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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 방씨(南陽房氏)
    남양 방씨(南陽房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고, 1018 년 (고려 현종9) 수주(水州:수원)와 인주(仁州: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 말기에 남양군(南陽郡)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 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면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방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요(堯)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지명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방씨는 당(唐)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이 634년(당태종 정관8, 고구려 영류왕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사적(賜籍)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후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조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공(三重大匡輔國公)에 오른 방계홍(房季弘)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사적지(賜籍地)인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어왔다.
     방씨의 관향(貫鄕)은 남양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남원(南原), 온양(溫陽), 밀양(密陽), 양산(梁山)등 23본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남양 방의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수원 방씨(水原房氏)의 시조(始祖)로 전하는 방정유(房貞儒:일명 지유)는 남양 방씨의 일세조 방계홍(房季弘)의 손자임이 밝혀졌다.
     남양 방씨의 인물로는 계홍(季弘)의 아들 의강(儀康)이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진유(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한편 상호군(上護軍) 주(柱)의 아들 사량(士良)은 공양왕(恭讓王)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전의시승(典醫寺丞)을 지냈고,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구행(九行)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차남 구달(九達)은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사량(士良)의 증손귀원(貴元:봉교를 지냄)과 옥정(玉精:세자시강원 문학)이 유명했다. 특히 계문(戒文)의 아들 귀온(貴溫)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조(中宗朝)에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과 사간(司諫院)의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으며, 남명(南溟) 조 식(曺植)에게 글을 배운 응현(應賢)은 선조(宣祖) 때 농사(農事)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학자로 명망이 높았다.그외 응현의 손자 원진(元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광해군(光海郡) 때는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찰방(찰訪)에 천거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김장생(金長生)의 휘하에서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했으며, 복령(復齡)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선조(宣祖)로부터 <가히 대장부>라는 칭찬을 받고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방씨(房氏)는 남한에 총 5,371가구, 22,5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24
  • 온양 방씨(溫陽方氏)
    온양 방씨(溫陽方氏)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을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두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2) 현(縣)으로 강등되고 조선 태종(太宗) 때 신창현(新昌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다가 다시 온수현(溫水縣)이라 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온양군(溫陽郡)이 되었고, 19 13년 아산군(牙山郡)에 속한 온양면(溫陽面)이 된 후 지금의 온양읍에 이르고 있다. 방씨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주(周)나라 때 대부(大夫) 방 숙(方叔)의 후예로 전한다. 남양 방씨(南陽方氏)는 중국 산동(山東) 사람인 방 지(方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기 669년(당고종 총장2, 신라 문무왕9)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동래(東來)하여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여 불교의 전성시대인 신라에서 유학(儒學)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뿌리를 내렸다. 그후 그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 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데 무공을 떨쳤고,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대(981∼997)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군 팔동리(八東里) 과안산(過雁山)은 <방씨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배방산(裵方山)으로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누대(累代)로 사패지(賜牌地)인 온양지방에 살면서 방지(方 智)를 시조(始祖)로 하고 운(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온양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근대에 와서는 온양으로 단일화하고 있다. 그후 온양 방씨는 12세에 이르러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 )과 그의 아우 우번(于番), 목사(牧使) 득세(得世)의 아들 대에서 장암공(壯岩公) 서(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와 간의대부(諫議大夫) 현(縣)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按廉使) 훤(暄)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군위군(軍威君) 적( 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우번(于番)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평장사(平章事) 신제(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우(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분파되었으나, 안렴사공파 훤(暄)과 상락부원군파 신우(臣佑)는 절손되었고 현재는 다섯 파만 세계가 이어진다.
     방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穆宗)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중탁(仲鐸:운의 아들)과 현종(顯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진 휴(休:운의손자, 중탁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휴의 증손 유(裕)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러,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아들 재(宰),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증손희진(曦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성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유영(有寧)이 중종조(中宗朝)에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우고(祐固)과 옹(翁)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떨쳤다. 순조조(純祖朝)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난을 일으키자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정주성(定州城)함락에 공을 세웠던 우정(禹鼎)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할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기전(基典)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은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한편 소파(小波) 정환(定煥)은 일제 압정기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 특히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빨래 광주리에 숨겨 돌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고,일본으로 유학하여 아동문학에 전심, '사랑의 선물', '어린이' 등의 잡지를 창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의 정수를 이루었다.그외 윤명(允明)과 천용(天鏞), 한익(漢翼), 건홍(建洪), 무길(戊吉) 등이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쳐  문무의 전통을 이은 온양 방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9,317가구, 81,4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15
  • 반씨(班氏)
    반씨(班氏)

     반씨(班氏)는 중국 부풍(扶風: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대 전욱의 후예(後裔)로 전하며, 초(楚)나라 투반(鬪班)의 후손이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나라 반씨(班氏)의 연원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으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반씨의 본관(本貫)이 개성(開城), 고성(固城), 평해(平海)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에 와서 반씨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국에 25가구, 1960년에는 101명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40가구, 1,3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75
  • 거제 반씨(巨濟潘氏)
     거제(巨濟)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해안(南海岸)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소가야국(小伽倻國)의 일부였던 독로국(瀆盧國)에 속했다가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상군(裳郡)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에 거제로 개칭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거창과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으로 불리다가, 1422년(세종4)에 거제현(巨濟縣)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895년(고종32)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반씨(潘氏)는 중국 형양(滎陽:지금의 하남성 개봉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의 아버지)의 여섯째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아들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은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유학자(儒學者)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족(名族)으로 일컬어진 반씨는 송(宋)나라 출신인 반 부(潘 阜)가 이종(理宗) 때 문과에 장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몽고정벌(蒙古征伐)을 간청했다.
     그런데 간신(奸臣)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은밀히 죽이게 하였으나, 원(元)의 세조(世祖:흘필렬)는 문무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사양한 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원재의 딸, 충렬왕비가 됨)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고려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巨濟)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반씨(潘氏)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挺)과 유항(有抗)을 시작으로 가세(家勢)가 일어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며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기성(岐城), 충주(忠州), 남평(南平), 결성(結城), 청도(淸道) 홍천(洪川), 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거제반씨정미대봉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에는 거제 반씨로 합보(合譜)하였다. 가문을 중흥시킨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부(阜)의 증손(曾孫) 익순(益淳)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하평리(門下評理)을 거쳐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덕해(德海)와 복해(福海)이 현달하여 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신(名臣)으로 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복해는 왕이 사냥을 나가 말에서 떨어져 멧돼지의 습격을 받게 될 순간 활을 쏘아 왕을 위기에서 해낸 일화가 전하며, 밀직부사(密直府使)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추충양절익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에 올라 제성부원군(濟城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최 영(崔瑩)장군을 암살하려던 조 반, 임견미(林堅味)와의 관련 혐의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가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복권되었다.한편 복해의 아들 자건(自建)은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조(太宗朝)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영평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충(忠)도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좌명일등공신(開國原從佐命一等功臣)로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광주백(光州伯)에 추봉되었다. 세칭 절효선생(節孝先生)으로 불리웠던 유(儒)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해(德海)의 손자로서 부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에서 3년동안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湖)의손자 효손(孝孫)은 세조(世祖) 때 황주 목사(黃州牧使)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회령 부사(會寧部事)로 나갔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한 우형(佑亨)은 당세의 석학(碩學)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내고 기성군(岐城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청렴근엄(淸廉謹嚴)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던 석평(碩枰)은 1472년(성종 3) 부사과(副司果) 서린(瑞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광조(趙光祖)의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후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인후(仁後)은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조령(鳥嶺:문경 새재)에서 공을 세워,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순절한 중인(仲仁:공조 좌랑 응기의 아들), 중경(仲慶) 형제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과 싸우다가 강화(江華)에서 전사한 일량(日良)이 유명했고, 한말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분으로 할복자결한 하경(夏慶:일명 학영)이 가문을 대표했다.
     반씨(潘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12,881명, 1975년에는 3,548 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149가구, 21,5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19
  • 태안 박씨(泰安朴氏)
    태안(泰安)은 충청남도(忠淸南道) 태안군(泰安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 또는 성대호현(省大號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소태(蘇泰)로 고치고 뒤에 소주(蘇州)로 개칭하여 부성(富城 : 서산)군(郡)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때 연주(蓮州 : 홍주)에 예속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태안(泰安)으로 고쳤고, 1416년(조선 태종 16)군(郡)으로 승격시켰다가 1913년 서산군(瑞山郡)에 병합되어 면이 되었다.
     태안 박씨(泰安朴氏)는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의 세자(世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枕)의 13세손 원의(元義)를 기일세(起一世)하여 세(世系)를 계하고 있다. <태안박씨족보(泰安朴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을재(乙材)의 현손(玄孫)으로 광록대부(光록夫)에 올라 상서좌복야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9형제 중 다섯째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형(白兄)인 세흥군(世興君) 원효(元孝 : 좌정승을 지냄)의 네째 아들 희문(喜文)을 사자(嗣子)로 맞아 대(代)을 잇게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원의(元義)를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태안(泰安)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으며, 2세 희문(喜文)이 고려조에서 좌정승(左政丞)을 지내고 태원부원군(泰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후 희문의 아들 보규(甫圭)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학(謔)은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손자 유는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내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상호군(上護軍) 인추(仁抽)의 아들 문거(文巨)가 뛰어났다.
     순성부원군(蓴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비(悲)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송경(松京) 출신으로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비는 고흥 감무(高興監務) 겸 권농병마 단련판관(勸農兵馬團鍊判官)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처자(妻子)를 데리고 청산현 동면 대동리(靑山縣 東面 大同里)에 은거(隱居)했으며, 조선조에서 신창(新昌),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임명하고 그를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한편 조선조에서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지낸 상덕(尙德)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자유가 김해 교수(金海敎授)를 지냈으며, 둘째 자주(自胄)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사(訓練院判事)를 역임했다.
     그 외 연천 현감(蓮川縣監)을 지낸 안종(安宗 : 안릉 참봉 세훈의 맏아들)과 청풍 군수(淸風郡守) 안방(安邦)형제가 유명했고, 세적(世勣)의 아들 안도(安道)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서 진주성(晋州城) 방어에 공을 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여러 장수들과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아들 시생(始生)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여 정 구(鄭 逑)의 문인(門人)으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던 민(敏)과 함께 태안 박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안 박씨(泰安朴氏)는 남한에 총 1,079가구, 4,4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1
  • 전주박씨(全州朴氏)
    전주(全州)는 전라북도(全羅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후 경덕왕(景德王: 제 35대 왕, 재위기간: 742 ∼ 765) 이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40여년 간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완산부(完山府)로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全州府)가 되었으며,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全州市)로 개편되었다. 전주 박씨(全州朴氏)의 시조(始祖) 언화(彦華)는 신라(新羅)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로 완산대군(完山大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의 아들 웅(雄)이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증손 보진(輔辰)은 정승(政丞)으로 추성협모공신(推誠協謀功臣)에 올라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시령(是齡: 보진의 손자)의 아들 혁(奕)은 평장사(平章事)와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한편 평장사 혁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철견(鐵堅)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둘째 천견(天堅)은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여 시중(侍中)에 오른 셋째 지견(地堅)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좌랑(佐郞) 천익(薦益)의 아들 실(實)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과 의정부사(議政府事)를 거쳐 공신(功臣)에 올랐고, 학문(學問)에 뛰어나고 성품이 청렴강직하여 세인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사인(思仁)은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한 후 공신(功臣)으로 완산군(完山君)에 추봉되었다. 그외 조선조(朝鮮朝)에서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지양(志讓: 시중 유의 아들)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지온(志溫) 형제가 유명했으며, 진사(進士) 종수(從壽)의 맏아들 진(晋)은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목사(牧使) 문찬(文燦: 군수 진의 증손), 군수(郡守) 문증(文增) 등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박씨(全州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598가구, 3,0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27
  • 광주 박씨(廣州朴氏)
    광주(廣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마한(馬韓)의 일부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이 되어 세운 회안국(淮安國)의 일부였다.
     371년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남한산(南漢山: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이도(移都)하여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553년(백제 성왕 31, 신라 진흥왕 14) 신라(新羅)에게 나라를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경덕왕(景德王)때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주(廣州)로 고쳤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 광주군(廣州郡)이 되었다.
     광주 박씨(廣州朴氏)의 시조(始祖) 박명훈(朴明勳)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광주(廣州)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 명훈의 아들 계징(戒澄)이 고려 때 부윤(府尹)을 역임했으며, 손자(孫子) 영준(永準: 계징의 아들)은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무명(武名)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진사(進士) 찬기(贊己: 상장군 영준의 아들)의 아들 형제 중 장남 시해(弑害)가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차남 시화(時和)는 의관(議官)을 역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동추(東秋: 참의 시해의 아들). 성룡(聖龍: 동추의 손자, 몽화의 아들) 등과 함께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박씨(廣州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426가구, 2,2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03
  • 사천박씨(泗川朴氏)
    사천박씨(泗川朴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때에는 사주(泗州)로 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의 둘째 아들 남환(男桓: 사수 군주)의 후손 인겸(仁謙)이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사주군(泗州君)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사천(泗川)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인겸의 손자 자문(自文)이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으며, 우왕(禑王)때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함경남도 안변(咸鏡南道 安邊)을 둔거(遯居)하였다가 영흥(永興)에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자문(自文)을 일세조(一世組)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자문의 아들 양준(良俊)이 향직(鄕職)인 창정(倉正)을 역임했고, 손자 수도(守道)는 총경장군(摠京將軍)으로 무명(武名)을 떨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대재(大材: 양준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정용낭장(精勇郎將) 인경(仁景: 자문의 10세손)의 아들 용계(龍桂)가 1469(예종 즉위)에 출생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의릉참봉(義陵參奉)을 지내고 영흥좌수(永興座首)를 자청하여 선원전(璿源殿) 축성 때 도감(都監)으로 공(功)을 세워 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함주군 상조양면 상한리(咸州郡上朝陽面上閒里)로 옮겨 살게 되어 후손들이 입함흥중조(入咸興中祖)로 받들어왔다. 그외 판결사(判決事) 창문(昌文)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던 두문(斗文)·원해(元楷)가 유명했고, 창조(昌朝)는 찰방(察訪)을 역임하여 주부(主簿)를 지낸 영주(永胄)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0가구, 1,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02
  • 영암靈岩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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