 어렵게 되자, 각 가문에서는 족보의 한글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으며, 아울러 간지를 서기로 환산하거나 사진의 컬러화와 체제의 단순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여러 뜻있는 학자들이 학회를 결성하여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체계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한글세대에 맞는 현대 감각으로 족보를 개편하여 모든 이들이 실용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 외국의 족보현황

      족보는 한국이나 동양의 일부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사실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제도가 있다. 많은 나라들에 족보학회가 있으며, 족보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이 있는 나라도 있다.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마이크로 필름화가 되어 있으며 족보학회가 창립된지도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국제 회의를 통하여 족보에 대한 여러가지 세미나를 하고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에서는 한국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족보들을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여 보관하고 있다. 미국 유타주의 각 대학에서는 계보의 작성법을 각 학과에 편성해놓고 교과로 배우고 있으며 연구발표회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일본의 도쿄(동경)대학과 교토(경도)대학, 중국의 남경 도서관과 중국과학원, 북경도서관, 프랑스의 극동학원, 베트남의 국립도서관등에 동양의 족보가 보존되어 있다. 명칭에 있어서 중국에서는 종보(宗譜)라 하며, 상류 계층에만 족보가 보급되어 있는 일본에서는 가보(家譜)라고 하며 각 가문마다 문장이 대대로 전해져서 특별한 예식이나 명절에는 예복,모자 등에 착용한다. 서구에서는 "Family Tree"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족보가 없는 민족 가운데는 잃어버린 조상을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유럽의 민족주의 국가에서는 지난날의 잡혼에 의한 질의 저하를 막기 위해 혈통을 존중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 있어서 족보는 세계 각국에 널리 보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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