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19 페이지
  • 남양 서씨(南陽徐氏)
    남양 서씨(南陽徐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당성(唐城)으로 고쳤고, 1018 년(현종 9) 수주(水州:수원)와 인주(仁州: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 말기에 남양군(南陽郡)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 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면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으며,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남양 서씨(南陽徐氏)의 시조(始祖) 간은 중국에서 귀화(歸化)해 온 8학사의 한사람으로 당성(唐城:남양의 별호)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러 남양군(南陽郡)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 후(厚)가 고려 현종(顯宗:제8대 왕, 재위기간 : 1009 ∼1031) 때 대장군(大將軍)으로 거란(契丹)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간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4세손 눌(訥)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그의 아들 존(存)은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찬(贊:시조의 8세손)의 아들 희팔(希八 : 부제학을 역임)과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거쳐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른 적(迪)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한편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우승지(右承旨)에 오른 숙(淑)의 맏아들 충수( 忠守)는 도승지(都承旨)을 역임했으며, 부위(副尉) 혼(混)의 아들 충필(忠弼)이 부호군(副護軍)에 올라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아우 충우(忠佑)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1625년(인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정연(挺然 : 참판 충우의 아들)은 사정(司正)과 호조 참의(戶曹參議)을 지내고 천안(天安)의 육현사(六賢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참찬관(參贊官) 정지(挺之)의 아들 한주(漢柱)가 학행(學行)으로 유명했다. 그는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의 거두(巨頭)인 존재(存齋) 조 익(趙 翼)에게 글을 배우고 신독재(愼獨齋), 김 집(金 集)의 문하(門下)에서 예학(禮學)을 연마하여 문장(文章)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효종(孝宗) 때 학행(學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거되어 현종(顯宗) 때 주부(主簿)와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나가 치적(治績)을 쌓아 부사(府使)에 올랐다. 그외 절제사(節制使) 몽량(夢良:한주의 아들)과 부사(府使) 필경(必慶:참판 정시의 증손)이 유명했으며, 명로(命老)의 아들 성경(性慶)은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여 오위장(五衛將) 종렬(鍾烈)과 함께 남양 서씨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양 서씨(南陽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2,940가구, 13,6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16
  • 목천 상씨(木川尙氏)
    목천 상씨(木川尙氏)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 面)이 되었다.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中國) 상당(上黨:산서성 기령도 노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상씨(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목천 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珍)이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太祖) 왕건(王建)이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고려를 개국(開國)하자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목천 상왕산(尙王山)에 웅거(雄據)하여 백제 재건을 위해 수차에 걸쳐 반기를 들자 화가 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가축(家畜)의 이름인 우(牛)·마(馬)·상(象)·돈(豚)·장(獐)으로 사성(賜姓)하였다. 축성(畜姓)으로 사성(賜姓)된 상씨(尙氏)는 국진의 아들 득유(得儒)가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 충(崔 庶)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향역(鄕役)을 면하게 되었고, 본래의 성(姓)인 상씨(尙氏)로 회복(回復)하였다고 한다. 그후 3세손 원(愿)이 급사(給事)를 지내며 임지(任地)를 따라 주거(住居)를 임천(林川)으로 옮겨 10대를 세거하면서 조상(祖上)의 원향지(原鄕地)인 목천(木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후대로 내려와 후손들이 풍덕(豊德)·원주(原州)·부여(扶餘)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파(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8세손 천석(天錫)이 고려 말에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효충(孝忠)은 조선 초에 충청도 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侯)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 중기에 명상(名相)으로 이름난  범허재(泛虛齋) 진(震)은 목천 상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 영부(英孚)가 임천(林川) 합하동(閤下洞)에서 부자(富者)로 살았는데, 재물을 사람들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다가 만년에 그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며, "내가 후손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아버지 보(甫:안기도 찰방을 지냄)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친히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이듬해 그를 낳았다.  그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서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관찰사(觀察使), 4조(四曹)의 판서(判書)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우·좌의정(右·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후한 인품으로 16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상(名相)으로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렴과 구휼(救恤)로 일생을 살았던 그는 창고가 무너져서 노비가 수리할 것을 말하면 웃으면서 "네가 비록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 하였고, 집에 도둑이 들었다가 잡히면 도리어 불쌍히 여겨 "주리고 떨면서 쪼들리다가 부득이 하였구나"하며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 주면서 "만약 배고프고 추위에 떨거든 반드시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하였으며, 벌레나 짐승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인품이었다. 진의 아들 붕남(鵬南)은 학문(學問)에 깊이가 있어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높은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詩書)로 일생을 살았다.
     그외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낸 시손(蓍孫:붕남의 아들)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한 자산(子産)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진의 9세손 동기(東耆:통덕랑)의 둘째 아들 득용(得容)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거쳐 화량진 첨절제사(花梁津僉節制使)에 이르렀으며 경사(經史)를 비롯한 병서(兵書)·천문(天文)·주수(籌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의 전통 가문인 목천 상씨(木川尙氏)를 더욱 빛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63
  • 삼가 삼씨(三嘉森氏)
    삼가 삼씨(三嘉森氏)

     삼가(三嘉)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삼기(三 岐)·가수(嘉樹)·양현(兩縣)의 합명(合名)이다.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양현을 합하여 삼가(三嘉)로 개명하였다가 고종(高宗) 때 삼가군(三嘉郡)으로 승격되었으며, 1913년 일부는 거창(居昌)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합천군(陜川郡)에 속한 삼가면(三嘉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삼씨(森氏)는 역사(歷史)가 오래된 성씨(姓氏)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성원(姓原)과 유래(由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처음으로 14가구가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17
  • 사씨(舍氏)
    사씨(舍氏)

     사씨(舍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2가구가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姓氏)로서, 당시 경기도 파주군(京畿道坡州郡)에 살고 있던 사재성(舍在成)씨의 말에 의하면 본성(本姓)이 김씨(金氏)였는데 10대조(代祖) 김극윤(金克胤)씨가 사씨(舍氏)로 개성(改姓)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수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사씨의 본관이 부평(富平)과 태안(泰安) 2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씨(舍氏)는 남한(南韓)에 총 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60
  • 효령 사공씨(孝令司空氏)
    효령 사공씨(孝令司空氏)

     효령(孝令)은 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모혜현(芼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효령(孝靈)으로 고쳐 숭선군(崇善郡:선산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상주(尙州)에 속하였다가 1143년(인종 21) 일선군(一善郡:선산)에 환속하였으며, 공민왕조(恭愍王朝)에 군위(軍威)에 합해져 지금은 군위군에 속한 효령면(孝令面)으로 남아 있다.  사공씨(司空氏)는 중국(中國) 돈구(頓丘:직예성 대명도 청풍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진(晋 )나라 때 가신(賈辛)이란 사람이 사공(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왕으로부터 벼슬 이름을 성(姓)으로 하사(下賜)받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사공씨의 연원(淵源)은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낸 사공도(司空圖)가 897년(신라 효공왕 원년) 8학사의 한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동방의 거유(巨儒)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유하며 당문화(唐文化) 보급에 앞장섰고, 그후 귀화하여 사공씨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불명(不明)하고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고려 충숙왕(忠肅王:제27대 왕, 재위기간 : 1313 ∼1370, 복위 : 1332 ∼1339)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의시사(判儀시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효령군(孝令君)에 봉해진 사공중상(司空仲常)을 중조(中祖)로 받들고 봉군지명인 효령(孝令)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중상(仲常)의 아들 실(實)이 1353년(공민왕 2) 이 색(李 穡)·박상충(朴 尙衷)·정 추(鄭 樞) 등과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광흥창사(廣興倉使)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한림박사(翰林博士)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을 떨쳐「동방명현록(東方名賢錄)」에 수록되었으며,그의 아들 민(敏)은 공민왕(恭愍王)과 창왕대(昌王代)에 걸쳐 사복시정(司僕시正)과 삼사 부윤(三司府尹)을 지내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개성 유수(開城留守) 달(達:민의 아들)의 아들 주(周)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올랐으나 세조(世祖)가 왕위찬탈의 음모를 꾸미자 낙향하여 세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편 경어재(耕漁齋) 주(周)의 아들 발(發)은 문종(文宗) 때 통훈대부(通訓大 夫)에 올랐으나 강직(剛直)한 성품으로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이들이 종파(宗派)·중파(仲派)·계파(季派)로 갈라져 가문의 중추(中樞)를 이루었다.
     성종(成宗) 때 선무랑(宣務郞)으로 개성부 직장(開城府直長)을 지낸 맏아들 비( )의 후손에서는 효성(孝誠)과 학문(學問)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精:비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지낸 회(誨:정의 손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선(銑),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의 용(鎔) 3부자가 유명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습(習)의 아들로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지낸 양(亮 )과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을 역임한 기(琦)의 형제가 뛰어났고, 찰방 용(鎔)의 손자 지(祉)는 숙종(肅宗) 때 용양위 부호군(龍양衛副護軍)을 역임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균(均), 순조(純祖) 때의 병마절제사(兵馬切除使) 현(鉉), 장악원정(掌樂院正) 억( 檍) 등과 함께 효령 사공씨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효령 사공씨(孝令司空氏) 남한(南韓)에 총 915가구,
    3,6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75
  • 사씨(謝氏)
    사씨(謝氏)

     사씨(謝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우리나라에는 청(淸)나라 말기에 귀화(歸化)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본관(本貫)은 진주(晋州)와 한산(韓山) 2본으로 전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고,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북 순창(全北淳昌)에 3가구(家口)가 있었으며, 1960년에는 19명으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68
  • 청주 사씨(淸州史氏)
    청주 사씨(淸州史氏)

     청주(靑州)는 중국(中國) 화북지방(華北地方)에 인접한 지명으로 고대 중국을 아홉으로 나누었던 구주(九州)의 하나였으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일대이다.
     사씨(史氏)는 중국 경조(京兆:협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때 사람인 사질의 후예(後裔)가 관직(官職)의 이름을 따서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씨(史氏)는 산동성 청주(山東省靑州) 출신인 사 요(史 繇)가 명(明)나라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올랐으나 세자(世子)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모함을 받자 아들 형제 중 장남 중(重)을 데리고 1372년(공민왕 21) 고려(高麗)에 망명하여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위전리(京畿道坡州郡月籠面葦田里)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사 요(史繇)를 시조로 받들고 그의 출신지인 청주(靑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사씨의 본관(本貫)은 청주(靑州) 외에도 거창(居昌)·경주(慶州)·파주(波州)·청송(靑松)·충주(忠州) 등 16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데, 거창 사씨(居昌史氏)는 고려 예종(睿宗) 때 귀화하여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여진(女眞)의 침입을 토벌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거창(居昌)에 뿌리를 내린 사 영(史 榮)의 후예로 알려졌으며, 청송 사씨(靑松史氏)는 청주 사씨의 시조 사 요(史 繇)가 우리나라에 건너올 때 중국에 두고 온 둘째 아들 직(直)의 8세손인 세용(世用)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원군으로 출정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조선(朝鮮)에 귀화하여 경북 청송에 터를 잡아 본관을 청송으로 칭관(稱貫)해 왔다.
     그러나 청주 사씨와 한 뿌리의 자손임을 알고 청주로 합본(合本)했다고 한다. 그후 시조의 아들 중(重)이 세종(世宗) 때 경상좌도 관찰사(慶尙左道觀察使)를 지내고 1429년(세종 11)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출정했다가 전장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극명(克明)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여 평택 현감(平澤縣監)을 지낸 의담(義淡)과 함께 가문(家門)의 기반을 다졌다.
     그밖의 인물로는 감찰(監察)을 지낸 득손(得孫:의담의 아들)과 도사(都事) 기린(麒麟:득손의 손자), 주부(主簿) 학수(鶴壽), 공조 참의(工曹參議) 원훈(遠勳) 3형제가 뛰어났으며, 도사 기린의 아들 맹련(孟連)은 형조 좌랑(形曹 佐郞)을 역임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용(龍:주부 학수의 아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동(遜東:공조참의 원훈의 아들), 형조 좌랑 영주(英周),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종남(種男)과 함께 청주 사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사씨(靑州史氏)는 남한(南韓)에 총2,000가구, 8,66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50
  • 경주 빙씨(慶州 빙氏)
    경주 빙씨(慶州 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우리나라 빙씨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명(明)나라 출신인 빙여경(如鏡)이 1465년(명나라 헌종 성화 1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연학사(文淵學士)와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내각한림(內閣翰林)에 이르러 1467년(세조 13) 왕명(王命)으로 8학사와 더불어 동래(東來)하여 우리나라에 정착한 이 시초(始初)가 된다.「경주빙씨족보(慶州 氏族譜)」에의하면 세조(世祖)이 그를 국빈(國賓)으로 예우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벼슬을 내린 후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했으므로 관향(貫鄕)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慶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빙씨는 그후 시조 여경의 아들 청(淸)이 1507년(중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거쳐 강동 부사(江東府使)로 나갔다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규현(奎鉉)이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중화 부사(中和府使)를 거쳐 황해도 수사(黃海道 水使)를 지냈고, 차남 규서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조선 선조(宣祖) 때 등과(登科)했던 성의(珹儀:시조 여경의 현손)는 교리(校理)와 문천 군수(文川 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가문(家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그의 아들로 선조 때 덕원 부사(德源府使)를 지낸 홍일(弘日)과 삼척 부사(三陟府使) 겸 영장(榮將)으로 무명(武名)을 떨쳤던
    황일(璜一)이 유명했다. 한편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한 신민(信敏:부사 황일의 아들)은 응교(應校)를 시작으로 벼슬에 나가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치적(治績)을 올렸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한익(漢益)과 예봉(禮鳳) 부자(父子)가 이름났다. 그외 삼척 영장(三陟營將)을 지낸 주서(珠瑞:두익의 아들)과 용양위 부호군(龍양衛副護軍)에 올랐던 여옥(麗玉)이 유명했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상택(祥澤)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종문(種汶), 예조 좌랑(禮曹佐郞) 종찬(鍾찬),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종박(鍾박)·병순(炳淳) 등과 함께 경주 빙()씨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빙씨(慶州氏)는 남한(南韓)에 총 117 가구, 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227
  • 수성 빈씨(壽城賓氏)
    수성 빈씨(壽城賓氏)

     수성(壽城)은 대구직할시(大邱直轄市) 수성동(壽城洞) 지역의 고려시대 행정구역명으로, 본래 위화군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수창군(壽 昌郡) 또는 가창군(嘉昌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수성현(壽城縣)으로 고쳤다. 1018 년(현종 9)에는 경주(慶州)에 속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조(太祖)때 대구(大邱)에 속하였고, 1914년 달성군에 속하여 수성면이 되었으며, 1938년 대구에 편입되어 현재 수성 1-3동을 이루고 있다. 빈씨(賓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정확한 연원(淵源)은 알 수 없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주(周)나라 경왕(景王기 원전 544∼521) 때 대부(大夫)를 지낸 빈골주(賓骨周)의 후손 빈모가(賓牟賈)가 노(魯) 나라에서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시중(侍中)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빈씨(賓氏)의 본관(本貫)은 수성을 비롯하여 육창(陸昌:영광지방), 대구(大邱), 안주(安州) 등 4본이 전하고 있으나 계대(系代)를 밝힐 수 없다.
    「빈씨세보(賓氏世譜)」에 의하면 수성빈씨(壽城賓氏)의 시조(始祖) 빈우광(賓 宇光)은 송(宋)나라에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나 송나라가 망하자 비각(秘閣)에 수장(收藏)된 귀중한 서적(書籍)을 가지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학풍(學風)을 크게 진작시켜 충숙왕(忠肅王)이 그 공(功)을 치하하고 수성군(壽城君)에 봉했다고 한다.
     빈씨(賓氏)는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2,186명, 1975년에는 504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637가구, 2,6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88
  • 대구 빈씨(大邱彬氏)
    대구 빈씨(大邱彬氏)

     대구(大邱)는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중앙부에 위치한 행정중심지로 본래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딜구화현(達丘火縣) 또는 달불성(達弗城)으로 불리우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대구(大丘)로 개칭되고, 1419년(세종 1)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되었다.
     대구(大丘)가 대구(大邱)로 개칭된 것은 지금부터 약 190년 전의 일이다.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대성 공자(大聖孔子)의 휘(諱)가 구(丘)자라고 개칭하고 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正祖) 때부터 점차 대구(大邱)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후 지방제도의 개정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 1949년 7월 대구시로 개칭되고 1981년 7월 1일을 기해 대구직할시(大邱直轄市)로 승격하였다. 빈씨(彬氏)는 중국(中國) 성씨(姓氏)로, 청(淸)나라 덕종(德宗:1875 ∼1908) 때 몽고(蒙古) 출신으로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빈 문(彬 文)이 조선(朝鮮) 고종조(高宗朝)에 우리나라에 건너와 대구(大邱)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가 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대구(大邱)와 담양(潭陽) 2본(本)이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고,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92명으로 집계되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426가구, 1,8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981
  • 농서 비씨( 西丕氏)
    농서 비씨( 西丕氏)

     농서는 지금의 중국(中國) 감숙성 임조부와 공창부(鞏昌府)의 서쪽에 걸쳐 있었던 진한시대의 군(郡) 이름으로 서역(西域)에 가까이 위치했다.
     비씨(丕氏)은 선성(宣城:지금의 안휘성 동남쪽에 있는 도시)에서 계출(系出) 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양왕(襄王) 때 사림인 비 표(丕 豹)의 후예(後 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비씨(丕氏)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傳)하지 않아 상고(詳考)할 수 없고, 전해지는 본관(本貫)으로는 농서(농西) 단본(單本)이다.
     근대에 와서 비씨(丕氏)은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8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총 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02
  • 제주 부씨(濟州夫氏)
    제주 부씨(濟州夫氏)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으로 명칭은 도이(島夷)·주호(州胡)·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탁라(탁羅)·탐라(耽羅)·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新羅)의 속국이었던 탐라국(耽羅國)은 938년(태조 21)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숙종(肅宗) 때는 군(郡)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다가 1153년(의종 7) 군을 현으로 고쳤으며 1211년(희종 7)에 탐라를 제주라고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성주(星州)·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어,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山北)을 제주, 산남(山南)을 양분하여 동쪽에 정의현(旌義縣),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여 통치하다가 1864년(고종 1) 대정·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 관찰사 관할하에 두었다.
     그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910년(순종 4)에는 정의·대정 양현이 제주군으로 합군되는 동시에 추자면(楸子面)이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분리되어 제주군에 편입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5년 도사제(島司制)로 개편, 제주도(濟州島)가 되었고,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2시 2군 6읍 5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부씨(夫氏)의 시조(始祖)는 유명한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設話)」에 등장하는 부을나(夫乙那)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탐라(耽羅)에는 본래 사람과 만물(萬物)이 없었는데 한라산(漢拏山) 북쪽 모흥혈(毛興穴)에서 세사람과 신인(神人)이 용출(湧出)하였으니, 이들이 곧 부을나(夫乙那)·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이다.
     이들 삼신인(三神人)은 후에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오곡(五穀)의 종자(種子)와 6축(六畜)을 가져온 세사람의 미녀(美女)를 맞아 각각 아내로 삼고, 각기 활을 쏘아 화살이 맞닿는 곳에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니 처음으로 탐라의 역사가 시작되어 문화(文化)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부씨(夫氏)는 탐라국 삼도(三徒)를 지배하여 오면서 왕자(王子)였던 부계량(夫繼良)이 신라 무열왕(武烈王) 때 안무사(按撫使)로 신라를 예방하여 외교에 길을 트고 왕으로부터 작록을 받았으며, 탐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부여계(夫麗季)는 탐라를 항복받기 위하여 침입한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애석하게 순절하였다.
     그러나 부씨(夫氏)는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조선(朝鮮) 초에 진용부위(進勇副尉)로 별장(別將)을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통을 지켜온 인물로는 언경(彦景)의 증손(曾孫) 삼로(三老)가 세종(世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형제 중 맏아들 유렴(有廉)은  어모장군(禦侮將軍)로 선조가 뿌리를 내린 제주도를 지켰고, 막내 유성(有成)이 육지로 건너가 경기도 연천(蓮川) 지방에 자리잡아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유렴(有廉)의 아들 세영(世榮)은 어모장군(禦侮將軍)로 슬하에 각(恪)·협·열(悅)·신(愼)·픽( )·홍(弘) 등 6형제를 낳아 이들이 제주6파(濟州六派)의파조(派祖)이 되었으며, 9세손 응호(應豪)는 어모장군으로 사과(司果)을 지냈고, 승일(承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10세손에 이르러 보공장군(保功將軍)로 겸사복정(兼司僕正)을 지낸 상필(尙弼)과 어모장군 경필(景弼)이 가세를 튼튼히 다졌고, 진운(進雲)은 절충장군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다경진 만호(多慶津萬戶)을 거쳐 감은당보안(感恩堂保安)이 된 시웅(時雄)은 해상(海上)에서 해적떼를 만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해적들의 물건을 도로 빼앗아 싣고 돌아왔다는 설화가 전해질 정도로 힘이 센 장사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절충장군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던 만원(萬元)과 통정대부(通政大夫) 만겸(萬謙)이 유명했고,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도성(道聖)은 영조(英祖) 때 효행(孝行)으로 이름난 천겸(千兼), 대정 현감(大 靜縣監)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 일컬어졌던 사민(士敏), 학문(學問 )이 뛰어나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았던 도일(道一) 등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정조(正祖) 때 문과(文科 )에 급제하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오른 종인(宗仁)은 제주 부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일찌기 대정 현감(大靜縣監)로 나가 문학진흥에 힘을 쏟아 그 공덕(功德)을 찬양받았으며 뒤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고, 항희(恒熙)는 무과에 올라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로 정사에 기록된 생종(生鍾)과 함께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이어 제주 부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부씨(濟州夫氏)는 남한(南韓)에 총 2,094가구, 8,5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1
  • 경주 봉씨(慶州鳳氏)
    경주 봉씨(慶州鳳氏)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錦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봉씨(鳳氏)는 중국(中國) 평양(平陽:절강성 임분현의 당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명(明)나라 신종(神宗:1573∼1619) 때 유근득(劉瑾得)이란 사람이 봉씨(鳳氏)로 개성(改姓)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우리나라 봉씨(鳳氏)의 관향(貫鄕)은 경주 봉씨(慶州鳳氏) 단본(單本)이며, 상계(上
    系)는 소목이 전(傳하)지 않아 고증(考證)할 수 없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全南海南郡縣山面白浦里)와 부산(釜山)에 각각 1가구씩 있었으며 27명으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37
  • 하음 봉씨(河陰奉氏)
    하음 봉씨(河陰奉氏)

     하음(河陰)은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내현(冬音奈縣) 또는 아음현(芽音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에 호음현( 音縣)으로 고쳐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 하음현(河陰縣)으로 고쳐 개성(開城)에 속하였으나, 1413년(조선 태종 13) 강화군(江華郡)에 이속되어 현(縣)을 폐하고 강화군에 병합되었다. 하음 봉씨(河陰奉氏)의 시조(始祖) 봉 우(奉 佑)는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위위시경을 지내고 좌복야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하음봉씨을축세보(河陰奉氏乙丑世譜)」에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1106년(고려 예종 1) 어느날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江華郡河岾面長井里) 하음산 기슭의 연못가에 눈부신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이 떠올랐다.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기며 살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뛰어난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이 아이를 왕(王)에게 바쳤더니 임금은 궁중(宮中)에서 양육하라는 명(命)을 내린 후 노파가 봉헌(奉獻)했다고 하여 성(姓)을 봉(奉)이라 하고 이름을 우(佑)로 하사(下賜)했다.
     그로 인하여 봉씨(奉氏)의 연원(淵源)을 이루게되었으며, 후손들은 봉 우(奉 佑)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하음(河陰) 땅의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봉씨의 본관(本貫)은 하음 외에도 강화(江華)·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안산(安山)·안성(安城) 등 19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모두가 하음 봉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하음을 제외한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상계(上系)가 미상하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우(佑)의 7세손 천우(天祐)가 고려 때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원(元)나라에 피난가는 충숙왕(忠肅王)을 호종(扈從)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을 받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올라 하음부원군(河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질(質)은 전객령(典客令)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와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역임하였다. 한편 천우의 손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유례(由禮:판도판서 문의 아들)는 나랏일로 상소(上疏)를 올려 극간(極諫)을 했으나 실행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學問)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 등과 교유하며 <도학(道學>의 지종(之宗)>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 여(礪)의 딸이 왕세자비(王世子妃:문종의 비인 순빈)가  되었고 형조(刑曹)를 비롯한 4조(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우 즙(楫 )은 세종조(世宗朝)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아들 여해(汝諧)와 함게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당대의 석학(碩學)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에게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數學)한 여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처남매부간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순절하여 공주의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그외 성종(成宗) 때 감찰(監察)을 거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을 역임한 원효(元孝:판도판서 문의 증손, 신의 아들)와 세조(世祖) 때 정난이등공신(靖亂二等功臣)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던 석주(石柱)가 유명했고, 황간 현감(黃澗縣監) 삼산(三山:훈련원 도정을 지낸 장의 아들)의 둘째 아들 천상(天祥)은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로 <시정책십개조(施政策十個條)>를 상소하여 채택됨에 따라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운 종한(宗翰)·진한(震翰)은 학명(學名)을 떨친 성민(聖民)·경륜(景綸)을 비롯한 효자(孝子) 한정(漢鼎)과 함께 하음 봉씨를 대표했다.
     봉씨(奉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5,911명, 1975년에는 1,700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469가구, 10,5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614
  • 면천 복씨(沔川卜氏)
    면천 복씨(沔川卜氏)

     면천(沔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당진군(唐津郡)에 속해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 때
    에는 혜군( 郡) 또는 지비(智非)라 부르던 것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 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운주(運州: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와서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唐津郡)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복씨(卜氏)의 선계(先系)는 당(唐:후당923∼936) 나라의 학사(學士) 한 분이 신라 말엽에 오계(五季:다섯 왕조에 걸쳐 문란해진 시대를 일컬음)의 난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면천(沔川)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가 되었다. 복씨의 본관(本貫)은 면천을 비롯하여 홍주(洪州)·오천(烏川)·연주(延州 : 강원도 영월의 고호)·평산(平山)·구성(龜城) 등 10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면천을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기록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始祖) 복지겸(卜智謙)은 고려창업(高麗創業)의 주역(主役)으로 본래는
    태봉국(泰封國)의 마군장수(馬軍將帥)로 있다가 궁 예(弓 裔)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민심이 어지러워지자신숭겸(申崇謙:평산 신씨의 시조)·배현경(裵玄慶:경주 배씨의 시조)·홍 유(洪 儒) 등과 함께 왕 건(王 建)을 추대(推戴)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후 장군 환선길(桓宣吉)과 임춘길(林春吉) 등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이를 평정(平定)시켰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혜성부원군( 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복지겸(卜智謙)을 시조로 받을고 본관(本貫)을 면천(沔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조에 10여 명의 평장사(平章事)와 관면잠영(冠冕簪영)이 끊이지 않아 거족(巨族)으로 일컬어졌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조에서 무신(武臣)으로 명성을 떨쳤던 규(奎:시조의 12세손)가 1291년(충렬왕17) 원(元)나라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 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원주 방호별감(原州防護別監)으로 이를 격퇴시켜 크게 무명(武名)을 날렸으며, 그의 아우 기(箕)는 지주사(智州事)을 역임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한편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진의 아들 위룡(渭龍)이 공양왕(恭讓王) 대 사온서 직장(司 暑直長)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 색(李 穡) 등과 함께 친교를 맺어 교유했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洪州) 여수동(麗水洞)으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의 아들 한( )은 세종조(世宗朝)에서 호조 좌랑(戶曹左郞)에 올라 아버지 상(喪)을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시묘(시墓)하여 세인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맏아들 오(吾)가 임천(林川)과 서천군수(舒川郡守)를 거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올랐고, 막내 여(予)는 고원 군수(高源郡守)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한편 오(吾)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는데  맏아들 승원(承元)은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으며, 차남 승형(承亨)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세째 아들 승리(承利)는 제주 목사(濟州牧使)을 각각 역임하여 막내 승정(承貞:예조 참의와 황해 감사를 역임)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승정(承貞)의 현손(玄孫) 응길(應吉:참봉 연의 아들)은 중봉(重峯) 조 헌(趙 憲)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종사관이 되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종용사(從容사)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그의 조카 정웅(廷雄:상길의 아들)은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그밖에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낸 태진(台鎭)과 장령(掌令) 태형(台衡)이 유명했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도흠(道欽)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한 준흠(駿欽)·윤성(潤成)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복씨(卜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4,264명, 1975년에는 1,116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1,794가구, 7,3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792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