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18 페이지
  •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月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박 혁거세
    (朴赫居世)가 개국하여 사로국(斯盧國),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불려오던 중
    65년(탈해왕 9)에 계림(鷄林)으로 개명되었고, 기림왕(基臨王) 때 다시 신라로 고쳤으나 고려 때 경주(慶州)로 개칭하였다.
     987년(성종 7)에는 동경(東京)이라 하고 목종(穆宗) 때 낙랑군(樂浪郡)으로 강등하였다가 현종(顯宗) 때 다시 경주라 하였으며, 이후 안동대도호부·경주목 등으로 변천해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불렀다.
     1415년(태종 15) 경주부로 다시 고치고 1895년(고종 32)에 경주군(慶州郡)이 되었으며, 1955년 8월 경주시를 설치하면서 종전의 경주군의 나머지 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제4대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 재위기간 : 57 ~ 80)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탈해왕(脫解王)의 탄생(誕生)에 대한 신화(神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왜국(倭國)의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 삼국사기에는 龍城國이라 함)의 왕이 여왕국(女王國)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이했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더니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좋겠다"고 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우고 떠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궤짝을 실은 배는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자, 배는 다시 계림(鷄林)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下西知村阿珍浦 : 지금의 영일만)에 닿으니 이때가 기원전 19년(신라 혁거세 39)이었다.
     이 때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이를 보고 새끼줄로 배를 매어 해안으로 끌어 올린 후 궤를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키가 9자나 되고 풍모가 준수하여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여 처음 배가 올 때 까치가 울면서 따라 왔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새조(鳥)를 떼어 버리고 석(昔)을 성으로 삼고, 포장한 궤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추호도 게으름을 피는 기색이 없었고, 자라면서 학문(學問)과 지리(地理)에 능통하여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남해왕(南解王)이 맏공주를 그에게 주고 대보(大輔)로 등용하여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57년 유리왕(儒理王 : 제3대 왕,  재위 기간 : 24 ~ 57)이 임종에 이르자 "아버지 남해왕이 고명(顧命)할 때 '내가 죽은 뒤 아들이나 사위를 논할 것 없이 연장자나 어진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라'하여 과인이 왕위에 올랐으니 지금에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신라 제4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석씨(昔氏)는 신라 56대왕 중 4대 탈해왕을 비롯하여 89대 벌휴왕(伐休王), 10대 내해왕(奈解王), 11대 조분왕(助賁王), 12대 첨해왕(沾解王), 14대 유례왕(儒禮王), 15대 기림왕(基臨王),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 8왕에 걸쳐 171년 간 왕통(王統)을 이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탈해왕을 시조로 받들고 월성(月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에서 교서랑(校書郞)을 지낸 석재흥(昔載興)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시종(時宗:재흥의 아들)과 밀직사(密直使) 운니(運尼)의 부자(父子)가 유명했으며, 좌복야(左僕射) 한일(漢一)의 아들 정민(貞敏)은 예의 시랑(禮儀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부사(府使) 상률(相律)과 판관(判官) 용진(龍眞), 부호군(副護軍) 광국(光國), 오위장(五衛將) 병권(炳權)이 뛰어났으며, 봉혁(鳳爀)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건민(鍵民)과 우성(羽盛)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월성 석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는 남한(南韓)에 총 1,932가구, 7,9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126
  • 해주 석씨(海州石氏)
    해주 석씨(海州石氏)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 일명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이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다가 1938년 부(府)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해주 석씨(海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성(石 星)은 중국(中國)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명(明)나라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혀 목종(穆宗) 즉위년에 직간(直諫)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신종(神宗) 때 다시 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명나라 신종 12, 조선 선조 17) 종계변무(宗系辨誣)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의 은인(恩人)이다. 그 후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사신(使臣)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 성(石星)에게 물어 투옥(投獄)시켜 옥사(獄死)케 하였다.「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의하면 석 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 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 석 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형제 중 차남 천은 1597년(만력 25, 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星州石氏)가 되었으며, 장남 담(潭)은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海 州)로 사적 (賜籍)하였다. 그 후 담(潭)의 작은 아들 귀당(貴棠)과 손자 난(亂 : 귀실의 아들)이 청인(淸人)을피하여 산음현 모호리(山陰縣毛好里 :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 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양군(首陽君) 담의 증손 중립(仲立 : 난의  맏아들)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진번(進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한편 천( )의 증손 숭길(崇吉 : 이수의  맏아들)과 선일(善一) 부자가 가선대부로 용양위호군(龍  衛護軍)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순조(純祖) 때 와서는 후손 준옥(俊玉)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좌승지(左承旨)을 지낸 재풍(在豊)과 군자감정(軍資監正) 관기(冠琦)가 유명했으며 , 한말(韓末)에는 상룡(祥龍)과 채룡(彩龍)이 항일 투쟁에 공헌하여 해주 석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 석씨(海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580가구, 2,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1
  • 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충주,홍주 석씨(忠州,洪州石氏)

     충주(忠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원군(中原郡)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완장성( 長城)·탁장성(託長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진흥왕(眞興王 : 제24대 왕, 재위기간 : 534 ∼ 576)이 소경(소경)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忠州)로 개칭되어 성종(成宗) 때 대원(大原)·예성 (蘂城) 등으로 불리웠고, 고종(高宗) 때 국원경(國原京)으로 하였으며, 1550년(명종 5) 유신현(維新縣)으로 부르다가 조선(朝鮮) 선조(宣祖) 즉위년에 다시 충주(忠州)로 환원,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56년 시(市)로 승격되었다.
     석씨(石氏)는 본래 중국(中國) 무위(武威 : 감숙성 감량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85본(本)이다.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린(石  )은 1174년(고려 명종 4)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 (上將軍)에 오르고 동서북면 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석 린(石  )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6세손 양선(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이태조(李太祖)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고, 양선의 아들 천을(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후슬하에 아들 수명(壽明)과 여명(汝明)을 두어 이들이 충주 석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천을의 맏아들 수명(壽明)은 조선조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으며, 그의 아우 여명(汝明)은 고려 말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3등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하니 태종이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천 군수(泰川郡守)를 지낸 관(瓘 : 한성 판윤 수명의 아들)과 증좌찬성(贈左贊成) 여명(汝明)의 아들 문수(文守 : 자헌대부로 예조 참판을 역임)·문현(文賢 : 이천 현감을 역임)·문성(文成 : 직제학을 역임)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한편 직제학(直提學) 문성(文成)의 맏아들로 세조(世祖) 때 판서(判書)를 지낸 인정(仁正)은 예원군( 蘂原君)에 봉해지고, 차남 의정(義正)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여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한 예정(禮正)·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을 지낸 지정(智正)·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신정(信正)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의정의 아들 사진(斯珍)은 단종(端宗)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령(宜寧) 석천동(石川洞)으로 내려갔다. 그 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옥점(玉 )과 첨정 (僉正)을 역임한 옥진(玉 )이 뛰어났고, 좌부장(左副將) 경하(擎廈)의 아들 지형(之珩)은 인조(仁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거쳐 강화 교수(江華敎授)를 지내고 효종(孝宗) 때 「오행귀감(五行龜鑑)」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쳐 서적과 호피(虎皮)를 하사(下賜)받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청주(淸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성국(成國)과 속리산(俗離山) 전투에서 선봉(先峯)으로 싸웠던 창문(昌文)이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충주 석씨의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홍주 석씨(忠州, 洪州石氏)는 남한(南韓)에 총 8,137가구, 33,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03
  •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

     안음(安陰)은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양군(咸陽郡)과 거창군(居昌郡)의 일부 지역을 관장하였던 조선 초기(朝鮮初期)의 행정구역명으로, 고려(高麗) 때의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을 1415년(태종 15)에 합쳤다.
     그 후 1728년(영조 4)에 와서 안의현(安義縣)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1913년 지방행적구역 개편에 따라 군을 폐하고 함양군(咸陽郡)과 거창군(居昌郡)에 갈라 편입하여 지금은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으로 남아 있다. 서문씨(西門氏)는 본래 중국(中國) 양국(梁國 : 강소성 서해도 갈산)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정(鄭)나라 대부(大夫)가 살고 있던 지명(地名)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서문씨는 원(元)나라의 하남성(河南省)출신으로 진사(進士)를 지낸 서문 기(西門記)가 1351년(고려 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의 비(妃)인 노국대 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안음군(安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음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씨의 본관은 안음 외에도 청주(淸州)·감음(感陰: 안음의 옛 지명)·동주(東州 : 철원지방) 등 3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추정되며, 안음을 제외한 관향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충남 금산(忠南錦山)과 전북 장수(全北長水)에 대다수가 살고 있는 서문씨는 시조의 아들 존(尊)이 조선조에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사(師)가 정랑(正郞)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외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군수(郡守)를 지낸 식(湜 : 시조의 증손, 정랑 사의 아들)과 검상(檢詳) 질(秩)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는 남한(南韓)에 총 588가구, 2,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66
  • 서씨(西氏)
    서씨(西氏)는 중국(中國)에서 귀화(歸化)한 성씨(姓氏)로 알려졌으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등의 문헌(文獻)에는 중국 청(淸 : 통일왕조 : 1636 ~ 1912)나라 덕종(德宗 : 제11대 왕, 재위기간 : 1875 ∼ 1908) 때 만주 (滿洲) 사람인 서랍희(西拉希)와 몽고(蒙古) 출신인 서 임(西 林)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국(全國)에 2가구가 있었으며, 1960년도 국세 조사 때는 29명으로 나타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0가구, 1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92
  • 평당 서씨(平當徐氏)
    평당 서씨(平當徐氏)

     평당(平當)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파주(坡州)의 옛 지명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봉성현(峰城縣)이라 하였으며, 고려(高麗) 때 서원현(瑞原縣)으로 개칭하였고 조선(朝鮮) 때 원평군(原平郡 )으로 고쳤다가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파주군(坡州郡)이 되었다.
     평당 서씨(平當 徐氏)의 시조(始祖) 서준방(徐俊邦)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외적(外敵)을 격퇴시키는 데 공(功)을 세워 봉성군(峯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약진(若珍)과 손자 숭조(崇祖)에 이르기까지 3대가 봉성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평당(平當)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의하면 시조 준방(俊邦)은 서신 일의 5세손으로 이천 서씨에서 분족(分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원(同源)으로 알려진 봉성 서씨(峰城徐氏)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역임한 서극후(徐克後)의 후손으로 전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을 역임한 숭조(崇祖)의 아들 령(  : 시조의 증손)이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7세손 원경(元敬)은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정랑(正郞)을 지낸 인기(仁奇 :  8세손)와 목사(牧使) 신(信)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극일(克一)은 정언(正言)을 역임하여 군수(郡守) 구(矩), 첨지중추부사(僉知中 樞府事) 수(綬), 교리(校理) 륜(倫) 등과 함께 평당 서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당 서씨(平當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56가구, 2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70
  • 절강 서씨(浙江徐氏)
    절강 서씨(浙江徐氏)

     절강(浙江)은 중국(中國) 동남부(東南部)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陽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져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절강 서씨(浙江徐氏)는 절강성(浙江省) 출신인 서해룡(徐海龍)의 증손 서 학(徐 鶴)이 1597년(선조 30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총관(都摠管)으로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여러 전투에서 공(功)을 세우고 경북 성주 대동방(慶北星州大同坊)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서해룡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인 절강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학(鶴)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헐세(歇世)가 종6품의 문관(文官) 품계인 승사랑(承仕郞)을 제수(除授)받아 가세(家勢)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학(鶴)의 손자 종길(宗吉:승사랑 헐세의 아들)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겸세(士世)의 맏아들 의필(義必)은 효행(孝行)으로 명성을 떨쳐 훈련원 부장(訓鍊院副將)을 지낸 후손 가행(嘉行), 참봉 (參奉) 응명(應明)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강 서씨(浙江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90가구,
    4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97
  • 장성 서씨(長城徐氏)
    일세조 휘(諱): 서 능(徐 稜), 장성군(長城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66
  • 이천 서씨(利川徐氏)
    시  조 휘(諱):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묘 소: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540
  • 연산 서씨(連山徐氏)
    시  조 휘(諱): 서준영(徐俊英)
       일세조 휘(諱):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08
  • 부여 서씨(扶餘徐氏)
    시  조 휘(諱): 서 융(徐 隆)
       일세조 휘(諱): 서 존(徐 存), 태원군(太原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22
  • 대구 서씨(大丘徐氏)
    시  조 휘(諱): 서 한(徐 한), 군기소윤(軍器少尹)
             묘 소: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63
  • 당성 서씨(唐城徐氏)
    원  조 휘(諱): 서 간(徐 간), 남양군(南陽君)
       시  조 휘(諱): 서득부(徐得富)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54
  • 달성 서씨(達城徐氏)
    시  조 휘(諱): 서 진(徐 晋), 판도판서(版圖判書)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45
  • 남평 서씨(南平徐氏)
    남평 서씨(南平徐氏)

     남평(南平)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군(羅州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을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경덕왕(景德王)이 현웅현(玄雄縣)으로 고쳐 무주(武州 : 광주의 옛 이름)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조(高麗朝)에서는 남평(南平) 또는 영평(永平)이라 하여 나주목(羅州牧)에 속했었다.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羅州郡)에 합해져서 지금의 남평면(南平面)이 되었다.
     남평 서씨(南平徐氏)은 이천 서씨(利川徐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원손(遠孫) 서 호(徐 灝)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호(號)는 누대(累代)로 남평(南平)에 세거(世居)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그의 아들 효당(孝堂)이 조선조(朝鮮朝)에서 전생서 판관(典牲署判官)을 역임하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손자 우(祐)와 지(祉)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세거지(世居地)인 남평(南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이천 서씨(利川徐氏)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현감(縣監) 우(祐)의 아우 지(祉)는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으로 명망이 높아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의 격찬을 받았으며, 1498년(연산군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폐위(廢位)된 단경왕후(端敬王后:중종의 비 신씨)의 복위(復位)를 상소하다 탄핵을 받은 박 상(朴 祥)과 김 정(金 淨)의 무고함을 변호하다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던 이 행(李 荇)과의 의견 충돌로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그 외 참봉(參奉) 연(演)의 아들로 현감(縣監)을 지낸 탁(晫)과 전적(典籍)을 역임한 국정(國楨)의 부자(父子)가 남평 서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평 서씨(南平徐氏)은 남한(南韓)에 총 1,102가구,
    5,2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07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