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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계,밀양 변씨(草溪, 密陽卞氏)
    초계,밀양 변씨(草溪, 密陽卞氏)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 초계(草溪)로 개칭하였고, 1018 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을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변씨(卞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지금의 감숙성 위천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인 숙진탁(叔振鐸)이 조후(曹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변읍(卞邑)을 하사(下賜) 받아 지명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변씨(卞氏)는 당(唐)나라 천보년간(天寶年間:742∼755)에 예부 상서(禮部尙書)을 지낸 변 원(卞 源)이 743년(경덕왕 2) 왕명(王命)을 받들어 8학사의 한 사람으로「효경(孝經)」을 가지고 동래(東來), 신라(新羅)에 정착(定着)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고려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시조 정실의 아들 광(光:장파)·요(耀:중파)·휘(輝:계파) 3형제를 기점으로 크게 3갈래로 갈라졌다.
     그후 시조의 둘째 아들인 요(耀)의 손자 고적(高迪)이 밀양(密陽)에 시거(始居)함으로써 밀양 변씨(密陽卞氏)로 분적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초계(草溪)·밀양(密陽) 외에도 원주(原州)·팔계(八溪)·진주(晋州)·청주(淸州)·경주(慶州)·장성(長城)·남원(南原) 등 44개 파(派)로 분관(分貫)되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종의(宗議)에 따라 합보(合譜)를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일찍이 영남내륙과 호남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의 집안으로 명성을 떨친 변씨(卞氏)는 시조의 맏아들 광(光)의 후손인 장파(長派)가 변씨일문의 6할을 차지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에  많이 살고,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 중파(仲派)는 경상도(慶尙道) 지방에, 막내 휘(輝)의 후손인 계파(季派)는 합천군(陜川郡)을 중심으로 집중 세거하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첫째 장파(長派)에서는 시중(侍中) 광의 8세손 남룡(南龍)이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직산(稷山)에 은거(隱居)한 후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아들 7형제가 현달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장남 혼( )은 사복시 주부(司僕시主簿)을 역임했고, 둘째 순(純)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을 거쳐 연안 부사
    (延安府使)로 나가 장흥 부사(長興府使)였던 아우 타( ), 참판(參判) 굉(紘)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다섯째 아들인 효문(孝文)은 태종(太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로 일본(日本)에 다녀왔고,「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했으며「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했다. 한편 효문의 증손 형량(亨良:감의 아들)은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로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무장(茂長)에 유배되었다가 효수(梟首) 당했으며, 승세(承世)의 아들 훈남(勳男)은 군수(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연안공(延安公) 순(純)의 증손 준(雋:훈련원 부정 옥곤의 아들)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사등공신( 靖國四等功臣)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라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으며, 참봉(參奉) 유청(惟淸)의 아들 시민(時敏)은 선조(先祖) 때 경흥부사(慶興府使)과 낙안 군수(樂安郡守)을 거쳐 남원 영장(南原營將)을 역임했고, 유명(惟明)의 아들 시환(時煥)은 수학(數學)에 정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외 형량(亨良)의 둘째 아들로 선조(宣祖) 때 효행(孝行)을 떨쳐 정려(旌閭)가 내려졌던 경복(景福)과 <변충효(卞忠孝)>로 불리웠던 시익(時益:경복의  손자)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마동(麻洞) 창덕궁 부근에 살았던 변지사(卞知事)의 아들 원규(元圭)가 유명했다.원래 원규의 아버지는 북촌에서 민심이 후한 부자로 손꼽혔는데 어몽설하에 삼청동 뒷산지역을 순찰하던 순찰군사에게 쌀밥과 고음국과 용주박에 담은 술을 밤참으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하며, 그의 아들 원규(元圭 : 한성부 판윤을 지냄)는 명판윤(名判尹)로 이름났다. 다시 인맥을 소급하여 시조 정실이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인 중파(仲派:밀양 변씨)에서는 공양왕(恭讓王) 때 호(戶)·병(兵)·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로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올랐던 옥란(玉蘭)의 아들 3형제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맹량(孟良:옥란의 맏아들)의 아들 필상(必祥)은 좌승지(左承旨)를 지냈으며, 이원계(李元桂:이성계의 이복형)의 사위가 된 중량(仲良)은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王子)의 난에  정도전(鄭道傳)의 일파로 몰려 화(禍)을 입었다.  태종조(太宗朝)의 문형(文衡) 계량(季良)은 옥란의 막내아들로 20여 년 간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손꼽혔다. 특히 그는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 만한 것을 모아서 정부상규설(政府相規設)을 저술했으며, 역사상 고집(固執)으로도 유명했다.
     세종(世宗) 명조(明朝)에서 우리나라에 흰 꿩 한 마리를 보내오자 하례하는 표(表)를 계량이 쓰게 되었는데, 글 중에 흰 꿩을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특별히 행을 바꿔, 글자를 띄어서 따로 써야 한다고 하고 대신들은 윗 귀절에 붙이지 아니하고 어찌 띄어서 쓰느냐고 하였으나, 그는 그 존경의 표시로 띄어서 쓴다고 고집하였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03
  • 황주 변씨(黃州邊氏)
    황주 변씨(黃州邊氏)

     황주(黃州)는 황해도(黃海道) 중앙 북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동홀(冬忽 ) 또는 동어홀(冬於忽)이었으며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때 취성군(取城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高麗) 초에 황주(黃州)라 하였다. 983년(성종 2) 목(牧)을 두었고 그후 절도사(節度使)을 두었으며 천덕군(天德軍)이라 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가 또 목으로 고쳐 서해도(西海道)에 속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지고령군(知高寧郡)으로 강경, 후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으로 환원되었다. 1269년(원종 10)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고 1290년 서북면에 이관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서해도에 이관,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어 2도호부, 6군, 5현 등을 관할하여 오다가 1895년에 황주군이 되었다.
     황주 변씨(黃州邊氏)는 중국(中國) 농서 사람인 변 려(邊 呂)가 북송(北宋)이 망하자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황주(黃州)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황주로 하게 되었다.
     「황주변씨세보(黃州邊氏世譜)」에 의하면 변 려(邊 呂)는 1232년(고려 고종19) 몽고병(蒙古兵)이 송경(松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나간 고종(高宗)을 시종(侍從)하는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上將軍)로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은 것으로 전한다. 가통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려(呂)의 아들(允)이 고려 원종(元宗) 때 서해도  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제주도(濟州島)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우고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올랐으며, 9세손 정(靜)은 중군사정(中軍司正)을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참봉(參奉) 택(澤)의 둘째 아들 이중(以中)이 임진왜란 때 소모사(召募使)로 병마(兵馬)와 군기(軍器)를 수습했으며, 뒤에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화차(火車) 300량(輛)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 율(權 慄)을 도와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루게 하였고, 함안 군수(咸安郡守)로 나갔다가 사임하고 장성(長城)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중(以中)의 맏아들 경윤(慶胤)은 광해군(光海君)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학행(學行)로 명성을 떨쳤으며, 폐모론(廢母論)에 대의(大意)를 세워 반대하다가 삭직되자 두문불출( 杜門不出)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로 지평(持平)에 천거된 휴(烋)와 영조(英祖) 때 이름난 학자(學者)였던 괄( )이 유명했으며, 치명(致明)은 한성우윤(漢城右尹)과 공조 판서(工曹判書)을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치명의 아들 득양(得讓)은 정조(正祖) 때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라 아버지에 이어 기로소에 들어가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황주 변씨(黃州邊氏)는 남한(南韓)에 총 1,457가구, 6,3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09
  • 장연 변씨(長淵邊氏)
    장연 변씨(長淵邊氏)

     장연(長淵)은 황해도(黃海道) 서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장연으로 불리워 오다가 1018 년(고려 현종9)에 옹진(甕津)에 속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여러 변천을 거친 후 태종(太宗) 때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으로 개칭하였다.
     1416년에는 전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청송현(靑松縣:지금의 신천군 용문면)으로 편입시켰던 해안현(海安縣)을 다시 합치고 이름도 장연으로 환원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군(郡)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장연 변씨(長淵邊氏)는 주(朱)나라 문하습비후(門下習秘侯) 대아찬 변 경(邊 鏡)의 증손(曾孫)인 변유영(邊有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장연변씨갑오보(長淵邊氏甲午譜)」에 의하면 그는 1138년( 고려 인종16) 중문지후(中門祗侯)로 연성부원군(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장연(長淵)에 정착세거(政着世居)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장연(長淵)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유영의 7세손 영인(永仁:사온동정 용지의 아들)이 고려조에서 판전의사(判典醫事)를 지냈고 , 그의 손자 처후(處厚)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하여 태종(太宗) 때
    소윤(少尹)을 지내고 세종조(世宗朝)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처후의 아들 대해(大海)는 관찰사(觀察使)을 역임하고 슬하에 곤(崑)과 윤(崙)의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교하 현감(交河縣監)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을 각각 지내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곤의 증손 사정(士貞)은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변응정(邊應井:원주 변씨)·변이중(邊以中:황주 변씨)과 더불어 임란의 <삼변충장(三邊忠壯)>으로 일컬어졌다. 당대에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일재(一齋) 이 항(李 恒)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사정(士貞)은 1592년(선조 25) 임란이 일어나자 순천(順天 )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晋州) 싸움에 파병하고 전라도(全羅道) 산간지방에서 20일 동안에 왜병 2천 명을 사살하는 등 빛나는 전공을 올려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으로 불리웠다. 그외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사형(士亨:사정의 형)과 거제 부사(巨濟府使)로 치적을 쌓았던 윤조(潤祖:통제사 흡의아들),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건중(建中:신천 군수 징의 맏아들) 등이 뛰어났으며, 호군(護軍)을 지낸 광후(光厚:처후의 아우)의 6세손 발(潑)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 의(誼), 거제 부사(巨濟府使) 진영(震英), 의금부사(義禁府使) 덕용(德龍) 등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연 변씨(長淵邊氏)는 남한(南韓)에 총 582가구, 2,4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08
  • 원주 변씨(原州邊氏)
    원주 변씨(原州邊氏)

     원주(原州)는 강원도 원성군(原城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시대에 북원소경(北原小京), 940년(고려 태조23)에 원주(原州)로 고쳤다.그후 일신현(一新縣), 정원 도호부(靖原都護府),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 등을 거쳐 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나 1310년 성안부(成安府)로 강등, 1353년(공민왕 2) 치악산에 태(胎)를 안치하고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1895년(고종 32) 원주군(原州郡)이 되었으며,1955년 일부가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황주 변씨(黃州邊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고려 말의 절신(節臣)인 변안렬(邊安烈)을 시조(始祖)로 한다. '원주변씨족보(原州邊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조부(祖父)인 변 순(邊 順)이 1268년(고려 원종9) 원(元)나라 사신(使臣)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元世祖)를 알현(謁見)하고 심양(瀋陽)의 장수(將帥)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고 , 안렬(安烈)은 조카 숙(肅:안렬의 형인 안백의 아들)과 함께 공민왕(恭愍王)과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환국하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도(京都)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의 호(號)을 받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이 되어 나 세(羅 世), 조사민(趙思敏), 이성계(李成桂), 류 실(柳 實)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지역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을 폐립(廢立)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復位) 시키려다가 김 저(金 佇)와 함께 순절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진 절신으로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부흥을 위하여 강인한 절개를 굽힐 줄 몰랐으며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 이의 딸과 혼인하여 사적지(賜籍地 )인 원주(原州)에서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원주(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 )를 이어왔다.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李太祖)는 안렬의 충절(忠節)을 기리고 그의 아들 3형제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어 맏아들 현(顯)은 봉상시사(奉常寺事)를, 둘째 이는 도총제(都摠制)를, 막내 예(預)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사(訓鍊院事)를 각각 역임하였고, 손자 상복(尙服:이의 아들)은 덕천옹주( 德川翁主)와 혼인하여 원주위(原州尉)에 봉해졌다.
     한편 예조 참판(禮曹參判) 상회(尙會)의 아들 수(修)는 호조 및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충청, 경상, 함경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면천 군수(沔川郡守) 계윤(季胤)의 아들 협(協)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이르렀고,주역(周易),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에도 정통하였으며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특히 협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쾌하고 도량이 넓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여섯살 때 샘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우물 안에서 돌을 붙들고 밤새 버티고 있다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에게 큰 새끼를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쳤다고 하며, 1565년(명종 20)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귀양온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장살(杖殺)함으로써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난정을 개탄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던 사촌 동생 희리(希李)와 함께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로 낙향했던 희예(希乂)의 아들 광(廣)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고, 그의 아들 영청(永淸)은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은사나 헌상하는 옷의 겉감과 안감)와 안마(鞍馬)를 하사 받았으며, 단아하면서 근엄한 성품으로 공직에 있으면서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재임중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성력을 다했고 부모 봉양을 잘 하는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지급하는 등 밝은 치적을 거두었다.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양걸(良傑)은 임진왜란 때 강화(江華)를 방비하는데 공을 세우고 명(明)나라 낙오병(落伍兵)들의 반란을 재치로 진압하여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었으며, 왕자(王子)가 관련된 살인사건을 가차없이 다루다가 선조의 뜻에 거슬려 동래(東來)로 유배, 뒤에 수원 부사(水原府使)와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공조 좌랑(工曹佐郞) 열(悅)의 아들 응정(應井)은 임진왜란 때 조 헌(趙 憲), 정 담(鄭 湛) 등과 더불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자, 적장도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무덤을 크게 만들고 <조선국충간의담(朝鮮國忠肝義膽)>이라 쓴 푯말을 세웠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고향에 내렸다.
     또한 만취당(晩翠堂) 영순(永淳)의 아들 경회(慶會)는 임진왜란 때 임 흘(任 訖), 금윤선(琴胤先)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많은 훈공을 세웠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무과에 급제한 흡은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헌하여 진무이등공신(振武二等功臣)로 원흥군(原興君)에 봉군되어,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극태(克泰:경회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그외 효종(孝宗) 때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정하여 러시아군을 격파시켰던 급(급)과 경종(景宗) 때  통역관(通譯官)으로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을 편찬한 헌(憲)이 유명했으며, 근대에 와서는 의병대장(義兵大將) 학기(鶴基)가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충절(忠節)의 전통가문( 傳統家門)인 원주 변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 와서는 면와(勉窩) 태균(台均)의 주관으로 1924년 경북 봉화읍 거촌리(慶北奉化邑巨村里)에 구양사(龜陽祠)를 세워 백산(栢山) 경회(慶會)와 봉은(鳳隱) 극태(克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3월과 9월의 중정일(中丁日)에 제향(祭享)하여 왔다그후 1984년 후손 교우(敎雨)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강당(講堂)을 중수(重修)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여 묘우(廟宇), 전사청(典祀廳), 장서각(藏書閣), 동서재(東西齋), 주사(廚舍), 삼문(三門), 문루(門樓)를 비롯한 기타 부속건물의 신축사업비를 전담하고 구양서원(龜陽書院)이라 이름하여 시조 대은공(大隱公), 백산공(栢山公), 봉은공(鳳隱公)을 향사(享祠)하고 있으며, 약국(藥局)을 세워 봉화군(奉化郡) 지역 영세민에 대한 의약품 무료지급과 사회자선사업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철탑산업훈장(鐵塔産業勳章)과 새마을 포장(褒章)을 수상했고 사회봉사 부분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어 명문(名門) 원주 변씨의 전통을 살렸으며 문중단결(門中團結)을 위하여 전국에 산재(散在)한 증손(曾孫)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남한에 총 9,698가구, 39,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12
  • 안주 범씨(安州凡氏)
    안주 범씨(安州凡氏)

     안주(安州)는 평안남도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식성(息城) 또는 한성(漢城), 한홀(漢忽), 내홀(乃忽)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太祖)가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다가 931년(태조 14) 안북부(安北府)를 두었다. 995년(성종 14)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라 칭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초에 안북대도호도부로 하여 해주(海州)에 속했다가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공민왕(恭愍王)이 안주 만호부(安州萬戶部)를 두었으며,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고 1712년(순조 12) 현(縣)으로 강등,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범씨(凡氏)는 중국 하남(河南:하남성 낙양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우리나라 범씨는 고려 우왕(禑王) 때 문화 안집사(文化安集使)를 지낸 범영부(凡永富)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범씨의 관향(貫鄕)은 안주(安州) 단본(單本)이며,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역리(驛里)에 범기영(凡基永) 1가구가 처음으로 나타났고, 1960년에는 44명으로 집계되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6가구, 1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45
  • 금성 범씨(錦城范氏)
    금성 범씨(錦城范氏)

     금성(錦城)은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을 통일신라 시대에 경덕왕(景德王)이 금성(錦城:일명 금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1011년(고려 현종2) 거란(거丹)의 2차 침입 때 현종(顯宗)이 이 곳에 피난 갔다가 돌아와 목(牧)으로 승격되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1981년 7월에 영산읍과 나주읍을 통합하여 금성시(錦城市)로 승격되었다.
     범씨(范氏)는 중국 고평(高平:산서성 기영도에 속해있는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원(元)나라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낸 범승조(范承祖)가 고려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나주(羅州)에 터를 잡은 것이 우리나라  범씨의 시초가 된다.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학자로서 고려에 올 때 북송(北宋)의 대학자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백가예설(百家禮說)' 등 많은 문헌을 가지고 들어와 널리 보급했으며, 그의 아들 유수가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을 세워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금성으로 삼게 되었다. 범씨의 본관(本貫)은 금성(錦城), 광주(光州), 안주(安州) 등 3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재는 금성 범씨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호남(湖南)의 선비 가문으로 일컬어진 금성 범씨는 시조의 증손(曾孫) 세동(世東)이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개성(開城) 근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며, 태종(太宗)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하여 뜻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나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동의 6세손 가용(可容), 가종(可鐘) 형제와 전창(傳昌), 천배(天培) 부자(父子)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학문과 고명한 인품으로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천배(天培)의 손자 기생(起生:만암 홍로의 맏아들)과 기봉(起鳳) 형제는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어 충절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외 후손 경문(慶文)이 영조(英祖) 때 17세로 <사문(辭文)>을 지었고, 순조(純祖) 때는 '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集)'을 저술하여 문벌가문(文伐家門)의 전통을 지켰으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양성당(養性堂) 윤덕(潤德)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크게 명성을 떨쳤다.근대에 와서 금성 범씨는 광주(光州)를 비롯한 전라도와 서울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1960년 국제조사 당시 1,373명, 1975년에는 243가구로 집계되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714가구, 3,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99
  • 수원 백씨(水原白氏)
    수원 백씨(水原白氏)

     수원(水原)은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 때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시대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으며, 고려 때 인주(仁州), 수주(水州)를 거쳐 1301년(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로 개칭되었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한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水原市)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은 화성군(華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백씨(白氏)는 고대 황제 헌원(軒轅)의 후예로 중국 풍익(馮翊)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씨의 연원(淵源)은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황제의 16세손 백을병(白乙丙:진나라 때 부를 지냄)의 후손 백우경(白宇經)이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여 당(唐)나라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자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우경(宇經)이 그 곳에다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고, 만세암을 찾아온 선덕왕(宣德王)은 정혜사(淨惠寺)로 명(改名)하고 영월당이 판에 어필(御筆)로 '경춘(景春)'이라 쓰고 아울러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함께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경덕왕(景德王:신라 제54대왕,재위기간:917∼924)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창직(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기일세(起一世)하며, 창직의 증손 휘(揮)가 고려 목종(穆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9세손 천장(天藏:임평부원군 원정의 아들)은 원(元)나라에서 이부 상서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충선왕(忠宣王) 때 수성백(城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게 되었다고 한다. 백씨(白氏)의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을 비롯하여 180여 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수원 백씨의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분명하여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 발간 당시 각 파의 대표들이 회합하여 관향(貫鄕)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역사상 학문과 도덕의 문으로 지휘를 굳혀온 백씨는  중시조 창직(昌稷)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창직의 증손 휘(揮:광평시랑 길의 손자)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육조(六朝)에 걸쳐 주요 관을 지내며 나라의 모든 문장(文章)을 지어낸 맏아들 간미(簡美)는 만년에 영해(寧海)로 낙향(落鄕)한 후 수차에 걸친 문종(文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우 행미(行美)는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역임했고, 막내 가미(可美)는 판삼사(判三司)를 거쳐 태자 사부(太子師傅)에 올랐다. 한편 대장군(大將軍) 간미(簡美)의 아들 5형제 중 세째 무신(武臣:선무 장군)의아들 후재(厚載)가 소용장군(昭勇將軍)으로 도통사(都統使)를 지내고, 그의 아들 유정(有貞)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손자 대민(大旻)은 문하성사(文下省事)를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벼슬을 지내 한때 후손들이 가림 백씨(嘉林白氏)로 칭관(稱貫)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조에서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은 문간공(文簡公) 문절(文節)의 아들 이정(이正)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거봉(巨峯)인 안 향(安 珦)의 고제(高弟)였던 그는 충렬왕(忠烈王)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10년간 머무르면서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의 꽃을 피웠으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그의 학맥을 잇게 하여 조선 유학(儒學)의 기틀을 마련했다.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던 장(莊:문하시중 경신의 7세손)은 공민왕(恭愍王) 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처자를 거느리고 원주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태종(太宗)이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문간공(文簡公) 양신(良臣)의 현손 문보(文寶:중랑장 견의 아들)는 강경한 배불론자(排佛論者)로 유명했으며, 공민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사부(師傅)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봉해졌고 문집(文集)으로 '담암일집(淡庵逸集)'을 남겼다. 조선 중기 중종(中宗)과 선조(宣祖) 양대에 걸쳐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던 인걸(仁傑)은 돐도 지나기 전에 왕자 사부(王子師傅)였던 아버지 익견(益堅)을 잃고 연산군의 수탈에 의해 집마저 강제 철거당해 편모가 셋방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어머니가 자는 것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에 어머니는 늘 불을 켜놓고 자는체 함으로써 그를 먼저 자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537년(중중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며 왕실외척(王室外戚)의 세도가(勢道家)인 심의겸(沈義謙: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의 세도에 줄곧 저항적이었으며, 대윤(大尹)과 소윤(少尹) 등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았던 기개 높은 인품으로 풍파 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는 허 자(許 磁:명종 때 이조 판서에 오름)와 이웃에 살면서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워낙 가난하게 살았기로 허 자가 별다른 음식이 있으면 꼭 나누어 주었다. 소윤(少尹)의 혁명인 을사사화(乙巳士禍: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윤 임 일파를 몰아내어 사림의 큰 화를 입힌 사건)의 전야(前夜)에 허 자가 인걸을 초청하여 저녁상을 차려놓고 거사에 가담할 것을 권고하자 끝내 거절하니 허자가 말하길 "내일이면 자네가 죽을 것이라"하였다.이 말에도 인걸은 태연하게 인사하고 나오는데 허자가 인걸의 손을 잡으며 "내일은, 자네는 군자(君子)가 되고 나는 소인(小人)이 되는 날이로다" 하며 친구의 위대한 인격을 자신에 대비시켰다. 특히 그는 1576년(선조  원년)에 양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집집마다 축수를 하며 노래 부르기를,  <흰 눈의 흰 빛은 임과 같이 희도다(白雲之白與君同白) 마음 속으로 사랑하노니 어찌 걸이 아닐소냐(心乎愛矣胡不爲傑)>하였고, 그가 떠난 뒤에는 관가의 현판에 이 글을 새겨 두었다고 한다. 일찌기 인걸과 함께 학문을 토론했던 율곡(栗谷) 이 이(李 珥)는 "나이가 80세인데도 학문연구에  애쓰며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 이는 오직 이 분뿐이다"라고 하였으며, 1578년(선조 11)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군비강화를 주장했으며,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83세로 일생을 마치니 송강(松江) 정 철(鄭 澈)이 만사(挽詞)를 짓기를 외로운 충성은 일대에 둘도 없는 선비요(孤忠一代無雙士)헌납으로 밤이라도 혼자서 말씀을 올리던 사이였다(獻納三更獨啓人)
    산악의 정기로 이 노인이 태어났으니(山岳精生此老)하늘에 돌아가서도 응당 빛나는 별이 되리로다(歸天應復作星辰) 인걸의 형 인호(仁豪)도 성품이 순후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국화를 좋아하고 탈속적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인호의 아들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모함을 받아 화를 당한 유양(惟讓)이며, 인걸의 아들 유함(惟咸)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에 올랐으나 격렬한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인(仁)에 내려와 야인생활을 하며 시폐(時弊)가 있을 때마다 상소(上疏)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임진왜란을 당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 직제학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정국공신(靖國功臣)로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던 수장(壽長)의 현손 민수(民秀)는 경(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義兵)을 모아 장수(長水) 지역에서 적을 대파시켰으며, 정유재란 때도 문위세와 합세하여 용담(龍潭)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한편 세인(世仁)의 아들 광홍(光弘)이 명종조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를 사직하고 돌아올 때 우리 말로 쓴 가사(歌辭) <관서별곡(關西別曲)>으로 유명하며, 그의아우 광훈(光勳)은 시서(詩書)에 현달하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고곡 이 달(李 達)과 함께 <삼당(三唐)>으로 일컬어졌다.
     그외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순절한 광언(光彦)과 초선장사(秒選壯士)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로 잡혀있던 수천명의 동포를 구한 광조(光祖)가 뛰어났으며, 광훈의 아들 진남(振南)은 시부(詩賦)와  글씨로 명성을 떨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義州)의 남성장(南城將)이 되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웠던 원의(元義)와 함께 명문의 가통을 지켰다.
     한말에 와서는 일본세력 침투에 반대했던 낙관(樂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義擧)를 결의했던 홍인(弘寅),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과  원수부군무국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을 지낸 성기(性基) 등이 유명했으며, 남규(南圭)는 한일합방이 되자 노백린(盧伯麟), 안중근(安重根) 등 23명의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하였고, 낙귀(洛龜)는 광양(光陽)과 하동(河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천(順天)을 점령했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운각(雲閣)은 3·1운동 때 고향인 정주(定州)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고, 일규(一圭)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창립하고 '국민보(國民報)' 주필이 되어 언론을 통한 한국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외 종렬(鍾烈)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소대장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했던 삼규(三圭)는 항일투쟁에 몸바쳤던 영촌(永村), 일진(日鎭), 남준(南俊), 광운(狂雲), 남채(南埰), 관수(寬洙), 인해(仁海) 등과 함께 의절(義節)의 가맥을 이어 명문의 수원 백씨(水原白氏)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99
  • 흥해 배씨(興海裵氏)
    흥해 배씨(興海裵氏)
       일세조 휘(諱): 배경분(裵景分), 검교장군(檢校將軍)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38
  • 성산·성주 배씨(星山·星州裵氏)
     성산·성주 배씨(星山·星州裵氏)
       일세조 휘(諱):배위준(裵位俊), 벽상공신(壁上功臣)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46
  • 분성,김해 배씨(盆城,金海裵氏)
    분성,김해 배씨(盆城,金海裵氏)

     분성(盆城)은 경상남도 남동부 낙동강(洛東江)의 서안에 위치한 김해(金海)의 고려 때 지명으로 본래 가락국(駕洛國)이었는데 신라에 병합되어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국(金官國)이 되었다가 문무왕(文武王)이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김해(金海)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가 부(府)로 강등시켜 뒤에 임해현(臨海縣)이 되었으나 성종(成宗) 때 금주(金州)로 개칭되고 원종조(元宗朝)에 와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김해로 고쳐 부(府)로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이 이곳에다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기도 했으며 고종(高宗) 때 군(郡)으로 승격, 1906년 양산군의 2개면을 병합하고, 1981년 시(市)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분성 배씨(盆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일등원훈(一等元勳) 배현경(裵玄慶:중시조)의 6세손인 원룡(元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분성배씨대동보(盆城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도원수(都元帥)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분성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인맥으로는 원룡(元龍)의 아들 중 장남 서(署)가 고려조에서 감무어사(監務禦使)와 전객령(典客令)을 지냈으며, 손자 단(端)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생원(生員) 윤온(允溫)의 아들 극수(克壽)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양성에 진력하며 거문고와 독서로 여생을 보냈으며, 윤검(允儉)의 아들 극부(克富)은 야은(冶隱)길 재(吉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며 학문으로 명성을 떨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의 가통을 세웠다. 교수(敎授) 상금(尙錦)의 장남인 문보(文甫)는 중종(中宗) 때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쳐 그가 죽자 왕이 제문(祭文)을 내려 공적(功績)을 치하했으며, 직장(直長) 유 흥(有興)의 아들 진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탁월하여 아들 맹후(孟厚)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1462년(세조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맹후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성종(成宗) 때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왕으로부터 포상이 내려졌다. 그의 아우 중후(仲厚)는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숙후(叔厚)는 연산군(燕山君)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 계후(季厚)는 경주 판관(慶州判官)과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온후한 성품과 지극한 효성으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던 학(鶴:용양위 부호군 세즙의 아들)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노천(老泉) 김 식(金湜)에게 글을 배웠으며 도천(道泉)에다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문벌의 가문에 무맥(武脈)을 형성한 철중(鐵重)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거쳐 홍주 영장(洪州營將)을 지내고 손가락을 잘라 모친의 병환에 수혈하여 사림(士林)의 주청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병마단련사(兵馬團鍊使)를 지낸 담(湛)은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쳤고 학행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던 영(渶)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에서 회맹(會盟)했던 원우(元祐)는 전쟁에 나가 무훈(武勳)을 세워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석학(碩學) 조 식(曹植)의 고제(高第)인 명원(明遠)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성(城)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된 아우 형원(亨遠)과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맥을 지켰다.
     광해군(光海郡)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삭직당했던 대유(大維)는 문장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와 오위진결(五衛陳訣)을 공부했던 응남(應男)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숙부(叔父) 원우(元佑)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배향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사오당(四吾堂) 양옥(良玉)이 문장과 행의(行誼)로 추앙을 받았으며, 홍우( 弘祐)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장현광(張顯光)의 휘하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여, 죽림(竹林)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진 양성에 진력했던 동도(東度), 숙종(肅宗) 때 효행으로 동몽교관(童夢敎官)에 임명되었던 여경(汝慶), '심경보사(心經補辭)'의 저자인 일장(一長), 항일투사 동석(東奭)등과 함께 분성배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분성, 김해 배씨(盆城, 金海裵氏)는 남한에 총 13,202가구, 53,5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19
  • 달성 배씨(達城裵氏)
    달성 배씨(達城裵氏)

     달성(達成)은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고, 757년(신라 경덕왕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달성 배씨(達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주역으로 개국공신에 책록된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 운룡(雲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배씨대동보(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 중엽에 벼슬을 지내고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달성(達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후 달성 배씨는 민부 전서(民部典書) 영(瑩:운룡의 7세손)의 아들 정지(廷芝)와 정란(廷蘭)의 형제 대에서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금위(禁衛)에 들어갔던 정지(廷芝)는 강화(江華)에 천도했던 원종(元宗)이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할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대정(隊正)이 되었고, 충렬왕(忠烈王) 때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 후(印侯)와 함께 연기(燕岐)에 침입한 거란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충청(忠淸)과 전라도 찰방(全羅道察訪)으로 나가서는 지방 관기(官紀)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고, 충숙왕(忠肅王) 때 일어난 제주도 반란사건을 존무사(存撫使)로서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도원수를 지낸 아우 정란(廷蘭)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천(果川)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다가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순절한 성경(成慶)은 밀직부사 정지의 맏아들로, 그의 아우 천경(天慶), 함경(咸慶)과 더불어 가문의 중추적(中樞的)인 인맥을 형성하였다. 신유당옥(辛酉黨獄)으로 아버지 정지가 무고를 받아 유배되자 대신하여 수형(受刑)할것을 간청했던 천경(天慶:성경의 아우)은 공민왕을 호종하여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으로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함경(咸慶)은 맏형인 성경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성경의 손자 균(均:광유의 아들)은 우왕(隅王) 때 함양(咸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이었고, 고려 말에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 했던 을서(乙瑞:균의아우)는 조선이 개국한 후 수차에 걸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부름에도 응하지않고 둔거하여 고려 말 절의충신(節義忠臣)으로 유명했으며, 야은(冶隱) 길 재(吉再)에게 글을 배웠던 인경(仁敬:성경의 증손, 문우의 아들)은 태종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내고 세종때 고주 수령(固州守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뒤에 고부군(古阜君)에 봉해졌다.
     그외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을 예견했던 두유(斗有)와 단종(端宗)이 손위하자 절의를 지켰던 효명(孝明)이 뛰어났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사원(師元)은 정언(正言)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성종(成宗) 때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낸 상경(尙絅)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한편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던 익신(益臣)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으며, 명종(明宗) 때 유일(遺逸)로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천거되었던 서(恕)는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귀양간 규암(圭庵) 송인수(宋隣壽)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파직되자 향리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선조(宣祖) 때 문과에 급제했던 승무(承武)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순절하여 승문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성유(聖有)는 영조(英祖)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상규(祥奎), 고종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은성(殷星), 좌승지(左承旨) 인기(仁基)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달성 배씨(達城裵氏)는 남한에 총 9,777가구, 41,2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41
  • 곤산,곤양 배씨(昆山,昆陽裵氏)
    곤산,곤양 배씨(昆山,昆陽裵氏)

     곤산(昆山)은 경상남도 사천군(泗川郡)에 속해있는 곤양(昆陽)의 옛 지명으로 고려 때 곤명현(昆明縣)이라 하였고, 1018 년(현종 9) 진주(晋州)에 속하였다가 조선 세종(世宗)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이 되었으며, 1437년(세종 19)에는 다시 나뉘고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하여 곤양(昆陽)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 사천(泗川)에 속하였다가 곧 회복하여 군(郡)이 되어 진주부 관할이 되었고, 1913년 군을 폐하고 서면(西面), 금양면(金陽面)은 하동(河東)에 소속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사천에 병합되어 곤양면(昆陽面), 곤명면(昆明面)으로 남아 있다.
     곤산 배씨(昆山裵氏)의 일세조(一世祖) 맹달(孟達)은 달성군(達城君) 운룡(雲龍)의 13세손으로 조선 세종(世宗) 때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거쳐 1454년(단종 2)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올라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특진되었으며 서강군(西江君)에 봉해졌다가 곤산군(昆山君)에개봉(改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달성 배씨(達城裵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을 곤산(昆山)으로 삼게 되었다. 곤산 배씨의 인맥으로는 맹달(孟達)의 아들 4형제가 현달(顯達)했고, 그의 후대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가세가 크게 융성하기 시작했다.
     맹달의 맏아들 숙흥(叔興)은 조선조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거쳐 진주 병마절도사(晋州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둘째 사종(嗣宗)은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양지 현감(陽智縣監)을 역임했으나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음애(陰崖) 이 운(李耘)을 비롯한 충암(沖菴) 김 정(金淨) 등과 도의(道義)를 교유했다.
     한편 절도사 숙흥의 손자 언구(彦矩:감찰 치인의 둘째 아들)는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고, 그의 아우 언손(彦孫)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치례(致禮)의 아들 언필(彦弼)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치지(致智)의 아들 수(洙)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고, 현감 사종(嗣宗)의 증손 승조(承祖:증갑의 아들)와 운조(雲祖:용양위 부호군을 지냄)형제가 유명했다.
     조선 예학(禮學)의 조종(祖宗)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승조(承祖)는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김 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며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진력했으며 문하에서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여 문명을 떨침으로서, 광흥 도사(廣興都事)를 지내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추증된 익립(翊立),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시창(時昌), 횡성 현감(橫城縣監) 명성(命晟)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곤산, 곤양 배씨(昆山, 昆陽裵氏)는 남한에 총1,174가구, 4,8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83
  • 방邦 씨
    방邦 씨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29
  • 태원 방씨(太原龐氏)





    태원 방씨(太原龐氏)

     태원(太原)은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태원분지의 중심지이며, 근대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였고, 사적(史蹟)이 많은 곳이다.
     태원 방씨(太原龐氏)의 시조(始祖) 방 발은 중국 태원(太原) 출신으로 지휘도총장(指揮都摠將 )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 귀화(歸化)한 것으로 전해지나 연대는 미상이며, 후손들이 그의 출생지인 태원(太原)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발의 아들 엄형(嚴亨)이 진무사(鎭撫使)로 강화도(江華島) 방어에 공을 세웠고, 그의 증손(曾孫) 세진(世珍)은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한편 진사(進士) 도윤(道潤:세진의 아들)은 슬하에 아들 계첨(啓添)과 계헌(啓憲:참봉을 역임)형제를 두어 태원 방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었으며, 후손 원호(元灝)은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여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원 방씨(太原龐氏)는 남한에 총 34가구, 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45
  • 개성 방씨(開城龐氏)
    개성 방씨(開城龐氏)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의 수도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 송도(松都), 개경(開京), 부소갑(扶蘇岬), 동비홀(冬比忽), 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방씨(龐氏)는 중국 시평(始平:섬서성 관중도 흥평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개성 방씨의 시조(始祖)는 주(周)나라 현왕(顯王:기원전 368-321) 때 장군(將軍)인 방연위(龐涓魏)의 원손(遠孫) 방두현(龐斗賢)으로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가 원(元)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으로 학사(學士)에 이르러, 1351년(충정왕 3) 고려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개성(開城)에 정착(定着)한 것이 개성 방씨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한다.가맥(家脈)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曾孫) 천룡(天龍)이 조선조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예남(禮楠)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낸 영내(永奈:천룡의 차남)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그밖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대건(大建)과 종일(宗逸) 부자가 유명했으며, 세진(世珍:종일의 차남)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을, 도명(道明)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방씨(開城龐氏)는 남한에 총 179가구, 6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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