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장씨(牙山 蔣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
아산(牙山)은 충청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 시대에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시대에 음봉(陰蜂:일명 음잠)또는 온정군령(溫井郡嶺)이라 하였고,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로 고쳤다가 1018 년(현종 9) 천안부에 속하였으며 그 후 아주로 고쳐 다시 설치하였다.
1413(태종 13) 아산으로 개칭하였고, 1459년(세조 5)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의 3읍으로 분속되었다가 1476년(성종 7) 아산현(牙山縣)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1914년 온양, 신창(新昌)의 두 군(郡)을 편입하였다. 장씨(蔣氏)의 득성(得姓) 근원은 중국 춘추시대의 나라 이름으로 주나라 주공(周公)의 세째 아들 백령(伯齡)이 하남성(河南省) 기사현(期思縣)을 장국(蔣國)으로 하사 받아 국명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씨(蔣氏)의 본관은 문헌에 아산, 청송, 김포 등 여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존(現存)하는 장씨는 아산 장씨로 단일화하고 있다.
아산 장씨의 시조인 장 서(蔣 壻)는 중국 송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 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상서(尙書)이 강(李 綱)과 함께 항전(抗戰), 적에게 한치라도 빼앗겨서는 안되며 끝까지 사수(死守)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議論)이 불합(不合)하여,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배를 타고 동으로 망명, 우리나라의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표착(漂着)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예종이 중국에 탐문(探問)한 바 후히 대접하라는 전달을 받았다.
예종은 서(壻)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아산군(牙山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서(壻)를 시조로 하고 아산을 관적으로 하여 누대에 걸쳐 세거하면서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서의 증손 숭(崇)이 고려조에 정록대부(正祿大夫)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역임하였고, 숭의 아들 득분(得芬)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서운관사(書雲觀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거쳐 판군기시사 (判軍器侍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의 6세손 균(均)이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으며 균의 아들 자방(自芳)이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삼사 부사(三司副使) 겸 검교 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였다.
자방(自芳)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성길(成吉)이 판도판서(版圖判書), 평장사(平章事)를, 둘째 아들 성발(成發)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전공 전서(典工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세째 아들 성휘(成暉)가 전서(典書)를, 네째 아들 성호(成昊)는 전법 전서(典法判書)를, 다섯째 아들 성미(成美)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는 등 모두 전서를 역임하였으므로 그들의 출생지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5전서로 전해지고 있다.
그 외 인물로는 상서 우복야(尙書右僕揶)를 지낸 극맹(劇孟)과 장사랑(將士郞)으로 동정(同正)을 지낸 모(耗)가 유명하다. 조선조에 와서는 서(壻)의 9세손이며 전서(全書)를 지낸 성휘(成暉)의 아들인 영실(英實)이 있다.
그는 1423년(세종 5)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 사직(司直)을 지내고 1432년(세종 14) 천문기상기기(天文氣象機器)를 발명, 1438년부터 몇 년동안 대소간의 천구의(大小簡儀天毬儀), 혼천의(渾天儀), 일귀(日晷),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였다.
그 외 동활자주조(銅活字鑄造), 채광제련(採鑛製鍊)을 감독하였고 1442년 세계 최초로 천문측우기(天文測雨器)를 발명하였다.
그 후 관직은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나 선생의 업적이 세월이 흐를수록 높이 평가되어 1983년 전국의 후손과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인사들이 모여 과학선현의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선생의 뜻을 담아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 동래시조 서(壻)의 표착지(漂着地)에 추모 기념비를 세워 유지를 기리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 성조조에 경기 병사(京畿兵使)를 지낸 처용(處勇)과 선조조(宣祖朝)에 옥포 만호(玉浦萬戶)를 거쳐 부사(府使)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울산 소모대장(蔚山召募大將)으로 전공을 세워 칠공신의 한 사람이 된 후완(後腕)이 유명했으며 희양(希陽)은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언기(彦起)는 호종3등공신(扈從三等功臣)에 올랐고, 희춘(希春)의 재종형(再從兄) 계현(啓賢)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화왕산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아산 장시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아산 장씨는 남한에 총 3,937가구, 16,1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