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상기내용을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를 찾아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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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연동마을 당제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연동마을 당제제명 : 당제신격 : 입석 2기를제당 :일시 :신화옛날 벽파진 나룻배 사공이 승객 10여명을 태우고 벽파항을 출발하여 감부선 부근까지 노를 저어 가는데, 느닷없이 백발노인이 부두에 나타나 "여보! 여보! 나 지금 갈 길이 급하니 함께 갑시다", 하면서 간절하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뱃사공은 지금처럼 기계선이 아닌 범선인지라 다시 되돌아가 싣고 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 그 노인 너무 급하게 굴어서, 마음씨 착한 사공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승객들의 양해를 수하여 뱃머리를 돌려 벽파항을 향하여 막 노를 젓고 있노라니까 방금 뱃머리를 돌리던 그 자리에서 무서운 회오리바람과 함께 바닷물이 하늘로 치솟고 큰 풍파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나룻배는 그 곳을 벗어났기에 힘을 내러 벽파항에 도착하였으나, 그렇게도 애걸복걸하던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려졌다. 이 같은 일은 마음씨 고운 사공과 선량한 승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벽파정당 노인신이 사람으로 변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공과 승객들은 이 고마움을 감사 보은하기 위하여 벽파정(현 벽파지서 후편 길 옆 언덕아래) 사당을 모시고, 노인신을 당신이라 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제당의 형태위치 : 마을에서 해변으로 가는 다리 입구 양 옆에 위치해 있다.형태와 재질 : 이 2기의 미륵독은 모두 자연석에 ‘四角石柱’ 형태로 특별한 조각은 없다.1기는 높이 142cm, 폭 27cm, 두께 24cm 이며 다른 1기는 높이 162cm, 폭 25cm, 두께 24cm 이다.특징 : 미륵독은 마을이 설촌되면서 있었던 마을수호신이다. 이 미륵독은 농로개설 시에 치워져버렸다가 마을에 액운이 들까 두려워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주민들은 과거에는 마을 앞을 지날 때 미륵독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며 아플 때는 미륵독에 왼새끼 금줄을 친 후 밥을 차리고 빌었다고 한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510
  • 전남 함평군 대동면 아처동 미륵제
    전남 함평군 대동면 아처동 미륵제제명 : 미륵제신격 : 미륵할머니제당 :일시 :신격미륵할머니 : 미륵 바위처럼 생겼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신화먼 옛날 이 마을에 음산한 밤이면, 마을 옆 대밭에서 소름이 끼치는 해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불길한 징후라 하여, 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대밭으로 가 보았다. 대밭엔 아무 기척이 없었고 미륵과 같이 생긴 바위에서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해괴한 울음소리에 오한을 느꼈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한 분이 경건히 미륵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미륵할머니 어리석고 죄 많은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시는 연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빌고 나서 수없이 절을 하니 이상하게도 울음소리가 씻은 듯이 뚝 그쳤다. 그 날 밤 할아버지 꿈에 미륵할머니가 나타나 “나는 너희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인 미륵할머니이니라.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푸대접 했느니라. 이제부터 나를 아늑한 자리에 집을 지어 안치해 주면 마을의 모든 재액을 없게 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의논한 끝에 미륵할머니 바위를 대밭에 옮겨 바르고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아 제당을 지어 안치시키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참고문헌 :『전남의 전설』 전라남도, 1987, 390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54
  • 전남 함평군 손불면 대전리 불맥이굿
    전남 함평군 손불면 대전리 불맥이굿제명 : 불맥이굿신격 : 육수와 해수를 담은 항아리제당 :일시 :신격항아리 : 육수와 해수를 담은 3개의 항아리로 윗바을, 중간마을, 아랫마을을 상징한다. 육수와 해수 담은 항아리는 각자의 마을 화귀를 막아주는 신이다.신화지금부터 약 400여년 전 스님 한 분이 노승봉에서 내려와 이 터가 “참 큰 터로구나”하고 감탄을 하며 지형을 살피다가 앞산 등남산에 화귀가 서려있고, 뒷산 낭떠러지에 흠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 탄식하여 노승봉을 향하던 재에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엉엉 울고 있어, 촌로 한분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 좋은 터가 흠이 있어 하도 아까워서 울고 있소”하고 대답하였다. 촌로는 도승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방지책을 일러 달라고 간청을 하자, 도승이 이르기를 “화귀를 막으려만 낭떠러지는 어찌할꼬?”하며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노인은 “우선 화귀 막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 낭떠러지는 차차 우리들이 대책을 세우겠습니다.”하고 거듭 통사정을 하니, 노인장의 뜻이 갸륵하여 이르기를 “저기 수문위에 있는 등허리(등남산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항아리 셋을 주되 육수와 해수를 반반씩 넣어서 가득 채우고 꼭 봉한 후에 흙을 덮어 무덤처럼 해두었다가 불이 나거든 열어보라”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중간 마을에서 불이 나 열어보니, 가운데 항아리만이 물이 없어졌으며 아무리 살펴봐도 물이 없어진 곳이 없었다. 기이하게 여기어 다시 물을 채우고 묻어두었다가 아랫마을에서 불이 났기에 열어보니, 아래쪽 항아리만 물이 없어졌다. 항아리 셋이 윗마을 중간마을 아랫마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후 지금까지 뜻을 모아 정월 2월 초하룻날을 정하여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올린다.* 참고문헌 :『전남의 전설』 전라남도, 1987, 380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70
  • 전남 함평군 학교면 용호마을 용신제
    전남 함평군 학교면 용호마을 용신제제명 : 용신제신격 : 암이무기제당 :일시 :신화고문산은 옛부터 사람이 하나 들어갈 만큼 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길이 몽탄강에 이른다고 하여 먼 옛날 이 굴에는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지상에 내려 온 백년 묵은 이무기가 한 쌍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비가 오면 굴 앞 강변은 호수로 변하였고, 본래 용이었던 부부 이무기는 이 호수에 나와 목욕재계하고, 다시 용이 되기를 옥황상제께 빌었다고 한다. 그 정성이 지극하여 마침내 옥황상제의 윤허가 있어 하늘로 승천하기에 이르렀다. 우레가 번득이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숫용이 먼저 하늘로 승천 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 이 마을은 질병이 끊이지 않으며 가뭄 때문에 흉년을 면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암이무기의 저주라고 믿어 용신당을 짓고 용신제를 지내고 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45
  • 전북 군산시 옥도면 반도리 비안도 유왕굿(용왕굿)
    전북 군산시 옥도면 반도리 비안도 유왕굿(용왕굿)제명 : 유왕굿(용왕굿)신격 : 용왕제당 :일시 :신화바다를 관장하는 수신인 용왕에게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빌기 위해 드리는 의례다. ‘시숫배’란 시식배의 현지 말이다. 시숫배 띄우기는 액막이를 위한 의례다. 한 해의 나쁜 액운을 모형의 배에 실어서 바다에 띄워 보냄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해상 안전, 그리고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위도 띠뱃놀이와도 유사하다.시숫배 띠우기는 주로 정월이나 이월 중에 손없는 날을 받아서 한다. 날이 정해지면 마을 남자들이 산에서 소나무를 잘라서 배의 모형을 만들고 띠풀과 나무판을 이용하여 몸체를 만든다. 그 다음에는 돛대를 달고 키를 매단다.선창가에서는 제상을 차리고 당골이 용왕굿을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유왕굿을 집안 단위의 의례로 하지만, 비안도에서는 마을공동체 단위의 의례이기 때문에 주민 대다수의 참여 속에서 진행된다. 당골의 굿이 끝난 다음에는 시숫배에 유왕제를 지낸 음식을 배에다 가득 싣고 어선이 끌고 바다로 나가 먼 바다로 띄워 보낸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66
  •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개양할미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개양할미제명 : 수성당제신격 : 수성당할머니(개양할미), 막내딸, 산신, 장군신제당 : 수성당일시 :전북 부안 죽막동 수성당 개양할미지역 : 전북 부안 죽막동명칭 : 개양할미신격 : 개양할미는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해신이다. 아득한 옛날 적벽강의 대막골 뒤 ‘여울굴’에서 개양할미가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과 깊이를 조정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여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개양할미를 물의 성인으로 높여 수성할미라 부르고, 여울골 위 칠산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절벽에 구랑사를 짓고 모셔왔는데, 이는 개양할미가 딸 여덟을 낳아 위도,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 요소에 보내 바다를 지키게 하고, 개양할미는 막내딸을 데리고 구랑사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했다고 한다. 지금은 수성당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특징 : 개양할미는 키가 어찌나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다 하며, 다만 곰소의 ‘계란여’에 이르러 발이 빠져 치마까지 젖었는데, 화가 난 개양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다 계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지금도 깊은 물을 보면 ‘곰소 둠벙 속 같다’는 속담이 전해오고 있다.얼마 전까지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죽막동을 중심으로 한 주변 마을 어민들이 무사태평과 풍어를 비는 수성당제를 지내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맥이 끊긴 상태다.칠산바다를 지키는 개양할미지 역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죽막동수성당줄거리 : 개양할미는 당집 곁의 굴에서 나온 아주 키가 큰 거녀이다. 키가 얼마나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다. 개양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위도,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의 요소에 배치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한다.긴 대나무 자로 바다의 높낮이를 재면서 깊은 곳은 낮게 낮은 곳은 깊게 바다를 편편하게 골라 배가 항해할 때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한다. 풍랑을 다스려 어부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해 준다.등장인물 소개* 개양할미는 늙었다는 말이 아니라 크다는 의미이다. 개양할미가 입은 옷은 백제시대 의상이다. 한손에 늘 긴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닌다. 머리는 쪽을 지었다. 개양할미는 적벽강 대막골 뒤 여울굴에서 나왔다. 바다의 풍랑과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해신이다. 개양할미는 키가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는다.* 여덟 딸은 백제시대 의상에 머리 모양은 선녀머리를 하고 있다.배 경(1) 시대 : 백제시대(2) 공간 : 부안 수성당이 있는 절벽 바닷가 당집, 적벽강 바닷가, 적벽강 큰 바위 굴, 바다(3) 지역 :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수성당 5. 신의 성격 바다의 깊고 높낮이를 조절하고, 풍랑을 관장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주는 항해의 여신인 해신이다.애니메이션 시나리오 : 수성당은 깎아지른 바닷가 벼랑위에 위치해 있다. 수성당 안에는 개양할미와 그의 딸 여덟 명의 당신도가 걸려있다. 산신도가 함께 걸려있다. 개양할미는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해신이다. 옛날 옛날에 며칠 동안 적벽강에 큰 파도가 쳤다. 바닷가에 묶어 둔 배들이 모두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고 오직 배 한척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그 한척이나마 지키려고 나와서 갖은 애를 썼다. 그런데 갑자기 더 큰 파도가 일면서, 여울굴 바위가 흔들거리며 천둥같은 소리를 냈다. 적벽강 여울굴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와 사람들은 일제히 그 곳을 바라봤다.그때 그 곳에서 한 거인 여인이 쓱 나타났다. 머리는 쪽을 찌었는데 머리에 태양빛의 방배가 둘러져 있었다. 거인 여인은 구름을 타고 있었다. 여인은 구름 위에서 내려 바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두 손을 벌렸다. 그러자 언제 바다가 그랬는가 싶게 잔잔해졌다. 하늘은 맑게 개였다. 바다 가운데 서있는 여인을 보았을 때 마치 구름을 타고 있었을 때처럼 바다위에 나막신까지 드러나 있었다. 나막신은 굽이 있는 것이었는데 굽만이 바다에 잠겼던 것으로 그 정도로 여인은 컸다. 사람들은 일제히 여인에게 절을 올렸다. “ 바다의 여신이 출현하셨다. 우리를 보살펴 줄 해신이다.”“ 우리가 해신을 앞으로 수성당할미, 개양할미라고 부릅시다.”“ 그래요. 아주 큰, 거인이라는 뜻의 할미이니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바다가 잠잠해지자 개양할미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개양할미가 기거할 거쳐를 마련합시다.”“ 개양할미가 들어가시게 하려면 얼마나 큰 집을 지어야겠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우리가 그러지 말고 개양할미 당신도를 그려 그 것이나마 모시는 것은 어떻겠소.”“ 그래요. 우선 그렇게라도 개양할미를 모셔봅시다.”사람들은 개양할미가 출현했던 바로 여울굴 벼랑 위에 수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개양할미의 당신도를 그려 모셨다.개양할미는 여덟 명의 딸을 낳았다. 개양할미는 딸들을 위도를 비롯해서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의 요소에 보내고 막내딸만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렀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어보고, 깊은 곳은 매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해 어부들을 보호해 주었다. 어부들은 개양할미가 표시 해둔 곳을 피해서 먼 바다를 항해하고 고기도 잡았다.개양할미가 바다를 다스린 후부터는 서해바다에 풍랑이 일지 않았다. 고기 또한 다른 때보다 휠씬 많이 잡혔고, 칠산바다에는 조기떼로 넘쳐나기도 했다.개양할미의 보살핌으로 수성당 근처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항해를 하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갈 때마다 만선이 되어 돌아왔다. 사람들은 마을 수호신이자, 항해와 풍어의 여신 해신인 개양할미께 매년 감사의 제를 올렸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면 마을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을 보고, 가장 깨끗한 사람을 제주로 뽑아 정성을 다해 감사의 제를 올린다.수성당 근처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이 마을 저 마을 할 것 없이 어울려 풍물을 치고, 춤을 추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신명나는 잔치마당이 된다.신격개양할미 : 수성당 주신이며, 수성당할미라고도 하며 거녀이다. 8명의 딸을 낳아 칠산바다 각 요소에 배치해서 관장하게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면서 배의 항해할 때 안전하게 돌아주면서, 풍어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막내딸 : 개양할미의 여덟 딸 중에 막내로 개양할미와 함께 수성당제 좌정되어 있다. 구체적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산신 : 구체적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장군신 : 구체적 명칭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용신 : 구체적인 명칭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백발노인이 용을 타고 있는데 당신도 중앙에 위치해 있다.신화부안 죽막동의 수성당은 백제 때부터 존재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토마나 토기 등과 철제, 석제 등 제사 관련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고대부터 지속된 중요한 해신신앙 유적임을 말해준다. 수성당에 모셔진 신격은 수성당할머니[개양할미]라고 하며, 조기잡이의 가장 큰 어장이었던 칠산바다의 어로와 항해의 신이라고 한다.개양할미는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해신(海神)이다. 아득한 옛날 적벽강의 대막골 뒤 여울굴에서 개양할미가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과 깊이를 조정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여 왔다고 한다. … 이 할미는 어떻게 키가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 개양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위도와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의 요소에 배치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수성당할머니는 당집 바로 곁의 ‘굴’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키가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건너다녀도 버선에 묻지 않았다고 하며, 깊이를 조정하여 항해의 안전을 도왔다고 한다. 개양할미가 거녀적 존재로서 바다를 관장하는 해신임을 말해준다. 한편 수성당에는 개양할미 이외에 막내딸과 산신, 장군신도 함께 모셔졌다고 하는데, 이런 다신성(多神性)은 후대에 변모나 무속과의 복합 과정 등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한국의 해양문화』 서남해역 439~440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68
  • 전북 부안군 위도 벌금 당제
    전북 부안군 위도 벌금 당제          제명 : 산제, 원당제, 도청굿, 용왕굿신격 : 용왕, 칠성, 산신, 오방신장, 대신할머니, 장군제당 : 산제(산제터), 원당제(마을 뒤 야산 정상의 당집)일시 : 음력 1월 2~3일개괄벌금에서는 음력 정초에 마을 제사를 모시는데, 여러 군데에서 여러 가지 내용으로 지낸다. 초이튿날 저녁에는 산지터에서 ‘산지’[산제]를 모시며, 초3일 오전에는 마을 뒤쪽 야산 정상 부근에 있는 당집으로 올라가 원당제를 모신다. 그리고 오후에 마을로 내려와 샘굿과 당산굿을 치고 회관 앞 마당에서 도청굿이라고 하는 무당을 했다. 저녁 무렵에는 선창에서 용왕제를 모시고 띠배를 만들어 띄워 보낸다.제의내용벌금은 위도 면소지인 진리에서 동쪽으로 1㎞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조 말엽 창녕조씨와 평산신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며 지금은 73세대 2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지대가 낮아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어 예부터 소금을 생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여기서 유래하여 소금벌, 벌금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벌금에서는 음력 정초에 마을 제사를 모시는데, 여러 군데에서 여러 가지 내용으로 지낸다. 초이튿날 저녁에는 산지터에서 ‘산지’[산제]를 모시며, 초3일 오전에는 마을 뒤쪽 야산 정상 부근에 있는 당집으로 올라가 원당제를 모신다. 그리고 오후에 마을로 내려와 샘굿과 당산굿을 치고 회관 앞 마당에서 도청굿이라고 하는 무당을 했다. 저녁 무렵에는 선창에서 용왕제를 모시고 띠배를 만들어 띄워 보낸다.여러 제의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원당제라고 할 수 있는데, 원당제가 모셔지는 당집은 마을 뒤쪽 야산 정상 부근에 있는 후박나무 숲 속에 있다. 당집 주위에는 돌담이 있고 당집 앞과 옆으로는 50여 평 이상의 마당이 있다. 당집은 한 칸짜리 기와지붕이다. 당집 안의 상량문 昭和 十六年 辛巳 九월 二十九日入住 同日申時上樑 子坐午向 日日降福 / 年年登豊, 靈神所顯 / 萬民咸寧, 福錄日來 / 邪矢時却, 應天上之三光 / 備人間之上福을 확인한 결과 1941년(소화 16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자좌오향(子坐午向) 이후의 문구는 당제를 통해 축원하는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인데 두 줄 씩 적혀 있다. 또한 당집 안에는 정면 벽과 양 측면에 당신도가 6점 걸려 있다.신화벌금에서는 음력 정초에 마을 제사를 모시는데, 초이튿날 저녁에는 산지터에서 ‘산지’[산제]를 모시며, 초3일 오전에는 마을 뒤쪽 야산 정상 부근에 있는 당집으로 올라가 원당제를 모신다. 그리고 오후에 마을로 내려와 샘굿과 당산굿을 치고 회관 앞마당에서 도청굿했는데 무당이 했다. 저녁 무렵에는 선창에서 용왕제를 모시고 띠배를 만들어 띄워 보낸다.여러 제의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원당제라고 할 수 있는데, 원당제가 모셔지는 당집은 마을 뒤쪽 야산 정상 부근에 있는 후박나무 숲 속에 있다. 당집 주위에는 돌담이 있고 당집 앞과 옆으로는 50여 평 이상의 마당이 있다. 당집은 한 칸짜리 기와지붕이다. 당집 안의 상량문 昭和 十六年 辛巳 九월 二十九日入住 同日申時上樑 子坐午向 日日降福 / 年年登豊, 靈神所顯 / 萬民咸寧, 福錄日來 / 邪矢時却, 應天上之三光 / 備人間之上福을 확인한 결과 1941년(소화 16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자좌오향(子坐午向) 이후의 문구는 당제를 통해 축원하는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인데 두 줄 씩 적혀 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37
  • 제주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 해촌마을 용왕신(海田守護神)
    제주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 해촌마을 용왕신(海田守護神)제명 : 용왕제신격 : 용왕삼녀라는 요왕또. 개할망 또는 돈지할망, 일뤠할망제당 :일시 :신격용왕삼녀 : 해촌마을에서는 ‘개할망’, ‘돈지할망’이라 부르는 여신이다. 잠녀를 수호하는 생업신이다.신화제주도 여신설문대할망에 관한 가장 오랜 문헌기록은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조의 『탐라지』다. 제주도의 전설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설문대할망에 대한 전설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창조한 여신으로 거인으로 '설명두할망' 또는 '세명뒤할망'이라고도 한다. 옥황상제의 말젯딸이라는 설도 있으나 각 지역마다 구전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설문대할망은 치마에 흙을 담아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일곱 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옮기던 중 치마의 터진 부분으로 새어나온 흙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설문대할망과 한라산 백록담에 얽힌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전해진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만든 후 봉우리가 너무 뾰족하여 그 부분을 잡아 던지자 그 부분이 움푹패여 백록담이 되고, 윗부분은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설문대할망은 키가 워낙 커서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관탈섬까지 뻗었는데, 관탈섬에 난 구멍은 할망이 다리를 잘못 뻗어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산 일출봉에 있는 기암괴석을 등잔으로 삼아 바느질을 했는데 등잔을 얹었던 기암을 등경석이라 한다. 관탈섬과 마라도를 밟고 우도를 빨랫돌로 삼아 빨래를 했다고 하고, 할망의 오줌 세기가 강해 우도와 성산 사이의 조류가 세다고도 한다.설문대할망은 제주사람들에게 명주로 속옷을 만들어주면 육지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그때부터 명주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99통 밖에 모으지 못했다. 1통이 모자라 속옷을 만들지 못하였고, 설문대할망도 다리를 놓던 것을 중단해 제주와 육지가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리를 놓던 흔적이 북제주군 조천과 신촌사이에 뻗어나간 엉장매다.설문대할망은 큰 키를 자랑하며 깊다는 물을 다 찾아다녔다. 용담의 용연은 발등까지 왔고, 서귀포 서홍리 홍리물은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라산 중턱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갔는데, 물장오리는 밑이 뚫려있어 할망은 그만 빠져죽고 말았다고 한다.또 다른 이야기 한 가지. 할망에게는 설문대하르방과의 사이에 오백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사냥나간 오백 아들들에게 먹을 죽을 끓이다 가마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죽을 먹던 아들들이 할망이 솥에 빠져 죽은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영실의 오백장군이 되었다.http://www.jejusamda.com…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1-27 조회 426
  • 제주 제주시 내도동 잠녀당
    제주 제주시 내도동 잠녀당제명 : 본당풀이신격 : 용녀부인제당 :일시 :신화이형상목사가 제주도 신당을 철폐하고 임기를 마친 후 고향으로 가려고 했으나 광양당신의 노여움을 사 고향을 떠나지 못했다. 선주 박동지와 김동지 영감이 이형상을 고향으로 보내주자 목사가 무곡을 주었다. 무곡을 가지고 제주도로 오는 도중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 직전이 되자 기도를 했다. 큰 뱀이 똬리를 틀어 터진 배의 구멍을 막아줘 무사히 도착했다. 그 후 뱀을 모셔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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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보령시 오천면 효자도 당제
    충남 보령시 오천면 효자도 당제        제명 : 당제, 산신제신격 : 산신제당 : 효자도의 당집은 원래 상당과 하당 두 곳이 있었으나 하당은 10여년 전에 마을에서 회의를 하여 하당을 없애자고 하여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일시 :충남 보령시 오천면 효자도 당집내 색동 베지역 : 충남 보령시 오천면 효자도제명 : 당제, 산신제라고 부르며 상당제를 지내는 당집에 기해년(己亥年)이라고 써 있으며 미루어 볼 때 1899년으로 판단되며 적어도 100년은 넘은 것으로 보인다.제당 : 효자도의 당집은 원래 상당과 하당 두 곳이 있었으나 하당은 10여년 전에 마을에서 회의를 하여 하당을 없애자고 하여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위치 : 상당은 마을 당산 정상에 있으며, 하당은 예전 중리에 있는 마을회관 옆에 있었다.형태 : 상당의 당집은 약 5평 정도의 크기이며, 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의 벽만 시멘트로 되어 있고 나머지 측면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다. 당집 바닥도 나무로 되어 있으며, 우측으로 ‘ㄱ’ 자 모양의 선반이 벽 상단에 있으며 선반 위에는 나일론 줄에 빨강, 노랑, 하얀색의 천들이 걸려 있으며 선반 맨 우측에는 초가 있고 당집 앞에는 나무절구가 놓여 있으며 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있다.좌정된 신격 : 당집 내부에는 왼쪽에서부터 ‘장군당’, ‘각시당’, ‘본당’, ‘수부당’ 이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써놓은 이유는 젊은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면서 신격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특별히 신격에 관한 그림이나 신위는 모셔져 있지 않다.특징 : 효자도에서의 당의 신격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당집 내 벽면에 ‘장군당’, ‘각시당’, ‘본당’, ‘수부당’ 이라고 쓰여 있어 예전에 신을 기리기 위해서 노력했던 조상 대대로의 전통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제의 소멸과 변천 : 1995년 마을회의를 통해 하당을 없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으나 여전히 당제를 연행되고 있으며 당산에 있는 상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현재 차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게 되어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이 상당에 제물을 올릴 때 쉽게 올라가려고 넓혔다고 한다.제당의 형태위치 : 상당은 마을 당산 정상에 있으며, 하당은 예전 중리에 있는 마을회관 옆에 있었다.형태 : 상당의 당집은 약 5평 정도의 크기이며, 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의 벽만 시멘트로 되어 있고 나머지 측면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다. 당집 바닥도 나무로 되어 있으며, 우측으로 ‘ㄱ’ 자 모양의 선반이 벽 상단에 있으며 선반 위에는 나일론 줄에 빨강, 노랑, 하얀색의 천들이 걸려 있으며 선반 맨 우측에는 초가 있고 당집 앞에는 나무절구가 놓여 있으며 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있다.좌정된 신격 : 당집 내부에는 왼쪽에서부터 ‘장군당’, ‘각시당’, ‘본당’, ‘수부당’ 이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써놓은 이유는 젊은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면서 신격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특별히 신격에 관한 그림이나 신위는 모셔져 있지 않다.특징 : 효자도에서의 당의 신격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당집 내 벽면에 ‘장군당’, ‘각시당’, ‘본당’, ‘수부당’ 이라고 쓰여 있어 예전에 신을 기리기 위해서 노력했던 조상 대대로의 전통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제의 소멸과 변천 : 1995년 마을회의를 통해 하당을 없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으나 여전히 당제를 연행되고 있으며 당산에 있는 상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현재 차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게 되어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이 상당에 제물을 올릴 때 쉽게 올라가려고 넓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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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 붕기 풍어제
    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 붕기 풍어제          제명 : 붕기풍어제신격 : 뱀서낭, 임경업장군(현재)제당 : 당집은 주산인 상봉과 하봉 사이에 위치일시 : 음력 1월 2~3일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붕기 당집 내 성주지역 : 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제명 : 붕기풍어제. 원래 황도의 당제는 도당굿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풍어제’란 명칭을 달게 되었다.제당 : 총 3칸 건물의 당집위치 : 섬의 북쪽에 당산이 있는데, 큰 상봉과 작은 상봉의 두 봉우리가 만나는 편편한 지점에 당집이 위치한다.형태 : 개보수하기 이전에는 붉은 기와에 시멘트벽으로 만든 당이었으나 지금은 총 3칸의 시멘트건물이다. 주위에는 홰나무가 군을 이루고 있으며, 당집 앞에는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1991년 태안군수가 세운 ‘붕기풍어제의 유래’라고 쓰여 있다.좌정된 신격 : 당 내부에는 탱화가 그려져 있는데 원래의 탱화는 일제시대에 사라지고 현재는 임경업장군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지금 그려진 탱화의 이전 것은 가로와 세로 각각 50cm정도의 크기에 그려진 것으로 하얀옷을 입은 성황님 혼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현재 3채의 당집 중에 맨 왼쪽에는 열두당과 화상 5점이 선반 위에 걸려 있는데 왼쪽 벽에는 용왕각시당(龍王閣氏堂)이 있고 전면에는 왼쪽부터 성조천신(成造天神), 군왕(軍王)님, 삼불제석(三佛帝釋)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동서남북이십사방잡귀축출장군(東西南北二十四方雜鬼逐出將軍)이 걸려 있다. 가운데 당집은 산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맨 오른쪽에 있는 집은 고기보관 및 제물을 준비하는 육간이 있으며 당 마당에는 굴뚝과 화덕이 위치해있다.특징 : 원래 모시는 신은 진대(뱀신)였으나 17세기 말엽에 임경업 장군이 어로신으로 등장하면서부터 황도 당집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차츰 어업의 다양화와 점진적인 원양어업의 진출 등으로 보다 더 신의 가호를 필요로 하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신을 모시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왕을 중심으로 장군, 성주, 사해 용왕, 오방 장군으로 봉안해 왔는데 어로신으로는 역시 임경업 장군이 주신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뱀과 상극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인지 이 마을 사람들은 금기로 돼지를 먹거나 기르지 않는다고 하며 이를 잘 지키고 있다.제의 소멸과 변천: 현재 마을에서는 성주 이하 다섯 장군을 포함한 열두당을 모시고 있는데 제를 지낼 때는 ‘접당’으로 스물넉당을 모신다. 예전에는 원당에 주신인 진대(뱀신)을 모셨다고 하며, 주민의 대다수도 진대(巳)를 주신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마을신에 대한 구체적인 신격의 직능 구분 없이 ‘서낭님’으로 부른다.개괄제의의 유래로는 아주 오랜 옛날 짙은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밤에 출어를 한 황도리 어선들이 항로를 잃고 표류할 때 지금의 당산(제당이 있는 곳)에서 밝은 불빛이 귀로(歸路)를 밝혀 모두 무사히 귀항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살펴준 신성한 곳이라 하여 이곳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제의내용제의유래제의의 유래로는 아주 오랜 옛날 짙은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밤에 출어를 한 황도리 어선들이 항로를 잃고 표류할 때 지금의 당산(제당이 있는 곳)에서 밝은 불빛이 귀로(歸路)를 밝혀 모두 무사히 귀항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살펴준 신성한 곳이라 하여 이곳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제당황도의 당집은 주산인 상봉과 하봉 사이에 위치해있다. 총 3칸의 건물로 당집이 구성되어 있으며, 4년전에 개축을 하였으며, 개보수하기 이전에는 붉은 기와에 시멘트벽으로 만든 당이었다.당집 주위에는 홰나무가 군(群)을 이루어 있으며, 당집 앞에는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1991년 태안군수가 세운 비로 ‘붕기풍어제의 유래’라고 쓰여있다.당 내부에는 탱화가 그려져 있는데 원래의 탱화는 일제시대에 불살라 버려서 사라지고 현재는 임경업장군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것은 황도에 무당이 들어오면서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제보자에 따르면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을 지켜주는 무당이 있었는데 이 무당은 안면읍에 사는 무당으로 제의를 주관해주었다. 또한 1983년 김금화 무당이 들어오면서 황해도굿으로 변하였고, 본인의 신들을 모시고 와서 황도에서 지냈다고 한다. 지금 그려진 탱화의 이전 것은 가로와 세로 각각 50cm정도의 크기에 그려진 것으로 하얀옷을 잎은 성황님 혼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현재 3채의 당집중에 맨 왼쪽에는 열두당과 화상 5점이 선반위에 있으며, 가운데 당집은 산신도가 그려져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집은 고기보관 및 제물을 준비하는 육간이 있으며 당 마당에는 굴뚝과 화덕이 위치해있다.이 세 건물에는 제를 지내면서 둘러 놓은 금줄이 남아있는데 이는 신성시 하는 지역의 표시로 다음제의를 지낼 때 까지 그대로 놓아둔다.신격진대 : 원당의 주신으로 진대는 뱀서낭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마을 사람들은 진대와 상극인 돼지를 사육하지 않다. 돼지고기를 먹고는 배도 타지 않는다. 풍어를 관장 한다. 형태는 없다.성주 : 파란 색 도포를 입었으며 칼집에 담아진 칼을 들고 있다. 구체적인 기능은 알 수 없고 산신당에 모셔져 있다.군왕 : 한 사람은 칼을 높이 쳐들고 있고 한 사람은 허리에 찬 칼을 잡고 있다.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산신당에 모셔져 있다.삼불제석님 : 세 사람이 똑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며 가운데 사람은 고깔을 쓰지 않았다. 산신당에 모셔져 있으며 구체적인 기능은 알 수 없다.신화제의의 유래로는 아주 오랜 옛날 짙은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밤에 출어를 한 황도리 어선들이 항로를 잃고 표류할 때 지금의 당산(제당이 있는 곳)에서 밝은 불빛이 귀로(歸路)를 밝혀 모두 무사히 귀항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살펴준 신성한 곳이라 하여 이곳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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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백도마을 성황제
    강원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백도마을 성황제제명 : 성황제와 별신굿신격 : 숫성황신, 암성황신제당 : 마을뒷산 숫성황당, 바닷가 암성황당(자연석)일시 : 음력 1월 3일, 3년에 1회 별신굿개괄문암1리 백도는 ‘망개’라 불리는데 예전에 일 만 호가 살아서 ‘만포만개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3일날 마을 앞산에 있는 숫성황신과 바닷가 암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특별히 목조남근을 암성황신에게 제물로 바친다.제의내용문암1리 백도는 ‘망개’라 불리는데 예전에 일 만 호가 살아서 ‘만포만개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3일날 마을 앞산에 있는 숫성황신과 바닷가 암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특별히 목조남근을 암성황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목조 남근은 제관 가운데 한 사람이 깎는데 자신이 남근을 깎는다고 말해서는 안되고 남근을 타인에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남근은 길이 한 자, 지름 5㎝정도의 크기인데 반드시 오리나무로 3개를 깎는다. 남근을 암성황신이 있는 바위구멍에 꽂는데, 구멍이 한 번에 맞으면 풍어가 된다고 믿는다. 망개마을의 남근신앙과 인근에 있는 미륵석상은 민속적 이미지에 맞는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문암1리와 문암2리로 구성되어 있다. 문암1리는 백도마을로 불리는데 157가구이고 이중 김씨가 50여 가구다. 논과 밭도 있고 가축도 사육하고 있어 바닷가에 접해 있지만 반농반어라 할 수 있다. 그 외 민박도 주요한 수입원이다. 백도마을이라 이름한 것은 일명 흰섬이라 불리는 백도가 해안에서 약 500m 떨어져 있는데 갈매기 배설물로 섬 전체가 덮혀 백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출과 일몰 때 섬의 장관은 옛날 임금님이 살던 커다란 성처럼 우람하게 보인다고 한다. 마을 산밑 지표에는 융기문, 손톱무늬 회갈색 토기편이 다량 수집되어 1997년 국립문화재연구소 검사 결과 이것이 신석기 시대와 철기 시대유물로 추정되고 있어 남한의 신석기 문화의 이동경로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만호리, 괘진리, 망포리, 망개리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이 곳에 침략하여 신라장군을 죽였다. 신라장군이 죽은 곳에 난데없이 돌로 된 미륵동이 생겨났다. 장군의 부인이 이곳에서 애절히 울다가 부인이 죽어 뱀이 되어 미륵동을 지켰다. 부인이 죽으며 내가 뱀이 되어 미륵동을 지킬 터이니 나를 잘 보살피면 훗날 신라인 만호가 거주하게 할 것이라고 하여 만호리로 한 때 불렸다. 이때 고구려의 박씨가 그 뱀을 죽여 마을주민들은 마을이 곧 망한다하여 망포리라 불렀고, 이후 부락 앞에 개[浦]가 있어 마을을 바라본다고 하여 망개리라 이름하였다. 1919년에 와서 문암리로 되었고, 1954년에 1리와 2리(괘진리)로 나뉘어졌다. 이 마을의 가장 큰 명절은 설날과 추석이다. 마을의 제의는 다음과 같다.?성황제(3일)초사흘에 성황제가 고정되어 있지만 마을에 큰 부정이 있으면 조정할 수 있다. 자금은 가가호호 정성껏 갹출한다. 섣달에 생기복덕을 보아 제관을 선임한다. 제물은 풍부할 때는 소도 잡아 썼으나 지금은 돼지를 잡아 쓴다. 어물은 앞 바다에서 나오는 문어, 열기, 오징어를 쓰며, 탕도 물론 올리며 제주를 봉하고, 제관이 올라가 제를 올린다. 자작도 해수욕장 바위에 암 성황이 있고, 이곳 성황은 수 성황이다.제관들이 할머니 성황을 모셔와 할아버지 성황도 모셔와 한 군데에서 제를 올린다. 따로 제단을 만들어 거기에서 제를 올린다. 가가호호 호주의 성명과 생기를 써서 소지를 전부 올려준다. 그래서 낙성이 되는 소지는 그분들에게 알려, 또 낙성된 각자가 와 소지를 올려야 한다. 제사 후 음식은 동네 모두가 제관 집에서 모여 나눠 먹는다.문암1리 바닷가에 있는 암성황제는 해마다 정월 3일 새벽 4시경 올리는데 이때 문암2리 수 성황제도 함께 지낸다. 암 성황당은 수십 개의 자연석 구멍이 있으며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제관으로 선정된 7명은 오리나무로 길이 30㎝, 지름 5㎝정도의 남근을 3개 깎아 가지고 가서 처음에 한 개를 넣어서 구멍이 맞으면 풍어가 된다고 믿는다.마을 이장은 한복을 한 벌 지어 암 성황신에게 바치는데 암 성황신은 시집을 못가고 바다에 빠져 죽은 여성이므로 그 영혼을 위로하는 뜻이라고 한다. 5년마다 풍어굿을 할 때 무당이 주관하여 암수성황신을 굿 당에 봉안하고 합사한다. 이 마을의 남근봉헌은 한 어부가 고기가 잘 잡히지 않자 홧김에 암 성황당에 가서 육담으로 욕설을 퍼붓고 바다로 나갔더니 만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후에 남몰래 암 성황신을 위하는 목각남근을 바치고 늘 풍어가 되자 주민들이 동참하여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문암 2리 제당은 군부대 초소입구 야산에 바다쪽을 보고 있는데 기와집으로 지었다. 내부에는 목판에 성황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1970년 음력 4월 25일날 중건하였다.?성황굿3년에 한 번씩 큰굿을 한다. 배타는 사람은 정성으로 상을 하나씩 차려 놓는다. 무당들이 신이 올라서 신 굿을 하고, 어민들 풍어를 축원을 한다. 자금은 선주들하고 부락유지들이 갹출한다.신격당제명신화삼국시대 고구려가 침략하여 신라장군을 죽였는데, 죽은 곳에 돌로 된 미륵동이 생겨났다. 장군 부인이 그 곳에서 애절하게 울다가 죽어 뱀이 되어 미륵동을 지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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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 안씨부인
    경기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 안씨부인제명 : 성황제신격 : 경부데왕(경순왕), 안씨부인, 홍씨부인제당 :일시 :신화당집 및 화상. 경부대왕(경순왕), 안씨부인, 홍씨부인을 모신다. 이들이 신당에 봉안되기까지 역사민속적인 깊은 유래가 있는 당이다. 군자봉은 서해연안에 있는 산이어서 삼국시대 이래로 한강 유역과 남양만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는 요새로 이어져왔다. 또한 군자봉은 예로부터 무속신앙이 크게 발달한 영산으로 성황당이 이어져온다.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사직을 넘겨주고 경주를 떠나 충북 제원군을 거쳐 강원도 원성군 고자암에 미륵불상을 조성한 후 시흥시 군자동 구준물 마을에 이르러 안씨부인과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 후 경순왕이 죽자 안씨부인이 마을 뒷산인 군자봉에 매일 올라가 치성을 드렸다. 어느 날 꿈에 경순왕이 나타나 안씨부인을 위로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얼마 후 내시랑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출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안씨부인의 영혼이 나타나 사행길을 도와주었다. 그 공으로 군자봉 정상에 경순왕의 영정과 안씨부인의 소원당(성황당)을 지어주었다. 그 후부터 인근 주민들이 해마다 제를 지낸다. 성황당은 수암봉과 인근 안산의 성두산에도 하나씩 있다. 이들 성황당은 모두 인근 해변 가의 방위와 밀접한 관계 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한국의 해양문화』 서해해역 431~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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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통영시 사량면 수우도 당제
    경남 통영시 사량면 수우도 당제제명 : 풍어제신격 : 설운장군제당 :일시 :경남 통영 수우도 설운장군지역 : 경남 통영시 사량면 돈지리 수우도명칭 : 설운장군제명 : 풍어제신격 : 설운장군관련설화: 가난한 어부부부가 치성으로 아들을 얻었는데 겨드랑이에 아가미가 있고 온 몸에 물고기비늘이 돋아 그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게 했다. 아이는 돌이 되자 바다에 뛰어 들어 헤엄을 치명서 고기들과 놀았다. 아이가 장성해서 왜구를 무찌르고 곡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는데, 판관의 모함으로 나라에서 설운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설운장군이 역습하여 판관부인을 아내로 삼아 딸까지 낳았는데, 판관부인은 설운장군이 잠을 자면 며칠씩 자는 약점을 이용 관군을 불러 생포하게 했다. 설운장군이 잠에서 깨어나 포승줄을 끊자 관군이 설운장군의 목을 베었었는데 다시 붙었다. 판관부인은 다시 칼로 설운의 목을 내리 치게 한 후 숨겨둔 메밀가루를 잘린 목에 뿌려 결국 설운장군은 죽게 되었다. 수우섬의 사람들은 설운장군을 바다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장군의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그의 넋을 달래는 한편, 왜구를 무찔러 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더불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제사를 연년이 지내게 되었다.당설화 :통영시 사량면 수우섬(樹牛島)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 작은 장군사당이 하나 있는데, 매년 음력 10월이면,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인 설운장군의 사당에 모여 지극한 정성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이 당산신인 설운장군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옛날 이 섬에 한 가난한 어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 부인이 뒤뜰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아들 하나를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결국 오랜 치성이 효험이 있었던지 드디어 태기가 있더니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여느 아이들보다 몸체가 두 배나 큰 똘똘하였다. 아이는 첫 돌을 지나자 혼자 바다로 나가 헤엄을 치는데, 잠수를 퍽 잘하였다.마을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인 설운장군의 사당에 모여 지극한 정성으로 당산제를 지내며 전래 영웅설화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설운장군을 캐릭터화하였다.인어장수 설운지 역 : 경남 통영 사량면 수우도분 류 : 역사의 신줄거리 : 통영시 사량면 수우섬(樹牛島)에는 장군사당이 하나 있는데, 매년 음력 10월이면, 마을사람들이 수호신인 설운장군의 사당에 모여 지극한 정성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설운장군은 용왕의 아들로 가난한 어부의 집에 인간으로 태어나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또다시 용신으로 좌정된다.설운은 돌이 되었을 때 온몸에 물고기 비늘이 돋아나고, 겨드랑이에 아가미가 생기고, 등에 물고기 지느러미가 생겨나고, 도술을 부리게 된다. 수우도에 왜구가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자 도술을 부려 무찌르고 곡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설운의 활약으로는 수우섬과 사량섬 및 욕지섬, 그리고 멀리 남해섬까지를 훌쩍훌쩍 건너 뛰어 다녔으며, 산정에 걸터앉아 큰 부채를 펴들고 살래살래 부채질을 하면 먼 바다 위로 지나가던 왜구의 해적선들이 바람에 끌려오고, 순순히 응하지 않는 놈들은 파도를 거세게 일으켜 배를 침몰시켜 버리기도 했다. 주신으로 바다의 수호신이며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관장하는 신이다.신격설운장군 : 겨드랑이에 아가미가 있고 온 몸에 물고기비늘이 돋아 있는 반인반어의 인물이다. 돌이 지나 헤엄을 치면서 고기들과 놀고, 장성해서는 왜구를 무찌르고 곡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수우섬과 사량섬 및 욕지섬, 그리고 멀리 남해섬까지를 훌쩍훌쩍 건너 뛰어 다녔으며, 산정에 걸터앉아 큰 부채를 펴들고 살래살래 부채질을 하면 먼 바다 위로 지나가던 왜구의 해적선들이 바람에 끌려오고, 순순히 응하지 않는 놈들은 파도를 거세게 일으켜 배를 침몰시켜 버리기도 했다.주신으로 바다의 수호신이며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관장하는 신이다.신화통영시 사량면 수우섬(樹牛島)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 작은 장군사당이 하나 있는데, 매년 음력 10월이면,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인 설운장군의 사당에 모여 지극한 정성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이 당산신인 설운장군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옛날 이 섬에 한 가난한 어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 부인이 뒤뜰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아들 하나를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결국 오랜 치성이 효험이 있었던지 드디어 태기가 있더니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여느 아이들보다 몸체가 두 배나 큰 똘똘하였다. 아이는 첫 돌을 지나자 혼자 바다로 나가 헤엄을 치는데, 잠수를 퍽 잘하였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이 섬에 예사롭지 않은 아이가 태어났다며 좋아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잠든 아들 설운(薛雲)을 자세히 살펴보니 겨드랑이에 아가미가 있을 뿐 아니라 온 몸에 딱딱한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은 괴이한 아이를 낳았다고 하여 혹시나 동네에서 쫓겨날까 싶어 이 사실을 일체 발설하지 않기로 영감과 엄밀히 약조를 했다. 설운은 무사히 자라 장정이 되었다.한편 이 때, 남해안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뭍에 올라와 곡식을 약탈해 가더니, 급기야 전라도 곡창지대에까지 그 손길을 뻗쳐 약탈한 곡식을 배에 싣고 수우도 및 사량도 앞 바다를 거쳐 일본으로 가져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를 괘씸히 여긴 설운은 단신 바다로 뛰어들어 왜구를 무찔렀으며, 약탈해 가던 곡식을 빼앗아 인근 섬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설운장군은 도술도 부리곤 했다. 수우섬과 사량섬 및 욕지섬, 그리고 멀리 남해섬까지를 훌쩍훌쩍 건너 뛰어 다녔으며, 산정에 걸터앉아 큰 부채를 펴들고 살래살래 부채질을 하면 먼 바다 위로 지나가던 왜구의 해적선들이 바람에 끌려오고, 순순히 응하지 않는 놈들은 파도를 거세게 일으켜 배를 침몰시켜 버리기도 했다. 드디어 설운장군은 이곳 바닷사람들에게 구세주처럼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는 수우도 근처에 해괴한 인물이 나타나, 오가는 어선을 괴롭히기 때문에 어부들이 무서워 고기잡이를 못하고 모두들 굶어 죽어간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왜구들이 설운장군을 없애기 위해 꾸민 소문을 지방 관리들은 그대로 듣고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조정에서는 어부를 괴롭히는 그 인물을 당장 체포하라는 명령을 욕지도 호주판관(湖州判官)에게 내렸다. 결국 관군이 설운장군을 잡으려고 하자 억울하게 누명을 쓴 그는 어부들을 모아 관군에 맞서 싸웠으며, 욕지도 관아를 역습하여 판관부인을 납치해 절해고도인 국섬(國島)에 숨겨두고는 아내로 삼았다. 아내가 된 판관부인은 일 년이 되어 설운장군의 자식을 낳았다. 그래서 설운장군은 자기의 아이까지 낳은 여자이기에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껏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도 설운장군의 약점을 살피며 탈출의 기회를 노리던 부인은 설운장군이 한번 잠이 들면 며칠을 잔다는 것을 알고 어느 날 설운장군이 잠들자 몰래 산정에 올라가 봉화를 올려 관군들을 불러들이었다. 관군들이 급히 몰려와 잠든 설운장군을 생포하여 배에 실어 압송하는 도중, 그때서야 잠에서 깨어난 설운장군이 힘을 쓰니 굵은 포승줄이 “뚝, 뚝” 하고 끊어졌다. 놀란 관군이 칼을 빼 급히 내려쳤으나 목이 댕강 떨어지는가 싶더니 곧 제자리로 도로 붙는 것이었다. 이에 판관부인이 다시 칼로 목을 내려치게 명하고는 숨겨둔 메밀가루를 잘린 목에 뿌리니 머리가 갑판 위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몸뚱이가 몇 번 꿈틀거리더니 서서히 죽어갔다.이렇게 설운장군이 관군에 붙잡혀 죽자 왜구의 노략질은 다시 시작되었으며, 나라에서도 한동안 이를 막지 못해 그 피해는 극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우섬의 사람들은 설운장군을 바다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장군의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그의 넋을 달래는 한편, 왜구를 무찔러 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더불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제사를 연년이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한국의 해양문화』 동남해역 521〜5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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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원항마을 당제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원항마을 당제                     제명 : 장군제, 산신제, 밥상제신격 : 산신, 장군, 벅수, 용왕, 당산제당 : 장군봉 정상과 마을 입구(벅수거리) 및 당산나무 앞, 그리고 마을 앞 바닷가일시 : 음력 12월 그믐~1/1경남 통영 삼덕리, 남해 미조면 사항 산신당의 산신령명칭 : 산신령제명 : 산신제제당 : 장군봉 정상 최영장군사당 바로 옆에 산신당이 있다.위치 : 삼덕리는 원항, 당포, 관유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관유마을은 산신당을 가지고 있고, 원항과 당포마을은 장군봉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특히 원항마을은 통영시의 미륵도 서쪽에 위치하며, 마을 뒤에는 주산인 장군봉이 있고 그 정상에 산신당과 장군당이 위치해 있다.형태 : 장군당, 산신당 모두 전형적인 충효각 형식의 건물로 지금의 장군당은 1988년 재건축한 것이며 그 때 산신을 모신 당을 새로이 만들어 놓았으며 산신도는 1988년에 그린 것이다.좌정된 신격 : 장군당에는 목마 2기와 장군의 영정이 있고 이것은 마을 쪽을 향해 있으며 산신당에는 당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산신도가 그려져 있다.특징 : 한국의 농어촌에 폭넓게 분포되었던 동제신당의 하나로 천신제, 산신제, 용마제, 잡신제, 조상제, 벅수제, 별신제 등이 합쳐진 다신적 신앙예배처이다. 이곳에는 장군당, 장군신 산신도, 나무로 만든 목마, 천제당, 돌벅수 1쌍, 당산신목 등의 일련의 민간신앙자료들이 갖추어져 있다.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원항마을 최영장군사당지역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원항마을제명 : 최영장군 제사, 당산제, 당제라고 부른다.제당 : 장군봉 정상에 산신당과 장군당위치 : 삼덕리는 원항, 당포, 관유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관유마을은 산신당을 가지고 있고, 원항과 당포마을은 장군봉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특히 원항마을은 통영시의 미륵도 서쪽에 위치하며, 마을 뒤에는 주산인 장군봉이 있고 그 정상에 산신당과 장군당이 위치해 있다.형태 : 장군당, 산신당 모두 전형적인 충효각 형식의 건물로 지금의 장군당은 1988년 재건축한 것이며 그 때 산신을 모신 당을 새로이 만들어 놓았다.좌정된 신격 : 장군당에는 목마 2기와 장군의 영정이 있고 이것은 마을 쪽을 향해 있으며 산신당에는 당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산신도가 그려져 있다. 장군에 관해서는 문화재관리국이 1968년 발간한 《민속자료보고서》 제11호를 보면 이순신 장군 또는 고려 장군이라고 적고 있는데 현지마을에서는최영장군사당이라고 부른다. 또한 삼덕리 당포와 원항마을의 입구에는 각각 돌로 만든 벅시(장승)가 있는데 원항마을의 벅시는 마을 입구 양쪽에 각각 한 구씩 있는 반면, 삼덕마을의 벅시는 남녀 한 쌍이 바닷가 쪽을 향해 나란히 서 있다. 말과 관련하여, 전설에 따르면 장군당의 말은 황금으로 된 말이었으나 왜정 때 일본사람이 가지고 가다가 물에 빠뜨렸다는 설과 원래는 철마였는데 다른 마을에서 훔쳐 가다가 그 배가 바다에 빠졌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제 시대에 어업을 크게 하던 다나까라는 사람이 일본에서 정교하게 만든 목마를 장군당에 모셨다고 한다. 그는 고기를 잡으면 가장 좋고 큰 것을 목마에 걸었으며, 어획량도 다른 사람에 비해 많았다고 한다. 현재 제당에는 당시 다나까가 만든 목마가 안치되어 있는데, 작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 그가 가져온 것이고, 크고 투박하게 만든 것이 마을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특징 : 한국의 농어촌에 폭넓게 분포되었던 동제신당의 하나로 천신제, 산신제, 용마제, 잡신제, 조상제, 벅수제, 별신제 등이 합쳐진 다신적 신앙예배처이다. 이곳에는 장군당, 장군신 산신도, 나무로 만든 목마, 천제당, 돌벅수 1쌍, 당산신목 등의 일련의 민간신앙자료들이 갖추어져 있다. 이 음원은 인터넷 익스플로러(IE)에서만 지원 가능 합니다.2006년 1월 경남 통영 삼덕리 원항마을에서 당제가 거행되었다. 원항마을의 당제는 본래 마을 사람들에 의해 주관되었는데, 근래에 인근 사찰의 스님을 모셔서 제를 지낸다. 당제의 여러 제차 중 용왕제에서 제를 주관하는 비구니가 자신의 넋두를 하면서 축원을 한다.개괄원항마을의 당제는 산신제, 장군제, 용왕제, 당산나무제, 벅수제 등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군당, 장군신화, 대목마, 벅수 등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장군당의 장군에 대해 최영장군이나 이순신장군으로 인식하고 있어 주목된다. 제의는 현재 스님을 초청해 진행하고 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제관을 선정해 엄숙하게 지낸 곳이다.제의내용제사의 준비과정ㄱ. 제사 전의 마을회의 명칭-방법-안건 : 없다.ㄴ. 제관 선출 시기와 방법 : 옛날에는 제관을 마을회의에서 선출하였으나 요사이는 제관을 따로 선정하지 않는다. 당제를 인근 ‘미래사’에 위탁하여 모시기 때문이다. 다만 제물을 함께 운반하고 제를 모실 사람을 마을 사람 중 깨끗한 사람을 스님이 추천하여 선정한다. 또한, 마을에서는 매년 깨끗한 사람을 뽑아 황토와 장군봉에 올릴 제물을 진설하기 위해 소용되는 물과 땔감을 맡아 준비하는 사람을 선임한다. 선임자에게는 수고비로 5만원을 지급한다.ㄷ. 제관의 수와 명칭 및 역할 : 요사이는 제관을 선정하지 않는다.ㄹ. 제관의 금기 기간과 방법 : 옛날에는 마을회의에서 제관과 제물 운반자를 선정하였으나, 요사이는 ‘미래사’에 위탁하여 지내기 때문에 제물 운반자만 선정한다.ㅁ. 금줄과 금토를 치는 장소와 시기 : 제를 지내기 전날 아침 마을 주민들이 협력하여 마을에서 장군봉에 이르는 길은 물론 벅수-당산나무-마을 회관 앞 등 당제를 지낼 성역 주변을 청소한 후 제당 주위와 마을 곳곳에 황토를 뿌린다.ㅂ. 제사 비용 마련 방법 : 마을 공공기금을 제사 비용으로 쓴다.ㅅ. 제수 구입과 그에 따른 금기 : 옛날에는 12월 25일경 제관으로 선정되면, 매일 찬물에 목욕재계를 하고, 마을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며, 제물 구입 때는 삿갓을 쓰고 통영시장에 나가 제물을 사되 값을 상인이 부르는 대로 지불하고 사왔다.ㅇ. 제수 장만의 방법과 금기 : 제수의 장만은 일반 가정의 기제(忌祭)와 같으나, 제수를 장만할 때에는 입을 수건 같은 천으로 봉하고(요사이는 마스크를 함) 장만하며, 제수를 먹거나 맛을 일체 볼 수 없다.ㅈ. 제의와 관련된 금기 : ㈀ 장군당이 있는 장군봉에서는 절대 침을 뱉거나 소변을 보지 못한다. ㈁ 장군당제를 지낼 때는 정숙해야하므로 마을주민들의 출입을 삼가함은 물론, 개 짖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개를 창고에 가둔다. ㈂ 제를 지낼 동안에는 마을의 임산부들을 외지로 내보낸다.ㅊ. 밥상제(당산나무제와 용왕제)와 관련된 금기 : ㈀ 타인의 생일 음식을 먹지 않는다. ㈁ 제사 모시는데 가지 않는다. ㈂ 제사 음식을 먹지 않는다. ㈃ 초상-출산과 같은 궂은 일에 가지 않는다. ㈄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제사의 진행ㄱ. 전체 진행 순서 : 산신제-장군당제-밥상제(벅수제, 당산나무제, 용왕제)ㄴ. 시간 : 산신제와 장군당제는 섣달 그믐 밤 자정 경으로부터 새벽 4시까지이며, 밥상제는 정월 초하룻날 새벽 6시경부터 9시경까지이다.ㄷ. 방법 : 산신제와 장군당제는 유가식으로 행하며, 밥상제는 각 가정에서 제물을 차려와 비손 형식으로 제를 올리는데, 한 가정이 세 제사(벅수제, 당산나무제, 용왕제) 가운데 한 곳에만 가서 행한다.ㄹ. 제사 순서 : 진설-단작 헌작-재배(재배시 무언의 기원)-철상-소지-헌식ㅁ. 풍물 참여 여부와 참여시 역할 : 밥상제를 지냄을 알리는데, 징이 사용된다.제의 후 행사ㄱ. 음복 : 용왕제까지 마친 뒤 용왕제에 사용한 제물을 마을회관으로 가져와 주민들이 모여 음복한다.(산신제와 장군당제에 쓴 제물은 당 주변에 헌식으로 모두 쓴다.)ㄴ. 마을회의 : 음복을 하면서 한 해 마을의 공동 사업에 관한 회의를 한다.ㄷ. 놀이 : 마을 풍물패들이 당제를 지낸 당일에는 간략하게 마을회관 앞에서 지신밟기를 하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지신밟기를 청하는 가정을 돌며 지신밟기를 한다. 옛날에는 마을 의 남성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맥이 끊어진지 오래다. 근래에 행하는 매굿은 통영문화원 주최 문화강좌에서 풍물을 익힌 부녀회원(상쇠 : 김정연, 51세)을 중심으로 행해진다.신격산신 : 삼덕리 원항마을의 장군봉에 산신당에는 산신도가 모셔져있다. 산신은 원항, 당포, 관유 세 마을이 공동으로 모시나 제의 날짜는 다르다.- 장군 :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이순신 장군 또는 고려 최영장군으로 적고 있으나 현지 사람들은 최영장군이라고 한다. 장군도는 투구를 쓰고 장군복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망치를 들고 오른 손에는 칼을 아래로 해서 들고 있다. 원항, 당포, 관유 세 마을이 공동으로 모시나 제의 날짜는 다르다.- 목마 : 나무로 깎아 만들어진 목마가 두 개 있다. 한 마리는 크고 다른 한 리는 작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대목마이다.- 할배벅수 : 원항마을 입구에 오른 쪽에 위치해 있는데 건을 쓰고 있다.- 할매벅수 : 원항마을 입구 왼쪽에 위치해 있다. 할매벅수 코를 달려 먹으면 아들을 낳는 다고 해 코가 거의 없다. 처녀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커를 달려 먹으면 유산이 된다고도 한다.신화일제 때 일본사람이 장군봉에 있던 말(철마)을 밤에 도둑질해 배에 싣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포구에 안개가 자욱히 끼어 밤새 노를 저었는데도 멀리 가지 못하고 마을 앞 포구에서 맴돌다 결국 마을사람들에게 잡혔다고 한다.이웃 마을에 살던 어느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장군봉에 올라 장군당사 안에 있는 큰 목마에 손자를 태우고 놀리며 말하기를 “집으로 가져가서 손자 놀이감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말에 부정 타 목마를 타고 놀았던 그 손자는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즉사했다고 한다.장군당에 제를 지내기 위해 제물을 짊어지고 장군봉을 오를 때는 돌부리나 나무뿌리에 발이 채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돌부리나 나무뿌리 등에 발이 채이면 집으로 돌아와 목욕재계를 한 후 다시 산에 올라야 하는데, 옛날에 어느 제관이 제물을 지고 장군봉을 오르는데 돌뿌리에 발이 채였는데도 그대로 장군봉에 오르다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 뒤로 장군당에 오르는 길에 돌부리나 나무뿌리에 발이 채이면 반드시 집으로 내려와 목욕재계를 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장군봉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제당의 형태벅수(벅시,장승)위치 : 장군당 아래 관유마을에서 원항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에 벅시 2시가 서 있는데 벅시는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도로 오른쪽에는 할배벅시가, 왼쪽에는 할매벅시가 있다.형태와 재질 : 남녀 한 쌍의 벅시를 할배 벅시, 할매 벅시라 칭하며 할배 벅시는 전체높이 90cm, 앞면 20cm, 옆면 18cm 크기의 화강석으로 깎아 만든 할배벅시는 탕건 모양의 관을 쓴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 길이 90cm 중 50cm가 머리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가분수 형태로 전체적으로 볼 때 사각형의 각진 모습을 하고 있다. 몸통은 정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형으로 몸통 위쪽은 그 둘레가 좁은 반면 아래쪽으로 갈수록 넓으며, 턱 밑에 직접 몸통이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마모 정도가 매우 심하나 형체를 알아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코, 약간 벌린 듯한 입, 유난히 크게 조각한 귀 등은 얼굴모습을 시원시원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할매벅시는 높이 65cm, 앞면 23cm, 옆면 14cm 크기의 화강석으로 아기자기하게 깎아 만들었는데 얼굴의 형태가 정방형(正方形)으로, 민둥머리를 하고 있다. 전체 크기에 비해 얼굴 부분이 크게 묘사되었지만 몸통 둘레를 크게 해줌으로써 할배벅시보다 비교적 안정감을 준다. 몸통은 둥근 사각기둥 형태로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으며 전체 크기에 있어서도 할배벅시에 비해 아주 작다. 또한 그 마모 정도가 매우 심하여 이목구비가 있으나 선명치 않다. 특히 왼쪽 눈과 입이 마모가 심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은 약간 튀어나온 듯 하며 코는 삼각형으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귀는 길고 커서 흡사 부처님 귀와 같고, 이마는 넓어서 기형적으로 보인다.기능 : 원항마을의 석장승은 주 신앙 대상물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정성을 들이는사람이 많고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해 부녀자들이 벅수의 코를 많이 갉아 먹었다고 한다. 반대로 유산을 원하는 여자들은 벅수의 눈을 가루 내어 먹었다. 이러한 일은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외지인들에 의해서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할매벅시의 왼쪽 눈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또한 재혼을 하는 여인네는 마을을 떠날 때 신발을 벅수 앞에 놓고 가는데, 이 때 신발의 방향은 마을을 향하도록 놓는다. 이처럼 신을 놓는 이유는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죽은 신랑의 혼이 따라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처럼 ‘신 들러간다’고 하면 제가를 갔다는 의미를 지닌다.특징 : 원항마을 벅시 역시 당포마을처럼 예전에는 돌로 된 것이나 마을 사람들에 따르며 본래는 나무였으나 사람들이 벅수의 눈을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벅시가 성할 날이 없어 약70년 전에 돌로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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