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
월성(月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박 혁거세
(朴赫居世)가 개국하여 사로국(斯盧國),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불려오던 중
65년(탈해왕 9)에 계림(鷄林)으로 개명되었고, 기림왕(基臨王) 때 다시 신라로 고쳤으나 고려 때 경주(慶州)로 개칭하였다.
987년(성종 7)에는 동경(東京)이라 하고 목종(穆宗) 때 낙랑군(樂浪郡)으로 강등하였다가 현종(顯宗) 때 다시 경주라 하였으며, 이후 안동대도호부·경주목 등으로 변천해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불렀다.
1415년(태종 15) 경주부로 다시 고치고 1895년(고종 32)에 경주군(慶州郡)이 되었으며, 1955년 8월 경주시를 설치하면서 종전의 경주군의 나머지 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제4대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 재위기간 : 57 ~ 80)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탈해왕(脫解王)의 탄생(誕生)에 대한 신화(神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왜국(倭國)의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 삼국사기에는 龍城國이라 함)의 왕이 여왕국(女王國)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이했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더니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좋겠다"고 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우고 떠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궤짝을 실은 배는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자, 배는 다시 계림(鷄林)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下西知村阿珍浦 : 지금의 영일만)에 닿으니 이때가 기원전 19년(신라 혁거세 39)이었다.
이 때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이를 보고 새끼줄로 배를 매어 해안으로 끌어 올린 후 궤를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키가 9자나 되고 풍모가 준수하여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여 처음 배가 올 때 까치가 울면서 따라 왔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새조(鳥)를 떼어 버리고 석(昔)을 성으로 삼고, 포장한 궤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추호도 게으름을 피는 기색이 없었고, 자라면서 학문(學問)과 지리(地理)에 능통하여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남해왕(南解王)이 맏공주를 그에게 주고 대보(大輔)로 등용하여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57년 유리왕(儒理王 : 제3대 왕, 재위 기간 : 24 ~ 57)이 임종에 이르자 "아버지 남해왕이 고명(顧命)할 때 '내가 죽은 뒤 아들이나 사위를 논할 것 없이 연장자나 어진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라'하여 과인이 왕위에 올랐으니 지금에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신라 제4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석씨(昔氏)는 신라 56대왕 중 4대 탈해왕을 비롯하여 89대 벌휴왕(伐休王), 10대 내해왕(奈解王), 11대 조분왕(助賁王), 12대 첨해왕(沾解王), 14대 유례왕(儒禮王), 15대 기림왕(基臨王),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 8왕에 걸쳐 171년 간 왕통(王統)을 이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탈해왕을 시조로 받들고 월성(月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에서 교서랑(校書郞)을 지낸 석재흥(昔載興)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시종(時宗:재흥의 아들)과 밀직사(密直使) 운니(運尼)의 부자(父子)가 유명했으며, 좌복야(左僕射) 한일(漢一)의 아들 정민(貞敏)은 예의 시랑(禮儀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부사(府使) 상률(相律)과 판관(判官) 용진(龍眞), 부호군(副護軍) 광국(光國), 오위장(五衛將) 병권(炳權)이 뛰어났으며, 봉혁(鳳爀)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건민(鍵民)과 우성(羽盛)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월성 석씨를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경주 석씨(月城·慶州昔氏)는 남한(南韓)에 총 1,932가구, 7,9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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