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남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평금마을 당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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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1-27 12:30 조회 538 댓글 0

본문

전남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평금마을 당산제

제명 : 당산제
신격 : 열두 당산
제당 : 입석과 당산나무
일시 : 음력 1월 15일(1992년 중단)


전남 영광군 평금마을
당산제와 줄다리기

제명 : 당산제

내용 : 평금마을은 1992년까지 매우 엄숙한 마을 행사로 당산제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사람이 없어 1992년부터는 당산제를 폐지했다고 한다. 현재는 당산제를 진행하지 않고 있으나 2005년 11월 1일 영광농악보존회와 연계해 재현한 바 있다.

특징 : 당산은 12당산을 모시고 있고, 그 신체는 당산나무와 입석이다. 당산제를 지냈을 때는 줄다리기도 억세게 했고, 농악도 유명했다고 한다.

제작의도 : 본 영상은 2005년 재현한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이 음원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

평금마을의 당산제는 12당산 곳곳에서 지낸다. 그러나 현재는 당산제가 중단된 상태이고, 본 음성자료는 <영광 마을굿 축제>의 일환으로 재현된 자료이다.

개괄

평금마을은 1992년까지 매우 엄숙한 마을 행사로 당산제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사람이 없어 1992년부터는 당산제를 폐지했다고 한다. 현재는 당산제를 진행하지 않고 있으나 2005년 11월 1일 영광농악보존회와 연계해 재현한 바 있다. 당산은 12당산을 모시고 있고, 그 신체는 당산나무와 입석이다. 당산제를 지냈을 때는 줄다리기도 억세게 했고, 농악도 유명했다고 한다.

제의내용

마을의 네 곳에 입석이 있다. 그리고 마을 뒤쪽 논 가운데 당산나무(당산할아버지)가 있고 마을 중앙에 당산나무(당산할머니)가 있다. 본디의 당산제는 12당산을 돌아다니면서 곳곳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다음날 아침 줄다리기 할 줄을 만들었다. 줄을 만들 짚은 집집마다 몇 뭇씩 걷어서 내고, 마을 청년들이 모여 줄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줄을 바닥에 놓고 매구꾼들이 줄굿을 친 다음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오방돌기를 했다. 오방돌기를 마친 후 줄다리기를 하고, 할머니당산에 줄을 감았다.
2005년 11월 1일 재현된 당산제에서는 문굿, 당산제, 당산굿, 탈춤시연, 줄굿, 오방돌기, 줄다리기, 줄감기, 샘굿의 순으로 진행됐다.

신화

조선조 중엽에 이감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재산이 넉넉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으나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었다. 그는 자식이 없으므로 외로운 생활을 지냈으나 마음시가 착하고 도량이 넓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처지였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자시 일처럼 돌보아 주었고, 흉년이 들면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는 마을 사람을 모아 놓고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는 것도 서로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니, 이웃 간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을이 잘 살고 서로 화합하여 우리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재단을 만들어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태평선대를 기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니 생각해보니 그럴싸한 일이라 생각되어 “좋은대로 하십시다” 하고 호응하였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제단을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하고 마을 사람들이 물었다. 이감관은 “우리 마을을 수호하는 신의 재단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 자식은 없으나 이 마을을 위해서 평소 생각한 바 있습니다. 우리 마을이 평지에 있고 들이 좋으니 후손들이 오래오래 평안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거북이형의 제단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나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사람들이 생각해 보니 이 감관이 본래 남다른 데가 잇고 솔선해서 만든다 하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감관은 이내 고산 아래에서 자라모양의 바위를 옮겨 제단을 만들고 매년 3월 그믐에 마을 공동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수년이 지나 마을은 재앙이 없어지고 차츰 부자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 돕고 협조하는 기풍이 일어나 인심 좋은 마을로 변하였다. 어느덧 이감관은 늙어 자시에 들게 되었는데, 하루는 마을사람들을 불러놓고 유언하기를 “내 나이 늘고 자식이 없어 나의 재산을 전할 곳이 없으니, 모든 재산을 평금마을의 재산으로 하여 주시오”하고 운명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하여 장례를 마을 공동으로 후히 치르고 의논한 끝에 제사는 마을제인 3월 말일로 정하고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로 하였다. 지금도 평금마을에는 매년 3월 말일에 동제와 같이 이감관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참고문헌 :『영광의 노래와 글모음』 전설 편, 영광향토사연구회, 1986, 65~266쪽.

제당의 형태

입석(당산독)
위치 : 마을의 4곳에 입석이 각각 한 基씩 위치하고 있다.
재질과 형태 : 마을 입구 길 옆에 있는 입석은 높이가 340cm, 폭 50cm, 두께 28cm, 둘레 170cm의 四角石柱로 보기 드문 대형의 입석이다. 돌은 화강암인데 자연석 그대로가 아니라 손질을 하여 사각석주로 만든 형태이다. 이 입석이 있는 곳을 마을에서는 “장타리”라고 부르고 있는데 옛날에 이곳에 장이 섰기 때문에 그런 지명을 얻은 것이라 한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100m 떨어진 마을 뒤편 논두렁에 있는 입석은 주변에 돌을 쌓아 석대를 하였다. 높이는 197cm, 폭 48cm, 두께 40cm, 둘레 150cm의 사각석주형이다. 이 입석 역시 손질을 하여 만든 흔적이 보이며 마을에서는 당산이라고 부른다.
기능 : 입석을 이 마을에서는 대개 “당산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두가 堂山神으로 모셔졌기 때문이다. 마을의 4곳에 세워져 四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농을 기원한다.
특징 : 1992년부터는 마을에서 의견을 모아 당산제를 폐지했으나, 그 전까지만해도 영광군의 대표적인 당산제의 하나로 꼽혔고, 농악 역시 이름이 있었다. 이 마을은 본디 열두당산이 있어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당산제를 모셔 왔고, 그 중의 4곳이 바로 이들 입석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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