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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개양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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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2:38 조회 46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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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개양할미

제명 : 수성당제
신격 : 수성당할머니(개양할미), 막내딸, 산신, 장군신
제당 : 수성당
일시 :

전북 부안 죽막동 수성당 개양할미

지역 : 전북 부안 죽막동

명칭 : 개양할미

신격 : 개양할미는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해신이다. 아득한 옛날 적벽강의 대막골 뒤 ‘여울굴’에서 개양할미가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과 깊이를 조정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여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개양할미를 물의 성인으로 높여 수성할미라 부르고, 여울골 위 칠산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절벽에 구랑사를 짓고 모셔왔는데, 이는 개양할미가 딸 여덟을 낳아 위도,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 요소에 보내 바다를 지키게 하고, 개양할미는 막내딸을 데리고 구랑사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했다고 한다. 지금은 수성당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특징 : 개양할미는 키가 어찌나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다 하며, 다만 곰소의 ‘계란여’에 이르러 발이 빠져 치마까지 젖었는데, 화가 난 개양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다 계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지금도 깊은 물을 보면 ‘곰소 둠벙 속 같다’는 속담이 전해오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죽막동을 중심으로 한 주변 마을 어민들이 무사태평과 풍어를 비는 수성당제를 지내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맥이 끊긴 상태다.

관련 플래시 보기

칠산바다를 지키는 개양할미


지 역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죽막동
수성당

줄거리 : 개양할미는 당집 곁의 굴에서 나온 아주 키가 큰 거녀이다. 키가 얼마나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다. 개양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위도,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의 요소에 배치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한다.긴 대나무 자로 바다의 높낮이를 재면서 깊은 곳은 낮게 낮은 곳은 깊게 바다를 편편하게 골라 배가 항해할 때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한다. 풍랑을 다스려 어부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해 준다.

등장인물 소개

* 개양할미는 늙었다는 말이 아니라 크다는 의미이다. 개양할미가 입은 옷은 백제시대 의상이다. 한손에 늘 긴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닌다. 머리는 쪽을 지었다. 개양할미는 적벽강 대막골 뒤 여울굴에서 나왔다. 바다의 풍랑과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해신이다. 개양할미는 키가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는다.

* 여덟 딸은 백제시대 의상에 머리 모양은 선녀머리를 하고 있다.

배 경
(1) 시대 : 백제시대
(2) 공간 : 부안 수성당이 있는 절벽 바닷가 당집, 적벽강 바닷가, 적벽강 큰 바위 굴, 바다
(3) 지역 :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수성당 5. 신의 성격 바다의 깊고 높낮이를 조절하고, 풍랑을 관장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주는 항해의 여신인 해신이다.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 수성당은 깎아지른 바닷가 벼랑위에 위치해 있다. 수성당 안에는 개양할미와 그의 딸 여덟 명의 당신도가 걸려있다. 산신도가 함께 걸려있다. 개양할미는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해신이다. 옛날 옛날에 며칠 동안 적벽강에 큰 파도가 쳤다. 바닷가에 묶어 둔 배들이 모두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고 오직 배 한척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그 한척이나마 지키려고 나와서 갖은 애를 썼다. 그런데 갑자기 더 큰 파도가 일면서, 여울굴 바위가 흔들거리며 천둥같은 소리를 냈다. 적벽강 여울굴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와 사람들은 일제히 그 곳을 바라봤다.그때 그 곳에서 한 거인 여인이 쓱 나타났다. 머리는 쪽을 찌었는데 머리에 태양빛의 방배가 둘러져 있었다. 거인 여인은 구름을 타고 있었다. 여인은 구름 위에서 내려 바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두 손을 벌렸다. 그러자 언제 바다가 그랬는가 싶게 잔잔해졌다. 하늘은 맑게 개였다. 바다 가운데 서있는 여인을 보았을 때 마치 구름을 타고 있었을 때처럼 바다위에 나막신까지 드러나 있었다. 나막신은 굽이 있는 것이었는데 굽만이 바다에 잠겼던 것으로 그 정도로 여인은 컸다. 사람들은 일제히 여인에게 절을 올렸다. “ 바다의 여신이 출현하셨다. 우리를 보살펴 줄 해신이다.”“ 우리가 해신을 앞으로 수성당할미, 개양할미라고 부릅시다.”“ 그래요. 아주 큰, 거인이라는 뜻의 할미이니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바다가 잠잠해지자 개양할미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개양할미가 기거할 거쳐를 마련합시다.”“ 개양할미가 들어가시게 하려면 얼마나 큰 집을 지어야겠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우리가 그러지 말고 개양할미 당신도를 그려 그 것이나마 모시는 것은 어떻겠소.”“ 그래요. 우선 그렇게라도 개양할미를 모셔봅시다.”사람들은 개양할미가 출현했던 바로 여울굴 벼랑 위에 수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개양할미의 당신도를 그려 모셨다.개양할미는 여덟 명의 딸을 낳았다. 개양할미는 딸들을 위도를 비롯해서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의 요소에 보내고 막내딸만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렀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어보고, 깊은 곳은 매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해 어부들을 보호해 주었다. 어부들은 개양할미가 표시 해둔 곳을 피해서 먼 바다를 항해하고 고기도 잡았다.개양할미가 바다를 다스린 후부터는 서해바다에 풍랑이 일지 않았다. 고기 또한 다른 때보다 휠씬 많이 잡혔고, 칠산바다에는 조기떼로 넘쳐나기도 했다.개양할미의 보살핌으로 수성당 근처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항해를 하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갈 때마다 만선이 되어 돌아왔다. 사람들은 마을 수호신이자, 항해와 풍어의 여신 해신인 개양할미께 매년 감사의 제를 올렸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면 마을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을 보고, 가장 깨끗한 사람을 제주로 뽑아 정성을 다해 감사의 제를 올린다.수성당 근처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이 마을 저 마을 할 것 없이 어울려 풍물을 치고, 춤을 추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신명나는 잔치마당이 된다.


신격

개양할미 : 수성당 주신이며, 수성당할미라고도 하며 거녀이다. 8명의 딸을 낳아 칠산바다 각 요소에 배치해서 관장하게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면서 배의 항해할 때 안전하게 돌아주면서, 풍어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 막내딸 : 개양할미의 여덟 딸 중에 막내로 개양할미와 함께 수성당제 좌정되어 있다. 구체적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산신 : 구체적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장군신 : 구체적 명칭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용신 : 구체적인 명칭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백발노인이 용을 타고 있는데 당신도 중앙에 위치해 있다.

신화

부안 죽막동의 수성당은 백제 때부터 존재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토마나 토기 등과 철제, 석제 등 제사 관련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고대부터 지속된 중요한 해신신앙 유적임을 말해준다. 수성당에 모셔진 신격은 수성당할머니[개양할미]라고 하며, 조기잡이의 가장 큰 어장이었던 칠산바다의 어로와 항해의 신이라고 한다.

개양할미는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해신(海神)이다. 아득한 옛날 적벽강의 대막골 뒤 여울굴에서 개양할미가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과 깊이를 조정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여 왔다고 한다. … 이 할미는 어떻게 키가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 개양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위도와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의 요소에 배치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수성당할머니는 당집 바로 곁의 ‘굴’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키가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건너다녀도 버선에 묻지 않았다고 하며, 깊이를 조정하여 항해의 안전을 도왔다고 한다. 개양할미가 거녀적 존재로서 바다를 관장하는 해신임을 말해준다. 한편 수성당에는 개양할미 이외에 막내딸과 산신, 장군신도 함께 모셔졌다고 하는데, 이런 다신성(多神性)은 후대에 변모나 무속과의 복합 과정 등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참고문헌 : 『한국의 해양문화』 서남해역 439~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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