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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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延
    연延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215
  • 여씨(汝氏)





    여씨(汝氏)

     여씨(汝氏)는 중국(中國) 강릉(江陵)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문헌(文獻)에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의 연원(淵源)과 시조(始祖)에 대한 소목이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여씨(汝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김천(金泉)과 회양(淮陽)에 각각 1가구씩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는 남한(南韓)에 총 26가구 122명이 살고 잇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10
  • 의령 여씨(宜寧余氏)
    의령 여씨(宜寧余氏)

     의령(宜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앙,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장함현(獐含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진주(晉州)에 편입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현(縣)으로 승격된 뒤 1895년 (고종 32)에 의령군으로 개칭되어 여씨(余氏)는 본래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
     우리나라 여씨(余氏)의 연원(淵源)은 조(趙)·송(宋)나라 때 이르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오른 여선재(余善才)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고려(高麗)에서 의춘군(宜春君)에 봉(封)해지고 의령(宜寧)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으면서 부터이다. 그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선재(善才)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한 현경(玄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여씨(余氏)의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외에도 12본이 나타나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직유가 고려(高麗)에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검교 장군(檢校將軍)을 역임하였고, 손자 정(廷)이 군기감(軍器監)을 정(廷)의 5세손 중엄(仲淹)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부 전서(禮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 외에도 중부(仲富)의 아들로 조선(朝鮮) 때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를 지낸 홍열(興烈)과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안주진 병마절도사(安州鎭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원경(元暻), 이조 정랑(吏曹正郞)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낸 건(健)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여씨(宜寧余氏)는 남한(南韓)에 총 3,432가구, 14,110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12
  • 여呂
    여呂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94
  • 영월 엄씨(寧越嚴氏)
    영월 엄씨(寧越嚴氏)

     영월(寧越)은 강원도(江原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생군(奈生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영월로 고쳐서 원주(原州)에 편입시켰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부(府)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영월군(寧越郡)이 되었다.
     영월 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漢)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 先生)의 후예이며 당(唐)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 제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신라(新羅)에 도래(東來)하였다가 본국(本國)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 땅인 내성군에 안주(安住)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郡)에 추봉(追封)하고 후손들에게 영월(寧越)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자,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특히 엄씨의 관적지(貫籍地)인 영월읍 하송리(寧越邑下松里)에는 처음 엄시랑(嚴侍郞)이 정착하면서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우리나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보수(寶樹)로 천연기념물 제 76호로 지정 되었으며, 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와 을유해방(乙酉解放) 시(時)에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고, 6·25 동란시에는 북편의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이변(大異變)이 있을 때마다 무언(無言)의 예시(豫示)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영월 엄씨는 시조의 아들 3형제 대(代)에 와서 장남 태인(太仁)이 고향을 지키며 군기공파(軍器公派)를 이루었고, 차남 덕인(德仁)은 한양(漢陽)으로 이주(移住)하여 복야공파조가 되었으며, 3남 처인(處仁)은 함경도(咸鏡道)로 이주하여 문과공파조(文科公派祖)가 되어 현재 그의 후손들이 북한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대(代)를 거듭하면서 참봉공계(參奉公系)·교수공계(敎授公系)등 37계통으로 갈라져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특히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문(人物)로는 11세손 유온(有溫 : 장군 비의 증손, 준의 아들)이 조선창업(創業)의 개국공신(開國攻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총제(同知總制)를 역임했고 판관(判官) 한저(漢著)의 아들 흥도(興道)가 절행(節行)으로 뛰어났다.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王位)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되었던 단종(端宗)이 화(禍)를 당하자 명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든데 옥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御命)에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호장(寧越戶長)이라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있던 흥도(興道)가 관(棺)을 마련하여 선산(先山)에 장사 지내고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는 말을 남긴 후 영남지방으로 피했다.
     후환이 두려워 세인(世人)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한 흥도의  충절은, 선조(宣祖)때 그의 영웅성이 재평가되어 후손을 찾아 장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해 주고 단종릉(端宗陵)인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비로소 그 후손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에 등용되었다.
     영조(英祖) 때 와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 순조(純祖)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가자(加資)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로 내려져,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詞)와 고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었다.
     한편 시조의 16세존 흔(昕)은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정자(正字)를 지냈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수찬(修撰)을 지냈다. 특히 그는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그 행적(行績)이 등재(登載)되어 영월 엄씨를 더욱 빝냈으며, <선(善)으로 패)敗)한 일 보면 악(惡)으로 이긴 일 본가, 이 두 즈음에 취사(取捨) 아닌 명백(明白)한가, 平生)에 악된 일 아니하면 자연유성(自然有性)하리라>라는 시조(時調) 한수가「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한다. 흔(欣)의 현손 집(緝 : 성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과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했으며,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냈으며 폐모론(廢母論에 유생(儒生)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파직당한 성(惺)과, 효종(孝宗) 때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갔던 황(愰)이 유명했고, 성의 조카 정구(鼎耉)는 효종(孝宗) 때 좌승지(左承旨)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뒤에 교리(校理)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한호(韓濩) 이후의 명필로 이름났던 한명(漢明)은 고금의 서법(대성한 「집고첩(集古帖)」과 「만향제시초(晩香齊詩抄)」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엄문(嚴門)을 대표했으며, 집(緝)의 아들 경수(慶遂)는 숙종(肅宗)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여,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 「연행록(燕行錄)」을 간행한 숙(琡), 순조 때 암행어사를 지낸 도(燾), 고종 때 이조 판 서(吏曹判書)를 지낸 석정(錫鼎)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세영(世永)은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 내각이 수립될 때 농상공부대신(農尙工部大臣)을 역임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한 후 군자금(軍資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정섭(正燮)과 더불어 충절(忠節)의 전통 가문인 영월 엄씨(寧越嚴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216가구, 114,1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797
  • 어魚
    어魚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262
  • 양씨(襄氏)
    양씨(襄氏)

     양씨(襄氏)는 중국(中國) 태원(太原)에서 계출된 성씨(姓氏)로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 제 11대왕 재위기간 : 147 ∼167) 때 평원 습음(平原濕陰) 사람인 양개개의 후손으로 전하며, 노(魯)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양중(襄仲)의 후손이 시호(諡號)를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양씨(襄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부산(釜山)에 1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그후 1960년 국세조사 당시 238명으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474
  • 양씨(樑氏)
    양씨(樑氏)

     옛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지 않는 성씨(姓氏)로, 성원(姓源)과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근대에 와서 양씨는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 강원도(江原道)와 충청남북도(忠淸南北道) 일원에 16가구가 분포되어 잇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는 서울을 비롯하 경기도(京畿道)에 335명, 충남(忠南)에 75명, 부산(釜山)에 65명 등 총 174가구, 7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38
  • 양楊
    양楊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276
  • 양梁
    양梁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27
  • 원평 야씨(原平夜氏)

    원평 야씨(原平夜氏)

     원평(原平)은 파주(坡州)의 옛 지명이다. 파주(坡州)는 경기도의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475년(고구려 장수왕 63)에 파주사현(坡州史縣)이라 칭하였고, 1398년(태조 7)에는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坡平縣)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였으며, 1415년(태종 15) 교하현(交河縣)을 폐지시켜 이에 병합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뒤에 교하현을 다시 복구시켰으나 도호부는 그대로 두었다.
     1461년(세조 7)에 파주 목(牧)으로 승격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본주(州)를 유행지소(遊幸之所)로 삼고 나머지 땅은 인접 고을에 소속시켰다가 1506년(중종 1) 파주목으로 복귀, 1895년 파주군(坡州郡)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하군을 폐합하였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야씨(夜氏)는 원평(原平), 개성(開城), 석천(石淺 : 교하지방), 봉성(奉城 : 파주지방)의 4본(本)이 전한다. 원평 야씨(原平夜氏)의 시조(始祖)인 야선조(夜先祖)는 대호군(大護軍)으로 1303년(충렬왕 29) 원(元)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고, 그 뒤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야씨(夜氏)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북한지역에만 42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43가구, 1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075
  • 애씨(艾氏)
    애씨(艾氏)

     애씨(艾氏)는 중국 천수(天水 : 지금의 감숙성 위천도에 있던 한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애공(艾孔)의 후예(後裔)가 땅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나라 애씨(艾氏)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한양(漢陽), 연풍(延豊), 장연(長延 : 연풍 지방), 전주(全州), 영천(榮川 : 영주 지방), 철원(鐵原)등 6본이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기도 시흥(京畿道始興)을 비롯한 안성(安城), 수원(水原) 등지에 4가구가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애씨(艾氏)는 남한(南韓)에 총 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818
  • 안安
    안安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08
  • 아씨(阿氏)
    아씨(阿氏)

      아씨(阿氏)는 동진(東晉)의 안제(安帝:제10대 왕, 재위기간:397-418) 때 사람인 아부간(阿簿干)의 후손으로 전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등 사서(史書)에 역사적인 인물로 나온다.
     6세기 초엽 신라(新羅)에 초청되어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세운 백제(百濟)의 아비지(阿非知),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학자로 일본(日本)에 한학(漢學)을 전한 아직기(阿直岐) 등인데 그들의 성씨(姓氏)가 아(阿)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보면, 고려(高麗) 태조(太祖) 원년(元年)에 상주(尙州)의 호족(豪族) 아자개(阿字蓋)가 고려에 내부(內附)하여 상주(尙州)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자개(字蓋)는 견훤(甄萱)의 아버지로서 본성(本姓)이 이씨(李氏)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전남(全南)에 20가구, 경남(慶南)에 9가구 등 모두 35가구가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70가구, 3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76
  • 심沈
    심沈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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