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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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무안군 해제면 대사리 각시섬
    전남 무안군 해제면 대사리 각시섬제명 : 당제신격 : 각시신제당 :일시 :신화무안 해제 백학산 밑 갯마을에는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다녔고, 부인은 해초를 따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행복했던 이 가정에 비운이 닥쳐왔다. 남편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백학산에 오르내리며 갖가지 약초를 캐다 달여 먹이고 인근에서 영험한 의원은 고루 찾아 다녔으나 효험이 없이 날로 악화되어 갔다. 시름에 잠겨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이 곳 갯마을에 사는 노파가 이 댁을 위로한 뒤 “옛부터 저 섬에 선약이 있긴 하다데만…….”하고 중얼 거리지 않는가·· (중간생략) 그녀가 마을 앞섬으로 약초를 구하러 떠나고 며칠이 지났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머리맡에 남겨둔 미음도 다 마시지 못하고 섬을 바라보며 애처롭게 부인을 부르다 죽어갔다. 이 날은 먹구름이 끼고 바다가 안개가 끼는 등 날씨가 변했다. 그녀가 약초를 구하러 떠난 섬이 섬 건너 마을에서 보니 마치 생전의 그녀 얼굴마냥 보였다. 사람들이 나와 그 이상야릇한 전경을 보고 있자니, 섬에서 무엇인가가 헤엄쳐 오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것이 커다란 구렁이임을 발견하고, 모두 마을로 돌아가 숨었다. 구렁이는 입에 이상함 풀잎을 물고 그의 남편이 죽어 있는 백학산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갔다. 이 날 밤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튿날 날이 밝고 마을사람들은 어제 건너왔던 구렁이가 죽은 남편의 집을 빠져나와 섬으로 건너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뒤 늦게 앓아누운 백학산 산마루 젊은이를 생각해냈다. 마을사람들이 뛰어나가 보니, 남자는 죽어 있고, 그의 곁에는 어제 구렁이가 물고 온 풀잎이 놓여 있었다. 이를 본 노파가 그 구렁이는 필시 不歸島에 건너간 색시였을 거라며, 자신이 그 섬에 선약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노라고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이 남자를 산마루에 장사지냈다. 장사를 지내자 멀리 부귀도가 너울너울 춤을 추듯 보였다. 그리고는 슬픈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후부터 각시섬이라 불렀다. 이 곳 섬사람들은 이 섬 위에 각시당을 모시고, 매년 정월 큰 제를 지내 그 원혼을 달래고 풍년들기를 빈다.* 참고문헌 :『영광의 노래와 글모음』 영광향토문화연구회, 1991, 250~277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551
  • 전남 신안군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당제와 거릿제
    전남 신안군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 당제와 거릿제제명 : 당제, 거릿제신격 : 선왕신(서낭신), 잡신제당 : 선왕신 중턱의 동자상, 마을 입구 거리일시 : 음력 1월 14일~15일개괄내촌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흩날 자정부터 정월 보름 새벽 2시까지 당제와 거리제를 지낸다. 당제의 제신은 마을 뒷산의 이름과 같은 선왕신(서낭신)으로, 마을의 풍농과 평안, 객지에 나간 사람의 무사고 등을 기원한다. 선왕신의 영험은 당제를 정성껏 지내면 제관의 꿈에 여신이 나타나고 잘못 지내면 엉뚱한 잡신들이 나타나 이상한 징조를 보인다는 이야기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당제를 지낸 후에 임자 없이 떠도는 잡신들을 달래기 위해 거리제를 지낸다.제의내용비금면 소재지인 덕산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4km쯤 되는 곳에 내촌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동으로 외촌, 서로 산너머 서해 바다, 남쪽으로 전답지를 건너 내포와 월포, 북쪽으로 고서리 서산마을과 접해 있다. 마을 뒷쪽에 있는 선왕산(해발 255m)의 형태가 소쿠리처럼 생겼고 가장 안쪽에 마을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안동네 또는 내촌이라 부른다.내촌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흩날 자정부터 정월 보름 새벽 2시까지 당제와 거리제를 지낸다. 당제의 제신은 마을 뒷산의 이름과 같은 선왕신(서낭신)으로, 마을의 풍농과 평안, 객지에 나간 사람의 무사고 등을 기원한다. 선왕신의 영험은 당제를 정성껏 지내면 제관의 꿈에 여신이 나타나고 잘못 지내면 엉뚱한 잡신들이 나타나 이상한 징조를 보인다는 이야기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당제를 지낸 후에 임자 없이 떠도는 잡신들을 달래기 위해 거리제를 지낸다.내촌 당제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자 그 딸은 선왕산에 올라가 기다리다 지쳐 끝내는 죽고 말았다. 그후 딸의 원혼이 울면서 마을을 돌아다녀 주민들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선왕신으로 모시고 당제를 지내게 되었다.당제는 선왕산 중턱에 있는 동자상 앞에서, 그리고 거리제는 마을 입구 길에서 지낸다. 원래 당제는 선왕산 중턱 두 개의 바위 틈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1947년 이 마을 유지인 유용덕씨가 이 곳 두 개의 바위 사이에 동자상을 세웠고 이 상이 당제의 신체가 되었다. 이 동자상은 높이 100㎝, 둘레 64㎝, 얼굴길이 26㎝에 머리에는 16㎝ 높이의 관을 쓰고 있다. 한편 왼손을 오른손 위로 하여 양손을 가슴 위에 얹고 있으며 미소를 머금은 넓적한 얼굴에 비취색의 구슬로 눈을 만들어 박아 놓았다. 동자상의 전면 기단부에는 이 상의 걸립연대와 「선왕산 신령지위」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제장 바로 밑에 맞배함석지붕으로 된 당집이 있다. 당집은 원래 기와지붕이었다가 낡아서 쓰러져 가던 것을 몇 년 전에 보수하면서 함석지붕을 얹었다. 당집 내부는 방 1칸, 부엌 1칸이 있고, 방에는 시렁을 두어 제의 시에 사용하는 제기들을 정돈하여 놓았다.신화옛날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자, 그 딸은 선왕산에 올라가 기다리다 지쳐 끝내 죽고 말았다, 그 후 딸의 원혼이 울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니, 주민들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선왕신으로 모시고 당제를 지냈다.* 참고문헌 :『신안군의 문화유적』 221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571
  • 전남 신안군 장산면 다수리 마을 공동 제사
    전남 신안군 장산면 다수리 마을 공동 제사제명 : 제신격 : 처녀신제당 :일시 :신화장산면 다수리와 성수골 사이 조그마한 무인도 용추가 있다. 서남쪽 하의면 상태가 바라보이는 이 섬은 할미섬이라고도 한다. 옛날 마을부녀자들이 해초를 따기 위해 이 섬에 가서 한참 해초를 따는데, 갑자기 날씨가 변하더니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서둘러 배를 타고 마을로 오는데, 바다에서 용 한마리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소리쳤다. 이 광경을 처음 발견한 한 처녀가 저것 봐라 이무기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순간 큰 이무기가 바다로 떨어졌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무서움에 떨면서 빨리 배를 저어 섬으로 갔다. 배가 섬에 닿을 무렵인데 어쩐 일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뱃전을 내려다보니 이무기가 배를 칭칭 감고 있었다. 혀를 널름거리면서 부정한 여자가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영영 하늘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저 섬에 살터인 즉 소리친 처녀를 배에서 내려놓으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은 처녀를 섬에다 내려놓았다, 이 처녀는 이무기에 갇혀 평생을 홀로 살다가 늙어 죽었다. 그 뒤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으며 제사도 지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549
  • 전남 신안군 흑산도 진리 당제
    전남 신안군 흑산도 진리 당제제명 : 당제, 용왕제, 갯제신격 : 상당(소저아기씨(당각시), 상궁부인, 제석님, 산중처사님, 도령(총각화상), 당할머니), 용신당(용왕)제당 : 상당, 용신당일시 : 음력 1월 1~3일당각시와 총각화장의 사랑이야기줄거리 : 처녀가 해초를 뜯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러 죽게 된다. 처녀가 죽었던 자리에서 배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고기도 잡히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당집을 짓고 제를 지내주게 된다.섬 마을에 옹기배가 들어오는데 그 배에 잘 생긴 총각화장이 따라 온다. 총각화장은 풀피리를 잘 분다. 풀피리 소리는 태풍과 파도를 잠재우는 힘이 있다.당각시는 총각화장의 풀피리에 반해 옹기배가 떠날 때 총각화장을 가지 못하게 한다. 총각화장은 섬에 남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날마다 당집 낭떠러지 소나무에 앉아 풀피리만 불다가 바다에 떨어지게 된다.총각화장이 사라지고 난 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배사고도 잦아 사람들은 당각시당 옆에 총각화장의 당을 지어 준다. 사람들은 태풍이 불거나 파도가 심하게 칠 때 총각화장의 피리소리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 때마다 바다가 잠잠해지게 된다.내용 : 당각시와 화장총각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이다.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당지역 : 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제명 : 당제제당 : 진리당(상당)과 용신당이 있으며, 진리 당제는 예로부터 성대한 규모로 이름 높았으며, 당은 흑산의 본당이라고 전해질만큼 권위를 갖춘 것이었다.위치 : 진리 당산의 산정에 북방향을 향하여 당이 이루어져 있다.형태 : 100평 가량 되는 당성 내에 진리당은 두 겹의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쪽 돌담은 신을 모신 당집과 제기와 취사도구들을 넣어 놓은 문간방들을 잇고 있다. 현 당집은 상당 기둥에 쓰여 있는 건조 연월일을 보아 1938년 7월 1일에 지어진 것이다. 그 전의 집을 헐고 지금의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좌정된 신격 : 얼마 전까지는 ‘소저아가씨(당각시)’, ‘상궁부인’, ‘제석님’, ‘산중처사님’, ‘도령(총각화상)’의 종이 위패가 있었고, ‘상궁부인’과 ‘제석님’의 중간에는 위패는 없으나 ‘당할머니’가 좌정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위패의 중간에 ‘신베[당베]’가 걸려 있었고, 이 당의 또 다른 신체인 성주단지 및 쌀 뒤주, 들돌 등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화재 이후 이러한 유물들은 자취가 없어지고 다만 한지로 만든 ‘당베’만 걸려 있다. 상당의 오른쪽 돌담 밖에는 바다의 신인 용왕이 좌정한 용신당이 있으며, 당집 앞으로는 돌담 밖에 넓은 마당이 있고, 당집을 등지고 서서 마당 우측에 총각화상이 떨어져 죽었다는 노송과 그의 무덤이 있다.특징 : 진리당신화와 관련하여 당산할아버지 · 할머니신앙이 약화되면서 진리당의 당각시가 당할머니의 대체신격으로 등장하며 총각은 당할아버지의 대체신격으로 섬겨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는 곧 부부신의 성립을 보여 준다. 이것은 남녀신의 결합에 의한 풍요 희구 원리를 잘 드러내는 것이며 진리의 당제와 당신화에서 나타나는 남녀 결합양상은 육지부의 ‘용신 + 당할머니’ 또는 ‘당할아버지 + 당할머니’의 결합양상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또한 용신의 우위성과 항존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풍농기원에서 풍어기원으로’라는 당제문화의 변이단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판단된다.제의 소멸과 변천 : 지금은 당제가 연행되고 있지 않으나 당 마당에서는 4월 초파일 경로잔치를 비롯한 각종 마을잔치와 집회가 열리기도 한다.제작의도 : 진리당과 용신당은 대체로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진리당은 규모가 큰 편이라서 입구에서 당신을 모시는 곳까지의 거리감을 나타내고자 했고 용신당은 자연스러운 형태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개괄흑산도 진리 마을의 당제는 예로부터 성대한 규모로 이름높았으며, 당(堂)은 흑산의 본당(本堂)이라고 전해질만큼 권위를 갖춘 것이었다. 상당(上堂)과 용신당(龍神堂)이 있으며, 이 외에 갯가에서 갯제를 지낼 때 임시로 설치하는 제청이 있다. 본래 진리의 당제는 제의 기간이나 절차로 보아 상당히 성대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과거에 비해 약화되어 있다. 특히 제의 기간이 음력 정초부터 3일간이었던 것, 제관들이 들돌을 들어 보아 가벼우면 신들이 제물을 잘 흠양했다고 여겼던 의례, 그리고 갯제에서 무당을 불러 용왕굿을 성대하게 진행했던 내용 등은 현재의 당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제의내용① 제당 구성 및 신격흑산도 진리 마을의 당제는 예로부터 성대한 규모로 이름높았으며, 당(堂)은 흑산의 본당(本堂)이라고 전해질만큼 권위를 갖춘 것이었다. 상당(上堂)과 용신당(龍神堂)이 있으며, 이 외에 갯가에서 갯제를 지낼 때 임시로 설치하는 제청이 있다.② 당제 준비당제를 지내기 2일 전에 마을 이장이 예리에 가서 쌀과 소지 종이 등의 물품을 구입해 온다. 제물 구입 경비는 마을공동기금에서 충당된다. 신격들이 육류와 어류의 냄새를 싫어하므로 준비되는 제물은 메와 술, 과일, 식물성 음식물이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새벽, 선정된 3명의 제관(1명은 제를 주관하고 2명은 보좌한다.)들이 몇 벌의 깨끗한 옷가지와 그 동안 먹을 식량, 제수용 물품 등을 챙겨서 당으로 간다. 우선 상당의 당집과 용신당, 당샘을 청소하고 문간방의 한쪽방에 보관해 놓은 시루, 절구, 그 밖의 제기들을 씻은 후, 제장 주위에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친다.진설할 제물의 준비를 위해 제관들은 쌀에서 겨, 반점이 있는 쌀알들을 하나하나 골라 낸다. 메를 정히 지으려는 의도이며, 제를 지낼 때까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 돌갓, 더덕, 고사리를 솥에 넣고 간을 맞추어 익힌다. 이 나물류는 반드시 주민들로부터 희사받는데, 이는 진리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마을의 산에서 손수 채취한 것을 제물로 써야 정성이 담긴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③ 당제 진행준비를 마친 제관들은 제물을 진설하고 자시(子時) 무렵 재배, 헌작, 구축, 소지 등의 절차에 맞춰 상당제를 거행한다. 구축의 내용은 당제의 일반적인 기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을의 안녕, 무병, 탈없는 농사와 어업, 객지에 나간 이들의 안녕 등이다. 소지는 제관, 마을 전체, 각 가정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된다.상당제를 마친 제관들은 용신당(龍神堂)으로 가서 용신에게 제를 지낸다. 용신에게 드리는 제물은 창호지에 진설되며, 제를 마친 후 제물들을 바로 아래에 있는 바다에 헌식하면서 뱃길의 무사와 풍어를 기원한다. 과거 큰 배들이 많았을 때에는 평상시에도 오랫동안 먼 바다에 나갔던 배들이 들어와 개안에 배를 대고서 절을 하고 구축을 하는 등의 간단한 의례적 행위를 했다고 한다.신격총각화장 (용왕신) : 구체적인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옹구배를 타고 온 총각화장이라고 한다. 소실된 위패에서 도령이란 명칭으로 되어 있었다. 총각화장은 용신당에 좌정되어 있다.당각시 : 상당의 주신이며 소저아기씨라고도 부른다. 당집에는 한지로 만든 ‘방베’가 걸려 있다.신화흑산도 진리 마을의 당제는 예로부터 성대한 규모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堂)은 흑산의 본당(本堂)이라고 전해질만큼 권위를 갖춘 것이었다. 상당(上堂)과 용신당(龍神堂)이 있으며, 이 외에 갯가에서 갯제를 지낼 때 임시로 설치하는 제청이 있다.상당의 형성과 관련해서는 ‘당각시 설화’와 ‘총각화상 설화’ 두 편이 전한다. 이들 설화들은 당각시와 총각화상이 어떻게 해서 당신(堂神)으로 좌정하게 되었는가를 전하고 있다. 그 설화의 줄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당각시이야기>처녀, 총각이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남편이 고기 잡으러 갔다가 죽었다. 각시가 목을 매어 죽었다. 주민들이 각시가 죽은 자리에 당을 지어 원혼을 모셨다. 그리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했다.<총각화상이야기>진리에 총각화상이 옹기를 파는 배를 타고 왔다. 총각이 피리를 불면 바다가 잠잠하고 고기가 많이 잡혔다. 옹기 장수 일행이 출발하려고 하자 당각시가 풍랑을 일으켜 못 떠나도록 방해를 했다. 당각시를 달래기 위해 총각을 섬에 떼어놓고 옹기배가 출항했다. 총각화상이 혼자 남아 피리를 불다가 죽었다. 주민들이 총각을 당각시 옆에 모시고, 용신으로 믿고 기원한다.이러한 설화가 얽힌 상당은 두 겹의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쪽 돌담은, 신을 모신 당집과 제기와 취사도구들을 넣어 놓은 문간방들을 잇고 있다. 현 당집은 상당 기둥에 쓰여 있는 건조 연월일로 보아 1938년 7월 1일에 지어진 것이다. 그 전의 집을 헐고 지금의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는 ‘소저아기씨(당각시)’, ‘상궁부인’, ‘제석님’, ‘산중처사님’, ‘도령(총각화상)’의 종이 위패가 있었고, ‘상궁부인’과 ‘제석님’의 중간에는 위패는 없으나 ‘당할머니’가 좌정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 위패의 중간에 ‘신베[당베]’가 걸려 있었고, 이 당의 또 다른 신체인 성주단지 및 쌀뒤주, 들돌 등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화재 이후 이러한 유물들은 자취가 없어지고 다만 한지로 만든 ‘당베’만 걸려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의 해양문화』 서남해역 440~443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56
  • 전남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동내마을 당제
    전남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동내마을 당제제명 : 당제신격 : 소대각시(모녀삼신)제당 :일시 :신화옛날에 원님이 부임해오기만하면 병이 나서 점을 쳤다. 물에 빠져 죽은 여자 세 사람 때문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마을에서 세 여인을 여신으로 모셨다.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의 지형이 옥녀탄금형국으로 부녀자의 제과가 많아 모녀삼신(소대각시)을 모셔 제과를 면케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여천군의 문화유적』 243~244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90
  • 전남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 사곡3구 당산제
    전남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 사곡3구 당산제제명 : 당산제신격 : 당산할머니제당 :일시 :신화김해 김씨 대현 양수 어머니의 꿈에 당산할머니가 나타나 복주머니를 두 개 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복주머니를 안고 꿈을 깬 뒤 아들을 잉태하여 대현, 양수 두 아들을 낳았다. 그 후부터 당산에 정성을 들여 제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 대현이가 모셔왔으나, 지금은 고령이 되어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를 지낸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507
  • 전남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 칠곡1구 당산제
    전남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 칠곡1구 당산제제명 : 당산제신격 : 당산나무제당 :일시 :신격당산나무 : 입도조 중 한 분인 한 씨가 나무를 심었는데 잎이 무성하였다. 손이 귀한 집에서는 한 씨가 심은 나무 밑에 성성을 드리면 자손을 얻었는데 삼신할머니 역할을 하는 신이다.신화한씨와 서씨가 처음 입주하여 부락을 형성하기 위해 나무 한 그루씩을 심었는데, 한씨가 심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자손이 번창하였고, 서씨가 심음 나무는 가지가 적어 자손이 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자손이 귀한 집에서 한씨가 심은 나무 밑에 정성을 드리면 많은 자식을 낳게 하여 주었다. 지금 그 곳에서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마을유래지』 여천군, 1991, 139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611
  • 전남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 제
    전남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 제제명 : 제신격 : 처녀의 원혼제당 :일시 :신화장낭자는 유현 인동장씨 현광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에 있다가 누명을 쓰고 처자녀 5인 가족이 신지면 송곡리로 귀양살이 왔었다. 장낭자의 나이 18세가 되어 화용월태의 염염한 모습은 믓사내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뢰한에게 불의 봉변을 당했다. 처녀성을 잃은 장 규수는 분함을 견디다 못해 자결할 것을 결심하고 江龍楸라는 해변으로 나갔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그의 어머니가 뒤쫓아 와서 종일토록 말렸으나, 낭자는 끝내 죽기로 고집했다. 할 수 없다고 체념한 어머니는 딸과 서로 껴안고 바닷물에 투신자살하고 말았는데, 바로 그날이 7월 모일이었다. 그 후부터 매년 7월 그믐이 되면, 반드시 폭풍우가 휘몰아쳐 피해가 극심하였기에 마을 사람들이 장낭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제를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완도군지』 완도군, 1992, 917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69
  • 제주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 해촌마을 용왕신(海田守護神)
    제주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 해촌마을 용왕신(海田守護神)제명 : 용왕제신격 : 용왕삼녀라는 요왕또. 개할망 또는 돈지할망, 일뤠할망제당 :일시 :신격용왕삼녀 : 해촌마을에서는 ‘개할망’, ‘돈지할망’이라 부르는 여신이다. 잠녀를 수호하는 생업신이다.신화제주도 여신설문대할망에 관한 가장 오랜 문헌기록은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조의 『탐라지』다. 제주도의 전설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설문대할망에 대한 전설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창조한 여신으로 거인으로 '설명두할망' 또는 '세명뒤할망'이라고도 한다. 옥황상제의 말젯딸이라는 설도 있으나 각 지역마다 구전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설문대할망은 치마에 흙을 담아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일곱 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옮기던 중 치마의 터진 부분으로 새어나온 흙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설문대할망과 한라산 백록담에 얽힌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전해진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만든 후 봉우리가 너무 뾰족하여 그 부분을 잡아 던지자 그 부분이 움푹패여 백록담이 되고, 윗부분은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설문대할망은 키가 워낙 커서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관탈섬까지 뻗었는데, 관탈섬에 난 구멍은 할망이 다리를 잘못 뻗어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산 일출봉에 있는 기암괴석을 등잔으로 삼아 바느질을 했는데 등잔을 얹었던 기암을 등경석이라 한다. 관탈섬과 마라도를 밟고 우도를 빨랫돌로 삼아 빨래를 했다고 하고, 할망의 오줌 세기가 강해 우도와 성산 사이의 조류가 세다고도 한다.설문대할망은 제주사람들에게 명주로 속옷을 만들어주면 육지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그때부터 명주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99통 밖에 모으지 못했다. 1통이 모자라 속옷을 만들지 못하였고, 설문대할망도 다리를 놓던 것을 중단해 제주와 육지가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리를 놓던 흔적이 북제주군 조천과 신촌사이에 뻗어나간 엉장매다.설문대할망은 큰 키를 자랑하며 깊다는 물을 다 찾아다녔다. 용담의 용연은 발등까지 왔고, 서귀포 서홍리 홍리물은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라산 중턱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갔는데, 물장오리는 밑이 뚫려있어 할망은 그만 빠져죽고 말았다고 한다.또 다른 이야기 한 가지. 할망에게는 설문대하르방과의 사이에 오백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사냥나간 오백 아들들에게 먹을 죽을 끓이다 가마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죽을 먹던 아들들이 할망이 솥에 빠져 죽은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영실의 오백장군이 되었다.http://www.jejusam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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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제주시 삼도동 각시당
    제주 제주시 삼도동 각시당제명 :신격 : 산육신제당 :일시 :신화옥황상제 막내딸이 부모 명령을 거역하고, 궁녀 · 시녀들에게 물과 밥을 주지 않았다. 궁녀 · 시녀들은 다 굶어 죽었다.상제는 화를 내고 딸을 인간세상으로 쫓아내라고 호령했다. 할 수 없이 딸은 머리를 깎아 송낙을 쓰고 장삼을 입고, 백팔 염주를 목에 걸어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다. 어디에 좌정할까 하고 마땅한 곳을 고르다가, 삼내남문골(제주도 삼도동 남문로) 청대밭에 좌정하고, 상단골에 현몽을 주어 불도로 위함을 받게 되었다.얼마 동안 있어 보니 인가가 가까운지라 부정이 많으므로, 나는 ‘막대동산 만년 팽나무 아래로 좌정하겠다’고 다시 현몽을 주어 막대동산으로 옮겼다.그래서 성단골 · 중단골 · 하단골이 불도로 위하는 신이 되었다.* 참고문헌 : 『제주도신화』219~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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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제주시 용담동 궁당
    제주 제주시 용담동 궁당제명 : 궁당신격 : 상사대왕의 부인 중전대부인과 정절상군농, 일곱 아기씨제당 :일시 :신화상사대와의 중전대부인과 정절상군농은 내왓당에 좌정되어 있었으나 궁당으로 옮겨진 내력이 있다. 작은부인 정절상군농이 임신하여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 돼지털을 하나 뽑아 불에 태워 코에 댔다. 상사대왕이 외출해서 돌아와 냄새난 연유를 알고 두 부인과 함께 좌정할 수 없다고 궁당으로 쫓아냈다.중전대부인은 쌀로 만든 맑은 음식만 받아먹고 어린애를 낳게 해주고 기르는 신, 정절상군농은 한꺼번에 일곱 아들을 낳아 기르고 돼지고기를 받아먹게 되었다.* 참고문헌 :『제주도신화』21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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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당개마을 의관입힌 왕대
    경기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당개마을 의관입힌 왕대제명 : 성황제신격 :제당 :일시 :신화백령도에는 일찍이 가톨릭이 들어오면서 주민 총수 교인의 비율이 매우 높다. 서양종교의 이입으로 민간신앙은 매우 일직이 끊겼으며, 지금도 이야기의 일부가 전승되고 있다. 당개 성황당도 그 중의 하나이다.“어느 무더운 여름철, 당개 해변에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 왔다. 이상히 여겨 건져보니 놀라울 정도로 큰 왕대토막이었다. 이상하다싶어 왕대를 발견한 산 위에 성황당을 지어 신으로 모셨다. 그 후로는 마을이 풍요로워졌다. 이에 섬사람들은 왕대에 의관을 입혀 신위로 모시고 해마다 9월9일 제를 올리는데 왕대 신위가 현몽하여 제사 절차를 일일이 지시하고 간다. 이상한 일은 마음이 불순한 사람이 지나치려고 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아 고생을 했으며, 말을 타고 갈 때 하마(下馬)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 욕을 당하였다. 뱃사람이 고사를 안 지내면 풍랑이 일어서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해양문화』 서해해역 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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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파주시 문산읍 하동마을 17신위
    경기 파주시 문산읍 하동마을 17신위제명 : 도당굿신격 : 임경업장군, 최영장군, 관운장, 걸립, 백마장군, 산신, 창부, 글문도사, 칠성, 삼불제석, 별상, 옥황상제, 선녀부인, 중국장군, 대신할머니, 불사할머니, 오방신장, 대동터주가리제당 :일시 :신화임진강이 범람하면 늘 홍수피해를 심각하게 받던 곳이다. 그래서 설화에도 잘 나타난다. 오래 전에 홍수로 인하여 이 마을로 짚더미가 떠내려 왔는데 마을사람들이 그 짚더미를 육지로 끌어올려 살펴보았더니 그 안에 17점의 인물화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그 그림들을 신성이 여기게 되었고 짚더미가 발견된 곳 옆에 있던 절벽 위에 당집을 만들고 무신도를 걸어 신당을 꾸민 후에 오늘날까지 모시고 있다고 한다.또 다른 당설화로 원혼설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한 장군이 왜적과 싸우기 위하여 이곳 문산포구를 떠날 때 그의 부인에게 만약 자신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배 앞머리에 흰 기를 꽂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전쟁에 패하여 죽게 된다면 붉은 기를 꽂고 돌아오겠노라고 이야기를 남긴 채 떠나갔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전쟁에 승리한 장군은 이겼다는 기쁨에 싸울 때 흘린 병사들의 피에 젖은 흰 기를 그냥 달고 고향으로 향했다. 한편, 저만치서 보이는 뱃머리에 휘날리는 흰 기를 붉은 기로 오인한 부인은 배가 도착하기도 전에 슬픔에 못 이겨 당집이 있는 절벽으로 올라가 남편을 그리워하며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던 그 장소가 당집터이며 어부들이 치성을 드리면 환난이 없다고 믿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의 해양문화』서해해역 하 410~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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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남해군 미조면 사항마을 최영장군 제사와 당산제
    경남 남해군 미조면 사항마을 최영장군 제사와 당산제        제명 : 최영장군제사, 당산제신격 : 최영장군, 당산, 산신제당 : 최영장군사당(마을 언덕의 무민사 내), 산신당(최영장군사당 뒤)일시 : 최영장군제사(음력 4월 20일), 당산제(음력 10월 15일)경남 통영과 남해 미조 최영장군명칭 : 최영장군제명 : 최영장군제사, 장군제제당과 위치 : 최영장군사당, 미조면 사항마을 북쪽(초전에서 미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100m 지점에 사당이 위치하며 고려말의 명장 최영 장군을 모셨다고 하여 장군당이라 한다. 사우(祠宇)는 무민사(武愍祠)라 한다. 이는 장군의 시호가 무민공이기 때문이다.형태 : 최영장군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형태이다. 사당 앞의 건물은 향교로서 역할을 하며 장군을 모신 사당은 배모양의 형국으로, 사당은 이물(앞머리)에 해당한다.관련설화 : 한 촌로가 꿈에 최영장군이 학을 타고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 후 바닷가에 하얀 단지가 흘러 들어왔는데, 그 안에 최영장군의 영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이 내린 곳에 최영장군사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사당은 조선조 성종 때 지었으며, 현재의 사당은 1954년 미조면 최영장군 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1978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사당 내에는 최영장군의 영정 1점과 화상 2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특징 : 최영장군의 사당은 추자도, 통영읍 삼덕리, 남해군 미조면, 사량도, 부산 등에서도 모셔지는 것을 보면 그 분포권이 중부지방은 물론 남부지방까지 이르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지역들에서의 최영장군은 장군신으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지녀 마을을 지켜주는 수문신의 역할을 원천적으로 할뿐만 아니라 분포권이 생업을 어업으로 하는 곳들이여서 ‘어업신’ 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이 동영상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사항마을 최영장군사당지역 : 경남 남해 미조 사항마을제명 : 최영장군제사, 장군제제당 : 최영장군사당위치 : 미조면 사항마을 북쪽(초전에서 미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100m 지점에 사당이 위치하며 고려말의 명장 최영 장군을 모셨다고 하여 장군당이라 한다. 사우(祠宇)는 무민사(武愍祠)라 한다. 이는 장군의 시호가 무민공이기 때문이다.형태 : 최영장군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형태이다. 사당 앞의 건물은 향교로서 역할을 하며 장군을 모신 사당은 배모양의 형국으로, 사당은 이물(앞머리)에 해당한다.좌정된 신격 : 최영장군사당이 여기에 세워지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한 촌로가 꿈에 최영장군이 학을 타고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 후 바닷가에 하얀 단지가 흘러 들어왔는데, 그 안에 최영장군의 영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이 내린 곳에 최영장군사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사당은 조선조 성종 때 지었으며, 현재의 사당은 1954년 미조면 최영장군 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1978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사당 내에는 최영장군의 영정 1점과 화상 2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특징 : 최영장군의 사당은 추자도, 통영읍 삼덕리, 남해군 미조면, 사량도, 부산 등에서도 모셔지는 것을 보면 그 분포권이 중부지방은 물론 남부지방까지 이르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지역들에서의 최영장군은 장군신으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지녀 마을을 지켜주는 수문신의 역할을 원천적으로 할뿐만 아니라 분포권이 생업을 어업으로 하는 곳들이여서 ‘어업신’ 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제작의도 : 사당의 지붕 모양이 배 모양을 하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각 목조와가로써 사당 건물의 양 옆이 다른 제당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고 특히 지붕의 앞부분은 화려함이 더하다. 건물의 화려한 특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개괄사항마을에서는 최영장군제사와 당산제, 두 개의 제사를 지낸다. 최영장군제사는 음력 4월 20일에 지내고, 당산제는 음력 10월 15일에 지낸다. 사당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최영장군의 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산 제사는 미조리 본동 사람들만 참석한다. 당산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레이더기지가 생기면서 그곳에 지하수를 만들어 4~5년 전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 당산나무의 제사는 10월 보름에 지낸다제의내용<최영장군 제사>최영장군 제사는 마을 전체 주민이 참석하며, 음력 4월 20일에 지낸다. 제관은 3명을 뽑으며, 제사는 초헌-아헌-종헌-고축으로 이루어진다. 보통 제관은 최영장군유적보존회나 미조면 출신 사람 중 덕망 있는 사람들이 한다. 제물도 보존회에서 준비한다. 제물을 구입하는 일부 비용은 사당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다.사당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최영장군의 사당은 제당과 향교가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당 앞의 건물은 향교로서 역할을 하고, 사당 안에는 최영장군의 영정과 칼이 있다. 한편 사당 안에는 돌로 만든 장군상이 있다.<당산제>당산 제사는 미조리 본동 사람들만 참석한다. 당산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레이더기지가 생기면서 그곳에 지하수를 만들어 4~5년 전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 당산나무의 제사는 10월 보름에 지낸다. 본래는 깨끗한 사람이 제관이 되었으나, 사람들이 원하지 않자 7~8년 전부터 이장이 제관이 되었다. 본래 스님을 모시고 제를 주관하려 하였으나 경비상의 문제를 들어 그만 두었다. 미조리 본동의 가구수는 120호이며, 집집마다 제사 경비로 3천원을 거둔다. 과거 제관이 되면 1년 동안 바다의 몰을 마을껏 떼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러나 몰은 1년 중 봄에만 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그리 길지 않다.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수 그릇을 새로 구입하고, 제사가 끝나면 제관은 그릇을 가지고 간다. 제물은 삼색과일, 흰떡, 돼지머리, 물고기(수어)를 놓으며, 술은 막걸리를 쓴다. 제물을 구입할 때는 값을 깍지 않는다.제관은 제사지내기 일주일 전에 당산에 올라갔으나, 지금은 집에서 3일동안 정성만 드린다. 당산에는 음식을 만들고 제관이 쉴 수 있도록 조립식 집을 만들어 놓았다. 제사가 끝난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이장집에 모여 음복을 한다.신격최영장군 : 고려말 장군으로 남해안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를 물리진 장군이다. 최영장군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관복을 입고 좌정된 영정도 있고, 석인상을 최영장군이라 하기도 한다. 장군모를 쓰고 손을 앞으로 모아 도포 속에 숨기고 화상도는 화살통을 매고 칼을 옆에 세워 둔 것이다. 또 다른 화상도는 장군모를 쓰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칼을 세워 들고 있다.산신 : 호랑이에 올라 앉아 호랑이의 귀를 잡고 왼 손은 앞으로 내밀고 있는 화상도 이다. 옆에 시중을 드는 여인이 연꽃을 그릇에 담아 들고 있다.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신화촌로가 꿈에 최영장군이 학을 타고 내려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런 후 바닷가에 하얀 단지가 흘러 들어왔다. 그 안에 최영장군의 영정이 있었다고 한다. 학이 내린 곳에 최영장군 사당을 짓게 되었다.제당의 형태석인(민불, 장군상)위치 : 미조면 미조초등학교 동편에 있는 무민사의 본당 건물 동쪽 편 축대 아래에 있는 돌부처상으로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짚고 선 형상을 하고 있다.형태와 재질 : 투구를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마치 장군이 칼을 짚고 선 형상을 한 석인(石人)으로 가로 60㎝, 세로 84㎝, 높이 19㎝의 돌 제단 위에 높이 87㎝, 어깨 너비 37㎝의 크기이다.특징 : 조선조 후기에 와서 불상, 장승, 석인상의 여러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민불(民佛) 제작이 성행하게 되는데, 민속 신앙이 빚은 불상이라 하여 ‘민불’이라고 부른다. 너무나 소박하고 고졸(古拙)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무민사가 조선 성종 때 (1470~1494년) 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무민사 건립 후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며 현지 주민들의 주된 기도처가 되고 있는데, 이는 이 민불 앞에 촛대를 꽂을 수 있도록 아예 못까지 박아둔 사실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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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2리 권씨골맥이할배, 천장군, 해수신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2리 권씨골맥이할배, 천장군, 해수신  제명 : 서낭제(골맥이당제)신격 : 권씨골맥이할배, 천장군, 해수신제당 : 골맥이당일시 :경북 영해면 대진2리 천장군 캐릭터지역 :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2리명칭 : 권씨골맥이할배, 천장군, 해수신제명 : 서낭제(골맥이당제)신격 : 권씨골맥이할배 : 권동수는 입향조이며 주신이다. 위패에‘洞神權公之位’이라고 써 있다.천장군 : 마을에 호환이 많이 발생하여 모시게 되었다. 천장군은 옛날 천씨가 이 마을에 살 때 그 조상 중 장군벼슬을 한 사람을 모신 것이다. 천장군은 하늘 색 투구를 쓰고 노란 갑옷을 입고, 칼을 아래로 들고 있다. 해수(해불)신 : 폭풍우가 친 후 바닷가에 떠내려 온 부처님을 동신으로 모신 것이다. 海佛은 자연석에 “海佛神位”라고 써 있다.특징 : 대진리의 동제는 본당과 함께 천(千)장군과 해불신(海佛神)까지 모신다. 해불신은 먼 옛날 바다에서 부처님이 떠내려와 이것을 땅에 묻고 마을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이처럼 천장군을 케릭터화하였다.신격권씨골맥이할배 : 권동수는 입향조이다. 주신이다. 위패에 ‘洞神權公之位’이라고 써 있다.천장군 : 마을에 호환이 많이 발생하여 모시게 되었다. 천장군은 옛날 천씨가 이 마을에 살 때 그 조상 중 장군벼슬을 한 사람을 모신 것이다. 천장군은 하늘 색 투구를 쓰고 노란 갑옷을 입고, 칼을 아래로 들고 있다.해수(해불)신 : 폭풍우가 친 후 바닷가에 떠내려 온 부처님을 동신으로 모신 것이다. 海佛은 자연석에 “海佛神位”라고 써 있다.신화권씨골맥이할배 권동수는 입향조이다. 천장군은 마을에 호환이 많이 발생하여 모시게 되었다. 해수(해불)는 폭풍우가 친 후 나가보니 부처님이 바닷가에 떠 있어 그것을 다시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런데 한 20일 뒤 다시 그 부처가 파도에 밀려 똑같은 장소에 와 있어 동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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